ㅡ 가나의 포도주에서 십자가의 신 포도주와 어린양의 혼인잔치까지
「말씀의 섭취」 3부작 후속편 — 언약의 잔, 생수, 식탁, 십자가를 따라 읽는 개혁주의적 성경신학
1부. 물이 하나님을 보고 붉어졌다
— 가나에서 언약의 잔까지
서곡: 수줍은 물
갈릴리 가나의 어느 혼인잔치,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이 아귀까지 차 있다. 하인들이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가는 짧은 사이, 무엇인가가 일어난다. 복음서는 그 순간을 묘사하지 않는다. 요한은 물이 언제,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지 말하지 않고, 다만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요2:9)고 적을 뿐이다. 기적의 순간 자체는 침묵 속에 있다. 그 침묵 속으로 한 시인이 라틴어 한 줄을 들여보냈다.
Nympha pudica Deum vidit, et erubuit.
수줍은 물이 하나님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조금 더 문학적으로 옮기면 이렇게도 읽힌다. "물은 자기 하나님을 보고, 부끄러워 붉어졌다." 이 문장은 오랫동안 학창 시절 일화와 함께 떠돌았다. 이튼이나 웨스트민스터의 어느 소년이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이라는 라틴어 작시 과제를 받고 긴 시 대신 이 한 줄만 써 내어 선생을 감탄시켰다는 이야기이고, 그 소년의 이름은 전하는 사람에 따라 젊은 바이런이 되기도 하고 드라이든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의 실제 출처는 그보다 앞선다. 17세기 영국 시인 리처드 크래쇼(Richard Crashaw, c.1613–1649)가 1634년 케임브리지에서 펴낸 라틴어 성시집 『거룩한 경구집』(Epigrammatum Sacrorum Liber)에 「요한복음 2장: 포도주로 변한 물」(Joann. 2. Aquae in vinum versae)이라는 네 줄짜리 경구가 있고, 그 마지막 행이 바로 이 문장이다. 전문은 이렇다.[^1]
Unde rubor vestris et non sua purpura lymphis?
Quae rosa mirantes tam nova mutat aquas?
Numen, convivae, praesens agnoscite Numen:
Nympha pudica Deum vidit, et erubuit.어디서 왔는가, 너희 물에 이는 붉음, 제 것 아닌 이 자줏빛은?
어떤 장미가 놀라는 물을 이토록 새롭게 물들이는가?
손님들이여, 여기 계신 신성을, 여기 계신 신성을 알아보라.
수줍은 물이 하나님을 보고, 붉어졌도다.
학창 시절의 일화는 이 마지막 행의 어순을 조금 바꾸어 전해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줄을 어느 영리한 소년의 재치가 아니라, 복음서 본문을 붙들고 앉아 기적을 한 편의 경구로 빚어낸 성시(聖詩) 전통의 열매로 받아도 좋다. 청교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훗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시인의 한 줄로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글을 여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구절이 붙잡은 것은 특정 교파의 교리가 아니라 요한복음 2장 그 자체이고, 교회가 공유하는 성경의 기쁨이다.
이 짧은 시적 상상은 가나의 기적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다. 복음서가 침묵하는 그 순간을 시인은 물의 편에서 바라본다. 기적을 행하는 쪽이 아니라 기적을 당하는 쪽에서, 곧 피조물의 편에서. 물은 자기를 만드신 분이 곁에 계신 것을 알아보았고, 그 앞에서 제 빛깔을 지키지 못했다.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의 수줍음이 포도주의 붉은 빛이 되었다.
이것은 크래쇼만의 발명은 아니다. 성경에도 물이 하나님을 "본다"는 대담한 시어가 있다. 아삽의 시는 출애굽의 밤을 이렇게 노래한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시77:16)
그리고 유월절마다 불리던 할렐 시편은 바다와 요단과 산들이 주의 임재 앞에서 몸을 뒤틀었다고 노래한 뒤 이렇게 끝맺는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114:7–8)
크래쇼가 이 시편들을 의식하고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경구는 성경의 시가 이미 알고 있던 감각, 곧 피조세계가 창조주를 알아본다는 감각과 한 핏줄이다. 그리고 시편 114편의 마지막 두 행, 반석을 쳐서 물이 되게 하셨다는 그 노래는 이 글의 뒤편에서 다시 우리를 부를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이 아름다운 붉은 포도주는 뜻밖의 질문을 불러온다. 가나에서 물을 좋은 포도주로 바꾸신 분, 초막절 명절 끝날에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고 외치신 분, 다락방에서 "나는 참포도나무요"(요15:1)라고 말씀하신 분이, 요한복음의 끝에서는 십자가에 달려 "내가 목마르다"(요19:28)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이 우슬초에 매어 올린 신 포도주를 받으신다. 더 이상한 것이 있다. 그분은 불과 몇 시간 전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잔을 제자들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26:29)
개역개정은 이 문장을 우리말 어순에 맞게 매끄럽게 풀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한 단어가 더 또렷하게 서 있다. "그 날까지"(ἕως τῆ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 헤오스 테스 헤메라스 에케이네스). 예수께서는 막연히 "마시는 때까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 날까지"라고 하셨다. 이 글의 제목은 그 두 단어에서 왔다.
*새한글성경(KNT);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지금부터 나는 포도나무에서 난 이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겁니다. 바로 그날이 되어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대들과 함께 그것을 새로 마실 때까지는요.”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그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분이, 왜 십자가에서는 다시 신 포도주를 받으셨는가? 이것은 사소한 본문 간 긴장처럼 보인다. 어떤 이는 이것을 복음서의 모순이라며 흥미로워할 것이고, 어떤 이는 "신 포도주는 포도주가 아니다"라는 식의 재빠른 해결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질문을 서둘러 치우지 않고 붙들고 따라가 보면, 그 끝에서 우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식탁과 하나의 잔, 그리고 하나의 목마름을 만나게 된다.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먹음 다음에 놓인 잔
앞선 세 편의 글, 곧 「말씀의 섭취」 3부작은 모두 명령형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 말씀을 먹으라!」,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 「먹지 말라, 먹으라」. 세 편은 각기 다른 길로 한 가지 성경의 언어를 따라갔다. "먹으라."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내미신 두루마리를 받았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3:3). 선지자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먹어야 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그 두루마리의 자리에 한 인격이 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두 번째 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짧은 한 문장,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Crede, et manducasti)를 따라,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살폈다.[^2] 세 번째 글은 에덴의 금지된 열매에서 베드로의 환상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먹음이 "취함"과 "받음"이라는 두 길 사이에서 갈라진다는 것을 보았다. 자기 손으로 움켜쥐는 먹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먹음이 있다.
그 세 편이 이르렀던 자리는 개혁주의 성찬론이 오랫동안 지켜 온 경계선 안이었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조잡한 육체적 섭취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지 마음속 회상이나 주관적 기억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성령과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실제로 연합하고 그의 생명과 유익에 참되게 참여하는 것이다. 말씀과 성례는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둘은 동일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하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웨스트민스터 전통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자는 "육적으로나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그러나 참되고 실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그 죽음의 모든 유익을 받는다.[^3] 그리고 그 모든 논의는 한 문장으로 모였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먹음의 질문은 그 자체로 한 번 닫혔다. 그 연작은 미완성이 아니었다. 그런데 성경의 식탁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떡 옆에 놓인 것이 하나 더 보였다.
잔이다. 성경은 "먹으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마시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그 명령은 성경의 가장 결정적인 자리들마다 놓여 있다. 이사야의 초청은 이렇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은 잔을 들어 이르신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26:27)
초막절의 가장 큰 날, 그분은 서서 외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7:37)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묻는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전10:16)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초청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22:17)
앞선 연작의 명령이 "먹으라"였다면, 이제 들려오는 명령은 "마시라"다. 이 글은 「말씀의 섭취」가 열어 놓은 문을 지나, 성경의 식탁에서 떡 옆에 놓여 있던 잔과, 그 잔 너머로 흐르는 생수를 따라가 보려는 후속편이다. 사실 먹음과 마심은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앞선 연작의 중심 본문이었던 요한복음 6장, 곧 "생명의 떡"의 장 한가운데에서도 목마름은 이미 말해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떡을 말씀하시는 자리에서 주님은 목마름도 함께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장은 더 강렬한 언어로 나아간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6:53–56)
앞선 연작은 이 본문을 두고 개혁주의가 걸어온 좁은 길을 따랐다. 이 말씀을 화체설적으로, 곧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실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방향으로 읽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을 단순한 비유적 수사로 증발시키지도 않는다. 주님 자신이 같은 장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셨다. 먹고 마심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고, 성령으로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과 생명의 유익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경계선은 이 글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렇다면 "마심"은 "먹음"에 무엇을 더하는가? 같은 말을 다른 동사로 반복하는 것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떡을 얼마간 쌓아둘 수 있다. 곡식은 창고에 들이고, 만나조차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치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목마름은 사람이 가장 빨리, 가장 자주 자기의 한계를 깨닫는 자리다. 물은 마셔도 곧 다시 목마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하신 첫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요4:13). 마신다는 것은 매 순간 자기 바깥의 근원에 기대어 사는 존재라는 고백이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이렇게도 정의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2:13)
예레미야가 말하는 죄의 본질은 목마름 그 자체가 아니라, 근원을 떠나 스스로 물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흐르는 샘 곁을 떠나 제 손으로 판 웅덩이에 물을 가두려는 것, 생명을 받는 대신 생명을 저장하고 소유하려는 것. 그 웅덩이는 터져 있다. 앞선 연작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신다"는 데 이르렀다면, 이번 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려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마심으로써 생명을 스스로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 의존한다.
그런데 이 글이 붙들려는 것은 그보다 한 겹 더 깊은 역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마실 수 있는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가 마셔야 할 잔을 마시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피를 마시는 자로 불리는데, 그는 십자가에서 목마른 자가 되신다. 우리는 생수를 받는데, 생수의 근원이 목마르시다. 우리는 축복의 잔을 받는데, 그는 저주의 잔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이 후속편 전체의 숨은 질문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앞선 질문 다음에 오는 질문. 그렇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마신다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마실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마셔야 하셨는가?
이 질문을 따라 우리는 세 개의 장소를 지나게 될 것이다. 먼저 가나의 혼인잔치와 다락방의 식탁, 곧 좋은 포도주가 주어지고 언약의 잔이 건네지는 자리. 다음으로 겟세마네와 골고다, 곧 그 잔이 저주의 잔으로 뒤집히고 생수의 근원이 목마르며 "다 이루었다"가 선언되는 자리. 마지막으로 교회와 새 예루살렘, 곧 축복의 잔과 제자의 잔이 함께 마셔지다가 마침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잔치가 시작되는 자리. 이 글은 앞의 두 장소를 거쳐 마지막 장소까지 따라간다.
1. 가나: 좋은 포도주를 주시는 분
요한은 공생애의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의 혼례에서 시작한다. 이야기의 줄기는 이렇다. 예수와 그 어머니와 제자들이 혼례에 청함을 받았는데, 잔치 도중 포도주가 떨어진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알린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요2:3)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2:4)
그곳에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한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고, 하인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그 항아리들에 물을 아귀까지 채워 연회장에게 떠다 준다.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은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한 채 신랑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요2:10)
요한은 이것이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며, 이로써 그의 영광이 나타나고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적는다(요2:11). 이 장면 전체는 요한복음 2:1–11을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여기서는 논증에 필요한 표현들을 차례로 붙들며 따라가 보자. 이야기의 세부 하나하나가 뒤에서 다시 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잔치
이야기의 발단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포도주가 떨어졌다. 며칠씩 이어지던 고대 근동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잔치를 연 집안의 체면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기쁨의 자리에서 기쁨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무엇보다 먼저 기쁨의 선물이다. 창조의 선하심을 노래하는 시편 104편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나게 하신 것들을 열거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시104:15)
요담의 우화에서 포도나무는 왕이 되라는 청을 거절하며, 자기 포도주를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삿9:13) 것이라고 부른다. 포도주는 창조세계가 인간에게 건네는 즐거움의 언어다. 이 사실은 이 글의 뒤편에서, 모든 포도주를 곧장 상징으로 끌어올리려는 유혹을 경계할 때 다시 중요해질 것이다. 가나의 포도주는 무엇보다 먼저 진짜 포도주이고, 진짜 혼인잔치의 진짜 기쁨이다. 그러면서도 선지서를 읽어 온 독자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또 다른 울림을 갖는다. 이사야는 땅에 임하는 심판을 이렇게 묘사했다.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사24:11)
반대로 선지자들이 그린 회복의 날, 메시아적 구원의 날에는 포도주가 넘친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욜3:18)
아모스도 같은 날을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암9:13)고 노래한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 날의 잔치를 이렇게 그렸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사25:6)
요한은 가나 이야기에서 이 선지서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가나의 기적을 이 본문들의 "성취"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지서의 언어를 품고 살던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정경 전체를 손에 든 우리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에 한 사람이 들어와 넘치도록 좋은 포도주를 주는 장면은 그 배경 위에서 읽힐 수밖에 없다. 요엘 3:18이 포도주와 함께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라고 말하는 것도 기억해 두자. 포도주의 풍성함과 성전에서 흐르는 물은 선지자의 환상 속에서 이미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 두 이미지가 요한복음 안에서 어떻게 다시 만나는지는 뒤에서 보게 될 것이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사정을 알린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그리고 아들의 대답은 뜻밖에 거리를 둔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자여"(γύναι, 귀나이)는 무례한 호칭이 아니다. 그러나 아들이 어머니를 부르는 다정한 말도 아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τί ἐμοὶ καὶ σοί, 티 에모이 카이 소이)라는 셈어적 관용구도 한 걸음 물러서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일하시는 시간표가 혈육의 요청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밝히신다. 그리고 그 시간표를 가리키는 말이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내 때"(ἡ ὥρα μου, 헤 호라 무).
요한복음을 따라 읽는 독자는 이 "때"가 한 번 나오고 사라지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것은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는 시계추다. 초막절에 사람들이 그를 잡으려 했을 때에도 손을 대는 자가 없었는데, 요한은 그 까닭을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요7:30)라고 적는다. 성전 헌금함 앞에서 가르치실 때도 같은 말이 반복된다(요8:20). "아직"이 계속 쌓여 간다. 그러다가 헬라인들이 예수를 뵙고자 찾아온 날, 마침내 시계가 바뀐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2:23)
그리고 곧바로 그 영광의 때가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12:27)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12:32–33)
요한복음에서 "때"는 영광의 때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때다. 들림은 십자가에 달리심이면서 동시에 높아지심이다. 공관복음이 고난과 영광을 시간 순서로 나란히 놓는다면, 요한은 그 둘을 하나의 "때" 안에 겹쳐 놓는다. 그리고 수난 기사의 문턱에서 요한은 이렇게 쓴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13:1)
"끝까지"(εἰς τέλος, 에이스 텔로스). 이 단어를 기억해 두자. 이 "끝"(τέλος, 텔로스)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19장에서 십자가 위의 마지막 외침,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로 다시 돌아온다. 같은 어근이다. 다락방에서 "끝까지" 사랑하기 시작하신 분이, 십자가에서 그 사랑이 "끝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신다. 대제사장적 기도의 첫 문장도 이 흐름 위에 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그렇다면 가나의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는 요한복음 전체 앞에 걸린 예고문이다. 가나에서 예수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셨지만(요 2:11), 그것은 아직 그 "때"의 영광이 아니었다. 가나의 포도주는 앞당겨 맛본 영광, 아직 오지 않은 때를 가리키는 표적(σημεῖον, 세메이온)이다. 요한이 이 기적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표적"이라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표적은 제 자신 너머를 가리킨다. 여기에 요한복음이 숨겨 둔 또 하나의 괄호가 있다. 예수의 어머니는 요한복음에 단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또 한 번은 십자가 곁에서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19:26)
(십자가 곁의 장면 전체: 요19:25–27)
두 장면 모두에서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신다. 가나에서는 "내 때가 아직"이었고, 십자가에서는 그 때가 와 있다. 그리고 십자가 곁의 이 장면 바로 다음 절이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요19:28)이다. 어머니가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던 이야기의 괄호가, 아들이 "내가 목마르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닫힌다. 요한이 이 대칭을 의도적으로 설계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라면 이 수미(首尾)의 울림을 지나치기 어렵다.
정결 예식의 돌항아리
요한은 이상하리만치 구체적으로 항아리를 묘사한다.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 "통"으로 번역된 메트레테스(μετρητής)는 대략 40리터 가까운 액량이니, 항아리 하나에 80리터에서 120리터, 여섯 항아리를 합하면 수백 리터에 이른다. 혼인잔치 하나를 위해 필요한 양을 훨씬 넘어서는 풍성함이다. 그리고 하인들은 그 항아리를 "아귀까지" 채웠다. 그 항아리의 원래 용도는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손과 그릇을 씻는 정결 예식을 위한 물이었다. 씻기 위한 물이 잔치의 포도주가 된 것이다. 여기서 해석자는 조심해야 한다. 이 장면을 유대교의 정결법에 대한 경멸로 읽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것은 폐기가 아니라 성취다. 요한은 서문에서 이미 이렇게 말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17)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선물이었다. 정결 예식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깨끗해져야 한다는 진리를 매일 가르쳤다. 그러나 돌항아리의 물은 사람의 손을 씻을 수는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씻을 수는 없었다. 요한복음은 참된 정결이 어디서 오는지를 차근차근 보여 준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 불렀다. 다락방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요15:3)
앞선 연작의 독자라면 이 구절에서 걸음을 멈출 것이다. 제자들을 깨끗하게 한 것은 "말씀"이다. 그리고 요한은 그의 첫 서신에서 그 정결의 가장 깊은 근거를 이렇게 밝힌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7)
정결을 위한 물이 포도주가 되고, 그 포도주는 훗날 다락방에서 "언약의 피"를 가리키는 잔이 되며, 그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 이 연결은 요한이 가나 본문 안에서 직접 전개한 논증은 아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그리고 공관복음의 성찬 제정을 정경 안에서 함께 읽을 때 드러나는 성경신학적 선이다. 그러나 그 선은 억지로 그은 것이 아니라 본문들이 스스로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다.
하인들은 알았다
크래쇼의 경구로 잠시 돌아가 보자. 시인은 물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잔치에서 누가 그것을 보았는가? 요한은 흥미로운 대조를 남긴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잔치의 책임자, 포도주의 품질을 판정하는 전문가는 맛은 보았으나 근원은 알지 못했다. 알았던 사람은 하인들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했던가? 예수의 어머니가 그들에게 한 말은 이것이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들었다.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물을 채우라니. 정결 예식용 항아리의 물을 잔치의 책임자에게 떠다 주라니.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대로 했고, 그 순종의 자리에서 기적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앞선 연작에서 우리는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나의 하인들은 그 붙들림의 작은 초상이다. 그들은 기적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 말씀에 붙들려 움직였고, 그래서 알았다. 맛보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포도주의 좋음은 연회장도 알았지만, 그 포도주가 누구에게서 왔는지는 말씀대로 물을 길은 사람들만 알았다.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연회장의 말은 이 이야기의 절정이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연회장은 신랑을 칭찬하려 했지만, 요한복음의 독자는 그 칭찬이 엉뚱한 사람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안다. 좋은 포도주를 둔 것은 신랑이 아니라 그 잔치에 손님으로 오신 분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이 뒤에서 밝히듯이, 그분이야말로 참 신랑이시다(요3:29). 이 주제는 뒤에서 혼인잔치를 다룰 때 본격적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좋은 것을 나중까지 두었다"는 이 한 문장은 구속사의 문법 자체를 요약한다. 사람의 잔치는 좋은 것에서 낮은 것으로 흘러간다. 처음의 흥분이 가라앉으면 질이 떨어지는 것을 내놓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잔치는 반대로 흐른다. 히브리서는 그 흐름을 이렇게 말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1:1–2)
게할더스 보스는 『성경신학』에서 계시의 역사를 유기적 진전으로 설명했다(요지).[^4] 그의 유기적 계시 이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씨앗이 나무가 될 때 씨앗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 안에서 자기의 목적에 이른다. 옛 계시는 불완전했으나 거짓이 아니었고, 새 계시는 옛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있던 것을 꽃피운다. 가나의 돌항아리와 좋은 포도주의 관계도 그렇게 읽을 수 있다. 물은 버려지지 않았다. 물은 포도주가 되었다.
작은 관찰 하나를 덧붙이자면, 연회장의 "지금까지"는 헬라어로 헤오스 아르티(ἕως ἄρτι)이고, 마태복음 26:29에서 주님이 "이제부터"(ἀπ᾽ ἄρτι, 아프 아르티) 마시지 않겠다고 하실 때도 같은 "지금"(ἄρτι, 아프티)이 쓰였다. 가나에서는 좋은 포도주가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었고, 다락방에서는 "지금부터" 그 잔이 멈춘다. 물론 이것은 서로 다른 복음서 기자의 서로 다른 문장이므로, 요한과 마태가 서로를 의식하고 썼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정경을 한 권으로 읽는 독자에게 허락된 작은 울림이다. 좋은 포도주가 "지금까지" 보관되었다가 드디어 나오는 가나와, 포도나무의 열매가 "지금부터" 멈추고 "그 날"을 기다리는 다락방 사이에, 복음 이야기의 시간이 흐른다.
요한이 이 이야기를 "사흘째 되던 날"로 시작한다는 것도 많은 해석자들의 눈길을 끌어 왔다. 문맥상 이것은 1장의 날짜 흐름을 잇는 표현이지만, 부활의 "사흘"을 아는 독자에게 이 날짜는 은은한 울림을 갖는다. 이 울림을 과장해서는 안 되지만, 영광이 처음 나타난 날이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는 것은 기억해 둘 만하다.
가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러므로 가나의 이야기를 단순히 "예수께서 잔치의 필요를 채워 주신 풍요의 기적"으로만 읽는 것은 요한이 쓴 것의 절반만 읽는 셈이다. 요한은 이 표적을 네 개의 주제로 짜 놓았다. 혼인, 포도주, 영광,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때. 혼인잔치가 무대이고, 포도주가 표적의 내용이며, 영광이 표적의 목적이고, "아직 오지 않은 때"가 표적의 방향이다. 그리고 이 네 주제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함께 읽을 때, 정경의 끝에서 다시 모인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계시록 19장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향해 열려 있고, 가나의 "아직"은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를 거쳐 새 예루살렘의 "이루었도다"(계21:6)로 이어진다. 이 글은 그 흐름을 따라 하나의 삼중 구조를 제안한다.
가나의 좋은 포도주 → 십자가의 신 포도주 → 어린양의 혼인잔치
여기서 정직하게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삼중 구조는 칼빈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정식화한 교리 공식이 아니다. 고전 개혁파 신학자들이 이 세 장면을 이런 도식으로 묶어 가르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그리고 공관복음의 성찬 본문을 정경적으로 함께 읽을 때 드러나는 성경신학적 종합이다. 그러나 그 종합이 서 있는 토대, 곧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의 중심이시고, 구약의 약속이 그 안에서 성취되며, 현재의 교회가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산다는 확신은 개혁주의 전통이 한결같이 붙들어 온 것이다. 이 글에서 "개혁파가 말한 것"과 "개혁파의 토대 위에서 이 글이 종합하는 것"은 필요한 자리마다 구별될 것이다.
가나에서 그분은 좋은 포도주를 주셨다. 잔치는 구원되었고, 신랑의 체면은 지켜졌으며, 제자들은 믿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한 문장이 그림자처럼 서 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좋은 포도주는 그 때가 오기 전에 주어졌다. 그렇다면 그 때가 오면, 그분의 손에는 어떤 잔이 들려 있을 것인가?
2.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 금주 선언이 아니라 종말론적 약속
이제 장면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으로 옮겨 간다. 유월절 밤이다. 누가는 그 밤 예수의 첫 마디를 이렇게 전한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눅22:15)
주님은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뒤(눅22:16), 잔을 받아 감사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게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눅22:18)
(전체 문맥: 눅 22:14–20)
"원하고 원하였노라"(ἐπιθυμίᾳ ἐπεθύμησα, 에피튀미아 에페튀메사). 히브리어적 강조 어법으로, 간절히, 사무치게 원했다는 뜻이다. 주님은 이 식탁을 기다리셨다. 그리고 그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멈출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는 같은 밤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26:26–29)
마가의 기록은 가장 간결하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막14:25)
문장의 무게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장을 처음 읽는 사람의 귀에는 부정문이 먼저 들린다. "마시지 아니하리라." 헬라어도 강한 부정이다. 우 메 피오(οὐ μὴ πίω)는 이중 부정으로, "결코 마시지 않으리라"는 단호한 어조를 갖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말씀을 일종의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처럼 포도나무의 소산을 입에 대지 않겠다는 금주의 맹세로 읽기도 한다. 그렇게 읽으면 앞의 질문은 정말로 난처해진다. 금주를 서원하신 분이 몇 시간 뒤에 신 포도주를 받으셨으니, 서원을 깨신 것인가?
그러나 문장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 이 문장의 무게중심은 "마시지 않는다"에 있지 않다. 문장은 부정으로 시작하지만 두 개의 표현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그 날까지", 그리고 "너희와 함께."
먼저 "포도나무에서 난 것"(τοῦ γενήματος τῆς ἀμπέλου, 투 게네마토스 테스 암펠루)이라는 표현을 보자. 이 표현은 후대 미쉬나(베라코트 6:1)에 정리된 유대의 식사 축복문, 곧 포도주를 들 때 "포도나무의 열매를 창조하신 분"(보레 페리 하가펜, בּוֹרֵא פְּרִי הַגָּפֶן)을 찬송하는 문구와 상응한다. 미쉬나는 2세기 말에 정리된 문헌이므로 1세기 식탁의 정확한 전례 형식을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고, 예수의 말씀이 그 축복문에서 직접 왔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상응은 적어도 이 표현이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며 함께 나누는 식탁 교제의 언어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주님이 멈추시는 것은 어떤 성분의 섭취가 아니라 바로 그 식탁이다. 제자들과 함께 축복하고, 감사하고, 나누던 그 식탁.[^5]
다음으로 "그 날까지"(ἕως τῆ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 헤오스 테스 헤메라스 에케이네스). 구약 선지서를 읽은 사람에게 "그 날"(바욤 하후, בַּיּוֹם הַהוּא)은 평범한 날짜가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날이다.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 25장의 잔치,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베푸시는 그 연회가 바로 그 날의 잔치다. 이사야는 그 연회를 묘사한 뒤 이렇게 잇는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사25:8–9)
포도주의 잔치, 사망의 멸망, 눈물의 씻김, 그리고 "그 날에."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이사야 25장을 직접 인용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 날까지" 기다린다는 말씀이 선지서의 종말론적 잔치의 지평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 약속은 계시록 21장에서 이사야의 그 문장이 다시 들려올 때 가장 분명해진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계21:4). 그리고 "너희와 함께"(μεθ᾽ ὑμῶν, 메트 휘몬). 이 두 단어는 마가에도 누가에도 없고 마태에게만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 전체의 틀에서 보면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마태는 복음서의 첫 장에서 예수의 이름을 이렇게 풀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
그리고 복음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20)
"우리와 함께"로 시작해서 "너희와 함께"로 끝나는 복음서. 그 한가운데, 떠나시기 전날 밤의 식탁에서 주님은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을 약속하신다. 마태에게 마지막 만찬의 약속은 금주의 선언이 아니라 임마누엘의 약속이다. 지금 이 식탁의 교제는 끝나지만, "함께"는 끝나지 않는다. 그 "함께"가 다시 식탁으로 모이는 날이 온다.
마지막으로 "새것으로"(καινόν, 카이논). 헬라어에서 "새롭다"는 뜻의 단어로는 흔히 네오스(νέος)와 카이노스(καινός)가 함께 거론된다.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최근의 것을,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향성의 차이일 뿐 절대적인 구분은 아니며, 두 단어의 의미 영역은 상당히 겹친다. 예컨대 히브리서 12:24는 "새 언약"을 말하면서 카이노스가 아니라 네오스(διαθήκης νέας)를 쓴다. 그러므로 이 단어 하나만으로 마태복음 26:29의 의미를 결정할 수는 없다. 이 "새것"이 새 창조에 속한 새로움이라는 것은 단어 자체보다 문맥, 곧 "그 날"과 "내 아버지의 나라"라는 말이 둘러싼 자리에서 드러난다. 신약이 "새 언약"(ἡ καινὴ διαθήκη, 눅22:20)과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를 말할 때 같은 카이노스 계열의 말을 쓴다는 것은 그 문맥적 의미와 잘 어울리는 울림이다. 주님이 "그 날에"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실 포도주는 지금의 포도주를 조금 더 좋게 만든 것이 아니라, 새 창조에 속한 새로움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6:29의 신학적 중심은 "다시 마시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 날까지"와 "너희와 함께"다. 이 말씀은 포도 성분이 들어간 액체를 다시는 입에 대지 않겠다는 물질적 금주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식탁 교제가 이제 끝나고, 하나님 나라의 새 식탁이 올 것이라는 언약적이고 종말론적인 선언이다. 작별의 말이면서 동시에 재회의 약속이다. 나는 이 식탁을 떠나지만, 이 식탁은 끝나지 않는다. 다음 잔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마실 것이다.
크리소스톰과 칼빈의 읽기
교회의 해석자들도 이 말씀을 물질적 금주의 선언으로 읽지 않았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마태복음 강해 제82강에서 이 구절을 다루며, "새것으로"를 새로운 방식, 곧 고난받을 수 있는 몸이 아니라 이제는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몸으로 마시는 것이라고 풀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 후에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은 몸이 그것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부활을 온전히 확증시켜 주기 위해서였다고 보았다(요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한 증언이 그 읽기의 근거가 된다.[^6]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행10:41)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이라고 옮겼지만, 헬라어 원문은 "함께 먹고 함께 마신"(συνεφάγομεν καὶ συνεπίομεν, 쉬네파고멘 카이 쉬네피오멘)이다. 크리소스톰이 이 구절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먹고 마심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은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는다. 주님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고 하신 것은, 성찬에서 포도주 대신 물만 쓰던 어떤 이들의 관행을 반박하는 근거도 된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물이 아니라 포도주를 낸다(요지). 이 지적은 흥미롭다.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을 영적으로만 증발시키지 않았다. 식탁의 포도주는 진짜 포도주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말씀의 중심을 금주가 아니라 부활 이후의 새로운 교제에 두었다. 누가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잡수시고(눅24:42–43), 요한복음에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21:12)고 부르신 장면들이 그 새 교제의 첫 빛이다.
칼빈은 『공관복음 주석』에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 말씀을 읽는다. 그는 이 말씀이 제자들이 곧 주님의 육체적 임재를 빼앗기게 될 것, 그리고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늘의 생명을 누리게 될 때까지 다시 그들과 함께 먹지 않으실 것을 뜻한다고 보았다. 먹고 마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그 생명은 음식과 음료의 도움이 필요 없는 생명이기에 주님이 그때에는 "새로운 종류의 마심"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며, 이 표현은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나눌 영광을 약속하신다는 것이다(요지). 칼빈은 같은 자리에서, 주님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고 하신 것은 그가 제자들에게 건넨 것이 여전히 포도주였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고 지적하며,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변한다는 화체설을 반박하는 근거로도 이 구절을 사용했다.[^7]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다. 크리소스톰은 "그 날"의 시작을 부활 이후의 식탁에서 보았고, 칼빈은 "그 날"을 하늘나라의 복된 생명에서 보았다. 그러나 개혁주의 종말론의 "이미"와 "아직"은 이 둘을 경쟁시킬 필요가 없게 해 준다. 부활은 "그 날"을 개시했고, 재림은 "그 날"을 완성한다. 부활하신 주님의 조반 식탁은 그 날의 새벽빛이고,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그 날의 한낮이다. 그리고 두 해석자는 중요한 한 점에서 일치한다. 이 말씀은 포도주 금지령이 아니다. 이것은 식탁 교제의 중단과 재개에 관한, 곧 언약적 교제의 종말론적 전망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면 질문은 해소되었는가
이렇게 읽으면 서곡의 질문은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태복음 26:29가 물질적 금주의 서원이 아니라면, 십자가에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것은 서원을 깨뜨린 것이 아니다. 주님은 "너희와 함께",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식탁을 멈추신 것이지, 포도나무에서 난 모든 액체를 거부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어진다. 이제 두 장면을 나란히 놓아 보자.
다락방에서 약속된 잔은 "너희와 함께" 마시는 잔이다. 골고다에서 받으신 신 포도주는 홀로 마시신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그 곁에는 로마 병사들이 있다.
다락방에서 약속된 잔은 "새것"이다. 골고다의 잔은 시어진 것, 곧 로마 병사들이 마시던 값싼 신 포도주(ὄξος, 옥소스)다.
다락방에서 약속된 잔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신다. 골고다의 잔은 저주의 나무 위에서 마신다.
다락방에서 약속된 잔은 "그 날"의 기쁨의 잔이다. 골고다의 잔은 "내가 목마르다"는 외침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니 이제 질문은 "왜 주님은 서원을 깨셨는가?"가 아니다.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와 함께 새 것으로 마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왜 우리 없이 홀로, 신 것을, 저주의 나무 위에서 마셔야 하셨는가? 한 가지 세부를 더 기억해 두자. 마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의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마27:34)
주님은 처음에 건네진 포도주를 거절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건네진 신 포도주는 받으셨다. 이 거절과 받으심의 차이, 그리고 요한이 그 받으심을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라는 말로 감싸는 이유는 뒤에서 자세히 살필 것이다. 지금은 이 한 가지만 붙들어 두자. 신 포도주의 장면은 마태복음 26:29의 약속을 깨뜨리는 장면이 아니라,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했던 장면이다. "그 날"에 이르는 길은 이 날을 지나간다.
3. 새 언약의 잔 —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다시 다락방으로 돌아가, 그 약속의 말씀 바로 앞에 놓인 잔을 보자. 주님은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26:27)고 하셨다.
감사의 잔, 축복의 잔
"감사 기도 하시고"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사스(εὐχαριστήσας)이다. 교회가 훗날 이 식사를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르게 된 말이 여기서 나왔다. 성찬은 무엇보다 먼저 감사의 식사다.
유월절 식사에서 여러 잔이 차례로 돌려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후대의 랍비 문헌은 유월절 식사에 네 개의 잔이 있었다고 전하고, 그중 식사를 마친 뒤에 드는 잔을 "축복의 잔"(코스 쉘 브라카, כּוֹס שֶׁל בְּרָכָה)이라 불렀다. 누가가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눅22:20)라고 쓰고, 바울이 "축복의 잔"(τὸ ποτήριον τῆς εὐλογίας,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 고전10:16)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유월절 식사의 잔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은 크다. 다만 그 랍비 문헌은 예수 시대보다 한두 세기 뒤에 정리된 것이므로, 마지막 만찬의 잔이 정확히 몇 번째 잔이었는지를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구원을 감사하며 들던 그 잔을 손에 드시고, 그 잔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셨다는 것이다.
"너희가 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πίετε ἐξ αὐτοῦ πάντες, 피에테 엑스 아우투 판테스). 떡에 대해서는 "받아서 먹으라"고 하신 주님이 잔에 대해서는 굳이 "다"(πάντες)라는 말을 덧붙이신다.
새한글성경(KNT); 또 잔을 들어 감사드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들 이 잔을 받아 마시세요.
교회사를 아는 독자에게 이 한 단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점차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고 떡만 주는 관행이 굳어졌고, 1415년 6월 15일 콘스탄츠 공의회 제13회기는 이 관행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보헤미아의 개혁 운동과, 그 뒤를 이은 우트라퀴스트(양종 성찬파)들이 평신도에게도 잔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저항한 것은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한 세기 뒤, 루터는 1520년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교회가 사로잡힌 첫 번째 포로 상태로 바로 이 잔의 박탈을 꼽았다. 칼빈 역시 『기독교강요』 제4권 성찬론의 말미에서, 주님께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명하셨는데 교회가 잔을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것은 그리스도의 제정을 사람이 임의로 고친 것이라고 비판했다(요지).[^8]
그러니 종교개혁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수백 년 동안 먹기만 하고 마시지 못했던 교회에 다시 잔을 돌려준 운동이기도 했다. 이 글이 "마심의 신학"을 말하려 할 때, 그것은 새로운 신학적 유행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이 회복한 주님의 제정,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를 성경 전체의 흐름 안에서 다시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주님은 떡만 주지 않으셨다. 잔도 주셨다. 그리고 그 잔을 모두에게 주셨다.
"언약의 피"
주님은 그 잔을 이렇게 부르신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언약의 피"(τὸ αἷμά μου τῆς διαθήκης, 토 하이마 무 테스 디아테케스). 이 표현을 들은 제자들의 귀에는 시내산이 울렸을 것이다. 모세가 율법의 말씀을 백성에게 낭독하고 백성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응답한 뒤, 모세는 제물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렸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24:8)
헬라어 구약(칠십인역)은 이 "언약의 피"를 토 하이마 테스 디아테케스(τὸ αἷμα τῆς διαθήκης)로 옮겼다. 주님의 말씀과 거의 같은 말이다. 다락방의 잔은 시내산의 피를 불러낸다. 그리고 출애굽기 24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피가 뿌려진 뒤 모세와 아론과 칠십 장로가 산에 올라,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문장 가운데 하나를 남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24:11)
피 다음에 식탁이 있다. 언약의 피가 뿌려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뵙고, 죽지 않고, 먹고 마신다. 이 장면이 이 글 전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뒤에서 따로 한 장을 들여 살필 것이다. 지금은 주님께서 잔을 "언약의 피"라 부르셨을 때, 그것이 피와 식탁과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로 묶인 시내산의 장면을 불러오는 말이었다는 것만 기억해 두자. 누가와 바울은 같은 말씀을 "새 언약"으로 전한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22:20)
이 "새 언약"은 예레미야의 약속을 가리킨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렘31:31)
그 새 언약은 출애굽 때 맺은 언약과 같지 않을 것인데, 하나님은 그 이유를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렘 31:32)고 말씀하신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시고(31:33), 약속은 이렇게 끝난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31:34). 약속 전체는 예레미야 31:31–34를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이 약속 안에 두 가지를 눈여겨보자. 하나는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설명하시며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언약은 처음부터 혼인의 언어로 말해져 왔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그 첫 표적의 무대였다는 것은, 이 언약의 혼인 언어를 기억하는 독자에게 결코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신랑과 신부의 주제는 뒤에서 다시 불러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새 언약의 약속이 "죄 사함"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마태만이 잔의 말씀에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εἰς 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를 덧붙인다. 마태복음의 첫 장에서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말을 기억한다면 이 덧붙임의 무게를 알 수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마태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죄 사함의 약속이었고, 마지막 만찬의 잔은 그 이름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준다. 그의 피로. "많은 사람을 위하여"(περὶ πολλῶν, 페리 폴론)라는 말도 구약의 한 본문을 불러낸다.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53:12)
"많은 사람"(라빔, רַבִּים)의 죄를 담당하는 종. 다락방의 잔은 시내산의 언약의 피, 예레미야의 새 언약,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을 한 잔에 담는다. 이 잔을 받는다는 것은 이 모든 약속이 이 사람의 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받는 것이다.
표와 인, 그리고 제재
개혁주의 전통은 성례를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sign)와 인(seal)"이라고 불러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장은 성례가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유익을 나타내고, 그 안에서 우리가 받은 몫을 확증하며, 교회에 속한 자와 세상을 눈에 보이게 구별하고, 신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엄숙히 묶는다고 가르친다(요지). 성찬의 잔은 언약의 약속을 눈에 보이게 하는 표이며, 믿는 자에게 그 약속을 확증하는 인이다.[^9]
메러디스 클라인은 이 언약의 표를 조금 더 날카롭게 보게 해 준다. 그는 『맹세로 위임된』(By Oath Consigned, 1968)에서 할례와 세례 같은 언약의 표가 단지 축복의 약속만이 아니라, 언약의 제재(covenant sanctions), 곧 순종에 따르는 축복과 배반에 따르는 저주를 함께 담고 있다고 논증했다. 고대 근동의 조약에서 맹세의 의식은 "만일 내가 이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되리라"는 자기저주의 형식을 띠었고, 성경의 언약 의식도 그 구조를 공유한다는 것이다(요지). 클라인의 모든 세부 논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 통찰은 한 가지를 분명히 해 준다.[^10] 언약의 피는 생명의 피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피다. 피가 흘려졌다는 것은 누군가가 죽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이렇게 요약한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22)
주님이 제자들에게 건네신 잔은 언약의 축복의 잔이다. 죄 사함과 새 언약과 생명의 잔이다. 그러나 그 잔에 담긴 이름은 "흘리는 바 나의 피"다. "흘리는"(ἐκχυννόμενον, 에크퀸노메논)은 현재분사다. 지금 막 흘려지려는, 이미 흘려지기 시작한 피. 제자들이 축복으로 마시는 그 잔은, 그리스도 편에서는 죽음으로 부어지는 잔이다. 잔이 제자들에게 오기 전에, 피가 먼저 흘러야 했다.
피를 마시라는 말씀의 충격
여기서 잠시 요한복음 6장으로 돌아가, 앞선 연작이 다 풀지 않고 남겨 둔 한 가지 충격을 마주해 보자. 이스라엘에게 피를 먹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노아 언약에서부터 그랬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창9:4). 레위기는 그 금지의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17:11)
피는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다. 그래서 사람은 피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생명을 자기 것으로 삼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움켜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피를 "주셔서" 제단에 뿌리게 하셨다. 피는 사람이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속죄를 위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는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신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6:60)고 수군거린 것은 당연했다. 율법을 아는 유대인에게 이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말이었다.
앞선 연작의 세 번째 글, 「먹지 말라, 먹으라」가 붙들었던 "취함"과 "받음"의 축이 여기서 다시 빛을 낸다. 율법이 금지한 것은 피를 "취하는" 것, 곧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사람이 제 손으로 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잔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반대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의 생명을 "주신다." 그 생명은 사람이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스스로 내어 주시는 것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8). 레위기가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라고 말했던 그 "주심"이, 이제 가장 깊은 방식으로 성취된다. 우리는 그의 생명을 취하지 않는다. 받는다.
그리고 여기서 개혁주의의 경계선은 다시 확인된다. 성찬의 잔에 담긴 것은 문자 그대로의 피가 아니라 포도주다. 칼빈이 지적했듯이 주님 자신이 그것을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 부르셨다. 우리는 피를 물질적으로 마시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6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풀었다.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도 우리 안에도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의 거룩한 몸과 더욱더 연합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가 되어, 한 영혼이 우리 몸의 지체들을 살리듯 한 성령에 의해 영원히 살고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요지).[^11]
"그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러므로 그의 죽음이 얻은 생명을 믿음으로 받고, 성령으로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잡한 육체적 섭취도 아니고, 머릿속의 회상도 아니다. 참된 참여다.
두 개의 잔이 준비되는 밤
이제 여기까지 온 흐름을 한 번 정리해 보자. 가나에서 그분은 좋은 포도주를 주셨다. 잔치의 기쁨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다락방에서 그분은 잔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그 잔은 언약의 피, 새 언약, 죄 사함의 잔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 날까지", "너희와 함께", "새것으로" 마실 날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금주의 선언이 아니라 종말론적 식탁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그 잔에는 "흘리는 바 나의 피"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제자들이 축복으로 받는 그 잔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부으셔야 비로소 축복일 수 있는 잔이었다. 마태는 다락방 장면을 이렇게 닫는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마26:30)
그들은 찬미했다. 아마도 유월절 식사를 마치며 부르던 할렐 시편, 곧 시편 113편에서 118편에 이르는 노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밤 그들이 부른 노래 가운데에는 서곡에서 인용한 시편 114편,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할렐의 마지막 시편 118편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118:22),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118:26). 1세기 유월절 식사의 정확한 순서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으므로 이것은 조심스러운 추정이다. 그러나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걸어가시는 분이, 이제 곧 스스로 쳐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밤의 찬미는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그리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겟세마네라 불리는 동산에서 그분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
"이 잔." 몇 시간 전 그분은 한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다 마시라"고 하셨다. 이제 그분 앞에는 또 하나의 잔이 놓여 있고, 그분은 그 잔 앞에서 떨고 계신다. 제자들에게 건넨 잔은 축복의 잔이었다. 그러나 그 잔이 축복일 수 있으려면, 그분의 손에 먼저 이 다른 잔이 놓여야 했다. 그 잔은 무엇인가? 구약은 그 잔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그리고 그 잔을 받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시고, 신 포도주를 받으신 뒤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그 목마름과 그 완성은 우리가 마시는 생수와 어떻게 이어지는가?
이제 그 동산으로 들어가자.
2부. 내가 목마르다
— 겟세마네에서 "다 이루었다"까지
가나에서 좋은 포도주를 주신 분을 보았다. 다락방에서 그분이 제자들에게 잔을 건네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하시고, "그 날까지" "너희와 함께" "새것으로" 마실 날을 약속하시는 것도 들었다. 그 잔의 이름은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였다. 그러나 이제 복음서는 그분의 손에 다른 잔을 놓는다.
4. 겟세마네: 두 잔의 역전
동산의 밤
마태는 그 밤을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시며 "고민하고 슬퍼하사"(마26:37)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26:38)
그리고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26:40)라고 하신 뒤, 두 번째 기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마26:42)
이 장면 전체는 마태복음 26:36–46을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앞에서 우리는 마태만이 마지막 만찬의 약속에 "너희와 함께"(μεθ᾽ ὑμῶν, 메트 휘몬/메튀몬)를 덧붙였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겟세마네에서 마태는 같은 전치사를 다시 쓴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γρηγορεῖτε μετ᾽ ἐμοῦ, 그레고레이테 메테무),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몇 시간 전 식탁에서 주님은 "너희와 함께" 마실 날을 약속하셨다. 이제 동산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청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잠들었다. "함께"가 무너지는 자리에서 주님은 홀로 잔 앞에 엎드리신다.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도 눈여겨보자. 베드로, 그리고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이다. 이 두 형제는 얼마 전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나아와 그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했던 사람들이다. 그때 주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마20:22). 이제 그 잔을 마시러 가시는 주님 곁에서, "할 수 있나이다"라고 했던 두 사람은 잠들어 있다. 이 장면이 품은 긴장은 뒤에서 다시 붙들 것이다. 지금은 겟세마네의 잔이 제자들이 "할 수 있다"고 말했던 그 잔과 결코 같지 않다는 것만 기억해 두자. 마가는 기도의 첫 부르심을 아람어 그대로 남겼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막14:36)
누가는 그 기도의 몸의 무게를 기록한다. 초기 사본 가운데 일부에는 이 두 절이 빠져 있어 본문비평상 논의가 있지만, 교회는 오랫동안 이 기록을 겟세마네의 한 장면으로 읽어 왔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22:43–44)
그리고 히브리서는 이 밤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5:7)
그는 무엇 앞에서 떨고 계셨는가
이 장면은 기독교 신앙에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찬송을 부르며 화형대에 올랐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담담히 마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왜 죽음 앞에서 이토록 괴로워하시는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그분은 순교자들보다 약하셨는가?
개혁주의 전통은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해 왔다. 그분이 떨고 계신 것은 단지 육체적 죽음 앞에서가 아니었다. 그분 앞에 놓인 잔은 순교자의 잔이 아니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16장에서 사도신경의 "지옥에 내려가사"를 다루며,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버림받은 자의 영혼의 고통을 친히 겪으셨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칼빈은 겟세마네의 두려움과 피땀을,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육체적 죽음 이상의 심판과 영혼의 고통을 담당하셨음을 보여 주는 징표로 읽었다(요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것을 신자의 위로의 언어로 옮긴다. 37문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내내, 특히 생애의 마지막에,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44문은, 내가 가장 큰 시험 속에 있을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고난 가운데, 특히 십자가에서 겪으신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뇌와 고통과 공포로 나를 지옥의 고뇌와 고통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고 말한다(요지).[^12]
그러니 겟세마네의 떨림은 약함의 표지가 아니라 그 잔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표지다. 순교자들이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마신 잔이 이 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잔을 먼저, 홀로 마셨기 때문이다.
구약의 잔: 여호와의 손에 있는 잔
그렇다면 "이 잔"은 무엇인가? 제자들의 귀에는 그 말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구약에서 "잔"(코스, כּוֹס)은 한 사람이 받는 몫, 곧 운명을 뜻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무서운 이미지였다. 아삽은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시75:8)
다윗의 시도 악인이 받을 몫을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의 "잔"으로 말한다(시11:6).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열방에게 마시게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렘25:15; 전체 문맥 25:15–29). 그리고 이사야는 그 잔을 이미 마셔 버린 예루살렘을 향해 외친다.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사51:17)
그런데 이사야 51장에는 놀라운 반전이 이어진다.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사51:22)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잔을 백성의 손에서 거두어 가신다.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이사야 본문 안에서 그 잔은 백성을 괴롭히던 자들에게로 옮겨진다(사51:23). 그러나 이사야를 계속 읽어 가면, 불과 몇 단락 뒤에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5)
(함께 볼 본문: 사53:6)
이사야 51장이 "잔이 어디로 가는가"를 말한 뒤에 곧바로 53장의 종이 "우리의 징계"를 대신 받는다는 흐름은, 선지자 자신이 두 본문을 하나의 논증으로 묶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정경을 손에 든 독자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배열이다. 백성의 손에서 거두어진 진노의 잔은 결국 어디로 가는가? 신약은 그 대답을 겟세마네에서 들려준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요한은 체포의 장면에서 주님의 결단을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18:11)
"아버지께서 주신 잔." 이 잔은 사람이 강요한 잔이 아니다. 로마 병정이나 대제사장이 억지로 먹인 잔도 아니다. 아버지의 손에서 아들의 손으로 건네진 잔이다. 계시록은 그 잔의 내용을 가장 두려운 말로 표현한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계14:10). 섞인 것이 없는 진노. 그것이 겟세마네에서 아들 앞에 놓인 잔이다.
두 잔의 역전
이제 앞에서 본 다락방과 겟세마네를 나란히 놓아 보자. 한 밤, 한 시간 남짓한 거리 안에 두 개의 잔이 있다. 다락방에서 주님은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그 잔에는 새 언약, 죄 사함, 생명, 축복이 담겨 있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잔을 "받으시며" 기도하셨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잔에는 심판, 저주, 고난, 죽음이 담겨 있었다. 제자들에게 건넨 잔과 아버지께 받으신 잔은 서로 반대편을 향한다. 그리고 이 두 잔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제자들의 잔이 축복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잔이 저주였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죄 사함"을 마실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삯"을 마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글이 따라가는 역전의 첫 번째 모습이다. 바울은 이 역전을 율법의 언어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3:13–14)
"저주를 받은 바 되사"(γενόμενος ὑπὲρ ἡμῶν κατάρα, 게노메노스 휘페르 헤몬 카타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셨다"고만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두 가지가 흘러나온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는 것, 그리고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 저주의 잔을 그가 마시신 결과로 복과 성령이 우리에게 온다. 이 성령의 약속이 요한복음에서 어떻게 "생수"로 불리는지는 곧 보게 될 것이다. 바울은 같은 역전을 고린도후서에서 더 날카롭게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5:21)
클라인과 언약의 제재
앞에서 잠시 소개한 메러디스 클라인의 통찰이 여기서 제자리를 찾는다. 클라인은 성경의 언약이 고대 근동 조약처럼 순종에 따르는 축복과 배반에 따르는 저주, 곧 언약의 제재(sanctions)를 품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요지). 신명기는 그 구조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축복과 저주가 선포되고(신27–28장), 백성은 저주의 선언마다 "아멘"으로 응답해야 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27:26)
바울이 갈라디아서 3:10에서 인용하는 것이 바로 이 구절이다. 그리고 신명기 28장이 열거하는 언약의 저주 가운데는 이런 말이 있다.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신28:48)
목마름은 언약의 저주 목록 안에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해 두는 것은 십자가의 "내가 목마르다"를 읽을 때 도움이 된다. 다만 조심해야 한다. 요한복음 19장의 "내가 목마르다"가 신명기 28:48을 인용한 것은 아니다. 요한이 직접 가리키는 본문은 시편이다. 그러나 클라인이 밝혀 준 언약 제재의 구조는, 그리스도의 수난 전체가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는 사건이라는 신약의 증언(갈3:13)을 이해하는 넓은 틀을 제공한다.
이 틀 안에서 두 잔의 관계는 더 선명해진다. 언약에는 축복의 제재와 저주의 제재가 있다. 이스라엘은, 그리고 아담 안의 모든 인류는 언약의 저주 아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서 받으신 잔은 그 저주의 제재 전체를 담은 잔이다. 그리고 그가 제자들에게 건네신 잔은 그 저주가 해소된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축복의 제재, 곧 새 언약의 복이다. 한 분이 저주의 몫을 마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축복의 몫을 마신다.
여기서 이 글의 중요한 경계선 하나를 미리 그어 두어야 한다. 요한복음 19장의 신 포도주 자체를 곧바로 "진노의 잔"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신 포도주 사건의 직접적 강조점은 시편 69편의 성취와 실제 갈증이다. 그러나 그 신 포도주가 건네진 장면 전체는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저주와 메시아적 고난을 마지막까지 담당하시는 수난의 문맥 안에 있다. 이 구별은 뒤에서 신 포도주를 다룰 때 다시 확인할 것이다.
5. 두 동산
첫 동산과 마지막 동산
요한은 겟세마네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이렇게 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요18:1)
그리고 수난 이야기는 또 하나의 동산에서 끝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요19:41)
부활의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κηπουρός, 케푸로스)로 착각한다(요20:15). 체포도 동산에서, 장사도 동산에서, 부활의 첫 만남도 동산에서 일어난다. 네 복음서 가운데 이 장소들을 "동산"(κῆπος, 케포스)이라고 부르는 것은 요한뿐이다.
칠십인역 창세기는 에덴을 보통 "낙원"(παράδεισος, 파라데이소스)이라고 부르므로, 요한의 "동산"이 창세기를 직접 인용하는 어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산에서 시작된 인류의 이야기를 아는 독자에게, 동산에서 체포되시고 동산에 묻히시고 동산에서 "동산지기"로 보이신 분의 이야기가 첫 동산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것은 요한의 명시적 논증이라기보다 정경이 허락하는 울림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바울이 명시적으로 전개하는 아담-그리스도 대조와 만날 때 신학적 무게를 얻는다.
취함과 받음
앞선 연작의 세 번째 글, 「먹지 말라, 먹으라」는 에덴의 이야기를 "취함"과 "받음"의 축으로 읽었다. 여기서 그 축이 겟세마네로 이어진다. 첫 동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넉넉한 식탁을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17)
"임의로 먹되"는 히브리어로 아콜 토켈(אָכֹל תֹּאכֵל), "먹고 또 먹으라"는 강조형이다. 에덴은 금지의 동산이 아니라 풍성한 허락의 동산이었다. 금지는 하나였다. 그러나 그 하나의 금지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사는 피조물인지를 드러내는 시험이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6)
첫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주어지지 않은 것을 제 손으로 취하여 먹었다. 그 결과는 저주였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창3:17), 땅은 사람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3:18)이며, 사람은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3:19)라는 선고를 받는다. 이 선고 전체는 창세기 3:14–19에 있다. 그리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닫혔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이제 마지막 동산을 보자. 마지막 아담 앞에도 먹고 마실 것이 놓였다. 그러나 그것은 탐스러운 열매가 아니라 쓴 잔이었다. 첫 아담은 금지된 것을 원했고, 마지막 아담은 명령된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분의 인성은 그 잔 앞에서 참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움츠러듦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첫 아담은 "나의 원대로" 취했다. 마지막 아담은 "아버지의 원대로" 받으셨다. 요한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고 쓴 것은 바로 이 대조의 핵심이다. 에덴의 열매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고, 겟세마네의 잔은 주어진 것이었다. 첫 아담은 주어지지 않은 생명을 움켜쥐다가 죽음을 얻었고, 마지막 아담은 주어진 죽음을 받으셔서 생명을 여셨다.
그러므로 두 동산의 대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첫 아담: 취함 → 불순종 → 저주 → 죽음.
마지막 아담: 받음 → 순종 → 저주 담당 → 생명.
창세기 3장의 저주와 복음서의 수난 사이에는 교회가 오래 묵상해 온 울림들도 있다. 첫 아담에게 선언된 저주에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라는 말이 있고, 누가는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아담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적는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는 저주가 있었고, 요한은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요19:2)라고 기록한다. 복음서 기자들이 창세기 3장을 의식하고 이 세부를 기록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저주의 표지들이 마지막 아담의 몸 위에 얹혀 있는 이 그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는 바울의 선언을 묵상하는 교회에게 오래도록 말을 걸어 왔다.
한 사람의 순종
바울은 두 아담의 대조를 로마서 5장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전개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5:18–19)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은 그 대조를 부활의 빛 안에 놓는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1–22)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5)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 대조를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틀 안에서 이해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과 맺으신 언약이 완전하고 인격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후손에게 생명을 약속한 행위언약이었고, 사람이 타락으로 그 언약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을 기뻐하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8장은 주 예수께서 그의 완전한 순종과 자기를 드리신 희생으로 아버지의 공의를 충분히 만족시키셨다고 말한다(요지). 첫 아담이 실패한 순종을 마지막 아담이 이루셨고, 첫 아담이 불러들인 저주를 마지막 아담이 짊어지셨다.[^13]
존 머레이는 『구속의 성취와 적용』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전체를 여는 첫 범주로 "순종"을 들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단지 고난을 수동적으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향한 능동적 자기 드림이었으며, 그 순종은 생애 전체를 관통하여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이다(요지). 칼빈도 『기독교강요』 제2권 16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신 때부터 그의 순종의 전 과정을 통해 우리의 속량을 이루기 시작하셨다고 말했다(요지).[^14] 히브리서는 그 순종의 신비를 이렇게 말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5:8–9)
겟세마네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는 그 순종이 가장 날카롭게 시험받은 자리였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분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나무에서 나무로
그 순종의 끝에 한 나무가 서 있다. 신약은 십자가를 여러 번 "나무"(ξύλον, 크쉴론)라고 부른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행5:30)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2:24)
갈라디아서 3:13의 "나무에 달린 자마다"도 같은 단어다. 이 표현은 일차적으로 신명기 21:23, 곧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에서 온다. 그러니 신약이 십자가를 "나무"라 부를 때 가장 먼저 울리는 것은 저주의 나무라는 의미다. 그런데 칠십인역 창세기에서 "생명나무"는 토 크쉴론 테스 조에스(τὸ ξύλον τῆς ζωῆς)이고, 계시록이 새 창조의 생명나무를 말할 때도 같은 크쉴론을 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2:7)
크쉴론은 나무와 목재를 두루 가리키는 흔한 단어이므로, 이 어휘의 일치만으로 신약 기자들이 십자가와 생명나무를 의도적으로 겹쳐 놓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대 교회는 이 두 나무를 함께 묵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레네우스는 『이단 논박』 V.16.3과 V.19.1에서, 주님께서 나무와 관련하여 일어난 불순종을 나무에 달리신 자신의 순종으로 총괄갱신(recapitulatio)하셨다고 말했다(요지). 6세기의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는 십자가 찬가 「혀여 노래하라」(Pange lingua gloriosi)에서, 창조주께서 처음 사람의 타락을 슬퍼하시며 그때 이미 한 나무를 표해 두셨으니 나무의 손해를 나무로 풀기 위함이었다고 노래했다(ipse lignum tunc notavit, / damna ligni ut solveret).[^15]
한 나무에서 죽음이 들어왔고, 한 나무를 통해 생명의 길이 열린다. 이것은 개혁파 신앙고백의 조항이 아니라 고대 교회의 해석적·송영적 전통이다. 그러나 그 전통이 붙잡은 신학적 핵심, 곧 첫 아담의 불순종이 마지막 아담의 순종으로 뒤집혔다는 것은 로마서 5장이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바이며,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중심에 서 있다. 에덴에서 불 칼이 지키던 생명나무의 길은, 저주의 나무 위에서 마지막 아담이 그 저주를 끝까지 받으심으로 다시 열린다. 계시록 22장에서 그 나무가 다시 등장할 때, 우리는 그 길이 어떤 값으로 열렸는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6. 광야의 반석
목마른 백성
이제 겟세마네의 잔에서 잠시 눈을 돌려, 이 글의 두 번째 물줄기인 "물"을 따라가 보자. 성경에서 목마름은 광야에서 가장 날것으로 드러난다. 홍해를 건넌 지 얼마 되지 않은 백성이 르비딤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출17:1). 목마른 백성은 모세에게 원망한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17:3).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 앞을 지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17:5) 손에 잡고 가라고 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출17:6)
모세는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했고, 그곳의 이름은 맛사와 므리바가 되었다. 백성이 다투었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17:7) 하며 여호와를 시험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 전체는 출애굽기 17:1–7을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백성은 목말랐다. 반석은 쳐졌다. 백성은 물을 마셨다. 이 세 문장이 이 장면의 뼈대다. 이 본문에는 곱씹을 만한 세부들이 있다. 모세가 들고 간 지팡이는 "나일 강을 치던" 지팡이, 곧 애굽에 심판을 내리던 지팡이다. 장로들이 증인으로 불려 나온다. "므리바"(מְרִיבָה)라는 이름은 "다툼", 법정적 쟁론을 뜻하는 리브(רִיב)에서 왔다. 백성은 하나님을 고소하듯 다투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하나님께서 서 계신 그 반석을, 심판의 지팡이가 친다. 그리고 거기서 물이 나와 원망하던 백성을 살린다.
일부 해석자들은 이 장면을 일종의 법정 장면으로 읽는다. 다툼을 일으킨 쪽은 백성이었으니 심판의 지팡이는 백성 위에 떨어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서 계신 반석 위에 떨어지고, 그 결과로 생명의 물이 흐른다. 이것은 출애굽기 본문이 명시적으로 풀이하는 해석은 아니므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읽기가 붙드는 방향, 곧 하나님께서 심판의 자리에 스스로 서시고 그로 인해 백성이 산다는 방향은 신약이 이 사건을 어떻게 읽는지와 놀랍게 겹친다. 시편과 선지서는 이 사건을 두고두고 노래했다.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시78:15–16)
(함께 볼 본문: 사48:21)
그리고 서곡에서 인용했던 할렐 시편, 제자들이 겟세마네로 가며 불렀을지도 모르는 그 노래가 있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114:8). 민수기 20장에는 비슷하지만 다른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므리바에서 다시 물이 없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으나, 모세는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1). 그리고 그 불순종 때문에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적어도 19세기 이후 일부 설교자와 주석가들은 출애굽기 17장과 민수기 20장을 함께 읽으며, 한 번 쳐진 반석은 다시 쳐질 필요가 없었다는 데서 그리스도의 단회적 죽음을 보는 예표론적 교훈을 끌어내기도 했다.^a 그러나 민수기 본문이 직접 밝히는 모세의 잘못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 앞에서 그분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데 있다(민 20:12; 참조 27:14). 이 글은 그 교훈을 본문의 의도로 단정하지 않고, 다만 히브리서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단번에”(ἐφάπαξ) 드리셨다고 강조한다는 사실(히 7:27; 10:10)과 나란히 놓아 두는 데 그친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바울은 광야의 이야기를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들려준다. 그는 먼저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 뒤(고전10:1–2), 이렇게 잇는다.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3–4)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ἡ πέτρα δὲ ἦν ὁ Χριστός, 헤 페트라 데 엔 호 크리스토스). 바울은 과거 시제로 말한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마신 물의 근원에 이미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개혁주의 성례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칼빈은 이 본문을 주석하며, 옛 백성의 표징들도 빈 그림자가 아니라 영적 실체를 가리키고 전달했으며,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참여하였다고 이해했다(요지). 이를 그의 성례론 전체의 언어로 요약하면, 구약과 신약의 성례는 그리스도라는 실체에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계시와 제시 방식에서 차이를 가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장 5절은 이 이해를 고백의 언어로 정리한다. 구약의 성례들은 그것이 나타내고 제시한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실체상 신약의 성례들과 동일하다(요지).[^16] 그런데 바울이 이 구절을 쓴 목적은 위로만이 아니라 경고였다. 곧바로 이어지는 절은 이렇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5)
그들은 모두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 그러나 다수가 멸망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성례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를 구원의 보증처럼 여기는 태도를 경계한다. 이것은 앞선 연작이 지켜 온 개혁주의 성례론의 핵심과 맞닿는다. 성례는 믿음 없이 기계적으로 효력을 내는 것이 아니다. 광야의 물은 모두에게 흘렀지만, 그 물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자에게만 생명이 되었다. 마심은 의존이다. 그러나 그 의존은 믿음의 의존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광야의 장면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구조를 남긴다. 목마른 백성, 쳐진 반석, 흐르는 물. 그리고 바울의 해석,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구조가 요한복음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이제 따라가 보자.
7. 야곱의 우물: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른 분이 물을 청하시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신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4:6–7)
이야기는 목마른 예수에서 시작한다. 생수를 주시는 분이 먼저 물을 청하신다. "물을 좀 달라"(δός μοι πεῖν, 도스 모이 페인). 직역하면 "내게 마실 것을 달라." 요한은 그분이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으셨다고 적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요한복음 서문의 선언(요1:14)은 이런 자리에서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얻는다. 영원한 말씀이 한낮의 햇볕 아래서 지치고 목마르셨다. "여섯 시쯤"은 유대식 시간 계산으로 정오 무렵이다.
요한복음에서 "여섯 시"는 한 번 더 나온다. 빌라도가 예수를 유대인들 앞에 세우고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말하던 때를 요한은 이렇게 적는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요19:14). 한낮의 우물가에서 목마르셨던 분이, 또 다른 한낮에 십자가로 넘겨지신다. 이것 역시 요한이 명시하는 연결은 아니지만,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의 귀에 들리는 울림이다.
여인은 놀란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하는 것은 그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4:9).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4:10)
여기서 대화의 방향이 뒤집힌다. 물을 청하던 분이 물을 주시는 분으로 드러난다. "네가 만일 ...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리고 요한은 그 대화 끝까지, 여인이 예수께 실제로 물을 떠 드렸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우물가의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은 채 이야기의 뒤편으로 물러난다. 그 목마름은 요한복음 19장에서 다시 입을 열 것이다.
"생수"라는 오해
"생수"(ὕδωρ ζῶν, 휘도르 존)는 이중적인 말이다. 일상어로는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 샘물을 뜻한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는 "살아 있는 물", 생명의 물이다. 여인은 첫 번째 뜻으로 알아듣는다. 그녀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그 생수를 얻겠느냐고 되묻고, 조상 야곱이 준 이 우물을 떠올리며 이렇게 덧붙인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4:12). 예수께서는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3–14)
그리고 여인은 이렇게 청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5)
이 부탁은 처음 읽을 때 조금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여인은 여전히 생수를 물리적 편의로 오해하고 있다. 매일 한낮에, 아마도 다른 여인들의 눈을 피해 무거운 물동이를 지고 우물까지 오가는 수고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다. 요한복음의 대화들이 흔히 그렇듯이, 예수의 말씀은 한 차원 위에서 들리고 상대는 한 차원 아래서 알아듣는다. 니고데모가 "거듭남"을 어머니 모태로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 알아들었듯이, 여인은 "생수"를 물 긷는 수고의 종말로 알아듣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끝까지 읽고 이 장면으로 돌아오면, 이 부탁은 놀랍게 들린다. 여인은 청한다. "목마르지도 않고"(요4:15) 살게 해 달라고. 그리고 요한복음의 끝에서, 생수의 주인이 십자가에서 말한다. "내가 목마르다."
여인이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되기 위해, 생수를 주시는 분이 목마르셔야 했다. 여인은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 달라고 했다. 그 청이 참으로 이루어지는 길은, 우물가에 앉아 목마르셨던 그분이 마지막 목마름까지 짊어지시는 길이었다. 이것이 이 글이 따라가는 역전의 두 번째 모습이다. 우리는 생수를 받는데, 생수의 근원이 목마르시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대화는 여인의 삶의 가장 아픈 자리로 들어가고(요4:16–18), 예배의 장소에 관한 질문을 지나(요4:19–24), 마침내 메시아의 자기 계시에 이른다. "내가 그라"(요4:26). 예배에 관한 그 대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로 시작하는 그 말씀은 이 글의 부록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대화의 끝에 요한이 남긴 한 줄의 세부만 보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4:28–29)
물을 길으러 왔던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간다. 그녀는 물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물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 달라던 그녀의 청은, 그녀가 오해했던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물동이가 아니라 증언을 들고 동네로 달려간다. 생수는 그 속에서 솟아나기 시작했다.
"나의 양식은"
그 사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께 음식을 권한다. 앞선 「말씀의 섭취」 연작을 읽은 독자라면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제자들이 "랍비여 잡수소서"(요4:31) 하고 권하자, 예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4:32)고 하신다. 제자들이 누가 음식을 갖다 드렸는가 하고 서로 묻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같은 장에서 예수께서는 목마르셨고, 이제 먹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분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τελειώσω, 텔레이오소) 것이다. 이 동사를 기억해 두자. 요한복음은 이 "이룸"의 어휘를 복음서 전체에 걸쳐 쌓아 간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요 5:36),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요17:4).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어휘는 두 번 연달아 터져 나온다.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요19:28), "다 이루었다"(요19:30).
우물가에서 그분은 목마르셨고, 그분의 양식은 아버지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다시 목마르셨고, 그 일을 이루셨다. 먹음과 마심의 신학은 이렇게 한 장 안에서, 그리고 복음서 전체의 호흡 안에서 서로 붙들려 있다.
8. 초막절의 외침: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요한복음 7장의 배경은 초막절이다(요7:2). 초막절은 광야에서 장막에 거하던 조상들을 기억하는 절기이며, 동시에 가을 추수를 감사하고 다가올 우기의 비를 구하는 절기였다. 후대 랍비 문헌인 미쉬나는 초막절 동안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서 금 주전자로 물을 길어 성전 제단에 붓는 "물 긷는 예식"이 있었다고 전하며, 이 예식의 기쁨을 보지 못한 사람은 평생 기쁨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미쉬나는 2세기 말에 정리된 문헌이므로 1세기 성전 예식의 세부를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지만, 초막절이 물과 기쁨과 종말론적 기대로 가득한 절기였다는 것은 분명하다.[^17] 그 절기에 읽히던 선지서의 약속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사12:3)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14:8)
스가랴 14장은 같은 장에서, 그 날에 열방이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고 예언한다(슥14:16). 초막절과 생수와 "그 날"은 선지자의 환상 속에서 이미 하나로 묶여 있었다. 바로 그 절기의 마지막 큰 날, 예수께서 서서 외치신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7:37–39)
"그 배에서"는 누구의 배인가
이 구절에는 오래된 해석상의 질문이 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에서 "그"는 누구인가? 헬라어 원문에는 구두점이 없으므로 두 가지로 끊어 읽을 수 있다. 하나는 개역개정처럼 "나를 믿는 자는 ... 그 배에서"로 읽어, 생수가 믿는 자의 속에서 흘러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요한복음 4:14의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잘 어울리는 읽기다. 다른 하나는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마시라)"로 끊고,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의 "그"를 그리스도 자신으로 보는 것이다. 이 읽기에서는 생수의 강이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고, 이것은 요한복음 19:34의 찔린 옆구리와 곧바로 이어진다.
두 읽기 모두 고대부터 지지자가 있었고, 이 글은 어느 한쪽을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두 읽기 모두에서 분명하다. 생수의 근원은 그리스도시다. 믿는 자의 속에서 생수가 흐른다 해도, 그것은 믿는 자가 스스로 샘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와서 마셨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말한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과 반대로, 신자는 근원에 연결되어 흐르는 강의 한 줄기가 될 뿐이다.
영광, 십자가, 성령, 생수
요한은 이 외침에 괄호를 달아 설명한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앞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영광"과 "때"가 십자가를 향한다는 것을 보았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 그렇다면 요한의 괄호는 이렇게 읽힌다. 요한이 말하는 "아직"은 성령의 부재가 아니라, 성령이 약속된 충만함으로 주어지는 때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영광은 십자가의 들림을 통해 온다. 칼빈도 이 구절에서 요한이 신약을 구약과 비교할 때처럼 비교하여 말한다고 보았다(요지). 다락방에서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7)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라"(요20:22). 그리고 오순절, 베드로는 그 모든 것을 이렇게 정리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3)
그러므로 요한복음 7장의 괄호 안에는 구속사의 한 구조가 압축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영화(榮化), 곧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 결과로서 성령의 부어주심. 그리고 그 성령이 "생수"로 불린다. 앞에서 인용한 갈라디아서 3:14가 같은 구조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저주가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었다. 저주의 잔을 그리스도께서 마시셨기 때문에, 성령의 생수가 우리에게 흐른다.
게할더스 보스는 1912년의 논문 「바울의 성령 개념의 종말론적 측면」에서, 신약에서 성령이 무엇보다 "오는 세대"의 생명 원리이며, 신자에게 주어진 성령은 장차 올 세계의 첫 열매요 보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요지). 보스의 이 통찰은 요한복음 7장의 생수를 이해하는 데에도 빛을 비춘다. 초막절의 선지자들이 "그 날에" 흐를 것이라 약속했던 생수, 곧 종말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영화 이후 성령 안에서 이미 교회에게 새롭게, 충만히 흐르게 되었다. 생수를 마신다는 것은 오는 세상의 생명을 지금 앞당겨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생명이 완성되는 것은 여전히 "그 날"이다. 이 "이미"와 "아직"의 긴장은 하편의 성찬론에서 다시 중심에 설 것이다.[^18]
칼빈이 『기독교강요』 제3권의 첫머리에서 성령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효과적으로 자기에게 연합시키시는 띠"라고 부른 것도 여기서 기억해 둘 만하다(요지).[^19] 앞선 연작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이 성령과 믿음을 통한 연합이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할 수 있다. 그 연합을 이루시는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생수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 그 연합 안에서 우리는 그 생수를 거듭 마신다. 옛 언약의 성도들도 같은 성령으로 거듭나 같은 그리스도를 마셨지만(고전10:4), 요한복음이 약속하는 생수의 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지나 영광을 받으신 뒤 새 언약의 충만함으로 흘러넘친다.
9. "내가 목마르다"
한 단어의 외침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 19장에 이르렀다. 십자가 곁에 선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에게 말씀하신 뒤, 요한은 이렇게 쓴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19:28)
"내가 목마르다"는 헬라어로 한 단어다. 딥소(διψῶ).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은 셋뿐이다. 어머니와 제자에게 하신 말씀, 이 한 단어, 그리고 "다 이루었다"(역시 한 단어,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그 가운데 가장 짧고 가장 인간적인 말이 "딥소"다. 이 외침은 무엇보다 먼저 실제 갈증이다. 채찍질과 출혈과 한낮의 햇볕과 몇 시간의 매달림 끝에 온 몸이 말라 가는 사람의 갈증이다. 요한은 그 사실을 조금도 영적인 비유로 흐리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첫 장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선언했다면, 그 육신은 여기서 가장 적나라하게 목마른 육신이다. 예수께서 참 사람이 아니라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던 가현설(docetism)에 맞서, 요한의 증언은 이 한 단어로 선다. 그분은 참으로 목마르셨다. 시편 22편은 고난받는 의인의 입으로 그 목마름을 이렇게 말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시22:15)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 위의 예수께서 이 시편의 첫 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셨다고 기록한다(마27:46; 막15:34). 요한은 그 외침을 기록하지 않지만, 정경을 함께 읽는 우리는 요한의 "내가 목마르다"가 마태와 마가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같은 시간, 같은 십자가 위에서 터져 나왔다는 것을 안다.
생수의 근원이 목마르시다
그런데 이 목마름은 누구의 목마름인가?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렘2:13)이라 불렀다. 요한복음 4장에서 그분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고, 7장에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다. 생수를 주시는 분, 생수의 근원이신 분이 지금 목마르시다.
개혁주의 기독론은 이 신비를 조심스럽게 말한다. 목마름은 신성의 속성이 아니라 인성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목마르실 수 없다. 그러나 목마르신 분은 한 인격, 곧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7절은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에서 두 본성에 따라 각 본성에 고유한 일을 행하시되, 인격의 통일성 때문에 한 본성에 고유한 것이 성경에서 때때로 다른 본성의 이름으로 불리는 인격에게 돌려진다고 고백한다(요지).[^2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목마르셨다"고 말할 수 있다. 목마름을 신성에 돌리는 것이 아니라, 목마르신 분이 누구신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글의 역전을 가장 날카롭게 만든다.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는 그의 피를 "마시는" 자로 불렸다. 요한복음 4장과 7장에서 우리는 그가 주시는 생수를 "마시는" 자로 초대받았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에서 그분은 "목마른" 자가 되신다. 마시는 자는 우리이고, 목마른 이는 그분이시다.
목마름의 문맥
앞에서 보았듯이 신명기 28장의 언약의 저주 목록에는 목마름이 있었다. 그리고 복음서에는 목마름이 심판의 자리와 연결되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누가복음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음부에서 고통받는 부자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16:24)
여기서도 조심해야 한다. 요한복음 19:28은 이 비유를 가리키지 않는다. 요한이 직접 가리키는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곧 시편의 성취다. 따라서 "내가 목마르다"를 곧바로 "지옥의 갈증"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칼빈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고백,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몸과 영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셨다는 고백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목마름은 단지 한 사형수의 생리적 갈증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저주받은 자의 자리, 버림받은 자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분의 목마름이다. 시편의 의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라고 노래했다. 십자가 위의 목마름은 몸의 갈증이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분의 목마름이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과 신학이 그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을 구별하되, 둘을 분리하지는 말자. 요한은 실제 갈증과 성경의 성취를 말한다. 신약 전체와 개혁주의 신학은 그 갈증이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시는 수난 한가운데서 터져 나왔다고 말한다. 둘 다 참이다.
10. 신 포도주와 "다 이루었다"
신 포도주를 받으시다
요한은 이어서 쓴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19:29–30)
"신 포도주"(ὄξος, 옥소스)는 로마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흔히 마시던 값싼 음료, 물에 탄 시큼한 포도주였다. 병사들이 자기들이 마시려고 가져다 둔 그릇이 형장 곁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건넨 것이 조롱이었는지 약간의 긍휼이었는지는 복음서마다 뉘앙스가 다르다. 누가는 병사들이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쓰고(눅23:36), 마태와 마가는 누군가 달려가 해면에 적셔 갈대에 꿰어 주었다고 쓴다(마27:48; 막15:36).
이제 앞에서 붙들어 두었던 세부를 다시 꺼내자.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 사람들은 예수께 포도주를 건넸다. 마가는 그것을 "몰약을 탄 포도주"(막15:23)라 부르고, 마태는 "쓸개 탄 포도주"(마27:34)라 부르는데, 마태의 "쓸개"는 뒤에서 볼 신 포도주와 함께 시편 69:21의 어휘를 떠올리게 한다. 마태는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고, 마가는 "받지 아니하시니라"고 적는다. 후대 유대 전승은 처형당하는 이에게 정신을 흐리게 하려고 유향을 탄 포도주를 주었다고 전하며 그 근거로 잠언 31:6을 인용하는데, 18–19세기 이후 적지 않은 개신교 주석가들은 이 전승을 배경으로, 예수께서 고통을 흐린 의식으로 피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끝까지 받으시려 하셨다고 읽어 왔다.^b 복음서가 그 이유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해석이지만, 개연성 있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건네진 포도주는 거절하시고, 마지막에 건네진 신 포도주는 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은 그 이유를 분명히 적는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마지막 신 포도주는 고통을 마비시키는 음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는 자리였다. 그리고 요한이 그 받으심 바로 뒤에 "다 이루었다"를 놓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지막 외침을 위해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이기도 했다.
시편 69편: 요한복음을 관통하는 시
요한이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라고 할 때 가리키는 시편은 69편이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시69:21)
(탄식의 문맥: 시69:19–21)
칠십인역은 이 "초"를 옥소스(ὄξος)로 옮겼다. 요한이 쓴 바로 그 단어다. 그런데 시편 69편은 요한복음 19장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시가 아니다. 요한은 이 시편을 복음서 전체에 걸쳐 인용한다. 가나의 혼인잔치 바로 다음 장면,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실 때 요한은 이렇게 적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2:17)
이것이 시편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다. 다락방에서 주님은 세상의 미움을 말씀하시며 이렇게 인용하셨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요15:25)
이것은 시편 69: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시편 69:21의 신 포도주.
그러니 요한복음에서 시편 69편은 가나 직후의 성전 장면에서 시작해 십자가에서 끝나는 긴 호(弧)를 그린다. 가나에서 좋은 포도주를 주신 분이 머지않아 성전에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삼켜지기 시작하시고, 그 열심이 마침내 그분을 십자가까지 삼키며, 거기서 그분은 같은 시편이 말한 신 포도주를 받으신다. 좋은 포도주를 주신 가나와 신 포도주를 받으신 십자가 사이를 따라가는 이 글의 독자에게, 이 호는 중요한 수난의 배경을 제공한다.
칼빈은 요한복음 19장을 주석하며, 그리스도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것이 이 시편의 성취였음을 짚고, 그분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 모두 이루어질 때까지 생명을 내려놓지 않으셨다는 점에 주목했다(요지).[^21]
우슬초
요한만이 해면을 "우슬초"(ὕσσωπος, 휘쏘포스)에 매었다고 기록한다. 마태와 마가는 "갈대"라고 쓴다. 우슬초는 가느다란 줄기의 식물이어서 해면을 들어 올리기에 적합했겠느냐는 실제적 질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요한이 이 식물의 이름을 남긴 것은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슬초는 출애굽의 밤에 쓰인 식물이다.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출12:22)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그린다. 세례 요한은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 불렀다. 요한은 예수께서 넘겨지신 때를 "유월절의 준비일"(요19:14), 곧 유월절 어린양들이 성전에서 잡히던 날로 기록한다. 그리고 병사들이 예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일을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요 19:36)는 말씀의 성취로 본다. 이것은 유월절 어린양에 관한 규례(출12:46)에서 온 말씀이다. 이 흐름 속에서 우슬초는 조용한 표지다. 유월절 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던 그 우슬초가, 참 유월절 어린양의 입술에 신 포도주를 올린다.
다윗의 참회 시도 이 식물을 부른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7). 이 연결들은 요한의 명시적 설명이 아니라 그가 남긴 세부가 품은 울림이다. 과장하지 않되, 지나치지도 말자.
"다 이루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단어.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19:30)
순서를 눈여겨보자. 목마르다 하셨고, 신 포도주를 받으셨고, "그 후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목마름, 받으심, 완성. 요한은 이 세 동작을 끊지 않고 이어 놓는다.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는 텔레오(τελέω)의 현재완료 수동형이다. 헬라어 완료형의 기능을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하나의 기계적 공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이 완료형은 한 일이 끝에 이르렀다는 완결과, 그 완결로 말미암아 성립한 상태를 함께 드러낸다. "이루어졌고, 이루어진 채로 있다." 이 단어가 고대 영수증에 "완납"의 뜻으로 쓰였다는 설명이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그 증거와 해석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신중한 평가가 있으므로, 이 글은 그 설명에 기대지 않고 요한복음 자신의 어휘 흐름에 집중하려 한다.
요한복음 안에서 이 단어의 무게는 이미 충분하다. 다락방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εἰς τέλος, 에이스 텔로스) 사랑하셨다고 썼다(요13:1). 우물가에서 그분은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τελειώσω, 텔레이오소) 것이 자기 양식이라고 하셨다(요4:34).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그분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τελειώσας, 텔레이오사스)라고 기도하셨다(요17:4). 그리고 십자가에서, 19:28의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줄 아시고"와 "성경을 응하게(τελειωθῇ, 텔레이오데) 하려 하사", 그리고 19:30의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요한은 두 절 안에서 같은 어근을 세 번 쓴다. 칼빈도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19:30의 주석에서 그리스도께서 조금 전에 쓰신 같은 단어를 반복하신다고 지적하며, 이 말씀이 우리 구원의 모든 성취와 그 모든 부분이 그의 죽음 안에 담겨 있음을 보여 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로써 우리의 믿음을 오직 자기에게만 고정시키시고, 사람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며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했다(요지).[^22]
가나에서 "내 때가 아직"이라고 하셨던 분이, 다락방에서 "끝까지" 사랑하기 시작하신 분이, 우물가에서 아버지의 일을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던 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다. 요한복음의 시계는 여기서 멈춘다.
신 포도주를 과도하게 신비화하지 말 것
여기서 이 글이 처음부터 지키려 한 경계선을 분명히 해 두자. 신 포도주는 진노의 잔 자체가 아니다. 겟세마네의 "이 잔"은 아버지의 손에서 건네진 심판의 잔이었고, 골고다의 신 포도주는 병사들의 그릇에서 건네진 실제 음료였다. 둘을 하나로 뭉쳐 "그리스도께서 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진노의 잔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서는 일이다. 요한 본문의 직접적 강조점은 시편 69편의 성취와 실제 갈증이다. 그러나 신 포도주를 그저 우연한 세부로 흘려보내는 것도 본문을 덜 읽는 일이다. 가장 정직한 표현은 이것이다.
신 포도주는 진노의 잔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기록된 메시아의 고난을 마지막까지 받아내시고 구속 사역의 완성을 선언하시는 마지막 수난 장면 속에 있다.
이제 서곡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날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분이 왜 신 포도주를 받으셨는가? 앞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26:29가 금주 서원이 아니라 종말론적 식탁의 약속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할 수 있다. 그분이 받으신 신 포도주는 약속된 "새것"의 반대편에 있는 잔이었다. "너희와 함께"가 아니라 홀로, "새것"이 아니라 시어진 것, "아버지의 나라에서"가 아니라 저주의 나무 위에서. 그분은 "그 날"의 잔을 마시기 전에, 먼저 이 날의 잔을 받으셔야 했다. 그리고 그 받으심의 끝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러니 신 포도주는 마태복음 26:29의 약속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그 약속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다 이루었다"가 성찬론을 지킨다
"다 이루었다"는 이 후속편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앞선 「말씀의 섭취」 연작이 세운 성찬론을 보호한다.
우리가 성찬에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의 희생을 다시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미 완성되었다. 히브리서는 이 "단번"을 거듭 강조한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9:26)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10:12, 1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장 2절은 이 진리 위에서,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며 죄 사함을 위한 어떤 실제적 제사가 드려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기를 드리신 그 한 번의 제사를 기념하는 것이며, 그 제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찬양의 영적 봉헌이라고 고백한다(요지). 성찬의 식탁은 제단이 아니다. 제단의 일은 골고다에서 끝났다. "다 이루었다."[^23] 그러므로 이제 이 후속편의 세 번째 명제를 여기서 미리 분명히 말해 둘 수 있다.
성찬에서의 먹고 마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하거나 보충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그의 죽음과 생명의 유익을 성령과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언약적 참여다.
앞선 연작이 "먹음은 소유가 아니라 붙들림"이라고 말했다면, 이제 우리는 그 붙들림의 근거를 말할 수 있다. 우리를 붙드는 것은 완성된 사역이다. 우리는 미완성의 일을 거들기 위해 식탁에 오지 않는다. 다 이루어진 일의 열매를 받기 위해 온다.
11. 피와 물
찔린 옆구리
"다 이루었다"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 같지만, 요한은 한 장면을 더 기록한다. 그리고 그 장면에 자기 증언의 무게를 싣는다. 그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었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청했다. 군인들은 함께 못 박힌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으나,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요19:33) 다리를 꺾지 않았다.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19:34–35)
요한은 이 일이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19:36)는 말씀과, 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19:37)는 말씀을 이루었다고 덧붙인다. 이 장면 전체는 요한복음 19:31–37을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먼저, 실제 죽음의 증언
이 장면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요한이 강조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요한은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예수께서 실제로 죽으셨고, 그 몸이 실제 몸이었다는 것을 증언한다. 병사들은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나왔다. 의학적으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제시되어 왔지만, 요한의 관심은 생리학에 있지 않다. 그의 관심은 증언에 있다. 이분은 참으로 죽으셨다. 요한은 그의 첫 서신에서 같은 증언을 되풀이한다.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참 몸으로 오시고 참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 퍼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일5:6)
그리고 요한은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요일5:7–8)고 덧붙인다. 역사적 증언이 먼저다. 그 위에서만 상징적·정경적 울림이 정당하게 들린다. 피와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기 전에, 요한은 우리가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기를 원한다.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스가랴의 찔린 자와 열린 샘
요한이 인용하는 두 번째 성경,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는 스가랴 12:10에서 온다. 그 문맥 전체를 읽어 보면 놀라운 흐름이 드러난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12:10)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의 첫 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슥13:1)
영이 부어짐, 찔린 자, 애통, 그리고 "그 날에" 열리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요한이 스가랴 12:10을 인용할 때, 그 선지서의 흐름 속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열린 샘"이 그의 시야 밖에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스가랴 14:8은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라고 말했다. 스가랴의 마지막 장들은 찔린 자와 열린 샘과 흐르는 생수를 한 줄로 꿰고 있다.
정경적 울림: 피와 물의 긴 역사
이제 역사적 증언과 요한 자신이 제시한 구약 배경 위에서, 정경 전체의 울림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자. 피와 물은 성경의 구속 이야기에서 처음부터 나란히 흘러왔다. 출애굽에서 피와 물은 구원의 두 문이었다. 유월절 밤, 문설주의 피가 죽음을 넘어가게 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출12:13). 그리고 홍해의 물이 갈라져 백성이 지나갔고, 바울은 그것을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10:2)라고 불렀다. 광야에서는 쳐진 반석에서 물이 흘렀고, 바울은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다.
성막에서 피와 물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단계였다. 회막 앞 뜰에 들어서면 먼저 번제단이 있었고, 그 다음에 물두멍이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어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출30:18)고 하셨고,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그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30:20)이라고 하셨다. (전체 규례: 출30:17–21)
제단의 피로 속죄하고, 물두멍의 물로 씻고, 그 다음에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회막으로 들어간다. 히브리서는 이 구조를 새 언약의 언어로 다시 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10:19–20, 22)
피와 물을 지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그 길이 "그의 육체"를 통해 열렸다. 에스겔은 새 언약의 정결을 물의 언어로 약속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겔36:25)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36:26)
그리고 하나님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36:27) 그들이 율례를 행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맑은 물과 새 영이 한 약속 안에 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하셨을 때,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가 떠올려야 했던 본문이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환상을 보았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겔47:1)
그 물은 흘러갈수록 깊어져 헤엄칠 만한 강이 되고, 사해에 이르러 죽은 물을 되살린다.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47:9). 그리고 강가에는 나무들이 자란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겔47:12)
(성전 물의 환상 전체: 겔47:1–12)
성전에서 흘러나와 죽은 곳을 살리는 물, 그 강가에 자라는 열매 맺는 나무들. 이 환상은 계시록 22장에서 거의 그대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성전이 누구인지를 가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미 밝혔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19–21)
예수 자신이 참 성전이시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본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요한복음 안에서 어디에서 흘러나오는가? 초막절에 그분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고, 그 생수는 성령을 가리킨다고 요한은 설명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성전된 그의 육체가 찔렸을 때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제 그 흐름을 한 줄로 이어 보자. 출애굽의 피와 물. 광야의 쳐진 반석과 흐르는 물. 성막의 제단과 물두멍. 에스겔 36장의 맑은 물과 새 영. 에스겔 47장의 성전에서 흐르는 물. 스가랴의 찔린 자와 열린 샘. 요한복음 2장의 참 성전이신 예수. 요한복음 7장의 생수와 성령. 요한복음 19장의 찔린 몸에서 흐르는 피와 물. 그리고 이 흐름은 계시록 22장,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강에서 끝날 것이다.
이 연결 가운데 어떤 것은 요한이 직접 인용으로 제시하고(스가랴 12:10, 출애굽기 12:46), 어떤 것은 요한복음 자신의 내적 연결이 가리키며(2장의 성전, 7장의 생수), 어떤 것은 정경 전체를 함께 읽을 때 드러나는 성경신학적 종합이다(성막의 구조, 에스겔 47장). 이 글은 그 층위를 뭉개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층위를 구별한다는 것이 연결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한 이야기라면, 요한이 증언한 찔린 옆구리의 피와 물이 이 긴 흐름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교부들의 읽기
교회는 일찍부터 이 피와 물을 성례와 연결해 읽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제120강)에서, 복음서 기자가 옆구리를 "찔렀다"가 아니라 "열었다"고 썼다는 점에 주목하여(그가 읽던 라틴어 역본의 표현), 거기서 생명의 문이 열리고 교회의 성례들이 흘러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첫 아담이 잠든 사이 그 옆구리에서 하와가 지어졌듯이, 마지막 아담이 십자가에서 잠드신 사이 그 옆구리에서 교회가 지어졌다고 보았다(요지). 크리소스톰은 세례 교육 강론에서 물은 세례를, 피는 성찬의 신비를 가리킨다고 가르쳤고, 역시 하와와 교회의 대비를 사용했다(요지). 암브로시우스는 『성령론』(De Spiritu Sancto) III.11.68에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은 씻기 위함이요 피는 속량의 값이라는 취지로 말했다(요지).[^24]
요한복음 19:34의 "옆구리"(πλευρά, 플레우라)가 칠십인역 창세기 2:21–22에서 하와를 지으신 아담의 "갈빗대"와 같은 단어라는 것은, 교부들의 이 신부론적 읽기에 어휘적 발판을 준다.[^c] 신랑과 신부의 주제는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함께 다시 불러낼 것이다.
라틴 교회는 부활절 절기에 "내가 보니 성전 오른편에서 물이 흘러나오더라"(Vidi aquam egredientem de templo, a latere dextro)라고 노래하는 교송을 불러 왔다. 이 노래가 직접 노래하는 것은 에스겔 47장의 성전 물이다. 다만 교회는 이 교송을 오래도록 요한복음 19장의 찔린 옆구리와 함께 읽고 묵상해 왔다. 노래의 본문과 교회의 묵상은 구별해야 하지만, 둘이 오래 함께 불려 왔다는 사실은 기억할 만하다.[^25]
개혁주의의 절제와 확신
그러나 여기서 해석의 절제가 필요하다. 요한이 요한복음 19:34에서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를 직접 정의하거나 제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한의 일차적 강조는 실제 죽음에 대한 증언과 성경의 성취다. 교부들의 성례적 읽기는 이 본문이 품은 정경적 울림을 교회의 삶 안에서 묵상한 전통이다.
칼빈은 이 전통을 버리지도 않고 과장하지도 않는 길을 보여 준다. 그는 요한복음 19:34를 주석하며, 피와 물이 율법 아래 옛 백성이 받았던 씻음과 속죄의 두 은혜를 가리키며, 요한은 그 두 은혜의 성취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선언하고 이 장면을 그 사실의 가시적 표지로 제시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남기신 성례들도 같은 목적을 갖는다고 했다. 세례는 새 생명 안에서의 영혼의 정결과 성화를 가리키고, 성찬은 완전한 속죄의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칼빈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례들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왔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세례와 성찬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옆구리로 인도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그 샘에서 그것들이 나타내는 바를 길어 올릴 때, 그때 우리는 참으로 더러움에서 씻기고 거룩한 삶으로 새로워지며 하나님 앞에서 속량된 자로 산다(요지). 『기독교강요』 제4권 14장에서도 칼빈은 같은 본문을 인용하며, 물로는 씻음이, 피로는 속죄가 표상되며,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옆구리를 우리 성례의 샘이라고 부른 것은 옳다고 말했다(요지).[^26]
칼빈의 이 문장들은 개혁주의 성례론의 핵심을 보여 준다. 성례가 우리를 성례 자체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옆구리로 인도"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 샘에서 길어 올린다는 것. 성례는 그 자체가 샘이 아니다. 샘은 그리스도시다. 성례는 우리를 그 샘으로 데려가는 표이며, 믿는 자에게 그 샘의 물이 참으로 자기 것임을 확증하는 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성례를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와 인"이라 부를 때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요한복음 19:34의 피와 물은 두 성례의 정의가 아니라 두 성례가 가리키는 실체, 곧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보여 준다. 속죄의 피와 정결의 물, 그리고 그 둘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성령. 성례는 그 완성된 사역을 가리키고 인친다. 그리고 그 사역은 이미 "다 이루어졌다."
우리가 마시는 물의 근원
이제 여기까지 따라온 두 개의 물줄기가 한 곳에서 만난다. 하나는 잔의 물줄기였다.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건넨 축복의 잔, 겟세마네에서 아버지께 받으신 저주의 잔, 골고다에서 병사들에게 받으신 신 포도주. 그리고 "다 이루었다."
다른 하나는 물의 물줄기였다. 광야의 목마른 백성과 쳐진 반석, 야곱의 우물가에서 목마르셨던 분과 "그런 물을 내게 주사"라고 청한 여인, 초막절에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신 분, 그리고 십자가 위의 "내가 목마르다." 그리고 찔린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와 물.
두 물줄기는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우리가 마시는 모든 것, 곧 축복의 잔과 생수와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마시신 잔과 그리스도께서 먼저 겪으신 목마름에서 흘러나온다. 반석이 쳐졌기 때문에 물이 흐른다. 목마른 이가 목마르셨기 때문에 목마른 자가 마신다. 저주의 잔이 비워졌기 때문에 축복의 잔이 채워진다. 이것이 이 후속편의 두 번째 명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고 마실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죽음과 저주의 잔을 마시셨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리스도의 고난이 다 이루어졌다면, 무엇이 "남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잠들어 있던 세베대의 두 아들,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그리스도께서 홀로 마셔야 했던 잔이 있다면, 왜 그분은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말씀하셨는가?
제3부는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3부. 너희도 내 잔을 마시리라
— 교회의 잔과 언약의 식탁
앞에서 우리는 중보자가 홀로 마신 잔을 보았다. 겟세마네에서 아버지께 받으신 잔, 골고다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시고 신 포도주를 받으신 뒤 "다 이루었다"로 끝난 그 잔. 그 잔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마신 잔이었고, 그 완성에는 아무것도 더할 수 없다. 이제 질문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바울은 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말했는가?
12.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 골로새서 1:24
충돌처럼 보이는 두 문장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이 문장을 요한복음 19:30 옆에 놓으면 표면적으로는 충돌처럼 보인다. 한쪽은 "다 이루었다"고 하고, 다른 쪽은 "남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한 것이 있어서 바울이 그것을 채워야 한다는 말인가?
교회사에서 이 구절은 실제로 그렇게 오해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종교개혁 당시 이 구절은 성인들의 공로가 그리스도의 공로와 함께 "교회의 보고(寶庫)"를 이루고, 교회가 그 보고에서 형벌의 사면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면벌부 체계를 뒷받침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로 쓰였다. 개혁자들이 이 구절 앞에서 긴장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공정을 위해 덧붙이자면, 로마 가톨릭 신학도 그리스도의 수난이 속죄에 완전하고 무한히 충분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논쟁의 초점은 그 충분성 자체라기보다, 신자와 성인들의 "보속"(satisfactio)이 형벌의 사면과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있었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보기에 이 구절을 그런 방향으로 끌어가는 것은 바울의 논지를 뒤집는 일이었다.
바울 자신의 문맥
골로새서 1:24를 바르게 읽는 첫걸음은, 바울이 바로 앞에서 무엇을 말했는지를 보는 것이다. 몇 절 앞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선언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1:20) 만물을 화목하게 하셨고, 멀리 떠나 원수가 되었던 골로새 교인들을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1:22) 흠 없는 자로 세우려 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더 강하게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2:13)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2:14). (함께 볼 문맥: 골 1:19–23; 2:11–15)
"화평을 이루사", "화목하게 하사", "모든 죄를 사하시고", "증서를 지우시고." 바울은 과거에 완결된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한다. 같은 편지 안에서 바울이 1:20–22에서는 속죄의 완성을 선언하고, 1:24에서는 속죄의 부족을 인정한다고 읽는 것은 바울을 스스로 모순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1:24의 "남은 고난"은 1:20–22의 "이루신" 화목과 다른 차원의 무엇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단어가 말하는 것
바울이 쓴 단어들도 그 차원을 가리킨다. "고난"으로 번역된 말은 틀립시스(θλῖψις)의 복수형 틀립세온(θλίψεων)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지적해 왔듯이,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수난을 특정하는 전문용어로 사용되지 않으며, 주로 신자와 교회가 이 세상에서 겪는 환난, 압박, 박해를 가리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θλῖψις)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채우노라"(ἀνταναπληρῶ, 안타나플레로)는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복합동사로, "내 몫으로, 차례대로 채운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그리고 그 고난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ὑπὲρ τοῦ σώματος αὐτοῦ, 휘페르 투 소마토스 아우투) 받는 것이다. 바울은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고난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교회를 위하여, 곧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기 위하여 고난받는다고 말한다. 바로 다음 절에서 그는 자기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골1:25)이라고 설명한다.
머리와 몸
그렇다면 그 고난이 왜 "그리스도의" 고난인가? 바울 자신이 그 답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이렇게 물으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9:4)
사울은 그리스도를 박해한 적이 없다. 그가 박해한 것은 교회였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박해한다고 하신다. 머리와 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행9:16)
교회가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 안에서 당하시는 고난이다. 이것이 골로새서 1:24의 "그리스도의 고난"이 뜻하는 바다.
칼빈은 골로새서 1:24를 주석하며 바로 이 방향에서 읽는다. 그는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속죄에 부족함이 있어 사람이 보충한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을 강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인격 안에서 단번에 고난을 받으셨듯이, 그의 지체들 안에서 날마다 고난을 받으시며, 이런 방식으로 아버지께서 그의 몸을 위해 작정하신 고난이 채워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요지). 이어서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려, 바울이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것은 속량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인다(요지).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구절을 다루며, 그것은 이미 하늘에 계셔서 더 이상 그런 고난을 받지 않으시는 머리에 관한 말이 아니라, 머리와 함께 온전한 그리스도를 이루는 몸, 곧 교회에 관한 말이라고 풀었다(요지).[^27]
두 차원의 고난
그러므로 여기서 개혁주의의 핵심 구분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두 차원이 있다.
첫째는 대속적이고 속죄적인 고난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시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고난. 겟세마네에서 아버지께 받으신 잔, 골고다에서 "다 이루었다"로 끝난 그 고난.
둘째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가 그의 형상을 따라 참여하는 고난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역사 속에서 복음을 위해, 사랑을 위해, 증언을 위해,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받는 고난.
첫째는 공유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신다. "다 이루었다." 여기에 바울도, 순교자도, 교회도 단 한 방울을 보탤 수 없다. 이 고난에는 "남은" 것이 없다.
둘째는 공유된다. 신약은 이 참여의 고난을 거듭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함께 볼 본문: 벧전4:13; 롬8:17; 고후1:5)
이 고난에는 "남은" 것이 있다. 교회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이 아직 땅끝까지 가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몸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 몸이 자라는 동안, 몸은 머리가 걸으신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1:24의 구조는 이렇게 정리된다.
미완성된 속죄 → 인간의 보충 (아니다)
완성된 속죄 → 교회의 참여 (그렇다)
바울이 "남은 고난"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미완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속죄가 완성되지 않았다면 바울의 고난은 두려움 속에서 공로를 쌓는 고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속죄가 완성되었기에 바울은 "기뻐하고" 고난받는다. 그의 고난은 구원을 얻기 위한 값이 아니라, 이미 얻은 구원이 교회 안에서 드러나는 모양이다.
참여는 대체가 아니다
앞선 「말씀의 섭취」 연작은 "참여"라는 말을 중심에 두었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참여"라는 말을 더 정밀하게 다듬어야 한다.
참여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구속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합한다고 해서 중보자의 독특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제한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존 머레이는 『구속의 성취와 적용』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론 전체의 중심 진리라고 불렀다. 선택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모든 국면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요지). 그러나 머레이는 같은 책의 전반부 전체를 "구속의 성취", 곧 그리스도께서 홀로 이루신 사역에 할애했다. 성취(accomplished)와 적용(applied)의 구분. 이 구분을 한 단계 더 정밀하게 말하면 이렇다. 그리스도께서 홀로 구속을 성취하시고, 성령께서 그 완성된 구속을 신자에게 적용하시며,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그 유익에 참여한다. 이 순서가 뒤집히면 참여는 협력이 되고, 협력은 공로가 된다.[^28]
이것을 이 후속편의 언어로 말하면 이렇다. 먹음의 신학은 참여다. 마심의 신학도 참여다. 그러나 그 참여 아래에는 한 번의 대리(代理)가 놓여 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리를 취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생명에 참여한다. 대리가 참여의 근거다. 그분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 마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함께 마신다.
그리스도만 속죄하신다. 교회는 그 속죄에 참여한다. 그리스도만 저주의 잔을 대속적으로 마시셨다. 교회는 그분의 뒤를 따라 제자도의 잔을 마신다.
13.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영광을 구한 형제
이제 앞에서 겟세마네에 잠들어 있던 두 형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마태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0–23)
마가는 같은 대화를 잔과 세례의 두 이미지로 기록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10:38). 그리고 주님은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10:39)라고 답하신다. (전체 대화: 막10:35–45) 이 대화가 놓인 자리를 보면 그 아이러니가 선명해진다. 바로 앞 단락에서 예수께서는 세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셨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이방인들에게 조롱과 채찍질을 당한 뒤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20:19)는 예고였다(전체: 마20:17–19). 주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보좌를 구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주의 나라에서" 좌우편을 구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왕으로 "영광"을 얻으시는 자리에서 그 좌우편을 차지한 사람들이 누구였던가?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마27:38)
마태의 머리에 씌워진 죄패는 "유대인의 왕 예수"(마 27:37)였다. 그 왕의 좌우편에 선 것은 두 강도였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몰랐다. 그 "영광"의 좌우편은 십자가였다.
할 수 있나이다
"할 수 있나이다"(δυνάμεθα, 뒤나메타). 이 대답은 용감했지만 무지했다. 그들은 몇 주 뒤 겟세마네에서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했고, 체포의 순간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56). "할 수 있나이다"라고 했던 사람들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대답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그 말씀은 이루어졌다.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가 되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12:1–2)
그리고 요한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밧모섬에서 자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1:9)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 여기서 "환난"은 골로새서 1:24와 같은 단어, 틀립시스(θλῖψις)다. 요한은 "주의 좌편"을 구했던 젊은 날의 자신을 기억했을까. 그는 끝내 좌우편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이 약속하신 "내 잔"이었다.
본문 안에 이미 있는 구별
그런데 이 대화가 놓인 마태복음 20장은, 그 단락 안에서 이미 이 글이 필요로 하는 구별을 스스로 보여 준다. 두 형제의 요청에 나머지 열 제자가 분개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 섬김에 대해 가르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6–28)
이 문단 안에는 두 가지가 나란히 있다. 하나는 제자들이 따라야 할 길이다. 섬기는 자, 종이 되는 길. 이것은 "인자가 온 것은 ... 섬기려 하고"와 같은 모양이다. 제자는 스승의 섬김을 본받는다.
그러나 문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λύτρον, 뤼트론)은 몸값, 속전을 뜻한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ἀντὶ πολλῶν, 안티 폴론)의 안티는 "대신하여"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제자들은 섬김을 본받으라는 명령을 받지만, 대속물이 되라는 명령은 받지 않는다. 대속물은 인자 한 분뿐이다.
그러니 마태복음 20장은 한 단락 안에서 두 잔을 구별한다. 제자들이 "과연 마실" 잔(20:23)이 있고, 인자만이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주시는 목숨(20:28)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에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περὶ πολλῶν) 흘리는 바 나의 피"(26:28)라는 말씀이 이 "많은 사람의 대속물"을 다시 불러낸다.
두 잔을 혼동하지 말 것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잔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제자가 마실 수 없는 잔. 대속적 진노와 저주의 잔이다.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의 손에서 건네진 잔, 오직 중보자만 마시는 잔. 이 잔 앞에서 세베대의 아들들은 잠들어 있었고,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잔이 아니었다.
둘째, 제자가 마시는 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을 따라가는 제자도의 고난의 잔이다. 야고보의 칼, 요한의 밧모섬, 바울의 감옥. 이 잔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약속된 잔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마신 잔"과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가 마시는 잔"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첫째를 둘째로 끌어내리면 십자가는 단지 가장 위대한 순교의 모범이 되고, 복음은 도덕이 된다. 둘째를 첫째로 끌어올리면 신자의 고난이 속죄의 값이 되고, 은혜는 공로가 된다. 두 잔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제자의 잔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잔에서 흘러나오고, 그 잔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제자도를 말씀하실 때의 표현도 이 구별을 섬세하게 보여 준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
"자기 십자가"(τὸν σταυρὸν αὐτοῦ, 톤 스타우론 아우투). 주님은 "내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 않으신다. 제자는 스승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의 십자가 나무를 대신 짊어졌지만(마27:32), 그 위에 못 박힌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대속의 십자가는 그리스도만 지신다.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른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제자들이 마실 잔을 "내 잔"이라 부르신다. 그 잔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마시는 잔이기 때문이다. 제자의 십자가는 제자의 것이지만, 그 모양은 그리스도를 닮는다.
증언하는 십자가
골로새서 1:24와 마태복음 20:23을 함께 놓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이룬다. 우리의 십자가는 그 구원을 증언한다.
그의 고난은 속죄한다. 우리의 고난은 속죄하지 않는다.
우리의 고난은 완성된 속죄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오는 제자의 형상이다.
그리고 이 구별은 성찬의 신학에도 결정적이다. 교회가 성찬에서 마시는 것은 대속의 잔이 아니다. 그 잔은 이미 비워졌다. 교회가 성찬에서 마시는 것은 대속의 열매로 채워진 축복의 잔이다. 그리고 그 축복의 잔을 마신 교회는 성찬상에서 일어나 세상으로 나가 제자의 잔을 마신다. 축복의 잔과 제자의 잔. 교회는 이 두 잔을 함께 마시며 "그 날"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나 두 잔 가운데 어느 것도 그리스도께서 홀로 마신 그 잔은 아니다. 그 사이의 경계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경계가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교회의 잔은 두려움의 잔이 아니라 기쁨의 잔이 될 수 있다.
14. 참 포도나무
다락방의 마지막 가르침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그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공관복음이 전하는 그 말씀과 같은 밤, 요한복음은 주님이 다락방을 떠나시며 하신 긴 가르침을 기록한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14:31)는 말씀 바로 다음에, 주님은 자신을 이렇게 부르신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15:1)
농부이신 아버지는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하시고 열매 맺는 가지를 깨끗하게 하신다(15:2).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15:3)라고 하신 뒤, 이 장의 중심 명령을 주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4–5)
포도나무의 비유 전체는 요한복음 15:1–8을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서로 다른 전승이므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는 말씀과 "나는 참포도나무"라는 말씀을 한 문맥으로 합치는 것은 정경을 함께 읽는 독자의 일이다. 그러나 그 독자에게는 이 겹침이 잊히지 않는다. 그 밤, 포도나무의 열매를 "그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분이 스스로 참 포도나무이셨다.
앞선 연작의 첫 글, 「이 말씀을 먹으라!」도 이 장을 지나갔다. 그때 우리의 초점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에 있었다. 말씀이 사람 안에 거하는 것, 말씀을 먹는 것. 이번에 우리의 초점은 포도나무 자체, 그리고 포도나무가 맺는 열매와 그 열매에서 나오는 잔에 있다.
크래쇼의 『거룩한 경구집』에는 가나의 경구만이 아니라 요한복음 15:1을 소재로 한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In Christum Vitem)라는 경구도 실려 있다. 가나의 포도주를 노래한 시인이 참 포도나무도 노래했다는 것은, 17세기의 한 시인의 눈에도 이 두 장면이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는 작은 증거다.[^29]
실패한 포도나무
"참"포도나무라는 말은 비교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참되지 못한 포도나무는 무엇이었는가? 구약은 이스라엘을 거듭 포도나무, 포도원으로 불렀다. 아삽의 시는 출애굽을 포도나무 이식으로 노래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시80:8)
그러나 같은 시편은 그 포도나무가 짓밟히고 불탄 뒤의 기도로 이어진다. 시인은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시80:14)라고 부르짖은 뒤 이렇게 기도한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시80:17)
포도나무를 위한 기도가 "인자"를 위한 기도로 이어진다. 시편 80편 안에서 포도나무와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인자"는 서로를 비춘다. 요한복음에서 스스로를 "인자"라 부르시는 분이 "나는 참포도나무"라고 하실 때, 이 시편이 그 배경의 한 자리에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사야는 포도원의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사랑의 노래로 시작해 심판의 노래로 끝난다. 사랑하는 이가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일구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으나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5:2). 노래는 그 포도원이 누구인지를 밝히며 끝난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5:7)
(포도원의 노래 전체: 사5:1–7)
히브리어의 말놀이가 이 노래의 아픔을 더한다. 하나님은 "정의"(미쉬파트, מִשְׁפָּט)를 바라셨는데 "포학"(미스파흐, מִשְׂפָּח)이 나왔고, "공의"(체다카, צְדָקָה)를 바라셨는데 "부르짖음"(체아카, צְעָקָה)이 나왔다. 소리는 비슷하지만 열매는 정반대다.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는데 들포도가 열렸다. 예레미야도 같은 탄식을 한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렘2:21)
칠십인역은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이 원래 심긴 포도나무를 "참된"(ἀληθινή, 알레티네) 포도나무라 부른다. 요한복음 15:1의 "참포도나무"(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헤 암펠로스 헤 알레티네)와 같은 형용사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참된" 포도나무로 심으셨지만, 그 포도나무는 참되지 못한 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에서 한 분이 일어나 말씀하신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에스겔은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가 목재로도 쓸모없어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겔15:4)이라고 했다. 요한복음 15:6의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는 이 선지서의 언어와 이어져 있다. 그리고 공관복음의 포도원 농부 비유(마21:33–43)에서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고, 농부들은 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인다.
언약 백성의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므로 "나는 참포도나무요"는 단순히 아름다운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가 이루지 못한 소명, 곧 하나님께 좋은 열매를 맺어 드리는 언약 백성의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선언이다. 마태가 호세아의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 호11:1)를 예수께 적용할 때 보여 주는 것과 같은 논리다. 이스라엘이 걸었던 길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걸으시되, 이스라엘이 실패한 곳에서 신실하게 걸으신다. 시편 80편이 "애굽에서 가져다" 심은 포도나무를 노래했다면, 신약은 애굽에서 불러낸 아들을 참 포도나무로 고백한다.
그러나 참 포도나무는 홀로 서 있지 않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이스라엘의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만 열매를 맺으시고 우리는 구경꾼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에게 붙어 있는 가지들이 그분의 생명으로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문장은 앞에서 인용한 예레미야 2:13, 곧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에 대한 가장 짧은 대답이다. 가지는 스스로 수액을 만들지 않는다. 포도나무에서 받는다.
열매와 잔
그렇다면 가지가 맺는 열매는 무엇인가? 요한복음 15장은 곧바로 그 대답을 준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2–13)
열매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곧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다. 포도나무이신 분이 자기 목숨을 버리신다. 그리고 가지들은 그 사랑에서 수액을 받아 같은 모양의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앞의 장에서 본 제자의 잔과 같은 구조다. 포도나무는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고, 가지는 그 생명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가지의 열매는 포도나무의 희생을 보충하지 않는다. 그 희생에서 흘러나온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도주를 "포도의 피"라고 부르는 관용 표현이 있다. 야곱은 유다를 축복하며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창49:11)라고 했는데, 여기서 "포도즙"은 히브리어로 "포도의 피"(담-아나빔, דַּם־עֲנָבִים)다. 모세의 노래도 "포도즙의 붉은 술"(신32:14)을 "포도의 피"(담-에나브)로 부른다. 이것은 관용어일 뿐이므로 여기서 알레고리를 끌어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관용어는 적어도,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담은 잔을 들어 "이것은 ... 나의 피"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이 성경의 언어 안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들렸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리고 유다 지파에 대한 그 축복, 곧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라는 축복을 받은 유다의 후손이 누구인지를 아는 독자에게는, 이 관용어가 뒤에서 다룰 계시록 19장의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계19:13)라는 장면과 함께 조용히 울린다.
모든 이미지는 연합으로 모인다
이제 이 글이 따라온 이미지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자.
생수. 그것은 그리스도께 "와서 마시는" 자에게 주어지고,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
포도나무.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가지는 그분에게 붙어 있을 때만 산다.
열매. 그것은 가지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의 생명이 가지를 통해 맺는 것이다.
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며 건네시는 것이며, 그 안에 그분의 피, 곧 그분의 생명과 죽음의 유익이 담겨 있다.
이 네 이미지는 모두 한 곳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생수를 마신다는 것,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것, 열매를 맺는다는 것, 잔을 마신다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서로 다른 얼굴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6:56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와 요한복음 15:4의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같은 동사, 메노(μένω, 거하다)로 묶여 있다. 먹고 마심의 목적은 거함이다.
15. 출애굽기 24장 — 피의 목적은 교제
산 아래의 피
앞에서 우리는 주님이 잔을 "언약의 피"라 부르셨을 때 그 말씀이 출애굽기 24장을 불러낸다는 것을 보았고, 그 장면을 따로 살피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킬 때다. 이 장은 이 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약 본문 가운데 하나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십계명과 언약서의 율례들을 주셨다(출 20–23장). 그리고 24장에서 그 언약이 비준된다. 모세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율례를 백성에게 전했고, 백성은 한 소리로 준행하겠다고 응답했다(출24:3). 모세는 그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운 뒤,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했다. 그리고 피의 절반은 양푼에 담고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24:4–6). 그 다음의 두 절이 이 장면의 심장이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24:7–8)
(전체 문맥: 출24:3–11)
이 장면의 순서를 천천히 보자. 먼저 말씀이 있다.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기록하고, 낭독한다. 그 다음에 제단과 제사가 있다. 번제와 화목제. 그 다음에 피가 있다. 피의 반은 제단에, 반은 백성에게. 하나님과 백성이 한 피로 묶인다. 그리고 선언이 있다. "이는 ... 언약의 피니라."
앞선 연작의 독자라면 이 순서에서 한 가지를 알아볼 것이다. 말씀이 먼저 낭독되고, 그 다음에 피가 뿌려진다. 말씀과 의식은 경쟁하지 않는다. 의식은 말씀을 인치고, 말씀은 의식의 의미를 밝힌다. 개혁주의가 성례를 언제나 말씀과 함께, 말씀 아래에서 이해해 온 것은 이 오랜 언약의 문법과 맞닿아 있다. 성례는 말씀 없이 홀로 서지 않는다. 시내산에서도 그랬다.
산 위의 식탁
그런데 출애굽기 24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피가 뿌려진 뒤,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 가운데 하나가 이어진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산에 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는데, 그 발 아래는 청옥을 편 듯 하늘같이 청명했다(출24:9–10).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적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24:11)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이 한 문장의 무게를 느끼려면, 같은 책의 뒤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함께 들어야 한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33:20)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 그런데 출애굽기 24장에서 이스라엘의 대표들은 하나님을 "뵙고"(ויֶּחֱזוּ, 바예헤주), 죽지 않고, "먹고 마셨다." 요한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장면에서 그들이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는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본문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그 임재 앞에서 식탁에 앉았다.
그 식사는 아마도 산 아래에서 드린 화목제의 고기였을 것이다. 레위기가 규정하듯이 화목제(셸라밈, שְׁלָמִים)는 번제와 달리 제물의 일부를 드린 자가 먹는 제사였다.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는 것, 그것이 화목제의 본질이었다. 화목제의 이름 자체가 평화, 온전함을 뜻하는 샬롬(שָׁלוֹם)과 같은 어근이다. 그러니 출애굽기 24장의 구조는 이렇다.
말씀 → 피 → 언약 → 하나님의 임재 → 식사와 교제 [^0]
피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식탁으로 이어진다. 제단에 뿌려진 피는 산 위의 식탁을 연다.
피의 목적에 대하여
여기서 이 장의 제목, "피의 목적은 교제"를 조심스럽게 풀어야 한다. 이것을 "피의 유일한 목적은 교제"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가 이루는 일을 여러 언어로 말한다. 속죄, 곧 죄의 값을 치르는 것. 칭의, 곧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선언되는 것. 화목, 곧 원수 되었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 정결, 곧 더러움에서 씻기는 것. 속량, 곧 종 된 자리에서 값을 치르고 풀려나는 것. 연합, 곧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 이 모든 것은 각기 고유한 무게를 가지며, 어느 하나로 다른 것을 흡수해서는 안 된다. 특히 속죄와 칭의의 법정적 차원을 "교제"라는 관계적 언어 속에 녹여 버리는 것은 개혁주의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구속의 유익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다. 속죄는 교제를 위해 죄를 제거하고, 칭의는 교제를 위해 법정의 문을 열며, 화목은 교제를 위해 원수 관계를 끝내고, 정결은 교제를 위해 더러움을 씻고, 연합은 교제를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리게 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3:18)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대신 죽으심의 목적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심이다. 바울도 화목을 말한 뒤 곧바로 그 화목이 여는 기쁨을 말한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5:11)
그리고 요한은 복음 선포의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1: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문답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즐거워함"(enjoy)은 바로 이 교제를 가리킨다. 구속은 사람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출애굽기 24장의 칠십 장로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신 것은, 구속이 무엇을 향하는지를 구약의 한가운데서 미리 보여 준 장면이다.[^30]
나답과 아비후
그러나 출애굽기 24장의 식탁에는 그림자도 있다. 그 산에 올라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신 사람들 가운데 나답과 아비후가 있었다. 그들은 훗날 여호와께서 명하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는다(레10:1–2). 하나님의 식탁에 앉았다는 사실이 그들을 지켜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은 앞에서 본 고린도전서 10:5, 곧 광야에서 모두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나 다수가 멸망했다는 경고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찬에 대해서도 같은 경고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11:27). 언약의 식탁은 은혜의 식탁이지만, 거룩한 식탁이다. 그 식탁에 앉는 것은 믿음으로, 경외함으로 앉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다락방으로, 다락방에서 하늘의 시온으로
이제 출애굽기 24장과 마지막 만찬을 나란히 놓아 보자. 시내산에서 모세는 "이는 ... 언약의 피니라"고 선언했고, 다락방에서 예수께서는 "이것은 ...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다. 시내산에서는 열두 지파를 따라 열두 기둥이 세워졌고, 다락방에는 열두 제자가 앉아 있었다. 시내산에서는 피가 뿌려진 뒤 대표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다락방에서는 잔이 돌려진 뒤 주님이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을 약속하셨다. 누가는 그 약속을 이렇게 전한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22:29–30)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시내산의 식탁은 다락방의 식탁으로, 다락방의 식탁은 하나님 나라의 식탁으로 이어진다. 히브리서는 시내산의 언약 비준을 회상하며, 출애굽기 24장에는 기록되지 않은 세부까지 덧붙인다.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히9:18)라고 말한 뒤, 히브리서는 이렇게 잇는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히9:19–20)
히브리서가 기억하는 시내산의 의식에는 피와 함께 물이 있고, 우슬초가 있다. 이것은 출애굽기 24장 본문 자체에는 없는 세부로, 히브리서가 오경의 다른 정결 의식들을 함께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선 논의를 지나온 독자에게 이 조합은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슬초와 피와 물. 골고다에서 신 포도주는 우슬초에 매어 올려졌고, 찔린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흘렀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그 시내산을 새 언약의 시온과 대조한다. 시내산은 흑암과 폭풍과 두려움의 산이었지만, 새 언약의 백성이 이른 곳은 이렇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12:22–24)
"천만 천사와 ... 모임"으로 번역된 말에는 축제의 총회를 뜻하는 파네귀리스(πανήγυρις)가 들어 있다. 새 언약의 백성은 두려움의 산이 아니라 축제의 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축제의 중심에 "뿌린 피"가 있다. 시내산에서 백성에게 뿌려진 언약의 피는, 이제 새 언약의 중보자의 피로 성취되어 축제의 총회를 연다.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 25:6의 "이 산에서" 베풀어지는 잔치가 여기서 다시 보인다. 시내산의 식탁, 시온의 잔치.
보스와 종말론의 우선성
게할더스 보스는 『바울의 종말론』에서 종말론이 구원론보다 앞선다는 유명한 통찰을 제시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그 앞에 더 높은 목표, 곧 시험을 통과한 뒤 들어갈 확정된 생명의 상태가 놓여 있었으며, 구속은 타락 이후에 그 원래의 종말론적 목표를 향한 길을 다시 여는 것이라는 것이다(요지). 『성경신학』에서 보스는 에덴의 생명나무를 그 더 높고 변하지 않는 생명을 가리키는 성례로 이해했다(요지).[^31]
이 통찰은 출애굽기 24장을 읽는 데 깊은 빛을 비춘다. 구속의 목적은 단지 타락 이전의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 앞에 두셨던 목표, 곧 하나님과의 완성된 교제에 이르는 것이다. 에덴의 생명나무, 시내산의 식탁, 다락방의 잔,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그 한 목표를 향해 서로 다른 구속사의 지점에서 세워진 표지들이다.
다만 여기서 정직하게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출애굽기 24장의 언약 식사와 주의 만찬과 종말론적 잔치를 이렇게 하나의 선으로 잇는 것은 보스가 특정한 문장으로 정식화한 명제라기보다, 보스가 열어 준 방법, 곧 계시의 유기적 진전과 종말론의 우선성이라는 성경신학적 토대 위에서 이 글이 시도하는 종합이다. 보스의 이름으로 그가 하지 않은 말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토대 위에서 이 연결은 자연스럽게 서 있다.
16. 성찬 — 십자가와 혼인잔치 사이의 식사
좌표를 먼저 밝히며
이제 이 모든 흐름이 교회의 현재 안에서 모이는 자리, 곧 성찬에 이르렀다. 앞선 연작에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이 글의 좌표를 먼저 밝혀 둔다. 이 글은 성찬을 개혁파적 복음주의의 자리에서 이해한다. 곧 칼빈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이어지는 개혁파 성찬론의 틀 안에서, 복음주의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려 한다. 다른 전통의 성찬 이해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글이 서 있는 자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축복의 잔, 참여의 잔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루면서 성찬의 본질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고전10:16–17)
"참여함"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다. 교제, 사귐, 함께 나눔. 요한일서 1:3에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할 때 쓰인 바로 그 단어다. 출애굽기 24장이 가리킨 교제, 구속의 모든 유익이 향하는 그 교제가 성찬의 잔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으로 주어진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잔을 떡보다 먼저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고 이 글은 어느 하나를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마심의 신학"을 따라온 이 글에게, 바울이 성찬의 교제를 말하면서 잔을 먼저 들었다는 사실은 반가운 세부다.
앞선 연작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말했다면, 이번 글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레위기가 가르쳤듯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레17:11).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의 죽음, 곧 흘려진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죽음을 통해 주어지는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몸과 피, 떡과 잔은 둘로 나뉜 두 은혜가 아니라 하나의 그리스도, 하나의 언약적 식사다. 성경에서 먹음과 마심은 언제나 함께 생명을 받는 행위였고, 성찬에서 떡과 잔은 함께 하나의 식탁을 이룬다.
바울은 같은 장에서 이 참여의 배타성도 말한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10:21). 잔을 마신다는 것은 언약의 충성을 표하는 일이다. 두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다. 이것은 이 글이 앞에서 본 두 잔의 구별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잔과 제자의 잔은 구별되되 서로 이어져 있지만,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은 서로를 배제한다.
"그가 오실 때까지"
그리고 바울은 다음 장에서 주님께 받은 성찬 제정의 말씀을 전한다. 그는 이것이 "주께 받은 것"(고전11:23)이라고 밝히고,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떼어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11:24) 하신 말씀을 전한 뒤, 잔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5–26)
(제정의 말씀 전체: 고전11:23–26)
"그가 오실 때까지"(ἄχρι οὗ ἔλθῃ, 아크리 후 엘테). 이 표현은 앞에서 우리가 붙들었던 마태복음 26:29의 "그 날까지"(ἕως τῆ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 헤오스 테스 헤메라스 에케이네스)와 짝을 이룬다. 주님은 "그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고, 교회는 "그가 오실 때까지" 마신다. 주님의 기다림과 교회의 기다림이 같은 식탁 위에서 만난다. 주님은 마시지 않으며 기다리시고, 교회는 마시며 기다린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둘은 함께 새 것으로 마실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며 아람어 그대로 남긴 한 마디도 이 기다림의 언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μαράνα θά, 마라나 타, 고전16:22). 초대교회의 문헌 『디다케』는 성찬 기도의 끝에 바로 이 "마라나타"를 두었다(요지). 초대교회는 식탁에서 주님의 오심을 불렀다.[^32]
성찬의 세 시제
그러므로 성찬에는 세 시제가 있다.
과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주의 죽으심을 ...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은 골고다에서 단번에 완성된 사역을 가리킨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여기서 "기념"(ἀνάμνησις, 아남네시스)은 머릿속의 회상 이상이다. 구약에서 유월절은 "기념"(지카론, זִכָּרוֹן)의 절기였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출12:14). 이스라엘은 해마다 유월절을 지키며 출애굽이 자기들의 구원이었음을 고백했다. 개혁주의는 이 "기념"을 그리스도의 제사를 재현하거나 다시 드리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한 추억으로 축소하지도 않는다. 기념은 단번에 이루어진 사역의 유익이 성령에 의해 지금 믿는 자에게 참되게 적용되는 언약의 방식이다.
현재. 교회의 실제 언약적 교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 성찬은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그리고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참되게 교제하는 식사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미래. 하나님 나라의 잔치. "그가 오실 때까지." 성찬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미리 맛보는 식사다. 그리고 그 맛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교회는 "마라나타"를 부른다.
그래서 성찬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식사다. 이미 십자가는 완성되었고, 이미 성령이 부어졌으며, 이미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아직 신랑은 오지 않았고, 아직 눈물은 씻기지 않았으며, 아직 교회는 "새것으로" 마시지 않는다. 성찬의 잔은 가나의 좋은 포도주와 어린양의 혼인잔치 사이에, 십자가의 신 포도주를 기억하며 들려진다.
"단번"과 "마실 때마다"
여기서 고린도전서 11:25–26에 두 번 나오는 작은 단어 하나를 보자. "마실 때마다"(ὁσάκις, 호사키스). 성찬은 반복된다. 교회는 이 잔을 한 번 마시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마실 때마다" 거듭 마신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제사를 "단번에"(ἐφάπαξ, 에파팍스) 드려진 것이라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번이다. 교회의 마심은 거듭된다.
이 두 단어의 대조 안에 개혁주의 성찬론의 핵심이 있다. 반복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받음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다시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마심"의 신학과 이어진다. 물은 마셔도 곧 다시 목마르다. 사람은 생명을 한 번 마시고 저장해 두는 존재가 아니라, 근원께 거듭 나아가 거듭 받아야 하는 존재다. 성찬이 반복된다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계속 의존하는 존재라는 고백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한 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거듭 붙들린다.
단번의 희생, 거듭되는 받음. 이것을 뒤집어 희생을 반복하고 받음을 한 번으로 끝내면, 십자가는 불완전해지고 신앙은 자기 충족이 된다. 성경의 순서는 반대다. 십자가는 "다 이루었고", 교회는 "마실 때마다" 그 이루심에서 받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75문에서 79문에 걸쳐 성찬을 다룬다. 그 문답들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이 글이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이 교리문답의 위로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볼 수 있다.
75문은 성찬이 무엇을 확증하는지를 묻고 이렇게 답한다. 내가 눈으로 주님의 떡이 나를 위해 떼어지고 잔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드려지고 찢기셨으며 그의 피가 나를 위해 흘려졌다. 그리고 내가 목사의 손에서 주님의 떡과 잔을 받아 입으로 맛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과 흘리신 피로 내 영혼을 영생에 이르도록 먹이시고 마시게 하신다(요지).
76문은 앞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믿음으로 그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일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 그의 거룩한 몸과 더욱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요지). "뿐 아니라"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성찬의 먹고 마심은 믿음과 분리되지 않으며, 믿음을 통하여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연합을 함께 말한다. 우르시누스는 요리문답 해설에서 이 점을 풀어,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참되게 연합하고 그의 유익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요지).[^33]
78문은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하는지를 묻고,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 성찬의 떡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지 않으며, 다만 성례의 본질과 용법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린다고 답한다(요지).
그리고 79문.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자기 몸이라, 잔을 자기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 부르셨는가? 그 답의 끝부분은 여기서 다룬 모든 것을 한 문장에 담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보이는 표와 보증을 통해 우리에게 확신시키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이 거룩한 표들을 육신의 입으로 받는 것처럼 참되게 성령의 역사로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마치 우리가 친히 모든 것을 고난받고 하나님께 만족을 드린 것처럼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요지).[^34]
"마치 우리가 친히 고난받고 만족을 드린 것처럼." 이 문장은 골로새서 1:24를 다룬 앞의 논의와 정확히 맞물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난으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이,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우리의 것으로 여겨진다. 대리가 참여의 근거라는 것, 우리가 속죄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 교회가 역사 속에서 받는 고난은 이 만족을 보충하지 않는다. 이 만족은 이미 성찬의 잔 안에서 우리에게 인쳐진다.
칼빈: 이해하기보다 경험하는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권 17장에서 성찬론을 길게 전개한다. 그의 성찬론의 중심에는 성령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있고 우리는 땅에 있다. 그 거리를 무엇이 잇는가? 칼빈은 성령의 비밀한 능력이 우리의 모든 감각을 넘어서며,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성령께서 참으로 결합시키신다고 말한다(요지). 그래서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땅으로 끌어내려지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들어 올려진다고 보았다. 고대 교회의 성찬 예전에서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라고 외치던 전통을 칼빈이 소중히 여긴 것도 이 때문이다(요지).
그리고 칼빈은 이 신비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고백한다. 그는 이 신비가 너무 높아서 자기의 지성으로 파악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자기는 그것을 이해하기보다 차라리 경험한다고 말했다(요지). 개혁주의 성찬론이 흔히 차갑고 합리적인 기념설로 오해되지만, 그 원천인 칼빈에게서 성찬은 이성의 해명보다 앞서는 경외와 경험의 자리였다.[^35]
웨스트민스터: 영적으로, 그러나 참되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27장에서 성례 일반을, 29장에서 성찬을 다룬다. 27장은 성례를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와 인이라 부르고, 모든 성례에는 표와 표가 가리키는 실체 사이에 영적 관계, 곧 성례적 연합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례의 효력은 성례 자체 안에 있는 어떤 능력이나 집례자의 경건이나 의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제정의 말씀에서 온다고 고백한다(27.3, 요지).
29장은 주님이 성찬을 제정하신 목적들을 열거한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드려진 자기 희생을 교회 안에서 영속적으로 기념하는 것, 그 죽음의 모든 유익을 참된 신자들에게 인치는 것,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양육받고 자라게 하는 것, 그들이 그리스도께 마땅히 드려야 할 모든 의무에 더욱 헌신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신자 서로 간의 교제의 띠와 보증이 되게 하는 것이다(요지). 이 목적들 가운데 "모든 의무에 더욱 헌신하게 하는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성찬은 식탁에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이어진다. 이 주제는 이 글의 부록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그리고 29장 7절은 앞선 연작이 거듭 인용했던 그 표현, 합당한 수찬자가 이 성례에서 보이는 요소들을 외적으로 받으면서 동시에 내적으로 믿음으로, 육적으로나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그러나 참되고 실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의 모든 유익을 받아 먹는다고 고백한다(요지).[^36]
두 극단 사이의 좁은 길
그러므로 개혁주의 성찬론은 두 극단 사이의 좁은 길을 걷는다. 한편으로 개혁주의는 성찬을 단순한 기억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성찬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떠올리는 심리적 행사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교회에 자신을 주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다른 한편으로 개혁주의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의 실체로 물질적으로 변한다고 보지 않는다. 떡은 떡이고 포도주는 포도주다. 칼빈이 지적했듯이 주님 자신이 그 잔을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 부르셨다. 또한 개혁주의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아래에" 편재한다는 루터파의 이해와도 구별되는 길을 걸어 왔다.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은 승천하여 하늘에 계시며, 성령께서 믿는 자를 그분과 참되게 연합시키신다.
이 좁은 길의 중심에는 두 단어가 있다. 성령과 믿음.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시고, 믿음이 그 연합을 받는다. 성령이 없으면 성찬은 빈 의식이 되고, 믿음이 없으면 성찬은 심판의 식탁이 된다. 성령과 믿음이 있을 때, 떡과 잔은 그리스도 자신을 참되게 전달하는 표와 인이 된다.
이 후속편의 첫 번째 명제
이제 우리는 이 후속편 전체가 수렴하는 세 명제 가운데 첫 번째를 여기서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두 번째와 세 번째 명제를 말했으니, 이제 셋이 모두 제자리에 놓인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생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마신다.
앞선 연작의 "먹음"과 이번 글의 "마심"은 여기서 한 문장이 된다. 떡과 잔, 몸과 피, 생명의 떡과 생수. 그러나 둘은 결국 한 분을 가리킨다. 말씀도, 떡도, 잔도, 생수도,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 자신에게 데려간다.
이렇게 성찬의 잔까지 따라오고 나면, 이 글은 한 가지 위험 앞에 선다. 가나의 포도주, 다락방의 잔, 겟세마네의 잔, 골고다의 신 포도주, 제자의 잔, 축복의 잔. 성경의 모든 포도주가 이렇게 신학적 의미로 무거워지다 보면, 우리는 포도주라는 것 자체를 신비한 물질로 여기거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잔을 하나의 상징으로 환원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한 구석의 평범한 한 줄이 우리를 붙잡는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딤전5:23)
이 평범한 구절은 왜 이 글에 필요한가? 그리고 이 글이 지금까지 구별해 온 여러 잔들은 마침내 어떻게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되며, 그 모든 잔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이제 그 질문과 함께, 이 글의 제목이 약속한 "그 날"을 향해 가자.
4부. 그 날까지
—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생명수의 강
앞에서 우리는 성찬의 잔 앞에 섰고, 모든 포도주와 모든 잔을 하나의 상징으로 환원할 위험도 보았다. 이제 바울의 지극히 평범한 한 문장으로 그 위험을 바로잡으며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자.
17. 디모데전서 5:23 — 포도주 자체를 신비화하지 말라
목회 서신 한 구석의 한 줄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교회의 질서에 관한 긴 지침을 쓰고 있다. 장로를 세우는 일, 과부를 돌보는 일, 죄를 범한 장로를 책망하는 일. 그 한가운데에서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듯한 한 줄이 끼어든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딤전5:22–23)
이 구절은 교리적 선언도 아니고 예언도 아니다. 몸이 약한 젊은 목회자를 향한 노(老)사도의 실제적인 당부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이 구절은 이 글에 꼭 필요하다.
문맥을 보면 이 당부가 왜 여기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막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고 했다. 디모데는 그 "정결"을 금욕으로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는다. 정결하라는 말이 몸을 해치면서까지 포도주를 끊으라는 뜻은 아니다. 디모데가 왜 물만 마시고 있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다. 절제에 대한 개인적 결단이었을 수도 있고, 에베소 교회를 흔들던 거짓 교사들의 금욕주의와 구별되려는 조심이었을 수도 있으며, 말로 다른 이들을 책망해야 하는 목회자로서 술과 말을 섞지 않으려는 지혜 전통을 따른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해석자들 사이에 여러 제안이 있다. 그러나 바울의 결론은 분명하다.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37] 같은 편지의 앞부분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딤전4:3) 가르칠 것을 경고하며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앞선 「말씀의 섭취」 연작의 독자라면 이 마지막 구절에서 멈출 것이다. 음식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금식이나 금욕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다. 음식은 말씀 아래에서, 감사함으로 받을 때 거룩하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주석하며, 디모데가 지나친 금욕으로 건강을 해칠 정도였기에 바울이 건강을 위해 포도주를 소량 쓰도록 허락한 것이라고 보았고, "조금씩"이라는 말에서 절제의 기준을 읽었다(요지). 바울은 디모데의 절제를 꾸짖지 않는다. 다만 절제가 몸을 무너뜨리는 금욕이 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준다.[^38]
물론 같은 편지는 감독과 집사의 자격으로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딤전3:3),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딤전3:8)를 요구한다. 잠언은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잠20:1)고 경고하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이렇게 명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엡 5:18)
이 대조는 이 글에게 특히 흥미롭다. 포도주에 취하는 것 대신 성령으로 충만하라. 앞에서 우리는 요한이 성령을 "생수"라 불렀다는 것을 보았다. 사람을 참으로 채우는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성령이다. 그러나 이 경고들은 포도주를 악한 물질로 규정하지 않는다. 경고의 대상은 포도주가 아니라 취함이고, 방탕이고, 사람을 지배하는 탐닉이다.
구약에는 포도주를 끊는 것이 특별한 헌신의 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나실인은 서원 기간 동안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않았고(민6:3–4), 레갑 족속은 조상의 명령을 따라 포도주를 마시지 않음으로 순종의 모범이 되었다(렘35장). 성경은 이런 자발적 절제를 존중한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신자에게 요구되는 거룩의 보편적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나실인의 서원은 기한이 있는 특별한 헌신이었고, 그 기한이 끝나면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민6:20).
포도주는 한 가지 상징이 아니다
그러면 이 평범한 구절이 이 글에 왜 중요한가? 그것은 성경의 모든 포도주를 하나의 상징으로 억지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균형추다. 이 글에서 만난 포도주들을 떠올려 보면, 포도주는 문맥에 따라 전혀 다른 기능을 가졌다.
포도주는 창조의 선물이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시104:15).
포도주는 잔치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떨어졌다가 넘치도록 다시 채워진 포도주.
포도주는 기쁨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삿9:13).
포도주는 약이다. 디모데의 약한 위장을 위한 포도주, 그리고 강도 만난 자의 상처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부은 "기름과 포도주"(눅10:34).
포도주는 언약의 표지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포도주는 축복이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며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27:28)라고 했다.
포도주는 심판이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시75:8).
그리고 포도주는 고난이다. 겟세마네의 잔, 골고다의 신 포도주, 제자의 잔.
이 여덟 가지 얼굴은 서로 다르다. 가나의 포도주를 곧바로 성찬의 포도주로 읽거나, 디모데의 포도주를 언약의 상징으로 읽거나, 시편 75편의 진노의 포도주를 가나의 기쁨과 한데 섞는 것은 본문을 존중하는 읽기가 아니다. 각 포도주는 먼저 자기 문맥 안에서 읽혀야 한다. 그 다음에야 정경 전체 안에서 그 포도주들이 서로 어떻게 울리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을 수 있다. 이 글이 가나와 골고다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잇는 선을 그을 때마다, 그 선이 요한복음과 계시록의 본문들이 스스로 가리키는 방향 위에 있어야 한다고 거듭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포도주는 악하지도, 신비하지도 않다
디모데전서 5:23은 또 하나의 사실을 보여 준다. 포도주라는 물질 자체는 악하지도 않고, 특별히 신비한 물질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피조물이며, 어떤 날에는 잔치의 기쁨이 되고, 어떤 날에는 아픈 위장을 위한 약이 된다.
이것은 성찬의 신학에도 중요하다. 성찬의 잔이 거룩한 것은 포도주라는 물질 안에 어떤 신비한 힘이 내재해 있어서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장 3절은, 바르게 사용된 성례 안에서 또는 성례에 의해 제시되는 은혜가 성례 안에 있는 어떤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성례의 효력은 집례자의 경건이나 의도에 달려 있지 않고 성령의 역사와 제정의 말씀, 곧 그 사용을 허락하는 명령과 합당한 수찬자에게 주시는 유익의 약속을 담은 말씀에 달려 있다고 고백한다(요지). 그러나 이것이 외적 요소가 아무래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외적 요소와 함께 주어지며, 같은 신앙고백 29장은 주님께서 이 규례에서 떡과 포도주를 성찬의 요소로 정하셨음을 명시한다(29.3, 29.5 요지). 요소 자체에 내재적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요소를 제정의 말씀으로 구별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가볍게 여겨질 수 없다. 오늘날 교회가 성찬에 포도주를 쓰느냐 포도즙을 쓰느냐 하는 현대의 실천적 논쟁 자체를 이 글은 판정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성찬의 은혜가 요소에 내재한 힘이 아니라 제정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성찬의 잔도 하나님이 지으신 선물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거룩한 용도로 구별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할 뿐이다.[^39]
그러므로 앞에서 확인했던 것이 여기서 다시 확인된다. 마태복음 26:29를 "앞으로 포도 성분이 들어간 액체는 절대로 마시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멈추신 것은 포도라는 물질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나누던 식탁 교제였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시작하실 것도 물질이 아니라 교제, 곧 "너희와 함께" 새것으로 마시는 식탁이다.
18. 네 종류의 잔
잔들을 정리하며
이제 이 글이 따라온 여러 잔들을 한자리에 모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여 이 글은 "네 종류의 잔"을 제안한다. 미리 밝혀 두자면, 넷이라는 숫자는 유월절 식사의 네 잔 전통에서 끌어낸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 전통의 1세기 형태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 글은 그런 숫자의 대응에 신학을 걸지 않는다. 이 넷은 복음서와 서신서가 말하는 잔들을 그 기능과 마시는 사람에 따라 구별해 본 성경신학적 정리다.[^40]
첫째, 언약 제정의 잔.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잔이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잔은 새 언약을 세우고, 그 언약의 복을 약속하며, 그 복이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질 것을 선언한다.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고, 받는 이는 제자들이다.
둘째, 언약 저주의 잔.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홀로 담당하신 잔이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잔은 구약이 여호와의 손에 있는 잔(시75:8), "분노의 잔"(사51:17), "진노의 술잔"(렘25:15)이라 불렀던 바로 그 잔이며, 언약의 저주의 제재 전체를 담고 있다. 주시는 분은 아버지이고, 받으시는 분은 아들 한 분뿐이다.
셋째, 교회의 축복과 제자도의 잔. 이 잔은 두 얼굴을 갖는다. 한편으로 교회는 성찬에서 "축복의 잔"을 받는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고전10:16) 이 잔은 첫째 잔의 약속이 둘째 잔의 대가로 성취된 뒤, 그 성취의 유익을 교회가 성령과 믿음으로 받는 잔이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의 잔을 마신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내 육체에 채우노라." 축복의 잔과 제자도의 잔은 서로 다른 두 잔이라기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가 이 세대 안에서 마시는 한 잔의 두 면이다. 은혜를 받는 교회가 그 은혜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
넷째, 종말론적 잔. "그 날", 곧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의 잔,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교제의 잔이다. 이 잔은 아직 마셔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그 날까지" 기다리시고, 교회가 "그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잔이다.
둘째와 셋째를 결코 혼동하지 말 것
이 네 가지 가운데 이 글이 가장 힘주어 구별해 온 것은 둘째와 셋째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잔은 공유되지 않는다. 제자의 고난의 잔은 공유된다.
둘째 잔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마신 잔이고, 셋째 잔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마시는 잔이다. 둘째 잔은 속죄하고, 셋째 잔은 증언한다. 둘째 잔은 구원을 이루고, 셋째 잔은 이루어진 구원의 열매다. 둘째 잔에는 "남은" 것이 없고, 셋째 잔에는 "남은" 것이 있다.
이 구별이 서면, 이 글이 붙들어 온 세 문장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다 이루었다." (요19:30)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마20:2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첫 문장은 둘째 잔에 대한 말이다. 둘째와 셋째 문장은 셋째 잔에 대한 말이다. 둘째 잔이 다 비워졌기 때문에, 셋째 잔은 두려움의 잔이 아니라 기쁨으로 받는 잔이 된다. 바울이 "괴로움을 기뻐하고"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네 잔의 흐름
그리고 이 네 잔은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그리스도께서 첫째 잔을 주시며 약속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둘째 잔을 홀로 마시셨다. 그 결과로 교회는 셋째 잔을 마신다. 그리고 마침내 넷째 잔을 그리스도와 함께 마실 것이다.
첫째 잔과 넷째 잔은 서로를 향해 있다. 첫째 잔을 건네시며 주님은 넷째 잔을 약속하셨다. "그 날까지." 그 사이에 둘째 잔과 셋째 잔이 있다. 주님이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그 시간은, 주님 편에서는 저주의 잔을 마시신 시간이며, 교회 편에서는 축복과 제자도의 잔을 마시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처음과 중간에 나온 두 포도주, 곧 가나의 좋은 포도주와 골고다의 신 포도주는 네 잔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둘 다 어느 하나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가나의 포도주는 창조의 선물이면서, "내 때가 아직"이라는 말씀 아래 넷째 잔의 기쁨을 앞당겨 보여 준 표적이다. 골고다의 신 포도주는 둘째 잔 그 자체는 아니지만, 둘째 잔을 마시시는 수난의 마지막 장면 안에 있다. 두 포도주는 네 잔의 흐름을 앞뒤에서 비추는 표지들이다.
19. 신랑과 혼인잔치
신랑의 친구
가나의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고 칭찬했다. 앞에서 우리는 그 칭찬이 엉뚱한 사람에게 가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 요한복음은 곧 그 칭찬이 누구에게 가야 했는지를 밝힌다. 가나 이야기에서 겨우 한 장 뒤,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한 뒤(요 3:27–28), 자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3:29)
그리고 그의 증언은 한 문장으로 끝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신랑은 예수시다.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 곧 혼인을 준비하고 신랑의 음성을 기뻐하는 들러리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이름도 없이 지나간 신랑의 자리에, 요한복음은 참 신랑을 세운다.
신랑을 빼앗길 날
공관복음도 예수를 신랑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 신랑 이미지 곁에는 놀랍게도 새 포도주가 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왜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9:15)
그리고 이어지는 두 비유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끝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9:17). (전체 대화: 마9:14–17) 한 단락 안에 신랑, 혼인집의 기쁨, "신랑을 빼앗길 날", 그리고 "새 포도주"가 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혼인잔치의 기쁨이 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마태복음 26:29에서 주님은 "이제부터"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신랑을 빼앗기는 그 날이 온 것이다. 주님은 "그 날까지" 마시지 않으시고, 교회는 신랑이 보이지 않는 동안 기다린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절망이 아니다. 새 포도주가 준비되고 있다. 그리고 그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가 아니라 새 부대, 곧 새 언약과 새 창조에 담길 것이다. 마태는 이 신랑 이미지를 두 개의 혼인잔치 비유로 이어 간다. 임금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청하는 비유(마22:1–14), 그리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마25:10)
신랑은 떠났고, 신랑은 다시 온다. 그 사이의 교회는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언약은 처음부터 혼인이었다
신랑과 신부의 언어는 신약이 새로 발명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예레미야의 새 언약 약속 안에서 하나님은 옛 언약을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렘31:32)라고 설명하셨다. 선지자들은 언약을 혼인으로, 우상 숭배를 음행으로 불렀다. 그리고 회복을 이렇게 약속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2:19–20)
이사야도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사 54:5)고 했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5)고 약속했다. 그러니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표적을 행하시고, 스스로를 신랑이라 부르시며, 마지막 잔을 "새 언약"이라 하셨을 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남편이 되시겠다던 언약의 오랜 약속 위에 서 있다.
신부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신랑
바울은 이 신랑의 사랑이 무엇이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엡5:25–27)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신랑은 신부를 얻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었다. 십자가는 그 내어줌의 사건이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20:28)라고 불렀고, 계시록의 장로들은 어린양을 이렇게 찬양한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신부는 신랑의 피로 얻어졌다.
에베소서 5장의 이 문장 안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가 들어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자. 앞에서 가나의 정결 예식 항아리를 보며, 우리는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15:3)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찔린 옆구리의 피와 물을 보았다. 신랑은 자기 피로 신부를 사시고, 물과 말씀으로 신부를 씻으신다. 바울은 창세기의 첫 혼인을 인용한 뒤 그 비밀을 밝힌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1–32)
에덴의 첫 혼인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교회를 가리키는 비밀이었다. 앞에서 우리는 교부들이 요한복음 19:34의 찔린 "옆구리"(πλευρά)를 칠십인역 창세기 2:21–22에서 하와가 지어진 아담의 "갈빗대"(πλευρά)와 연결하여, 첫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왔듯이 마지막 아담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태어났다고 읽었다는 것을 보았다. 그 옆구리의 연결 자체는 교부들의 해석 전통이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혼인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은 바울 자신이 에베소서에서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바다. 동산에서 시작된 혼인이 십자가를 지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이른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그리고 마침내 계시록 19장에서 그 잔치가 선포된다. 하늘의 허다한 무리가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하는 가운데(계19:6), 선포가 울린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계19:7)
그리고 천사가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명한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19:9)
(전체 장면: 계 19:6–10)
"청함을 받은 자들"(οἱ κεκλημένοι, 호이 케클레메노이). 가나의 이야기가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ἐκλήθη, 요2:2)로 시작했던 것을 기억하자. 같은 동사 칼레오(καλέω)다. 물론 신약에서 아주 흔한 동사이므로 여기에 큰 무게를 둘 수는 없고, 작은 어휘적 울림 정도로 들어 두면 충분하다. 두 혼인잔치를 본질적으로 잇는 것은 이 동사가 아니라 혼인잔치라는 모티프, 그리고 예수를 신랑으로 보는 기독론이다. 그 울림 안에서 보면, 가나에서 예수는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손님이셨다. 계시록에서 그분은 혼인잔치의 신랑이시고, 그분의 백성이 "청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이 신랑은 "어린 양"이시다. 계시록이 처음 어린양을 보여 줄 때 그는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 5:6)고 묘사된 어린양이었다. 혼인잔치의 신랑은 희생의 흔적을 지닌 채 서 계신다.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듯이(요 20:27),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신랑도 자신이 신부를 어떻게 얻었는지를 몸에 지니고 계신다.
두 잔치, 그리고 하나의 경고
계시록 19장을 계속 읽으면 이 혼인잔치 곁에 또 다른 장면이 있다. 하늘이 열리고 백마 탄 이가 나타나는데, 그는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19:13). 그리고 그가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계19:15). 이어서 천사가 공중의 새들을 불러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계 19:17) 대적들의 살을 먹으라고 외친다.
같은 장에 두 잔치가 있다. 신부를 위한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있고, 대적을 향한 심판의 "큰 잔치"가 있다. 그리고 진노의 포도주 틀이 있다. "피 뿌린 옷"의 피가 누구의 피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이사야 63장의 포도즙 틀을 밟는 전사의 옷에 튄 대적의 피로 읽는 해석이 많고, 전투 이전에 이미 피에 적셔진 옷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피를 떠올리는 해석도 있다. 이 글은 어느 한쪽을 단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장면은 이 글이 따라온 잔의 신학에 엄숙한 한 줄을 더한다. 계시록은 앞에서 이미 이렇게 말했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계14:10). 진노의 잔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그 잔을 마신 것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였다. 그 잔을 대신 마셔 주신 분을 끝내 거절하는 자에게 그 잔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은 이 글의 기쁨을 흐리려는 말이 아니라, 그 기쁨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를 보여 주는 말이다. 신부가 마시는 기쁨의 잔은 신랑이 대신 마신 진노의 잔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초청은 아직 열려 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신랑이 쓴 잔을 마셨기 때문에
이 모든 흐름을 한 줄로 이어 보자.
가나: 혼인잔치. 신랑의 포도주가 떨어졌고, 손님으로 오신 분이 좋은 포도주를 주셨다.
요한복음: 그 손님이 참 신랑이심이 드러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십자가: 신랑이 신부를 얻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다.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계시록: 어린양의 혼인잔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 흐름 위에서 이 글은 다음 문장을 제안한다.
신랑이 쓴 잔을 마셨기 때문에, 신부는 혼인잔치의 기쁨의 잔을 마신다.
이 문장은 어떤 개혁파 신학자의 직접 인용이 아니다. 칼빈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이렇게 말한 적이 없다. 이것은 가나에서 계시록까지의 정경을 함께 읽으며 이 글이 도달한 성경신학적 요약이다. 그러나 이 요약이 서 있는 토대,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고 그 결과로 백성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3:13–14가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바이며, 개혁주의 신앙의 한가운데에 있다.
20. 디모데전서 5:23에서 계시록 22장까지 — 창조와 구속
창조를 긍정하는 신앙
마지막 장면으로 가기 전에, 디모데전서 5:23이 열어 준 또 하나의 문을 지나야 한다. 포도주는 단지 구속의 상징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글의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읽을지를 결정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창조를 긍정하는 신학이다. 하나님은 물을 만드셨고, 포도를 만드셨고, 사람에게 먹고 마시는 기쁨을 주셨다. 창조의 여섯째 날 하나님은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하셨다. 전도서는 허무의 한가운데서도 이렇게 권한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전9:7)
바울은 부자들에게 소망을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딤전6:17) 두라고 권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려고 주신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10장에서 현세의 삶과 그 선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다루며, 하나님께서 음식을 창조하신 목적을 생각해 보면 그분이 단지 필요만이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까지 공급하려 하셨음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시편 104편의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인용한다(요지). 동시에 칼빈은 같은 자리에서 그 선물들을 탐닉과 방종으로 남용하는 것을 엄하게 경계한다. 창조의 긍정과 절제의 경계는 칼빈에게서 함께 간다. 디모데전서 5:23의 "조금씩"이 그 균형을 가장 짧게 요약한다.[^41]
죄는 창조를 악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상의 고통과 왜곡은 어디서 오는가? 개혁주의는 죄가 창조물 자체를 악한 것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니라, 창조물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왜곡했다고 본다. 포도주는 악하지 않다. 그러나 죄 아래의 인간은 그것으로 취하고, 그것에 매이고, 그것을 우상으로 삼는다. 노아는 홍수 뒤에 포도나무를 심었고, 포도주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창9:20–21). 문제는 포도나무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구속은 창조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헤르만 바빙크가 즐겨 강조했듯이, 은혜는 자연을 없애지 않고 회복한다(요지). 그리스도의 구속은 창조를 버리고 순수한 영의 세계로 도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를 회복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바울은 피조물 전체가 그 날을 기다린다고 말한다.[^42]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1)
(전체 문맥: 롬8:18–25)
베드로는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라고 말한다. 영혼만의 하늘이 아니라, 새로워진 땅이다.
새 창조의 식탁은 어떤 식탁인가
그렇다면 성경 마지막의 식탁과 생명수와 생명나무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 앞에서 우리는 칼빈이 마태복음 26:29의 "새로운 마심"을 비유적 표현으로 읽었다는 것을 보았다. 칼빈은 하늘의 생명이 이 세상의 음식과 음료의 필요에 매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키려 했다. 그 관심은 정당하다. 우리는 새 창조에서의 먹고 마심이 이 세상의 생리적 필요와 같은 방식일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부활한 몸과 새 땅을 말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잡수셨고,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행10:41; 헬라어 συνεφάγομεν καὶ συνεπίομεν, 쉬네파고멘 카이 쉬네피오멘, 개역개정은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으로 옮김). 크리소스톰이 보았듯이 그것은 필요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몸이 참된 몸임을 확증하기 위해서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이 다른 몸이 아니라 같은 몸으로, 그러나 다른 성질을 지닌 몸으로 일으켜진다고 고백한다(요지). 새 창조는 비물질적인 영혼만의 천국이 아니라, 새로워진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완성이다.[^43]
새한글성경(KNT) 하下; 우리는 그분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일어나신 뒤에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이 두 진리는 경쟁하지 않는다. 새 창조의 식탁이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이 그 완성을 식탁과 강과 나무와 열매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구속이 창조를 버리지 않고 완성한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동산을 지으시고 거기에 강과 나무와 먹을 것을 두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성을 내려 보내시고 거기에 강과 나무와 열매를 두신다. 처음과 마지막이 서로를 비춘다.
약한 위장과 만국의 치료
그리고 여기서 디모데전서 5:23과 계시록 22장이 뜻밖의 방식으로 손을 잡는다. 디모데에게는 "자주 나는 병"이 있었다. 바울은 그 병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다. 성경에서 가장 평범한 약 처방이다. 사도의 권위도, 디모데의 경건도 그 병을 없애 주지 않았다. 디모데는 약한 몸으로 교회를 섬겼다.
계시록 22장의 생명나무는 이렇게 묘사된다.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2). 그리고 계시록 21장은 그 도성에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21:4)라고 말한다.
디모데의 약한 위장을 위한 한 잔의 포도주와 만국을 치료하는 생명나무의 잎사귀 사이에, 이 세대의 교회가 산다. 이것은 예표론이 아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권할 때 생명나무를 떠올렸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다만 정경을 끝까지 읽는 독자에게, 몸의 연약함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작은 배려와 모든 연약함을 끝내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치유가 같은 손에서 나온다는 것은 위로가 된다. 오늘 약을 쓰는 신자도, 그 날 잎사귀의 치료를 받을 신자도, 같은 창조주의 돌봄 아래 있다.
21. 마지막 장면 — 다시는 목마르지 않음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이제 이 글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다. 계시록 7장에서 요한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든 셀 수 없는 무리를 본다. 장로 가운데 하나가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계7:13), 스스로 대답한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7:14)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7:15), 그 다음에 약속이 이어진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7:16–17)
(전체 환상: 계7:9–17)
이 본문에는 이 글이 구별해 온 두 잔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란히 서 있다. 그들은 "큰 환난"(θλίψεως τῆς μεγάλης, 틀립세오스 테스 메갈레스)에서 나온 자들이다. 골로새서 1:24의 "고난", 계시록 1:9의 "예수의 환난"과 같은 단어, 틀립시스다. 그들은 제자의 잔을 마신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옷을 희게 한 것은 그들의 환난이 아니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받은 고난은 그들을 씻지 못했다. 그들을 씻은 것은 어린양의 피였다. 제자도의 잔은 끝까지 마셔졌지만, 속죄는 끝까지 어린양의 것이었다. 이 글이 처음부터 붙들어 온 구별이 성경의 마지막 환상 안에서도 지켜진다.
그리고 그 환난의 끝에 약속이 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이것은 이사야의 약속,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49:10)의 성취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σκηνώσει, 스케노세이).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ἐσκήνωσεν, 에스케노센)와 같은 동사다. 그리고 초막절, 곧 장막절을 기억하게 하는 말이다. 앞에서 우리는 초막절의 큰 날에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던 것을 보았다. 이제 영원한 장막절이 온다. 하나님이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어린양이 그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신다. 목마르셨던 분이 이제 목마른 자들을 샘으로 이끄는 목자가 되신다. 제자의 고난의 잔조차 영원하지 않다. 그 잔에도 마지막이 있다.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그들은 그 환난에서 "나온다."
"이루었도다"
계시록 21장에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본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그리고 보좌에서 큰 음성이 들린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계21:3)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21:4), 보좌에 앉으신 이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1:5) 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21:6)
새 예루살렘의 전체 환상은 계시록 21:1–22:5를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이 본문 안에서 이 글의 거의 모든 실이 한데 모인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시작된 혼인의 이야기가 여기서 완성된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앞에서 우리는 마태만이 마지막 만찬의 약속에 "너희와 함께"를 덧붙였다는 것, 그리고 마태복음이 임마누엘로 시작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로 끝난다는 것을 보았다. 계시록 21:3은 "함께"(μετ᾽ αὐτῶν)를 거듭 말한다. "그 날"에 "너희와 함께" 마시겠다던 약속은 하나님이 친히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이 장면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 25장,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베풀어지는 잔치 바로 뒤에 이어지던 약속,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가 여기서 성취된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마태복음 26:29의 "새것으로"(καινόν)가 여기서 "새롭게"(καινά)로 온 창조에 번진다.
그리고 "이루었도다"(γέγοναν, 게고난). 앞에서 우리는 십자가 위의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를 들었다. 이제 새 창조의 보좌에서 또 하나의 "이루었도다"가 들린다. 두 단어는 헬라어로 다르고, 사전적 의미도 같지 않다. 십자가의 테텔레스타이가 구속 사역의 완결을 선언했다면, "되었다", "일어났다"는 뜻의 보좌의 게고난은 그 구속이 향하던 새 창조가 이제 실현되었음을 선언한다. 이 두 선언의 관계를 이 글의 언어로 표현하면, 하나는 값의 완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값으로 산 것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두 단어의 사전적 뜻이 아니라,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함께 읽으며 이 글이 시도하는 성경신학적 종합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선언되었기 때문에, 보좌에서 "이루었도다"가 선언될 수 있다.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사야 55:1의 초청,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가 여기서 완성된다. 값없이. 그 값은 이미 다른 분이 치르셨기 때문이다.
생명수의 강
그리고 계시록의 마지막 장이 열린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1–2)
이어지는 절들에서 환상은 저주의 종결과 하나님의 얼굴, 그리고 다시는 밤이 없는 빛으로 이어진다(계22:3–5). 앞에서 인용한 에스겔 47장이 거의 그대로 여기에 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 그 강 좌우에 자라는 나무, 달마다 새 열매, 약 재료가 되는 잎사귀. 그러나 에스겔에서는 물이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왔다면, 계시록에서는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 계시록 21:22는 그 도성에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키셨던 분, 요한복음 19장에서 그 성전된 몸이 찔려 피와 물을 흘리셨던 분이, 이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보좌에 앉아 계신다. 생명수의 근원은 찔리셨던 어린양이시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창세기 3:24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지키던 생명나무의 길이 여기서 열려 있다. 계시록 22:14는 그 길이 누구에게 열리는지를 말한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계시록 7:14가 이미 말했듯이 "어린 양의 피에" 씻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첫 아담이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취하여" 먹고 생명나무를 잃었고, 마지막 아담이 저주의 나무 위에서 주어진 잔을 "받으셔서" 생명의 길을 여셨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 길 끝에서 생명나무가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그 열매는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다시 저주가 없으며"(πᾶν κατάθεμα οὐκ ἔσται ἔτι, 판 카타테마 우크 에스타이 에티). 창세기 3장에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고 선언되었던 저주, 신명기 28장이 목마름을 포함하여 열거했던 언약의 저주, 그리고 갈라디아서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던 그 저주. 이제 다시 저주가 없다. 겟세마네에서 아버지께 받으신 저주의 잔이 이 문장의 값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앞에서 우리는 출애굽기 33:20의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와, 출애굽기 24:11에서 장로들이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는 놀라운 예외를 함께 보았다. 첫 아담은 동산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다(창3:8). 이제 그의 종들이 "그의 얼굴을 볼" 것이다. 시내산의 식탁에서 잠시 열렸던 것이 이제 영원히 열린다.
모든 물이 한곳에서 만난다
이제 이 글이 따라온 모든 물줄기가 마침내 한곳에서 만난다.
에덴의 강.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창2:10). 성경의 첫 강은 동산에서 흘러나왔다.
광야의 반석.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그리고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성전의 물. 에스겔이 본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와 사해를 되살리는 물, 스가랴가 본 "그 날에" 예루살렘에서 솟아나는 생수, 그리고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사마리아 여인의 생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초막절의 생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리고 요한의 괄호,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십자가의 목마름. "내가 목마르다."
찔린 옆구리의 피와 물.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새 예루살렘의 생명수.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이 모든 물이 하나의 강으로 모인다. 그리고 그 강의 근원은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 곧 우물가에서 목마르셨고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셨던 바로 그분이시다.
마지막 초청
그리고 성경은 마지막 초청으로 끝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22:17)
"성령과 신부가." 생수로 불린 성령과,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기다리는 신부가 함께 부른다. "오라." 그리고 그 초청은 목마른 자에게 향한다. 성경의 마지막 초청은 이 글이 처음부터 따라온 그 목마름을 향한다. 몇 절 뒤, 성경의 마지막 대화가 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20)
앞에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성찬의 식탁에서 "마라나타", 곧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를 불렀다는 것을 보았다. 성경의 마지막 기도가 그 기도다. 그리고 그 기도에 대한 대답이 그보다 먼저 주어져 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 날이 온다.
결론 — 그 날까지
다시 가나로
이 글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크래쇼의 라틴어 한 줄로 시작했다.
Nympha pudica Deum vidit, et erubuit.
물이 하나님을 보고 붉어졌다.
그 시구는 가나의 기적을 물의 편에서 바라보았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아보고 붉어지는 순간. 그 짧은 상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끝까지 읽은 지금, 우리는 그 시구 너머의 이야기를 안다. 가나에서 물을 붉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요한복음의 끝에서 목마른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가신다.
가나에서 그분은 좋은 포도주를 주셨다.
갈보리에서 그분은 신 포도주를 받으셨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분은 축복의 잔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겟세마네에서 그분은 저주의 잔을 자신이 받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목마르다." 그리고 신 포도주를 받으신 뒤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
그 결과로 교회는 "축복의 잔"을 마신다.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잔, 이미 완성된 그의 죽음과 생명의 유익을 성령과 믿음으로 받는 잔이다.
그러나 교회는 동시에 역사 속에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는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형상에 참여한다. 야고보의 칼과 요한의 밧모섬과 바울의 감옥이 그 잔이었고, 오늘 교회가 복음과 사랑과 증언을 위해 받는 고난도 그 잔이다. 이 고난은 속죄를 보충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성된 속죄의 열매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기뻐하며 말할 수 있었다. 채울 것이 속죄에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속죄가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러나 이 제자의 고난의 잔조차 영원하지 않다.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은 그 환난에서 나온다. 마지막에는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6장에서 약속하신 "그 날", 곧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이 온다.
세 개의 명제
이 후속편은 처음부터 세 개의 명제를 향해 걸어왔다. 이제 그 셋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생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마신다.
둘째,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고 마실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죽음과 저주의 잔을 마시셨다.
셋째, 그러므로 성찬에서의 먹고 마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하거나 보충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그의 죽음과 생명의 유익을 성령과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언약적 참여다.
「말씀의 섭취」로 돌아가며
앞선 「말씀의 섭취」 3부작은 한 문장으로 모였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이 후속편은 그 문장을 지우지 않는다. 그 곁에 또 하나의 문장을 놓는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라면, 생수를 마신다는 것도 생명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을 죄라고 불렀다. 그 웅덩이는 터져 있었다. 사람은 생명을 저장해 둘 수 없다. 마실 때마다 다시 목마르고, 목마를 때마다 다시 근원께 나아가야 한다. 교회가 성찬의 잔을 "마실 때마다" 거듭 마시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번이지만, 우리의 받음은 거듭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한 번 손에 넣고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날마다 그분께 붙들리는 존재다.
그리고 이제 먹음과 마심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이 우리를 살리신다.
우리가 그분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자기 것으로 삼으신다.
우리가 생명을 섭취하여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일어난다. 말씀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가고, 성례는 그 약속을 인치며,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 믿음은 그 연합을 받는다. 말씀도, 떡도, 잔도, 생수도,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 자신에게 데려간다.
오라, 먹으라, 마시라
앞선 연작이 따라간 명령은 "먹으라"였다. 이 후속편이 따라간 명령은 "마시라"였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장은 그 둘을 하나의 초청으로 모은다.
"오라."
이사야는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불렀다. 예수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부르셨다. 성령과 신부는 "오라"고 부른다.
"먹으라."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마시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그리고 그 초청의 중심에는 음식이나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계신다. 우리는 떡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분께 온다. 우리는 물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생수의 근원이신 분께 온다. 우리는 잔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잔을 주시는 분, 그리고 그 잔을 위해 먼저 저주의 잔을 마시신 분께 온다.
그리고 그 초청의 길은 두 동산 사이에서 열렸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금지된 것을 자기 손으로 취하여 먹고, 식탁과 생명나무와 하나님의 얼굴을 잃었다. 마지막 아담은 또 하나의 동산에서 아버지가 주신 잔을 순종하여 받으시고, 저주의 나무 위에서 목마르셨으며, 신 포도주를 받으신 뒤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자기 백성이 다시 하나님의 식탁에 앉을 길을 여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실 수 없는 저주의 잔을 홀로 마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생수와 축복의 잔을 마신다.
우리는 아직 그분의 제자로서 고난의 잔을 마신다. 그러나 그 잔에도 마지막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 어린양과 그의 신부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흐르는 생명수 곁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누리며,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것으로 마실 것이다. 그분이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대로. 그 날에. 너희와 함께.
가나에서, 물은 자기 하나님을 알아보고 붉어졌다.
골고다에서, 그 하나님은 우리의 목마름을 마지막 한 모금까지 짊어지셨다.
그 목마름이 다한 자리에서, 어린양의 잔치가 열린다.
그 날까지, 우리는 그분이 주신 잔을 마신다.
그리고 그 날에, 그분과 함께 마실 것이다.
부록 — 식탁에서 삶으로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1. 왜 이 부록이 필요한가
이 글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시작해 다락방의 잔과 겟세마네의 잔을 지나, 골고다의 신 포도주와 찔린 옆구리를 거쳐, 교회의 성찬상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이르렀다. 그 여정의 한가운데에는 늘 식탁과 잔이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결국 이 글은 성찬에 관한 글인가? 신앙의 중심을 예배당의 성찬상 위에 두자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 부록은 그 오해를 막기 위해 쓴다. 이 글이 따라온 모든 주제,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 은혜를 받음, 자기부인, 고난에의 참여, 먹고 마심의 신학은 성찬과 성례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신자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성찬은 그 모든 것이 가장 선명하게 압축되어 보이는 자리일 뿐, 그 모든 것이 머무는 자리가 아니다. 식탁에서 받은 것은 식탁을 떠나 삶으로 흘러간다.
2. 개혁주의는 전통주의가 아니다
먼저 한 가지 오해를 풀어야 한다. 성례를 중요하게 말하고, 교부들과 옛 신앙고백들을 인용하고, 라틴어 성시와 고대 교회의 교송까지 불러오는 글이라면, 결국 예전과 전통을 신앙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다.
개혁주의는 전통주의와 같지 않다. 둘의 차이는 전통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 이 글 자신이 크리소스톰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이레네우스를 인용했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시인의 경구로 문을 열었으며, 중세 라틴 교회의 찬가와 교송을 소개했다. 개혁자들 자신이 교부들을 누구보다 깊이 읽은 사람들이었다. 칼빈의 주석과 『기독교강요』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크리소스톰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개혁주의는 전통을 버리지 않는다.
차이는 권위가 어디에 있느냐에 있다. 전통주의는 이렇게 말할 위험이 있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지킨다." 형식과 관습 그 자체에 본질적 권위를 부여하고, 예전을 신앙의 중심으로 끌어올린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다른 질문을 묻는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이 복음을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이끄는가? 이 은혜가 어떻게 삶의 순종으로 이어지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첫 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과 믿음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거나 성경에서 선하고 필연적인 추론으로 이끌어낼 수 있으며, 여기에 성령의 새로운 계시든 사람의 전통이든 어떤 것도 더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한다. 동시에 같은 조항은 예배와 교회 정치에 관한 어떤 부수적 사항들은 말씀의 일반 원칙을 따라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로 정해야 한다고 인정한다(요지). 성경은 모든 것을 규정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스린다.[^44]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막7:8)고 책망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살후2:15)고 권했다. 성경은 전통을 무조건 배척하지도, 무조건 높이지도 않는다. 말씀을 폐하는 전통은 버리고, 말씀을 전하는 전통은 지킨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는 전통을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고, 전통을 절대화하지도 않는다. 오직 말씀 아래에서 유익한 전통은 사용하고, 말씀을 가리거나 대체하는 전통은 거부한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secundum verbum Dei)는 표어가 가리키는 것도 이것이다. 다만 이 정형화된 문구를 그대로 특정 인물이 처음 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중요한 역사적 뿌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이른바 '더 진전된 개혁'(Nadere Reformatie) 운동, 특히 요도쿠스 판 로덴슈타인(Jodocus van Lodenstein) 같은 이들이 교회의 개혁이 교리의 정비에 머물지 않고 삶과 경건의 개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호소한 데 있으며, 오늘의 라틴어 정형구는 그 뒤에 다듬어지고 널리 퍼진 것이다. 개혁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말씀 앞에 계속 서는 태도다.[^45]
이 글이 성찬을 깊이 다룬 것은 성찬이라는 의식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성찬이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개혁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 그 자체가 아니라, 말씀에 의해 규정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믿음으로 드려지는 예배다. 전통은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신앙의 본질이나 은혜의 근원은 아니다.
3.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 로마서 12:1의 순서
이 부록의 중심 본문은 로마서 12:1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그리고 바울은 곧바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고 잇는다(롬12:2). 이 구절에서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명령이 아니라 그 명령 앞에 놓인 두 단어다. "그러므로"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그러므로"는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바울은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칭의,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연합, 성령 안의 새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을 차례로 말했다. 앞에서 우리가 인용한 로마서 5장의 두 아담의 대조도 그 흐름 안에 있다. 그리고 11장은 송영으로 끝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11:36)
그 송영 바로 다음에 "그러므로"가 온다. 그리고 그 "그러므로"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διὰ τῶν οἰκτιρμῶν τοῦ θεοῦ, 디아 톤 오이크티르몬 투 테우) 권면된다. 복수형 "자비하심들"은 로마서 앞부분 전체가 펼쳐 보인 하나님의 긍휼의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니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만들어 바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푸신다. 그 다음에,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몸을 드린다.
은혜 → 응답
복음 → 예배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 신자의 자기헌신
이 순서는 절대로 뒤집혀서는 안 된다. 순서가 뒤집히면, 곧 신자의 헌신이 먼저 오고 하나님의 자비가 그 다음에 온다면, 예배는 은혜를 얻어 내기 위한 거래가 되고 복음은 율법이 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구조 자체가 이 순서를 가르친다. 요리문답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사람의 비참, 사람의 구원, 그리고 그 구원에 대한 감사. 선한 행위와 십계명과 기도는 세 번째 부분, 곧 "감사" 아래에서 다루어진다. 요리문답 86문은 우리가 우리의 공로 없이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는데 왜 선을 행해야 하느냐고 묻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사신 뒤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우리가 온 삶으로 그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이 우리로 인하여 찬양받으시게 하려 하심이라고 답한다(요지). 선행은 구원의 값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다.[^46]
바울이 이 드림을 "영적 예배"(λογικὴ λατρεία, 로기케 라트레이아)라고 부른 것도 눈여겨보자. 로기케는 "합당한", "이치에 맞는", "말씀에 걸맞은"이라는 뜻을 함께 품는 말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받은 자에게 가장 이치에 맞는 반응, 가장 합당한 예배가 바로 자기 몸을 드리는 것이다. 라트레이아는 원래 성전의 제사 봉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울은 성전의 제사 언어를 가져와 신자의 삶 전체에 적용한다.
그리고 "산 제물"(θυσίαν ζῶσαν, 튀시안 조산). 구약의 제물은 죽임을 당해 제단에 드려졌다. 그러나 신자는 살아 있는 채로 드려진다. 죽임을 당한 제물은 이미 드려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죽임을 당하셨으므로, 신자는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그 사신 생명으로 드려진다.
4. 두 희생을 혼동하지 말라
여기서 이 글 전체가 지켜 온 구별이 부록에서도 똑같이 지켜져야 한다. 성찬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희생을 받아 누린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신자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나 두 희생은 동일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대속적이고, 단회적이며, 완전하고, 반복될 수 없는 희생이다. 그것은 죄를 속하고, 진노를 담당하고, 저주를 짊어진 희생이다. "다 이루었다."
신자의 희생은 감사의 희생이다. 순종과 자기부인과 사랑과 봉사와 증언과 고난과 거룩한 삶의 희생이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를 길게 논증한 뒤, 신자가 드릴 제사를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히13:15–16)
"예수로 말미암아." 신자의 제사는 예수를 통해서만 드려진다. 그리고 그 내용은 찬송과 선행과 나눔이다. 이 제사는 속죄하지 않는다. 기쁘시게 할 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성찬을 두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사를 다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번의 제사를 기념하는 것이며 그 제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찬양의 영적 봉헌이라고 고백한 것(29.2, 요지)은 바로 이 두 희생의 구별이다. 성찬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드려지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감사와 찬양으로 자신을 드린다.[^47]
이 구별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 주는 이미지가 이 글의 주제인 "마심"과 이어져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바울은 투옥과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자기 생명을 "전제"로 표현했고, 생애 말년에는 그 이미지를 다시 사용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2:17)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딤후4:6)
"전제"(σπένδομαι, 스펜도마이)는 제단의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제사, 곧 부어 드리는 음료의 제사다(민15:5–10). 바울은 자기 생명을 그렇게 부어 드린다고 말한다. 그런데 본문을 먼저 정확히 보아야 한다. 빌립보서 2:17에서 바울이 전제로 부어지는 자리는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다. 그 밑에 놓인 제물은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섬김이며,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 위에 자기 생명이 음료의 제물처럼 부어지기를 기뻐한다. 그러니 이 본문이 그리스도의 속죄제를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넓은 구속론의 차원에서 보면,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섬김도, 그 위에 부어지는 바울의 생명도, 모두 이미 단번에 완성된 그리스도의 희생 위에 서 있다. 신자의 자기헌신은 그 희생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희생의 열매다. 그리고 바울은 그 부어짐 앞에서 "나는 기뻐하고"라고 말한다. 앞에서 골로새서 1:24의 "괴로움을 기뻐하고"를 보았듯이, 완성된 속죄 위에서 드려지는 삶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부어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주의 잔을 마시셨다. 신자는 그 은혜 위에 자기 생명을 전제로 붓는다. 두 잔은 결코 같지 않다. 그러나 두 번째 잔은 첫 번째 잔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5. "다 이루었다" 위에서 드리는 삶
그러므로 신자의 삶의 예배는 "다 이루었다"는 완성된 복음 위에서만 가능한 응답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은혜의 순서를 이렇게 말한다. 그는 먼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2:8), 그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2:9). 그리고 이렇게 잇는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구원은 행위에서 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장은 참된 살아 있는 믿음으로 행한 선한 일들이 그 믿음의 열매요 증거이며, 이로써 신자는 감사를 표현하고 확신을 굳게 하며 형제를 세우고 복음을 빛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고백한다(요지).[^48]
그러므로 신자의 헌신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다. 신자의 희생은 속죄를 만드는 희생이 아니라 속죄받은 자의 감사의 희생이다. 이 순서가 무너지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신자가 자기 헌신으로 구원을 얻으려 애쓰다가 불안에 빠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가 자기 헌신을 자랑하다가 교만에 빠지는 일이다. "다 이루었다"는 두 위험을 모두 막는다. 이미 이루어졌으니 불안할 이유가 없고,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니 자랑할 이유도 없다.
6. 삶 전체에 퍼져 있는 제자의 잔
앞에서 우리는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제자가 그리스도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성찬의 잔을 의식적으로 마시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자기부인과 고난과 사랑과 용서와 섬김과 증언과 인내와 충성의 삶을 사는 것을 포함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섬김을 가르치실 때, 그 가르침은 예배의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위와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20:26). 제자의 잔은 누가 윗자리에 앉느냐는 다툼 한가운데서, 곧 삶의 가장 평범하고 가장 이기적인 자리에서 마셔진다.
그러니 제자도의 잔은 삶 전체에 퍼져 있는 잔이다. 교회 안에서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마신다. 정직하게 일하다 손해를 볼 때, 동료의 실수를 덮어 주고 대신 책임을 질 때. 가정에서 마신다. 날마다 반복되는 돌봄과 인내와 용서 속에서. 관계 속에서 마신다. 오해를 받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고난 속에서 마신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오해와 불이익과 박해를 감수할 때. 노동과 책임과 봉사와 희생 속에서 마신다. 누구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맡겨진 일을 끝까지 할 때.
여기서 한 가지를 구별해 두자. 제자의 잔은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섬기며 증언하기 때문에 감수하는 자기부인과 고난의 삶에서 마셔진다. 물론 신자는 병과 상실과 실패 같은 일반적인 섭리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부름받는다. 그러나 그런 모든 고난을 마태복음 20장의 "내 잔"과 곧바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말한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3:17)
"무엇을 하든지." 제자의 잔에는 성과 속의 경계가 없다.
7. 골로새서 1:24와 몸의 예배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배당 안의 의식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의 사역과 여행, 박해와 노동, 복음 전파와 교회를 위한 수고, 몸의 고통 전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드려지는 삶의 예배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회상한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살전2:9)
천막을 만드는 노동과 복음 전파가 한 문장 안에 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는 자기 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
"몸에." "우리 몸에."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는 "우리 죽을 육체에"(고후4:11). 바울에게 제자도는 몸의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로마서 12:1의 "너희 몸을"이라는 표현이 새롭게 들린다. 바울은 "너희 영혼을" 드리라고 하지 않았다. "너희 몸을" 드리라고 했다.
개혁주의는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몸과 시간과 노동과 관계와 재산과 말과 생각과 고난 전체가 하나님께 속한다고 본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첫 문답은 신자의 유일한 위로를 이렇게 고백한다.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 그분이 그의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치르셨다는 것(요지).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7장에서 로마서 12:1을 풀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을 위해 죽어야 한다(요지).[^49] 바울 자신이 이미 이렇게 말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6:19–20)
"값으로 산 것." 그 값이 무엇이었는지를 이 글은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보았다. 그리고 "성령의 전." 앞에서 우리는 성전된 그리스도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렀고, 그 생수가 성령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 성령이 신자의 몸을 성전으로 삼으신다. 그 몸이 무엇을 하든, 먹든지 마시든지 일하든지 쉬든지, 그것은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자유대학 개교 연설에서, 인간 존재의 전 영역 가운데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으시는 곳은 한 치도 없다고 말했을 때(요지), 그것은 이 신학의 사회적 차원을 선언한 것이었다.[^50]
8. 섭취에서 헌신으로
이 글에서 다룬 성경의 명령들을 한 줄로 늘어놓아 보자.
먹으라. 마시라. 받으라. 따르라. 드리라.
이 다섯 명령은 모두 은혜를 받고 삶으로 응답하는 하나의 구조 안에 있다. 앞의 셋은 받음이고, 뒤의 둘은 응답이다. 그러나 응답은 받음 없이는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써 종교적 체험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앞선 「말씀의 섭취」 연작이 말했듯이, 먹는다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붙들리는 것이다. 이 후속편이 덧붙였듯이, 마신다는 것은 생명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에 붙들린 사람은 자기의 삶도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므로 이 흐름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섭취 → 연합 → 변화 → 헌신
말씀과 성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고(섭취),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연합), 그 연합 안에서 새로워지며(변화), 그 새로워진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헌신). 로마서 12:2의 "변화를 받아"(μεταμορφοῦσθε, 메타모르푸스테)는 수동태다. 신자는 스스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는다."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헌신조차 받은 은혜의 결과다.
9. 우물가에서 예배자로 — 요한복음 4장과 로마서 12장
앞에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 생수를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 주는 편의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은 삶의 부담을 제거하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다. 그 생명은 사람을 새롭게 하여 예배자로 만든다. 실제로 요한복음 4장에서 생수에 관한 대화는 곧바로 예배에 관한 대화로 이어진다. 여인이 조상들이 예배하던 산과 예루살렘 가운데 어디가 참된 예배의 장소냐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1)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씀(4:22)에 이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3–24)
개역한글에서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옮겼던 이 표현을 개역개정은 "영과 진리로"라고 옮겼다. 요한복음 전체의 흐름 안에서 보면 이 두 단어는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다. "영"은 요한이 7장에서 "생수"라고 부른 성령을 떠올리게 하고, "진리"는 14장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해석자들이 이 예배를 성령 안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드리는 예배로 읽어 온 것은 그 때문이다.
생수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된다. 생수와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예배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곧 특정한 장소나 전통적 중심지에 갇히지 않는다. 새 언약의 예배는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면 어디서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이면 어디서든 드려진다. 이것이 로마서 12:1의 "너희 몸을 ... 산 제물로 드리라"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참된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면(요2:21), 그리고 신자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면(고전6:19), 예배는 그 몸이 가는 모든 곳에서 드려진다.
그러나 이것을 공예배나 성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 4장은 "어디서든 혼자 예배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같은 신약은 교회가 함께 모이기를 거듭 명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10:25)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이 글의 제목인 "그 날"이 여기에도 있다. 교회가 모이는 이유는 그 날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고 기록한다. 말씀과 교제와 떡을 떼는 것과 기도. 공예배는 중요하다. 말씀과 성례는 중요하다.
그러므로 균형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공예배는 중요하다. 말씀과 성례는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주일의 특정 시간과 공간에만 갇히지 않는다. 주일의 모임은 한 주간 전체의 예배를 대신하지 않고, 한 주간 전체의 예배는 주일의 모임을 대신하지 않는다. 모임에서 받고, 흩어져서 드린다.
10. 성찬 —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
그렇다면 이 "모임에서 받고, 흩어져서 드리는" 삶에서 성찬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성찬은 삶 전체의 예배를 대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 전체를 압축하여 교회에 건네는 언약적 식사다.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시고, 신자는 믿음으로 받으며, 교회는 그분과 그리고 서로와 연합한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간다.
앞에서 보았듯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장은 주님이 성찬을 제정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로,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마땅히 드려야 할 모든 의무에 더욱 헌신하게 하는 것을 꼽는다(요지). 성찬은 의무에서 벗어나게 하는 식탁이 아니라, 의무로 다시 보내는 식탁이다. 다만 그 의무는 이제 은혜에 대한 감사로 짊어지는 의무다.[^51]
그러므로 성찬은 예배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삶 전체의 예배를 계속 가능하게 하는 은혜의 방편이다. 앞에서 우리는 성찬이 "마실 때마다" 거듭된다는 것을 보았다. 삶의 예배는 한 번에 드려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드려진다. 그리고 날마다 드려지는 그 삶은 거듭 받는 은혜로만 지탱된다. 성찬상에서 받은 복음은 일상에서 몸으로 살아진다. 그리고 일상에서 지친 몸은 다시 성찬상으로 돌아와 받는다. 식탁과 삶은 서로를 향해 숨을 쉰다.
11. 디모데전서 5:23과 몸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디모데전서 5:23이 포도주를 신비화하지 않도록 돕는 균형추라는 것을 보았다. 이 구절은 부록에서도 같은 역할을 한다. 신앙은 삶의 구체성과 몸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 구절은 신앙을 지나치게 의식화하거나 금욕화하지 않도록 돕는다. 바울은 디모데의 위장을 걱정했다. 사도는 젊은 동역자의 영적 상태만이 아니라 몸의 상태를 돌보았다. 개혁주의적 삶의 예배는 몸을 혐오하거나 일상을 떠나는 종교성이 아니다. 오히려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므로 몸의 건강, 절제, 노동, 쉼, 음식, 관계도 삶의 예배와 무관하지 않다. 주님은 사역에 지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6:31)고 하셨다. 쉼도 순종이다. 그리고 바울은 먹고 마시는 가장 평범한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이 구절은 이 글 전체에게 가장 적절한 마지막 교훈이다. 이 글은 성경의 먹음과 마심을 가장 거룩한 자리들에서 따라왔다. 에스겔의 두루마리, 생명의 떡, 다락방의 잔, 겟세마네의 잔, 골고다의 신 포도주, 성찬의 축복의 잔, 새 예루살렘의 생명수.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거룩한 먹고 마심을 지나, 오늘 아침의 밥 한 공기와 오후의 물 한 잔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먹든지 마시든지." 그 평범한 먹고 마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성찬의 잔에서 시작된 감사는 일상의 모든 잔으로 번진다.
12. 식탁에서 삶으로
이제 이 부록 전체를 하나의 구조로 모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잔을 마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생명을 받고, 그분을 따라 우리의 잔을 마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구원 안에서 산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삶의 예배다.
성찬은 삶과 분리된 거룩한 섬이 아니다. 오히려 삶 전체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식탁이다.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받은 은혜가 가정과 노동과 관계와 고난과 섬김으로 흘러갈 때, 성찬은 삶의 예배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찬의 독특성을 약화시키는 말은 아니다. 성찬은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특별한 은혜의 방편이다. 일상의 모든 식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해서 모든 식사가 성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제정의 말씀이 있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유익을 인치시는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은 다른 어떤 식탁에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 은혜의 목적은 예배당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적 신앙의 흐름은 예전주의나 전통주의로 결론 나지 않는다. 그 흐름은 이렇게 이어진다.
말씀 → 그리스도 → 은혜 → 연합 → 성례 → 삶 → 예배
말씀이 그리스도를 보여 주고, 그리스도가 은혜를 주시며, 은혜가 우리를 그분과 연합시키고, 성례가 그 연합을 인치며, 그 인침을 받은 삶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그 삶 전체가 예배가 된다. 성찬은 이 흐름의 중심에 있는 은혜의 방편이지만, 신앙 전체의 종착점은 아니다. 종착점은 "그 날", 곧 어린양의 혼인잔치다. 그리고 그 날까지, 교회는 말씀과 식탁에서 받고 세상에서 드린다.
가나에서 좋은 포도주를 주셨고, 골고다에서 우리의 목마름을 짊어지셨으며, 다락방에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하신 분이, 오늘 식탁에서 우리에게 잔을 건네신다. 그리고 그 잔을 마신 우리를, 그분은 다시 세상으로 보내신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부으셨듯이, 우리도 그분을 위해 우리의 삶을 붓도록.
복음은 말씀과 식탁에서 받고, 삶으로 드려진다.
각주
[^2]: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25.12,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7, ed. Philip Schaff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8),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5.htm
[^3]: Westminster Assembly,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29.7,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opc.org/wcf.html
[^4]: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Eerdmans, 1948), Internet Archive,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archive.org/details/biblicaltheology0000vosg; see also Vos, “The Nature and Aims of Biblical Theology,” esp. his description of revelation’s “historical progress,” The Geerhardus Vos Projec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biblicaltheology.org/nabt.pdf
[^5]: Mishnah Berakhot 6:1, Sefaria,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sefaria.org/Mishnah_Berakhot.6.1
[^6]: John Chrysostom, “Homily 82 on Matthew,” trans. George Prevost, rev. M. B. Riddle,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0, ed. Philip Schaff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8),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200182.htm
[^7]: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vol. 3, trans. William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ommentary on Matt. 26:29,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ccel.org/ccel/calvin/calcom33/calcom33.i.html
[^8]: Council of Constance, Session 13 (June 15, 1415), “Condemnation of Communion under Both Kinds,” in Decrees of the Ecumenical Councils, ed. Norman P. Tanner, online transcription, Papal Encyclicals Online,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papalencyclicals.net/councils/ecum16.htm; Martin Luther,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520), trans. Albert T. W. Steinhaeuser, ed.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Henry Beveridg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 IV.17.48–5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ccel.org/institutes
[^9]: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7.
[^10]: Meredith G. Kline, By Oath Consigned: A Reinterpretation of the Covenant Signs of Circumcision and Baptism (Eerdmans, 1968), Meredith G. Kline Resource Site,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meredithkline.com/klines-works/by-oath-consigned
[^11]: “Heidelberg Catechism,” Q. 76,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Korean translation,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heidelberg-catechism?language=ko
[^12]: Calvin, Institutes, II.16.10–12; “Heidelberg Catechism,” Qs. 37, 44.
[^13]: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7.2–3; 8.5.
[^14]: Calvin, Institutes, II.16.5.
[^15]: Irenaeus, Against Heresies V.16.3 and V.19.1,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5),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16.htm and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19.htm; Venantius Fortunatus, “Pange lingua gloriosi proelium certaminis,” Latin Wikisource,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la.wikisource.org/wiki/Pange_lingua_gloriosi_proelium_certaminis
[^17]: Mishnah Sukkah 4:9; 5:1, Sefaria,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sefaria.org/Mishnah_Sukkah.4.9 and https://www.sefaria.org/Mishnah_Sukkah.5.1
[^18]: Geerhardus Vos, “The Eschatological Aspect of the Pauline Conception of the Spirit,” 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10 (1912), The Geerhardus Vos Projec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biblicaltheology.org/eapcs.pdf
[^19]: Calvin, Institutes, III.1.1.
[^20]: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8.7.
[^21]: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2, trans. William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ommentary on John 19:28–3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5.html
[^22]: Calvin, Commentary on John, commentary on John 19:30.
[^23]: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9.2.
[^24]: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20.2,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7, ed. Philip Schaff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8),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120.htm; John Chrysostom, Baptismal Instructions 3.16–17, trans. Paul W. Harkins, Ancient Christian Writers 31 (Newman Press, 1963); compare Chrysostom, “Homily 85 on the Gospel of John,”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4,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85.htm; Ambrose, On the Holy Spirit III.11.68, trans. H. de Romestin, E. de Romestin, and H. T. F. Duckworth,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0, ed.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96),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34023.htm
[^25]: “Vidi aquam egredientem de templo,” Cantus Database, Cantus ID 005403,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cantusdatabase.org/chant/689241
[^26]: Calvin, Commentary on John, commentary on John 19:34; Calvin, Institutes, IV.14.22.
[^27]: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Philippians, Colossians, and Thessalonians, trans. and ed. John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51), commentary on Col. 1:24,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ccel.org/ccel/calvin/calcom42/calcom42.v.ii.vi.html;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08,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108.htm For Augustine’s more explicit head/body formulation, see Augustine, Sermon 341, in Sermons 341–400, trans. Edmund Hill, O.P., ed. John E. Rotelle, The Works of Saint Augustine III/10 (New City Press, 1995), online reproduction,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esleyscholar.com/wp-content/uploads/2019/04/Augustine-Sermons-341-400.pdf; see also Augustine, Sermon 87,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160387.htm
[^28]: John Murra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Eerdmans, 1955), 161. For an online reproduction of Murray’s sentence describing union with Christ as “the central truth of the whole doctrine of salvation,” see “Union with Christ,” Grace Quotes,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gracequotes.org/quote/union-with-christ-is-really-the-central-truth-of-the-whole-doctrine-of-salvation-not-only-in-its-application-but-also-in-its-once-for-all-accomplishment-in-the-finished-work-of-christ For the book’s accomplishment/application structure, see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rts.edu/resources/redemption-accomplished-and-applied
[^29]: Crashaw, “In Christum Vitem,” in Complete Works, vol. 2.
[^30]: Westminster Assembly, The Shorter Catechism, Q. 1,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opc.org/sc.html
[^31]: Geerhardus Vos, The Pauline Eschatology (published by the author, 1930), esp. chap. 2, “The Interaction between Eschatology and Soteriology,” Monergism,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monergism.com/pauline-eschatology-ebook; Vos, Biblical Theology.
[^32]: Didache 10.6, in “The Didache,”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0714.htm
[^33]: Zacharias Ursinus, commentary on Heidelberg Catechism Q. 76, in “The Lord’s Supper | Lord’s Day 28,” Reformed Confessions,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reformedconfessions.org/heidelberg/lords-day-28
[^34]: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Heidelberg Catechism,” Qs. 75–79,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heidelberg-catechism; Korean version,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heidelberg-catechism?language=ko.
[^35]: Calvin, Institutes, IV.17.12, 32, 36.
[^36]: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7.1–3; 29.1, 7.
[^37]: Garrett S. Craig, “Sobriety and Speech in Greco-Roman Moralists and the Jewish Wisdom Tradition with Reference to 1 Timothy 5:23,”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68, no. 3 (2025): 525–43,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etsjets.org/wp-content/uploads/JETS_68.3_525_Craig.pdf
[^38]: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Epistles to Timothy, Titus, and Philemon, trans. William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56), commentary on 1 Tim. 5:23,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ccel.org/ccel/calvin/calcom43/calcom43.iii.vii.vi.html
[^39]: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7.3; 29.3, 5.
[^40]: Mishnah Pesachim 10, Sefaria,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sefaria.org/Mishnah_Pesachim.10.1 Because the Mishnah is later than the New Testament period, this citation supports the later four-cup pattern, not a precise reconstruction of first-century Passover practice.
[^41]: Calvin, Institutes, III.10.2.
[^42]: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3, Sin and Salvation in Christ, ed. John Bolt, trans. John Vriend (Baker Academic, 2006), 577–78. For an online discussion and quotation of this passage, see Dane C. Ortlund, “‘Created Over a Second Time’ or ‘Grace Restoring Nature’? Edwards and Bavinck on the Heart of Christian Salvation,” The Bavinck Review 3 (2012): 9–29, esp. 21–22,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bavinckinstitute.org/wp-content/uploads/2012/06/TBR3a-Ortlund1.pdf
[^43]: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commentary on Matt. 26:29; Chrysostom, “Homily 82 on Matthew”;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2.2.
[^44]: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6.
[^45]: Michael D. Bush, “Is the Reformation Ever Finished?,” Theology Matters 22, no. 1 (2016),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theologymatters.com/articles/is-the-reformation-ever-finished Bush traces the reformanda language through Jodocus van Lodenstein and cautions against attributing the modern maxim directly to Calvin.
[^46]: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Heidelberg Catechism,” Q. 86,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heidelberg-catechism
[^47]: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9.2.
[^48]: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6.2.
[^49]: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Heidelberg Catechism,” Q. 1,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heidelberg-catechism; Calvin, Institutes, III.7.1.
[^50]: Abraham Kuyper, “Sovereignty in Its Own Sphere” (Souvereiniteit in eigen kring), inaugural address at the Free University, Amsterdam, October 20, 1880, English translation and Dutch tex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rghollenbeck.com/extra/kuyper/sphere_sovereignty.html
[^5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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