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가나의 포도주에서 십자가의 신 포도주와 어린양의 혼인잔치까지

「말씀의 섭취」 3부작 후속편 — 언약의 잔, 생수, 식탁, 십자가를 따라 읽는 개혁주의적 성경신학
 
 
 

 

1부. 물이 하나님을 보고 붉어졌다

— 가나에서 언약의 잔까지

 

서곡: 수줍은 물

갈릴리 가나의 어느 혼인잔치,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이 아귀까지 차 있다. 하인들이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가는 짧은 사이, 무엇인가가 일어난다. 복음서는 그 순간을 묘사하지 않는다. 요한은 물이 언제,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지 말하지 않고, 다만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요2:9)고 적을 뿐이다. 기적의 순간 자체는 침묵 속에 있다. 그 침묵 속으로 한 시인이 라틴어 한 줄을 들여보냈다.

Nympha pudica Deum vidit, et erubuit.

수줍은 물이 하나님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조금 더 문학적으로 옮기면 이렇게도 읽힌다. "물은 자기 하나님을 보고, 부끄러워 붉어졌다." 이 문장은 오랫동안 학창 시절 일화와 함께 떠돌았다. 이튼이나 웨스트민스터의 어느 소년이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이라는 라틴어 작시 과제를 받고 긴 시 대신 이 한 줄만 써 내어 선생을 감탄시켰다는 이야기이고, 그 소년의 이름은 전하는 사람에 따라 젊은 바이런이 되기도 하고 드라이든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의 실제 출처는 그보다 앞선다. 17세기 영국 시인 리처드 크래쇼(Richard Crashaw, c.1613–1649)가 1634년 케임브리지에서 펴낸 라틴어 성시집 『거룩한 경구집』(Epigrammatum Sacrorum Liber)에 「요한복음 2장: 포도주로 변한 물」(Joann. 2. Aquae in vinum versae)이라는 네 줄짜리 경구가 있고, 그 마지막 행이 바로 이 문장이다. 전문은 이렇다.[^1]

Unde rubor vestris et non sua purpura lymphis?
Quae rosa mirantes tam nova mutat aquas?
Numen, convivae, praesens agnoscite Numen:
Nympha pudica Deum vidit, et erubuit.

어디서 왔는가, 너희 물에 이는 붉음, 제 것 아닌 이 자줏빛은?
어떤 장미가 놀라는 물을 이토록 새롭게 물들이는가?
손님들이여, 여기 계신 신성을, 여기 계신 신성을 알아보라.
수줍은 물이 하나님을 보고, 붉어졌도다.

 
학창 시절의 일화는 이 마지막 행의 어순을 조금 바꾸어 전해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줄을 어느 영리한 소년의 재치가 아니라, 복음서 본문을 붙들고 앉아 기적을 한 편의 경구로 빚어낸 성시(聖詩) 전통의 열매로 받아도 좋다. 청교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훗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시인의 한 줄로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글을 여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구절이 붙잡은 것은 특정 교파의 교리가 아니라 요한복음 2장 그 자체이고, 교회가 공유하는 성경의 기쁨이다.
 
이 짧은 시적 상상은 가나의 기적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다. 복음서가 침묵하는 그 순간을 시인은 물의 편에서 바라본다. 기적을 행하는 쪽이 아니라 기적을 당하는 쪽에서, 곧 피조물의 편에서. 물은 자기를 만드신 분이 곁에 계신 것을 알아보았고, 그 앞에서 제 빛깔을 지키지 못했다.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의 수줍음이 포도주의 붉은 빛이 되었다.
 
이것은 크래쇼만의 발명은 아니다. 성경에도 물이 하나님을 "본다"는 대담한 시어가 있다. 아삽의 시는 출애굽의 밤을 이렇게 노래한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시77:16)

 
그리고 유월절마다 불리던 할렐 시편은 바다와 요단과 산들이 주의 임재 앞에서 몸을 뒤틀었다고 노래한 뒤 이렇게 끝맺는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114:7–8)

 
크래쇼가 이 시편들을 의식하고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경구는 성경의 시가 이미 알고 있던 감각, 곧 피조세계가 창조주를 알아본다는 감각과 한 핏줄이다. 그리고 시편 114편의 마지막 두 행, 반석을 쳐서 물이 되게 하셨다는 그 노래는 이 글의 뒤편에서 다시 우리를 부를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이 아름다운 붉은 포도주는 뜻밖의 질문을 불러온다. 가나에서 물을 좋은 포도주로 바꾸신 분, 초막절 명절 끝날에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고 외치신 분, 다락방에서 "나는 참포도나무요"(요15:1)라고 말씀하신 분이, 요한복음의 끝에서는 십자가에 달려 "내가 목마르다"(요19:28)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이 우슬초에 매어 올린 신 포도주를 받으신다. 더 이상한 것이 있다. 그분은 불과 몇 시간 전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잔을 제자들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26:29)

 
개역개정은 이 문장을 우리말 어순에 맞게 매끄럽게 풀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한 단어가 더 또렷하게 서 있다. "그 날까지"(ἕως τῆ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 헤오스 테스 헤메라스 에케이네스). 예수께서는 막연히 "마시는 때까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 날까지"라고 하셨다. 이 글의 제목은 그 두 단어에서 왔다.
*새한글성경(KNT);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지금부터 나는 포도나무에서 난 이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겁니다. 바로 그날이 되어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대들과 함께 그것을 새로 마실 때까지는요.”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그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분이, 왜 십자가에서는 다시 신 포도주를 받으셨는가? 이것은 사소한 본문 간 긴장처럼 보인다. 어떤 이는 이것을 복음서의 모순이라며 흥미로워할 것이고, 어떤 이는 "신 포도주는 포도주가 아니다"라는 식의 재빠른 해결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질문을 서둘러 치우지 않고 붙들고 따라가 보면, 그 끝에서 우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식탁과 하나의 잔, 그리고 하나의 목마름을 만나게 된다.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먹음 다음에 놓인 잔

앞선 세 편의 글, 곧 「말씀의 섭취」 3부작은 모두 명령형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 말씀을 먹으라!」,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 「먹지 말라, 먹으라」. 세 편은 각기 다른 길로 한 가지 성경의 언어를 따라갔다. "먹으라."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내미신 두루마리를 받았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3:3). 선지자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먹어야 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그 두루마리의 자리에 한 인격이 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두 번째 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짧은 한 문장,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Crede, et manducasti)를 따라,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살폈다.[^2] 세 번째 글은 에덴의 금지된 열매에서 베드로의 환상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먹음이 "취함"과 "받음"이라는 두 길 사이에서 갈라진다는 것을 보았다. 자기 손으로 움켜쥐는 먹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먹음이 있다.
 
그 세 편이 이르렀던 자리는 개혁주의 성찬론이 오랫동안 지켜 온 경계선 안이었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조잡한 육체적 섭취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지 마음속 회상이나 주관적 기억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성령과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실제로 연합하고 그의 생명과 유익에 참되게 참여하는 것이다. 말씀과 성례는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둘은 동일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하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웨스트민스터 전통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자는 "육적으로나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그러나 참되고 실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그 죽음의 모든 유익을 받는다.[^3] 그리고 그 모든 논의는 한 문장으로 모였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먹음의 질문은 그 자체로 한 번 닫혔다. 그 연작은 미완성이 아니었다. 그런데 성경의 식탁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떡 옆에 놓인 것이 하나 더 보였다.
 
이다. 성경은 "먹으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마시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그 명령은 성경의 가장 결정적인 자리들마다 놓여 있다. 이사야의 초청은 이렇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은 잔을 들어 이르신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26:27)

 
초막절의 가장 큰 날, 그분은 서서 외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7:37)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묻는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전10:16)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초청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22:17)

 
앞선 연작의 명령이 "먹으라"였다면, 이제 들려오는 명령은 "마시라"다. 이 글은 「말씀의 섭취」가 열어 놓은 문을 지나, 성경의 식탁에서 떡 옆에 놓여 있던 잔과, 그 잔 너머로 흐르는 생수를 따라가 보려는 후속편이다. 사실 먹음과 마심은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앞선 연작의 중심 본문이었던 요한복음 6장, 곧 "생명의 떡"의 장 한가운데에서도 목마름은 이미 말해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떡을 말씀하시는 자리에서 주님은 목마름도 함께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장은 더 강렬한 언어로 나아간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6:53–56)

 
앞선 연작은 이 본문을 두고 개혁주의가 걸어온 좁은 길을 따랐다. 이 말씀을 화체설적으로, 곧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실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방향으로 읽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을 단순한 비유적 수사로 증발시키지도 않는다. 주님 자신이 같은 장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셨다. 먹고 마심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고, 성령으로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과 생명의 유익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경계선은 이 글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렇다면 "마심"은 "먹음"에 무엇을 더하는가? 같은 말을 다른 동사로 반복하는 것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떡을 얼마간 쌓아둘 수 있다. 곡식은 창고에 들이고, 만나조차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치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목마름은 사람이 가장 빨리, 가장 자주 자기의 한계를 깨닫는 자리다. 물은 마셔도 곧 다시 목마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하신 첫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요4:13). 마신다는 것은 매 순간 자기 바깥의 근원에 기대어 사는 존재라는 고백이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이렇게도 정의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2:13)

 
예레미야가 말하는 죄의 본질은 목마름 그 자체가 아니라, 근원을 떠나 스스로 물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흐르는 샘 곁을 떠나 제 손으로 판 웅덩이에 물을 가두려는 것, 생명을 받는 대신 생명을 저장하고 소유하려는 것. 그 웅덩이는 터져 있다. 앞선 연작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신다"는 데 이르렀다면, 이번 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려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마심으로써 생명을 스스로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 의존한다.

 
그런데 이 글이 붙들려는 것은 그보다 한 겹 더 깊은 역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마실 수 있는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가 마셔야 할 잔을 마시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피를 마시는 자로 불리는데, 그는 십자가에서 목마른 자가 되신다. 우리는 생수를 받는데, 생수의 근원이 목마르시다. 우리는 축복의 잔을 받는데, 그는 저주의 잔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이 후속편 전체의 숨은 질문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앞선 질문 다음에 오는 질문. 그렇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마신다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마실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마셔야 하셨는가?
 
이 질문을 따라 우리는 세 개의 장소를 지나게 될 것이다. 먼저 가나의 혼인잔치와 다락방의 식탁, 곧 좋은 포도주가 주어지고 언약의 잔이 건네지는 자리. 다음으로 겟세마네와 골고다, 곧 그 잔이 저주의 잔으로 뒤집히고 생수의 근원이 목마르며 "다 이루었다"가 선언되는 자리. 마지막으로 교회와 새 예루살렘, 곧 축복의 잔과 제자의 잔이 함께 마셔지다가 마침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잔치가 시작되는 자리. 이 글은 앞의 두 장소를 거쳐 마지막 장소까지 따라간다.
 
 

 

1. 가나: 좋은 포도주를 주시는 분

요한은 공생애의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의 혼례에서 시작한다. 이야기의 줄기는 이렇다. 예수와 그 어머니와 제자들이 혼례에 청함을 받았는데, 잔치 도중 포도주가 떨어진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알린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요2:3)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2:4)

 
그곳에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한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고, 하인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그 항아리들에 물을 아귀까지 채워 연회장에게 떠다 준다.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은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한 채 신랑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요2:10)

 
요한은 이것이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며, 이로써 그의 영광이 나타나고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적는다(요2:11). 이 장면 전체는 요한복음 2:1–11을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여기서는 논증에 필요한 표현들을 차례로 붙들며 따라가 보자. 이야기의 세부 하나하나가 뒤에서 다시 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잔치

이야기의 발단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포도주가 떨어졌다. 며칠씩 이어지던 고대 근동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잔치를 연 집안의 체면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기쁨의 자리에서 기쁨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무엇보다 먼저 기쁨의 선물이다. 창조의 선하심을 노래하는 시편 104편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나게 하신 것들을 열거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시104:15)

 
요담의 우화에서 포도나무는 왕이 되라는 청을 거절하며, 자기 포도주를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삿9:13) 것이라고 부른다. 포도주는 창조세계가 인간에게 건네는 즐거움의 언어다. 이 사실은 이 글의 뒤편에서, 모든 포도주를 곧장 상징으로 끌어올리려는 유혹을 경계할 때 다시 중요해질 것이다. 가나의 포도주는 무엇보다 먼저 진짜 포도주이고, 진짜 혼인잔치의 진짜 기쁨이다. 그러면서도 선지서를 읽어 온 독자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또 다른 울림을 갖는다. 이사야는 땅에 임하는 심판을 이렇게 묘사했다.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사24:11)

 
반대로 선지자들이 그린 회복의 날, 메시아적 구원의 날에는 포도주가 넘친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욜3:18)

 
아모스도 같은 날을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암9:13)고 노래한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 날의 잔치를 이렇게 그렸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사25:6)

 
요한은 가나 이야기에서 이 선지서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가나의 기적을 이 본문들의 "성취"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지서의 언어를 품고 살던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정경 전체를 손에 든 우리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에 한 사람이 들어와 넘치도록 좋은 포도주를 주는 장면은 그 배경 위에서 읽힐 수밖에 없다. 요엘 3:18이 포도주와 함께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라고 말하는 것도 기억해 두자. 포도주의 풍성함과 성전에서 흐르는 물은 선지자의 환상 속에서 이미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 두 이미지가 요한복음 안에서 어떻게 다시 만나는지는 뒤에서 보게 될 것이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사정을 알린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그리고 아들의 대답은 뜻밖에 거리를 둔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자여"(γύναι, 귀나이)는 무례한 호칭이 아니다. 그러나 아들이 어머니를 부르는 다정한 말도 아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τί ἐμοὶ καὶ σοί, 티 에모이 카이 소이)라는 셈어적 관용구도 한 걸음 물러서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일하시는 시간표가 혈육의 요청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밝히신다. 그리고 그 시간표를 가리키는 말이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내 때"(ἡ ὥρα μου, 헤 호라 무).
 
요한복음을 따라 읽는 독자는 이 "때"가 한 번 나오고 사라지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것은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는 시계추다. 초막절에 사람들이 그를 잡으려 했을 때에도 손을 대는 자가 없었는데, 요한은 그 까닭을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요7:30)라고 적는다. 성전 헌금함 앞에서 가르치실 때도 같은 말이 반복된다(요8:20). "아직"이 계속 쌓여 간다. 그러다가 헬라인들이 예수를 뵙고자 찾아온 날, 마침내 시계가 바뀐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2:23)

 
그리고 곧바로 그 영광의 때가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12:27)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12:32–33)

 
요한복음에서 "때"는 영광의 때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때다. 들림은 십자가에 달리심이면서 동시에 높아지심이다. 공관복음이 고난과 영광을 시간 순서로 나란히 놓는다면, 요한은 그 둘을 하나의 "때" 안에 겹쳐 놓는다. 그리고 수난 기사의 문턱에서 요한은 이렇게 쓴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13:1)

 
"끝까지"(εἰς τέλος, 에이스 텔로스). 이 단어를 기억해 두자. 이 "끝"(τέλος, 텔로스)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19장에서 십자가 위의 마지막 외침,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로 다시 돌아온다. 같은 어근이다. 다락방에서 "끝까지" 사랑하기 시작하신 분이, 십자가에서 그 사랑이 "끝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신다. 대제사장적 기도의 첫 문장도 이 흐름 위에 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그렇다면 가나의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는 요한복음 전체 앞에 걸린 예고문이다. 가나에서 예수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셨지만(요 2:11), 그것은 아직 그 "때"의 영광이 아니었다. 가나의 포도주는 앞당겨 맛본 영광, 아직 오지 않은 때를 가리키는 표적(σημεῖον, 세메이온)이다. 요한이 이 기적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표적"이라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표적은 제 자신 너머를 가리킨다. 여기에 요한복음이 숨겨 둔 또 하나의 괄호가 있다. 예수의 어머니는 요한복음에 단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또 한 번은 십자가 곁에서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19:26)

(십자가 곁의 장면 전체: 요19:25–27)
 
두 장면 모두에서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신다. 가나에서는 "내 때가 아직"이었고, 십자가에서는 그 때가 와 있다. 그리고 십자가 곁의 이 장면 바로 다음 절이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요19:28)이다. 어머니가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던 이야기의 괄호가, 아들이 "내가 목마르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닫힌다. 요한이 이 대칭을 의도적으로 설계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라면 이 수미(首尾)의 울림을 지나치기 어렵다.

정결 예식의 돌항아리

요한은 이상하리만치 구체적으로 항아리를 묘사한다.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 "통"으로 번역된 메트레테스(μετρητής)는 대략 40리터 가까운 액량이니, 항아리 하나에 80리터에서 120리터, 여섯 항아리를 합하면 수백 리터에 이른다. 혼인잔치 하나를 위해 필요한 양을 훨씬 넘어서는 풍성함이다. 그리고 하인들은 그 항아리를 "아귀까지" 채웠다. 그 항아리의 원래 용도는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손과 그릇을 씻는 정결 예식을 위한 물이었다. 씻기 위한 물이 잔치의 포도주가 된 것이다. 여기서 해석자는 조심해야 한다. 이 장면을 유대교의 정결법에 대한 경멸로 읽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것은 폐기가 아니라 성취다. 요한은 서문에서 이미 이렇게 말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17)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선물이었다. 정결 예식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깨끗해져야 한다는 진리를 매일 가르쳤다. 그러나 돌항아리의 물은 사람의 손을 씻을 수는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씻을 수는 없었다. 요한복음은 참된 정결이 어디서 오는지를 차근차근 보여 준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 불렀다. 다락방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요15:3)

 
앞선 연작의 독자라면 이 구절에서 걸음을 멈출 것이다. 제자들을 깨끗하게 한 것은 "말씀"이다. 그리고 요한은 그의 첫 서신에서 그 정결의 가장 깊은 근거를 이렇게 밝힌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7)

 
정결을 위한 물이 포도주가 되고, 그 포도주는 훗날 다락방에서 "언약의 피"를 가리키는 잔이 되며, 그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 이 연결은 요한이 가나 본문 안에서 직접 전개한 논증은 아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그리고 공관복음의 성찬 제정을 정경 안에서 함께 읽을 때 드러나는 성경신학적 선이다. 그러나 그 선은 억지로 그은 것이 아니라 본문들이 스스로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다.

하인들은 알았다

크래쇼의 경구로 잠시 돌아가 보자. 시인은 물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잔치에서 누가 그것을 보았는가? 요한은 흥미로운 대조를 남긴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잔치의 책임자, 포도주의 품질을 판정하는 전문가는 맛은 보았으나 근원은 알지 못했다. 알았던 사람은 하인들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했던가? 예수의 어머니가 그들에게 한 말은 이것이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들었다.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물을 채우라니. 정결 예식용 항아리의 물을 잔치의 책임자에게 떠다 주라니.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대로 했고, 그 순종의 자리에서 기적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앞선 연작에서 우리는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나의 하인들은 그 붙들림의 작은 초상이다. 그들은 기적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 말씀에 붙들려 움직였고, 그래서 알았다. 맛보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포도주의 좋음은 연회장도 알았지만, 그 포도주가 누구에게서 왔는지는 말씀대로 물을 길은 사람들만 알았다.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연회장의 말은 이 이야기의 절정이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연회장은 신랑을 칭찬하려 했지만, 요한복음의 독자는 그 칭찬이 엉뚱한 사람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안다. 좋은 포도주를 둔 것은 신랑이 아니라 그 잔치에 손님으로 오신 분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이 뒤에서 밝히듯이, 그분이야말로 참 신랑이시다(요3:29). 이 주제는 뒤에서 혼인잔치를 다룰 때 본격적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좋은 것을 나중까지 두었다"는 이 한 문장은 구속사의 문법 자체를 요약한다. 사람의 잔치는 좋은 것에서 낮은 것으로 흘러간다. 처음의 흥분이 가라앉으면 질이 떨어지는 것을 내놓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잔치는 반대로 흐른다. 히브리서는 그 흐름을 이렇게 말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1:1–2)

 
게할더스 보스는 『성경신학』에서 계시의 역사를 유기적 진전으로 설명했다(요지).[^4] 그의 유기적 계시 이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씨앗이 나무가 될 때 씨앗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 안에서 자기의 목적에 이른다. 옛 계시는 불완전했으나 거짓이 아니었고, 새 계시는 옛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있던 것을 꽃피운다. 가나의 돌항아리와 좋은 포도주의 관계도 그렇게 읽을 수 있다. 물은 버려지지 않았다. 물은 포도주가 되었다.
 
작은 관찰 하나를 덧붙이자면, 연회장의 "지금까지"는 헬라어로 헤오스 아르티(ἕως ἄρτι)이고, 마태복음 26:29에서 주님이 "이제부터"(ἀπ᾽ ἄρτι, 아프 아르티) 마시지 않겠다고 하실 때도 같은 "지금"(ἄρτι, 아프티)이 쓰였다. 가나에서는 좋은 포도주가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었고, 다락방에서는 "지금부터" 그 잔이 멈춘다. 물론 이것은 서로 다른 복음서 기자의 서로 다른 문장이므로, 요한과 마태가 서로를 의식하고 썼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정경을 한 권으로 읽는 독자에게 허락된 작은 울림이다. 좋은 포도주가 "지금까지" 보관되었다가 드디어 나오는 가나와, 포도나무의 열매가 "지금부터" 멈추고 "그 날"을 기다리는 다락방 사이에, 복음 이야기의 시간이 흐른다.
 
요한이 이 이야기를 "사흘째 되던 날"로 시작한다는 것도 많은 해석자들의 눈길을 끌어 왔다. 문맥상 이것은 1장의 날짜 흐름을 잇는 표현이지만, 부활의 "사흘"을 아는 독자에게 이 날짜는 은은한 울림을 갖는다. 이 울림을 과장해서는 안 되지만, 영광이 처음 나타난 날이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는 것은 기억해 둘 만하다.

가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러므로 가나의 이야기를 단순히 "예수께서 잔치의 필요를 채워 주신 풍요의 기적"으로만 읽는 것은 요한이 쓴 것의 절반만 읽는 셈이다. 요한은 이 표적을 네 개의 주제로 짜 놓았다. 혼인, 포도주, 영광,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때. 혼인잔치가 무대이고, 포도주가 표적의 내용이며, 영광이 표적의 목적이고, "아직 오지 않은 때"가 표적의 방향이다. 그리고 이 네 주제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함께 읽을 때, 정경의 끝에서 다시 모인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계시록 19장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향해 열려 있고, 가나의 "아직"은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를 거쳐 새 예루살렘의 "이루었도다"(계21:6)로 이어진다. 이 글은 그 흐름을 따라 하나의 삼중 구조를 제안한다.

가나의 좋은 포도주 → 십자가의 신 포도주 → 어린양의 혼인잔치

 
여기서 정직하게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삼중 구조는 칼빈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정식화한 교리 공식이 아니다. 고전 개혁파 신학자들이 이 세 장면을 이런 도식으로 묶어 가르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그리고 공관복음의 성찬 본문을 정경적으로 함께 읽을 때 드러나는 성경신학적 종합이다. 그러나 그 종합이 서 있는 토대, 곧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의 중심이시고, 구약의 약속이 그 안에서 성취되며, 현재의 교회가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산다는 확신은 개혁주의 전통이 한결같이 붙들어 온 것이다. 이 글에서 "개혁파가 말한 것"과 "개혁파의 토대 위에서 이 글이 종합하는 것"은 필요한 자리마다 구별될 것이다.
 
가나에서 그분은 좋은 포도주를 주셨다. 잔치는 구원되었고, 신랑의 체면은 지켜졌으며, 제자들은 믿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한 문장이 그림자처럼 서 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좋은 포도주는 그 때가 오기 전에 주어졌다. 그렇다면 그 때가 오면, 그분의 손에는 어떤 잔이 들려 있을 것인가?
 
 

 

2.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 금주 선언이 아니라 종말론적 약속

이제 장면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으로 옮겨 간다. 유월절 밤이다. 누가는 그 밤 예수의 첫 마디를 이렇게 전한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눅22:15)

 
주님은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뒤(눅22:16), 잔을 받아 감사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게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눅22:18)

(전체 문맥: 눅 22:14–20)
 
"원하고 원하였노라"(ἐπιθυμίᾳ ἐπεθύμησα, 에피튀미아 에페튀메사). 히브리어적 강조 어법으로, 간절히, 사무치게 원했다는 뜻이다. 주님은 이 식탁을 기다리셨다. 그리고 그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멈출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는 같은 밤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26:26–29)

 
마가의 기록은 가장 간결하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막14:25)

문장의 무게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장을 처음 읽는 사람의 귀에는 부정문이 먼저 들린다. "마시지 아니하리라." 헬라어도 강한 부정이다. 우 메 피오(οὐ μὴ πίω)는 이중 부정으로, "결코 마시지 않으리라"는 단호한 어조를 갖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말씀을 일종의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처럼 포도나무의 소산을 입에 대지 않겠다는 금주의 맹세로 읽기도 한다. 그렇게 읽으면 앞의 질문은 정말로 난처해진다. 금주를 서원하신 분이 몇 시간 뒤에 신 포도주를 받으셨으니, 서원을 깨신 것인가?
 
그러나 문장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 이 문장의 무게중심은 "마시지 않는다"에 있지 않다. 문장은 부정으로 시작하지만 두 개의 표현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그 날까지", 그리고 "너희와 함께."
 
먼저 "포도나무에서 난 것"(τοῦ γενήματος τῆς ἀμπέλου, 투 게네마토스 테스 암펠루)이라는 표현을 보자. 이 표현은 후대 미쉬나(베라코트 6:1)에 정리된 유대의 식사 축복문, 곧 포도주를 들 때 "포도나무의 열매를 창조하신 분"(보레 페리 하가펜, בּוֹרֵא פְּרִי הַגָּפֶן)을 찬송하는 문구와 상응한다. 미쉬나는 2세기 말에 정리된 문헌이므로 1세기 식탁의 정확한 전례 형식을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고, 예수의 말씀이 그 축복문에서 직접 왔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상응은 적어도 이 표현이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며 함께 나누는 식탁 교제의 언어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주님이 멈추시는 것은 어떤 성분의 섭취가 아니라 바로 그 식탁이다. 제자들과 함께 축복하고, 감사하고, 나누던 그 식탁.[^5]
 
다음으로 "그 날까지"(ἕως τῆ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 헤오스 테스 헤메라스 에케이네스). 구약 선지서를 읽은 사람에게 "그 날"(바욤 하후, בַּיּוֹם הַהוּא)은 평범한 날짜가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날이다.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 25장의 잔치,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베푸시는 그 연회가 바로 그 날의 잔치다. 이사야는 그 연회를 묘사한 뒤 이렇게 잇는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사25:8–9)

 
포도주의 잔치, 사망의 멸망, 눈물의 씻김, 그리고 "그 날에."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이사야 25장을 직접 인용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 날까지" 기다린다는 말씀이 선지서의 종말론적 잔치의 지평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 약속은 계시록 21장에서 이사야의 그 문장이 다시 들려올 때 가장 분명해진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계21:4). 그리고 "너희와 함께"(μεθ᾽ ὑμῶν, 메트 휘몬). 이 두 단어는 마가에도 누가에도 없고 마태에게만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 전체의 틀에서 보면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마태는 복음서의 첫 장에서 예수의 이름을 이렇게 풀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

그리고 복음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20)

 
"우리와 함께"로 시작해서 "너희와 함께"로 끝나는 복음서. 그 한가운데, 떠나시기 전날 밤의 식탁에서 주님은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을 약속하신다. 마태에게 마지막 만찬의 약속은 금주의 선언이 아니라 임마누엘의 약속이다. 지금 이 식탁의 교제는 끝나지만, "함께"는 끝나지 않는다. 그 "함께"가 다시 식탁으로 모이는 날이 온다.
 
마지막으로 "새것으로"(καινόν, 카이논). 헬라어에서 "새롭다"는 뜻의 단어로는 흔히 네오스(νέος)와 카이노스(καινός)가 함께 거론된다.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최근의 것을,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향성의 차이일 뿐 절대적인 구분은 아니며, 두 단어의 의미 영역은 상당히 겹친다. 예컨대 히브리서 12:24는 "새 언약"을 말하면서 카이노스가 아니라 네오스(διαθήκης νέας)를 쓴다. 그러므로 이 단어 하나만으로 마태복음 26:29의 의미를 결정할 수는 없다. 이 "새것"이 새 창조에 속한 새로움이라는 것은 단어 자체보다 문맥, 곧 "그 날"과 "내 아버지의 나라"라는 말이 둘러싼 자리에서 드러난다. 신약이 "새 언약"(ἡ καινὴ διαθήκη, 눅22:20)과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를 말할 때 같은 카이노스 계열의 말을 쓴다는 것은 그 문맥적 의미와 잘 어울리는 울림이다. 주님이 "그 날에"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실 포도주는 지금의 포도주를 조금 더 좋게 만든 것이 아니라, 새 창조에 속한 새로움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6:29의 신학적 중심은 "다시 마시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 날까지"와 "너희와 함께"다. 이 말씀은 포도 성분이 들어간 액체를 다시는 입에 대지 않겠다는 물질적 금주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식탁 교제가 이제 끝나고, 하나님 나라의 새 식탁이 올 것이라는 언약적이고 종말론적인 선언이다. 작별의 말이면서 동시에 재회의 약속이다. 나는 이 식탁을 떠나지만, 이 식탁은 끝나지 않는다. 다음 잔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마실 것이다.

크리소스톰과 칼빈의 읽기

교회의 해석자들도 이 말씀을 물질적 금주의 선언으로 읽지 않았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마태복음 강해 제82강에서 이 구절을 다루며, "새것으로"를 새로운 방식, 곧 고난받을 수 있는 몸이 아니라 이제는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몸으로 마시는 것이라고 풀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 후에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은 몸이 그것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부활을 온전히 확증시켜 주기 위해서였다고 보았다(요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한 증언이 그 읽기의 근거가 된다.[^6]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행10:41)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이라고 옮겼지만, 헬라어 원문은 "함께 먹고 함께 마신"(συνεφάγομεν καὶ συνεπίομεν, 쉬네파고멘 카이 쉬네피오멘)이다. 크리소스톰이 이 구절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먹고 마심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은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는다. 주님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고 하신 것은, 성찬에서 포도주 대신 물만 쓰던 어떤 이들의 관행을 반박하는 근거도 된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물이 아니라 포도주를 낸다(요지). 이 지적은 흥미롭다.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을 영적으로만 증발시키지 않았다. 식탁의 포도주는 진짜 포도주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말씀의 중심을 금주가 아니라 부활 이후의 새로운 교제에 두었다. 누가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잡수시고(눅24:42–43), 요한복음에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21:12)고 부르신 장면들이 그 새 교제의 첫 빛이다.
 
칼빈은 『공관복음 주석』에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 말씀을 읽는다. 그는 이 말씀이 제자들이 곧 주님의 육체적 임재를 빼앗기게 될 것, 그리고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늘의 생명을 누리게 될 때까지 다시 그들과 함께 먹지 않으실 것을 뜻한다고 보았다. 먹고 마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그 생명은 음식과 음료의 도움이 필요 없는 생명이기에 주님이 그때에는 "새로운 종류의 마심"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며, 이 표현은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나눌 영광을 약속하신다는 것이다(요지). 칼빈은 같은 자리에서, 주님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고 하신 것은 그가 제자들에게 건넨 것이 여전히 포도주였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고 지적하며,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변한다는 화체설을 반박하는 근거로도 이 구절을 사용했다.[^7]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다. 크리소스톰은 "그 날"의 시작을 부활 이후의 식탁에서 보았고, 칼빈은 "그 날"을 하늘나라의 복된 생명에서 보았다. 그러나 개혁주의 종말론의 "이미"와 "아직"은 이 둘을 경쟁시킬 필요가 없게 해 준다. 부활은 "그 날"을 개시했고, 재림은 "그 날"을 완성한다. 부활하신 주님의 조반 식탁은 그 날의 새벽빛이고,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그 날의 한낮이다. 그리고 두 해석자는 중요한 한 점에서 일치한다. 이 말씀은 포도주 금지령이 아니다. 이것은 식탁 교제의 중단과 재개에 관한, 곧 언약적 교제의 종말론적 전망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면 질문은 해소되었는가

이렇게 읽으면 서곡의 질문은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태복음 26:29가 물질적 금주의 서원이 아니라면, 십자가에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것은 서원을 깨뜨린 것이 아니다. 주님은 "너희와 함께",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식탁을 멈추신 것이지, 포도나무에서 난 모든 액체를 거부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어진다. 이제 두 장면을 나란히 놓아 보자.
 
다락방에서 약속된 잔은 "너희와 함께" 마시는 잔이다. 골고다에서 받으신 신 포도주는 홀로 마시신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그 곁에는 로마 병사들이 있다.
 
다락방에서 약속된 잔은 "새것"이다. 골고다의 잔은 시어진 것, 곧 로마 병사들이 마시던 값싼 신 포도주(ὄξος, 옥소스)다.
 
다락방에서 약속된 잔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신다. 골고다의 잔은 저주의 나무 위에서 마신다.
 
다락방에서 약속된 잔은 "그 날"의 기쁨의 잔이다. 골고다의 잔은 "내가 목마르다"는 외침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니 이제 질문은 "왜 주님은 서원을 깨셨는가?"가 아니다.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와 함께 새 것으로 마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왜 우리 없이 홀로, 신 것을, 저주의 나무 위에서 마셔야 하셨는가? 한 가지 세부를 더 기억해 두자. 마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의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마27:34)

 
주님은 처음에 건네진 포도주를 거절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건네진 신 포도주는 받으셨다. 이 거절과 받으심의 차이, 그리고 요한이 그 받으심을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라는 말로 감싸는 이유는 뒤에서 자세히 살필 것이다. 지금은 이 한 가지만 붙들어 두자. 신 포도주의 장면은 마태복음 26:29의 약속을 깨뜨리는 장면이 아니라,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했던 장면이다. "그 날"에 이르는 길은 이 날을 지나간다.

 

 

3. 새 언약의 잔 —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다시 다락방으로 돌아가, 그 약속의 말씀 바로 앞에 놓인 잔을 보자. 주님은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26:27)고 하셨다.

감사의 잔, 축복의 잔

"감사 기도 하시고"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사스(εὐχαριστήσας)이다. 교회가 훗날 이 식사를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르게 된 말이 여기서 나왔다. 성찬은 무엇보다 먼저 감사의 식사다.
 
유월절 식사에서 여러 잔이 차례로 돌려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후대의 랍비 문헌은 유월절 식사에 네 개의 잔이 있었다고 전하고, 그중 식사를 마친 뒤에 드는 잔을 "축복의 잔"(코스 쉘 브라카, כּוֹס שֶׁל בְּרָכָה)이라 불렀다. 누가가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눅22:20)라고 쓰고, 바울이 "축복의 잔"(τὸ ποτήριον τῆς εὐλογίας,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 고전10:16)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유월절 식사의 잔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은 크다. 다만 그 랍비 문헌은 예수 시대보다 한두 세기 뒤에 정리된 것이므로, 마지막 만찬의 잔이 정확히 몇 번째 잔이었는지를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구원을 감사하며 들던 그 잔을 손에 드시고, 그 잔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셨다는 것이다.

"너희가 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πίετε ἐξ αὐτοῦ πάντες, 피에테 엑스 아우투 판테스). 떡에 대해서는 "받아서 먹으라"고 하신 주님이 잔에 대해서는 굳이 "다"(πάντες)라는 말을 덧붙이신다.

새한글성경(KNT); 또 잔을 들어 감사드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들 이 잔을 받아 마시세요.
 
교회사를 아는 독자에게 이 한 단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점차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고 떡만 주는 관행이 굳어졌고, 1415년 6월 15일 콘스탄츠 공의회 제13회기는 이 관행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보헤미아의 개혁 운동과, 그 뒤를 이은 우트라퀴스트(양종 성찬파)들이 평신도에게도 잔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저항한 것은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한 세기 뒤, 루터는 1520년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교회가 사로잡힌 첫 번째 포로 상태로 바로 이 잔의 박탈을 꼽았다. 칼빈 역시 『기독교강요』 제4권 성찬론의 말미에서, 주님께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명하셨는데 교회가 잔을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것은 그리스도의 제정을 사람이 임의로 고친 것이라고 비판했다(요지).[^8]
 
그러니 종교개혁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수백 년 동안 먹기만 하고 마시지 못했던 교회에 다시 잔을 돌려준 운동이기도 했다. 이 글이 "마심의 신학"을 말하려 할 때, 그것은 새로운 신학적 유행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이 회복한 주님의 제정,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를 성경 전체의 흐름 안에서 다시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주님은 떡만 주지 않으셨다. 잔도 주셨다. 그리고 그 잔을 모두에게 주셨다.

"언약의 피"

주님은 그 잔을 이렇게 부르신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언약의 피"(τὸ αἷμά μου τῆς διαθήκης, 토 하이마 무 테스 디아테케스). 이 표현을 들은 제자들의 귀에는 시내산이 울렸을 것이다. 모세가 율법의 말씀을 백성에게 낭독하고 백성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응답한 뒤, 모세는 제물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렸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24:8)

 
헬라어 구약(칠십인역)은 이 "언약의 피"를 토 하이마 테스 디아테케스(τὸ αἷμα τῆς διαθήκης)로 옮겼다. 주님의 말씀과 거의 같은 말이다. 다락방의 잔은 시내산의 피를 불러낸다. 그리고 출애굽기 24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피가 뿌려진 뒤 모세와 아론과 칠십 장로가 산에 올라,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문장 가운데 하나를 남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24:11)

 
피 다음에 식탁이 있다. 언약의 피가 뿌려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뵙고, 죽지 않고, 먹고 마신다. 이 장면이 이 글 전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뒤에서 따로 한 장을 들여 살필 것이다. 지금은 주님께서 잔을 "언약의 피"라 부르셨을 때, 그것이 피와 식탁과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로 묶인 시내산의 장면을 불러오는 말이었다는 것만 기억해 두자. 누가와 바울은 같은 말씀을 "새 언약"으로 전한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22:20)

 
이 "새 언약"은 예레미야의 약속을 가리킨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렘31:31)

 
그 새 언약은 출애굽 때 맺은 언약과 같지 않을 것인데, 하나님은 그 이유를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렘 31:32)고 말씀하신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시고(31:33), 약속은 이렇게 끝난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31:34). 약속 전체는 예레미야 31:31–34를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이 약속 안에 두 가지를 눈여겨보자. 하나는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설명하시며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언약은 처음부터 혼인의 언어로 말해져 왔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그 첫 표적의 무대였다는 것은, 이 언약의 혼인 언어를 기억하는 독자에게 결코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신랑과 신부의 주제는 뒤에서 다시 불러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새 언약의 약속이 "죄 사함"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마태만이 잔의 말씀에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εἰς 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를 덧붙인다. 마태복음의 첫 장에서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말을 기억한다면 이 덧붙임의 무게를 알 수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마태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죄 사함의 약속이었고, 마지막 만찬의 잔은 그 이름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준다. 그의 피로. "많은 사람을 위하여"(περὶ πολλῶν, 페리 폴론)라는 말도 구약의 한 본문을 불러낸다.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53:12)

 
"많은 사람"(라빔, רַבִּים)의 죄를 담당하는 종. 다락방의 잔은 시내산의 언약의 피, 예레미야의 새 언약,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을 한 잔에 담는다. 이 잔을 받는다는 것은 이 모든 약속이 이 사람의 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받는 것이다.

표와 인, 그리고 제재

개혁주의 전통은 성례를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sign)와 인(seal)"이라고 불러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장은 성례가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유익을 나타내고, 그 안에서 우리가 받은 몫을 확증하며, 교회에 속한 자와 세상을 눈에 보이게 구별하고, 신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엄숙히 묶는다고 가르친다(요지). 성찬의 잔은 언약의 약속을 눈에 보이게 하는 표이며, 믿는 자에게 그 약속을 확증하는 인이다.[^9]
 
메러디스 클라인은 이 언약의 표를 조금 더 날카롭게 보게 해 준다. 그는 『맹세로 위임된』(By Oath Consigned, 1968)에서 할례와 세례 같은 언약의 표가 단지 축복의 약속만이 아니라, 언약의 제재(covenant sanctions), 곧 순종에 따르는 축복과 배반에 따르는 저주를 함께 담고 있다고 논증했다. 고대 근동의 조약에서 맹세의 의식은 "만일 내가 이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되리라"는 자기저주의 형식을 띠었고, 성경의 언약 의식도 그 구조를 공유한다는 것이다(요지). 클라인의 모든 세부 논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 통찰은 한 가지를 분명히 해 준다.[^10] 언약의 피는 생명의 피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피다. 피가 흘려졌다는 것은 누군가가 죽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이렇게 요약한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22)

 
주님이 제자들에게 건네신 잔은 언약의 축복의 잔이다. 죄 사함과 새 언약과 생명의 잔이다. 그러나 그 잔에 담긴 이름은 "흘리는 바 나의 피"다. "흘리는"(ἐκχυννόμενον, 에크퀸노메논)은 현재분사다. 지금 막 흘려지려는, 이미 흘려지기 시작한 피. 제자들이 축복으로 마시는 그 잔은, 그리스도 편에서는 죽음으로 부어지는 잔이다. 잔이 제자들에게 오기 전에, 피가 먼저 흘러야 했다.

피를 마시라는 말씀의 충격

여기서 잠시 요한복음 6장으로 돌아가, 앞선 연작이 다 풀지 않고 남겨 둔 한 가지 충격을 마주해 보자. 이스라엘에게 피를 먹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노아 언약에서부터 그랬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창9:4). 레위기는 그 금지의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17:11)

 
피는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다. 그래서 사람은 피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생명을 자기 것으로 삼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움켜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피를 "주셔서" 제단에 뿌리게 하셨다. 피는 사람이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속죄를 위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는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신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6:60)고 수군거린 것은 당연했다. 율법을 아는 유대인에게 이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말이었다.
 
앞선 연작의 세 번째 글, 「먹지 말라, 먹으라」가 붙들었던 "취함"과 "받음"의 축이 여기서 다시 빛을 낸다. 율법이 금지한 것은 피를 "취하는" 것, 곧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사람이 제 손으로 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잔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반대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의 생명을 "주신다." 그 생명은 사람이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스스로 내어 주시는 것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8). 레위기가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라고 말했던 그 "주심"이, 이제 가장 깊은 방식으로 성취된다. 우리는 그의 생명을 취하지 않는다. 받는다.
 
그리고 여기서 개혁주의의 경계선은 다시 확인된다. 성찬의 잔에 담긴 것은 문자 그대로의 피가 아니라 포도주다. 칼빈이 지적했듯이 주님 자신이 그것을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 부르셨다. 우리는 피를 물질적으로 마시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6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풀었다.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도 우리 안에도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의 거룩한 몸과 더욱더 연합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가 되어, 한 영혼이 우리 몸의 지체들을 살리듯 한 성령에 의해 영원히 살고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요지).[^11]
 
"그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러므로 그의 죽음이 얻은 생명을 믿음으로 받고, 성령으로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잡한 육체적 섭취도 아니고, 머릿속의 회상도 아니다. 참된 참여다.

두 개의 잔이 준비되는 밤

이제 여기까지 온 흐름을 한 번 정리해 보자. 가나에서 그분은 좋은 포도주를 주셨다. 잔치의 기쁨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다락방에서 그분은 잔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그 잔은 언약의 피, 새 언약, 죄 사함의 잔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 날까지", "너희와 함께", "새것으로" 마실 날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금주의 선언이 아니라 종말론적 식탁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그 잔에는 "흘리는 바 나의 피"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제자들이 축복으로 받는 그 잔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부으셔야 비로소 축복일 수 있는 잔이었다. 마태는 다락방 장면을 이렇게 닫는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마26:30)

 
그들은 찬미했다. 아마도 유월절 식사를 마치며 부르던 할렐 시편, 곧 시편 113편에서 118편에 이르는 노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밤 그들이 부른 노래 가운데에는 서곡에서 인용한 시편 114편,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할렐의 마지막 시편 118편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118:22),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118:26). 1세기 유월절 식사의 정확한 순서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으므로 이것은 조심스러운 추정이다. 그러나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걸어가시는 분이, 이제 곧 스스로 쳐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밤의 찬미는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그리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겟세마네라 불리는 동산에서 그분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

 
"이 잔." 몇 시간 전 그분은 한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다 마시라"고 하셨다. 이제 그분 앞에는 또 하나의 잔이 놓여 있고, 그분은 그 잔 앞에서 떨고 계신다. 제자들에게 건넨 잔은 축복의 잔이었다. 그러나 그 잔이 축복일 수 있으려면, 그분의 손에 먼저 이 다른 잔이 놓여야 했다. 그 잔은 무엇인가? 구약은 그 잔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그리고 그 잔을 받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시고, 신 포도주를 받으신 뒤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그 목마름과 그 완성은 우리가 마시는 생수와 어떻게 이어지는가? 
 
이제 그 동산으로 들어가자.
 
 

 

2부. 내가 목마르다

— 겟세마네에서 "다 이루었다"까지

 

가나에서 좋은 포도주를 주신 분을 보았다. 다락방에서 그분이 제자들에게 잔을 건네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하시고, "그 날까지" "너희와 함께" "새것으로" 마실 날을 약속하시는 것도 들었다. 그 잔의 이름은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였다. 그러나 이제 복음서는 그분의 손에 다른 잔을 놓는다.

 

4. 겟세마네: 두 잔의 역전

동산의 밤

마태는 그 밤을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시며 "고민하고 슬퍼하사"(마26:37)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26:38)

 
그리고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26:40)라고 하신 뒤, 두 번째 기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마26:42)

 
이 장면 전체는 마태복음 26:36–46을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앞에서 우리는 마태만이 마지막 만찬의 약속에 "너희와 함께"(μεθ᾽ ὑμῶν, 메트 휘몬/메튀몬)를 덧붙였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겟세마네에서 마태는 같은 전치사를 다시 쓴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γρηγορεῖτε μετ᾽ ἐμοῦ, 그레고레이테 메테무),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몇 시간 전 식탁에서 주님은 "너희와 함께" 마실 날을 약속하셨다. 이제 동산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청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잠들었다. "함께"가 무너지는 자리에서 주님은 홀로 잔 앞에 엎드리신다.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도 눈여겨보자. 베드로, 그리고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이다. 이 두 형제는 얼마 전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나아와 그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했던 사람들이다. 그때 주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마20:22). 이제 그 잔을 마시러 가시는 주님 곁에서, "할 수 있나이다"라고 했던 두 사람은 잠들어 있다. 이 장면이 품은 긴장은 뒤에서 다시 붙들 것이다. 지금은 겟세마네의 잔이 제자들이 "할 수 있다"고 말했던 그 잔과 결코 같지 않다는 것만 기억해 두자. 마가는 기도의 첫 부르심을 아람어 그대로 남겼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막14:36)

 
누가는 그 기도의 몸의 무게를 기록한다. 초기 사본 가운데 일부에는 이 두 절이 빠져 있어 본문비평상 논의가 있지만, 교회는 오랫동안 이 기록을 겟세마네의 한 장면으로 읽어 왔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22:43–44)

 
그리고 히브리서는 이 밤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5:7)

그는 무엇 앞에서 떨고 계셨는가

이 장면은 기독교 신앙에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찬송을 부르며 화형대에 올랐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담담히 마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왜 죽음 앞에서 이토록 괴로워하시는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그분은 순교자들보다 약하셨는가?
 
개혁주의 전통은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해 왔다. 그분이 떨고 계신 것은 단지 육체적 죽음 앞에서가 아니었다. 그분 앞에 놓인 잔은 순교자의 잔이 아니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16장에서 사도신경의 "지옥에 내려가사"를 다루며,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버림받은 자의 영혼의 고통을 친히 겪으셨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칼빈은 겟세마네의 두려움과 피땀을,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육체적 죽음 이상의 심판과 영혼의 고통을 담당하셨음을 보여 주는 징표로 읽었다(요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것을 신자의 위로의 언어로 옮긴다. 37문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내내, 특히 생애의 마지막에,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44문은, 내가 가장 큰 시험 속에 있을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고난 가운데, 특히 십자가에서 겪으신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뇌와 고통과 공포로 나를 지옥의 고뇌와 고통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고 말한다(요지).[^12]
 
그러니 겟세마네의 떨림은 약함의 표지가 아니라 그 잔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표지다. 순교자들이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마신 잔이 이 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잔을 먼저, 홀로 마셨기 때문이다.

구약의 잔: 여호와의 손에 있는 잔

그렇다면 "이 잔"은 무엇인가? 제자들의 귀에는 그 말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구약에서 "잔"(코스, כּוֹס)은 한 사람이 받는 몫, 곧 운명을 뜻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무서운 이미지였다. 아삽은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시75:8)

 
다윗의 시도 악인이 받을 몫을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의 "잔"으로 말한다(시11:6).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열방에게 마시게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렘25:15; 전체 문맥 25:15–29). 그리고 이사야는 그 잔을 이미 마셔 버린 예루살렘을 향해 외친다.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사51:17)

 
그런데 이사야 51장에는 놀라운 반전이 이어진다.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사51:22)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잔을 백성의 손에서 거두어 가신다.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이사야 본문 안에서 그 잔은 백성을 괴롭히던 자들에게로 옮겨진다(사51:23). 그러나 이사야를 계속 읽어 가면, 불과 몇 단락 뒤에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5)

(함께 볼 본문: 사53:6)
 
이사야 51장이 "잔이 어디로 가는가"를 말한 뒤에 곧바로 53장의 종이 "우리의 징계"를 대신 받는다는 흐름은, 선지자 자신이 두 본문을 하나의 논증으로 묶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정경을 손에 든 독자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배열이다. 백성의 손에서 거두어진 진노의 잔은 결국 어디로 가는가? 신약은 그 대답을 겟세마네에서 들려준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요한은 체포의 장면에서 주님의 결단을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18:11)

 
"아버지께서 주신 잔." 이 잔은 사람이 강요한 잔이 아니다. 로마 병정이나 대제사장이 억지로 먹인 잔도 아니다. 아버지의 손에서 아들의 손으로 건네진 잔이다. 계시록은 그 잔의 내용을 가장 두려운 말로 표현한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계14:10). 섞인 것이 없는 진노. 그것이 겟세마네에서 아들 앞에 놓인 잔이다.

두 잔의 역전

이제 앞에서 본 다락방과 겟세마네를 나란히 놓아 보자. 한 밤, 한 시간 남짓한 거리 안에 두 개의 잔이 있다. 다락방에서 주님은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그 잔에는 새 언약, 죄 사함, 생명, 축복이 담겨 있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잔을 "받으시며" 기도하셨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잔에는 심판, 저주, 고난, 죽음이 담겨 있었다. 제자들에게 건넨 잔과 아버지께 받으신 잔은 서로 반대편을 향한다. 그리고 이 두 잔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제자들의 잔이 축복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잔이 저주였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죄 사함"을 마실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삯"을 마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글이 따라가는 역전의 첫 번째 모습이다. 바울은 이 역전을 율법의 언어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3:13–14)

 
"저주를 받은 바 되사"(γενόμενος ὑπὲρ ἡμῶν κατάρα, 게노메노스 휘페르 헤몬 카타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셨다"고만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두 가지가 흘러나온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는 것, 그리고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 저주의 잔을 그가 마시신 결과로 복과 성령이 우리에게 온다. 이 성령의 약속이 요한복음에서 어떻게 "생수"로 불리는지는 곧 보게 될 것이다. 바울은 같은 역전을 고린도후서에서 더 날카롭게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5:21)

클라인과 언약의 제재

앞에서 잠시 소개한 메러디스 클라인의 통찰이 여기서 제자리를 찾는다. 클라인은 성경의 언약이 고대 근동 조약처럼 순종에 따르는 축복과 배반에 따르는 저주, 곧 언약의 제재(sanctions)를 품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요지). 신명기는 그 구조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축복과 저주가 선포되고(신27–28장), 백성은 저주의 선언마다 "아멘"으로 응답해야 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27:26)

 
바울이 갈라디아서 3:10에서 인용하는 것이 바로 이 구절이다. 그리고 신명기 28장이 열거하는 언약의 저주 가운데는 이런 말이 있다.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신28:48)

 
목마름은 언약의 저주 목록 안에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해 두는 것은 십자가의 "내가 목마르다"를 읽을 때 도움이 된다. 다만 조심해야 한다. 요한복음 19장의 "내가 목마르다"가 신명기 28:48을 인용한 것은 아니다. 요한이 직접 가리키는 본문은 시편이다. 그러나 클라인이 밝혀 준 언약 제재의 구조는, 그리스도의 수난 전체가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는 사건이라는 신약의 증언(갈3:13)을 이해하는 넓은 틀을 제공한다.
 
이 틀 안에서 두 잔의 관계는 더 선명해진다. 언약에는 축복의 제재와 저주의 제재가 있다. 이스라엘은, 그리고 아담 안의 모든 인류는 언약의 저주 아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서 받으신 잔은 그 저주의 제재 전체를 담은 잔이다. 그리고 그가 제자들에게 건네신 잔은 그 저주가 해소된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축복의 제재, 곧 새 언약의 복이다. 한 분이 저주의 몫을 마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축복의 몫을 마신다.
 
여기서 이 글의 중요한 경계선 하나를 미리 그어 두어야 한다. 요한복음 19장의 신 포도주 자체를 곧바로 "진노의 잔"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신 포도주 사건의 직접적 강조점은 시편 69편의 성취와 실제 갈증이다. 그러나 그 신 포도주가 건네진 장면 전체는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저주와 메시아적 고난을 마지막까지 담당하시는 수난의 문맥 안에 있다. 이 구별은 뒤에서 신 포도주를 다룰 때 다시 확인할 것이다.
 

 

5. 두 동산

첫 동산과 마지막 동산

요한은 겟세마네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이렇게 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요18:1)

 
그리고 수난 이야기는 또 하나의 동산에서 끝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요19:41)

 
부활의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κηπουρός, 케푸로스)로 착각한다(요20:15). 체포도 동산에서, 장사도 동산에서, 부활의 첫 만남도 동산에서 일어난다. 네 복음서 가운데 이 장소들을 "동산"(κῆπος, 케포스)이라고 부르는 것은 요한뿐이다.
 
칠십인역 창세기는 에덴을 보통 "낙원"(παράδεισος, 파라데이소스)이라고 부르므로, 요한의 "동산"이 창세기를 직접 인용하는 어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산에서 시작된 인류의 이야기를 아는 독자에게, 동산에서 체포되시고 동산에 묻히시고 동산에서 "동산지기"로 보이신 분의 이야기가 첫 동산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것은 요한의 명시적 논증이라기보다 정경이 허락하는 울림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바울이 명시적으로 전개하는 아담-그리스도 대조와 만날 때 신학적 무게를 얻는다.

취함과 받음

앞선 연작의 세 번째 글, 「먹지 말라, 먹으라」는 에덴의 이야기를 "취함"과 "받음"의 축으로 읽었다. 여기서 그 축이 겟세마네로 이어진다. 첫 동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넉넉한 식탁을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17)

 
"임의로 먹되"는 히브리어로 아콜 토켈(אָכֹל תֹּאכֵל), "먹고 또 먹으라"는 강조형이다. 에덴은 금지의 동산이 아니라 풍성한 허락의 동산이었다. 금지는 하나였다. 그러나 그 하나의 금지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사는 피조물인지를 드러내는 시험이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6)

 
첫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주어지지 않은 것을 제 손으로 취하여 먹었다. 그 결과는 저주였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창3:17), 땅은 사람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3:18)이며, 사람은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3:19)라는 선고를 받는다. 이 선고 전체는 창세기 3:14–19에 있다. 그리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닫혔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이제 마지막 동산을 보자. 마지막 아담 앞에도 먹고 마실 것이 놓였다. 그러나 그것은 탐스러운 열매가 아니라 쓴 잔이었다. 첫 아담은 금지된 것을 원했고, 마지막 아담은 명령된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분의 인성은 그 잔 앞에서 참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움츠러듦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첫 아담은 "나의 원대로" 취했다. 마지막 아담은 "아버지의 원대로" 받으셨다. 요한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고 쓴 것은 바로 이 대조의 핵심이다. 에덴의 열매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고, 겟세마네의 잔은 주어진 것이었다. 첫 아담은 주어지지 않은 생명을 움켜쥐다가 죽음을 얻었고, 마지막 아담은 주어진 죽음을 받으셔서 생명을 여셨다.
 
그러므로 두 동산의 대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첫 아담: 취함 → 불순종 → 저주 → 죽음.
 
마지막 아담: 받음 → 순종 → 저주 담당 → 생명.
 
창세기 3장의 저주와 복음서의 수난 사이에는 교회가 오래 묵상해 온 울림들도 있다. 첫 아담에게 선언된 저주에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라는 말이 있고, 누가는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아담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적는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는 저주가 있었고, 요한은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요19:2)라고 기록한다. 복음서 기자들이 창세기 3장을 의식하고 이 세부를 기록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저주의 표지들이 마지막 아담의 몸 위에 얹혀 있는 이 그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는 바울의 선언을 묵상하는 교회에게 오래도록 말을 걸어 왔다.

한 사람의 순종

바울은 두 아담의 대조를 로마서 5장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전개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5:18–19)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은 그 대조를 부활의 빛 안에 놓는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1–22)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5)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 대조를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틀 안에서 이해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과 맺으신 언약이 완전하고 인격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후손에게 생명을 약속한 행위언약이었고, 사람이 타락으로 그 언약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을 기뻐하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8장은 주 예수께서 그의 완전한 순종과 자기를 드리신 희생으로 아버지의 공의를 충분히 만족시키셨다고 말한다(요지). 첫 아담이 실패한 순종을 마지막 아담이 이루셨고, 첫 아담이 불러들인 저주를 마지막 아담이 짊어지셨다.[^13]
 
존 머레이는 『구속의 성취와 적용』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전체를 여는 첫 범주로 "순종"을 들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단지 고난을 수동적으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향한 능동적 자기 드림이었으며, 그 순종은 생애 전체를 관통하여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이다(요지). 칼빈도 『기독교강요』 제2권 16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신 때부터 그의 순종의 전 과정을 통해 우리의 속량을 이루기 시작하셨다고 말했다(요지).[^14] 히브리서는 그 순종의 신비를 이렇게 말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5:8–9)

 
겟세마네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는 그 순종이 가장 날카롭게 시험받은 자리였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분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나무에서 나무로

그 순종의 끝에 한 나무가 서 있다. 신약은 십자가를 여러 번 "나무"(ξύλον, 크쉴론)라고 부른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행5:30)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2:24)

 
갈라디아서 3:13의 "나무에 달린 자마다"도 같은 단어다. 이 표현은 일차적으로 신명기 21:23, 곧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에서 온다. 그러니 신약이 십자가를 "나무"라 부를 때 가장 먼저 울리는 것은 저주의 나무라는 의미다. 그런데 칠십인역 창세기에서 "생명나무"는 토 크쉴론 테스 조에스(τὸ ξύλον τῆς ζωῆς)이고, 계시록이 새 창조의 생명나무를 말할 때도 같은 크쉴론을 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2:7)

 
크쉴론은 나무와 목재를 두루 가리키는 흔한 단어이므로, 이 어휘의 일치만으로 신약 기자들이 십자가와 생명나무를 의도적으로 겹쳐 놓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대 교회는 이 두 나무를 함께 묵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레네우스는 『이단 논박』 V.16.3과 V.19.1에서, 주님께서 나무와 관련하여 일어난 불순종을 나무에 달리신 자신의 순종으로 총괄갱신(recapitulatio)하셨다고 말했다(요지). 6세기의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는 십자가 찬가 「혀여 노래하라」(Pange lingua gloriosi)에서, 창조주께서 처음 사람의 타락을 슬퍼하시며 그때 이미 한 나무를 표해 두셨으니 나무의 손해를 나무로 풀기 위함이었다고 노래했다(ipse lignum tunc notavit, / damna ligni ut solveret).[^15]
 
한 나무에서 죽음이 들어왔고, 한 나무를 통해 생명의 길이 열린다. 이것은 개혁파 신앙고백의 조항이 아니라 고대 교회의 해석적·송영적 전통이다. 그러나 그 전통이 붙잡은 신학적 핵심, 곧 첫 아담의 불순종이 마지막 아담의 순종으로 뒤집혔다는 것은 로마서 5장이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바이며,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중심에 서 있다. 에덴에서 불 칼이 지키던 생명나무의 길은, 저주의 나무 위에서 마지막 아담이 그 저주를 끝까지 받으심으로 다시 열린다. 계시록 22장에서 그 나무가 다시 등장할 때, 우리는 그 길이 어떤 값으로 열렸는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6. 광야의 반석

목마른 백성

이제 겟세마네의 잔에서 잠시 눈을 돌려, 이 글의 두 번째 물줄기인 "물"을 따라가 보자. 성경에서 목마름은 광야에서 가장 날것으로 드러난다. 홍해를 건넌 지 얼마 되지 않은 백성이 르비딤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출17:1). 목마른 백성은 모세에게 원망한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17:3).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 앞을 지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17:5) 손에 잡고 가라고 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출17:6)

 
모세는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했고, 그곳의 이름은 맛사와 므리바가 되었다. 백성이 다투었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17:7) 하며 여호와를 시험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 전체는 출애굽기 17:1–7을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백성은 목말랐다. 반석은 쳐졌다. 백성은 물을 마셨다. 이 세 문장이 이 장면의 뼈대다. 이 본문에는 곱씹을 만한 세부들이 있다. 모세가 들고 간 지팡이는 "나일 강을 치던" 지팡이, 곧 애굽에 심판을 내리던 지팡이다. 장로들이 증인으로 불려 나온다. "므리바"(מְרִיבָה)라는 이름은 "다툼", 법정적 쟁론을 뜻하는 리브(רִיב)에서 왔다. 백성은 하나님을 고소하듯 다투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하나님께서 서 계신 그 반석을, 심판의 지팡이가 친다. 그리고 거기서 물이 나와 원망하던 백성을 살린다. 
 
일부 해석자들은 이 장면을 일종의 법정 장면으로 읽는다. 다툼을 일으킨 쪽은 백성이었으니 심판의 지팡이는 백성 위에 떨어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서 계신 반석 위에 떨어지고, 그 결과로 생명의 물이 흐른다. 이것은 출애굽기 본문이 명시적으로 풀이하는 해석은 아니므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읽기가 붙드는 방향, 곧 하나님께서 심판의 자리에 스스로 서시고 그로 인해 백성이 산다는 방향은 신약이 이 사건을 어떻게 읽는지와 놀랍게 겹친다. 시편과 선지서는 이 사건을 두고두고 노래했다.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시78:15–16)

(함께 볼 본문: 사48:21)
 
그리고 서곡에서 인용했던 할렐 시편, 제자들이 겟세마네로 가며 불렀을지도 모르는 그 노래가 있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114:8). 민수기 20장에는 비슷하지만 다른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므리바에서 다시 물이 없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으나, 모세는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1). 그리고 그 불순종 때문에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적어도 19세기 이후 일부 설교자와 주석가들은 출애굽기 17장과 민수기 20장을 함께 읽으며, 한 번 쳐진 반석은 다시 쳐질 필요가 없었다는 데서 그리스도의 단회적 죽음을 보는 예표론적 교훈을 끌어내기도 했다.^a 그러나 민수기 본문이 직접 밝히는 모세의 잘못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 앞에서 그분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데 있다(민 20:12; 참조 27:14). 이 글은 그 교훈을 본문의 의도로 단정하지 않고, 다만 히브리서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단번에”(ἐφάπαξ) 드리셨다고 강조한다는 사실(히 7:27; 10:10)과 나란히 놓아 두는 데 그친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바울은 광야의 이야기를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들려준다. 그는 먼저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 뒤(고전10:1–2), 이렇게 잇는다.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3–4)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ἡ πέτρα δὲ ἦν ὁ Χριστός, 헤 페트라 데 엔 호 크리스토스). 바울은 과거 시제로 말한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마신 물의 근원에 이미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개혁주의 성례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칼빈은 이 본문을 주석하며, 옛 백성의 표징들도 빈 그림자가 아니라 영적 실체를 가리키고 전달했으며,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참여하였다고 이해했다(요지). 이를 그의 성례론 전체의 언어로 요약하면, 구약과 신약의 성례는 그리스도라는 실체에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계시와 제시 방식에서 차이를 가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장 5절은 이 이해를 고백의 언어로 정리한다. 구약의 성례들은 그것이 나타내고 제시한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실체상 신약의 성례들과 동일하다(요지).[^16] 그런데 바울이 이 구절을 쓴 목적은 위로만이 아니라 경고였다. 곧바로 이어지는 절은 이렇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5)

 
그들은 모두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 그러나 다수가 멸망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성례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를 구원의 보증처럼 여기는 태도를 경계한다. 이것은 앞선 연작이 지켜 온 개혁주의 성례론의 핵심과 맞닿는다. 성례는 믿음 없이 기계적으로 효력을 내는 것이 아니다. 광야의 물은 모두에게 흘렀지만, 그 물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자에게만 생명이 되었다. 마심은 의존이다. 그러나 그 의존은 믿음의 의존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광야의 장면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구조를 남긴다. 목마른 백성, 쳐진 반석, 흐르는 물. 그리고 바울의 해석,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구조가 요한복음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이제 따라가 보자.
 
 

 

7. 야곱의 우물: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른 분이 물을 청하시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신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4:6–7)

 
이야기는 목마른 예수에서 시작한다. 생수를 주시는 분이 먼저 물을 청하신다. "물을 좀 달라"(δός μοι πεῖν, 도스 모이 페인). 직역하면 "내게 마실 것을 달라." 요한은 그분이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으셨다고 적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요한복음 서문의 선언(요1:14)은 이런 자리에서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얻는다. 영원한 말씀이 한낮의 햇볕 아래서 지치고 목마르셨다. "여섯 시쯤"은 유대식 시간 계산으로 정오 무렵이다.

 

요한복음에서 "여섯 시"는 한 번 더 나온다. 빌라도가 예수를 유대인들 앞에 세우고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말하던 때를 요한은 이렇게 적는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요19:14). 한낮의 우물가에서 목마르셨던 분이, 또 다른 한낮에 십자가로 넘겨지신다. 이것 역시 요한이 명시하는 연결은 아니지만,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의 귀에 들리는 울림이다.

 

여인은 놀란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하는 것은 그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4:9).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4:10)

 
여기서 대화의 방향이 뒤집힌다. 물을 청하던 분이 물을 주시는 분으로 드러난다. "네가 만일 ...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리고 요한은 그 대화 끝까지, 여인이 예수께 실제로 물을 떠 드렸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우물가의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은 채 이야기의 뒤편으로 물러난다. 그 목마름은 요한복음 19장에서 다시 입을 열 것이다.

"생수"라는 오해

"생수"(ὕδωρ ζῶν, 휘도르 존)는 이중적인 말이다. 일상어로는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 샘물을 뜻한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는 "살아 있는 물", 생명의 물이다. 여인은 첫 번째 뜻으로 알아듣는다. 그녀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그 생수를 얻겠느냐고 되묻고, 조상 야곱이 준 이 우물을 떠올리며 이렇게 덧붙인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4:12). 예수께서는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3–14)

 
그리고 여인은 이렇게 청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5)

 
이 부탁은 처음 읽을 때 조금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여인은 여전히 생수를 물리적 편의로 오해하고 있다. 매일 한낮에, 아마도 다른 여인들의 눈을 피해 무거운 물동이를 지고 우물까지 오가는 수고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다. 요한복음의 대화들이 흔히 그렇듯이, 예수의 말씀은 한 차원 위에서 들리고 상대는 한 차원 아래서 알아듣는다. 니고데모가 "거듭남"을 어머니 모태로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 알아들었듯이, 여인은 "생수"를 물 긷는 수고의 종말로 알아듣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끝까지 읽고 이 장면으로 돌아오면, 이 부탁은 놀랍게 들린다. 여인은 청한다. "목마르지도 않고"(요4:15) 살게 해 달라고. 그리고 요한복음의 끝에서, 생수의 주인이 십자가에서 말한다. "내가 목마르다."
 
여인이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되기 위해, 생수를 주시는 분이 목마르셔야 했다. 여인은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 달라고 했다. 그 청이 참으로 이루어지는 길은, 우물가에 앉아 목마르셨던 그분이 마지막 목마름까지 짊어지시는 길이었다. 이것이 이 글이 따라가는 역전의 두 번째 모습이다. 우리는 생수를 받는데, 생수의 근원이 목마르시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대화는 여인의 삶의 가장 아픈 자리로 들어가고(요4:16–18), 예배의 장소에 관한 질문을 지나(요4:19–24), 마침내 메시아의 자기 계시에 이른다. "내가 그라"(요4:26). 예배에 관한 그 대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로 시작하는 그 말씀은 이 글의 부록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대화의 끝에 요한이 남긴 한 줄의 세부만 보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4:28–29)

 
물을 길으러 왔던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간다. 그녀는 물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물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 달라던 그녀의 청은, 그녀가 오해했던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물동이가 아니라 증언을 들고 동네로 달려간다. 생수는 그 속에서 솟아나기 시작했다.

"나의 양식은"

그 사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께 음식을 권한다. 앞선 「말씀의 섭취」 연작을 읽은 독자라면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제자들이 "랍비여 잡수소서"(요4:31) 하고 권하자, 예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4:32)고 하신다. 제자들이 누가 음식을 갖다 드렸는가 하고 서로 묻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같은 장에서 예수께서는 목마르셨고, 이제 먹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분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τελειώσω, 텔레이오소) 것이다. 이 동사를 기억해 두자. 요한복음은 이 "이룸"의 어휘를 복음서 전체에 걸쳐 쌓아 간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요 5:36),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요17:4).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어휘는 두 번 연달아 터져 나온다.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요19:28), "다 이루었다"(요19:30).
 
우물가에서 그분은 목마르셨고, 그분의 양식은 아버지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다시 목마르셨고, 그 일을 이루셨다. 먹음과 마심의 신학은 이렇게 한 장 안에서, 그리고 복음서 전체의 호흡 안에서 서로 붙들려 있다.
 
 

 

8. 초막절의 외침: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요한복음 7장의 배경은 초막절이다(요7:2). 초막절은 광야에서 장막에 거하던 조상들을 기억하는 절기이며, 동시에 가을 추수를 감사하고 다가올 우기의 비를 구하는 절기였다. 후대 랍비 문헌인 미쉬나는 초막절 동안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서 금 주전자로 물을 길어 성전 제단에 붓는 "물 긷는 예식"이 있었다고 전하며, 이 예식의 기쁨을 보지 못한 사람은 평생 기쁨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미쉬나는 2세기 말에 정리된 문헌이므로 1세기 성전 예식의 세부를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지만, 초막절이 물과 기쁨과 종말론적 기대로 가득한 절기였다는 것은 분명하다.[^17] 그 절기에 읽히던 선지서의 약속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사12:3)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14:8)

 
스가랴 14장은 같은 장에서, 그 날에 열방이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고 예언한다(슥14:16). 초막절과 생수와 "그 날"은 선지자의 환상 속에서 이미 하나로 묶여 있었다. 바로 그 절기의 마지막 큰 날, 예수께서 서서 외치신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7:37–39)

"그 배에서"는 누구의 배인가

이 구절에는 오래된 해석상의 질문이 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에서 "그"는 누구인가? 헬라어 원문에는 구두점이 없으므로 두 가지로 끊어 읽을 수 있다. 하나는 개역개정처럼 "나를 믿는 자는 ... 그 배에서"로 읽어, 생수가 믿는 자의 속에서 흘러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요한복음 4:14의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잘 어울리는 읽기다. 다른 하나는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마시라)"로 끊고,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의 "그"를 그리스도 자신으로 보는 것이다. 이 읽기에서는 생수의 강이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고, 이것은 요한복음 19:34의 찔린 옆구리와 곧바로 이어진다.
 
두 읽기 모두 고대부터 지지자가 있었고, 이 글은 어느 한쪽을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두 읽기 모두에서 분명하다. 생수의 근원은 그리스도시다. 믿는 자의 속에서 생수가 흐른다 해도, 그것은 믿는 자가 스스로 샘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와서 마셨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말한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과 반대로, 신자는 근원에 연결되어 흐르는 강의 한 줄기가 될 뿐이다.

영광, 십자가, 성령, 생수

요한은 이 외침에 괄호를 달아 설명한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앞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영광"과 "때"가 십자가를 향한다는 것을 보았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 그렇다면 요한의 괄호는 이렇게 읽힌다. 요한이 말하는 "아직"은 성령의 부재가 아니라, 성령이 약속된 충만함으로 주어지는 때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영광은 십자가의 들림을 통해 온다. 칼빈도 이 구절에서 요한이 신약을 구약과 비교할 때처럼 비교하여 말한다고 보았다(요지). 다락방에서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7)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라"(요20:22). 그리고 오순절, 베드로는 그 모든 것을 이렇게 정리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3)

 
그러므로 요한복음 7장의 괄호 안에는 구속사의 한 구조가 압축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영화(榮化), 곧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 결과로서 성령의 부어주심. 그리고 그 성령이 "생수"로 불린다. 앞에서 인용한 갈라디아서 3:14가 같은 구조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저주가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었다. 저주의 잔을 그리스도께서 마시셨기 때문에, 성령의 생수가 우리에게 흐른다.
 
게할더스 보스는 1912년의 논문 「바울의 성령 개념의 종말론적 측면」에서, 신약에서 성령이 무엇보다 "오는 세대"의 생명 원리이며, 신자에게 주어진 성령은 장차 올 세계의 첫 열매요 보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요지). 보스의 이 통찰은 요한복음 7장의 생수를 이해하는 데에도 빛을 비춘다. 초막절의 선지자들이 "그 날에" 흐를 것이라 약속했던 생수, 곧 종말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영화 이후 성령 안에서 이미 교회에게 새롭게, 충만히 흐르게 되었다. 생수를 마신다는 것은 오는 세상의 생명을 지금 앞당겨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생명이 완성되는 것은 여전히 "그 날"이다. 이 "이미"와 "아직"의 긴장은 하편의 성찬론에서 다시 중심에 설 것이다.[^18]
 
칼빈이 『기독교강요』 제3권의 첫머리에서 성령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효과적으로 자기에게 연합시키시는 띠"라고 부른 것도 여기서 기억해 둘 만하다(요지).[^19] 앞선 연작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이 성령과 믿음을 통한 연합이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할 수 있다. 그 연합을 이루시는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생수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 그 연합 안에서 우리는 그 생수를 거듭 마신다. 옛 언약의 성도들도 같은 성령으로 거듭나 같은 그리스도를 마셨지만(고전10:4), 요한복음이 약속하는 생수의 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지나 영광을 받으신 뒤 새 언약의 충만함으로 흘러넘친다.
 
 

 

9. "내가 목마르다"

한 단어의 외침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 19장에 이르렀다. 십자가 곁에 선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에게 말씀하신 뒤, 요한은 이렇게 쓴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19:28)

 
"내가 목마르다"는 헬라어로 한 단어다. 딥소(διψῶ).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은 셋뿐이다. 어머니와 제자에게 하신 말씀, 이 한 단어, 그리고 "다 이루었다"(역시 한 단어,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그 가운데 가장 짧고 가장 인간적인 말이 "딥소"다. 이 외침은 무엇보다 먼저 실제 갈증이다. 채찍질과 출혈과 한낮의 햇볕과 몇 시간의 매달림 끝에 온 몸이 말라 가는 사람의 갈증이다. 요한은 그 사실을 조금도 영적인 비유로 흐리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첫 장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선언했다면, 그 육신은 여기서 가장 적나라하게 목마른 육신이다. 예수께서 참 사람이 아니라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던 가현설(docetism)에 맞서, 요한의 증언은 이 한 단어로 선다. 그분은 참으로 목마르셨다. 시편 22편은 고난받는 의인의 입으로 그 목마름을 이렇게 말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시22:15)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 위의 예수께서 이 시편의 첫 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셨다고 기록한다(마27:46; 막15:34). 요한은 그 외침을 기록하지 않지만, 정경을 함께 읽는 우리는 요한의 "내가 목마르다"가 마태와 마가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같은 시간, 같은 십자가 위에서 터져 나왔다는 것을 안다.

생수의 근원이 목마르시다

그런데 이 목마름은 누구의 목마름인가?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렘2:13)이라 불렀다. 요한복음 4장에서 그분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고, 7장에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다. 생수를 주시는 분, 생수의 근원이신 분이 지금 목마르시다.
 
개혁주의 기독론은 이 신비를 조심스럽게 말한다. 목마름은 신성의 속성이 아니라 인성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목마르실 수 없다. 그러나 목마르신 분은 한 인격, 곧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7절은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에서 두 본성에 따라 각 본성에 고유한 일을 행하시되, 인격의 통일성 때문에 한 본성에 고유한 것이 성경에서 때때로 다른 본성의 이름으로 불리는 인격에게 돌려진다고 고백한다(요지).[^2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목마르셨다"고 말할 수 있다. 목마름을 신성에 돌리는 것이 아니라, 목마르신 분이 누구신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글의 역전을 가장 날카롭게 만든다.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는 그의 피를 "마시는" 자로 불렸다. 요한복음 4장과 7장에서 우리는 그가 주시는 생수를 "마시는" 자로 초대받았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에서 그분은 "목마른" 자가 되신다. 마시는 자는 우리이고, 목마른 이는 그분이시다.

목마름의 문맥

앞에서 보았듯이 신명기 28장의 언약의 저주 목록에는 목마름이 있었다. 그리고 복음서에는 목마름이 심판의 자리와 연결되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누가복음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음부에서 고통받는 부자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16:24)

 
여기서도 조심해야 한다. 요한복음 19:28은 이 비유를 가리키지 않는다. 요한이 직접 가리키는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곧 시편의 성취다. 따라서 "내가 목마르다"를 곧바로 "지옥의 갈증"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칼빈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고백,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몸과 영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셨다는 고백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목마름은 단지 한 사형수의 생리적 갈증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저주받은 자의 자리, 버림받은 자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분의 목마름이다. 시편의 의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라고 노래했다. 십자가 위의 목마름은 몸의 갈증이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분의 목마름이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과 신학이 그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을 구별하되, 둘을 분리하지는 말자. 요한은 실제 갈증과 성경의 성취를 말한다. 신약 전체와 개혁주의 신학은 그 갈증이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시는 수난 한가운데서 터져 나왔다고 말한다. 둘 다 참이다.
 
 

 

10. 신 포도주와 "다 이루었다"

신 포도주를 받으시다

요한은 이어서 쓴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19:29–30)

 
"신 포도주"(ὄξος, 옥소스)는 로마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흔히 마시던 값싼 음료, 물에 탄 시큼한 포도주였다. 병사들이 자기들이 마시려고 가져다 둔 그릇이 형장 곁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건넨 것이 조롱이었는지 약간의 긍휼이었는지는 복음서마다 뉘앙스가 다르다. 누가는 병사들이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쓰고(눅23:36), 마태와 마가는 누군가 달려가 해면에 적셔 갈대에 꿰어 주었다고 쓴다(마27:48; 막15:36).
 
이제 앞에서 붙들어 두었던 세부를 다시 꺼내자.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 사람들은 예수께 포도주를 건넸다. 마가는 그것을 "몰약을 탄 포도주"(막15:23)라 부르고, 마태는 "쓸개 탄 포도주"(마27:34)라 부르는데, 마태의 "쓸개"는 뒤에서 볼 신 포도주와 함께 시편 69:21의 어휘를 떠올리게 한다. 마태는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고, 마가는 "받지 아니하시니라"고 적는다. 후대 유대 전승은 처형당하는 이에게 정신을 흐리게 하려고 유향을 탄 포도주를 주었다고 전하며 그 근거로 잠언 31:6을 인용하는데, 18–19세기 이후 적지 않은 개신교 주석가들은 이 전승을 배경으로, 예수께서 고통을 흐린 의식으로 피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끝까지 받으시려 하셨다고 읽어 왔다.^b 복음서가 그 이유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해석이지만, 개연성 있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건네진 포도주는 거절하시고, 마지막에 건네진 신 포도주는 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은 그 이유를 분명히 적는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마지막 신 포도주는 고통을 마비시키는 음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는 자리였다. 그리고 요한이 그 받으심 바로 뒤에 "다 이루었다"를 놓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지막 외침을 위해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이기도 했다.

시편 69편: 요한복음을 관통하는 시

요한이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라고 할 때 가리키는 시편은 69편이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시69:21)

(탄식의 문맥: 시69:19–21)
 
칠십인역은 이 "초"를 옥소스(ὄξος)로 옮겼다. 요한이 쓴 바로 그 단어다. 그런데 시편 69편은 요한복음 19장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시가 아니다. 요한은 이 시편을 복음서 전체에 걸쳐 인용한다. 가나의 혼인잔치 바로 다음 장면,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실 때 요한은 이렇게 적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2:17)

 
이것이 시편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다. 다락방에서 주님은 세상의 미움을 말씀하시며 이렇게 인용하셨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요15:25)

 
이것은 시편 69: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시편 69:21의 신 포도주.
그러니 요한복음에서 시편 69편은 가나 직후의 성전 장면에서 시작해 십자가에서 끝나는 긴 호(弧)를 그린다. 가나에서 좋은 포도주를 주신 분이 머지않아 성전에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삼켜지기 시작하시고, 그 열심이 마침내 그분을 십자가까지 삼키며, 거기서 그분은 같은 시편이 말한 신 포도주를 받으신다. 좋은 포도주를 주신 가나와 신 포도주를 받으신 십자가 사이를 따라가는 이 글의 독자에게, 이 호는 중요한 수난의 배경을 제공한다.
 
칼빈은 요한복음 19장을 주석하며, 그리스도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것이 이 시편의 성취였음을 짚고, 그분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 모두 이루어질 때까지 생명을 내려놓지 않으셨다는 점에 주목했다(요지).[^21]

우슬초

요한만이 해면을 "우슬초"(ὕσσωπος, 휘쏘포스)에 매었다고 기록한다. 마태와 마가는 "갈대"라고 쓴다. 우슬초는 가느다란 줄기의 식물이어서 해면을 들어 올리기에 적합했겠느냐는 실제적 질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요한이 이 식물의 이름을 남긴 것은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슬초는 출애굽의 밤에 쓰인 식물이다.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출12:22)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그린다. 세례 요한은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 불렀다. 요한은 예수께서 넘겨지신 때를 "유월절의 준비일"(요19:14), 곧 유월절 어린양들이 성전에서 잡히던 날로 기록한다. 그리고 병사들이 예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일을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요 19:36)는 말씀의 성취로 본다. 이것은 유월절 어린양에 관한 규례(출12:46)에서 온 말씀이다. 이 흐름 속에서 우슬초는 조용한 표지다. 유월절 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던 그 우슬초가, 참 유월절 어린양의 입술에 신 포도주를 올린다.
 
다윗의 참회 시도 이 식물을 부른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7). 이 연결들은 요한의 명시적 설명이 아니라 그가 남긴 세부가 품은 울림이다. 과장하지 않되, 지나치지도 말자.

"다 이루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단어.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19:30)

 
순서를 눈여겨보자. 목마르다 하셨고, 신 포도주를 받으셨고, "그 후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목마름, 받으심, 완성. 요한은 이 세 동작을 끊지 않고 이어 놓는다.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는 텔레오(τελέω)의 현재완료 수동형이다. 헬라어 완료형의 기능을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하나의 기계적 공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이 완료형은 한 일이 끝에 이르렀다는 완결과, 그 완결로 말미암아 성립한 상태를 함께 드러낸다. "이루어졌고, 이루어진 채로 있다." 이 단어가 고대 영수증에 "완납"의 뜻으로 쓰였다는 설명이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그 증거와 해석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신중한 평가가 있으므로, 이 글은 그 설명에 기대지 않고 요한복음 자신의 어휘 흐름에 집중하려 한다.
 
요한복음 안에서 이 단어의 무게는 이미 충분하다. 다락방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εἰς τέλος, 에이스 텔로스) 사랑하셨다고 썼다(요13:1). 우물가에서 그분은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τελειώσω, 텔레이오소) 것이 자기 양식이라고 하셨다(요4:34).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그분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τελειώσας, 텔레이오사스)라고 기도하셨다(요17:4). 그리고 십자가에서, 19:28의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줄 아시고"와 "성경을 응하게(τελειωθῇ, 텔레이오데) 하려 하사", 그리고 19:30의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요한은 두 절 안에서 같은 어근을 세 번 쓴다. 칼빈도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19:30의 주석에서 그리스도께서 조금 전에 쓰신 같은 단어를 반복하신다고 지적하며, 이 말씀이 우리 구원의 모든 성취와 그 모든 부분이 그의 죽음 안에 담겨 있음을 보여 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로써 우리의 믿음을 오직 자기에게만 고정시키시고, 사람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며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했다(요지).[^22]
 
가나에서 "내 때가 아직"이라고 하셨던 분이, 다락방에서 "끝까지" 사랑하기 시작하신 분이, 우물가에서 아버지의 일을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던 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다. 요한복음의 시계는 여기서 멈춘다.

신 포도주를 과도하게 신비화하지 말 것

여기서 이 글이 처음부터 지키려 한 경계선을 분명히 해 두자. 신 포도주는 진노의 잔 자체가 아니다. 겟세마네의 "이 잔"은 아버지의 손에서 건네진 심판의 잔이었고, 골고다의 신 포도주는 병사들의 그릇에서 건네진 실제 음료였다. 둘을 하나로 뭉쳐 "그리스도께서 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진노의 잔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서는 일이다. 요한 본문의 직접적 강조점은 시편 69편의 성취와 실제 갈증이다. 그러나 신 포도주를 그저 우연한 세부로 흘려보내는 것도 본문을 덜 읽는 일이다. 가장 정직한 표현은 이것이다.

신 포도주는 진노의 잔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기록된 메시아의 고난을 마지막까지 받아내시고 구속 사역의 완성을 선언하시는 마지막 수난 장면 속에 있다.

 
이제 서곡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날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분이 왜 신 포도주를 받으셨는가? 앞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26:29가 금주 서원이 아니라 종말론적 식탁의 약속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할 수 있다. 그분이 받으신 신 포도주는 약속된 "새것"의 반대편에 있는 잔이었다. "너희와 함께"가 아니라 홀로, "새것"이 아니라 시어진 것, "아버지의 나라에서"가 아니라 저주의 나무 위에서. 그분은 "그 날"의 잔을 마시기 전에, 먼저 이 날의 잔을 받으셔야 했다. 그리고 그 받으심의 끝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러니 신 포도주는 마태복음 26:29의 약속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그 약속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다 이루었다"가 성찬론을 지킨다

"다 이루었다"는 이 후속편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앞선 「말씀의 섭취」 연작이 세운 성찬론을 보호한다.
우리가 성찬에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의 희생을 다시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미 완성되었다. 히브리서는 이 "단번"을 거듭 강조한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9:26)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10:12, 1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장 2절은 이 진리 위에서,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며 죄 사함을 위한 어떤 실제적 제사가 드려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기를 드리신 그 한 번의 제사를 기념하는 것이며, 그 제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찬양의 영적 봉헌이라고 고백한다(요지). 성찬의 식탁은 제단이 아니다. 제단의 일은 골고다에서 끝났다. "다 이루었다."[^23] 그러므로 이제 이 후속편의 세 번째 명제를 여기서 미리 분명히 말해 둘 수 있다.

성찬에서의 먹고 마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하거나 보충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그의 죽음과 생명의 유익을 성령과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언약적 참여다.

 
앞선 연작이 "먹음은 소유가 아니라 붙들림"이라고 말했다면, 이제 우리는 그 붙들림의 근거를 말할 수 있다. 우리를 붙드는 것은 완성된 사역이다. 우리는 미완성의 일을 거들기 위해 식탁에 오지 않는다. 다 이루어진 일의 열매를 받기 위해 온다.
 
 

 

11. 피와 물

찔린 옆구리

"다 이루었다"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 같지만, 요한은 한 장면을 더 기록한다. 그리고 그 장면에 자기 증언의 무게를 싣는다. 그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었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청했다. 군인들은 함께 못 박힌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으나,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요19:33) 다리를 꺾지 않았다.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19:34–35)

 
요한은 이 일이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19:36)는 말씀과, 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19:37)는 말씀을 이루었다고 덧붙인다. 이 장면 전체는 요한복음 19:31–37을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먼저, 실제 죽음의 증언

이 장면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요한이 강조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요한은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예수께서 실제로 죽으셨고, 그 몸이 실제 몸이었다는 것을 증언한다. 병사들은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나왔다. 의학적으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제시되어 왔지만, 요한의 관심은 생리학에 있지 않다. 그의 관심은 증언에 있다. 이분은 참으로 죽으셨다. 요한은 그의 첫 서신에서 같은 증언을 되풀이한다.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참 몸으로 오시고 참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 퍼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일5:6)

 
그리고 요한은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요일5:7–8)고 덧붙인다. 역사적 증언이 먼저다. 그 위에서만 상징적·정경적 울림이 정당하게 들린다. 피와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기 전에, 요한은 우리가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기를 원한다.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스가랴의 찔린 자와 열린 샘

요한이 인용하는 두 번째 성경,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는 스가랴 12:10에서 온다. 그 문맥 전체를 읽어 보면 놀라운 흐름이 드러난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12:10)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의 첫 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슥13:1)

 
영이 부어짐, 찔린 자, 애통, 그리고 "그 날에" 열리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요한이 스가랴 12:10을 인용할 때, 그 선지서의 흐름 속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열린 샘"이 그의 시야 밖에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스가랴 14:8은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라고 말했다. 스가랴의 마지막 장들은 찔린 자와 열린 샘과 흐르는 생수를 한 줄로 꿰고 있다.

정경적 울림: 피와 물의 긴 역사

이제 역사적 증언과 요한 자신이 제시한 구약 배경 위에서, 정경 전체의 울림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자. 피와 물은 성경의 구속 이야기에서 처음부터 나란히 흘러왔다. 출애굽에서 피와 물은 구원의 두 문이었다. 유월절 밤, 문설주의 피가 죽음을 넘어가게 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출12:13). 그리고 홍해의 물이 갈라져 백성이 지나갔고, 바울은 그것을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10:2)라고 불렀다. 광야에서는 쳐진 반석에서 물이 흘렀고, 바울은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다.
 
성막에서 피와 물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단계였다. 회막 앞 뜰에 들어서면 먼저 번제단이 있었고, 그 다음에 물두멍이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어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출30:18)고 하셨고,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그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30:20)이라고 하셨다. (전체 규례: 출30:17–21)
 
제단의 피로 속죄하고, 물두멍의 물로 씻고, 그 다음에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회막으로 들어간다. 히브리서는 이 구조를 새 언약의 언어로 다시 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10:19–20, 22)

 
피와 물을 지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그 길이 "그의 육체"를 통해 열렸다. 에스겔은 새 언약의 정결을 물의 언어로 약속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겔36:25)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36:26)

 
그리고 하나님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36:27) 그들이 율례를 행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맑은 물과 새 영이 한 약속 안에 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하셨을 때,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가 떠올려야 했던 본문이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환상을 보았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겔47:1)

 
그 물은 흘러갈수록 깊어져 헤엄칠 만한 강이 되고, 사해에 이르러 죽은 물을 되살린다.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47:9). 그리고 강가에는 나무들이 자란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겔47:12)

(성전 물의 환상 전체: 겔47:1–12)
 
성전에서 흘러나와 죽은 곳을 살리는 물, 그 강가에 자라는 열매 맺는 나무들. 이 환상은 계시록 22장에서 거의 그대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성전이 누구인지를 가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미 밝혔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19–21)

 
예수 자신이 참 성전이시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본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요한복음 안에서 어디에서 흘러나오는가? 초막절에 그분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고, 그 생수는 성령을 가리킨다고 요한은 설명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성전된 그의 육체가 찔렸을 때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제 그 흐름을 한 줄로 이어 보자. 출애굽의 피와 물. 광야의 쳐진 반석과 흐르는 물. 성막의 제단과 물두멍. 에스겔 36장의 맑은 물과 새 영. 에스겔 47장의 성전에서 흐르는 물. 스가랴의 찔린 자와 열린 샘. 요한복음 2장의 참 성전이신 예수. 요한복음 7장의 생수와 성령. 요한복음 19장의 찔린 몸에서 흐르는 피와 물. 그리고 이 흐름은 계시록 22장,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강에서 끝날 것이다.
 
이 연결 가운데 어떤 것은 요한이 직접 인용으로 제시하고(스가랴 12:10, 출애굽기 12:46), 어떤 것은 요한복음 자신의 내적 연결이 가리키며(2장의 성전, 7장의 생수), 어떤 것은 정경 전체를 함께 읽을 때 드러나는 성경신학적 종합이다(성막의 구조, 에스겔 47장). 이 글은 그 층위를 뭉개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층위를 구별한다는 것이 연결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한 이야기라면, 요한이 증언한 찔린 옆구리의 피와 물이 이 긴 흐름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교부들의 읽기

교회는 일찍부터 이 피와 물을 성례와 연결해 읽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제120강)에서, 복음서 기자가 옆구리를 "찔렀다"가 아니라 "열었다"고 썼다는 점에 주목하여(그가 읽던 라틴어 역본의 표현), 거기서 생명의 문이 열리고 교회의 성례들이 흘러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첫 아담이 잠든 사이 그 옆구리에서 하와가 지어졌듯이, 마지막 아담이 십자가에서 잠드신 사이 그 옆구리에서 교회가 지어졌다고 보았다(요지). 크리소스톰은 세례 교육 강론에서 물은 세례를, 피는 성찬의 신비를 가리킨다고 가르쳤고, 역시 하와와 교회의 대비를 사용했다(요지). 암브로시우스는 『성령론』(De Spiritu Sancto) III.11.68에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은 씻기 위함이요 피는 속량의 값이라는 취지로 말했다(요지).[^24]
 
요한복음 19:34의 "옆구리"(πλευρά, 플레우라)가 칠십인역 창세기 2:21–22에서 하와를 지으신 아담의 "갈빗대"와 같은 단어라는 것은, 교부들의 이 신부론적 읽기에 어휘적 발판을 준다.[^c] 신랑과 신부의 주제는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함께 다시 불러낼 것이다.
 
라틴 교회는 부활절 절기에 "내가 보니 성전 오른편에서 물이 흘러나오더라"(Vidi aquam egredientem de templo, a latere dextro)라고 노래하는 교송을 불러 왔다. 이 노래가 직접 노래하는 것은 에스겔 47장의 성전 물이다. 다만 교회는 이 교송을 오래도록 요한복음 19장의 찔린 옆구리와 함께 읽고 묵상해 왔다. 노래의 본문과 교회의 묵상은 구별해야 하지만, 둘이 오래 함께 불려 왔다는 사실은 기억할 만하다.[^25]

개혁주의의 절제와 확신

그러나 여기서 해석의 절제가 필요하다. 요한이 요한복음 19:34에서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를 직접 정의하거나 제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한의 일차적 강조는 실제 죽음에 대한 증언과 성경의 성취다. 교부들의 성례적 읽기는 이 본문이 품은 정경적 울림을 교회의 삶 안에서 묵상한 전통이다.
 
칼빈은 이 전통을 버리지도 않고 과장하지도 않는 길을 보여 준다. 그는 요한복음 19:34를 주석하며, 피와 물이 율법 아래 옛 백성이 받았던 씻음과 속죄의 두 은혜를 가리키며, 요한은 그 두 은혜의 성취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선언하고 이 장면을 그 사실의 가시적 표지로 제시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남기신 성례들도 같은 목적을 갖는다고 했다. 세례는 새 생명 안에서의 영혼의 정결과 성화를 가리키고, 성찬은 완전한 속죄의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칼빈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례들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왔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세례와 성찬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옆구리로 인도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그 샘에서 그것들이 나타내는 바를 길어 올릴 때, 그때 우리는 참으로 더러움에서 씻기고 거룩한 삶으로 새로워지며 하나님 앞에서 속량된 자로 산다(요지). 『기독교강요』 제4권 14장에서도 칼빈은 같은 본문을 인용하며, 물로는 씻음이, 피로는 속죄가 표상되며,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옆구리를 우리 성례의 샘이라고 부른 것은 옳다고 말했다(요지).[^26]
 
칼빈의 이 문장들은 개혁주의 성례론의 핵심을 보여 준다. 성례가 우리를 성례 자체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옆구리로 인도"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 샘에서 길어 올린다는 것. 성례는 그 자체가 샘이 아니다. 샘은 그리스도시다. 성례는 우리를 그 샘으로 데려가는 표이며, 믿는 자에게 그 샘의 물이 참으로 자기 것임을 확증하는 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성례를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와 인"이라 부를 때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요한복음 19:34의 피와 물은 두 성례의 정의가 아니라 두 성례가 가리키는 실체, 곧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보여 준다. 속죄의 피와 정결의 물, 그리고 그 둘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성령. 성례는 그 완성된 사역을 가리키고 인친다. 그리고 그 사역은 이미 "다 이루어졌다."

우리가 마시는 물의 근원

이제 여기까지 따라온 두 개의 물줄기가 한 곳에서 만난다. 하나는 잔의 물줄기였다.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건넨 축복의 잔, 겟세마네에서 아버지께 받으신 저주의 잔, 골고다에서 병사들에게 받으신 신 포도주. 그리고 "다 이루었다."
 
다른 하나는 물의 물줄기였다. 광야의 목마른 백성과 쳐진 반석, 야곱의 우물가에서 목마르셨던 분과 "그런 물을 내게 주사"라고 청한 여인, 초막절에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신 분, 그리고 십자가 위의 "내가 목마르다." 그리고 찔린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와 물.
 
두 물줄기는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우리가 마시는 모든 것, 곧 축복의 잔과 생수와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마시신 잔과 그리스도께서 먼저 겪으신 목마름에서 흘러나온다. 반석이 쳐졌기 때문에 물이 흐른다. 목마른 이가 목마르셨기 때문에 목마른 자가 마신다. 저주의 잔이 비워졌기 때문에 축복의 잔이 채워진다. 이것이 이 후속편의 두 번째 명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고 마실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죽음과 저주의 잔을 마시셨다.

 
그러나 아직 한 문제가 남는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면, 그 완성에 더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리스도의 고난이 다 이루어졌다면, 무엇이 "남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잠들어 있던 세베대의 두 아들,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그리스도께서 홀로 마셔야 했던 잔이 있다면, 왜 그분은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말씀하셨는가?
 
제3부는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3부. 너희도 내 잔을 마시리라

— 교회의 잔과 언약의 식탁

 

앞에서 우리는 중보자가 홀로 마신 잔을 보았다. 겟세마네에서 아버지께 받으신 잔, 골고다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시고 신 포도주를 받으신 뒤 "다 이루었다"로 끝난 그 잔. 그 잔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마신 잔이었고, 그 완성에는 아무것도 더할 수 없다. 이제 질문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바울은 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말했는가?

 

12.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 골로새서 1:24

충돌처럼 보이는 두 문장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이 문장을 요한복음 19:30 옆에 놓으면 표면적으로는 충돌처럼 보인다. 한쪽은 "다 이루었다"고 하고, 다른 쪽은 "남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한 것이 있어서 바울이 그것을 채워야 한다는 말인가?
 
교회사에서 이 구절은 실제로 그렇게 오해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종교개혁 당시 이 구절은 성인들의 공로가 그리스도의 공로와 함께 "교회의 보고(寶庫)"를 이루고, 교회가 그 보고에서 형벌의 사면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면벌부 체계를 뒷받침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로 쓰였다. 개혁자들이 이 구절 앞에서 긴장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공정을 위해 덧붙이자면, 로마 가톨릭 신학도 그리스도의 수난이 속죄에 완전하고 무한히 충분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논쟁의 초점은 그 충분성 자체라기보다, 신자와 성인들의 "보속"(satisfactio)이 형벌의 사면과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있었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보기에 이 구절을 그런 방향으로 끌어가는 것은 바울의 논지를 뒤집는 일이었다.

바울 자신의 문맥

골로새서 1:24를 바르게 읽는 첫걸음은, 바울이 바로 앞에서 무엇을 말했는지를 보는 것이다. 몇 절 앞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선언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1:20) 만물을 화목하게 하셨고, 멀리 떠나 원수가 되었던 골로새 교인들을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1:22) 흠 없는 자로 세우려 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더 강하게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2:13)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2:14). (함께 볼 문맥: 골 1:19–23; 2:11–15)
 
"화평을 이루사", "화목하게 하사", "모든 죄를 사하시고", "증서를 지우시고." 바울은 과거에 완결된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한다. 같은 편지 안에서 바울이 1:20–22에서는 속죄의 완성을 선언하고, 1:24에서는 속죄의 부족을 인정한다고 읽는 것은 바울을 스스로 모순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1:24의 "남은 고난"은 1:20–22의 "이루신" 화목과 다른 차원의 무엇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단어가 말하는 것

바울이 쓴 단어들도 그 차원을 가리킨다. "고난"으로 번역된 말은 틀립시스(θλῖψις)의 복수형 틀립세온(θλίψεων)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지적해 왔듯이,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수난을 특정하는 전문용어로 사용되지 않으며, 주로 신자와 교회가 이 세상에서 겪는 환난, 압박, 박해를 가리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θλῖψις)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채우노라"(ἀνταναπληρῶ, 안타나플레로)는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복합동사로, "내 몫으로, 차례대로 채운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그리고 그 고난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ὑπὲρ τοῦ σώματος αὐτοῦ, 휘페르 투 소마토스 아우투) 받는 것이다. 바울은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고난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교회를 위하여, 곧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기 위하여 고난받는다고 말한다. 바로 다음 절에서 그는 자기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골1:25)이라고 설명한다.

머리와 몸

그렇다면 그 고난이 왜 "그리스도의" 고난인가? 바울 자신이 그 답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이렇게 물으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9:4)

 
사울은 그리스도를 박해한 적이 없다. 그가 박해한 것은 교회였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박해한다고 하신다. 머리와 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행9:16)

 
교회가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 안에서 당하시는 고난이다. 이것이 골로새서 1:24의 "그리스도의 고난"이 뜻하는 바다.
 
칼빈은 골로새서 1:24를 주석하며 바로 이 방향에서 읽는다. 그는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속죄에 부족함이 있어 사람이 보충한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을 강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인격 안에서 단번에 고난을 받으셨듯이, 그의 지체들 안에서 날마다 고난을 받으시며, 이런 방식으로 아버지께서 그의 몸을 위해 작정하신 고난이 채워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요지). 이어서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려, 바울이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것은 속량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인다(요지).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구절을 다루며, 그것은 이미 하늘에 계셔서 더 이상 그런 고난을 받지 않으시는 머리에 관한 말이 아니라, 머리와 함께 온전한 그리스도를 이루는 몸, 곧 교회에 관한 말이라고 풀었다(요지).[^27]

두 차원의 고난

그러므로 여기서 개혁주의의 핵심 구분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두 차원이 있다.
 
첫째는 대속적이고 속죄적인 고난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시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고난. 겟세마네에서 아버지께 받으신 잔, 골고다에서 "다 이루었다"로 끝난 그 고난.
 
둘째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가 그의 형상을 따라 참여하는 고난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역사 속에서 복음을 위해, 사랑을 위해, 증언을 위해,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받는 고난.
 
첫째는 공유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신다. "다 이루었다." 여기에 바울도, 순교자도, 교회도 단 한 방울을 보탤 수 없다. 이 고난에는 "남은" 것이 없다.
 
둘째는 공유된다. 신약은 이 참여의 고난을 거듭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함께 볼 본문: 벧전4:13; 롬8:17; 고후1:5)
 
이 고난에는 "남은" 것이 있다. 교회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이 아직 땅끝까지 가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몸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 몸이 자라는 동안, 몸은 머리가 걸으신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1:24의 구조는 이렇게 정리된다.

미완성된 속죄 → 인간의 보충 (아니다)

완성된 속죄 → 교회의 참여 (그렇다)

 
바울이 "남은 고난"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미완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속죄가 완성되지 않았다면 바울의 고난은 두려움 속에서 공로를 쌓는 고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속죄가 완성되었기에 바울은 "기뻐하고" 고난받는다. 그의 고난은 구원을 얻기 위한 값이 아니라, 이미 얻은 구원이 교회 안에서 드러나는 모양이다.

참여는 대체가 아니다

앞선 「말씀의 섭취」 연작은 "참여"라는 말을 중심에 두었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참여"라는 말을 더 정밀하게 다듬어야 한다.
 
참여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구속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합한다고 해서 중보자의 독특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제한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존 머레이는 『구속의 성취와 적용』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론 전체의 중심 진리라고 불렀다. 선택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모든 국면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요지). 그러나 머레이는 같은 책의 전반부 전체를 "구속의 성취", 곧 그리스도께서 홀로 이루신 사역에 할애했다. 성취(accomplished)와 적용(applied)의 구분. 이 구분을 한 단계 더 정밀하게 말하면 이렇다. 그리스도께서 홀로 구속을 성취하시고, 성령께서 그 완성된 구속을 신자에게 적용하시며,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그 유익에 참여한다. 이 순서가 뒤집히면 참여는 협력이 되고, 협력은 공로가 된다.[^28]
 
이것을 이 후속편의 언어로 말하면 이렇다. 먹음의 신학은 참여다. 마심의 신학도 참여다. 그러나 그 참여 아래에는 한 번의 대리(代理)가 놓여 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리를 취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생명에 참여한다. 대리가 참여의 근거다. 그분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 마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함께 마신다.
 
그리스도만 속죄하신다. 교회는 그 속죄에 참여한다. 그리스도만 저주의 잔을 대속적으로 마시셨다. 교회는 그분의 뒤를 따라 제자도의 잔을 마신다.
 
 

 

13.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영광을 구한 형제

이제 앞에서 겟세마네에 잠들어 있던 두 형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마태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0–23)

 
마가는 같은 대화를 잔과 세례의 두 이미지로 기록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10:38). 그리고 주님은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10:39)라고 답하신다. (전체 대화: 막10:35–45) 이 대화가 놓인 자리를 보면 그 아이러니가 선명해진다. 바로 앞 단락에서 예수께서는 세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셨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이방인들에게 조롱과 채찍질을 당한 뒤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20:19)는 예고였다(전체: 마20:17–19). 주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보좌를 구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주의 나라에서" 좌우편을 구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왕으로 "영광"을 얻으시는 자리에서 그 좌우편을 차지한 사람들이 누구였던가?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마27:38)

 
마태의 머리에 씌워진 죄패는 "유대인의 왕 예수"(마 27:37)였다. 그 왕의 좌우편에 선 것은 두 강도였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몰랐다. 그 "영광"의 좌우편은 십자가였다.

할 수 있나이다

"할 수 있나이다"(δυνάμεθα, 뒤나메타). 이 대답은 용감했지만 무지했다. 그들은 몇 주 뒤 겟세마네에서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했고, 체포의 순간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56). "할 수 있나이다"라고 했던 사람들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대답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그 말씀은 이루어졌다.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가 되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12:1–2)

 
그리고 요한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밧모섬에서 자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1:9)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 여기서 "환난"은 골로새서 1:24와 같은 단어, 틀립시스(θλῖψις)다. 요한은 "주의 좌편"을 구했던 젊은 날의 자신을 기억했을까. 그는 끝내 좌우편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이 약속하신 "내 잔"이었다.

본문 안에 이미 있는 구별

그런데 이 대화가 놓인 마태복음 20장은, 그 단락 안에서 이미 이 글이 필요로 하는 구별을 스스로 보여 준다. 두 형제의 요청에 나머지 열 제자가 분개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 섬김에 대해 가르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6–28)

 
이 문단 안에는 두 가지가 나란히 있다. 하나는 제자들이 따라야 할 길이다. 섬기는 자, 종이 되는 길. 이것은 "인자가 온 것은 ... 섬기려 하고"와 같은 모양이다. 제자는 스승의 섬김을 본받는다.
 
그러나 문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λύτρον, 뤼트론)은 몸값, 속전을 뜻한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ἀντὶ πολλῶν, 안티 폴론)의 안티는 "대신하여"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제자들은 섬김을 본받으라는 명령을 받지만, 대속물이 되라는 명령은 받지 않는다. 대속물은 인자 한 분뿐이다.
 
그러니 마태복음 20장은 한 단락 안에서 두 잔을 구별한다. 제자들이 "과연 마실" 잔(20:23)이 있고, 인자만이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주시는 목숨(20:28)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에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περὶ πολλῶν) 흘리는 바 나의 피"(26:28)라는 말씀이 이 "많은 사람의 대속물"을 다시 불러낸다.

두 잔을 혼동하지 말 것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잔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제자가 마실 수 없는 잔. 대속적 진노와 저주의 잔이다.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의 손에서 건네진 잔, 오직 중보자만 마시는 잔. 이 잔 앞에서 세베대의 아들들은 잠들어 있었고,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잔이 아니었다.
 
둘째, 제자가 마시는 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을 따라가는 제자도의 고난의 잔이다. 야고보의 칼, 요한의 밧모섬, 바울의 감옥. 이 잔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약속된 잔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마신 잔"과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가 마시는 잔"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첫째를 둘째로 끌어내리면 십자가는 단지 가장 위대한 순교의 모범이 되고, 복음은 도덕이 된다. 둘째를 첫째로 끌어올리면 신자의 고난이 속죄의 값이 되고, 은혜는 공로가 된다. 두 잔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제자의 잔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잔에서 흘러나오고, 그 잔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제자도를 말씀하실 때의 표현도 이 구별을 섬세하게 보여 준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

 
"자기 십자가"(τὸν σταυρὸν αὐτοῦ, 톤 스타우론 아우투). 주님은 "내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 않으신다. 제자는 스승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의 십자가 나무를 대신 짊어졌지만(마27:32), 그 위에 못 박힌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대속의 십자가는 그리스도만 지신다.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른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제자들이 마실 잔을 "내 잔"이라 부르신다. 그 잔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마시는 잔이기 때문이다. 제자의 십자가는 제자의 것이지만, 그 모양은 그리스도를 닮는다.

증언하는 십자가

골로새서 1:24와 마태복음 20:23을 함께 놓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이룬다. 우리의 십자가는 그 구원을 증언한다.
 
그의 고난은 속죄한다. 우리의 고난은 속죄하지 않는다.
 
우리의 고난은 완성된 속죄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오는 제자의 형상이다.
 
그리고 이 구별은 성찬의 신학에도 결정적이다. 교회가 성찬에서 마시는 것은 대속의 잔이 아니다. 그 잔은 이미 비워졌다. 교회가 성찬에서 마시는 것은 대속의 열매로 채워진 축복의 잔이다. 그리고 그 축복의 잔을 마신 교회는 성찬상에서 일어나 세상으로 나가 제자의 잔을 마신다. 축복의 잔과 제자의 잔. 교회는 이 두 잔을 함께 마시며 "그 날"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나 두 잔 가운데 어느 것도 그리스도께서 홀로 마신 그 잔은 아니다. 그 사이의 경계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경계가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교회의 잔은 두려움의 잔이 아니라 기쁨의 잔이 될 수 있다.
 
 

 

14. 참 포도나무

다락방의 마지막 가르침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그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공관복음이 전하는 그 말씀과 같은 밤, 요한복음은 주님이 다락방을 떠나시며 하신 긴 가르침을 기록한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14:31)는 말씀 바로 다음에, 주님은 자신을 이렇게 부르신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15:1)

 
농부이신 아버지는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하시고 열매 맺는 가지를 깨끗하게 하신다(15:2).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15:3)라고 하신 뒤, 이 장의 중심 명령을 주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4–5)

 
포도나무의 비유 전체는 요한복음 15:1–8을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서로 다른 전승이므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는 말씀과 "나는 참포도나무"라는 말씀을 한 문맥으로 합치는 것은 정경을 함께 읽는 독자의 일이다. 그러나 그 독자에게는 이 겹침이 잊히지 않는다. 그 밤, 포도나무의 열매를 "그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분이 스스로 참 포도나무이셨다.
 
앞선 연작의 첫 글, 「이 말씀을 먹으라!」도 이 장을 지나갔다. 그때 우리의 초점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에 있었다. 말씀이 사람 안에 거하는 것, 말씀을 먹는 것. 이번에 우리의 초점은 포도나무 자체, 그리고 포도나무가 맺는 열매와 그 열매에서 나오는 잔에 있다.
 
크래쇼의 『거룩한 경구집』에는 가나의 경구만이 아니라 요한복음 15:1을 소재로 한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In Christum Vitem)라는 경구도 실려 있다. 가나의 포도주를 노래한 시인이 참 포도나무도 노래했다는 것은, 17세기의 한 시인의 눈에도 이 두 장면이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는 작은 증거다.[^29]

실패한 포도나무

"참"포도나무라는 말은 비교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참되지 못한 포도나무는 무엇이었는가? 구약은 이스라엘을 거듭 포도나무, 포도원으로 불렀다. 아삽의 시는 출애굽을 포도나무 이식으로 노래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시80:8)

 
그러나 같은 시편은 그 포도나무가 짓밟히고 불탄 뒤의 기도로 이어진다. 시인은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시80:14)라고 부르짖은 뒤 이렇게 기도한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시80:17)

 
포도나무를 위한 기도가 "인자"를 위한 기도로 이어진다. 시편 80편 안에서 포도나무와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인자"는 서로를 비춘다. 요한복음에서 스스로를 "인자"라 부르시는 분이 "나는 참포도나무"라고 하실 때, 이 시편이 그 배경의 한 자리에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사야는 포도원의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사랑의 노래로 시작해 심판의 노래로 끝난다. 사랑하는 이가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일구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으나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5:2). 노래는 그 포도원이 누구인지를 밝히며 끝난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5:7)

(포도원의 노래 전체: 사5:1–7)
 
히브리어의 말놀이가 이 노래의 아픔을 더한다. 하나님은 "정의"(미쉬파트, מִשְׁפָּט)를 바라셨는데 "포학"(미스파흐, מִשְׂפָּח)이 나왔고, "공의"(체다카, צְדָקָה)를 바라셨는데 "부르짖음"(체아카, צְעָקָה)이 나왔다. 소리는 비슷하지만 열매는 정반대다.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는데 들포도가 열렸다. 예레미야도 같은 탄식을 한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렘2:21)

 
칠십인역은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이 원래 심긴 포도나무를 "참된"(ἀληθινή, 알레티네) 포도나무라 부른다. 요한복음 15:1의 "참포도나무"(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헤 암펠로스 헤 알레티네)와 같은 형용사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참된" 포도나무로 심으셨지만, 그 포도나무는 참되지 못한 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에서 한 분이 일어나 말씀하신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에스겔은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가 목재로도 쓸모없어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겔15:4)이라고 했다. 요한복음 15:6의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는 이 선지서의 언어와 이어져 있다. 그리고 공관복음의 포도원 농부 비유(마21:33–43)에서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고, 농부들은 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인다.

언약 백성의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므로 "나는 참포도나무요"는 단순히 아름다운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가 이루지 못한 소명, 곧 하나님께 좋은 열매를 맺어 드리는 언약 백성의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선언이다. 마태가 호세아의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 호11:1)를 예수께 적용할 때 보여 주는 것과 같은 논리다. 이스라엘이 걸었던 길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걸으시되, 이스라엘이 실패한 곳에서 신실하게 걸으신다. 시편 80편이 "애굽에서 가져다" 심은 포도나무를 노래했다면, 신약은 애굽에서 불러낸 아들을 참 포도나무로 고백한다.
 
그러나 참 포도나무는 홀로 서 있지 않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이스라엘의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만 열매를 맺으시고 우리는 구경꾼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에게 붙어 있는 가지들이 그분의 생명으로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문장은 앞에서 인용한 예레미야 2:13, 곧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에 대한 가장 짧은 대답이다. 가지는 스스로 수액을 만들지 않는다. 포도나무에서 받는다.

열매와 잔

그렇다면 가지가 맺는 열매는 무엇인가? 요한복음 15장은 곧바로 그 대답을 준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2–13)

 
열매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곧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다. 포도나무이신 분이 자기 목숨을 버리신다. 그리고 가지들은 그 사랑에서 수액을 받아 같은 모양의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앞의 장에서 본 제자의 잔과 같은 구조다. 포도나무는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고, 가지는 그 생명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가지의 열매는 포도나무의 희생을 보충하지 않는다. 그 희생에서 흘러나온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도주를 "포도의 피"라고 부르는 관용 표현이 있다. 야곱은 유다를 축복하며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창49:11)라고 했는데, 여기서 "포도즙"은 히브리어로 "포도의 피"(담-아나빔, דַּם־עֲנָבִים)다. 모세의 노래도 "포도즙의 붉은 술"(신32:14)을 "포도의 피"(담-에나브)로 부른다. 이것은 관용어일 뿐이므로 여기서 알레고리를 끌어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관용어는 적어도,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담은 잔을 들어 "이것은 ... 나의 피"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이 성경의 언어 안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들렸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리고 유다 지파에 대한 그 축복, 곧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라는 축복을 받은 유다의 후손이 누구인지를 아는 독자에게는, 이 관용어가 뒤에서 다룰 계시록 19장의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계19:13)라는 장면과 함께 조용히 울린다.

모든 이미지는 연합으로 모인다

이제 이 글이 따라온 이미지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자.
 
생수. 그것은 그리스도께 "와서 마시는" 자에게 주어지고,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
 
포도나무.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가지는 그분에게 붙어 있을 때만 산다.
 
열매. 그것은 가지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의 생명이 가지를 통해 맺는 것이다.
 
.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며 건네시는 것이며, 그 안에 그분의 피, 곧 그분의 생명과 죽음의 유익이 담겨 있다.
 
이 네 이미지는 모두 한 곳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생수를 마신다는 것,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것, 열매를 맺는다는 것, 잔을 마신다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서로 다른 얼굴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6:56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와 요한복음 15:4의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같은 동사, 메노(μένω, 거하다)로 묶여 있다. 먹고 마심의 목적은 거함이다.
 
 

 

15. 출애굽기 24장 — 피의 목적은 교제

산 아래의 피

앞에서 우리는 주님이 잔을 "언약의 피"라 부르셨을 때 그 말씀이 출애굽기 24장을 불러낸다는 것을 보았고, 그 장면을 따로 살피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킬 때다. 이 장은 이 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약 본문 가운데 하나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십계명과 언약서의 율례들을 주셨다(출 20–23장). 그리고 24장에서 그 언약이 비준된다. 모세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율례를 백성에게 전했고, 백성은 한 소리로 준행하겠다고 응답했다(출24:3). 모세는 그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운 뒤,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했다. 그리고 피의 절반은 양푼에 담고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24:4–6). 그 다음의 두 절이 이 장면의 심장이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24:7–8)

(전체 문맥: 출24:3–11)
 
이 장면의 순서를 천천히 보자. 먼저 말씀이 있다.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기록하고, 낭독한다. 그 다음에 제단과 제사가 있다. 번제와 화목제. 그 다음에 피가 있다. 피의 반은 제단에, 반은 백성에게. 하나님과 백성이 한 피로 묶인다. 그리고 선언이 있다. "이는 ... 언약의 피니라."
 
앞선 연작의 독자라면 이 순서에서 한 가지를 알아볼 것이다. 말씀이 먼저 낭독되고, 그 다음에 피가 뿌려진다. 말씀과 의식은 경쟁하지 않는다. 의식은 말씀을 인치고, 말씀은 의식의 의미를 밝힌다. 개혁주의가 성례를 언제나 말씀과 함께, 말씀 아래에서 이해해 온 것은 이 오랜 언약의 문법과 맞닿아 있다. 성례는 말씀 없이 홀로 서지 않는다. 시내산에서도 그랬다.

산 위의 식탁

그런데 출애굽기 24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피가 뿌려진 뒤,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 가운데 하나가 이어진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산에 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는데, 그 발 아래는 청옥을 편 듯 하늘같이 청명했다(출24:9–10).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적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24:11)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이 한 문장의 무게를 느끼려면, 같은 책의 뒤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함께 들어야 한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33:20)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 그런데 출애굽기 24장에서 이스라엘의 대표들은 하나님을 "뵙고"(ויֶּחֱזוּ, 바예헤주), 죽지 않고, "먹고 마셨다." 요한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장면에서 그들이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는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본문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그 임재 앞에서 식탁에 앉았다.
 
그 식사는 아마도 산 아래에서 드린 화목제의 고기였을 것이다. 레위기가 규정하듯이 화목제(셸라밈, שְׁלָמִים)는 번제와 달리 제물의 일부를 드린 자가 먹는 제사였다.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는 것, 그것이 화목제의 본질이었다. 화목제의 이름 자체가 평화, 온전함을 뜻하는 샬롬(שָׁלוֹם)과 같은 어근이다. 그러니 출애굽기 24장의 구조는 이렇다.

말씀 → 피 → 언약 → 하나님의 임재 → 식사와 교제 [^0]

 
피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식탁으로 이어진다. 제단에 뿌려진 피는 산 위의 식탁을 연다.

피의 목적에 대하여

여기서 이 장의 제목, "피의 목적은 교제"를 조심스럽게 풀어야 한다. 이것을 "피의 유일한 목적은 교제"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가 이루는 일을 여러 언어로 말한다. 속죄, 곧 죄의 값을 치르는 것. 칭의, 곧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선언되는 것. 화목, 곧 원수 되었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 정결, 곧 더러움에서 씻기는 것. 속량, 곧 종 된 자리에서 값을 치르고 풀려나는 것. 연합, 곧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 이 모든 것은 각기 고유한 무게를 가지며, 어느 하나로 다른 것을 흡수해서는 안 된다. 특히 속죄와 칭의의 법정적 차원을 "교제"라는 관계적 언어 속에 녹여 버리는 것은 개혁주의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구속의 유익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다. 속죄는 교제를 위해 죄를 제거하고, 칭의는 교제를 위해 법정의 문을 열며, 화목은 교제를 위해 원수 관계를 끝내고, 정결은 교제를 위해 더러움을 씻고, 연합은 교제를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리게 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3:18)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대신 죽으심의 목적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심이다. 바울도 화목을 말한 뒤 곧바로 그 화목이 여는 기쁨을 말한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5:11)

 
그리고 요한은 복음 선포의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1: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문답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즐거워함"(enjoy)은 바로 이 교제를 가리킨다. 구속은 사람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출애굽기 24장의 칠십 장로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신 것은, 구속이 무엇을 향하는지를 구약의 한가운데서 미리 보여 준 장면이다.[^30]

나답과 아비후

그러나 출애굽기 24장의 식탁에는 그림자도 있다. 그 산에 올라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신 사람들 가운데 나답과 아비후가 있었다. 그들은 훗날 여호와께서 명하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는다(레10:1–2). 하나님의 식탁에 앉았다는 사실이 그들을 지켜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은 앞에서 본 고린도전서 10:5, 곧 광야에서 모두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나 다수가 멸망했다는 경고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찬에 대해서도 같은 경고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11:27). 언약의 식탁은 은혜의 식탁이지만, 거룩한 식탁이다. 그 식탁에 앉는 것은 믿음으로, 경외함으로 앉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다락방으로, 다락방에서 하늘의 시온으로

이제 출애굽기 24장과 마지막 만찬을 나란히 놓아 보자. 시내산에서 모세는 "이는 ... 언약의 피니라"고 선언했고, 다락방에서 예수께서는 "이것은 ...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다. 시내산에서는 열두 지파를 따라 열두 기둥이 세워졌고, 다락방에는 열두 제자가 앉아 있었다. 시내산에서는 피가 뿌려진 뒤 대표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다락방에서는 잔이 돌려진 뒤 주님이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을 약속하셨다. 누가는 그 약속을 이렇게 전한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22:29–30)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시내산의 식탁은 다락방의 식탁으로, 다락방의 식탁은 하나님 나라의 식탁으로 이어진다. 히브리서는 시내산의 언약 비준을 회상하며, 출애굽기 24장에는 기록되지 않은 세부까지 덧붙인다.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히9:18)라고 말한 뒤, 히브리서는 이렇게 잇는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히9:19–20)

 
히브리서가 기억하는 시내산의 의식에는 피와 함께 물이 있고, 우슬초가 있다. 이것은 출애굽기 24장 본문 자체에는 없는 세부로, 히브리서가 오경의 다른 정결 의식들을 함께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선 논의를 지나온 독자에게 이 조합은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슬초와 피와 물. 골고다에서 신 포도주는 우슬초에 매어 올려졌고, 찔린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흘렀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그 시내산을 새 언약의 시온과 대조한다. 시내산은 흑암과 폭풍과 두려움의 산이었지만, 새 언약의 백성이 이른 곳은 이렇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12:22–24)

 
"천만 천사와 ... 모임"으로 번역된 말에는 축제의 총회를 뜻하는 파네귀리스(πανήγυρις)가 들어 있다. 새 언약의 백성은 두려움의 산이 아니라 축제의 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축제의 중심에 "뿌린 피"가 있다. 시내산에서 백성에게 뿌려진 언약의 피는, 이제 새 언약의 중보자의 피로 성취되어 축제의 총회를 연다.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 25:6의 "이 산에서" 베풀어지는 잔치가 여기서 다시 보인다. 시내산의 식탁, 시온의 잔치.

보스와 종말론의 우선성

게할더스 보스는 『바울의 종말론』에서 종말론이 구원론보다 앞선다는 유명한 통찰을 제시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그 앞에 더 높은 목표, 곧 시험을 통과한 뒤 들어갈 확정된 생명의 상태가 놓여 있었으며, 구속은 타락 이후에 그 원래의 종말론적 목표를 향한 길을 다시 여는 것이라는 것이다(요지). 『성경신학』에서 보스는 에덴의 생명나무를 그 더 높고 변하지 않는 생명을 가리키는 성례로 이해했다(요지).[^31]
 
이 통찰은 출애굽기 24장을 읽는 데 깊은 빛을 비춘다. 구속의 목적은 단지 타락 이전의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 앞에 두셨던 목표, 곧 하나님과의 완성된 교제에 이르는 것이다. 에덴의 생명나무, 시내산의 식탁, 다락방의 잔,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그 한 목표를 향해 서로 다른 구속사의 지점에서 세워진 표지들이다.
 
다만 여기서 정직하게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출애굽기 24장의 언약 식사와 주의 만찬과 종말론적 잔치를 이렇게 하나의 선으로 잇는 것은 보스가 특정한 문장으로 정식화한 명제라기보다, 보스가 열어 준 방법, 곧 계시의 유기적 진전과 종말론의 우선성이라는 성경신학적 토대 위에서 이 글이 시도하는 종합이다. 보스의 이름으로 그가 하지 않은 말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토대 위에서 이 연결은 자연스럽게 서 있다.
 
 

 

16. 성찬 — 십자가와 혼인잔치 사이의 식사

좌표를 먼저 밝히며

이제 이 모든 흐름이 교회의 현재 안에서 모이는 자리, 곧 성찬에 이르렀다. 앞선 연작에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이 글의 좌표를 먼저 밝혀 둔다. 이 글은 성찬을 개혁파적 복음주의의 자리에서 이해한다. 곧 칼빈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이어지는 개혁파 성찬론의 틀 안에서, 복음주의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려 한다. 다른 전통의 성찬 이해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글이 서 있는 자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축복의 잔, 참여의 잔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루면서 성찬의 본질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고전10:16–17)

 
"참여함"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다. 교제, 사귐, 함께 나눔. 요한일서 1:3에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할 때 쓰인 바로 그 단어다. 출애굽기 24장이 가리킨 교제, 구속의 모든 유익이 향하는 그 교제가 성찬의 잔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으로 주어진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잔을 떡보다 먼저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고 이 글은 어느 하나를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마심의 신학"을 따라온 이 글에게, 바울이 성찬의 교제를 말하면서 잔을 먼저 들었다는 사실은 반가운 세부다.
 
앞선 연작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말했다면, 이번 글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레위기가 가르쳤듯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레17:11).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의 죽음, 곧 흘려진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죽음을 통해 주어지는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몸과 피, 떡과 잔은 둘로 나뉜 두 은혜가 아니라 하나의 그리스도, 하나의 언약적 식사다. 성경에서 먹음과 마심은 언제나 함께 생명을 받는 행위였고, 성찬에서 떡과 잔은 함께 하나의 식탁을 이룬다.
 
바울은 같은 장에서 이 참여의 배타성도 말한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10:21). 잔을 마신다는 것은 언약의 충성을 표하는 일이다. 두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다. 이것은 이 글이 앞에서 본 두 잔의 구별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잔과 제자의 잔은 구별되되 서로 이어져 있지만,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은 서로를 배제한다.

"그가 오실 때까지"

그리고 바울은 다음 장에서 주님께 받은 성찬 제정의 말씀을 전한다. 그는 이것이 "주께 받은 것"(고전11:23)이라고 밝히고,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떼어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11:24) 하신 말씀을 전한 뒤, 잔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5–26)

(제정의 말씀 전체: 고전11:23–26)
 
"그가 오실 때까지"(ἄχρι οὗ ἔλθῃ, 아크리 후 엘테). 이 표현은 앞에서 우리가 붙들었던 마태복음 26:29의 "그 날까지"(ἕως τῆ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 헤오스 테스 헤메라스 에케이네스)와 짝을 이룬다. 주님은 "그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고, 교회는 "그가 오실 때까지" 마신다. 주님의 기다림과 교회의 기다림이 같은 식탁 위에서 만난다. 주님은 마시지 않으며 기다리시고, 교회는 마시며 기다린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둘은 함께 새 것으로 마실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며 아람어 그대로 남긴 한 마디도 이 기다림의 언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μαράνα θά, 마라나 타, 고전16:22). 초대교회의 문헌 『디다케』는 성찬 기도의 끝에 바로 이 "마라나타"를 두었다(요지). 초대교회는 식탁에서 주님의 오심을 불렀다.[^32]

성찬의 세 시제

그러므로 성찬에는 세 시제가 있다.
 
과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주의 죽으심을 ...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은 골고다에서 단번에 완성된 사역을 가리킨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여기서 "기념"(ἀνάμνησις, 아남네시스)은 머릿속의 회상 이상이다. 구약에서 유월절은 "기념"(지카론, זִכָּרוֹן)의 절기였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출12:14). 이스라엘은 해마다 유월절을 지키며 출애굽이 자기들의 구원이었음을 고백했다. 개혁주의는 이 "기념"을 그리스도의 제사를 재현하거나 다시 드리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한 추억으로 축소하지도 않는다. 기념은 단번에 이루어진 사역의 유익이 성령에 의해 지금 믿는 자에게 참되게 적용되는 언약의 방식이다.
 
현재. 교회의 실제 언약적 교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 성찬은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그리고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참되게 교제하는 식사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미래. 하나님 나라의 잔치. "그가 오실 때까지." 성찬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미리 맛보는 식사다. 그리고 그 맛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교회는 "마라나타"를 부른다.
 
그래서 성찬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식사다. 이미 십자가는 완성되었고, 이미 성령이 부어졌으며, 이미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아직 신랑은 오지 않았고, 아직 눈물은 씻기지 않았으며, 아직 교회는 "새것으로" 마시지 않는다. 성찬의 잔은 가나의 좋은 포도주와 어린양의 혼인잔치 사이에, 십자가의 신 포도주를 기억하며 들려진다.

"단번"과 "마실 때마다"

여기서 고린도전서 11:25–26에 두 번 나오는 작은 단어 하나를 보자. "마실 때마다"(ὁσάκις, 호사키스). 성찬은 반복된다. 교회는 이 잔을 한 번 마시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마실 때마다" 거듭 마신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제사를 "단번에"(ἐφάπαξ, 에파팍스) 드려진 것이라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번이다. 교회의 마심은 거듭된다.
 
이 두 단어의 대조 안에 개혁주의 성찬론의 핵심이 있다. 반복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받음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다시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마심"의 신학과 이어진다. 물은 마셔도 곧 다시 목마르다. 사람은 생명을 한 번 마시고 저장해 두는 존재가 아니라, 근원께 거듭 나아가 거듭 받아야 하는 존재다. 성찬이 반복된다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계속 의존하는 존재라는 고백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한 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거듭 붙들린다.
 
단번의 희생, 거듭되는 받음. 이것을 뒤집어 희생을 반복하고 받음을 한 번으로 끝내면, 십자가는 불완전해지고 신앙은 자기 충족이 된다. 성경의 순서는 반대다. 십자가는 "다 이루었고", 교회는 "마실 때마다" 그 이루심에서 받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75문에서 79문에 걸쳐 성찬을 다룬다. 그 문답들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이 글이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이 교리문답의 위로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볼 수 있다.
 
75문은 성찬이 무엇을 확증하는지를 묻고 이렇게 답한다. 내가 눈으로 주님의 떡이 나를 위해 떼어지고 잔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드려지고 찢기셨으며 그의 피가 나를 위해 흘려졌다. 그리고 내가 목사의 손에서 주님의 떡과 잔을 받아 입으로 맛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과 흘리신 피로 내 영혼을 영생에 이르도록 먹이시고 마시게 하신다(요지).
 
76문은 앞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믿음으로 그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일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 그의 거룩한 몸과 더욱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요지). "뿐 아니라"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성찬의 먹고 마심은 믿음과 분리되지 않으며, 믿음을 통하여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연합을 함께 말한다. 우르시누스는 요리문답 해설에서 이 점을 풀어,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참되게 연합하고 그의 유익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요지).[^33]
 
78문은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하는지를 묻고,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 성찬의 떡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지 않으며, 다만 성례의 본질과 용법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린다고 답한다(요지).
 
그리고 79문.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자기 몸이라, 잔을 자기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 부르셨는가? 그 답의 끝부분은 여기서 다룬 모든 것을 한 문장에 담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보이는 표와 보증을 통해 우리에게 확신시키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이 거룩한 표들을 육신의 입으로 받는 것처럼 참되게 성령의 역사로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마치 우리가 친히 모든 것을 고난받고 하나님께 만족을 드린 것처럼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요지).[^34]
 
"마치 우리가 친히 고난받고 만족을 드린 것처럼." 이 문장은 골로새서 1:24를 다룬 앞의 논의와 정확히 맞물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난으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이,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우리의 것으로 여겨진다. 대리가 참여의 근거라는 것, 우리가 속죄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 교회가 역사 속에서 받는 고난은 이 만족을 보충하지 않는다. 이 만족은 이미 성찬의 잔 안에서 우리에게 인쳐진다.

칼빈: 이해하기보다 경험하는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권 17장에서 성찬론을 길게 전개한다. 그의 성찬론의 중심에는 성령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있고 우리는 땅에 있다. 그 거리를 무엇이 잇는가? 칼빈은 성령의 비밀한 능력이 우리의 모든 감각을 넘어서며,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성령께서 참으로 결합시키신다고 말한다(요지). 그래서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땅으로 끌어내려지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들어 올려진다고 보았다. 고대 교회의 성찬 예전에서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라고 외치던 전통을 칼빈이 소중히 여긴 것도 이 때문이다(요지).
 
그리고 칼빈은 이 신비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고백한다. 그는 이 신비가 너무 높아서 자기의 지성으로 파악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자기는 그것을 이해하기보다 차라리 경험한다고 말했다(요지). 개혁주의 성찬론이 흔히 차갑고 합리적인 기념설로 오해되지만, 그 원천인 칼빈에게서 성찬은 이성의 해명보다 앞서는 경외와 경험의 자리였다.[^35]

웨스트민스터: 영적으로, 그러나 참되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27장에서 성례 일반을, 29장에서 성찬을 다룬다. 27장은 성례를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와 인이라 부르고, 모든 성례에는 표와 표가 가리키는 실체 사이에 영적 관계, 곧 성례적 연합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례의 효력은 성례 자체 안에 있는 어떤 능력이나 집례자의 경건이나 의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제정의 말씀에서 온다고 고백한다(27.3, 요지).
 
29장은 주님이 성찬을 제정하신 목적들을 열거한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드려진 자기 희생을 교회 안에서 영속적으로 기념하는 것, 그 죽음의 모든 유익을 참된 신자들에게 인치는 것,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양육받고 자라게 하는 것, 그들이 그리스도께 마땅히 드려야 할 모든 의무에 더욱 헌신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신자 서로 간의 교제의 띠와 보증이 되게 하는 것이다(요지). 이 목적들 가운데 "모든 의무에 더욱 헌신하게 하는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성찬은 식탁에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이어진다. 이 주제는 이 글의 부록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그리고 29장 7절은 앞선 연작이 거듭 인용했던 그 표현, 합당한 수찬자가 이 성례에서 보이는 요소들을 외적으로 받으면서 동시에 내적으로 믿음으로, 육적으로나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그러나 참되고 실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의 모든 유익을 받아 먹는다고 고백한다(요지).[^36]

두 극단 사이의 좁은 길

그러므로 개혁주의 성찬론은 두 극단 사이의 좁은 길을 걷는다. 한편으로 개혁주의는 성찬을 단순한 기억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성찬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떠올리는 심리적 행사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교회에 자신을 주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다른 한편으로 개혁주의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의 실체로 물질적으로 변한다고 보지 않는다. 떡은 떡이고 포도주는 포도주다. 칼빈이 지적했듯이 주님 자신이 그 잔을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 부르셨다. 또한 개혁주의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아래에" 편재한다는 루터파의 이해와도 구별되는 길을 걸어 왔다.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은 승천하여 하늘에 계시며, 성령께서 믿는 자를 그분과 참되게 연합시키신다.
 
이 좁은 길의 중심에는 두 단어가 있다. 성령과 믿음.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시고, 믿음이 그 연합을 받는다. 성령이 없으면 성찬은 빈 의식이 되고, 믿음이 없으면 성찬은 심판의 식탁이 된다. 성령과 믿음이 있을 때, 떡과 잔은 그리스도 자신을 참되게 전달하는 표와 인이 된다.

이 후속편의 첫 번째 명제

이제 우리는 이 후속편 전체가 수렴하는 세 명제 가운데 첫 번째를 여기서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두 번째와 세 번째 명제를 말했으니, 이제 셋이 모두 제자리에 놓인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생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마신다.

 
앞선 연작의 "먹음"과 이번 글의 "마심"은 여기서 한 문장이 된다. 떡과 잔, 몸과 피, 생명의 떡과 생수. 그러나 둘은 결국 한 분을 가리킨다. 말씀도, 떡도, 잔도, 생수도,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 자신에게 데려간다.
 

이렇게 성찬의 잔까지 따라오고 나면, 이 글은 한 가지 위험 앞에 선다. 가나의 포도주, 다락방의 잔, 겟세마네의 잔, 골고다의 신 포도주, 제자의 잔, 축복의 잔. 성경의 모든 포도주가 이렇게 신학적 의미로 무거워지다 보면, 우리는 포도주라는 것 자체를 신비한 물질로 여기거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잔을 하나의 상징으로 환원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한 구석의 평범한 한 줄이 우리를 붙잡는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딤전5:23)

 
이 평범한 구절은 왜 이 글에 필요한가? 그리고 이 글이 지금까지 구별해 온 여러 잔들은 마침내 어떻게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되며, 그 모든 잔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이제 그 질문과 함께, 이 글의 제목이 약속한 "그 날"을 향해 가자.
 
 

 

4부. 그 날까지

—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생명수의 강

 

앞에서 우리는 성찬의 잔 앞에 섰고, 모든 포도주와 모든 잔을 하나의 상징으로 환원할 위험도 보았다. 이제 바울의 지극히 평범한 한 문장으로 그 위험을 바로잡으며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자.

 

17. 디모데전서 5:23 — 포도주 자체를 신비화하지 말라

목회 서신 한 구석의 한 줄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교회의 질서에 관한 긴 지침을 쓰고 있다. 장로를 세우는 일, 과부를 돌보는 일, 죄를 범한 장로를 책망하는 일. 그 한가운데에서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듯한 한 줄이 끼어든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딤전5:22–23)

 
이 구절은 교리적 선언도 아니고 예언도 아니다. 몸이 약한 젊은 목회자를 향한 노(老)사도의 실제적인 당부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이 구절은 이 글에 꼭 필요하다.
 
문맥을 보면 이 당부가 왜 여기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막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고 했다. 디모데는 그 "정결"을 금욕으로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는다. 정결하라는 말이 몸을 해치면서까지 포도주를 끊으라는 뜻은 아니다. 디모데가 왜 물만 마시고 있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다. 절제에 대한 개인적 결단이었을 수도 있고, 에베소 교회를 흔들던 거짓 교사들의 금욕주의와 구별되려는 조심이었을 수도 있으며, 말로 다른 이들을 책망해야 하는 목회자로서 술과 말을 섞지 않으려는 지혜 전통을 따른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해석자들 사이에 여러 제안이 있다. 그러나 바울의 결론은 분명하다.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37] 같은 편지의 앞부분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딤전4:3) 가르칠 것을 경고하며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앞선 「말씀의 섭취」 연작의 독자라면 이 마지막 구절에서 멈출 것이다. 음식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금식이나 금욕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다. 음식은 말씀 아래에서, 감사함으로 받을 때 거룩하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주석하며, 디모데가 지나친 금욕으로 건강을 해칠 정도였기에 바울이 건강을 위해 포도주를 소량 쓰도록 허락한 것이라고 보았고, "조금씩"이라는 말에서 절제의 기준을 읽었다(요지). 바울은 디모데의 절제를 꾸짖지 않는다. 다만 절제가 몸을 무너뜨리는 금욕이 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준다.[^38]
 
물론 같은 편지는 감독과 집사의 자격으로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딤전3:3),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딤전3:8)를 요구한다. 잠언은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잠20:1)고 경고하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이렇게 명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엡 5:18)

 
이 대조는 이 글에게 특히 흥미롭다. 포도주에 취하는 것 대신 성령으로 충만하라. 앞에서 우리는 요한이 성령을 "생수"라 불렀다는 것을 보았다. 사람을 참으로 채우는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성령이다. 그러나 이 경고들은 포도주를 악한 물질로 규정하지 않는다. 경고의 대상은 포도주가 아니라 취함이고, 방탕이고, 사람을 지배하는 탐닉이다.
 
구약에는 포도주를 끊는 것이 특별한 헌신의 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나실인은 서원 기간 동안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않았고(민6:3–4), 레갑 족속은 조상의 명령을 따라 포도주를 마시지 않음으로 순종의 모범이 되었다(렘35장). 성경은 이런 자발적 절제를 존중한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신자에게 요구되는 거룩의 보편적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나실인의 서원은 기한이 있는 특별한 헌신이었고, 그 기한이 끝나면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민6:20).

포도주는 한 가지 상징이 아니다

그러면 이 평범한 구절이 이 글에 왜 중요한가? 그것은 성경의 모든 포도주를 하나의 상징으로 억지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균형추다. 이 글에서 만난 포도주들을 떠올려 보면, 포도주는 문맥에 따라 전혀 다른 기능을 가졌다.
 
포도주는 창조의 선물이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시104:15).
 
포도주는 잔치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떨어졌다가 넘치도록 다시 채워진 포도주.
 
포도주는 기쁨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삿9:13).
 
포도주는 이다. 디모데의 약한 위장을 위한 포도주, 그리고 강도 만난 자의 상처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부은 "기름과 포도주"(눅10:34).
 
포도주는 언약의 표지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포도주는 축복이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며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27:28)라고 했다.
 
포도주는 심판이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시75:8).
 
그리고 포도주는 고난이다. 겟세마네의 잔, 골고다의 신 포도주, 제자의 잔.
 
이 여덟 가지 얼굴은 서로 다르다. 가나의 포도주를 곧바로 성찬의 포도주로 읽거나, 디모데의 포도주를 언약의 상징으로 읽거나, 시편 75편의 진노의 포도주를 가나의 기쁨과 한데 섞는 것은 본문을 존중하는 읽기가 아니다. 각 포도주는 먼저 자기 문맥 안에서 읽혀야 한다. 그 다음에야 정경 전체 안에서 그 포도주들이 서로 어떻게 울리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을 수 있다. 이 글이 가나와 골고다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잇는 선을 그을 때마다, 그 선이 요한복음과 계시록의 본문들이 스스로 가리키는 방향 위에 있어야 한다고 거듭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포도주는 악하지도, 신비하지도 않다

디모데전서 5:23은 또 하나의 사실을 보여 준다. 포도주라는 물질 자체는 악하지도 않고, 특별히 신비한 물질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피조물이며, 어떤 날에는 잔치의 기쁨이 되고, 어떤 날에는 아픈 위장을 위한 약이 된다.
 
이것은 성찬의 신학에도 중요하다. 성찬의 잔이 거룩한 것은 포도주라는 물질 안에 어떤 신비한 힘이 내재해 있어서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장 3절은, 바르게 사용된 성례 안에서 또는 성례에 의해 제시되는 은혜가 성례 안에 있는 어떤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성례의 효력은 집례자의 경건이나 의도에 달려 있지 않고 성령의 역사와 제정의 말씀, 곧 그 사용을 허락하는 명령과 합당한 수찬자에게 주시는 유익의 약속을 담은 말씀에 달려 있다고 고백한다(요지). 그러나 이것이 외적 요소가 아무래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외적 요소와 함께 주어지며, 같은 신앙고백 29장은 주님께서 이 규례에서 떡과 포도주를 성찬의 요소로 정하셨음을 명시한다(29.3, 29.5 요지). 요소 자체에 내재적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요소를 제정의 말씀으로 구별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가볍게 여겨질 수 없다. 오늘날 교회가 성찬에 포도주를 쓰느냐 포도즙을 쓰느냐 하는 현대의 실천적 논쟁 자체를 이 글은 판정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성찬의 은혜가 요소에 내재한 힘이 아니라 제정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성찬의 잔도 하나님이 지으신 선물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거룩한 용도로 구별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할 뿐이다.[^39]
 
그러므로 앞에서 확인했던 것이 여기서 다시 확인된다. 마태복음 26:29를 "앞으로 포도 성분이 들어간 액체는 절대로 마시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멈추신 것은 포도라는 물질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나누던 식탁 교제였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시작하실 것도 물질이 아니라 교제, 곧 "너희와 함께" 새것으로 마시는 식탁이다.
 
 

 

18. 네 종류의 잔

잔들을 정리하며

이제 이 글이 따라온 여러 잔들을 한자리에 모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여 이 글은 "네 종류의 잔"을 제안한다. 미리 밝혀 두자면, 넷이라는 숫자는 유월절 식사의 네 잔 전통에서 끌어낸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 전통의 1세기 형태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 글은 그런 숫자의 대응에 신학을 걸지 않는다. 이 넷은 복음서와 서신서가 말하는 잔들을 그 기능과 마시는 사람에 따라 구별해 본 성경신학적 정리다.[^40]
 
첫째, 언약 제정의 잔.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잔이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잔은 새 언약을 세우고, 그 언약의 복을 약속하며, 그 복이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질 것을 선언한다.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고, 받는 이는 제자들이다.
 
둘째, 언약 저주의 잔.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홀로 담당하신 잔이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잔은 구약이 여호와의 손에 있는 잔(시75:8), "분노의 잔"(사51:17), "진노의 술잔"(렘25:15)이라 불렀던 바로 그 잔이며, 언약의 저주의 제재 전체를 담고 있다. 주시는 분은 아버지이고, 받으시는 분은 아들 한 분뿐이다.
 
셋째, 교회의 축복과 제자도의 잔. 이 잔은 두 얼굴을 갖는다. 한편으로 교회는 성찬에서 "축복의 잔"을 받는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고전10:16) 이 잔은 첫째 잔의 약속이 둘째 잔의 대가로 성취된 뒤, 그 성취의 유익을 교회가 성령과 믿음으로 받는 잔이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의 잔을 마신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내 육체에 채우노라." 축복의 잔과 제자도의 잔은 서로 다른 두 잔이라기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가 이 세대 안에서 마시는 한 잔의 두 면이다. 은혜를 받는 교회가 그 은혜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
 
넷째, 종말론적 잔. "그 날", 곧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의 잔,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교제의 잔이다. 이 잔은 아직 마셔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그 날까지" 기다리시고, 교회가 "그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잔이다.

둘째와 셋째를 결코 혼동하지 말 것

이 네 가지 가운데 이 글이 가장 힘주어 구별해 온 것은 둘째와 셋째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잔은 공유되지 않는다. 제자의 고난의 잔은 공유된다.
 
둘째 잔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마신 잔이고, 셋째 잔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마시는 잔이다. 둘째 잔은 속죄하고, 셋째 잔은 증언한다. 둘째 잔은 구원을 이루고, 셋째 잔은 이루어진 구원의 열매다. 둘째 잔에는 "남은" 것이 없고, 셋째 잔에는 "남은" 것이 있다.
 
이 구별이 서면, 이 글이 붙들어 온 세 문장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다 이루었다." (요19:30)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마20:2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첫 문장은 둘째 잔에 대한 말이다. 둘째와 셋째 문장은 셋째 잔에 대한 말이다. 둘째 잔이 다 비워졌기 때문에, 셋째 잔은 두려움의 잔이 아니라 기쁨으로 받는 잔이 된다. 바울이 "괴로움을 기뻐하고"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네 잔의 흐름

그리고 이 네 잔은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그리스도께서 첫째 잔을 주시며 약속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둘째 잔을 홀로 마시셨다. 그 결과로 교회는 셋째 잔을 마신다. 그리고 마침내 넷째 잔을 그리스도와 함께 마실 것이다.
 
첫째 잔과 넷째 잔은 서로를 향해 있다. 첫째 잔을 건네시며 주님은 넷째 잔을 약속하셨다. "그 날까지." 그 사이에 둘째 잔과 셋째 잔이 있다. 주님이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그 시간은, 주님 편에서는 저주의 잔을 마시신 시간이며, 교회 편에서는 축복과 제자도의 잔을 마시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처음과 중간에 나온 두 포도주, 곧 가나의 좋은 포도주와 골고다의 신 포도주는 네 잔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둘 다 어느 하나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가나의 포도주는 창조의 선물이면서, "내 때가 아직"이라는 말씀 아래 넷째 잔의 기쁨을 앞당겨 보여 준 표적이다. 골고다의 신 포도주는 둘째 잔 그 자체는 아니지만, 둘째 잔을 마시시는 수난의 마지막 장면 안에 있다. 두 포도주는 네 잔의 흐름을 앞뒤에서 비추는 표지들이다.
 
 

 

19. 신랑과 혼인잔치

신랑의 친구

가나의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고 칭찬했다. 앞에서 우리는 그 칭찬이 엉뚱한 사람에게 가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 요한복음은 곧 그 칭찬이 누구에게 가야 했는지를 밝힌다. 가나 이야기에서 겨우 한 장 뒤,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한 뒤(요 3:27–28), 자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3:29)

 

그리고 그의 증언은 한 문장으로 끝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신랑은 예수시다.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 곧 혼인을 준비하고 신랑의 음성을 기뻐하는 들러리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이름도 없이 지나간 신랑의 자리에, 요한복음은 참 신랑을 세운다.

신랑을 빼앗길 날

공관복음도 예수를 신랑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 신랑 이미지 곁에는 놀랍게도 새 포도주가 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왜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9:15)

 
그리고 이어지는 두 비유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끝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9:17). (전체 대화: 마9:14–17) 한 단락 안에 신랑, 혼인집의 기쁨, "신랑을 빼앗길 날", 그리고 "새 포도주"가 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혼인잔치의 기쁨이 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마태복음 26:29에서 주님은 "이제부터"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신랑을 빼앗기는 그 날이 온 것이다. 주님은 "그 날까지" 마시지 않으시고, 교회는 신랑이 보이지 않는 동안 기다린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절망이 아니다. 새 포도주가 준비되고 있다. 그리고 그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가 아니라 새 부대, 곧 새 언약과 새 창조에 담길 것이다. 마태는 이 신랑 이미지를 두 개의 혼인잔치 비유로 이어 간다. 임금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청하는 비유(마22:1–14), 그리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마25:10)

 
신랑은 떠났고, 신랑은 다시 온다. 그 사이의 교회는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언약은 처음부터 혼인이었다

신랑과 신부의 언어는 신약이 새로 발명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예레미야의 새 언약 약속 안에서 하나님은 옛 언약을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렘31:32)라고 설명하셨다. 선지자들은 언약을 혼인으로, 우상 숭배를 음행으로 불렀다. 그리고 회복을 이렇게 약속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2:19–20)

 

이사야도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사 54:5)고 했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5)고 약속했다. 그러니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표적을 행하시고, 스스로를 신랑이라 부르시며, 마지막 잔을 "새 언약"이라 하셨을 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남편이 되시겠다던 언약의 오랜 약속 위에 서 있다.

신부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신랑

바울은 이 신랑의 사랑이 무엇이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엡5:25–27)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신랑은 신부를 얻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었다. 십자가는 그 내어줌의 사건이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20:28)라고 불렀고, 계시록의 장로들은 어린양을 이렇게 찬양한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신부는 신랑의 피로 얻어졌다.
 
에베소서 5장의 이 문장 안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가 들어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자. 앞에서 가나의 정결 예식 항아리를 보며, 우리는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15:3)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찔린 옆구리의 피와 물을 보았다. 신랑은 자기 피로 신부를 사시고, 물과 말씀으로 신부를 씻으신다. 바울은 창세기의 첫 혼인을 인용한 뒤 그 비밀을 밝힌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1–32)

 
에덴의 첫 혼인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교회를 가리키는 비밀이었다. 앞에서 우리는 교부들이 요한복음 19:34의 찔린 "옆구리"(πλευρά)를 칠십인역 창세기 2:21–22에서 하와가 지어진 아담의 "갈빗대"(πλευρά)와 연결하여, 첫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왔듯이 마지막 아담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태어났다고 읽었다는 것을 보았다. 그 옆구리의 연결 자체는 교부들의 해석 전통이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혼인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은 바울 자신이 에베소서에서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바다. 동산에서 시작된 혼인이 십자가를 지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이른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그리고 마침내 계시록 19장에서 그 잔치가 선포된다. 하늘의 허다한 무리가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하는 가운데(계19:6), 선포가 울린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계19:7)

 
그리고 천사가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명한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19:9)

(전체 장면: 계 19:6–10)
 
"청함을 받은 자들"(οἱ κεκλημένοι, 호이 케클레메노이). 가나의 이야기가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ἐκλήθη, 요2:2)로 시작했던 것을 기억하자. 같은 동사 칼레오(καλέω)다. 물론 신약에서 아주 흔한 동사이므로 여기에 큰 무게를 둘 수는 없고, 작은 어휘적 울림 정도로 들어 두면 충분하다. 두 혼인잔치를 본질적으로 잇는 것은 이 동사가 아니라 혼인잔치라는 모티프, 그리고 예수를 신랑으로 보는 기독론이다. 그 울림 안에서 보면, 가나에서 예수는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손님이셨다. 계시록에서 그분은 혼인잔치의 신랑이시고, 그분의 백성이 "청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이 신랑은 "어린 양"이시다. 계시록이 처음 어린양을 보여 줄 때 그는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 5:6)고 묘사된 어린양이었다. 혼인잔치의 신랑은 희생의 흔적을 지닌 채 서 계신다.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듯이(요 20:27),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신랑도 자신이 신부를 어떻게 얻었는지를 몸에 지니고 계신다.

두 잔치, 그리고 하나의 경고

계시록 19장을 계속 읽으면 이 혼인잔치 곁에 또 다른 장면이 있다. 하늘이 열리고 백마 탄 이가 나타나는데, 그는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19:13). 그리고 그가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계19:15). 이어서 천사가 공중의 새들을 불러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계 19:17) 대적들의 살을 먹으라고 외친다.
 
같은 장에 두 잔치가 있다. 신부를 위한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있고, 대적을 향한 심판의 "큰 잔치"가 있다. 그리고 진노의 포도주 틀이 있다. "피 뿌린 옷"의 피가 누구의 피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이사야 63장의 포도즙 틀을 밟는 전사의 옷에 튄 대적의 피로 읽는 해석이 많고, 전투 이전에 이미 피에 적셔진 옷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피를 떠올리는 해석도 있다. 이 글은 어느 한쪽을 단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장면은 이 글이 따라온 잔의 신학에 엄숙한 한 줄을 더한다. 계시록은 앞에서 이미 이렇게 말했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계14:10). 진노의 잔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그 잔을 마신 것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였다. 그 잔을 대신 마셔 주신 분을 끝내 거절하는 자에게 그 잔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은 이 글의 기쁨을 흐리려는 말이 아니라, 그 기쁨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를 보여 주는 말이다. 신부가 마시는 기쁨의 잔은 신랑이 대신 마신 진노의 잔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초청은 아직 열려 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신랑이 쓴 잔을 마셨기 때문에

이 모든 흐름을 한 줄로 이어 보자.
 
가나: 혼인잔치. 신랑의 포도주가 떨어졌고, 손님으로 오신 분이 좋은 포도주를 주셨다.
 
요한복음: 그 손님이 참 신랑이심이 드러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십자가: 신랑이 신부를 얻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다.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계시록: 어린양의 혼인잔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 흐름 위에서 이 글은 다음 문장을 제안한다.

신랑이 쓴 잔을 마셨기 때문에, 신부는 혼인잔치의 기쁨의 잔을 마신다.

 
이 문장은 어떤 개혁파 신학자의 직접 인용이 아니다. 칼빈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이렇게 말한 적이 없다. 이것은 가나에서 계시록까지의 정경을 함께 읽으며 이 글이 도달한 성경신학적 요약이다. 그러나 이 요약이 서 있는 토대,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고 그 결과로 백성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3:13–14가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바이며, 개혁주의 신앙의 한가운데에 있다.
 
 

 

20. 디모데전서 5:23에서 계시록 22장까지 — 창조와 구속

창조를 긍정하는 신앙

마지막 장면으로 가기 전에, 디모데전서 5:23이 열어 준 또 하나의 문을 지나야 한다. 포도주는 단지 구속의 상징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글의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읽을지를 결정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창조를 긍정하는 신학이다. 하나님은 물을 만드셨고, 포도를 만드셨고, 사람에게 먹고 마시는 기쁨을 주셨다. 창조의 여섯째 날 하나님은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하셨다. 전도서는 허무의 한가운데서도 이렇게 권한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전9:7)

 
바울은 부자들에게 소망을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딤전6:17) 두라고 권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려고 주신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10장에서 현세의 삶과 그 선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다루며, 하나님께서 음식을 창조하신 목적을 생각해 보면 그분이 단지 필요만이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까지 공급하려 하셨음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시편 104편의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인용한다(요지). 동시에 칼빈은 같은 자리에서 그 선물들을 탐닉과 방종으로 남용하는 것을 엄하게 경계한다. 창조의 긍정과 절제의 경계는 칼빈에게서 함께 간다. 디모데전서 5:23의 "조금씩"이 그 균형을 가장 짧게 요약한다.[^41]

죄는 창조를 악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상의 고통과 왜곡은 어디서 오는가? 개혁주의는 죄가 창조물 자체를 악한 것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니라, 창조물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왜곡했다고 본다. 포도주는 악하지 않다. 그러나 죄 아래의 인간은 그것으로 취하고, 그것에 매이고, 그것을 우상으로 삼는다. 노아는 홍수 뒤에 포도나무를 심었고, 포도주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창9:20–21). 문제는 포도나무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구속은 창조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헤르만 바빙크가 즐겨 강조했듯이, 은혜는 자연을 없애지 않고 회복한다(요지). 그리스도의 구속은 창조를 버리고 순수한 영의 세계로 도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를 회복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바울은 피조물 전체가 그 날을 기다린다고 말한다.[^42]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1)

(전체 문맥: 롬8:18–25)
 
베드로는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라고 말한다. 영혼만의 하늘이 아니라, 새로워진 땅이다.

새 창조의 식탁은 어떤 식탁인가

그렇다면 성경 마지막의 식탁과 생명수와 생명나무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 앞에서 우리는 칼빈이 마태복음 26:29의 "새로운 마심"을 비유적 표현으로 읽었다는 것을 보았다. 칼빈은 하늘의 생명이 이 세상의 음식과 음료의 필요에 매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키려 했다. 그 관심은 정당하다. 우리는 새 창조에서의 먹고 마심이 이 세상의 생리적 필요와 같은 방식일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부활한 몸과 새 땅을 말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잡수셨고,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행10:41; 헬라어 συνεφάγομεν καὶ συνεπίομεν, 쉬네파고멘 카이 쉬네피오멘, 개역개정은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으로 옮김). 크리소스톰이 보았듯이 그것은 필요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몸이 참된 몸임을 확증하기 위해서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이 다른 몸이 아니라 같은 몸으로, 그러나 다른 성질을 지닌 몸으로 일으켜진다고 고백한다(요지). 새 창조는 비물질적인 영혼만의 천국이 아니라, 새로워진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완성이다.[^43]

새한글성경(KNT) 하下; 우리는 그분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일어나신 뒤에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이 두 진리는 경쟁하지 않는다. 새 창조의 식탁이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이 그 완성을 식탁과 강과 나무와 열매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구속이 창조를 버리지 않고 완성한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동산을 지으시고 거기에 강과 나무와 먹을 것을 두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성을 내려 보내시고 거기에 강과 나무와 열매를 두신다. 처음과 마지막이 서로를 비춘다.

약한 위장과 만국의 치료

그리고 여기서 디모데전서 5:23과 계시록 22장이 뜻밖의 방식으로 손을 잡는다. 디모데에게는 "자주 나는 병"이 있었다. 바울은 그 병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다. 성경에서 가장 평범한 약 처방이다. 사도의 권위도, 디모데의 경건도 그 병을 없애 주지 않았다. 디모데는 약한 몸으로 교회를 섬겼다.
 
계시록 22장의 생명나무는 이렇게 묘사된다.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2). 그리고 계시록 21장은 그 도성에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21:4)라고 말한다.
 
디모데의 약한 위장을 위한 한 잔의 포도주와 만국을 치료하는 생명나무의 잎사귀 사이에, 이 세대의 교회가 산다. 이것은 예표론이 아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권할 때 생명나무를 떠올렸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다만 정경을 끝까지 읽는 독자에게, 몸의 연약함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작은 배려와 모든 연약함을 끝내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치유가 같은 손에서 나온다는 것은 위로가 된다. 오늘 약을 쓰는 신자도, 그 날 잎사귀의 치료를 받을 신자도, 같은 창조주의 돌봄 아래 있다.
 
 

 

21. 마지막 장면 — 다시는 목마르지 않음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이제 이 글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다. 계시록 7장에서 요한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든 셀 수 없는 무리를 본다. 장로 가운데 하나가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계7:13), 스스로 대답한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7:14)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7:15), 그 다음에 약속이 이어진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7:16–17)

(전체 환상: 계7:9–17)
 
이 본문에는 이 글이 구별해 온 두 잔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란히 서 있다. 그들은 "큰 환난"(θλίψεως τῆς μεγάλης, 틀립세오스 테스 메갈레스)에서 나온 자들이다. 골로새서 1:24의 "고난", 계시록 1:9의 "예수의 환난"과 같은 단어, 틀립시스다. 그들은 제자의 잔을 마신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옷을 희게 한 것은 그들의 환난이 아니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받은 고난은 그들을 씻지 못했다. 그들을 씻은 것은 어린양의 피였다. 제자도의 잔은 끝까지 마셔졌지만, 속죄는 끝까지 어린양의 것이었다. 이 글이 처음부터 붙들어 온 구별이 성경의 마지막 환상 안에서도 지켜진다.
 
그리고 그 환난의 끝에 약속이 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이것은 이사야의 약속,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49:10)의 성취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σκηνώσει, 스케노세이).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ἐσκήνωσεν, 에스케노센)와 같은 동사다. 그리고 초막절, 곧 장막절을 기억하게 하는 말이다. 앞에서 우리는 초막절의 큰 날에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던 것을 보았다. 이제 영원한 장막절이 온다. 하나님이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어린양이 그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신다. 목마르셨던 분이 이제 목마른 자들을 샘으로 이끄는 목자가 되신다. 제자의 고난의 잔조차 영원하지 않다. 그 잔에도 마지막이 있다.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그들은 그 환난에서 "나온다."

"이루었도다"

계시록 21장에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본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그리고 보좌에서 큰 음성이 들린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계21:3)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21:4), 보좌에 앉으신 이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1:5) 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21:6)

 
새 예루살렘의 전체 환상은 계시록 21:1–22:5를 직접 읽어 보면 더 선명하다. 이 본문 안에서 이 글의 거의 모든 실이 한데 모인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시작된 혼인의 이야기가 여기서 완성된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앞에서 우리는 마태만이 마지막 만찬의 약속에 "너희와 함께"를 덧붙였다는 것, 그리고 마태복음이 임마누엘로 시작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로 끝난다는 것을 보았다. 계시록 21:3은 "함께"(μετ᾽ αὐτῶν)를 거듭 말한다. "그 날"에 "너희와 함께" 마시겠다던 약속은 하나님이 친히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이 장면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 25장,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베풀어지는 잔치 바로 뒤에 이어지던 약속,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가 여기서 성취된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마태복음 26:29의 "새것으로"(καινόν)가 여기서 "새롭게"(καινά)로 온 창조에 번진다.
그리고 "이루었도다"(γέγοναν, 게고난). 앞에서 우리는 십자가 위의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를 들었다. 이제 새 창조의 보좌에서 또 하나의 "이루었도다"가 들린다. 두 단어는 헬라어로 다르고, 사전적 의미도 같지 않다. 십자가의 테텔레스타이가 구속 사역의 완결을 선언했다면, "되었다", "일어났다"는 뜻의 보좌의 게고난은 그 구속이 향하던 새 창조가 이제 실현되었음을 선언한다. 이 두 선언의 관계를 이 글의 언어로 표현하면, 하나는 값의 완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값으로 산 것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두 단어의 사전적 뜻이 아니라,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함께 읽으며 이 글이 시도하는 성경신학적 종합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선언되었기 때문에, 보좌에서 "이루었도다"가 선언될 수 있다.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사야 55:1의 초청,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가 여기서 완성된다. 값없이. 그 값은 이미 다른 분이 치르셨기 때문이다.

생명수의 강

그리고 계시록의 마지막 장이 열린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1–2)

 
이어지는 절들에서 환상은 저주의 종결과 하나님의 얼굴, 그리고 다시는 밤이 없는 빛으로 이어진다(계22:3–5). 앞에서 인용한 에스겔 47장이 거의 그대로 여기에 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 그 강 좌우에 자라는 나무, 달마다 새 열매, 약 재료가 되는 잎사귀. 그러나 에스겔에서는 물이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왔다면, 계시록에서는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 계시록 21:22는 그 도성에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키셨던 분, 요한복음 19장에서 그 성전된 몸이 찔려 피와 물을 흘리셨던 분이, 이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보좌에 앉아 계신다. 생명수의 근원은 찔리셨던 어린양이시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창세기 3:24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지키던 생명나무의 길이 여기서 열려 있다. 계시록 22:14는 그 길이 누구에게 열리는지를 말한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계시록 7:14가 이미 말했듯이 "어린 양의 피에" 씻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첫 아담이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취하여" 먹고 생명나무를 잃었고, 마지막 아담이 저주의 나무 위에서 주어진 잔을 "받으셔서" 생명의 길을 여셨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 길 끝에서 생명나무가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그 열매는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다시 저주가 없으며"(πᾶν κατάθεμα οὐκ ἔσται ἔτι, 판 카타테마 우크 에스타이 에티). 창세기 3장에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고 선언되었던 저주, 신명기 28장이 목마름을 포함하여 열거했던 언약의 저주, 그리고 갈라디아서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던 그 저주. 이제 다시 저주가 없다. 겟세마네에서 아버지께 받으신 저주의 잔이 이 문장의 값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앞에서 우리는 출애굽기 33:20의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와, 출애굽기 24:11에서 장로들이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는 놀라운 예외를 함께 보았다. 첫 아담은 동산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다(창3:8). 이제 그의 종들이 "그의 얼굴을 볼" 것이다. 시내산의 식탁에서 잠시 열렸던 것이 이제 영원히 열린다.

모든 물이 한곳에서 만난다

이제 이 글이 따라온 모든 물줄기가 마침내 한곳에서 만난다.
 
에덴의 강.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창2:10). 성경의 첫 강은 동산에서 흘러나왔다.
 
광야의 반석.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그리고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성전의 물. 에스겔이 본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와 사해를 되살리는 물, 스가랴가 본 "그 날에" 예루살렘에서 솟아나는 생수, 그리고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사마리아 여인의 생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초막절의 생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리고 요한의 괄호,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십자가의 목마름. "내가 목마르다."
 
찔린 옆구리의 피와 물.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새 예루살렘의 생명수.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이 모든 물이 하나의 강으로 모인다. 그리고 그 강의 근원은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 곧 우물가에서 목마르셨고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셨던 바로 그분이시다.

마지막 초청

그리고 성경은 마지막 초청으로 끝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22:17)

 
"성령과 신부가." 생수로 불린 성령과,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기다리는 신부가 함께 부른다. "오라." 그리고 그 초청은 목마른 자에게 향한다. 성경의 마지막 초청은 이 글이 처음부터 따라온 그 목마름을 향한다. 몇 절 뒤, 성경의 마지막 대화가 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20)

 
앞에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성찬의 식탁에서 "마라나타", 곧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를 불렀다는 것을 보았다. 성경의 마지막 기도가 그 기도다. 그리고 그 기도에 대한 대답이 그보다 먼저 주어져 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 날이 온다.
 
 

 

결론 — 그 날까지

다시 가나로

이 글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크래쇼의 라틴어 한 줄로 시작했다.

Nympha pudica Deum vidit, et erubuit.

물이 하나님을 보고 붉어졌다.

 
그 시구는 가나의 기적을 물의 편에서 바라보았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아보고 붉어지는 순간. 그 짧은 상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끝까지 읽은 지금, 우리는 그 시구 너머의 이야기를 안다. 가나에서 물을 붉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요한복음의 끝에서 목마른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가신다.
 
가나에서 그분은 좋은 포도주를 주셨다.
 
갈보리에서 그분은 신 포도주를 받으셨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분은 축복의 잔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겟세마네에서 그분은 저주의 잔을 자신이 받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목마르다." 그리고 신 포도주를 받으신 뒤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
 
그 결과로 교회는 "축복의 잔"을 마신다.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잔, 이미 완성된 그의 죽음과 생명의 유익을 성령과 믿음으로 받는 잔이다.
 
그러나 교회는 동시에 역사 속에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는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형상에 참여한다. 야고보의 칼과 요한의 밧모섬과 바울의 감옥이 그 잔이었고, 오늘 교회가 복음과 사랑과 증언을 위해 받는 고난도 그 잔이다. 이 고난은 속죄를 보충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성된 속죄의 열매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기뻐하며 말할 수 있었다. 채울 것이 속죄에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속죄가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러나 이 제자의 고난의 잔조차 영원하지 않다.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은 그 환난에서 나온다. 마지막에는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6장에서 약속하신 "그 날", 곧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이 온다.

세 개의 명제

이 후속편은 처음부터 세 개의 명제를 향해 걸어왔다. 이제 그 셋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생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마신다.
 
둘째,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고 마실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죽음과 저주의 잔을 마시셨다.
 
셋째, 그러므로 성찬에서의 먹고 마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하거나 보충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그의 죽음과 생명의 유익을 성령과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언약적 참여다.

「말씀의 섭취」로 돌아가며

앞선 「말씀의 섭취」 3부작은 한 문장으로 모였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이 후속편은 그 문장을 지우지 않는다. 그 곁에 또 하나의 문장을 놓는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라면, 생수를 마신다는 것도 생명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을 죄라고 불렀다. 그 웅덩이는 터져 있었다. 사람은 생명을 저장해 둘 수 없다. 마실 때마다 다시 목마르고, 목마를 때마다 다시 근원께 나아가야 한다. 교회가 성찬의 잔을 "마실 때마다" 거듭 마시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번이지만, 우리의 받음은 거듭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한 번 손에 넣고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날마다 그분께 붙들리는 존재다.
 
그리고 이제 먹음과 마심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이 우리를 살리신다.
 
우리가 그분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자기 것으로 삼으신다.
 
우리가 생명을 섭취하여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일어난다. 말씀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가고, 성례는 그 약속을 인치며,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 믿음은 그 연합을 받는다. 말씀도, 떡도, 잔도, 생수도,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 자신에게 데려간다.

오라, 먹으라, 마시라

앞선 연작이 따라간 명령은 "먹으라"였다. 이 후속편이 따라간 명령은 "마시라"였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장은 그 둘을 하나의 초청으로 모은다.
 
"오라."
 
이사야는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불렀다. 예수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부르셨다. 성령과 신부는 "오라"고 부른다.
 
"먹으라."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마시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그리고 그 초청의 중심에는 음식이나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계신다. 우리는 떡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분께 온다. 우리는 물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생수의 근원이신 분께 온다. 우리는 잔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잔을 주시는 분, 그리고 그 잔을 위해 먼저 저주의 잔을 마시신 분께 온다.
 
그리고 그 초청의 길은 두 동산 사이에서 열렸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금지된 것을 자기 손으로 취하여 먹고, 식탁과 생명나무와 하나님의 얼굴을 잃었다. 마지막 아담은 또 하나의 동산에서 아버지가 주신 잔을 순종하여 받으시고, 저주의 나무 위에서 목마르셨으며, 신 포도주를 받으신 뒤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자기 백성이 다시 하나님의 식탁에 앉을 길을 여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실 수 없는 저주의 잔을 홀로 마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생수와 축복의 잔을 마신다.
 
우리는 아직 그분의 제자로서 고난의 잔을 마신다. 그러나 그 잔에도 마지막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 어린양과 그의 신부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흐르는 생명수 곁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누리며,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것으로 마실 것이다. 그분이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대로. 그 날에. 너희와 함께.
 
 

 

가나에서, 물은 자기 하나님을 알아보고 붉어졌다.
골고다에서, 그 하나님은 우리의 목마름을 마지막 한 모금까지 짊어지셨다.
그 목마름이 다한 자리에서, 어린양의 잔치가 열린다.
그 날까지, 우리는 그분이 주신 잔을 마신다.
그리고 그 날에, 그분과 함께 마실 것이다.
 
 

 

부록 — 식탁에서 삶으로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1. 왜 이 부록이 필요한가

이 글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시작해 다락방의 잔과 겟세마네의 잔을 지나, 골고다의 신 포도주와 찔린 옆구리를 거쳐, 교회의 성찬상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이르렀다. 그 여정의 한가운데에는 늘 식탁과 잔이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결국 이 글은 성찬에 관한 글인가? 신앙의 중심을 예배당의 성찬상 위에 두자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 부록은 그 오해를 막기 위해 쓴다. 이 글이 따라온 모든 주제,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 은혜를 받음, 자기부인, 고난에의 참여, 먹고 마심의 신학은 성찬과 성례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신자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성찬은 그 모든 것이 가장 선명하게 압축되어 보이는 자리일 뿐, 그 모든 것이 머무는 자리가 아니다. 식탁에서 받은 것은 식탁을 떠나 삶으로 흘러간다.

 
 

2. 개혁주의는 전통주의가 아니다

먼저 한 가지 오해를 풀어야 한다. 성례를 중요하게 말하고, 교부들과 옛 신앙고백들을 인용하고, 라틴어 성시와 고대 교회의 교송까지 불러오는 글이라면, 결국 예전과 전통을 신앙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다.
 
개혁주의는 전통주의와 같지 않다. 둘의 차이는 전통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 이 글 자신이 크리소스톰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이레네우스를 인용했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시인의 경구로 문을 열었으며, 중세 라틴 교회의 찬가와 교송을 소개했다. 개혁자들 자신이 교부들을 누구보다 깊이 읽은 사람들이었다. 칼빈의 주석과 『기독교강요』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크리소스톰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개혁주의는 전통을 버리지 않는다.
 
차이는 권위가 어디에 있느냐에 있다. 전통주의는 이렇게 말할 위험이 있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지킨다." 형식과 관습 그 자체에 본질적 권위를 부여하고, 예전을 신앙의 중심으로 끌어올린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다른 질문을 묻는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이 복음을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이끄는가? 이 은혜가 어떻게 삶의 순종으로 이어지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첫 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과 믿음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거나 성경에서 선하고 필연적인 추론으로 이끌어낼 수 있으며, 여기에 성령의 새로운 계시든 사람의 전통이든 어떤 것도 더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한다. 동시에 같은 조항은 예배와 교회 정치에 관한 어떤 부수적 사항들은 말씀의 일반 원칙을 따라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로 정해야 한다고 인정한다(요지). 성경은 모든 것을 규정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스린다.[^44]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막7:8)고 책망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살후2:15)고 권했다. 성경은 전통을 무조건 배척하지도, 무조건 높이지도 않는다. 말씀을 폐하는 전통은 버리고, 말씀을 전하는 전통은 지킨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는 전통을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고, 전통을 절대화하지도 않는다. 오직 말씀 아래에서 유익한 전통은 사용하고, 말씀을 가리거나 대체하는 전통은 거부한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secundum verbum Dei)는 표어가 가리키는 것도 이것이다. 다만 이 정형화된 문구를 그대로 특정 인물이 처음 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중요한 역사적 뿌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이른바 '더 진전된 개혁'(Nadere Reformatie) 운동, 특히 요도쿠스 판 로덴슈타인(Jodocus van Lodenstein) 같은 이들이 교회의 개혁이 교리의 정비에 머물지 않고 삶과 경건의 개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호소한 데 있으며, 오늘의 라틴어 정형구는 그 뒤에 다듬어지고 널리 퍼진 것이다. 개혁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말씀 앞에 계속 서는 태도다.[^45]
 
이 글이 성찬을 깊이 다룬 것은 성찬이라는 의식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성찬이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개혁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 그 자체가 아니라, 말씀에 의해 규정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믿음으로 드려지는 예배다. 전통은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신앙의 본질이나 은혜의 근원은 아니다.
 

 

3.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 로마서 12:1의 순서

이 부록의 중심 본문은 로마서 12:1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그리고 바울은 곧바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고 잇는다(롬12:2). 이 구절에서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명령이 아니라 그 명령 앞에 놓인 두 단어다. "그러므로"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그러므로"는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바울은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칭의,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연합, 성령 안의 새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을 차례로 말했다. 앞에서 우리가 인용한 로마서 5장의 두 아담의 대조도 그 흐름 안에 있다. 그리고 11장은 송영으로 끝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11:36)

 
그 송영 바로 다음에 "그러므로"가 온다. 그리고 그 "그러므로"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διὰ τῶν οἰκτιρμῶν τοῦ θεοῦ, 디아 톤 오이크티르몬 투 테우) 권면된다. 복수형 "자비하심들"은 로마서 앞부분 전체가 펼쳐 보인 하나님의 긍휼의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니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만들어 바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푸신다. 그 다음에,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몸을 드린다.

은혜 → 응답

복음 → 예배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 신자의 자기헌신

 
이 순서는 절대로 뒤집혀서는 안 된다. 순서가 뒤집히면, 곧 신자의 헌신이 먼저 오고 하나님의 자비가 그 다음에 온다면, 예배는 은혜를 얻어 내기 위한 거래가 되고 복음은 율법이 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구조 자체가 이 순서를 가르친다. 요리문답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사람의 비참, 사람의 구원, 그리고 그 구원에 대한 감사. 선한 행위와 십계명과 기도는 세 번째 부분, 곧 "감사" 아래에서 다루어진다. 요리문답 86문은 우리가 우리의 공로 없이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는데 왜 선을 행해야 하느냐고 묻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사신 뒤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우리가 온 삶으로 그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이 우리로 인하여 찬양받으시게 하려 하심이라고 답한다(요지). 선행은 구원의 값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다.[^46]
 
바울이 이 드림을 "영적 예배"(λογικὴ λατρεία, 로기케 라트레이아)라고 부른 것도 눈여겨보자. 로기케는 "합당한", "이치에 맞는", "말씀에 걸맞은"이라는 뜻을 함께 품는 말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받은 자에게 가장 이치에 맞는 반응, 가장 합당한 예배가 바로 자기 몸을 드리는 것이다. 라트레이아는 원래 성전의 제사 봉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울은 성전의 제사 언어를 가져와 신자의 삶 전체에 적용한다.
 
그리고 "산 제물"(θυσίαν ζῶσαν, 튀시안 조산). 구약의 제물은 죽임을 당해 제단에 드려졌다. 그러나 신자는 살아 있는 채로 드려진다. 죽임을 당한 제물은 이미 드려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죽임을 당하셨으므로, 신자는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그 사신 생명으로 드려진다.

 
 

4. 두 희생을 혼동하지 말라

여기서 이 글 전체가 지켜 온 구별이 부록에서도 똑같이 지켜져야 한다. 성찬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희생을 받아 누린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신자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나 두 희생은 동일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대속적이고, 단회적이며, 완전하고, 반복될 수 없는 희생이다. 그것은 죄를 속하고, 진노를 담당하고, 저주를 짊어진 희생이다. "다 이루었다."
 
신자의 희생은 감사의 희생이다. 순종과 자기부인과 사랑과 봉사와 증언과 고난과 거룩한 삶의 희생이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를 길게 논증한 뒤, 신자가 드릴 제사를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히13:15–16)

 
"예수로 말미암아." 신자의 제사는 예수를 통해서만 드려진다. 그리고 그 내용은 찬송과 선행과 나눔이다. 이 제사는 속죄하지 않는다. 기쁘시게 할 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성찬을 두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사를 다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번의 제사를 기념하는 것이며 그 제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찬양의 영적 봉헌이라고 고백한 것(29.2, 요지)은 바로 이 두 희생의 구별이다. 성찬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드려지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감사와 찬양으로 자신을 드린다.[^47]
 
이 구별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 주는 이미지가 이 글의 주제인 "마심"과 이어져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바울은 투옥과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자기 생명을 "전제"로 표현했고, 생애 말년에는 그 이미지를 다시 사용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2:17)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딤후4:6)

 
"전제"(σπένδομαι, 스펜도마이)는 제단의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제사, 곧 부어 드리는 음료의 제사다(민15:5–10). 바울은 자기 생명을 그렇게 부어 드린다고 말한다. 그런데 본문을 먼저 정확히 보아야 한다. 빌립보서 2:17에서 바울이 전제로 부어지는 자리는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다. 그 밑에 놓인 제물은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섬김이며,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 위에 자기 생명이 음료의 제물처럼 부어지기를 기뻐한다. 그러니 이 본문이 그리스도의 속죄제를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넓은 구속론의 차원에서 보면,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섬김도, 그 위에 부어지는 바울의 생명도, 모두 이미 단번에 완성된 그리스도의 희생 위에 서 있다. 신자의 자기헌신은 그 희생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희생의 열매다. 그리고 바울은 그 부어짐 앞에서 "나는 기뻐하고"라고 말한다. 앞에서 골로새서 1:24의 "괴로움을 기뻐하고"를 보았듯이, 완성된 속죄 위에서 드려지는 삶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부어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주의 잔을 마시셨다. 신자는 그 은혜 위에 자기 생명을 전제로 붓는다. 두 잔은 결코 같지 않다. 그러나 두 번째 잔은 첫 번째 잔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5. "다 이루었다" 위에서 드리는 삶

그러므로 신자의 삶의 예배는 "다 이루었다"는 완성된 복음 위에서만 가능한 응답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은혜의 순서를 이렇게 말한다. 그는 먼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2:8), 그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2:9). 그리고 이렇게 잇는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구원은 행위에서 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장은 참된 살아 있는 믿음으로 행한 선한 일들이 그 믿음의 열매요 증거이며, 이로써 신자는 감사를 표현하고 확신을 굳게 하며 형제를 세우고 복음을 빛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고백한다(요지).[^48]
 
그러므로 신자의 헌신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다. 신자의 희생은 속죄를 만드는 희생이 아니라 속죄받은 자의 감사의 희생이다. 이 순서가 무너지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신자가 자기 헌신으로 구원을 얻으려 애쓰다가 불안에 빠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가 자기 헌신을 자랑하다가 교만에 빠지는 일이다. "다 이루었다"는 두 위험을 모두 막는다. 이미 이루어졌으니 불안할 이유가 없고,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니 자랑할 이유도 없다.
 

 

6. 삶 전체에 퍼져 있는 제자의 잔

앞에서 우리는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제자가 그리스도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성찬의 잔을 의식적으로 마시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자기부인과 고난과 사랑과 용서와 섬김과 증언과 인내와 충성의 삶을 사는 것을 포함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섬김을 가르치실 때, 그 가르침은 예배의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위와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20:26). 제자의 잔은 누가 윗자리에 앉느냐는 다툼 한가운데서, 곧 삶의 가장 평범하고 가장 이기적인 자리에서 마셔진다.
 
그러니 제자도의 잔은 삶 전체에 퍼져 있는 잔이다. 교회 안에서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마신다. 정직하게 일하다 손해를 볼 때, 동료의 실수를 덮어 주고 대신 책임을 질 때. 가정에서 마신다. 날마다 반복되는 돌봄과 인내와 용서 속에서. 관계 속에서 마신다. 오해를 받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고난 속에서 마신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오해와 불이익과 박해를 감수할 때. 노동과 책임과 봉사와 희생 속에서 마신다. 누구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맡겨진 일을 끝까지 할 때.
 
여기서 한 가지를 구별해 두자. 제자의 잔은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섬기며 증언하기 때문에 감수하는 자기부인과 고난의 삶에서 마셔진다. 물론 신자는 병과 상실과 실패 같은 일반적인 섭리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부름받는다. 그러나 그런 모든 고난을 마태복음 20장의 "내 잔"과 곧바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말한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3:17)

 
"무엇을 하든지." 제자의 잔에는 성과 속의 경계가 없다.
 

 

7. 골로새서 1:24와 몸의 예배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배당 안의 의식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의 사역과 여행, 박해와 노동, 복음 전파와 교회를 위한 수고, 몸의 고통 전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드려지는 삶의 예배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회상한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살전2:9)

 
천막을 만드는 노동과 복음 전파가 한 문장 안에 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는 자기 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

 
"몸에." "우리 몸에."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는 "우리 죽을 육체에"(고후4:11). 바울에게 제자도는 몸의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로마서 12:1의 "너희 몸을"이라는 표현이 새롭게 들린다. 바울은 "너희 영혼을" 드리라고 하지 않았다. "너희 몸을" 드리라고 했다.
 
개혁주의는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몸과 시간과 노동과 관계와 재산과 말과 생각과 고난 전체가 하나님께 속한다고 본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첫 문답은 신자의 유일한 위로를 이렇게 고백한다.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 그분이 그의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치르셨다는 것(요지).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7장에서 로마서 12:1을 풀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을 위해 죽어야 한다(요지).[^49] 바울 자신이 이미 이렇게 말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6:19–20)

 
"값으로 산 것." 그 값이 무엇이었는지를 이 글은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보았다. 그리고 "성령의 전." 앞에서 우리는 성전된 그리스도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렀고, 그 생수가 성령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 성령이 신자의 몸을 성전으로 삼으신다. 그 몸이 무엇을 하든, 먹든지 마시든지 일하든지 쉬든지, 그것은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자유대학 개교 연설에서, 인간 존재의 전 영역 가운데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으시는 곳은 한 치도 없다고 말했을 때(요지), 그것은 이 신학의 사회적 차원을 선언한 것이었다.[^50]
 

 

8. 섭취에서 헌신으로

이 글에서 다룬 성경의 명령들을 한 줄로 늘어놓아 보자.
 
먹으라. 마시라. 받으라. 따르라. 드리라.
 
이 다섯 명령은 모두 은혜를 받고 삶으로 응답하는 하나의 구조 안에 있다. 앞의 셋은 받음이고, 뒤의 둘은 응답이다. 그러나 응답은 받음 없이는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써 종교적 체험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앞선 「말씀의 섭취」 연작이 말했듯이, 먹는다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붙들리는 것이다. 이 후속편이 덧붙였듯이, 마신다는 것은 생명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에 붙들린 사람은 자기의 삶도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므로 이 흐름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섭취 → 연합 → 변화 → 헌신

 
말씀과 성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고(섭취),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연합), 그 연합 안에서 새로워지며(변화), 그 새로워진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헌신). 로마서 12:2의 "변화를 받아"(μεταμορφοῦσθε, 메타모르푸스테)는 수동태다. 신자는 스스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는다."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헌신조차 받은 은혜의 결과다.
 

 

9. 우물가에서 예배자로 — 요한복음 4장과 로마서 12장

앞에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 생수를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 주는 편의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은 삶의 부담을 제거하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다. 그 생명은 사람을 새롭게 하여 예배자로 만든다. 실제로 요한복음 4장에서 생수에 관한 대화는 곧바로 예배에 관한 대화로 이어진다. 여인이 조상들이 예배하던 산과 예루살렘 가운데 어디가 참된 예배의 장소냐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1)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씀(4:22)에 이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3–24)

 
개역한글에서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옮겼던 이 표현을 개역개정은 "영과 진리로"라고 옮겼다. 요한복음 전체의 흐름 안에서 보면 이 두 단어는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다. "영"은 요한이 7장에서 "생수"라고 부른 성령을 떠올리게 하고, "진리"는 14장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해석자들이 이 예배를 성령 안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드리는 예배로 읽어 온 것은 그 때문이다.
 
생수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된다. 생수와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예배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곧 특정한 장소나 전통적 중심지에 갇히지 않는다. 새 언약의 예배는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면 어디서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이면 어디서든 드려진다. 이것이 로마서 12:1의 "너희 몸을 ... 산 제물로 드리라"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참된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면(요2:21), 그리고 신자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면(고전6:19), 예배는 그 몸이 가는 모든 곳에서 드려진다.
 
그러나 이것을 공예배나 성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 4장은 "어디서든 혼자 예배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같은 신약은 교회가 함께 모이기를 거듭 명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10:25)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이 글의 제목인 "그 날"이 여기에도 있다. 교회가 모이는 이유는 그 날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고 기록한다. 말씀과 교제와 떡을 떼는 것과 기도. 공예배는 중요하다. 말씀과 성례는 중요하다.
 
그러므로 균형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공예배는 중요하다. 말씀과 성례는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주일의 특정 시간과 공간에만 갇히지 않는다. 주일의 모임은 한 주간 전체의 예배를 대신하지 않고, 한 주간 전체의 예배는 주일의 모임을 대신하지 않는다. 모임에서 받고, 흩어져서 드린다.
 

 

10. 성찬 —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

그렇다면 이 "모임에서 받고, 흩어져서 드리는" 삶에서 성찬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성찬은 삶 전체의 예배를 대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 전체를 압축하여 교회에 건네는 언약적 식사다.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시고, 신자는 믿음으로 받으며, 교회는 그분과 그리고 서로와 연합한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간다.
 
앞에서 보았듯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장은 주님이 성찬을 제정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로,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마땅히 드려야 할 모든 의무에 더욱 헌신하게 하는 것을 꼽는다(요지). 성찬은 의무에서 벗어나게 하는 식탁이 아니라, 의무로 다시 보내는 식탁이다. 다만 그 의무는 이제 은혜에 대한 감사로 짊어지는 의무다.[^51]
 
그러므로 성찬은 예배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삶 전체의 예배를 계속 가능하게 하는 은혜의 방편이다. 앞에서 우리는 성찬이 "마실 때마다" 거듭된다는 것을 보았다. 삶의 예배는 한 번에 드려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드려진다. 그리고 날마다 드려지는 그 삶은 거듭 받는 은혜로만 지탱된다. 성찬상에서 받은 복음은 일상에서 몸으로 살아진다. 그리고 일상에서 지친 몸은 다시 성찬상으로 돌아와 받는다. 식탁과 삶은 서로를 향해 숨을 쉰다.

 
 

11. 디모데전서 5:23과 몸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디모데전서 5:23이 포도주를 신비화하지 않도록 돕는 균형추라는 것을 보았다. 이 구절은 부록에서도 같은 역할을 한다. 신앙은 삶의 구체성과 몸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 구절은 신앙을 지나치게 의식화하거나 금욕화하지 않도록 돕는다. 바울은 디모데의 위장을 걱정했다. 사도는 젊은 동역자의 영적 상태만이 아니라 몸의 상태를 돌보았다. 개혁주의적 삶의 예배는 몸을 혐오하거나 일상을 떠나는 종교성이 아니다. 오히려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므로 몸의 건강, 절제, 노동, 쉼, 음식, 관계도 삶의 예배와 무관하지 않다. 주님은 사역에 지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6:31)고 하셨다. 쉼도 순종이다. 그리고 바울은 먹고 마시는 가장 평범한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이 구절은 이 글 전체에게 가장 적절한 마지막 교훈이다. 이 글은 성경의 먹음과 마심을 가장 거룩한 자리들에서 따라왔다. 에스겔의 두루마리, 생명의 떡, 다락방의 잔, 겟세마네의 잔, 골고다의 신 포도주, 성찬의 축복의 잔, 새 예루살렘의 생명수.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거룩한 먹고 마심을 지나, 오늘 아침의 밥 한 공기와 오후의 물 한 잔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먹든지 마시든지." 그 평범한 먹고 마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성찬의 잔에서 시작된 감사는 일상의 모든 잔으로 번진다.
 

 

12. 식탁에서 삶으로

이제 이 부록 전체를 하나의 구조로 모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잔을 마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생명을 받고, 그분을 따라 우리의 잔을 마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구원 안에서 산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삶의 예배다.
 
성찬은 삶과 분리된 거룩한 섬이 아니다. 오히려 삶 전체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식탁이다.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받은 은혜가 가정과 노동과 관계와 고난과 섬김으로 흘러갈 때, 성찬은 삶의 예배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찬의 독특성을 약화시키는 말은 아니다. 성찬은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특별한 은혜의 방편이다. 일상의 모든 식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해서 모든 식사가 성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제정의 말씀이 있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유익을 인치시는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은 다른 어떤 식탁에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 은혜의 목적은 예배당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적 신앙의 흐름은 예전주의나 전통주의로 결론 나지 않는다. 그 흐름은 이렇게 이어진다.

 

말씀 → 그리스도 → 은혜 → 연합 → 성례 → 삶 → 예배

 
말씀이 그리스도를 보여 주고, 그리스도가 은혜를 주시며, 은혜가 우리를 그분과 연합시키고, 성례가 그 연합을 인치며, 그 인침을 받은 삶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그 삶 전체가 예배가 된다. 성찬은 이 흐름의 중심에 있는 은혜의 방편이지만, 신앙 전체의 종착점은 아니다. 종착점은 "그 날", 곧 어린양의 혼인잔치다. 그리고 그 날까지, 교회는 말씀과 식탁에서 받고 세상에서 드린다.
 
가나에서 좋은 포도주를 주셨고, 골고다에서 우리의 목마름을 짊어지셨으며, 다락방에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하신 분이, 오늘 식탁에서 우리에게 잔을 건네신다. 그리고 그 잔을 마신 우리를, 그분은 다시 세상으로 보내신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부으셨듯이, 우리도 그분을 위해 우리의 삶을 붓도록.
 
복음은 말씀과 식탁에서 받고, 삶으로 드려진다.
 

 
 
 

각주

[^0]: 히브리어 베리트(בְּרִית)의 정확한 어원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루트비히 쾰러는 이를 '먹다'를 뜻하는 בָּרָה와 연결하여 언약 식사에서 기원을 찾았고, 모셰 바인펠트는 아카드어 birītu('결속, 족쇄')를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으로 보았으며, 이 밖의 설명들도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어원과 별개로 언약의 체결과 공동 식사는 본문에서 거듭 함께 나타나며(창 26:28–31; 31:44–54; 출 24:8–11; 삼하 3:20–21), 비치우스도 어원이 아니라 이러한 본문 관찰에서 언약의 잔치를 진실하고 지속적인 우정의 표로 읽고, 특히 주의 만찬이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인친다고 보았다. Ludwig Köhler, "Problems in the Study of the Language of the Old Testament," Journal of Semitic Studies 1, no. 1 (1956): 3–24, esp. 4–7, https://doi.org/10.1093/jss/1.1.3; Moshe Weinfeld, "בְּרִית bᵉrîth,"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ed. G. Johannes Botterweck and Helmer Ringgren, rev. ed., vol. 2 (Grand Rapids, MI: Eerdmans, 1977), 253–55; Herman Witsius, The Economy of the Covenants between God and Man, trans. William Crookshank, new ed. (London: T. Tegg and Son, 1837), bk. 1, chap. 1, §§5–7, https://www.apuritansmind.com/covenant-theology/the-economy-of-the-covenants-between-god-and-man-by-herman-witsius/the-economy-of-the-covenants-book-1-chapter-1-of-the-divine-covenants-in-general-by-herman-witsius  
[^1]: Richard Crashaw, “Joann. 2. Aquae in vinum versae,” in The Complete Works of Richard Crashaw, vol. 2, ed. Alexander B. Grosart (Printed for private circulation, 1873), “Sacred Epigrams,” Project Gutenberg,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gutenberg.org/files/38550/38550-h/38550-h.htm The epigram first appeared in Crashaw’s Epigrammatum Sacrorum Liber (Cambridge, 1634).

[^2]: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25.12,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7, ed. Philip Schaff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8),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5.htm

[^3]: Westminster Assembly,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29.7,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opc.org/wcf.html

[^4]: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Eerdmans, 1948), Internet Archive,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archive.org/details/biblicaltheology0000vosg; see also Vos, “The Nature and Aims of Biblical Theology,” esp. his description of revelation’s “historical progress,” The Geerhardus Vos Projec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biblicaltheology.org/nabt.pdf

[^5]: Mishnah Berakhot 6:1, Sefaria,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sefaria.org/Mishnah_Berakhot.6.1

[^6]: John Chrysostom, “Homily 82 on Matthew,” trans. George Prevost, rev. M. B. Riddle,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0, ed. Philip Schaff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8),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200182.htm

[^7]: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vol. 3, trans. William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ommentary on Matt. 26:29,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ccel.org/ccel/calvin/calcom33/calcom33.i.html

[^8]: Council of Constance, Session 13 (June 15, 1415), “Condemnation of Communion under Both Kinds,” in Decrees of the Ecumenical Councils, ed. Norman P. Tanner, online transcription, Papal Encyclicals Online,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papalencyclicals.net/councils/ecum16.htm; Martin Luther,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520), trans. Albert T. W. Steinhaeuser, ed.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Henry Beveridg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 IV.17.48–5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ccel.org/institutes

[^9]: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7.

[^10]: Meredith G. Kline, By Oath Consigned: A Reinterpretation of the Covenant Signs of Circumcision and Baptism (Eerdmans, 1968), Meredith G. Kline Resource Site,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meredithkline.com/klines-works/by-oath-consigned

[^11]: “Heidelberg Catechism,” Q. 76,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Korean translation,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heidelberg-catechism?language=ko

[^12]: Calvin, Institutes, II.16.10–12; “Heidelberg Catechism,” Qs. 37, 44.

[^13]: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7.2–3; 8.5.

[^14]: Calvin, Institutes, II.16.5.

[^15]: Irenaeus, Against Heresies V.16.3 and V.19.1,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5),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16.htm and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19.htm; Venantius Fortunatus, “Pange lingua gloriosi proelium certaminis,” Latin Wikisource,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la.wikisource.org/wiki/Pange_lingua_gloriosi_proelium_certaminis
[^a]: 이 예표론의 명시적 사례로 C. H. Mackintosh는 민수기 20장에서 반석을 치는 일이 한 번만 있어야 했고, 그리스도의 죽음 역시 반복될 수 없다고 해석한다. W. A. Criswell도 1959년 설교에서 “the rock is to be struck but once,” “He died but once”라는 식으로 같은 연결을 제시했다. 반면 칼빈은 민수기 20:10–12에서 모세의 죄의 근원을 불신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데서 찾고, 반석을 두 번 친 행위를 그 불신의 표 또는 가중 요소로 보았을 뿐, 그리스도의 단회적 희생과 연결하지 않는다. C. H. Mackintosh, Notes on the Book of Numbers, on Num. 20:7–13, in Notes on the Pentateuch, StudyLight.org, https://www.studylight.org/commentaries/eng/nfp/numbers-20.html; W. A. Criswell, “The Death of Moses, the Man of God” (sermon, First Baptist Church, Dallas, June 14, 1959), W. A. Criswell Sermon Library, https://wacriswell.com/sermons/1959/the-death-of-moses/;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Four Last Books of Moses Arranged in the Form of a Harmony, trans. Charles William Bingham, vol. 4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52–55), on Num. 20:10–12,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06.ii.xxi.html.
[^16]: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vol. 1, trans. John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8), commentary on 1 Cor. 10:1–5,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ccel.org/ccel/calvin/calcom39/calcom39.xvii.i.html;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7.5.

[^17]: Mishnah Sukkah 4:9; 5:1, Sefaria,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sefaria.org/Mishnah_Sukkah.4.9 and https://www.sefaria.org/Mishnah_Sukkah.5.1

[^18]: Geerhardus Vos, “The Eschatological Aspect of the Pauline Conception of the Spirit,” 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10 (1912), The Geerhardus Vos Projec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biblicaltheology.org/eapcs.pdf

[^19]: Calvin, Institutes, III.1.1.

[^20]: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8.7.
[^b]: 이 전승은 바빌로니아 탈무드 산헤드린 43a에 있다. 라브 히스다(3세기)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말과 예루살렘의 귀부인들이 이 음료를 기부했다는 바라이타로 이루어져 있으며, 첨가물은 몰약이 아니라 유향이고, 다루는 대상은 로마의 십자가형이 아니라 유대 법정의 사형 집행이다. 따라서 이를 1세기 골고다의 확립된 관습으로 곧바로 소급할 수는 없다. 이 전승을 배경으로 거절의 이유를 설명한 예로는 존 길과 『풀핏 주석』 등이 있다. 반면 칼빈은 이 음료를 죽음을 재촉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예수께서 그것을 거절하신 것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차분히 죽음으로 나아가시며 고통을 참지 못해 서두르지 않으셨음을 보이려는 뜻이었다고 읽는다. Babylonian Talmud, Sanhedrin 43a, William Davidson Talmud (Koren–Steinsaltz translation), https://www.sefaria.org/Sanhedrin.43a; John Gill, Exposition of the Entire Bible, on Mark 15:23, https://biblehub.com/commentaries/gill/mark/15.htm; H. D. M. Spence and Joseph S. Exell, eds., The Pulpit Commentary: Mark, on Mark 15:23, https://biblehub.com/commentaries/pulpit/mark/15.htm;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vol. 3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46), on Matt. 27:34, https://sacred-texts.com/chr/calvin/cc33/cc33041.htm

[^21]: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2, trans. William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ommentary on John 19:28–3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5.html

[^22]: Calvin, Commentary on John, commentary on John 19:30.

[^23]: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9.2.

[^24]: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20.2,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7, ed. Philip Schaff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8),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120.htm; John Chrysostom, Baptismal Instructions 3.16–17, trans. Paul W. Harkins, Ancient Christian Writers 31 (Newman Press, 1963); compare Chrysostom, “Homily 85 on the Gospel of John,”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4,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85.htm; Ambrose, On the Holy Spirit III.11.68, trans. H. de Romestin, E. de Romestin, and H. T. F. Duckworth,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0, ed.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96),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34023.htm
[^c]: 이 어휘적 겹침 때문에 초대교회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온 것처럼,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열린 옆구리에서 교회가 태어났다는 상징적 독법을 발전시켰다. 다만 요한복음 자체가 이 연결을 명시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으므로, 이는 본문의 직접 진술이라기보다 정경적·교부적 해석의 층위에 속한다. 또한 창 2:21의 πλευρά는 꼭 해부학적으로 “갈빗대”만을 뜻하는 단어는 아니다. “옆구리/측면” 의미가 더 넓고, 그래서 오히려 요 19:34와의 어휘적 울림은 더 자연스럽다.

[^25]: “Vidi aquam egredientem de templo,” Cantus Database, Cantus ID 005403,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cantusdatabase.org/chant/689241

[^26]: Calvin, Commentary on John, commentary on John 19:34; Calvin, Institutes, IV.14.22.

[^27]: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Philippians, Colossians, and Thessalonians, trans. and ed. John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51), commentary on Col. 1:24,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ccel.org/ccel/calvin/calcom42/calcom42.v.ii.vi.html;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08,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108.htm For Augustine’s more explicit head/body formulation, see Augustine, Sermon 341, in Sermons 341–400, trans. Edmund Hill, O.P., ed. John E. Rotelle, The Works of Saint Augustine III/10 (New City Press, 1995), online reproduction,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esleyscholar.com/wp-content/uploads/2019/04/Augustine-Sermons-341-400.pdf; see also Augustine, Sermon 87,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160387.htm

[^28]: John Murra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Eerdmans, 1955), 161. For an online reproduction of Murray’s sentence describing union with Christ as “the central truth of the whole doctrine of salvation,” see “Union with Christ,” Grace Quotes,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gracequotes.org/quote/union-with-christ-is-really-the-central-truth-of-the-whole-doctrine-of-salvation-not-only-in-its-application-but-also-in-its-once-for-all-accomplishment-in-the-finished-work-of-christ For the book’s accomplishment/application structure, see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rts.edu/resources/redemption-accomplished-and-applied

[^29]: Crashaw, “In Christum Vitem,” in Complete Works, vol. 2.

[^30]: Westminster Assembly, The Shorter Catechism, Q. 1,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opc.org/sc.html

[^31]: Geerhardus Vos, The Pauline Eschatology (published by the author, 1930), esp. chap. 2, “The Interaction between Eschatology and Soteriology,” Monergism,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monergism.com/pauline-eschatology-ebook; Vos, Biblical Theology.

[^32]: Didache 10.6, in “The Didache,” New Adven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newadvent.org/fathers/0714.htm

[^33]: Zacharias Ursinus, commentary on Heidelberg Catechism Q. 76, in “The Lord’s Supper | Lord’s Day 28,” Reformed Confessions,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reformedconfessions.org/heidelberg/lords-day-28 

[^34]: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Heidelberg Catechism,” Qs. 75–79,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heidelberg-catechism; Korean version,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heidelberg-catechism?language=ko.

[^35]: Calvin, Institutes, IV.17.12, 32, 36.

[^36]: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7.1–3; 29.1, 7.

[^37]: Garrett S. Craig, “Sobriety and Speech in Greco-Roman Moralists and the Jewish Wisdom Tradition with Reference to 1 Timothy 5:23,”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68, no. 3 (2025): 525–43,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etsjets.org/wp-content/uploads/JETS_68.3_525_Craig.pdf

[^38]: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Epistles to Timothy, Titus, and Philemon, trans. William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56), commentary on 1 Tim. 5:23,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ccel.org/ccel/calvin/calcom43/calcom43.iii.vii.vi.html

[^39]: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7.3; 29.3, 5.

[^40]: Mishnah Pesachim 10, Sefaria,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sefaria.org/Mishnah_Pesachim.10.1 Because the Mishnah is later than the New Testament period, this citation supports the later four-cup pattern, not a precise reconstruction of first-century Passover practice.

[^41]: Calvin, Institutes, III.10.2.

[^42]: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3, Sin and Salvation in Christ, ed. John Bolt, trans. John Vriend (Baker Academic, 2006), 577–78. For an online discussion and quotation of this passage, see Dane C. Ortlund, “‘Created Over a Second Time’ or ‘Grace Restoring Nature’? Edwards and Bavinck on the Heart of Christian Salvation,” The Bavinck Review 3 (2012): 9–29, esp. 21–22,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bavinckinstitute.org/wp-content/uploads/2012/06/TBR3a-Ortlund1.pdf

[^43]: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commentary on Matt. 26:29; Chrysostom, “Homily 82 on Matthew”;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2.2.

[^44]: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6.

[^45]: Michael D. Bush, “Is the Reformation Ever Finished?,” Theology Matters 22, no. 1 (2016),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theologymatters.com/articles/is-the-reformation-ever-finished Bush traces the reformanda language through Jodocus van Lodenstein and cautions against attributing the modern maxim directly to Calvin.

[^46]: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Heidelberg Catechism,” Q. 86,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heidelberg-catechism

[^47]: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9.2.

[^48]: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6.2.

[^49]: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Heidelberg Catechism,” Q. 1,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heidelberg-catechism; Calvin, Institutes, III.7.1.

[^50]: Abraham Kuyper, “Sovereignty in Its Own Sphere” (Souvereiniteit in eigen kring), inaugural address at the Free University, Amsterdam, October 20, 1880, English translation and Dutch text, accessed September 10, 2026, https://rghollenbeck.com/extra/kuyper/sphere_sovereignty.html

[^5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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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sius, Herman. The Economy of the Covenants between God and Man. Translated by William Crookshank. New ed. 2 vols. London: T. Tegg and Son, 1837. A Puritan’s Mind. Accessed September 11, 2026. https://www.apuritansmind.com/covenant-theology/the-economy-of-the-covenants-between-god-and-man-by-herman-witsius/
 
 
 
 
 
 

AI 활용 안내 — 이 글의 문제의식과 중심 논지, 신학적 판단, 자료의 채택과 최종 문장은 필자에게 있다. 작성 과정에서는 생성형 AI를 연구와 편집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였다.
ChatGPT 5.6은 사전 조사와 쟁점의 구조화에, Claude Fable/Opus 5은 초고의 표현 및 참고문헌·각주 형식의 정돈에, Perplexity Pro는 관련 논문과 온라인 원문 자료의 탐색에 사용하였다.
AI가 제시한 내용은 그 자체를 권위 있는 출처로 삼지 않았으며, 접근 가능한 성경 원문, 교부 문헌, 신경과 공의회 문서, 공식 교리서 및 개혁파 신앙고백 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다시 대조하였다. 자료의 해석과 남아 있을 수 있는 오류를 포함한 글의 최종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ㅡ 역사신학 연구를 위한 방법론 메모






종교개혁의 중요한 지적 원리 가운데 하나는 ad fontes, 곧 “원천으로 돌아가라”는 요청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신학적 전통을 단순히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경의 원어 본문을 다시 읽고, 고대 교부들의 저술을 검토하며, 중세를 거쳐 전승된 해석이 그 원천을 얼마나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는지를 다시 물었다. 따라서 ad fontes는 과거의 권위를 다른 권위로 교체하는 일이 아니라, 전승을 존중하면서도 언제든 원천으로 돌아가 재검증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AI의 등장은 이러한 원리를 폐기시키기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할 가능성을 갖는다. 지금까지 역사신학 연구의 중요한 한계 가운데 하나는 한 연구자가 읽고 기억하고 비교할 수 있는 자료의 물리적 규모였다. 한 종교개혁자의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도 그의 주요 저술뿐 아니라 설교, 서신, 성경주석, 논쟁서, 동시대 번역본과 판본 차이, 성경과 교부의 인용,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연구사를 함께 검토해야 한다. 연구자가 평생을 한 인물에게 바쳐도 그의 모든 자료를 동시에 바라보기는 어렵다.

AI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AI를 새로운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은 ad fontes의 정신과 정반대다. AI가 “불링거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나 신학적 결론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AI가 생성한 문장은 사료가 아니며, AI의 추론 자체도 증거가 아니다.

AI의 역할은 오히려 거대한 사료군 속에서 인간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관계를 탐색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가령 하인리히 불링거의 『하나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et Aeterno, 1534)』을 연구한다고 하자. 전통적인 연구에서는 연구자가 이 저술을 정독하고 다른 저술과 선행연구를 하나씩 대조한다. AI를 활용하면 여기에 새로운 층위를 더할 수 있다. foedus, testamentum, pactum, conditio와 같은 핵심 어휘가 불링거의 여러 저작에서 어떤 문맥으로 사용되는지 전수에 가깝게 탐색하고, 동일한 성경구절이 여러 저작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비교하며, 교부 인용의 반복과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1534년판과 후속 판본, 동시대 독일어 번역 사이의 차이를 먼저 탐지하게 한 뒤 사람이 중요한 변이를 검토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연구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AI가 질문이나 패턴을 제안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용례, 반복되는 인용, 개념적 연결, 판본 차이 등을 탐색한다.

2. 모든 중요한 주장을 원자료로 되돌린다. 해당 라틴어 문장, 판본과 위치, 문맥을 직접 확인한다.

3. AI의 해석과 사료의 증언을 분리한다. “AI가 이렇게 분석했다”가 아니라 “이 사료들이 이러한 해석을 지지한다”고 논증해야 한다.

4. 기존 연구와 대조한다. 새로운 패턴처럼 보이는 것이 이미 연구된 것인지, 기존 해석과 충돌한다면 무엇 때문에 충돌하는지 확인한다.

5. 재현 가능하게 제시한다. 다른 연구자가 같은 원문과 자료를 가지고 그 주장을 다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에서 AI는 번역가나 역사학자를 대신하는 존재라기보다 색인, concordance, 검색엔진, 연구조교, 그리고 가설 생성기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도구에 가깝다. 현미경이 생물학자를 대신하지 않고 망원경이 천문학자를 대신하지 않듯이, AI도 역사신학자의 판단을 대신하지 않는다. 대신 이전에는 인간의 시간과 기억력 때문에 관찰하기 어려웠던 규모의 자료를 볼 수 있게 한다.

이 점에서 AI 시대의 ad fontes는 종교개혁 시대의 ad fontes와 흥미로운 연속성을 가진다. 종교개혁자들이 교부들의 글을 읽은 이유는 교부를 새로운 최종 권위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교부를 통해 자신들이 받은 전승을 점검하고 더 근원적인 자료로 돌아갔다. 오늘날 역시 기존 연구자의 해석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위대한 학자의 해석도 원자료를 대신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AI가 수천 편의 논문과 수백 권의 저술을 종합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원자료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역사신학 연구에는 두 가지 상반되어 보이는 태도가 동시에 필요하다. 더 대담하게 추론하면서, 더 엄격하게 검증해야 한다.

AI를 통해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큰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한 저술의 몇몇 문장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한 신학자의 저작 전체에서 개념의 구조와 변화를 탐색할 수 있으며, 여러 인물과 세대를 가로지르는 사상의 계보를 비교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인간 연구자가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던 관계에 대해 AI에게 가설을 제안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질문이 커질수록 증거에 대한 요구도 더 엄격해져야 한다. 역사적 인물의 “생각”은 AI가 대신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놓인 역사적 관계망으로부터 제한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AI가 보여준 흥미로운 패턴은 연구의 결론이 아니라 연구의 시작이다.

『De Testamento』 한국어 번역 작업은 이러한 방법론을 시험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사례가 될 수 있다. 번역 그 자체가 연구의 종착점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번역 과정에서 축적된 원문과 번역문, 주석, 성경 인용, 관련 문헌을 구조화하여 더 큰 불링거 corpus와 연결한다면 새로운 질문이 가능해진다. “불링거가 언약을 무엇이라고 정의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정의가 그의 저술 전체에서 얼마나 일관되게 나타나는가, 어떤 성경 본문과 교부 전통에 기대고 있는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가, 후대 개혁파 신학과 어디에서 이어지고 어디에서 달라지는가를 물을 수 있다.

결국 AI 시대의 ad fontes는 새로운 기술을 사용한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래된 연구 원칙을 더 철저하게 적용하자는 제안이다.

AI를 과거의 권위를 대신하는 새로운 권위로 사용하지 않는다.


AI를 인간의 독해 범위를 넘어서는 자료의 관계를 탐색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그 결과를 다시 원천으로 가져가 검증한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던 시대에서, 우리는 이제 그 거인이 남긴 방대한 흔적을 함께 살펴보며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이전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추론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 추론이 역사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반드시 다시 텍스트로 돌아와야 한다.

그 점에서 AI 시대의 새로운 연구 방법 역시 결국 같은 요청으로 귀결된다.

Ad fontes.

— 가나안의 겉옷과 하늘의 보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더 밝아진 하나의 언약

 

 

 

— summary

더보기

1. 출발 명제

  • 신약 시대에도 물질의 복은 있다. 다만 예수의 오심·부활·재림·환난 때문에 예수와 바울은 복보다 고난을 더 많이 언급한다.
  • 그럼에도 예수의 오심은 구약보다 덜한 은혜가 아니다 (불링거).
  • 변한 것은 강조점이며, 더 분명해진 것이다.
  • 가나안 약속은 그 땅 + 하늘 본향을 함께 포함한다.
  • 영지주의(영적인 것만 선, 육적인 것은 악) 아님.
  • 가나안 = 외적 표지 / 실제 복 = 그 알맹이인 언약.
  • 신약 성도도 물질적 복을 하늘로부터 받되, 더 신령한 복을 추구하도록 이끄심.

2. 불링거 해설에서 확인할 핵심

  • 신약이 구약보다 은혜가 적어진 것이 아님. 오히려 더 충만. 하나님이 신약 성도에게 더 엄격·무자비해진 것도 아님.
  • 근거: 하나님의 불변성 / 언약의 연속성 / 구속사의 점진적 확대.

3. involucrum 정확한 이해

  • 뜻: 감싸는 것, 외피, 외적 표지(signum externum). '아무 의미 없는 껍데기'가 아님.
  • 그 자체가 실제 역사적 선물이면서 동시에 더 큰 실재를 감싸고 가리키는 언약적 표지.
  • 정확한 표현:가나안은 실제적인 언약의 복이면서, 동시에 그보다 더 충만한 하늘의 기업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언약적 실재를 감싸고 있는 외적 표지였다.
  • 불링거의 그리스도 표현: copiae cornu & omnes coelestes thesauros nobis aperuit — "풍요의 뿔과 하늘의 모든 보화를 우리에게 열어 주셨다." 즉 그리스도는 가나안을 빼앗고 고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 안에 싸여 있던 보화를 열어 보이신 것.

4. "강조점 변화"의 정밀화

  • 강조점 변화 + 구속사적 명료화/확대.
  • 구약: 복이 토지·자손·풍요·평안 등 가시적·역사적 형태로 강하게 제시됨. 그러나 목적지 자체는 아니었고, 그 안에 하늘의 기업과 그리스도 안의 복이 싸여 있었음.
  • 신약: 그 안쪽 실재가 훨씬 분명히 드러남.
  • 신약의 메시지는 "물질은 나쁘다"가 아니라 "물질적 복은 더 큰 복의 최종 형태가 아니다".
  • 창조·육체·물질은 선함. 먹을 것·입을 것·집·건강·재산·평안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물 (주기도문 "일용할 양식").
  • 다만 신약에서는 그것이 언약 백성에게 보장된 현세적 번영의 형태로 제시되지 않음.
  • 전면에 나오는 것: 그리스도와의 연합 → 성령 → 죄 사함 → 양자됨 → 부활 → 하나님 나라 → 하늘의 기업 → 새 하늘과 새 땅 (엡 1:3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 현세적 선물은 사라진 게 아니라 '더 큰 복을 가리키는 위치'로 재배치됨.

5. 고난 문제

  • 예수와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한 환난·박해·가난·손실을 구약의 국가적 복 언어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말함.
  • 그러나 이는 은혜의 축소가 아님.
  • 역설: 외적 형편은 더 고난스러울 수 있는데, 언약의 실재는 더 충만하게 드러남.
  • 바울: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고후6:10).

6. 종합 문단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물질적 필요와 현세적 은혜를 베푸신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구약보다 하나님의 자비가 축소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구약에서 가나안·자손·풍요와 같은 가시적 복 안에 싸여 있던 언약의 더 깊은 실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따라서 신약은 물질을 악하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성도를 현세적 번영 자체보다 그리스도와 성령, 하늘의 기업과 부활이라는 더 신령하고 영원한 복을 추구하도록 이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는 고난이 있을 수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세적 형편과 언약적 복을 동일시할 수 없다.

  • 번영신학 회피 / 영지주의 회피 / 구·신약 단일 언약 유지 / 신약 고난 신학 유지.

7. 개혁주의 동의 여부

  • 고전적 개혁주의는 대체로 동의.
  • 핵심 구분: "신약에도 하나님이 현세적 선물을 주신다" vs. "그것이 언약 백성에게 보장된 번영의 표지다".
  • 개혁주의 정리: 일용할 양식·건강·직업·재산·평안은 여전히 주심. 그러나 신약의 중심 약속은 그것의 확대가 아니라 구원·성령·양자됨·성화·부활·영원한 기업. 신자는 오히려 손해·박해·고난을 받을 수도 있음.
  • 등식 불성립: "물질적 형편이 좋아질수록 은혜가 많다".
  • 히11장 족장들의 "더 나은 본향"과 자연스럽게 연결.
  • "구약은 물질, 신약은 영적" 이분법보다 구약의 가시적 약속 속에 이미 더 큰 종말론적 기업이 있었고 신약에서 더 분명히 드러났다가 훨씬 개혁주의적.

8. 번영주의적 종말론과의 구별

  • "신사도운동과 번영신학, 일부 은사주의·종말론 집단에서 나타남 (end-time wealth transfer / kingdom wealth transfer). 모든 신사도운동 계열이 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님.
  • 경계 지점은 "하나님이 큰 재산을 주실 수 있느냐"가 아님 (주실 수 있음). 문제는 이를 성경의 보편적 약속으로 만드는 것:
    • "말세 신자들에게 대규모 재정 이전을 약속하셨다"
    • "충성/믿음 → 특별한 부"
    • "그 돈은 종말 사역의 군자금으로 예정"
  • 방향의 역전: 불링거는 가시적 복 → 더 큰 언약 실재를 보게 함. 번영주의적 종말론은 더 큰 언약 실재 → 다시 가시적 부의 약속으로 축소.
  • 압축 대조:
    • 개혁주의: 물질적 복도 선물. 그리스도 안의 복은 훨씬 큼. 고난 중에도 충만한 복.
    • 번영주의적 종말론: 종말의 특별한 신자들에게 대규모 부 이전을 특별 약속처럼 강조.

9. 계보와 원문 (불링거 전후)

아우구스티누스 (선행자이지만 개혁주의자는 아님)

  • 『하나님의 도성』: 구약의 earthly gifts는 영원한 복을 상징. "신약이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 구조.
  • 10.14: 하나님은 현세적 복도 실제로 주시되 인간을 earthly → heavenly, visible → invisible로 점진적으로 이끄심.
  • 19.17: 신자는 현세적 이익을 순례자로서 사용. 순례를 돕는 선물.

칼빈 (동시대 평행) — 『기독교강요』 II.11

  • 구·신약 차이는 substance가 아니라 administration.
  • 구약: heavenly inheritance를 earthly blessings 아래에서 미리 맛보게 하심. 신약: 복음으로 더 직접·밝게 드러남.
  • "the same inheritance was destined to them as to us."
  • 가나안 = 소망의 한계(limit)가 아니라 참된 기업(true inheritance)을 바라보도록 훈련·확증.
  • 가나안 = "a symbol of the divine benevolence, and a type of the heavenly inheritance."
  • 불링거의 involucrum과 거의 같은 문법.

우르시누스 (1534–1583)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제50주일

  • "We should desire and pray for temporal blessings from God no less than such as are spiritual."
  • 순서: 현세적 복 수령 → 영적 복에 대한 신뢰 확증.
  • 조건성: 영적 복은 확정적 약속, 현세적 복은 구원과 하나님 영광에 유익한 만큼.
  • 물질적 복 구함 → 정당 / 신자니까 반드시 부·건강 → 아님.
  • 현세적 복 = 하나님 선의의 표지. 단 십자가·징계는 예외 → 고난이 복의 소멸은 아님.

비치우스 (1636–1708) — 『언약의 경륜』

  • "Canaan was a pledge of heaven."
  • 아브라함의 외적 약속들 =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의 types.
  • 구·신약 = 하나의 은혜언약의 서로 다른 경륜, 동일한 heavenly inheritance.
  • 불링거의 "하나이며 영원한 언약"의 17세기 발전형.

오웬 — 히브리서 11장 강해

  • 족장들의 "better country" = 지상의 더 좋은 가나안이 아니라 "an heavenly" country. 지상적 소망에 머물렀다는 해석을 강하게 거부.
  • 물질적 질서 자체는 악하지 않음. 복음은 권력·재산·지위를 폐지하지 않음. 다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구별하는 가치는 없음.

10. 불링거와 가장 가까운 원문 3개

  1. Calvin, Institutes II.11.1–2 — "earthly blessings 아래 heavenly inheritance"
  2. Ursinus,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Lord's Day 50 — 신약 성도의 현세적 복 기도 문제에 직접 답변
  3. Witsius, Economy of the Covenants — 가나안 = 실제 외적 약속이자 "pledge of heaven" (※ 크룩섕크 영역 기준 실제 위치는 III.3, IV.11)

11. 결론 한 줄

  • 구약의 물질적 복이 폐기되어 신약의 영적 복으로 교체된 것이 아니다.
  • 동일한 하나님의 복이 구약에서는 가시적·지상적 표지 속에 더 많이 싸여 있었고, 신약에서는 그 표지가 가리키던 그리스도와 하늘 기업이 더욱 밝고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 칼빈의 "the same inheritance was destined to them as to us" + 불링거의 "unum atque idem foedus" = 같은 개혁주의적 방향.

계보 참고

Augustine   현세적·가시적 복 → 영원하고 보이지 않는 복으로 교육
   ↓
Bullinger   가나안 involucrum → 그 안의 하나의 영원한 언약과 그리스도
   ↓ (동시대)
Calvin      earthly blessings → heavenly inheritance의 표지·모형
   ↓
Ursinus     현세적 복도 구함 / 영적 복보다 낮은 위치, 조건적
   ↓
Owen/Witsius  heavenly country / pledge of heaven / 하나의 은혜언약의 서로 다른 경륜

 

 

 

 

 

1.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

성경을 처음부터 읽어 가는 사람은 한 가지 사실에 반복해서 부딪힌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복이 놀랄 만큼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에게는 땅과 자손이 약속되었고, 광야의 이스라엘에게는 "아름다운 땅"이 약속되었다. 모세는 그 땅을 이렇게 그린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신명기 8:7–10)

 

여기에는 추상이 없다. 밀과 보리, 포도와 무화과, 시내와 샘, 그리고 배부름이 있다. 구약의 복은 흙 냄새가 나고, 추수의 무게가 있고, 자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복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질문이 뒤따른다. 그리스도가 오신 뒤에 사는 성도에게 이런 종류의 복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신약은 오히려 환난과 십자가와 자기 부인을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약에서는 땅과 풍요를 주시다가, 신약에서는 그것을 거두시고 대신 '영적인' 복만 남겨 두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사람들은 흔히 두 갈래 길 가운데 하나로 빠진다. 한쪽 길은 구약의 물질적 약속을 그대로 오늘의 성도에게 옮겨 와서, 믿음이 좋으면 현세의 번영이 보장된다고 가르친다. 다른 쪽 길은 물질과 육체를 낮은 것으로 취급하고 오직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만이 참된 복이라고 여긴다. 첫째 길은 번영신학으로, 둘째 길은 영지주의의 오래된 유혹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성경의 길, 그리고 개혁주의 언약신학이 성경에서 읽어 낸 길은 그 둘 어느 쪽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셋째 길을 따라가 보려 한다. 그 길의 핵심을 미리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렇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다. 하나이며 동일한 언약의 복이 역사 속에서 점점 더 밝게 드러난다. 가나안과 자손과 풍요는 실제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동시에 그 안에 더 큰 실재를 품고 있는 언약적 표지였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 선물을 빼앗은 사건이 아니라, 그 선물 안에 처음부터 싸여 있던 하늘의 보화를 열어 보이신 사건이다.

 

이 글의 중심 이미지도 여기서 나온다. 가나안이라는 외피를 찢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외피를 열어 그 안에 처음부터 약속되어 있던 보화를 보는 것. 그리고 그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열렸다는 것.

 

 

 

2. 하나이며 영원한 언약 — 불링거의 출발점

16세기 취리히의 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는 1534년에 짧지만 밀도 높은 글 한 편을 썼다. 제목은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et aeterno, 우리말로 옮기면 「하나님의 하나이며 영원한 유언 혹은 언약에 관하여」이다.*1 제목이 이미 논지다. 하나님의 언약은 여럿이 아니라 하나이며,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

 

불링거의 논지는 구약과 신약을 사실상 두 개의 다른 종교처럼 갈라 놓는 사고를 거부한다. 구약은 육적이고 국가적이며 지상적인 복의 종교이고, 신약은 영적이고 개인적이며 내면적인 종교라는 식의 이분법이다. 이런 이분법이 자라면 필연적으로 이상한 결론에 이른다. 구약의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땅과 풍요를 후히 주셨는데, 그리스도를 보내신 뒤의 하나님은 오히려 자기 백성에게 더 인색하고 더 엄격해졌다는 결론이다.

 

불링거는 이 결론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는 지극히 온유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Deum illum clementissimum)이 구주를 보내신 이후에(post missum salvatorem) 우리 자녀들에게(liberis nostris)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보다 더 잔인하고 무자비해지셨다는 것(iniquiorem et inclementiorem factum)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neque verisimile est)이라고 잘라 말한다.*2 이 문장은 단순한 감정 호소가 아니다. 그 뒤에는 하나님의 불변성, 언약의 연속성, 그리고 구속사의 점진적 확대라는 세 기둥이 서 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변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더 큰 은혜이지 덜한 은혜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이 구약보다 줄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원칙을 붙들고 나면 가나안 문제를 다르게 볼 수 있게 된다. 불링거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설명하면서 매우 의미심장한 라틴어 한 단어를 쓴다. involucrum이다.

involucrum — 껍데기가 아니라 감싸는 것

involucrum(인볼루크룸)은 '감싸는 것, 싸개, 껍질, 외피'를 뜻한다. 그러나 이 말을 '쓸모없는 껍데기'로 읽으면 불링거를 완전히 오해하게 된다. 라틴어에서 이 말은 무언가 더 귀한 것(res, 레스)을 담고 있는 외적 형식, 곧 표지(signum, 시그눔)를 가리킨다. 편지를 담은 봉투, 보석을 담은 함, 씨앗을 품은 껍질이 involucrum이다. 봉투가 편지의 전부는 아니지만, 봉투 없이는 편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함이 보석은 아니지만, 함은 실제로 존재하며 보석을 실제로 담고 있다.

 

불링거는 하나님의 언약이 가나안 땅과 복된 후손이라는 involucrum 아래에서 주어졌다고 말한다. 맥코이와 베이커의 영역본은 이 대목을 "under the cover of the land of Canaan and the blessed seed", 곧 "가나안 땅과 복된 후손이라는 덮개 아래에서"라고 옮긴다.*3 여기서 핵심은 가나안 땅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감싸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가나안이 허구였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두 가지가 함께 붙들려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약속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주어졌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요단을 건넜고, 실제로 그 땅의 소산을 먹었으며, 실제로 그 땅에서 자녀를 낳고 집을 지었다. 가나안은 은유가 아니라 지리였다.

 

둘째, 언약은 언제나 외적 표지(signa externa, 시그나 엑스떼르나)를 동반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는 표지에 담아 주신다. 무지개, 할례, 유월절 양, 성막, 그리고 땅이 그렇다. 표지는 실재를 가리키지만, 표지 자체도 하나님께서 실제로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involucrum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외적 표지(signum externum)이자 역사 속에서 실제로 주어진 실재라는 의미에서 '표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히브리서의 사고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골로새서는 옛 언약의 절기와 규례를 두고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로새서 2:17)고 말한다. 그림자(σκιά, 스키아)는 실체/몸(σῶμα, 소마)이 아니지만, 그림자는 실제로 바닥에 드리워져 있고 실제로 몸의 윤곽을 보여 준다. 가나안은 그런 의미의 그림자였고 그런 의미의 외피였다.

 

그래서 불링거는 바로 뒤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이렇게 표현한다.

copiae cornu et omnes coelestes thesauros nobis aperuit
— 그분은 풍요의 뿔과 하늘의 모든 보화를 우리에게 열어 주셨다.*4

 

'풍요의 뿔'(cornu copiae, 코르누 코피아이/코피아에)은 고대 세계에서 넘치는 결실과 풍성함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불링거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가나안이라는 복을 빼앗고 고난만 남기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정반대다. 그리스도는 가나안이라는 껍질 안에 싸여 있던 하늘의 모든 보화를 '열어' 주신 분이다. 동사는 aperuit(아페루잇), '열었다'이다. 찢었다도 아니고 버렸다도 아니고 대체했다도 아니다. 열었다.

 

요컨대 불링거에게 involucrum은 실재하지 않는 상징이 아니라, 실재하지만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는 외적 표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실체를 가리키는 역사적·언약적 표지다. 가나안 땅은 하늘의 기업을 가리키고 감싸는 외적 표지였다. 이것이 이 글 전체가 서 있는 자리다.

 

 

 

3. 장막에 살면서 성을 바라본 사람들 — 히브리서 11장

불링거의 이 독법이 과연 성경의 독법인가? 히브리서 11장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아브라함에 관하여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브리서 11:9–10)

 

이 두 절 안에 두 차원이 동시에 들어 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약속의 땅'에 거류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고, 그는 그 땅에 실제로 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는 그 땅에서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장막에 살았다. 그의 눈은 그 땅을 넘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브리서는 조금 뒤에서 이 그림을 더 밀고 나간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3–16)

 

"더 나은 본향 … 곧 하늘에 있는 것." 족장들이 사모한 것은 단순히 더 기름진 땅, 더 안전한 국경, 더 많은 가축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 땅을 약속받았고 그 약속을 참으로 믿었으나, 그 약속 안에서 하늘의 본향을 보았다. 이것이 정확히 불링거의 involucrum이다. 가나안은 그들이 실제로 받은 선물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멀리서 보고 환영한" 더 큰 실재를 감싸는 외피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히브리서가 족장들의 땅 소유를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이 땅을 바라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땅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 땅을 버린 자가 아니라, 땅을 열어 본 자가 칭찬받는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외피에 불과했다"라고 가볍게 말하는 것은 히브리서의 논리에 어긋난다.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가나안은 실제적인 언약의 복이면서, 동시에 그보다 더 충만한 하늘의 기업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언약적 실재를 감싸고 있는 외적 표지였다.

 

가나안에는 적어도 두 차원이 동시에 존재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실제 역사적 선물이다 — 땅, 거처, 풍요, 평안, 언약 백성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더 큰 실재를 가리키는 언약적 표지다 — 하나님과 함께 거함, 참된 안식, 하늘의 본향, 영원한 기업, 그리고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 이 둘 가운데 하나를 지우면 성경의 그림이 일그러진다.

 

 

 

 

4.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선행자

불링거의 이 독법은 16세기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훨씬 오래된 뿌리가 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교육하시는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The education of the human race, represented by the people of God, has advanced, like that of an individual, through certain epochs, or, as it were, ages, so that it might gradually rise from earthly to heavenly things, and from the visible to the invisible." *5
— 하나님의 백성으로 대표되는 인류의 교육은, 한 사람의 교육이 그러하듯, 일정한 시기 혹은 이를테면 연령대를 거쳐 나아갔다. 그리하여 땅의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점차 오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도성』 10.14, 도즈 영역)

 

이 문장의 구조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땅의 것을 버리게 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땅의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오르게 하셨다고 말한다. 땅의 것은 출발점이고 사다리의 아래 칸이다. 사다리의 아래 칸은 위 칸을 위해 존재하지만, 아래 칸이 없으면 위 칸에 오를 수 없다.

 

그리고 같은 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놀라운 말을 덧붙인다. 현세적 상급이 약속되던 시기에도 하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예배의 대상으로 제시하셨는데, 이는 사람들이 "이 덧없는 삶의 지상적 복과 관련해서도" 참된 창조주요 영의 주 이외의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천사나 사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한 분의 손에 있음을 부인하는 자는 미친 자라고. 이 장의 제목 자체가 논지를 요약한다. "한 분 하나님은 영원한 복만이 아니라 현세의 번영과 관련해서도 예배받으셔야 한다. 모든 것이 그분의 섭리로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현세적 복은 하나님이 실제로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 구할 만한 것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교육의 한 단계다. 그는 뒤에서 하늘의 도성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동안 현세의 평화와 유익을 순례자로서 사용한다고 설명한다(『하나님의 도성』 19.17, 요지).*6 순례자는 길에서 만나는 우물과 그늘과 빵을 감사히 받는다. 그것들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례자는 우물 옆에 집을 짓지 않는다. 우물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로 가는 길에 주어진 선물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개혁주의자가 아니다. 그를 개혁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시대착오다. 그러나 그가 보여 준 이 직관 — 현세적·가시적 복을 통해 영원하고 보이지 않는 복으로 교육하시는 하나님 — 은 후대의 개혁파 언약신학이 성경에서 읽어 낸 것과 매우 유사하다. 불링거의 involucrum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어휘로 표현된, 같은 방향의 신학적 직관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글은 둘 사이의 직접적 영향관계를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성경 본문이 두 사람을 같은 자리로 이끌었다는 점을 주목할 뿐이다.

 

 

 

5. 같은 기업이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 칼빈의 평행 증언

불링거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제네바의 요한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10–11장에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다룬다. 이 두 장은 불링거가 짧은 소논문에서 압축해 놓은 것을 거의 논문의 문장으로 풀어 놓은 것 같다.

 

칼빈의 출발점은 불링거와 같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구원의 실체(substantia)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행 방식(administratio)에 있다. 그는 두 언약의 차이를 열거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못 박는다. 그 차이들은 모두 "실체가 아니라 시행 방식에 속하며",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약속이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둘 모두의 기초이기 때문이다"(II.11.1, 요지).*7

 

그런 다음 그는 첫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옛 시대에 주님은 자기 백성의 생각을 하늘의 기업으로 향하게 하셨으나, 그 소망이 더 잘 유지되도록 하늘의 기업을 "지상적 복 아래에서(under earthly blessings)" 제시하시고 미리 맛보게 하셨다. 반면 이제 복음으로 더 밝고 분명하게 계시된 장래 생명은 우리의 마음을 곧바로 그것을 묵상하도록 이끈다(II.11.1, 요지).

 

"지상적 복 아래에서 하늘의 기업을." 이것은 불링거의 "가나안이라는 involucrum 아래에서"와 같은 문법이다.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것을 받치고 감싼다.

 

칼빈은 여기서 논쟁의 핵심을 정확히 짚는다. 그의 반대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최고이자 최종적인 행복으로 여겼으며,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이제야 비로소 그 땅이 우리에게 하늘의 기업을 예표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반대로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누린 지상의 소유 안에서, 마치 거울을 보듯, 하늘에 예비된 장래의 기업을 바라보았다고(II.11.1, 요지). 거울이라는 비유가 정확하다. 거울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건이지만, 사람이 거울을 보는 것은 거울 자체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것을 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4장 1절의 비유를 빌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The same inheritance was destined to them as to us, but from nonage they were incapable of entering to it, and managing it." *8
—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동일한 기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만 그들은 아직 어려서 그 기업에 들어가 그것을 관리할 수 없었다. (II.11.2, 베버리지 영역)

 

"동일한 기업." 구약 성도와 신약 성도의 기업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다. 이 한 문장을 불링거의 "하나이며 영원한 언약"(unum atque idem foedus) 옆에 놓으면 두 사람이 왜 같은 방향에 서 있는지 선명해진다.

 

가나안에 관해서 칼빈은 더 정밀하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후손을 불멸의 소망으로 택하셨을 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신 것은, 그 땅이 그들의 소망의 한계(limit)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바라봄으로써 아직 나타나지 않은 참된 기업(true inheritance)의 소망 안에서 그들을 훈련하고 확증하려는 것이었다(II.11.2, 요지). 그리고 그 증거로 창세기 15장 1절을 든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칼빈은 이 말씀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최종적 상급이 땅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심을 본다. 땅의 약속은 그 뒤에 덧붙여진 것이며, 그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A promise of the land is afterwards added for no other reason than that it might be a symbol of the divine benevolence, and a type of the heavenly inheritance." *9
— 땅의 약속이 뒤에 덧붙여진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호의의 표지이자 하늘 기업의 모형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II.11.2, 베버리지 영역)

 

"하나님의 호의의 표지(symbol)이자 하늘 기업의 모형(type)." 이것이 칼빈의 가나안이다. 표지는 실제로 주어진다. 모형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존재의 이유는 그 너머를 가리키는 데 있다. 불링거의 involucrum과 칼빈의 symbolum et typus는 같은 것을 다른 단어로 부른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성도들 자신의 고백을 증거로 부른다. 다윗은 현세적 복에서 시작하여 가장 높은 복으로 올라간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편 73:26)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편 16:5)

 

'분깃'과 '산업'은 본래 가나안 땅을 지파와 가문에 분배할 때 쓰던 말이다. 다윗은 그 땅의 언어를 가져다가 하나님 자신에게 적용한다. 땅의 분깃을 가진 자가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라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외피를 열어 그 안의 보화를 본 사람의 언어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칼빈은 옛 언약의 성도들이 지금 우리보다 이 땅의 삶과 그 복을 더 높이 평가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들이 그 복을 목표로 착각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연약함을 배려하여 거기에 "당신 호의의 윤곽을 새겨 두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II.11.3, 요지). 지상의 복을 통해 주님의 호의가 나타났고, 지상의 형벌을 통해 그분의 심판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 "일종의 베일 아래에서" 자기 언약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10 이 '베일'이라는 표현 역시 불링거의 involucrum과 정확히 겹친다. 베일은 얼굴을 가리지만, 베일 뒤에 얼굴이 실제로 있고, 베일이 걷히면 그 얼굴이 드러난다.

 

 

 

6.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 우르시누스와 신약 성도의 현세적 복

여기까지 오면 한 가지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구약 성도가 지상적 복 안에서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았다면, 그리고 이제 그 기업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 밝게 드러났다면, 신약 성도는 아예 현세적 복을 구하지 말아야 하는가? 빵과 건강과 집과 직업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이제 '수준 낮은' 신앙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주요 작성자인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1534–1583)는 이 질문에 놀랄 만큼 단호하게 답한다. 주기도문 넷째 간구를 해설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We should desire and pray for temporal blessings from God no less than such as are spiritual." *11
— 우리는 영적인 복 못지않게 현세적인 복도 하나님께 바라고 구해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제50주일, 윌리어드 영역)

 

"못지않게(no less than)." 우르시누스는 현세적 복을 구하는 기도를 마지못해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명령한다. 그 첫째 근거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스도께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태복음 7:7)라고 일반적으로 명하셨을 뿐 아니라, 주기도문 안에서 특별히 빵을 구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6:11)

 

우르시누스는 이 간구가 왜 죄 사함의 간구보다 앞에 놓였는지도 설명한다. 논리적으로는 더 중요한 것을 먼저 구해야 하니 죄 사함이 먼저 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배려하셔서 일용할 양식의 간구를 기도의 '한가운데'에 두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도의 처음과 끝은 영적인 복으로 하되, 현세적 은택을 받는 경험이 영적인 복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우리 안에 더욱 확증하게 하셨다는 것이다(제50주일, 요지).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다리이고, 칼빈의 거울이며, 불링거의 involucrum이다. 빵을 받은 손이 죄 사함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

 

우르시누스는 또 이 간구가 하나님의 섭리, 특히 교회를 향한 섭리를 고백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우리가 빵을 구하는 것은 모든 좋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현세의 좋은 선물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의 표현이 되어 우리를 위로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중요한 단서를 단다. 이 표지는 십자가와 징계의 경우를 제외한다는 것이다. 곧 성도가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복이 사라진 것이 아니며, 현세의 결핍이 곧 하나님의 진노의 표지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구별이 나온다. 우르시누스에게 영적인 복은 하나님께서 확정적으로 약속하신 것이지만, 현세적 복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에 유익한 만큼 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12 우리가 빵을 구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믿음이 좋으면 반드시 부유해진다"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부를 주실 수도 있고 가난 가운데 두실 수도 있으며, 어느 쪽이든 그것은 우리 구원에 유익하도록 재어진 분량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적 기도는 "영적인 것만 구하고 빵이나 건강이나 삶의 필요는 무시한다"도 아니고, "믿으면 반드시 부유해진다"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 아버지께 빵을 구하되, 그 빵을 주시는 분과 그 빵이 가리키는 더 큰 양식을 함께 사모하는 기도다. 마태복음 6장이 정확히 이 순서를 가르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1–33)

 

우르시누스가 지적하듯이, 여기서 그리스도는 먹을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말씀하시며, 그것들이 "더하여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분이 금하시는 것은 구함이 아니라 염려, 곧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이다.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은 하늘 아버지의 손에서 오는 진짜 선물이다. 다만 그것은 "먼저" 구할 것이 아니라 "더하여지는" 것이다. 순서가 바뀌면 이방인의 기도가 되고, 순서가 지켜지면 자녀의 기도가 된다.

 

 

 

7. 하늘의 보증으로서의 가나안 — 비치우스와 후기 언약신학

불링거의 "하나이며 영원한 언약"이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에서 어떻게 더 체계적인 언약신학으로 정리되는지를 보려면 헤르만 비치우스(Herman Witsius, 1636–1708)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의 경륜』이 좋은 자리다. 비치우스는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은혜언약(혹은 은혜의 유언)의 서로 다른 '경륜(economy)'으로 설명한다.

 

그는 하늘 기업의 분배가 "절대적으로 고려된 은혜의 유언"에서 나오며, 이 유언은 "모든 경륜 아래에서 변함없이 하나이며 동일하게 남아 있다"고 말한다. 다만 "동일한 기업이 다른 방식으로 제시될 뿐"이다. 구약에서는 그림자 아래에서, 그리고 그 가운데 일정한 시기에는 "가나안 땅이라는 보증(pledge) 아래에서" 제시되었고, 그것은 정해진 때에 유언자의 죽음으로 값 주고 사야 할 것이었다(제3권 3장, 요지).

 

그리고 두 경륜의 차이를 정리하면서 비치우스는 가나안을 이렇게 부른다.

"the inheritance of the land of Canaan, as a pledge of heaven" *13
— 하늘의 보증으로서의 가나안 땅의 기업 (제3권 3장, 크룩섕크 영역)

 

'보증(pledge)'이라는 말은 불링거의 involucrum, 칼빈의 typus에 하나의 색채를 더한다. 보증금은 실제 돈이다. 계약금은 실제로 지불된다. 그러나 보증금은 전체 값이 아니며, 그것은 나머지가 반드시 지불되리라는 약속의 담보다. 가나안은 그런 의미의 보증이었다. 실제로 주어졌고, 실제로 누려졌으나, 그것은 하늘이라는 전체 기업이 반드시 주어지리라는 하나님의 담보였다.

 

비치우스는 다른 곳에서 이 보증의 성격을 더 풀어 설명한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그곳에 성전을 두시고 자기 임재의 표지를 두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그 땅에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을 부어 그를 왕과 주로 기름 부으시려 하셨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땅"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기 땅 안에서 메시아가 자기들 가운데 나타나시리라는 보증을 가졌다. 가나안에서의 하나님의 거하심은 요한계시록 21장 3절이 말하는 것,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의 상징이었고, 그 땅의 보좌인 예루살렘은 하늘의 보증이었다(제4권 11장, 요지). *14

 

그러나 비치우스는 곧바로 균형을 잡는다. 이 모형적 기업이 구약의 기업 전체를 이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구약을 마치 "가나안 땅을 주려는 의지"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해서도 안 된다. 구약은 "뒤에 폐지될 모형들의 베일 아래 제시된, 바로 그 은혜의 유언" 자체다. 그리고 "하늘과 구원과 하나님 자신이 은혜의 유언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업"이므로, "그 유언이 변함없는 이상, 기업의 실체는 옛 경륜 아래에서와 새 경륜 아래에서 서로 다른 것일 수 없다"(제4권 11장, 요지).

 

이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 보자. 기업의 실체는 옛 경륜과 새 경륜에서 서로 다른 것일 수 없다. 이것이 불링거의 unum atque idem foedus이고 칼빈의 "the same inheritance"이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세기에, 서로 다른 도시에서, 서로 다른 어휘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신중함이 필요하다. 불링거의 『언약론』이 비치우스의 『언약의 경륜』에 직접 문헌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 글이 입증하려는 바가 아니며, 그런 직접 계보를 단정할 근거를 이 글은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 연속성 혹은 평행성이다. 그러나 그 연속성은 우연이 아니다. 같은 성경을 같은 방식으로 — 히브리서 11장의 눈으로 — 읽었기 때문에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8. 더 나은 본향 — 오웬과 현세적 선물의 질서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히브리서 강해에서 11장 16절의 "더 나은 본향"을 다루면서 한 가지 해석을 거의 공격적으로 거부한다. 족장들이 사모한 것이 단순히 더 나은 지상의 가나안이었다는 해석이다. 오웬에게 그 "더 나은 본향(better country)"은 명백히 "하늘에 속한(an heavenly” country)" 본향이었으며, 족장들의 믿음과 소망이 지상적인 것(earthly things)에 머물렀다고 보는 것은 본문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히브리서 11:13–16 강해, 요지). *15

 

그런데 바로 이 오웬이 현세의 선물 자체를 낮추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복음이 권력이나 재산이나 지위 같은 지상의 복을 폐지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실제 선물이다.*16 다만 영적인 문제에서, 곧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구별하는 문제에서 그것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부자가 하나님께 더 가까운 것도 아니고 가난한 자가 더 먼 것도 아니다.

 

이것이 오웬이 가르치는 질서다. 현세의 재산과 지위와 삶의 조건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참된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의 영적 지위나 하나님의 사랑을 측정하는 저울이 아니다. 저울로 쓰이는 순간 선물은 우상이 되고, 선물로 받는 순간 그것은 감사의 이유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팔복 가운데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5)

 

시편 37편의 언어를 그대로 가져온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땅'을 버리지 않으신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 땅은 이제 팔레스타인의 국경선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열린다. 외피가 찢어진 것이 아니라 열린 것이다.

 

 

 

9. 왜 신약에서 고난이 더 전면에 나오는가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신약은 왜 그토록 고난을 강조하는가? 이것이 은혜가 줄어들었다는 뜻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먼저 분명히 할 것이 있다. "구약은 복, 신약은 고난"이라는 이분법은 성경적이지 않다. 구약에도 요셉의 감옥과 다윗의 도피와 예레미야의 구덩이와 욥의 잿더미가 있다. 신약에도 잔치와 치유와 넘치는 떡과 물고기가 있다. 두 언약 모두에 복과 고난이 함께 있다.

그러나 그 복의 궁극적 의미와 종말론적 방향이 신약에서 더 명료하게 드러난 것은 사실이다. 강조점이 달라졌고, 더 분명해졌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받을 환난과 박해와 손실을 구약의 국가적 복 언어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말한다. 그 이유는 은혜의 축소가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다. 언약의 실재가 더 충만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그 실재와 현세적 형편을 동일시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이렇게 약속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가복음 10:29–30)

 

이 말씀은 놀랍도록 정직하다. 그리스도를 위해 집과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전토를 백 배나 받는다. 현세적 복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복은 "박해를 겸하여" 온다. 백 배의 복과 박해가 같은 문장, 같은 시제, 같은 삶 안에 함께 있다. 그리고 그 뒤에 "내세에 영생"이 온다. 여기에 신약의 구조 전체가 압축되어 있다. 현세적 선물은 참되다. 고난도 참되다. 그리고 그 둘을 넘어 영생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환난을 숨기지 않으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이것은 예언이 아니라 전제다. 그러나 그 환난은 "내 안에서 평안"과 함께 있다. 평안은 환난의 부재가 아니라 환난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다.

 

바울은 이 구조를 상속의 언어로 옮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7–18)

 

여기서 '상속자'와 '기업'의 언어가 다시 나온다.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은 백성의 후손인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다. 기업이 땅에서 하나님 자신으로 열렸다. 그런데 그 상속의 길에 고난이 있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고난은 기업에서 제외되었다는 표지가 아니라 오히려 상속자의 표지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삶을 두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10)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이것은 수사적 과장이 아니라 언약신학의 가장 정확한 요약이다. 외적 형편으로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언약의 실재로는 모든 것을 가졌다. 외피는 벗겨졌으나 보화는 손에 있다. 바울은 자신을 단지 가난한 자로만 부르지 않는다. 그는 가난 안에서 부요를 본 사람이다.

 

그리고 빌립보서에서 그는 이 부요가 형편에 따라 오르내리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1–13)

 

주목할 것은 바울이 풍부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 배부름도 그의 삶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의 자족은 풍부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의 평안은 궁핍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둘 모두 안에서 그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었다. 이것이 외피를 열어 본 사람의 자유다. 외피가 두꺼울 때도 얇을 때도 보화는 같다.

 

이 모든 것을 한 구절이 요약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에베소서 1:3)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이것이 신약이 전면에 내세우는 복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 죄 사함, 양자됨, 성화, 부활, 하나님 나라, 하늘의 기업, 새 하늘과 새 땅. 이것들이 이제 정면에 나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구약 성도에게 없던 새로운 종류의 복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에서 바라본 성이 바로 이것이었다. 다윗이 "나의 분깃"이라 부른 분이 바로 이분이었다. 가나안이라는 외피 안에 처음부터 싸여 있던 것이 이제 열렸을 뿐이다.

 

외적 형편은 더 고난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언약의 실재는 더 충만하게 드러났다. 이 두 문장이 함께 참이라는 것, 그것이 신약의 역설이며 불링거의 논리다.

 

 

 

10. 두 개의 잘못된 길

이제 우리가 피해야 할 두 극단을 분명하게 이름 붙일 수 있다.

물질은 악하다는 오류

첫째 극단은 물질과 육체를 열등하거나 악한 것으로 보고 오직 영적인 것만 선하다고 여기는 태도다. 이 태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초대교회가 맞섰던 영지주의였지만, 그보다 훨씬 온건한 형태로도 — 역사적 영지주의와는 무관한, 진지하고 경건한 신자들 사이에서도 — 비슷한 기울기가 나타난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돈에 관심이 없다", "영적인 사람은 몸을 돌보지 않는다", "이 땅의 것은 다 헛되다"는 말들이 그렇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의 첫 페이지에서 이 태도를 거부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물질세계는 하나님의 작품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음식과 결혼을 금하는 자들에 맞서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디모데전서 4:4–5)

 

"버릴 것이 없나니." 음식, 몸, 가정, 노동, 재산은 버릴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의 최종 소망은 영혼만의 탈출이 아니다. 성육신에서 하나님은 살을 입으셨고, 부활에서 그 살은 무덤을 이겼다. 그리고 피조물 전체가 그 부활에 참여할 날을 기다린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로마서 8:21, 23)

 

"우리 몸의 속량." 몸은 버려질 것이 아니라 속량될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그 마지막을 이렇게 본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1, 3–4)

 

새 '땅'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가나안의 언어 — 땅과 장막과 거함 — 가 마지막 페이지에 다시 나타난다. 가나안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을 악하게 보는 것은 창조도, 성육신도, 부활도, 새 창조도 부정하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이 길을 가지 않는다.

번영이 보장되었다는 오류

둘째 극단은 반대편에 있다. 하나님의 현세적 선물을 신자에게 보장된 부와 건강과 성공의 약속으로 바꾸는 태도다. 구약의 가나안 약속을 그대로 오늘로 옮겨 와서,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형통하고 형통하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어떤 형태의 가르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특별한 부를 이전하셔서 사역의 자금으로 쓰게 하신다고까지 말한다.

 

이 글은 특정 운동이나 단체를 이름 붙여 비판하려는 글이 아니다. 다만 원리는 분명하다. 성경은 현세적 부를 종말론적 신자에게 주어진 보편적 약속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부를 주실 수도 있고 가난 가운데 두실 수도 있다. 우르시누스가 말한 대로, 현세적 복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에 유익한 만큼 재어져 주어진다. 그리고 그 어느 쪽도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의 양을 측정하는 표지가 아니다. 부자 나사로가 아니라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번영신학의 더 깊은 문제는 이것이다. 불링거는 가시적 복을 통해 더 큰 언약의 실재를 보게 한다. 번영신학은 그 방향을 거꾸로 돌린다. 더 큰 언약의 실재를 다시 가시적 부의 약속으로 축소해 버린다. 외피를 열어 보화를 보는 대신, 보화를 도로 외피 안에 집어넣고 외피를 두껍게 만드는 데 몰두한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장막에서 바라본 성을 다시 가나안의 국경선 안으로 끌어내리는 일이다. 히브리서 11장의 족장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증언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두 극단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게 된다.

 

영지주의는 외피를 찢어 버리고 보화만 남기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피도 주셨다.

번영신학은 외피를 보화로 착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피 안에 보화를 두셨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외피를 감사함으로 받되, 그 외피를 열어 그 안의 보화를 본다.

 

 

 

11. 무엇이 달라졌는가 — 교체가 아니라 드러남

이제 처음의 질문에 답할 차례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오면서 하나님의 복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교체된 것이 아니다. 물질적 복이 영적 복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색해지신 것도 아니다. 달라진 것은 강조점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구속사적 명료화와 확대다.

동일한 하나님의 언약적 복이 구약에서는 가나안, 자손, 풍요, 성막과 같은 가시적이고 역사적인 표지 안에 더욱 싸여 있었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표지가 가리키던 실재가 더 명백하고 충만하게 드러났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복은 땅과 자손과 풍요와 평안 같은 가시적·역사적 형태로 매우 강하게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목적지 자체였던 것은 아니다. 칼빈의 표현대로 그것들은 소망의 한계가 아니라 참된 기업을 바라보게 하는 훈련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대로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오르게 하는 사다리였다. 비치우스의 표현대로 하늘의 보증이었다. 그리고 불링거의 표현대로, 하늘의 모든 보화를 담은 involucrum이었다.

 

그리스도가 오신 뒤에는 그 안쪽의 실재가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신약은 "물질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물질적 복은 더 큰 복의 최종 형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둘은 전혀 다른 문장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도 일용할 양식, 건강, 일, 집, 재산, 가족의 평안 같은 하나님의 현세적 선물을 감사히 받을 수 있고, 우르시누스가 강조한 대로 그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친히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것들은 여전히 하늘 아버지의 손에서 오는 진짜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언약 백성에게 보장된 최종적 복이거나 신앙의 척도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를 그 선물 자체에 멈추게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성도를 그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 그리스도 안의 구원, 성령, 양자됨, 부활, 하늘의 기업과 새 창조를 더욱 사모하도록 이끄신다. 아브라함이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눈이 땅에서 하나님께로 들려진 것처럼.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현세적으로 많은 것을 잃는 순간에도 언약의 복 자체를 잃은 것은 아니다. 집을 잃고 건강을 잃고 이름을 잃어도, 아브라함이 장막에서 바라본 그 성은 여전히 그의 것이다. 오히려 바로 그 지점에서 복음의 역설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10)

 

 

 

12. 열린 외피

이 글을 시작하며 우리는 신명기 8장의 아름다운 땅을 읽었다. 밀과 보리, 포도와 무화과, 시내와 샘이 있는 땅. 그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같은 장에서 그 땅에 들어가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떡을 주시는 하나님이 떡보다 더 큰 것으로 살라고 하신다. 이것이 가나안의 문법이다. 떡은 진짜다. 그러나 떡은 말씀을 담은 외피다. 그리고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했을 때, 예수님은 바로 이 구절로 대답하셨다. 떡의 주인이 떡보다 큰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불링거는 그리스도께서 "풍요의 뿔과 하늘의 모든 보화를 우리에게 열어 주셨다"고 썼다. 그 문장을 다시 읽어 보자. 열어 주셨다. 가나안을 빼앗지 않으셨다. 가나안을 헛것이라 하지 않으셨다. 가나안이라는 껍질을 열어, 그 안에 처음부터 담겨 있던 것을 보여 주셨다. 아브라함이 장막에서 본 성, 다윗이 "나의 분깃"이라 부른 분, 족장들이 "멀리서 보고 환영한" 본향,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열렸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물질적 필요와 현세적 은혜를 베푸신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구약보다 하나님의 자비가 축소되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구약에서 가나안과 자손과 풍요 같은 가시적 복 안에 싸여 있던 언약의 더 깊은 실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따라서 신약은 물질을 악하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성도를 현세적 번영 자체보다 그리스도와 성령, 하늘의 기업과 부활이라는 더 신령하고 영원한 복을 추구하도록 이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는 고난이 있을 수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세적 형편과 언약적 복을 동일시할 수 없다.

 

외피를 찢지 말라. 외피를 보화로 착각하지도 말라. 외피를 열라. 그 안에 처음부터 약속되어 있던 하늘의 보화가 있다. 그리고 그 보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열렸다.

 

 

 

각주

*1 Heinrich Bullinger,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 aeterno Heinrychi Bullingeri brevis expositio (Tiguri [Zurich]: in aedibus Christoph. Frosch., September 1534), Zentralbibliothek Zürich, 5.282,3, e-rara, https://doi.org/10.3931/e-rara-778.

*2 Bullinger,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 aeterno. 라틴어 자구 대조에는 Heinrich Bullinger,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et Aeterno(오직 하나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간략한 해설): 한국어–라틴어 대역판 (Zenodo, 2026), https://doi.org/10.5281/zenodo.18730651 참조.

*3 Bullinger,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 aeterno, e-rara, https://doi.org/10.3931/e-rara-778. 영역은 Heinrich Bullinger, “A Brief Exposition of the One and Eternal Testament or Covenant of God,” in Charles S. McCoy and J. Wayne Baker, Fountainhead of Federalism: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al Tradition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1), 99–138.

*4 Bullinger,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 aeterno, e-rara, https://doi.org/10.3931/e-rara-778; Bullinger,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et Aeterno(오직 하나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간략한 해설): 한국어–라틴어 대역판https://doi.org/10.5281/zenodo.18730651.

*5 Augustine, The City of God, 10.14, trans. Marcus Dods,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2,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7),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20110.htm.

*6 Augustine, The City of God, 19.17, trans. Marcus Dods,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20119.htm.

*7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11.1, trans. Henry Beveridg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iv.xii.html.

*8 Calvin, Institutes, 2.11.2, CCEL,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iv.xii.html.

*9 Calvin, Institutes, 2.11.2, CCEL,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iv.xii.html.

*10 Calvin, Institutes, 2.11.3, CCEL,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iv.xii.html.

*11 Zacharias Ursinus,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trans. G. W. Williard, 4th American ed. (Cincinnati: Elm Street Printing Co., 1888), Lord’s Day 50, Third Millennium Ministries, https://thirdmill.org/magazine/article.asp/link/zac_ursinus%5Ezac_ursinus.HC052.html/at/The%20Commentary%20on%20the%20Heidelberg%20Catechism.

*12 Ursinus,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Lord’s Day 50, sec. II, Third Millennium Ministries, https://thirdmill.org/magazine/article.asp/link/zac_ursinus%5Ezac_ursinus.HC052.html/at/The%20Commentary%20on%20the%20Heidelberg%20Catechism. 우르시누스는 현세적 복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조건 아래” 구해야 하며,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에 합당한 것만 주신다고 설명한다.

*13 Herman Witsius, The Economy of the Covenants between God and Man, trans. William Crookshank, 2 vols. (London: R. Baynes, 1822), 3.3, Monergism, https://www.monergism.com/different-economies-or-dispensations-covenant-grace. 동일 문맥은 A Puritan’s Mind에도 전재되어 있다: https://www.apuritansmind.com/covenant-theology/the-economy-of-the-covenants-between-god-and-man-by-herman-witsius/the-economy-of-the-covenants-book-3-chapter-3-of-the-different-economies-or-dispensations-of-the-covenant-of-grace-by-herman-witsius/.

*14 Witsius, Economy of the Covenants, 4.11, A Puritan’s Mind, https://www.apuritansmind.com/covenant-theology/the-economy-of-the-covenants-between-god-and-man-by-herman-witsius/the-economy-of-the-covenants-book-4-chapter-11-of-the-blessings-of-the-old-testament-by-herman-witsius/.

*15 John Owen, An Exposition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on Heb. 11:13–16, i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Edinburgh: T. & T. Clark, 1854–1855), StudyLight.org, https://www.studylight.org/commentaries/eng/joc/hebrews-11.html. 오웬은 “better country”가 가나안이 아니라 “an heavenly” country라고 논증한다.

*16 John Owen, Eshcol; A Cluster of the Fruit of Canaan, i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Edinburgh: T. & T. Clark, 1850–1855),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owen/eshcol.i.vi.xii.html. 오웬은 복음이 “power, authority, relation, enjoyment of earthly blessings”에서 오는 사회적 차이를 제거하지 않지만, 순전히 영적인 문제에서는 이러한 외적 차이가 가치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인용 표기에 관하여. 본문에서 따옴표로 직접 인용한 영어 문장은 위에 밝힌 영역본의 온라인 전자판(CCEL, Thirdmill, New Advent, A Puritan's Mind 등)에서 확인한 것이다. "요지"라고 표시한 부분은 해당 대목의 논지를 필자가 요약·의역한 것이며, 원문의 자구가 아니다. 불링거의 라틴어 두 구절(involucrum; copiae cornu et omnes coelestes thesauros nobis aperuit)은 위 한국어–라틴어 대역판의 본문과 해설에 근거하였다. 한글 성경 본문은 개역개정을 따랐다.

 

 

 

참고문헌

아래 서지는 Chicago Notes and Bibliography 형식을 기준으로 정리하였다. 온라인 판본은 본문 대조에 사용한 공개 전자판 또는 디지털 원문이다.

 

Augustine. The City of God. Translated by Marcus Dods.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2,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7.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20110.htm; https://www.newadvent.org/fathers/120119.htm.

 

Bullinger, Heinrich.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 aeterno Heinrychi Bullingeri brevis expositio. Tiguri [Zurich]: in aedibus Christoph. Frosch., September 1534. Zentralbibliothek Zürich, 5.282,3. e-rara. https://doi.org/10.3931/e-rara-778.

 

Bullinger, Heinrich. “A Brief Exposition of the One and Eternal Testament or Covenant of God.” In Charles S. McCoy and J. Wayne Baker, Fountainhead of Federalism: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al Tradition, 99–138.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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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 Joh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lated by Henry Beveridge. 2 vols.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iv.xii.html.

 

Owen, John. Eshcol; A Cluster of the Fruit of Canaan. In The Works of John Owen. Edited by William H. Goold. Edinburgh: T. & T. Clark, 1850–1855.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owen/eshcol.i.vi.xii.html.

 

Owen, John. An Exposition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In The Works of John Owen, edited by William H. Goold. Edinburgh: T. & T. Clark, 1854–1855. StudyLight.org. https://www.studylight.org/commentaries/eng/joc/hebrews-11.html.

 

Ursinus, Zacharias.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Translated by G. W. Williard. 4th American ed. Cincinnati: Elm Street Printing Co., 1888. Third Millennium Ministries. https://thirdmill.org/magazine/article.asp/link/zac_ursinus%5Ezac_ursinus.HC052.html/at/The%20Commentary%20on%20the%20Heidelberg%20Catechism.

 

Witsius, Herman. The Economy of the Covenants between God and Man: Comprehending a Complete Body of Divinity. Translated by William Crookshank. 2 vols. London: R. Baynes, 1822. A Puritan’s Mind / Monergism. https://www.apuritansmind.com/covenant-theology/the-economy-of-the-covenants-between-god-and-man-by-herman-witsius/; https://www.monergism.com/different-economies-or-dispensations-covenant-grace.

 

 

 

 

 

 

AI 활용 안내 — 이 글의 문제의식과 중심 논지, 신학적 판단, 자료의 채택과 최종 문장은 필자에게 있다. 작성 과정에서는 생성형 AI를 연구와 편집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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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제시한 내용은 그 자체를 권위 있는 출처로 삼지 않았으며, 접근 가능한 성경 원문, 교부 문헌, 신경과 공의회 문서, 공식 교리서 및 개혁파 신앙고백 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다시 대조하였다. 자료의 해석과 남아 있을 수 있는 오류를 포함한 글의 최종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Paul Auster폴 오스터의 『The Music of Chance우연의 음악』(1980년 작)을 읽은 지 꽤 오래되었지만, 그 소설의 마지막 무렵에 서 있던 벽돌담만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도박으로 가진 것을 다 잃은 두 사람이 있다. 빚을 갚을 길이 없던 그들에게 제안된 것은 노동이었다. 넓은 저택의 들판에 거대한 벽돌담을 쌓는 일. 처음에 그것은 그럴듯한 계약처럼 보인다.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양의 벽돌을 쌓으면 빚은 청산되고, 그들은 다시 자유로워질 것이다. 적어도 종이 위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독자는 서서히 불편해진다. 그 벽은 무엇을 막기 위해, 혹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세워지는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벽은 들판 한가운데 그저 길게 놓일 뿐이고, 그것이 완성된 뒤에 어떤 쓸모를 가지게 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올릴수록 빚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규칙은 점점 불투명해지고, 감시는 촘촘해지며, 두 사람은 어느새 노동자가 아니라 갇힌 사람이 되어 있다. 계약은 형벌로 변해 있었고, 벽돌담은 빚의 형상이자 감옥의 형상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잔혹한 것은 그 노동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벽은 높아지지만 사람은 자라지 않는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같은 벽 앞에 서서 같은 일을 하지만, 그 시간은 그들을 서로에게 가까워지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은 그들을 각자의 피로와 절망 속으로 밀어 넣고, 대화는 줄어들고, 사람은 조금씩 소모된다. 그리고 견디지 못한 한 사람이 저항하고 도망치려 했을 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이해도, 협상도 아닌 폭력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오래 멈춰 있었던 기억이 있다. 왜 이토록 잔인해야 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오스터는 그 잔인함을 통해 어떤 세계를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목적을 잃은 노동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 빚과 계약과 권력이 결합했을 때 자유가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람이 자신이 왜 이 벽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계속 쌓게 되는 상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그 소설에서 벽돌은 빚이고, 속박이고, 부조리이고, 고립이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서로로부터 떼어놓는다.

 

이 오래된 소설이 다시 떠오른 것은 뜻밖의 자리에서였다. 며칠 전, 나는 교회에서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올해 새로 옮긴 교회는 빨간 벽돌 건물로 이름난 곳이다. 처음 그 건물을 보았을 때부터 붉은 벽돌이 켜켜이 쌓인 외벽이 인상적이었는데, 막상 다니다 보니 그 벽돌은 건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축과 개축을 거치는 동안 남은 벽돌들이 교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어떤 것은 건물 뒤편에 무더기로, 어떤 것은 나무 아래에 몇 장씩, 어떤 것은 구석에 반쯤 잊힌 채로. 이번에 남전도회에서 대대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벽돌들을 모두 모으기로 했다. 흩어진 것들을 다 거두어 두 군데 정도에 가지런히 쌓아 두고, 그중 일부로는 화단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전에 출석하던 교회는 서울에 있었고 관리집사님이 따로 계셨다. 나 같은 교인이 직접 손을 댈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교회 건물의 한 부분을 내 손으로 만져 본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벽돌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빨간 벽돌 교회라는 이름값을 하듯 옮겨도 옮겨도 벽돌이 나왔다. 허리를 굽혀 몇 장씩 들어 올리고, 손수레에 싣고, 정해진 자리로 옮겨 줄을 맞추어 쌓는 일이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손바닥은 가루로 물들었고, 등에는 땀이 흘렀다. 그것은 분명한 육체노동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소설의 장면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무거운 벽돌을 나르고,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누군가 멀리서 보았다면 우리도 그저 벽돌을 쌓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만들어낸 것은 정반대였다.

 

벽돌을 나르는 사이사이에 이야기가 오갔다. 어느 집사님은 이 벽돌이 언제 어느 공사에서 남은 것인지를 이야기해 주셨고, 어느 집사님은 화단을 어디에 어떻게 만들면 좋을지 알려주셨다. 누가 무거운 손수레를 밀면 누가 뒤에서 받쳤고, 쉬는 틈에 시원한 아이스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마시며 교회와 지역의 역사 등 지난 이야기들을 조금씩 주고받았다.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이름과 얼굴을 맞추기도 어색했던 분들이, 그날 오후가 지나갈 즈음에는 등을 두드리며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벽돌을 정리했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함께 수고하는 동안 서로를 알게 되었고, 관계가 생겼고, 나는 어느새 이 공동체 안에 연결되어 있었다. 같은 벽돌인데, 왜 이렇게 다른가.

 

오스터의 소설에서 두 사람은 함께 일했지만 서로에게 닿지 못했다. 그 노동에는 목적이 없었고, 목적이 없는 노동은 사람 사이에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시간을 소모하고 힘을 소모하고, 끝내 사람을 소모한다. 강제된 짐은 사람을 짓누르고, 짓눌린 사람은 옆 사람을 돌아볼 여유를 잃는다. 반면 교회에서 나른 벽돌에는 처음부터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이 건물을, 이 공동체를 함께 돌보기 위해 모였다. 누구도 빚 때문에 그 자리에 있지 않았고, 누구도 감시 아래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벽돌보다 훨씬 오래된 것이었다.

 

바울은 교회를 몸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썼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로새서 2:19). 교회는 같은 건물에 모이는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어서 서로에게서 공급받고 서로에게 연결되어 함께 자라가는 하나의 몸이다. 이 비유에서 내가 오래 붙들게 되는 말은 '마디와 힘줄'이다. 몸이 하나로 움직이려면 뼈와 뼈 사이를 잇는 마디가 있어야 하고, 힘을 전달하는 힘줄이 있어야 한다. 그날 벽돌을 나르던 우리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 같다. 이야기와 웃음과 땀이 마디가 되고 힘줄이 되어, 아직 따로 놀던 지체들을 하나의 몸으로 이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잘해서 된 일이 아니라,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된 일이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더 직접적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리고 이어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19-22). 새로 옮긴 교회에서 나는 한동안 조금은 나그네였다. 예배는 함께 드리지만 아직 이 집의 식구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사람. 그런데 그날, 붉은 벽돌 건물의 남은 벽돌들을 함께 모아 쌓는 동안, 나는 '권속'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몸으로 조금 알게 되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벽돌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에 다른 것을 지어 가고 계셨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여, 살아 있는 성전으로 세워 가고 계셨던 것이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있었다(베드로전서 2:5). 손에 들고 있던 것은 벽돌이었지만, 그날 실제로 지어지고 있던 것은 사람이었다.

 

이 역설이 나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보이는 건물을 정리하는 동안,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건물을 세우신다. 우리가 벽돌을 두 군데에 나누어 가지런히 쌓아 두는 동안, 하나님은 흩어져 있던 성도들을 한곳에 모으신다. 화단 하나를 만드는 동안, 하나님은 그 화단 앞에 함께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 무엇인가를 심으신다.

 

그렇다면 벽돌의 무게는 어디로 간 것일까. 무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벽돌은 그날도 무거웠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30)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짐이 없어진다는 뜻으로 읽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도 멍에는 있고 짐은 있다. 다만 그 짐의 성격이 다르다. 오스터의 벽돌은 빚 때문에 짊어진 짐이었다. 갚아야 할 것이었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혼자 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무게는 사람을 안으로 짓눌러 고립시켰다. 교회의 벽돌은 함께 짊어진 짐이었다. 사랑 때문에, 관계 안에서, 목적을 가지고 지는 짐이었다. 그래서 같은 무게가 오히려 사람을 밖으로 열어 서로에게 향하게 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라디아서 6:2)는 말씀이 그날은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였다. 우리는 서로의 벽돌을 나누어 들었고, 그렇게 서로의 짐을 나누어 졌다.

 

그리고 그 노동은 무엇인가를 세웠다. 벽돌 더미와 화단만이 아니라, 바울이 말한 '덕'을 세웠다.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로마서 14:19).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1). 덕을 세운다는 말의 원래 뜻은 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서로 덕을 세운다는 것은 서로를 지어 올린다는 뜻이다. 그날 우리는 벽돌을 쌓으면서 서로를 쌓아 올렸다. 한 사람이 힘들어하면 다른 사람이 받쳐 주었고, 한 사람이 우스운 말을 하면 모두가 함께 웃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린도전서 12:26). 오스터의 세계에서는 함께 일해도 각자 고통을 받았다. 교회에서는 함께 일하며 함께 땀 흘리고 함께 웃었다. 그 차이가 모든 것을 갈랐다.

 

벽이라는 것은 본래 가르는 것이다. 안과 밖을 나누고, 이쪽과 저쪽을 구분한다. 『우연의 음악』의 벽은 그 본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두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가르고, 자유로부터 가르고, 끝내는 서로로부터 갈라놓는다. 벽이 높아질수록 사람은 작아지고, 벽이 완성되어 갈수록 사람은 사라져 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교회에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벽돌을 쌓을수록 사람 사이의 벽은 낮아졌다. 우리는 분명히 벽돌을 쌓았는데, 정작 낮아진 것은 사람과 나 사이에 있던 벽이었다. 어떤 벽은 사람을 가두지만, 어떤 벽은 오히려 사람을 만나게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벽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벽돌은 그저 벽돌이었다. 그것을 무엇으로 만드는지는 그 벽돌을 드는 이유와, 함께 드는 사람과, 그 모든 것 위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달려 있었다.

 

벽돌 정리는 그날 정오에 끝났다. 두 곳에 가지런히 쌓인 붉은 벽돌 더미와 자연스럽게 가지런히 돌로 두른 아름다운 화단들이 남았다. 언젠가 또 공사가 있으면 그 벽돌들은 다시 쓰일 것이고, 화단에는 계절마다 꽃이 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정말로 지어진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진다. 우리는 보이는 벽돌을 옮겼고, 하나님은 사람 사이의 거리를 옮기셨다. 우리는 흩어진 벽돌을 모았고, 하나님은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여 성전으로 지어 가셨다. 빨간 벽돌 교회의 벽돌은 많았다. 그러나 그 벽돌보다 먼저, 혹은 그 벽돌 사이에서, 하나님은 훨씬 조용하게, 훨씬 오래가는 집을 세우고 계셨다.

— 누가복음 6:27–38, 아버지의 자비를 닮은 사랑에 관하여
 
 
 
 
 

1. 머리로는 알지만, 현실에서는 어려운 것

먼저 이 질문 앞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난번 질문과 같이, 이것은 믿음이 약해서 나오는 질문이 아니라, 말씀을 정직하게 자기 삶에 갖다 대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을 읽고도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편이 이상한 일입니다. 이 말씀은 이천 년 동안 교회가 읽어 오면서 한 번도 "쉽다"고 말해 본 적이 없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본성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누군가 나를 부당하게 대할 때 분노가 올라오는 것,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맞서 싸우고 나서 후회하는 것 — 이것은 질문하신 분만의 경험이 아니라 이 본문 앞에 선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그냥 용서하세요"라든가 "기도하면 됩니다" 같은 답으로 서둘러 건너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렇게 요약해 버리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무게와, 그 말씀을 가능하게 하시는 복음의 깊이를 다 놓치기 때문입니다. 대신 본문을 천천히 함께 읽으면서 세 가지를 살피려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무엇을 명령하셨는가. 그 명령은 무엇을 뜻하고 무엇을 뜻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명령을 받은 우리는 도대체 무슨 힘으로 순종할 수 있는가.
 
미리 이 글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나의 원수가 아니라고 애써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원수처럼 대하더라도 나는 그에게 원수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원수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원수였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두 문장이 이 글 전체를 붙들고 있는 기둥입니다.
 
 
 

2. 예수님은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가

본문을 읽을 때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누구를 향해 선포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

 
원수 사랑의 명령이 나오기 직전, 누가복음 6장의 이른바 '평지 설교'는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일반 도덕 강연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제자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6:22)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면 원수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이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몇 절 뒤에서,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6:27)

 
6장 22절과 27절을 나란히 놓고 보면, 예수님의 전제가 분명해집니다. 제자에게는 미워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저주하는 자, 모욕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원수가 없는 세계가 아니라, 원수가 있는 세계 한복판에서 제자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질문하신 분에게 먼저 드리고 싶은 위로이기도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 신앙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미움을 받으셨고, 제자들도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어디에서 드러나는 것일까요.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 내는 데에 있을까요, 아니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도 드러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후자를 향하고 있습니다. 원수의 존재 여부는 대부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원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서는가 — 예수님은 바로 거기에 제자의 자리를 두셨습니다.
 
 
 

3. "원수를 사랑하라"는 정말 명령인가

눅 6:27–28에서 예수님은 네 개의 동사를 연이어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헬라어 본문에서 이 네 동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www.die-bibel.de/en/bible/NIV/LUK.6.27-LUK.6.28)

  • ἀγαπᾶτε(아가파테) — 사랑하라
  • καλῶς ποιεῖτε(칼로스 포이에이테) — 선을 행하라, 선대하라
  • εὐλογεῖτε(율로게이테) — 축복하라
  • προσεύχεσθε(프로슈케스데) — 기도하라

이 네 동사는 모두 명령형입니다. 헬라어 문법 이야기를 길게 할 필요는 없지만, 이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유가 되면 한번 그렇게 해 보아라" 수준의 선택적 권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마음이 내킬 때만 지키는 조언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율법이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이 명령을 약화시켜서 "예수님도 사실 그렇게까지 기대하신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고, 이 명령을 "네 힘으로 해내야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로 바꾸는 것도 잘못입니다. 명령은 진짜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이 누구에게, 어떤 근거 위에서 주어졌는지를 끝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 근거는 본문의 뒷부분(6:35–36)과 복음 전체가 밝혀 줄 것입니다. 지금은 다만 이것을 기억해 둡시다. 예수님은 이것을 명령하실 만큼 진지하셨고, 동시에 이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은혜 위에 서 있는지도 아셨습니다.
 
 
 

4.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무엇인가

여기서 많은 분들이 걸려 넘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곧장 감정을 떠올립니다. 그 사람이 좋아져야 하고, 미운 마음이 사라져야 하고, 따뜻한 애정이 생겨야 사랑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를 괴롭힌 사람에게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으니, "나는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사람인가" 하는 자책으로 이어집니다.
 
이 문제를 풀 때 흔히 "아가페는 감정 없는 의지적 사랑이고, 필리아는 감정적 사랑이다"라는 식의 단어 구분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 도식은 성경의 실제 용례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이 글에서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단어 사전을 뒤지는 것보다 훨씬 좋은 길이 있습니다. 본문 안에서 예수님 자신이 "사랑하라"를 어떻게 풀어 주시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뒤, 곧바로 그 사랑의 내용을 세 개의 동사로 펼쳐 놓으십니다. 사랑하라 — 그러면 어떻게? 선대하라. 저주하는 자에게는? 축복하라. 모욕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원수 사랑은, 먼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을 만들어 내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그 사람을 향해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어떤 말을 선택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가의 문제로 제시됩니다.
 
이것이 질문하신 분에게 실제적인 숨통을 틔워 주는 지점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즉시 그 사람이 좋아지라는 뜻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감정은 먼저 따라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래도록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 이것들에는 순종할 수 있습니다. 악을 되갚는 대신 선을 행하는 것. 저주하고 싶은 입으로 축복을 말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사람의 이름을 놓고 기도하는 것. 감정이 순종을 앞서지 못할 때, 순종이 감정을 앞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축복하고 기도하는 순종을 계속하는 동안 굳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경험하는 이들이 교회 역사에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다만 여기서 반대편 오해도 막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미워한 채로 겉으로만 잘해 주면 되는 거군요"라는 결론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설교의 뒷부분에서 마음의 쌓인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말씀하시며(눅6:45), 사람의 중심을 끝까지 문제 삼으십니다. 외적 행동만 관리하면 된다는 행동주의는 답이 아닙니다. 순종은 행동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우리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까지 새롭게 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이 사람을 축복하는 말을 하지만 마음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제 마음도 바꾸어 주십시오." 이것 자체가 원수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는 기도입니다.
 
 
 

5.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 모욕 앞에서의 비보복

이제 예수님은 이 사랑이 부딪치는 가장 구체적인 장면들로 들어가십니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눅6:29–30)

 
먼저 뺨에 관한 말씀을 봅시다. 흥미롭게도 누가복음은 그냥 "뺨"이라고만 하고 어느 쪽인지 특정하지 않습니다. 평행본문인 마태복음에서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오른뺨"과 관련해서 자주 소개되는 배경 설명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오른손잡이인 사회에서 오른손으로 상대의 오른뺨을 치려면 손등으로 치게 되는데, 고대 사회에서 손등으로 치는 것은 단순한 폭행 이상으로 상대를 경멸하고 모욕하는 행위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후대 유대교 법 전통을 담은 미쉬나(Mishnah Bava Kamma 8:6)는 일반적으로 때리는 것과 손등으로 때리는 것의 배상액을 다르게 규정하는데, 손등으로 치는 쪽의 배상액이 더 큽니다. 모욕의 정도가 더 크다고 본 것입니다.
 
다만 이 배경을 사용할 때는 신중해야 합니다. 미쉬나는 예수님 시대보다 뒤에(주후 200년경) 편집된 자료이기 때문에, 이 자료만으로 예수님 당시의 관습을 세밀하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른뺨을 치는 것은 노예를 때리던 정해진 방식이었다"는 식으로 단정해서 말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뺨을 치는 행위, 특히 그런 방식의 타격은 신체적 상해 이전에 인격에 대한 모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육체적 공격의 상황만이 아니라, 모욕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보복의 악순환으로 들어가지 않는 제자의 태도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의 일상에서 '원수'가 실제로 등장하는 장면은 물리적 폭력보다 이런 모욕의 형태가 많습니다. 무시하는 말, 험담, 부당한 평가, 자존심을 짓밟는 태도. 그럴 때 우리 안에서 즉각 일어나는 것은 "되갚아 주고 싶다"는 충동입니다. 같은 말로, 더 아픈 말로, 더 확실하게.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지점을 겨냥합니다. 모욕을 당했을 때 모욕으로 되갚는 순간, 나는 상대가 시작한 게임의 규칙 안으로 들어가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저 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내 쪽에서 끊으라는 명령입니다. 보복의 연쇄는 누군가 되갚기를 그만두는 지점에서만 멈춥니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멈추는 사람이 바로 너희가 되라고.
 
 
 

6. 겉옷과 속옷까지 — 권리와 소유를 움켜쥐지 않는 사랑

뺨 다음에 나오는 것은 옷입니다. 눅6:29에서 예수님은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겉옷은 헬라어로 ἱμάτιον(히마티온), 속옷은 χιτών(키톤)입니다. 히마티온은 바깥에 걸치는 망토 같은 겉옷이고, 키톤은 그 안에 입는 튜닉, 곧 몸에 직접 닿는 속옷입니다.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은 순서가 반대입니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40). 마태 쪽은 재판을 통해 속옷을 요구당하는 법적 상황을 그리고, 누가 쪽은 겉옷을 강제로 빼앗기는 상황을 그립니다. 상황 설정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습니다. 정당하게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소유와 권리조차 움켜쥐지 않는, 놀랍도록 아낌없는 태도입니다.
 
이 말씀의 무게를 느끼려면 당시 겉옷이 어떤 물건이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당시 사람들은 모두 겉옷이 하나뿐이었다"는 식의 단정은 피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눅3:11)라고 말한 것을 보면 두 벌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 겉옷이 얼마나 절박한 물건이었는지는 율법 자체가 증언합니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그의 몸을 가릴 유일한 옷이며 그의 살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출22:26–27)

 
가난한 사람에게 겉옷은 낮에는 옷이고 밤에는 이불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겉옷을 담보로 잡았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돌려주라고 명하셨고, 그 이유를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라고 밝히셨습니다. 겉옷 규정 하나에도 하나님의 자비가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겉옷을, 예수님은 빼앗는 자에게 내어주라 하시고, 속옷까지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계산이 서지 않는 요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계산이 서지 않는다는 점에 이 말씀의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자기 권리와 소유를 마지막 한 조각까지 지켜 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라면 정당한 자기 몫조차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다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의 질문이 올라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아낌없이 내어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내어주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분명히 해 둘 것은, "속옷까지 주라"는 말씀 자체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 알레고리적 해석은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을 본문에 집어넣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의 원형이 어디에 있는지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소유물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아끼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것을 우리를 위해 내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겉옷과 속옷을 내어주라는 명령은, 그렇게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이 순서를 기억할 때에만 이 말씀은 우리를 짓누르는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받은 사랑을 닮아가라는 은혜로운 부르심이며, 그 은혜 위에서 주어진 실제적인 명령이 됩니다. 은혜는 명령을 무효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가 순종의 토대와 능력이 됩니다.
 
 
 

7. 그러나 악을 악이라 말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이 불의 앞에서 무조건 침묵하고, 어떤 학대라도 계속 견디라는 뜻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 이 질문에 답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으실 때의 장면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요18:22–23)

 
예수님은 실제로 뺨을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맞받아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침묵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예수님은 그 폭력이 부당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복하지 않는 것과,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아무 모순 없이 공존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구분해야 합니다. 비보복은 불의에 대한 침묵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다른 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은 보복의 악순환에 들어가지 말라는 명령이지, 악을 악이라 부르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 구분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이 본문이 잘못 사용되어 큰 상처를 남긴 사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은 결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폭력을 참고 계속 맞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학대를 신고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범죄를 묵인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피해자를 보호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폭력과 학대의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이 본문을 들이대며 "예수님이 참으라고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말씀을 오용하여 악을 돕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 주변과 교회와 필요하다면 공적 기관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은 이 본문에 대한 불순종이 아닙니다. 이 점은 뒤에서 사적 보복과 공적 정의를 다룰 때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8.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이제 본문의 심장부로 들어갑니다. 많은 분들이 27–31절에서 읽기를 멈추지만, 이 단락은 38절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고, 그 흐름의 중심은 35–36절에 있습니다. 29–30절의 구체적 사례들(뺨, 겉옷과 속옷, 구하는 자, 빼앗는 자) 뒤에 예수님은 그 유명한 황금률을 두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6:31)

 
그리고 곧바로, 이 사랑이 세상의 일반적인 호의와 어떻게 다른지를 밝히십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눅6:32–34)

 
세 번 반복되는 질문의 요지는 하나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고, 되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 — 그것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고받음이 맞아떨어지는 상호주의는 인간 사회의 기본 문법이지, 하나님 나라의 표지가 아닙니다. 제자의 사랑이 사랑이 되는 지점은, 바로 그 상호주의의 계산이 무너지는 곳, 곧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 돌려주기는커녕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까지 향할 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명령의 근거가 선포됩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6:35)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이 두 구절이 눅6:27–38 전체의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 사랑을 명하시는 근거는 "그래야 네가 착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야 상대가 감동해서 변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근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해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의 밭에만 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자격 있는 사람에게만 흐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렇게 사랑할 때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 곧 아버지를 닮은 자녀임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녀의 신분은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이며, 원수 사랑은 그 자녀에게서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요구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착한 사람이 되어라"가 아닙니다. "너희 아버지가 어떠한 분이신지를, 그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내라"입니다. 원수 사랑은 도덕적 영웅의 업적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둔 자녀의 가족적 닮음입니다.
 
마태복음의 평행본문과 비교하면 누가의 강조점이 더 선명해집니다. 마태는 같은 자리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그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마태는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누가는 특별히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강조합니다. 두 복음서가 다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아버지의 성품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비추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언어를 살려서 말한다면, 이 본문은 "아버지의 자비를 닮은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자비는 37–38절에서 판단과 정죄와 용서와 나눔의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7–38)

 
아버지의 자비를 닮는 삶은 원수를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습관을 내려놓는 데로, 용서하는 데로, 후히 나누는 데로 번져 갑니다. 자비는 한 영역에만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 곡식을 됫박에 담을 때 꾹꾹 누르고 흔들어 빈틈을 채우고도 넘치게 부어 주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그렇게 되어 주시는 분이며, 그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을 헤아릴 때에도 그 됫박을 쓰는 법을 배웁니다.
 
 
 

9.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 하나님께 맡겨진 복수

그런데 여기서 정직한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그러면 정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악이 아무 대가 없이 넘어가도 좋다는 뜻입니까. 잘못한 사람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뜻입니까. 성경은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노래에서 하나님은 이미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신32:35). 그리고 바울은 바로 이 말씀을 가져와 원수 사랑의 문제에 적용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여기에 결정적인 신학적 통찰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수를 포기하는 것은 정의를 포기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심판자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씀의 근거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복수를 내려놓는 것은 "어차피 정의 같은 건 없어"라는 체념이 아니라, "의로우신 심판자가 따로 계시다"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정의가 없다고 믿어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모든 것을 정확히 아시고 반드시 공의롭게 행하실 심판자를 믿기에, 사적인 복수의 칼을 그분 발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 복수하려 할 때 우리는 세 가지 직책을 한꺼번에 차지하려 합니다. 피해자이면서, 재판관이면서, 형 집행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사람은 공정한 재판관이 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동기를 다 알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몫과 상대의 몫을 정확히 가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복수를 맡기라는 말씀은, 그 재판관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해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자리로 옮겨 가라는 초대입니다. 시편의 수많은 탄원시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드려진 기도입니다.

사적 보복과 공적 정의는 다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구분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한 바울은, 바로 이어지는 13장에서 공적 권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권세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롬13:4)라는 것입니다. 12장과 13장은 모순이 아니라 한 쌍입니다. 개인은 사적 복수를 내려놓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악을 제어하고 벌하는 공적 질서를 세워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은 범죄를 처벌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법과 공적 정의를 폐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피해자를 보호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폭력과 범죄 앞에서 경찰과 법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사적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적 통로를 사용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면서, 동시에 그의 범죄가 공적으로 다루어지도록 신고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범 — 벧전 2장

이 모든 것이 한 인격 안에서 완전하게 구현된 장면을 베드로가 보여줍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1–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원수 사랑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만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불의를 정당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맞대어 악을 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자신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의 비보복은 정의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공의로우신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신뢰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것이 감상용 그림이 아니라 "본"이라고, 우리가 그 자취를 따라오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10. 초대교회는 이 말씀을 어떻게 살았는가 [*1]

원수 사랑의 말씀이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보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물론 초대교회 전체가 모든 문제에서 한목소리였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증언들은 놀랍도록 일관된 방향을 보여줍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소수의 성인들만 도전하는 고급 영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걸어야 할 실제적인 제자도로 받아들였습니다.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의 교회 교육 문서인 《디다케》(Didache)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라는 두 길의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생명의 길의 첫머리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 하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고,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며,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교리교육적 성격을 지닌 이 문서가 '생명의 길'을 설명하는 첫머리에서 원수 사랑을 가르친다는 사실은, 초대교회가 이 말씀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소수를 위한 신앙의 심화 과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에 놓인 가르침이었습니다.
 
2세기 중반의 변증가 유스티누스(Justin Martyr)는 로마 황제에게 기독교를 변호하는 글을 쓰면서,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을 증거로 내세웠습니다. 그 취지는 이렇습니다. 전에는 서로 미워하고 죽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자기들을 부당하게 미워하는 자들을 설득하며, 다른 민족, 다른 관습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유스티누스에게 원수 사랑은 교리 문답의 한 항목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살아 있는 증거였습니다. "우리 교리가 옳다"가 아니라 "우리를 보라, 우리가 달라졌다"가 그의 변증이었던 것입니다.
 
2세기 말~3세기 초의 터툴리안(Tertullian) 역시 같은 방향을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제 박해와 폭력 속에서도 집단적인 보복이나 폭동으로 되갚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기독교 변증의 중요한 논거로 사용했습니다. 수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무력으로 맞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 — 그것이 이 신앙의 성격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증언 이전에, 교회의 첫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라고 기도하신 주님의 기도가, 첫 순교자의 입에서 그대로 메아리친 것입니다. 원수 사랑은 초대교회에서 이론이 아니라 피로 실천된 말씀이었습니다.
 
 
 

11. 개혁교회는 어떻게 읽었는가 [*2]

그렇다면 우리가 서 있는 개혁주의 전통은 이 본문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혹시 종교개혁자들은 이 말씀을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치부하고 옆으로 밀어 두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칼빈(Calvin)은 마태복음 5장과 누가복음 6장을 주석하면서, 예수님의 원수 사랑 가르침을 율법과 전혀 다른 새로운 윤리의 창조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보기에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계명을 사람들이 "이웃은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는 식으로 좁혀 놓은 인간적 왜곡을 벗겨 내시고, 율법이 본래 요구하던 사랑의 참된 넓이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원수 사랑은 율법 너머의 특별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처음부터 요구하던 사랑의 본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칼빈의 또 하나의 중요한 통찰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그들의 악함, 배은망덕, 미워할 만한 모습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그럴 때 그 사람의 공로나 매력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라고 권합니다. 상대가 사랑받을 자격을 스스로 훼손했을지라도, 그를 지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은 여전히 우리의 사랑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언어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이것은 칼빈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그의 통찰에 대한 현대적 요약입니다만 — 상대의 악함이 내가 악해질 허가증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는 상대의 문제이고, 내가 어떤 사람으로 반응하는가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방향을 교리교육의 뼈대에 새겨 넣었습니다.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를 다루는 105–107문에서, 요리문답은 이 계명이 단지 사람을 죽이는 행위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시기와 증오와 분노와 복수심 같은 살인의 뿌리까지 금하시며(106문), 더 나아가 이 계명은 소극적 금지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 요구를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곧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인내와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친절로 대하며, 해를 최대한 막아 주고, 원수에게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107문). 개혁교회는 원수 사랑을 신약에서 갑자기 등장한 비현실적 고급 윤리로 본 것이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적극적인 완성으로 이해했습니다. 원수를 향한 선행이 제6계명 해설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은, 이것이 선택 과목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필수 과목이라는 뜻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역시 같은 길을 갑니다. 제6계명이 금하는 죄로 죄악된 분노와 증오와 복수심을 들고, 요구하는 의무로는 생명을 보호하려는 노력과 함께 온유, 오래 참음, 화평, 악을 선으로 갚는 태도를 듭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한결같이, 원수 사랑을 십계명 윤리의 한복판에 두었던 것입니다.
 
 
 

12. 복음의 반전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이제 이 글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갈 차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명령을 살폈고, 그 명령의 근거로 "아버지의 자비"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자비가 가장 구체적으로, 가장 값비싸게 나타난 자리가 어디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그리고 두 절 뒤에서, 더 날카로운 단어가 나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이 구절 앞에서 우리는 멈추어 서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 사랑을 이야기할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의 자리에, 상대를 '원수'의 자리에 놓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 구도를 뒤집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수 관계에서, 원수는 저 사람이 아니라 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원수 된 자, 그것이 그리스도 밖에 있던 우리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원수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진멸하지 않으시고, 무시하지도 않으시고, 아들을 내어주어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숨은 가능성을 보시고 투자하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더 나아가 원수 되었을 때, 바로 그때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6:35)는 말씀이 관념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은혜를 모르던 자, 그 악한 자가 바로 우리였고, 그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십자가로 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원수 사랑과 세상의 관대함이 갈라집니다. 세상은 이렇게 권합니다. "저 사람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 미워하지 마." 때로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원수 사랑은 그런 낭만적 인간관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상대에게서 좋은 면을 찾아내는 데 성공해야만 가능한 사랑이라면, 좋은 면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본문의 근거는 상대의 사랑스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원수 사랑은 "저 사람도 사실 괜찮은 사람이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은 사람이 아니었다"라는 복음의 기억에서 나옵니다.
 
원수 앞에서 화가 끓어오를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참자, 참자"라는 주문이 아니라 이 기억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원수였다. 그런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내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은 자격 없이 받은 자비다. 그 자비를 받은 사람이, 이제 자비를 흘려보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원수 사랑은 은혜 받은 사람이 은혜를 갚는 방식이 아니라 — 은혜는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 은혜 받은 사람에게서 은혜가 배어 나오는 방식입니다.
 
 
 

13.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 사랑의 경계를 무너뜨리시는 예수님

같은 누가복음 안에는 이 원수 사랑의 말씀과 나란히 놓고 읽을 때 서로를 밝혀 주는 또 하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두 본문의 직접적인 맥락과 질문은 서로 다릅니다. 눅6장의 주제는 "원수를 사랑하라"이고, 눅10장의 질문은 한 율법교사의 입에서 나온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의 개인적 원수였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으므로, 이 비유를 곧장 "원수를 사랑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두 가르침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의 요약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10:27).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그다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10:29). 이것은 사랑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경계선을 긋기 위한 질문입니다. 이웃의 범위를 확정해 놓으면, 그 바깥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랑의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정의(定義)로 답하지 않으시고 비유로 답하신 뒤, 질문 자체를 뒤집으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6–37).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내 이웃의 자격을 갖추었는가"라는 경계 설정에 답하시기보다, 내가 고통받는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람인가를 묻게 하십니다. 칼빈 역시 이 비유를 주석하면서, 가장 낯선 사람까지도 이웃의 범위에서 배제할 수 없음을 이 비유가 드러낸다는 방향으로 읽었습니다. [*3]
 
이제 두 본문을 나란히 놓아 봅시다. 눅6장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에서 원수까지도 제외할 수 없게 하십니다. 눅10장에서 예수님은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를 내가 편한 사람들로 제한할 수 없게 하십니다. 두 본문 모두, 인간이 사랑의 경계선을 자기 편의대로 긋는 것을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묻습니다. "어디까지가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는 그 경계 밖으로 밀어낸 원수까지 도로 데려오시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누가 이웃인가"라는 경계 설정 자체를 뒤집어 "네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를 물으십니다. 이 둘은 같은 본문이 아니라, 같은 누가복음 안에서 사랑의 경계를 확장하는 서로 다른 두 가르침이며, 함께 읽을 때 우리 마음의 계산법이 얼마나 좁은지를 드러내 줍니다.
 
 
 

14.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 화목의 한계에 담긴 따뜻한 배려

그런데 사랑의 경계가 이렇게까지 넓어지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까지 전부 내 책임이라는 말인가. 내가 사랑했는데도 관계가 여전히 깨어져 있다면, 그것은 내 순종이 부족했다는 뜻인가. 이 무거움에 대해, 사도 바울을 통해 주어진 성경 말씀이 놀랍도록 세심한 표현으로 답합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씀 바로 앞에 놓인 이 구절에는 두 개의 한정어가 들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εἰ δυνατόν(에이 뒤나톤) — "가능하다면", 그리고 τὸ ἐξ ὑμῶν(토 엑스 휘몬) — "너희에게 달린 만큼, 너희 쪽에서 할 수 있는 한"입니다. 바울은 모든 관계의 완전한 화해를 무조건 성취해 내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내 쪽의 순종이므로 명령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목한 관계가 실제로 성립되는 것은 상대방의 반응과 회개와 태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쪽의 문을 열 수 있지만, 상대의 문까지 대신 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이라는 표현에는 상대방의 몫까지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목회적이고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네가 저 사람까지 변화시키지 못했느냐"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것은, 내 쪽에서 가능한 평화를 구하고, 악으로 갚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고, 복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말한다면, 내가 사랑하려 애썼는데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곧 내 순종의 실패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평화를 구하되, 상대의 반응과 그 관계의 결과까지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습니다.
 
 
 

15. 이 사랑을 무슨 힘으로 살아낼 것인가 — 성령의 도우심

여기까지 오면 정직한 탄식이 하나 남습니다. 원수까지, 가장 낯선 사람까지 품는 이 넓고 높은 사랑을, 도대체 무슨 힘으로 살아낸다는 말인가. 고전적 개혁주의 신앙은 이 질문에 "네 의지력으로 해내라"고 답하지 않습니다. 원수 사랑도, 이웃 사랑도, 선행과 축복과 기도와 화평을 구하는 것도, 인간의 도덕적 결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랑을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열매라고 부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의 열매 목록의 첫자리에 놓인 것이 사랑입니다. 열매는 가지가 이를 악물고 쥐어짜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붙어 뿌리로부터 공급받을 때 맺히는 것입니다. 원수 사랑은 이를 악물고 만들어 내는 인간적 성취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의 새 언약 약속 안에 들어 있던 구조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행하게 하리니." 행하는 것은 분명 우리지만, 행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 신비를 한 문장 안에 담아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여기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균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 힘으로 다 해낸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실제로 사랑하고, 내가 실제로 축복하고, 내가 실제로 기도하고, 내가 실제로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 순종의 소원과 능력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원수 사랑의 명령이 우리에게 이토록 높은 명령이라는 사실은, 이 명령을 포기할 이유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더 붙어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나는 못하니까 이 명령은 무효다"가 아니라, "나는 내 힘으로 못하므로 더욱 그리스도께 붙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순종한다"가 제자의 자리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본문의 삼위일체적 구조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자비로우신 성부께서 원수 된 우리를 사랑하시고, 성자께서 원수 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으며, 성령께서 그 사랑을 우리 안에 열매 맺게 하셔서, 성도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16. 중심을 아시는 주님, 알지 못하는 우리

그렇다면 이 사랑을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분별의 문제가 남습니다. 여기서 먼저 예수님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 교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2:24–25)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획일적 친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항상 똑같이 부드러우시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은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와는 긴 대화로 그를 거듭남의 진리로 이끄셨고(요3장), 뽕나무 위의 삭개오에게는 먼저 이름을 부르며 그 집에 유하겠다 하셨으며(눅19장), 세관에 앉은 마태를 먼저 부르셨고(마9장),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요4장). 이들이 모두 선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아시고,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셨으며, 필요한 곳에서는 책망하시고, 필요한 곳에서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중심과 필요를 아는 거룩한 분별을 가진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중심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저 사람의 속마음을 안다", "저 사람은 반드시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정하는 태도야말로, 중심을 아시는 분의 자리를 넘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찰의 자신감이 아니라 분별의 겸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적인 규범으로 삼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지혜와 공동체의 분별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책임 안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지를 배워 가야 합니다. 이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주관적인 느낌이나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다는 것은 내 감정과 직감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신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신 사람과 책임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과 다른 방향을 가리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17. 사랑의 범위는 넓고, 책임의 우선순위는 있다

분별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도 사랑의 범위에서 제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관계적 책임과 동일한 우선순위를 부여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이 두 범위를 한 문장 안에 함께 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

 
"모든 이에게" — 선행의 범위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 책임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편애나 배타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구체적 책임의 질서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사랑의 보편성은 가까운 책임을 무시하는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서 모든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고, 교회 안의 실제 어려움을 외면하면서 추상적인 인류애만 말할 수 없으며, 내 앞에 있는 연약한 사람을 외면하면서 먼 곳의 사랑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을 새로운 정죄의 잣대로 삼을 일은 아닙니다. 다만 사랑의 보편성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내 곁에 두신 사람들에 대한 가까운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이 책임의 질서 안에서, 사회적·경제적·관계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을 특별히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명령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10:18–19)

 
율법은 추수할 때 밭의 소출을 다 거두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 두라고 명했고(신24:19–21), 야고보는 참된 경건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어린아이들을 귀찮은 존재로 여긴 제자들과 달리 그들을 안고 축복하신 예수님의 모습도 같은 결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회적 약자만 사랑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핵심은,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공동체에서 쉽게 잊힌다고 해서 하나님의 관심에서도 뒤로 밀리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특별히 기억하고 돌보도록 거듭 명합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과 책임의 우선순위는 충돌하지 않습니다. 원수도 사랑의 범위 밖에 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같은 방식, 같은 친밀도, 같은 우선순위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원수 사랑은 사랑의 범위를 넓히고, 성경적 책임의 질서는 사랑의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원수도 사랑의 바깥에는 없지만, 내가 가장 먼저 돌봐야 할 사람이 반드시 원수인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는 감정적 평준화도 성경의 요구가 아니고, 가족과 교회만 사랑하고 원수와 낯선 사람은 제외하는 폐쇄성도 성경의 길이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사랑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롬12:18)과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갈6:10)라는 말씀은 사랑의 보편성과 책임의 현실성을 함께 붙들게 해 줍니다. 우리는 무한한 능력과 시간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에, 이 넓고도 세밀한 사랑을 우리의 판단력과 의지력만으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앞에 두신 사람과 책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한복판에, 누가복음 6장이 말하는 원수 사랑이 있습니다. 이제 그 자리로 돌아가, 처음의 질문에 답할 차례입니다.
 
 
 

18. 그러면 내일 다시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지금까지의 본문 묵상을 실제 삶의 결로 풀어 보겠습니다. 순서가 있는 처방전이라기보다, 원수를 마주한 제자가 반복해서 오가게 되는 길목들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화가 난다는 사실을 즉시 위선이나 실패로 여기지 마십시오. 감정이 올라오는 것과 그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분노가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곧 죄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악과 불의를 향한 정당한 분노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죄인인 우리의 분노에는 정당한 의분과 상처 입은 자아, 교만과 복수심이 쉽게 뒤섞이므로, 그 분노 자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분노를 살피지 않은 채 그 분노가 우리를 조종하도록 내어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노를 억지로 없는 척하라고 하지 않고, 분노를 하나님께 가져가라고 가르칩니다. 시편의 기도자들처럼, 끓어오르는 그 마음 그대로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사람 앞에서 화를 절제할 힘도 얻습니다.
 
둘째, 보복할 권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십시오. "내가 갚겠다"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이 정리된 다음에 하는 일이 아니라, 감정이 정리되기 전에 내리는 결단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12:19) 하신 하나님께, 그 사건과 그 사람에 대한 판결을 맡기는 것입니다. 억울함이 밀려올 때마다 이 이양을 다시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한 번 맡겼다가 도로 가져오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시 맡기십시오. 맡기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이 곧 훈련입니다.
 
셋째, 저주 대신 축복을 선택하십시오. 보복의 고리는 대개 말에서부터 이어집니다. 그 사람에 대해 험담하고 싶을 때, 마음속으로 그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말이 맴돌 때, 의지적으로 반대의 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눅6:28). 축복한다는 것은 그의 잘못을 잘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이 임하기를, 특히 그가 돌이키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말의 영역에서 먼저 보복을 끊으면, 마음의 영역이 따라올 자리가 생깁니다.
 
넷째,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원수 사랑의 가장 은밀하고 가장 강력한 실천입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상대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그 사람을 내 손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옮겨 드리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어떤 사람을 계속 미워하면서 동시에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하기는 어렵습니다. 기도가 미움을 밀어내든지, 미움이 기도를 그치게 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움과의 싸움에서 기도를 무기로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한 문장이어도 좋습니다. "하나님, 그 사람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섯째, 가능하다면 선을 행하십시오. 원수 사랑은 "해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선대하라"(눅6:27)는 적극적 방향까지 나아갑니다. 물론 모든 관계에서 즉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회가 왔을 때 —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이 필요할 때, 혹은 그저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 작은 선이라도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롬12:21) 길의 한 걸음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상대를 위한 일이기 이전에, 내가 악에게 지지 않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여섯째, 필요한 경계는 세우십시오. 앞에서 살핀 대로, 사랑과 용서는 신뢰나 무조건적 관계 회복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17:3)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죄를 죄라고 말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며, 도덕적 판단 능력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폭력, 학대, 지속적인 악, 범죄 앞에서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경계를 세우고, 피해자를 보호하고, 필요하다면 공적 권위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오히려 상대의 참된 선을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죄를 계속 지을 수 있도록 방치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회개하지 않는 원수에게도 복수심을 내려놓고 그의 선을 구하며, 언제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으로 용서를 준비하는 것과, 상대가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여 관계가 실제로 화해되는 것, 그리고 깨어진 신뢰가 상대의 변화 위에서 시간을 두고 회복되는 것은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별을 잃으면 용서가 두려워지고, 두려우면 용서를 미루게 됩니다.
 
일곱째, 실패했다면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십시오. 이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합니다. 질문하신 분은 "같이 맞서 싸우고 나서 후회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참으려 했는데 폭발하고, 축복하려 했는데 쏘아붙이고, 기도하려 했는데 미움을 곱씹은 날들이 있습니다. 그런 날 저녁, 우리를 찾아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봐라, 너는 역시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야. 너는 이 말씀과 상관없는 사람이야." 그 목소리를 따라 절망으로 끝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실패의 자리야말로 복음이 가장 크게 들리는 자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롬5:10), 원수 사랑에 실패한 오늘의 나를 그분이 버리시겠습니까. 회개하고, 용서받고, 필요하다면 상대에게도 내 잘못된 반응을 사과하고, 다시 축복하고, 다시 기도하고, 다시 선을 행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 — 넘어짐 없이 완주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다시 걷는 것이 성화의 길입니다. 원수 사랑은 단번에 통과하는 시험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아버지를 닮아가는 걸음입니다.
 
 
 

19. 맺음말 — 원수 앞에서 드러나는 것

마지막으로 오해를 막기 위해, 이 글이 말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화가 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면 언제나 관계가 회복된다는 보장도 아닙니다. 용서했으면 무조건 다시 신뢰해야 한다는 뜻도, 다른 뺨을 대라는 것이 폭력을 계속 참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공적 정의나 법적 보호를 구하면 안 된다는 뜻도 아니고, 원수 사랑이 "좋게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식의 긍정적 사고인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에게도 좋은 면이 있으니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랑의 근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의 사랑스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만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의 자녀인가도 드러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는 말씀은, 원수 앞에 선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누구를 닮았는지가 나타나는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아버지 — 그 아버지의 자녀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비추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나는 이제 원수를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자신감은 첫 번째 시험에서 무너집니다. 우리의 소망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원수였던 나를 사랑하셨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으며, 십자가에서 욕을 당하시고도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신 그리스도 — 그분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원수 사랑을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사랑을 몸소 이루셨고, 우리를 자기 은혜 안에 두셨으며, 이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그 사랑의 열매를 맺어 가십니다. 성령의 열매의 첫자리에 사랑이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갈5:22–23). 원수 사랑은 결국,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뜻하시고, 아들이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맺어 가시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그 사람을 다시 만나거든, 그리고 또 실패하거든, 절망 대신 십자가로 돌아가십시오. 거기서 다시 용서받고, 다시 일어나, 다시 축복하고, 다시 기도하고, 다시 선을 행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렇게 한 걸음씩, 우리는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닮은 자녀로 자라 갑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대인배가 되는 일이 아니라, 원수였던 나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자녀답게 되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5–36)

 
 
 
 

각주

*1-1. 디다케》1장은 “생명의 길”을 설명하면서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이어 다른 뺨을 돌려대라는 말씀까지 배치한다. 따라서 초기 교회의 교리교육적 성격을 지닌 이 문서에서 원수 사랑은 주변적인 고급 영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삶의 길 가운데 놓여 있다. 다만 이를 모든 교회의 정형화된 ‘입교 첫 수업’이었다고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다.
원문/영역: https://www.newadvent.org/fathers/0714.htm
다른 영역본: https://www.earlychristianwritings.com/text/didache-roberts.html
 
*1-2. 유스티누스는 《제1변증서》 14장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서로 미워하고 죽이며 다른 민족과 함께 살려 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에는 그들과 함께 살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자신들을 부당하게 미워하는 자들을 선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설득하려 한다고 증언한다. 이어 마 5:44–46과 눅 6:28의 원수 사랑 가르침을 직접 제시한다. 이는 원수 사랑을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을 보여주는 변증적 증거로 사용한 사례다.
원문/영역: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26.htm
확인 위치: First Apology, ch. 14
 
*1-3. 터툴리안은 《변증서》 31장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박해자를 위해 복을 구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고 말하며, 37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이 해를 입어도 보복해서는 안 된다고 논증한다. 그는 실제 박해와 군중 폭력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집단적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독교 변증의 한 근거로 제시한다.
원문/영역: https://www.newadvent.org/fathers/0301.htm
CCEL 37장 직접 링크: https://ccel.org/ccel/tertullian/apology/anf03.iv.iii.xxxvii.html
 
*2-1. 칼빈, 원수 사랑과 율법; 칼빈은 마5:43–48/눅6:27–36 주석에서 예수께서 새로운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친구나 자격 있는 사람으로 제한한 서기관들의 왜곡을 교정하신다고 본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자격 없는 자, 악한 자, 배은망덕한 자”에게까지 미치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사적 복수의 포기와 선행으로 이어진다. 또한 원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자녀 됨의 열매로 이해한다.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t 5:43–48; Lk 6:27–36.
온라인: https://ccel.org/ccel/calvin/calcom31.ix.li.html
 
*2-2. 칼빈, 하나님의 형상과 원수 사랑; 칼빈은 《기독교강요》 III.7.6에서 선행의 기준을 상대방의 공로나 자격에 두지 말고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라고 한다. 심지어 상대가 해악을 끼쳤더라도 그것이 사랑과 선행의 의무를 없애는 이유가 되지 않으며, 여기서 원수를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갚는 데까지 나아간다. 따라서 본문의 “상대의 악함이 내가 악해질 허가증이 되지는 않는다”는 표현은 칼빈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그 논지를 현대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온라인: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v.viii.html
 
*2-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계명과 원수 사랑;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0주일 105–107문은 제6계명을 단순한 살인 금지에 그치지 않고 시기·증오·분노·복수심을 금하며,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인내·화평·온유·자비·친절을 베풀며 “원수에게까지도 선을 행”하도록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무모하게 위험에 빠뜨리지 말 것과 공적 권세의 역할도 함께 인정한다.
영어: https://www.rca.org/about/theology/creeds-and-confessions/the-heidelberg-catechism/
한국어: https://network.crcna.org/sites/default/files/Heidelberg%20Catechism%20Korean%20tr-2012.pdf
 
*2-4.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선행·방어·공적 정의;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35–136문은 제6계명 아래에서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을 보존하고, 폭력에 대한 정당한 방어와 무죄한 자의 보호를 요구하는 동시에, 해를 인내하고 용서하며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을 명한다. 반대로 죄악된 분노·증오·복수욕은 금지하면서 공적 정의와 필요한 방어는 구별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원수 사랑과 자기보호·피해자 보호·공적 정의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본문·성구: https://westminsterstandards.org/westminster-larger-catechism/
OPC 교차확인: https://opc.org/lc.html
 
*3. 칼빈, 선한 사마리아인과 이웃의 범위; 칼빈은 눅10:25–37 주석에서 이웃의 범위를 친구나 친척으로 제한할 수 없으며 “가장 낯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웃됨이 온 인류에 미친다고 보면서도, 이 비유 자체를 곧바로 ‘개인적 원수 사랑의 비유’로 등치하지 않는다. 눅6의 원수 사랑과 눅10의 이웃 사랑은 직접 맥락은 다르지만, 사랑의 대상을 인간이 자의적으로 좁힐 수 없다는 점에서 강하게 공명한다.
온라인: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3.ii.vii.html
 
 
 
 
 
AI 활용 안내 — 이 글의 문제의식과 중심 논지, 신학적 판단, 자료의 채택과 최종 문장은 필자에게 있다. 작성 과정에서는 생성형 AI를 연구와 편집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였다.
ChatGPT 5.6은 사전 조사와 쟁점의 구조화에, Claude Fable/Opus 5은 초고의 표현 및 참고문헌·각주 형식의 정돈에, Perplexity Pro는 관련 논문과 온라인 원문 자료의 탐색에 사용하였다.
AI가 제시한 내용은 그 자체를 권위 있는 출처로 삼지 않았으며, 접근 가능한 성경 원문, 교부 문헌, 신경과 공의회 문서, 공식 교리서 및 개혁파 신앙고백 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다시 대조하였다. 자료의 해석과 남아 있을 수 있는 오류를 포함한 글의 최종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본편 「하나님이 행하시고, 사람이 믿는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예정론을 성경 전체로 다시 읽기,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 Dei)에 관한 하나의 연구가설」을 짧게 줄인 글입니다. 원문의 각주와 원어 분석, 증거본문 대조표는 본편에 있습니다.

 

 

 

 

 

프롤로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차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두 개의 질문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는 '예정된 자들'이라는 표현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표현보다 어딘지 배타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백서가 예정에서 선택으로, 중생으로, 믿음으로, 회개로, 견인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면, 우리 구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은 무엇이며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질문은 무지나 불신앙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백서를 성실하게 따라온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무엇보다 성경 자체가 이런 반문을 예상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자마자 스스로 묻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9:14),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9:19). 그는 그 반문을 지우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 글은 고백서를 변호하지도 공격하지도 않습니다. 두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 성경 본문과 교회 역사와 고백서 자체를 다시 펼쳐 놓고 대조해 볼 뿐입니다.

 

읽기 전에 알아 두실 표시가 있습니다. 이 글은 【A. 본문】(성경이 직접 말하는 것), 【B. 추론】(여러 본문을 종합할 때 강하게 추론되는 것), 【C. 구성】(후대 신학이 체계화하며 제안한 설명)을 계속 구별합니다. 이 셋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이 글이 바라는 가장 실용적인 열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의 물음을 내려놓습니다. 이 모든 주권적 은혜의 밑바닥에 놓인 것은 추상적인 '절대 의지'가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 아닐까 하는 물음입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결론이 아니라 연구가설입니다.

 

축약본

하나, 두 종류의 '배타성'

"배타적이다"라는 말에는 두 층위가 포개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론적 배타성 — 구원의 길이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것(요14:6, 행4:12). 그런데 이 배타성은 언제나 열린 문과 함께 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길은 하나지만 초청은 모두를 향합니다.

 

예정론적 특수성 — 왜 어떤 사람은 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아닌가. 이것은 다른 질문입니다. 앞의 것은 구원의 을, 뒤의 것은 왜 어떤 사람만 그 길에 들어서게 되는가를 묻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은 첫 번째 질문의 답이지 두 번째 질문의 답이 아닙니다.

 

둘, 성경은 두 가지를 함께 말한다

우리 직관은 하나님과 인간을 시소의 양 끝에 놓습니다.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내려가야 한다고요. 그런데 성경은 그 시소를 쓰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장. "너희 구원을 이루라"(명령). 그리고 곧바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이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은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 모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면 내가 할 필요 없다"로 흐르지만, 바울의 접속사는 "왜냐하면"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 너희가 이루라.

 

신명기. "여호와께서 네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 사랑하게 하실 것이며"(30:6). 그런데 같은 책에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10:16), "생명을 택하라"(30:19)도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내가 주겠다, 내가 제거하겠다 — 결과는 "너희가 지켜 행할지라". 하나님의 행하심의 종착점이 인간의 실제 행함입니다.

 

마태복음 11장. 숨기시고 나타내시는 아버지의 뜻(25–26절) 바로 다음에 "다 내게로 오라"(28절). 두 절 거리입니다.

성경은 조정하지 못해서 둘 다 남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인간관 자체가 둘을 경쟁으로 보지 않습니다.

 

셋, 왜 같은 성경에서 다른 신학이 나오는가

같은 문장을 읽어도 무엇을 먼저 보는지가 다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과하며 읽고, 루터는 죄책과 율법을 안고 읽고,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공의와 복음의 보편적 선포를 물으며 읽습니다. 본문은 같아도 질문이 다릅니다. 질문이 달라지면 눈에 들어오는 구절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이레나이우스가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 것은 인간을 본성으로 나누던 영지주의와 싸웠기 때문이고, 후기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의 시작 자체가 선물"이라고 한 것은 펠라기우스와 싸웠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를 반박한다기보다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개혁주의 자신에게도 아픈 질문이 돌아옵니다. 개혁주의자도 개혁주의 전통을 통해 성경을 읽습니다. 렌즈가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렌즈가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은 "전통 없이 읽는다"가 아니라 "성경으로 전통을 계속 교정한다"입니다.

 

덧붙여, 알미니안주의를 "인간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시작한다"로 요약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1610년 항론파 신조 제3조는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선한 것을 원할 수 없으며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진짜 쟁점은 은혜의 필요가 아니라, 그 은혜가 효력이 있는가·저항 가능한가, 그리고 최종적 차이를 무엇이 설명하는가입니다.

 

넷, 고백서를 펼쳐 놓고 대조하면

3장 1절. 예정론은 첫 문장부터 단서를 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작정하시지만 "피조물의 의지에 폭력이 가해지는 것도 아니며" 제2원인의 자유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WCF의 예정은 강제가 아닙니다.

 

9장. 고백서에는 「자유의지에 관하여」라는 장이 따로 있습니다. 인간은 로봇도 아바타도 아닙니다. 다만 타락한 인간은 영적 선을 향한 능력을 잃었습니다. 의지가 없는 것과 의지가 영적으로 무능한 것은 다릅니다. 불신자는 믿고 싶은데 막힌 사람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책임도 실제입니다.

 

10장 1절. 하나님이 마음을 밝히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리스도께 효력 있게 이끄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극히 자유롭게 나아오니,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본문은 겔 36:26, 신 30:6, 빌 2:13, 요 6:44–45 — 우리가 위에서 읽은 바로 그 본문들입니다. 여기서 핵심 구별이 나옵니다.

"구원의 근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다." — 참입니다.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는 무의미하다." — 거짓입니다.

 

다만 정직하게 말하면 WCF는 실제로 배타적입니다. 그러므로 "배타적으로 느껴진다"는 반응은 오해에서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왜 저 사람은 아닌가"에 고백서는 부분적으로만 답하며, 3장 8절은 이 교리를 특별한 신중함으로 다루라고 명합니다. 사실상 그 비밀을 안다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섯, 로마서 9장에서 멈추지 말 것

WCF 예정론의 상당 부분은 로마서 9장 독해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9장은 홀로 서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논증은 이렇게 흐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통곡 →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 → 그런데 그들이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했다(9:32) → 바울이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0:1) → "누구든지"(10:13) → "순종하지 아니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10:21) → 불신앙으로 꺾이고 믿음으로 선다(11:20) →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 다시 접붙임을 받는다(11:23) → 모두를 불순종 아래 가두심은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11:32) → 송영.

 

WCF 3장의 증거본문을 이 위에 칠해 보면 선택과 유기의 색은 9장에 몰려 있고, 9장 30절부터 10장 21절까지가 비어 있습니다. 11장 23절도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에 있죠?"라는 불편함의 상당 부분은 성경에 그 언어가 없어서가 아니라 조직신학적 재배열이 만드는 효과입니다.

 

다만 공정하게 볼 반전이 있습니다. 3장 8절의 증거본문에는 11장 20절 —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 이 함께 있습니다. 총회는 두 언어를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같은 비중을 부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대조는 고백서 자신의 원칙으로 수행됩니다. WCF 1장 9절은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라 하고, 31장 3절은 모든 공의회가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9:18만 읽지 말고 10:21도 읽으라. 9:22만 읽지 말고 11:23도 읽으라.

여섯, 바로의 마음 — 토라도 그렇게 말한다

두 행위 주체는 바울의 발명이 아닙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먼저 예고하십니다.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4:21). 그런데 실제 사건에서는 "바로가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8:15, 8:32)가 나오고, 9장 12절에서 처음으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가 나옵니다. 그리고 같은 장 34절에 "바로가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가 있습니다. 내레이터는 12절 때문에 34절에서 죄책을 물을 수 없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토라는 둘 사이의 철학적 접합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둘 다 말하고, 바로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바울도 똑같습니다.

일곱, 은혜는 강제인가 회복인가

"하나님이 주권자니까"만 반복하면 하나님의 의지를 그분의 본성에서 분리하게 됩니다. 칼빈 자신이 이 오해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법 없는 분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법이십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시119:68).

 

그렇다면 효력적 은혜의 그림도 달라집니다. 그것은 "싫습니다" 하는 사람을 강제로 믿게 만드는 힘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렸듯, 아버지의 이끄심은 밧줄로 끌고 가는 폭력이 아니라 마음이 그리스도를 기뻐하도록 이끄는 방식입니다. 은혜는 의지를 꺾기 전에 의지를 고칩니다. 신명기 30장 6절에서 마음의 할례의 목적은 "사랑하게 하사"입니다. 효력적 은혜의 종착점은 굴복이 아니라 사랑입니다【B. 추론】.

 

다만 경계선을 긋습니다. '회복'의 언어가 예정론을 물에 타는 데 쓰여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9장의 완악하게 하심은 여전히 본문에 있습니다.

여덟, 하나의 연구가설

여기서부터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불링거의 《De testamento》(1534)를 연구하며 자라난 연구가설이고, 층위로는 【C. 구성】입니다.

 

불링거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낮추어 언약을 맺으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본성인 순전한 선하심"에서 나온 일이라고 말합니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 10장도 선택이 값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목회적 규칙을 덧붙입니다 —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한 소망을 가지고, 아무도 경솔히 유기된 자로 단정하지 말라.

 

연구 질문은 이것입니다. 불링거에게 bonitas Dei는 여러 속성 중 하나인가, 아니면 언약과 선택과 인간의 응답까지 연결하는 더 근원적인 축인가?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불링거가 이것을 자기 신학의 공식 중심으로 선언했다"와 "그의 교리들을 추적하면 이것이 심층 논리로 반복 작동한다"는 다른 주장입니다. 전자를 지지할 증거는 없습니다. 검증하려는 것은 후자입니다. 작업가설은 이렇습니다.

"언약은 불링거 신학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취하는 관계적 형식이다."【C. 연구가설】

 

그리고 반증 조건도 함께 세웁니다. 선하심이 언약론에서만 중요하고 선택론에서는 주변적이라면, 선택의 근거를 선하심과 무관한 절대 의지에 두는 본문이 발견된다면 — 이 가설은 약해져야 합니다.

 

아홉, 가장 어려운 반론

피하지 않겠다고 한 질문 앞에 섭니다. 선하심을 앞세우면 질문은 오히려 날카로워집니다. 선하신 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왜 모두에게 하지 않으시는가.

 

성경이 명시하는 것【A】 — 하나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겔33:11),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딤전 2:4), 멸망하는 자는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습니다(요3:19).

 

개혁파가 추론하는 것【B/C】 — 아무도 받아 마땅한 것보다 나쁜 것을 받지 않고, 아무도 자격이 있어서 은혜를 받지 않습니다. 은혜는 빚이 아니므로 모두에게 주지 않으신다고 불의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별적인 '왜'에는 여전히 답하지 않습니다.

 

신비로 남는 것 — 바로 그 개별적 '왜'입니다. 성경도 고백서도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이 율법의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29:29). 신비는 우리를 사변이 아니라 순종으로 돌려보냅니다.

 

다만 신비의 자리는 논증의 앞이 아니라 끝입니다. 그리고 불링거 가설도 이 신비를 해소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하는 일은 다릅니다. 신비의 성격을 바꿉니다. 성품을 알 수 없는 권력 앞에서 묻는 것과, 온종일 손을 벌리시는 분의 선하심 앞에서 묻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전자의 신비는 공포이고, 후자의 신비는 깊이입니다.

 

열, 결론

"예정된 자들이라고 하면 배타적으로 느껴진다." 그 느낌은 오해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특수성은 성품 없는 권력의 명단 작성이 아닙니다. 성경의 선택은 선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하시려고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도 유기된 자로 단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 교리의 용도는 정반대입니다 — 믿는 자에게는 위로가 되고, 아직 믿지 않는 자를 향해서는 "하나님께는 그를 접붙이실 능력이 있다"는 소망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이 무엇인가." 구원의 근거로 말하면 —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입니다. 내 구원이 내 의지의 성능에 달렸다면 나는 하루도 확신 속에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으로 말하면 — 전부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내 대신 믿어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믿고, 내가 회개하고, 내가 사랑합니다. 다만 내가 그렇게 기꺼이 원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의지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 "내가 믿은 것인가, 하나님이 믿게 하신 것인가?"

 

원인과 응답을 구별해서 말하면 둘 다입니다. 그리고 그 순서가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먼저 믿게 하셨기 때문에, 정말로 내가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은혜로 주어졌고(빌1:29), 루디아가 정말로 듣고 따랐지만 그 마음을 여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행16:14).

 

이 글을 읽고 "이제 모든 문제가 풀렸다"고 느끼신다면 제가 글을 잘못 쓴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실제 응답을 얼마나 풍성하게, 얼마나 두려움 없이 함께 말하는지를 조금 더 보게 되셨기를. 그리고 그 풍성함 앞에서 바울이 도달했던 자리에 우리도 함께 서기를. 그 자리는 대답의 포기가 아닙니다. 물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물은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경배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11:33, 36)

말씀의 섭취 3부작 ㅡ 프롤로그와 축약본

  1. 「이 말씀을 먹으라!」
  2.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
  3. 「먹지 말라, 먹으라」

 

 

 

이 세 편의 글은 처음부터 3부작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했는데, 그 질문이 스스로 다음 질문을 불러왔고, 그렇게 세 번을 걸어오게 되었다. 그러니 이 프롤로그는 세 글의 내용을 다시 요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걸음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까지 갔는지를 짧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글 「이 말씀을 먹으라!」의 질문은 단순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고, 예레미야가 말씀을 얻어 먹고,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먹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신다. 성경 안에서 말씀은 반복해서 양식이 되고, 그 양식은 먹는 자에게로 들어가 그를 살린다. 그 흐름을 따라가 보니 말씀·양식·먹음·그리스도·연합·거함·성장·열매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첫 글은 말씀을 먹는다는 것을 지식을 쌓는 일이나 성경 읽는 기술로 좁히지 않고, 성령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 그분 안에 거하고 그 생명에 참여하며 그 말씀에 의해 빚어지는 삶으로 설명했다.

 

두 번째 글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는 첫 글을 넓히려고 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첫 글을 다시 의심하려고 쓴 글이었다. 교부들과 루터와 칼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의 원문과 초기 판본을 다시 펼쳐 놓고 물었다. 내가 처음 글에서 너무 멀리 나간 것은 없는가.

 

대답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어떤 문장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어떤 문장은 강도를 낮추어야 했다. 그리고 어떤 문장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한 역사적 근거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선이 분명해졌다. 본문을 직접 주해한 것과 신학적으로 공명하는 것은 다르다.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는 관계는 함부로 만들어 낼 수 없다. 교부를 개혁파 신학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신앙고백의 본문과 후대에 덧붙은 증거 구절은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먹음은 곧 믿음이다"라는 깔끔한 등식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 실제로 그분과 연합하고 그 생명에 참여한다는 더 두터운 구조가 원전에서 확인되었다. 교부와 종교개혁자들은 이 글의 결론을 승인해 주는 권위가 아니었다. 같은 본문 앞에서 먼저 씨름했던 선배들이었고, 그래서 이따금 나를 교정했다.

 

세 번째 글 「먹지 말라, 먹으라」는 첫 글에 '먹음 본문'을 몇 개 더 얹은 글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의 질문을 더 아래로 밀고 내려갔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서 누가 정하는가로, 그리고 누가 주는가로. 결국 이런 질문이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취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존재인가.

 

그래서 세 번째 글의 축은 취함과 받음이다.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자기 판단으로 취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 먹었다. 광야의 그리스도는 굶주림 속에서도 아버지의 말씀 아래 머무르셨다. 요한복음 6장에서 아버지께서는 마침내 생명의 떡을 주신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자기 오래된 기준으로 거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주어진 두루마리를 받아 먹고 다시 예언하러 나간다. 다만 이 본문들이 모두 같은 뜻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각 본문은 저마다의 문맥과 신학적 기능을 가진다. 여기서 한 일은 '먹음'이라는 단어 하나로 그것들을 묶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본문들 속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의 긴장, 곧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자기 판단 사이의 긴장을 정경 전체에 걸쳐 관찰한 것이다.

 

그러니 세 글의 관계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1부는 발견이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 안에서 찾았다. 2부는 검증이었다. 교회가 실제 원전 속에서 어디까지 그렇게 말해 왔는지를 물었다. 3부는 심화였다. 먹고 먹지 않는 행위 뒤에 어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놓여 있는지를 물었다.

 

이것을 새로운 학설이라거나 독창적인 신학 체계라고 부를 생각은 없다. 먹음과 양식, 연합과 순종은 오랜 연구사를 가진 주제이고, 교부와 종교개혁자들에게 이미 충분한 재료가 있었다. 여기서 한 일을 정확히 말하자면, 익숙한 성경적·역사신학적 재료들을 하나의 일관된 질문 아래 배열하고, 원전으로 검증하고, 다시 정경 전체로 돌아가 확장한 하나의 연구 궤적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세 글을 다 쓰고 나서 보니, 이 글들을 관통하는 진짜 중심은 '먹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먼저 주시며, 사람은 그 말씀을 자기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대신 믿음으로 받아 그 안에서 살도록 부름받는다.

 

복음의 순서도 언제나 같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 성령께서 믿게 하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받는다. 그리고 그 받은 생명이 우리를 거하게 하고,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한다.

 

처음의 질문은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그러나 세 글을 지나며 질문은 조금 달라졌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결국 어떤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가의 문제였다. 스스로 판단하여 취하는 인간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는 인간인가.

 

그래서 이 세 글의 중심에는 먹음보다 더 깊은 한 가지 고백이 남는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축약본

1부는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찾았고, 2부는 교회가 어디까지 그렇게 말해 왔는지 원전으로 검증했으며, 3부는 먹고 먹지 않는 행위 뒤에 어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1부 — 이 말씀을 먹으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실 때 설교문을 건네지 않으셨습니다. 읽으라고도, 외우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겔2:8). 말씀이 양식이라는 것은 비유적 장식이 아닙니다. 광야의 만나는 저장할 수 없었고 매일 아침 받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십 년 동안 자기 생존이 자기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 달려 있음을 몸으로 배웠습니다(신8:3). 에스겔이 받은 명령에는 순서가 있고, 그 순서가 곧 신학입니다.

 

받음 → 먹음 → 내면화 → 마음으로 받음 → 가서 말함

 

"가서 말하라"가 먹은 다음에 옵니다. 선지자는 우편배달부가 아니라, 전할 말씀을 먼저 자기 안에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먹는가. 묵상입니다. 읽고, 되새기고, 맛보고, 그 말씀으로 기도하고, 순종하고, 그렇게 말씀에 의해 빚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묵상은 기술이 아닙니다. 성경을 펴는 것은 우리가 하지만 믿음을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말씀에는 단맛만 있지 않습니다. 늘 단 것만 찾는 독서는 성경책을 들고 있어도 말씀을 먹는 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마침내 그 말씀이 한 인격으로 오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먹음"을 "믿음"이라는 한 단어로 바꿔치기하면,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만큼 거칠었던 그 언어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진술은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먹음의 언어가 곧 거함의 언어로 넘어갑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6:56). 소유가 아니라 상호 내주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그 거함이 포도나무와 가지로 펼쳐집니다. 가지는 열매를 만들지 않습니다. 붙어 있을 뿐이고, 열매는 그 결과입니다.

 

말씀 → 그리스도 → 믿음 → 연합 → 거함 → 성장 → 분별 → 열매 → 증언

 

 

2부 —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

1부의 각주 밑에 남겨 둔 숙제를 실제로 해 본 기록입니다. 이미 정한 결론을 증명하는 절차가 아니라, 이미 써 놓은 문장을 원전 앞에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결과는 "다 맞았다"가 아니었습니다.

 

낮추어야 했던 것. 이레네우스의 그 대목은 요한복음 6장의 주석이 아닙니다. 공명이라고 해야 합니다. 크리소스톰은 개혁파의 선구자가 아니라 성찬 앞에서 떨라고 권하는 4세기 동방의 설교자입니다. 하이델베르크 1563년 초판 여백에 요 15:1–6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문장들을 내려놓고 나서야 그 사람들이 실제로 한 말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의 증거본문 하나를 포기하고 나니, 76문 본문 자체가 이미 믿음과 죄 사함과 영생과 성령과 "점점 더 깊어지는 연합"을 다 말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적 주장은 좁아졌는데 신학적 논증은 오히려 견고해졌습니다.

 

더 강해진 것.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는 26논고가 아니라 25논고 12절이었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강해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이어 26논고에서 먹음이 거함으로 정의되고, 27논고에서 먹었다는 표지가 지금도 거하는가에 놓입니다. 루터는 바이마르판에서 훨씬 단호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성례에 관해 한 음절도 말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가 곧이어 인용한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문장이었습니다. 칼빈은 한 걸음 더 정밀합니다. 그는 "먹는 것은 곧 믿는 것"이라는 정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먹음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는 것입니다. "말의 차이는 작지만 실제의 차이는 작지 않다." 1부가 조심스럽게 피해 갔던 함정을 그는 이미 16세기에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주 하나도 신학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말했다"고만 쓰면 독자에게는 믿거나 믿지 않거나 두 선택지뿐입니다. 위치를 밝히는 순간 세 번째가 생깁니다. 직접 확인하는 것. 반박 가능한 글만이 신뢰할 수 있는 글입니다.

검증의 원리도 결국 같았습니다. 자료가 연구자의 말을 제한했고, 그 제한이 선물이었습니다.

 

 

3부 — 먹지 말라, 먹으라

질문이 더 아래로 내려갑니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서 누가 정하는가, 누가 주는가로. 에덴의 첫 명령은 금지가 아니라 허락으로 시작합니다.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하나님은 아담을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나무를 봅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취합니다. 문제는 배고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기 판단을 최종 판단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정확히 짚었습니다. 그 열매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금지되었기 때문에 문제였다고. 금지된 것이 그토록 사소했기 때문에, 순종할 이유는 하나만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에덴 금지된 것을 스스로 취함
에스겔 주시는 말씀을 받아 먹음
광야의 그리스도 말씀 밖에서 떡 취하기를 거절함
요한복음 6장 아버지께서 생명의 떡을 주심
사도행전 10장 깨끗하게 하신 것을 거부하지 않음
요한계시록 10장 주시는 계시를 받아 먹고 다시 전함

 

특히 베드로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는 자랑이 아니라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는 하나님의 뜻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충실함이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환상의 과녁은 식탁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행10:28). 에덴에서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인간이 허용하려 했고, 욥바에서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인간이 금지하려 했습니다. 방향은 정반대인데 뿌리는 닮았습니다. 한쪽은 욕망의 언어로, 다른 쪽은 경건의 언어로 말했지만 두 문장 모두 주어가 "내가"였습니다.

 

죄는 방종의 얼굴로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제까지 옳았던 경건의 얼굴로 옵니다. 다만 이 본문들을 하나로 눌러 붙이지는 않습니다. 열매와 두루마리와 떡과 짐승은 동일한 사물도, 동일한 기능도 아닙니다. 여기서 관찰한 것은 숨겨진 암호가 아니라, 서로 다른 본문들 가운데 반복되는 하나의 긴장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금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며, 인간은 자기 판단을 그 말씀 아래 두도록 부름받는다는 것. 그리고 "받는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에스겔은 입을 벌렸고 갔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문지방을 넘었습니다. 이것은 능동 대 수동이 아니라 누가 시작하는가의 대비입니다.

 

 

맺으며

"그러니 잘 순종하자"로 끝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내가"가 주어가 됩니다. 복음의 순서는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주시고, 아들을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 되시고, 성령께서 믿게 하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받고, 그 받은 생명이 우리를 순종하게 합니다. 생명의 떡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도, 빼앗은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입니다. 

 

처음의 질문은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러나 세 글을 지나며 질문은 달라졌습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결국 어떤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가의 문제였습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세 편의 긴 글을 한자리에서 읽을 수 있도록 줄인 것입니다. 원문의 논증 과정과 각주는 각 편의 본글에 있습니다.

 

 

에덴에서 베드로의 환상까지, 성경의 '먹음'과 순종 — 취하지 말고 받으라

 

 

 

 

들어가며 — 왜 성경에는 "먹으라"와 "먹지 말라"가 반복되는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상하리만큼 자주 마주치게 되는 명령이 하나 있다. "먹으라." 그리고 그 반대편에 늘 함께 서 있는 명령. "먹지 말라."

 

이 명령들은 아무 데서나 나오지 않는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결정되는 자리, 한 사람의 소명이 시작되는 자리, 교회의 문이 새롭게 열리는 자리에서 나온다. 에덴 동산 한복판에서, 바벨론 강가의 젊은 제사장에게, 사십 일을 굶주리신 그리스도의 광야에서, 갈릴리 회당의 강론에서, 욥바의 지붕 위에서, 그리고 밧모 섬의 환상 가운데서.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든다. "성경에 무슨 숨겨진 '먹음의 암호' 같은 것이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보론이 가장 경계하려는 것이 바로 그 유혹이다.

 

창세기 3장의 열매와 에스겔 3장의 두루마리와 마태복음 4장의 떡과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떡과 사도행전 10장의 짐승과 요한계시록 10장의 작은 두루마리는 같은 사물이 아니다. 같은 신학적 기능을 갖지도 않는다. 이것들을 "먹다"라는 동사 하나로 꿰어 하나의 도식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것은 성경신학이 아니라 말장난이 된다.

 

그러나 각 본문의 직접적인 의미를 충분히 존중하며 하나씩 읽어 나간 뒤에 그것들을 나란히 놓아 보면,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정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신학적 긴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 긴장은 이것이다.

먹는가 먹지 않는가 자체가 핵심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셨고 무엇을 금하셨으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앞세우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자기 판단을 두는가가 핵심이다.

 

그래서 이 보론의 중심 명제는 이렇게 정리된다.

성경에서 순종은 언제나 "먹는 것"이나 "먹지 않는 것" 자체에 있지 않다. 어떤 때에는 먹지 않는 것이 순종이고, 어떤 때에는 받아 먹는 것이 순종이며,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자기 기준으로 거부하지 않는 것이 순종이다.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판단을 앞세우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이 명제를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이 보론 전체를 떠받치는 하나의 대비에 이르게 된다.

 

자기 판단으로 취함 vs.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음

 

에덴의 손은 금하신 것을 스스로 취했고, 에스겔의 입은 주시는 것을 받아 먹었다. 광야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말씀 밖에서 떡을 취하기를 거절하셨고, 요한복음 6장에서 아버지께서는 친히 참 떡을 주신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자기 기준으로 거부하려다 제지당했고, 요한은 주어진 두루마리를 받아 먹고 다시 예언하러 나간다.

취함과 받음. 이것이 이 글의 축이다. 이제 하나씩 걸어 들어가 보자.


Ⅰ. 에덴 — 먹지 말라

성경의 첫 번째 "먹음" 명령은 금지가 아니라 허락으로 시작한다. 이 순서를 놓치면 창세기 2–3장 전체를 오해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17)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먹지 말라"가 아니라 "임의로 먹되"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굶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정반대다. 동산의 거의 모든 나무를 그의 식탁으로 내어 주셨다. "임의로"라는 말은 인색함의 언어가 아니라 넉넉함의 언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한 그루만 허락하고 나머지를 금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무를 주시고 단 한 그루에만 경계를 두셨다.

 

그러므로 선악과 명령을 금욕주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인간의 즐거움을 시기하셨다거나, 물질과 육체를 억누르는 것이 경건이라거나, 지식 자체가 위험한 것이라는 식의 해석은 이 본문이 말하려는 바와 정반대에 있다. 본문의 무게중심은 풍성함 가운데 놓인 하나의 경계에 있다. 그렇다면 그 하나의 경계는 왜 있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서라는 문제에 이른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자리는 인간의 자리가 아니다. 인간은 창조주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살아가도록 지어진 존재다. 동산 한가운데 서 있던 그 나무는, 인간이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니며 "나는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다"라는 사실을 몸으로 고백하게 하는 자리였다. 곧 그 명령의 핵심은 다음 네 가지다.

  •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
  • 피조물에게 주어진 경계
  •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서
  •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순종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이 순서가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지는 과정이 놀랍도록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6)

 

이 짧은 한 절 안에 죄의 해부도가 들어 있다. 순서를 따라가 보자.

 

하나님의 말씀 — "먹지 말라"는 분명한 말씀이 먼저 있었다.

 

뱀의 왜곡 —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뱀은 하나님의 넉넉함을 인색함으로 뒤집는다. 이어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인간의 자기 판단 — 이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나무를 "본다". 먹음직하다는 판단, 보암직하다는 판단,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판단. 이 세 가지는 모두 하와 자신의 감각과 이성이 내린 평가다.

 

경계의 재평가 —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선이 이제 인간의 검토 대상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스스로 취함 — 그리고 손을 뻗는다. "따먹고." 히브리어 본문의 동사 결합은 문자 그대로 "취하여 먹었다"이다.

 

먹음 → 죽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항목, "스스로 취함"이다. 성경은 하와가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만 기록하지 않는다. 그가 그 열매를 취했다고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먹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신 것에 손을 뻗어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에덴의 죄를 "먹고 싶어 했다"로 요약하는 것은 지나치게 얕은 독법이다. 배고픔이 문제가 아니었다. 동산은 먹을 것으로 가득했다. 문제는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기 판단을 최종 판단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서 있기를 그만두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그것을 심사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자. 그렇다고 해서 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물질이나 음식이 악한 것도 아니다. 나무도 악하지 않았고 열매도 악하지 않았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심히 좋았다고 선언한다. 문제는 사물에 있지 않고 관계에 있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보다 훨씬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이미 아주 분명하게 보았다.

 

 

 

Ⅱ. 교부들이 본 첫 먹음과 불순종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이 창세기 2–3장을 어떻게 읽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다. 왜 중요한가? 우리가 지금 잡고 있는 축—"열매가 아니라 불순종", "먹음이 아니라 자기 판단"—이 21세기에 새로 발명된 창의적 해석이 아니라, 교회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이 본문에서 실제로 읽어 낸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우리의 읽기를 검증해 주고, 동시에 우리가 지나치게 나아가지 않도록 제어해 준다.

2-1.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 죽음을 품고 있던 것은 나무가 아니었다

2세기 후반, 안디옥의 감독 테오필루스는 이교도 친구 아우톨리쿠스를 향해 쓴 변증서에서 선악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1 그의 대화 상대는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 신은 왜 인간에게 지식을 금했는가? 인간이 지혜로워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 아닌가?"

테오필루스의 대답은 단호하다. 그 나무 자체와 그 열매는 선했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쁜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동산에 심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가 남긴 그리스어 문장의 핵심은 이렇다.

οὐ ... θάνατον εἶχεν τὸ ξύλον, ἀλλ' ἡ παρακοή "죽음을 품고 있던 것은 나무가 아니라 불순종이었다."

 

여기서 쓰인 단어 파라코에(παρακοή)는 문자적으로 "곁에서 잘못 들음", 곧 듣기는 들었으나 그 말씀 아래 서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죽음의 원인은 나무의 성분에 있지 않았다. 들은 말씀에 순복하지 않은 데 있었다. 테오필루스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 명령을 통해 인간이 명령에 순종하는지를 보고자 하셨다고 설명한다.

 

이 한 문장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오늘날에도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이 "왜 사과 하나 때문에 인류가 저주를 받는가?"이기 때문이다. 테오필루스의 대답은 2세기의 답이지만 여전히 정확하다. 그것은 사과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씀의 문제였다.

2-2. 이레네우스 — "그들은 불순종하여 먹었다"

리옹의 이레네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먹음과 불순종을 문법적으로 아예 한 문장 안에 묶어 버린다. 『이단 논박』 5권의 고대 라틴어 전승에 남아 있는 문장은 이렇다.2

Simul enim cum esca et mortem adsciverunt, quoniam inobedientes manducabant: inobedientia autem Dei mortem infert. "그들은 음식과 함께 죽음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순종하여 먹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죽음을 가져온다."

 

이 문장의 힘은 inobedientes manducabant, 곧 "불순종하는 자로서 그들은 먹고 있었다"라는 구절에 있다. 이레네우스는 "그들이 먹었고, 그 후에 불순종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먹었고, 그것이 곧 불순종이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쓴 문장 구조에서 불순종은 먹음을 수식하는 상태다. 먹는 그 순간 그들은 이미 불순종의 자리에 서 있었다. 행위와 태도가 하나였다.

 

이레네우스에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 더 큰 그림이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온갖 양식을 풍성히 주시고 오직 한 나무만을 금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인류가 한 나무에서의 불순종으로 잃은 것을 그리스도께서 다른 한 나무—십자가—에서의 순종으로 회복하셨다고 본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재총괄(recapitulatio) 구조다.3

 

다만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이레네우스의 재총괄은 "선악과 = 십자가의 반대편"이라는 기계적 일대일 유형론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나무라는 사물의 대응이 아니라, 인류의 머리로 세워진 첫 사람의 불순종과 새 인류의 머리로 오신 둘째 아담의 순종 사이의 대응에 있다. 나무는 그 순종과 불순종이 드러난 자리였을 뿐이다. 이 구별을 지켜야 이레네우스를 그의 말대로 읽을 수 있다.

2-3. 아우구스티누스 — 금지되었기 때문에 문제였다

우리 보론의 논지를 가장 정면으로 진술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다. 『하나님의 도성』 14권 12장에서 그는 첫 사람의 죄를 "음식에 관한 사소한 잘못"으로 축소해 보려는 시도를 정면으로 거부한다.4 그의 핵심 문장은 이것이다.

non quidem mala nec noxia, nisi quia prohibita "그것 자체가 악하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라, 다만 금지되었기 때문에 문제였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다.

Sed oboedientia commendata est in praecepto "그 명령에서 권고된 것은 순종이었다."

 

이 두 문장을 나란히 놓고 천천히 읽어 보라.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가지를 동시에 부정하고 있다.

 

첫째, 그는 음식 자체의 악함을 부정한다. 열매에는 독이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좋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물질에 대한 혐오나 육체에 대한 경멸의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둘째, 그는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이 사소한 일이었다는 것도 부정한다. 오히려 정반대다. 금지된 것이 그토록 사소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서 시험된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더욱 선명해진다. 만약 하나님께서 살인이나 우상숭배를 금하셨다면, 순종의 동기 안에 "이것은 나쁜 일이니까"라는 인간 자신의 판단이 섞여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금지된 것이 그 자체로는 아무 해가 없는 열매였기 때문에, 순종할 이유는 오직 하나만 남는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라는 더 큰 원리로 나아간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 아래 있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유익이며, 자기 뜻을 창조주의 뜻보다 앞세우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파괴다. 첫 사람이 무너진 지점은 정확히 여기였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보는 것을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것 위에 놓았다.

 

이 세 사람—테오필루스, 이레네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은 놀랍도록 같은 곳을 가리킨다. 열매가 아니라 명령. 음식이 아니라 순종.

그러나 이들을 한 사람으로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 테오필루스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인간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교육적 지혜에 무게를 둔다. 이레네우스는 인류의 머리들과 재총괄이라는 구속사적 구조 안에 이 사건을 배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와 사랑의 방향이 뒤집히는 내면의 드라마를 파고든다. 강조점도 다르고, 신학적 관심사도 다르고, 살았던 시대의 논적도 다르다. 그럼에도 이 셋이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이 독법의 무게를 더해 준다.

 

 

 

Ⅲ. 루터와 칼빈 — 나무에 붙은 하나님의 말씀

천 년이 지나 종교개혁자들에게 오면, 같은 축이 훨씬 더 날카롭게 벼려진다.

3-1. 루터 — 아담의 교회이자 제단이며 강단

루터는 만년의 창세기 강해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읽는다.5 그에게 그 나무는 단지 "손대면 안 되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였다. 루터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이렇다.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는 성전도 없었고 성례도 없었고 설교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서 하나님을 예배했는가? 바로 그 나무 앞에서였다. 그 나무에 하나님의 말씀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매일 그 나무 앞을 지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다"라는 말씀을 기억했고, 그 기억 속에서 자기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임을 고백했다. 그래서 루터는 그 나무를 아담의 교회요, 제단이요, 강단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루터가 강조하는 것은 나무의 재질이나 열매의 성분이 아니다. 그 나무에 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무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말씀이었다. 말씀이 없었다면 그것은 동산의 수많은 나무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루터에게서 순종과 예배가 하나로 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자기를 두는 것, 그것이 곧 예배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기 판단을 놓는 것은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 예배의 전복이다. 아담이 그 열매에 손을 뻗었을 때, 그는 자기 교회의 제단을 무너뜨린 것이다. (다만 루터의 창세기 강해는 학생들의 필기와 편집을 거쳐 전해진 자료이므로, 확인된 범위를 넘어서는 긴 직접 인용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삼가는 것이 옳다. 여기서는 그의 해석의 취지를 요약해 소개한다.)

3-2. 칼빈 — 스스로 선악의 심판자가 되지 않도록

칼빈의 창세기 2장 주석은 우리 보론의 중심 문장과 거의 겹친다.6 칼빈은 먼저 오래된 오해 하나를 치운다. 하나님께서 그 나무를 금하신 것은 인간을 무지한 상태에 붙들어 두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지식을 시기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막으신 것인가? 칼빈에 따르면 세 가지다.

  • 인간이 자기 이해에 의존하는 것
  • 인간이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것
  •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심판자가 되는 것

특히 세 번째가 결정적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는 "선악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선악에 대한 판정권"이었다.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최종적으로 선언하는 자리는 창조주의 자리다. 인간이 그 자리를 탐냈을 때, 그는 지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 위치를 잃었다.

 

그리고 칼빈은 이 대목에서 아름다운 한 마디를 덧붙인다. 참된 지혜란 자기 지혜에 의존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어 순종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보론에서 세우고 있는 대비를 역사적으로 강하게 받쳐 준다.

"내가 보기에 좋으므로 내가 취하겠습니다."

대(Vs)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나는 그 경계를 신뢰하겠습니다."

 

에덴의 죄는 인간이 먹고 싶어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기 판단을 최종 판단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이제 이 판단의 문제를 머리에 담고, 정경의 반대편으로 건너가 보자.

 

 

 

Ⅳ. 에스겔 —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에덴에서 수천 년, 바벨론 강가. 사로잡혀 온 젊은 제사장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한복판에 다시 "먹으라"는 명령이 등장한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겔2:8)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채우며 네 창자에 가득하게 하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겔3:1–3)

 

이 짧은 대목에서 "내가 네게 주는"이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자. 두루마리는 에스겔이 발견해서 집어 든 물건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신 것이다. 본문은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라고 기록한다. 선지자는 입을 벌렸을 뿐이다.

 

여기서 서둘러 창세기와의 직접적인 문학적 평행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에스겔서 본문은 창세기 3장을 인용하지도, 암시하지도 않는다. 두 본문은 장르도 다르고 문맥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다. 그러나 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두 장면이 만들어 내는 대조는 선명하다.

 

에덴 —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인간이 자기 판단으로 취해 먹음.

 

에스겔 —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선지자가 받아 먹음.

이 대조를 두 단어로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취함 vs. 받음

에덴의 손은 뻗어 나간다. 에스겔의 입은 벌어진다. 손을 뻗는 것은 능동이고, 입을 벌리는 것은 수용이다. 둘 다 "먹음"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자세는 정반대다.

그리고 에스겔의 이야기는 먹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순서를 따라가 보자.

 

받음 → 먹음 → 내면화 → 마음으로 받음 → 가서 말함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들으라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겔3:10–11)

 

말씀은 선지자의 입에서 백성의 귀로 곧장 흘러가지 않는다. 먼저 선지자 자신의 배와 창자를 통과한다. 그를 형성하고, 그를 아프게 하고, 그를 바꾼다. 그러고 나서야 그의 입에서 나간다. 이것은 본편에서 우리가 붙들었던 문장과 정확히 맞물린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에스겔은 두루마리를 손에 쥐고 연구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삼켜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Ⅴ. 광야 — 먹지 않음으로 순종하신 그리스도

이제 신약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먹지 말라"의 자리로 돌아온다. 다만 이번에는 명령을 받는 쪽이 첫 사람이 아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4:1–2)

 

먼저 이 사실을 충분히 무겁게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 실제로 굶주리셨다. 이것은 상징적 표현이 아니다. 사십 일 만에 찾아온 진짜 배고픔이다. 신학적 논의로 서둘러 넘어가기 전에, 이 몸의 사실 앞에 잠시 머물러야 한다. 에덴의 아담은 배부른 상태에서 시험을 받았고, 광야의 그리스도는 굶주린 상태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시험하는 자가 말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이 유혹의 핵심을 잘못 짚기 쉽다. 사탄은 "음식을 먹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은 죄가 아니다. 사십 일 금식 후에 식사하는 것도 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도 물론 죄가 아니다.

 

유혹의 핵심은 이것이다. 아버지의 뜻과 말씀을 떠나, 자기 능력으로 자기 필요를 해결할 것인가.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로 이끄셨다. 그 굶주림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자리였다. 사탄의 제안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라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본문이 그 이상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유혹은 아버지의 뜻과 말씀에 대한 신뢰를 떠나 자신의 아들 됨을 자기 방식으로 증명하고 사용하라는 유혹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신명기 8장을 인용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4:4)

 

이 인용의 배경이 되는 신명기 본문은 이렇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인용하신 문맥이 광야의 이스라엘이라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주리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다. 그들은 그 만나를 받아 먹어야 했다. 스스로 취할 수도 없었고, 저장해 둘 수도 없었다. 매일 아침 하나님이 주시는 만큼만 받는 훈련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훈련에 반복해서 실패했다.

 

이제 참 이스라엘이신 분이 같은 광야에 서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첫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를 조심스럽게 놓아 보자.

 

첫 아담 — 풍성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 금지된 것을 취함.

 

그리스도 — 굶주림 속에서도, 아버지의 말씀 아래 머무심.

이 대비는 참으로 선명하다. 그러나 "마태복음 4장이 창세기 3장에 대한 직접적인 해설이다"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마태는 여기서 창세기 3장을 인용하지 않는다. 그가 인용하는 것은 신명기다. 마태의 직접적인 관심은 광야의 이스라엘과 참 이스라엘이신 아들의 대비에 있다.

 

그러므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는 마태복음 4장의 직접 주해가 아니라, 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성립하는 신학적·정경적 대비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물론 바울이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두 아담을 명시적으로 대조하고 있으므로, 이 대비 자체는 성경 내부에 충분한 근거를 가진다. 다만 그 근거가 마태복음 4장 본문에서 직접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구별을 지키자는 것이다.

 

 

 

Ⅵ. 생명의 떡 — 이제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신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 이르면, 이 모든 흐름이 뒤집힌다. 무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뒤 예수를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만나 이야기를 꺼낸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1). 곧, 모세는 우리에게 떡을 주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주겠느냐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2–35)

 

여기서 세 개의 동사를 눈여겨보자. 주신다, 내려온다, 주신다. 주어는 언제나 하나님이시다. 아버지께서 주신다. 떡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 떡이 세상에 생명을 준다. 이 문단 전체에서 인간은 주는 자가 아니라 받는 자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역전인지 보라.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스스로 취했다. 그 손이 뻗어 나갔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요한복음 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양식을 친히 주신다. 그리고 그 양식은 어떤 물건이 아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요6:51)

 

첫 사람이 손을 뻗어 취한 것은 생명을 주는 듯 보였으나 죽음을 가져왔다. 이제 하나님께서 내어 주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분의 살이며, 그것이 참으로 생명을 준다. 인간의 취함은 죽음을 낳고, 하나님의 주심은 생명을 낳는다. 그렇다면 이 떡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본편에서 세운 원칙으로 돌아간다. "먹음 = 믿음"이라는 단순한 등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요한복음 6장의 언어가 가진 육체성과 연합의 깊이가 다 날아가 버린다. 오히려 다음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자.

 

믿음으로 받음 → 그리스도 참여 → 연합 → 생명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6:56)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정보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분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는 상호 내주의 언어가 그것을 보여 준다. 이 구조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다시 나타나고,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의 성찬 언어에서도 울린다.


Ⅶ. 베드로 — "일어나 잡아 먹으라"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뜻밖의 "먹으라"를 만난다.

욥바의 지붕 위, 정오. 베드로는 기도하다가 시장기를 느낀다. 그리고 환상 가운데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 안에는 온갖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이 들어 있다.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10:13–15)

 

이 장면에서 베드로의 거절을 함부로 비웃어서는 안 된다. 그의 대답은 불경한 반항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온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말은 자랑이 아니라 고백이었다. 그는 자기가 아는 하나님의 뜻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충실함이 문제가 된다. 구속사의 새로운 단계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전 규례의 경계를 거두고 계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자.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새로운 계시로 옛 말씀을 계속 갱신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의식법의 그림자가 실체에 이르렀고, 그 전환을 사도에게 알리시는 사도 시대의 특별한 계시적 순간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그 전환이 이미 완료된 자리에 서 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문장의 문법을 보라. 깨끗하게 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속되다고 판정하려는 주체는 베드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판정권을 거두어 가신다.

 

그런데 이 환상을 "이제 모든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음식 규례의 전환도 실제 의미의 일부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가가 이야기 전체를 통해 보여 주는 결정적 적용은 다른 데 있다. 그리고 그 적용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베드로 자신이다. 환상 직후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다. 베드로는 그들을 따라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행10:28)

 

주목하라. 짐승에 대해 하신 말씀을 베드로는 사람에게 적용한다. "아무 것도"가 아니라 "아무도"다. 환상의 최종 과녁은 식탁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열고 계시던 것은 식단이 아니라 언약 백성의 문이었다. 이제 이 장면을 에덴과 조심스럽게 나란히 놓아 보자. 방향은 정반대다.

 

에덴 —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인간이 자기 판단으로 허용함.

 

행 10 —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인간이 자기 기존 판단으로 계속 금지하려 함.

한쪽은 하나님이 그으신 선을 지우려 하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이 지우신 선을 다시 그으려 한다. 정반대의 방향이다.

그런데 그 뿌리는 놀랍도록 닮았다.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 중 누가 최종적인가.

 

에덴의 인간은 "내가 보기에 좋으니 취하겠다"고 했고, 욥바의 베드로는 "내가 알기로 부정하니 먹지 않겠다"고 했다. 한쪽은 욕망의 언어로, 다른 한쪽은 경건의 언어로 말했다. 그러나 두 문장 모두 주어가 "내가"였다. 이것이 이 비교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닌 이유다. 죄는 방종의 얼굴로만 오지 않는다. 때로는 어제까지 옳았던 경건의 얼굴로 온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미 정하신 바보다 내가 익숙하게 배운 기준을 더 신뢰할 때, 우리는 아담과 정반대 방향으로 걸으면서도 같은 자리에 서게 된다.


Ⅷ. 크리소스톰과 칼빈이 본 베드로의 환상

이 독법이 현대인의 창의적 재해석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역사로 들어가 보자.

8-1. 크리소스톰 — 보자기는 세계요, 짐승은 이방인이다

4세기 말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에서 설교했던 요한 크리소스톰은 『사도행전 강해』 22편에서 이 환상을 다룬다.7 그의 해석은 대단히 명시적이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를 온 세계의 상징으로 읽는다. 그 안의 짐승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잡아 먹으라"는 명령은 베드로가 그들에게로 가야 한다는 사명의 선언이라고 푼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은 베드로 개인의 식습관에 관한 지침이 아니라, 유대인 전체를 향한 교훈이라고 본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가 이 보론에서 "행 10의 핵심은 음식이 아니라 이방인 수용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20세기 선교신학의 렌즈를 고대 본문에 덧씌운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은 1600년 전에 같은 것을 읽었다. 그리고 그는 누가가 10장 28절에서 보여 주는 적용을 그대로 따라간 것뿐이다.

 

다만 여기서 크리소스톰을 현대적 반율법주의의 선구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는 환상의 상징적 의미를 읽으면서도 음식 규례의 실제 전환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 환상을 "사람에 대한 알레고리일 뿐"이라고 축소하지 않는다. 상징과 실제를 함께 본다. 이 균형이 그의 해석의 미덕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는 베드로가 "나는 부정한 것을 먹은 적이 없다"고 항의한 것조차 섭리적으로 유익했다고 본다. 훗날 예루살렘의 유대계 신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했을 때, 그는 자기가 자원해서 그리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억지로 순복한 것임을 증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2. 칼빈 — 판정권은 하나님께 있다

칼빈의 사도행전 10장 주석은 우리 논지의 중심을 정면으로 진술한다.8 그는 15절을 설명하면서,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정죄할지는 인간의 자의적 판단에 달려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의 심판자이시라고 말한다. 사물의 정결과 부정을 결정하는 권한 자체가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의 그림자가 지나간 후 하나님께서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음을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의 성격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이 인간의 오래된 종교적 판단을 교정하는 장면이다. 베드로의 판단이 부도덕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에서 참으로 옳았던 판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새 단계에서 친히 폐하신 경계를 계속 절대화하면, 과거에 옳았던 규례 준수가 현재의 순종을 가로막는 자리에 설 수 있다. 진리가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가 이미 실체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그림자를 붙들고 있는 것이 문제다.

 

칼빈은 또한 베드로의 태도에서 배울 점도 짚는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도 곧바로 자기 해석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그 뜻이 무엇인지 속으로 의아해하며(행10:17), 하나님의 뜻이 더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불확실한 상태에서 섣불리 자기 판단으로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이것 역시 자기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는 한 방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흥미로운 대칭이 드러난다.

 

창세기 주석의 칼빈 —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심판자가 되지 말라.

 

사도행전 주석의 칼빈 —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인간이 다시 속되다고 판정하지 말라.

같은 원리가 정반대 방향에서 적용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인간이 금지된 것을 허용하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인간이 허용된 것을 금지하려 한다. 그러나 칼빈이 두 곳에서 붙들고 있는 원리는 하나다. 판정권은 하나님께 있다.

 

여기서 반드시 제한을 두어야 한다. 이 대칭은 칼빈이 두 본문을 서로 직접 연결했다는 뜻이 아니다. 필자가 아는 한 그는 창세기 주석에서 사도행전 10장을 끌어오지 않았고, 사도행전 주석에서 에덴을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그의 두 주석에서 같은 신학적 원리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Ⅸ. 요한 — 받아 먹고 다시 예언하라

정경의 마지막 책에서, 우리는 다시 두루마리를 먹는 사람을 만난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계10:8–11)

 

여기서는 에스겔 3장과의 문학적 공명을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없다. 요한계시록 본문 자체가 그것을 아주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두루마리, 먹으라는 명령, 꿀 같은 단맛, 그리고 이어지는 예언의 사명—에스겔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만큼 명백하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에스겔의 소명 장면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

그러나 요한은 단순히 복사하지 않는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 쓴맛이다. 에스겔에게 두루마리는 입에서 꿀 같이 달았다. 요한에게도 입에서는 달았다. 그러나 배에서는 썼다. 하나님의 말씀은 받는 순간 달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속으로 들어가 나의 것이 될 때, 그 안에 담긴 심판과 고난과 대가가 함께 소화된다. 말씀을 받는 자는 그 단맛만 골라 먹을 수 없다. 여기서도 순서가 중요하다.

 

받음 → 먹음 → 단맛과 쓴맛 → 다시 예언함

 

먹은 후에 곧바로 파송이 따라온다.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에스겔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씀은 사람을 통과한 뒤에 세상으로 나간다. 소화되지 않은 말씀은 전해질 수 없다.

 

그리고 에덴과의 대비도 다시 한 번 조용히 떠오른다. 첫 사람은 손을 뻗어 취했고, 요한은 천사의 손에서 받아 먹었다. 첫 사람이 취한 것은 그를 죽였고, 요한이 받아 먹은 것은 그를 파송했다.

 

다만 이것을 직접적인 유형론이라고 부르지는 말자. 요한계시록 10장은 창세기 3장을 인용하고 있지 않다. 그가 명시적으로 되짚는 것은 에스겔이다. 에덴과의 관계는 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드러나는 대비이지, 본문이 스스로 주장하는 연결이 아니다.

 

 

 

Ⅹ. 먹지 말라와 먹으라 사이 — 해석학적 안전장치

여기서 잠시 멈추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안전장치를 하나 박아 두어야겠다. 이 보론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성경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먹음 암호로 짜여 있구나!" 하는 흥분이 올라온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이 글이 의도한 결론이 아니며, 오히려 이 글이 가장 경계하는 오독이다. 다음 사실들을 분명히 하자.

  • 창세기 3장의 열매는 도덕적 시험의 대상이다. 그것은 계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예표도 아니며, 정결법의 대상도 아니다.
  • 에스겔의 두루마리는 선지자에게 주어진 계시다. 그것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사명의 내용이다.
  • 마태복음 4장의 떡은 실제 굶주림과 실제 시험의 문제다. 그것은 상징이 아니라 진짜 빵이다.
  • 요한복음 6장의 떡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항목과 질적으로 다르다. 다른 것들이 사물이거나 계시라면, 이것은 인격이다.
  • 사도행전 10장의 짐승은 정결법 및 이방인 수용과 연결된 환상 속의 상징이다.
  • 요한계시록 10장의 두루마리는 다시 예언해야 할 계시다.

이것들은 동일한 사물이 아니다. 동일한 신학적 기능을 갖지도 않는다. 이들 사이에는 문학 장르의 차이, 구속사적 위치의 차이, 언약적 상황의 차이가 겹겹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하나의 숨겨진 먹음 암호를 말한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서로 다른 본문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고 금하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명령하시는 분이며, 인간은 자기 판단을 그 말씀 아래 두도록 부름받는다는 반복되는 정경적 긴장이 보인다.

 

이 차이는 미묘해 보이지만 결정적이다. 앞의 진술은 본문들을 하나의 코드로 환원한다. 뒤의 진술은 각 본문을 그대로 두고, 그것들 위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부르심을 관찰한다.

 

그리고 이 구별을 지킬 때 얻는 것이 있다. 각 본문이 자기 목소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모든 목소리가 함께 울릴 때의 화음이 더 풍성해진다. 억지로 같은 음을 내게 만든 합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음을 내면서도 하나의 화성을 이루는 합창이 되는 것이다.\

 

 

 

Ⅺ. 역사신학적으로 무엇이 확인되는가

이제 지금까지 만나 온 해석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자. 다만 한 줄로 평면화해서는 안 된다. "교부와 종교개혁자는 모두 똑같이 해석했다"는 문장은 편리하지만 정직하지 않다.

 

테오필루스 — 나무가 아니라 불순종이 죽음을 품고 있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이 명령에 순복하는가에 있었다.

 

이레네우스 — 그들은 불순종하여 먹었고,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죽음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불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되감긴다.

 

아우구스티누스 — 금지된 음식 자체가 악하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 명령에서 권고된 것은 순종이었다.

 

루터 — 나무에 붙은 하나님의 말씀이 핵심이며, 그 나무 앞에서의 순종은 곧 예배였다.

 

칼빈(창세기) —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은 인간이 자기 이해에 의존하여 스스로 선악의 심판자가 되는 것이었다. 참된 지혜는 순종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크리소스톰(행10) — 보자기는 온 세계이고 짐승들은 이방인이며, "잡아 먹으라"는 그들에게 가라는 명령이다.

 

칼빈(행10) — 무엇을 허용하고 정죄할지는 인간의 자의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신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언어, 다른 논적 앞에서 글을 썼다. 테오필루스는 이교 지식인에게,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자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몰락 앞에서, 루터와 칼빈은 종교개혁의 한복판에서 썼다. 강조점도 방법론도 다르다. 이들을 하나의 "개혁파적 합의"로 묶는 것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고, 그들 각자에게도 무례한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사실은 남는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곳을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 반드시 제한을 두어야 한다.

이들이 창세기 3장과 사도행전 10장을 하나의 "먹음 모티프"로 직접 연결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확인한 범위에서, 교부들이나 종교개혁자들이 두 본문을 하나의 정경적 주제로 체계화한 전통적 정식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두 본문을 각각 해석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자율적 판단이라는 같은 신학적 긴장을 반복해서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가 전통적으로 이 둘을 이렇게 연결해 왔다"고 쓰면 과장이다. 그러나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교회의 오랜 주해 전통과 같은 신학적 축 위에 서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다.

 

이것이 우리가 이 둘을 정경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역사신학적 대화점이다. 증명이 아니라 대화다. 교부와 종교개혁자들은 우리의 결론을 승인해 주는 권위가 아니라, 같은 본문 앞에서 먼저 씨름했던 선배들이다. 그들이 도달한 곳과 우리가 도달한 곳이 겹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읽기가 본문에서 나온 것이지 우리의 시대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다.

 

 

 

Ⅻ. 취함에서 받음으로

이제 이 보론의 중심 대비를 충분히 펼칠 자리에 왔다. 지금까지 걸어온 본문들을 한 줄로 세워 보자.

 

에덴 — 금지된 것을 스스로 취함.

 

에스겔 —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 먹음.

 

광야의 그리스도 — 아버지의 말씀 밖에서 스스로 떡을 취하기를 거절함.

 

요한복음 6장 — 아버지께서 생명의 떡을 주심.

 

사도행전 10장 —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자기 판단으로 거부하지 않음.

 

요한계시록 10장 —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받아 먹고 다시 전함.

 

여섯 개의 서로 다른 본문이다.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사물이고,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상황이다. 그러나 이들을 나란히 놓고 볼 때 하나의 방향이 보인다. 인간의 손이 뻗어 나가는 자리에서, 인간의 손이 벌어지는 자리로. 이것을 하나의 명제로 정리해 보자.

성경적 신앙은 하나님이 주지 않으신 것을 움켜쥐는 삶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는 삶으로 인간을 돌려놓는다.

 

여기서 반드시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한다. 이 문장을 칭의의 교리를 단순한 "수동성"으로 축소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받는다"는 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에스겔은 입을 벌렸고, 두루마리를 먹었고, 사로잡힌 민족에게로 갔고,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했다. 요한은 천사에게 나아갔고, 두루마리를 달라고 했고, 그것을 먹었고, 쓴맛을 삼켰고, 다시 예언하러 갔다. 베드로는 일어나 이방인의 집 문지방을 넘었다—그것은 그의 평생의 습관과 정체성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받음은 살아 있는 믿음의 수용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반드시 순종과 열매로 이어진다. 죽은 손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열린 손만이 받는다. 그리고 받은 손은 반드시 움직인다.

 

그러므로 취함과 받음의 대비는 "능동 대 수동"의 대비가 아니다. 누가 시작하는가의 대비다. 취함은 인간에게서 시작하고, 받음은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 취함은 하나님이 아직 주지 않으신 것을 향하고, 받음은 하나님이 이미 내미신 것을 향한다.

 

이 구별이 왜 목회적으로 중요한가?

 

우리는 여전히 두 방향 모두로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아담처럼 하나님이 그으신 선을 자기 욕망으로 지우려 한다. 그것은 알아보기 쉬운 죄다. 그러나 어떤 이는 베드로처럼, 하나님이 이미 지우신 선을 자기 경건으로 다시 그으려 한다. 이것은 알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처럼 보이지 않고 신실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받으신 사람을 내 기준으로 여전히 밖에 세워 두려 할 때,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하신 영역에 내가 다시 사슬을 채우려 할 때, 우리는 정확히 욥바 지붕 위의 베드로와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물론 이것은 회개와 믿음, 교회의 권징과 분별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께서 허무신 것은 복음의 문 앞에 놓인 민족과 문화와 의식법의 장벽이지, 교회가 지켜야 할 신앙고백과 삶의 경계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받아들이신 자를 내 출신과 관습과 이미 성취된 규례의 기준으로 배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 귀에 들려야 할 음성도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한 가지만 덧붙이자. 사도행전 10장을 로마서 14장의 음식 문제와 무리하게 동일시하지는 말자. 로마서 14장은 이미 열린 교회 안에서 연약한 형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다루고, 사도행전 10장은 그 문이 열리는 순간 자체를 다룬다. 둘은 같은 원리를 공유하지만 같은 상황이 아니다.

 

 

 

결론 — 생명의 떡은 주어진다

이 보론을 도덕주의로 끝낼 수는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켜라"로 끝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정확히 반대로 되돌아가는 셈이 된다. 그런 결론은 다시 인간의 손을 주어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잘 순종하겠습니다, 이제 내가 취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내가 잘 받겠습니다—이 모든 문장의 주어는 여전히 "내가"다.

 

복음의 순서는 반대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신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 성령께서 믿게 하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받는다. 그 받은 생명이 우리를 순종하게 한다.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머무르기보다 스스로 취하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을 향해 손을 뻗는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기준으로 하나님의 선언을 심사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다시 받는 자리로 데려온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고,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자기 판단으로 거부하지 않는 자리. 손을 뻗는 자리가 아니라 손을 여는 자리. 심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순복하는 자리.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받는 것은 규칙이 아니다. 한 인격이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6:33)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생명의 떡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찾아낸 것도 아니다. 우리가 빼앗은 것도 아니다.

 

주어진 것이다.

 

첫 사람은 손을 뻗어 취했고 죽었다. 둘째 아담은 굶주림 속에서도 아버지의 말씀 아래 머무셨고, 마침내 자기 살을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어 주셨다. 에덴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얻으려 했던 생명을,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셨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작도 끝도 자기 힘으로 취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본편의 중심 문장과 만나는 자리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에덴에서 인간은 소유하려 했다. 선악을 자기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우리 손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삼키고, 우리 안에서 달고 쓰며, 우리를 바꾸어 다시 내보낸다.

 

먹지 말라 하실 때 멈추고, 먹으라 하실 때 받아 먹으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내 판단으로 거부하지 않는 것.

 

이것 또한 말씀을 먹는 삶의 한 모습이다.

 

 

 

 

 

각주

*성경 인용은 개역개정판 또는 개역한글판을 따랐다.

 

[^1]: Theophilus of Antioch, Ad Autolycum 2.25. 영역(ANF 2)은 온라인에서 전문 확인 가능: CCEL, [Theophilus to Autolycus, Book II](https://ccel.org/ccel/theophilus/autolycus_ii/anf02.iv.ii.ii.html); New Advent, [To Autolycus, Book II](https://www.newadvent.org/fathers/02042.htm). 그리스어 원문은 그리스어 위키문헌(el.wikisource.org)의 『Πρὸς Αὐτόλυκον』 제2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에 인용한 그리스어 구절은 해당 장의 핵심 문장이며, 여기서는 취지를 전달하는 범위에서 짧게 제시했다. 영역본은 원문 자체가 아니므로, 원어 확인이 필요한 대목은 그리스어 본문으로 대조할 것.

[^2]: Irenaeus, Adversus haereses 5.23.1. 인용한 라틴어 문장은 고대 라틴어 전승본에 근거한다. 표준판은 Sources chrétiennes 153 (Irénée de Lyon, Contre les hérésies, Livre V). 영역(ANF 1)은 온라인 확인 가능: CCEL, [Against Heresies, Book V](https://ccel.org/ccel/irenaeus/against_heresies_v/anf01.ix.vii.html); New Advent, [Against Heresies, Book V](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0.htm) (해당 페이지에서 장별 링크로 이동).

[^3]: Irenaeus, Adversus haereses 5.19 및 5권 관련 문맥. 재총괄(recapitulatio) 구조에 대해서는 3.18–23도 함께 볼 것. 온라인 접근점은 각주 2와 동일.

[^4]: Augustine, De civitate Dei 14.12. 영역은 New Advent, [City of God, Book XIV](https://www.newadvent.org/fathers/120114.htm)에서 전문 확인 가능(Marcus Dods 역, NPNF 1-2 계열). 라틴어 원문은 라틴어 위키문헌(la.wikisource.org)의 『De civitate Dei』 제14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평판은 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47–48. 본문의 라틴어 두 구절은 원문에서 확인할 것.

[^5]: Martin Luther, Lectures on Genesis, 창 2:16–17 주해.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eimarer Ausgabe) 42권(창세기 강해 1–17장, 1535/38)의 해당 부분; 영역은 Luther's Works, vol. 1 (Concordia). 이 강해는 강의 필기와 편집을 거쳐 전해진 자료이므로, 여기서는 확인된 범위 안에서 그의 해석 취지만 요약했다. 인쇄본 기준 자료이며 공개 전문 링크는 제시하지 않는다.

[^6]: John Calvin, Commentarius in Genesin, 창 2:9, 2:16–17 주해. 영역은 CCEL, [Commentary on Genesis, Volume 1](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01.viii.i.html)에서 해당 대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창 2장 주해 수록). 라틴어 초판은 In primum Mosis librum, qui Genesis vulgo dicitur, commentarius (Geneva: Oliva Roberti Stephani, 1554)이며, 디지털 사본은 [e-rara](https://www.e-rara.ch/gep_g/doi/10.3931/e-rara-5739)에서 열람할 수 있다. 영역본에서 해당 표현은 인간이 오직 순종으로써 지혜로워진다는 취지로 옮겨져 있다.

[^7]: John Chrysostom, Homiliae in Acta Apostolorum, Homily 22. NPNF 판본에서 이 강해의 표제 본문은 행 10:1–4이지만, 강해 자체는 고넬료 이야기와 베드로의 환상을 함께 다룬다. 필요하면 Homily 24(행 10:44 이하)와 Homily 25(행 11:19 이하)도 함께 볼 것. 영역(NPNF 1-11)은 CCEL, [Homilies on the Acts of the Apostles 목차](https://www.ccel.org/ccel/schaff/npnf111.toc.html); New Advent, [Homilies on the Acts of the Apostles](https://www.newadvent.org/fathers/2101.htm); 강해 21–30편 묶음은 [EWTN 판](https://www.ewtn.com/catholicism/library/homilies-on-the-acts-of-the-apostles-2130-11685)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스어 원문은 Patrologia Graeca 60 수록. 본문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그리스어 문장을 직접 인용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8]: John Calvin, Commentarii in Acta Apostolorum, 행 10:15, 10:17, 10:28 주해. 영역은 CCEL, [Commentary on Acts, Volume 1](https://ccel.org/ccel/calvin/calcom36/calcom36.xvii.i.html)에서 행 10장 주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라틴어 초판은 Commentariorum Ioannis Calvini in Acta Apostolorum liber primus (Geneva: Ex officina Ioannis Crispini, 1552).

 

 

참고문헌

Chicago Notes and Bibliography 방식. 이 보론에서 직접 인용하거나 참조한 1차 자료만 수록했다.

교부 문헌

Augustine. De civitate Dei. Edited by Bernhard Dombart and Alfons Kalb. 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47–48. Turnhout: Brepols, 1955.

Augustine. The City of God against the Pagans. Translated by R. W. Dyson. Cambridge Texts in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Chrysostom, John. Homiliae in Acta Apostolorum. In Patrologia Graeca, vol. 60, edited by J.-P. Migne. Paris, 1862.

Chrysostom, John. Homilies on the Acts of the Apostles.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1, vol. 11.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Irenaeus. Against Heresies. Translated by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Ante-Nicene Fathers, vol. 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Irénée de Lyon. Contre les hérésies, Livre V. Edited by Adelin Rousseau, Louis Doutreleau, and Charles Mercier. 2 vols. Sources chrétiennes 152–153. Paris: Éditions du Cerf, 1969.

Theophilus of Antioch. Ad Autolycum. Edited and translated by Robert M. Grant. Oxford Early Christian Texts. Oxford: Clarendon Press, 1970.

Theophilus of Antioch. Theophilus to Autolycus. Translated by Marcus Dods. Ante-Nicene Fathers, vol. 2.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종교개혁 문헌

Calvin, Jean. Commentariorum Ioannis Calvini in Acta Apostolorum liber primus. Geneva: Ex officina Ioannis Crispini, 1552.

Calvin, Jean. In primum Mosis librum, qui Genesis vulgo dicitur, commentarius Johannis Calvini. Geneva: Oliva Roberti Stephani, 1554.

Calvin, John. Commentaries on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Translated by John King. 2 vols.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1850.

Calvin, John. Commentary upon the Acts of the Apostles. Translated by Christopher Fetherstone. Edited by Henry Beveridge. 2 vols.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4.

Calvin, John.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Edited by Guilielmus Baum, Eduardus Cunitz, and Eduardus Reuss. 59 vols. Corpus Reformatorum 29–87. Brunswick: C. A. Schwetschke, 1863–1900. [창세기 주석은 CO 23에 수록]

Luther, Martin.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42, Genesisvorlesung (cap. 1–17), 1535/38. Weimar: Hermann Böhlau, 1911.

Luther, Martin. Lectures on Genesis: Chapters 1–5. Translated by George V. Schick. Luther's Works, vol. 1. Edited by Jaroslav Pelikan. Saint Louis: Concordia, 1958.

온라인 접근점

아래는 위 판본들을 온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접근점이다.

 

 

 

AI 활용 안내 — 이 글의 문제의식과 중심 논지, 신학적 판단, 자료의 채택과 최종 문장은 필자에게 있다. 작성 과정에서는 생성형 AI를 연구와 편집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였다.
ChatGPT 5.6은 사전 조사와 쟁점의 구조화에, Claude Fable/Opus 5은 초고의 표현 및 참고문헌·각주 형식의 정돈에, Perplexity Pro는 관련 논문과 온라인 원문 자료의 탐색에 사용하였다.
AI가 제시한 내용은 그 자체를 권위 있는 출처로 삼지 않았으며, 접근 가능한 성경 원문, 교부 문헌, 신경과 공의회 문서, 공식 교리서 및 개혁파 신앙고백 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다시 대조하였다. 자료의 해석과 남아 있을 수 있는 오류를 포함한 글의 최종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이 말씀을 먹으라!』 후속 원전 검증기 — 여섯 가지 과제를 따라 교부에서 웨스트민스터까지

 

 

 

들어가며 — 본편을 쓰고 나서, 왜 다시 원전으로 돌아갔는가

『이 말씀을 먹으라!』를 쓸 때 나는 하나의 원칙을 세워 두었다. 확인되지 않은 인용문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부와 종교개혁자와 신앙고백 문서를 다룰 때, 온라인으로 열람 가능한 1차 자료와 표준 번역본을 직접 열어 논지를 확인하고, 그 위치를 각주에 밝혔다. 이레네우스는 『이단 논박』 5권 2장, 크리소스톰은 요한복음 강해 47편,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25~27논고,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 칼빈은 요한복음 주석,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76문과 웨스트민스터 29장 7항과 도르트 신조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각주 밑에 나는 여섯 가지 과제를 정직하게 적어 두었다.

  1. 교부 문헌 — PG·PL 대조 및 그리스어·라틴어 원문 확인. 이레네우스 → 크리소스톰 → 아우구스티누스 순서로.
  2. 루터 — 바이마르판(WA) 6:497–573의 라틴어 원문과 온라인 전자판 §2.3의 대조.
  3. 칼빈 — CTS 프링글(Pringle) 영역본의 주 163과 프랑스어판 계열의 관계 확인, 그리고 『기독교강요』 4권 17장과의 정합성 검토.
  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 1563년 초기 인쇄본과 후대 판본 사이의 증거본문(proof-text) 형성사 확인.
  5. 웨스트민스터 — 1646/47년 초기 인쇄본 및 대·소요리문답 원문 대조.
  6. 인용 형식 — Chicago Notes and Bibliography 체계에 따라 최초 인용(full note)과 재인용(shortened note)과 참고문헌 표기를 통일.

이 글은 그 여섯 과제를 실제로 수행하고 난 뒤의 기록이다.

 

먼저 밝혀 둘 것이 있다. 이 작업은 이미 정해 놓은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이미 써서 공개 준비까지 마친 문장들을 다시 원전 앞에 세워 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원전 앞에 세워 놓고 보면, 어떤 문장은 그대로 서 있었고, 어떤 문장은 조금 낮추어야 했으며, 어떤 문장은 내가 처음 썼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근거를 얻었다.

 

이 비대칭이 이 글의 핵심이다. 검증의 결과는 "우리가 다 맞았다"가 아니었다. 이레네우스와 크리소스톰과 하이델베르크와 웨스트민스터에서는 주장의 강도를 낮추어야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낮춤과 나란히,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와 칼빈에서는 예상보다 훨씬 견고하고 세밀한 근거가 나왔다. 실제 연구는 대개 이런 모습이다. 전부 무너지지도 않고 전부 이기지도 않는다. 정확해진다.

그리고 그 정확해짐의 방향이 흥미롭다. 본편의 중심 명제는 이랬다.

요한복음 6장의 "먹음"이란,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본편은 이것을 "먹음 = 믿음"이라는 한 단어짜리 공식으로 환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전체 흐름을 이렇게 잡았다.

 

말씀 → 그리스도 → 믿음 → 연합 → 거함 → 성장 → 분별 → 열매 → 증언

 

원전 검증의 결과, 이 구조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칼빈의 원문을 정밀하게 읽고 나자 "먹음 = 믿음"이라는 단순 등식이 왜 부족한지가 훨씬 선명해졌다. 본편이 조심스럽게 피해 갔던 그 함정을, 칼빈은 이미 16세기에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축이 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따라 발견했던 믿음 → 먹음 → 그리스도 참여 → 연합 → 거함 → 생명이라는 흐름은, 교회의 실제 원전 속에서도 확인되는가? 확인된다면 어디까지 확인되며, 어디서부터는 서로 다른 전통들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가?

 

가기 전에 약호를 몇 개 정리해 두자. 낯선 기호가 연달아 나오면 글이 갑자기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 PG(Patrologia Graeca) — 19세기 미뉴(J.-P. Migne)가 편집한 그리스 교부 전집. 그리스어와 라틴어 대역으로 되어 있다.
  • PL(Patrologia Latina) — 같은 미뉴가 편집한 라틴 교부 전집.
  • CCSL(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 20세기 이후 벨기에 브레폴스 출판사가 펴내는 라틴 교부 비평판. 미뉴보다 훨씬 엄밀한 본문을 제공한다.
  • SC(Sources Chrétiennes) — 프랑스에서 나오는 교부 원문·번역 대역 비평판 총서.
  • WA(Weimarer Ausgabe) — 루터 전집 바이마르 비평판.
  • CO(Calvini Opera) — 『종교개혁자 전집』(Corpus Reformatorum) 안에 수록된 칼빈 전집.
  • CPG(Clavis Patrum Graecorum) — 그리스 교부 저작의 표준 번호 목록.
  • VD16 — 16세기 독일어권 인쇄본의 표준 서지 번호.
  • ANF / NPNF — 19세기 영어 교부 번역 총서(Ante-Nicene Fathers /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이 약호들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다. 같은 문장이라도 어느 판본에서 읽었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무게의 차이를 성도들과 함께 걸어가 보려는 시도다.

 

 

 

Ⅰ. 교부들에게 다시 묻다

1. 이레네우스 — 맞았지만, "요한복음 6장 주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본편이 주목했던 구조

본편에서 나는 2세기 리옹의 이레네우스에게서 하나의 강력한 연결을 보았다. 그것은 이런 구조였다.

 

성육신 →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 → 성찬 → 우리의 육체 → 마지막 날 육체의 부활

 

이 구조는 원문 검증을 견뎠다. 『이단 논박』 5권 2장 2~3절에서 이레네우스는 육체의 구원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의 논증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고 강하다. 만일 육체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주께서 자기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도 아니고, 성찬의 잔이 그의 피에 참여함도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이 그의 몸에 참여함도 아니라는 것이다. 피는 혈관과 살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그런 존재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섞인 잔과 만들어진 떡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찬이 되고, 바로 그것으로 우리 육체의 실체가 자라고 지탱된다. 그렇다면 그 육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땅에 묻혀 썩는 밀알이 하나님의 영으로 자라나듯, 성찬으로 양육된 우리 몸도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부활에 참여한다.

 

그러니까 이레네우스에게는 성찬이 단순한 예식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과 육체가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의 증거다. 참된 성육신이 없으면 참된 피와 몸이 없고, 참된 피와 몸이 없으면 성찬이 없고, 성찬이 없으면 우리 육체의 부활도 없다. 이 사슬 전체가 하나로 걸려 있다. 본편의 요약은 실질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중요한 수정 — 이것은 요한복음 6장의 주석이 아니다

여기서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 있다. 『이단 논박』 5권 2장 2~3절은 요한복음 6장의 주석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이레네우스가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성경은 고린도전서 10:16(잔과 떡의 참여), 골로새서 1:14(피로 말미암은 구속), 에베소서 5:30(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 고린도전서 15:53(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등이다. 요한복음 6장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를 붙들고 그 본문을 풀어 가는 강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레네우스는 요한복음 6장을 이렇게 해석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더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이레네우스의 성육신·성찬·육체 부활 신학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의 참여와 마지막 날의 부활을 하나로 묶는다는 점에서 요한복음 6장의 주제와 강하게 공명한다.

 

이 차이가 사소해 보이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역사신학에서 가장 자주 어겨지는 경계선이 걸려 있다.

왜 이 구별이 중요한가 — 직접 주해와 신학적 공명

우리는 어떤 옛 신학자가 우리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을 발견하면, 곧바로 "그 사람도 이 본문을 이렇게 읽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층위다.

 

첫째, 직접 주해다. 그 신학자가 실제로 그 본문을 앞에 놓고 강해한 경우다.

 

둘째, 신학적 공명이다. 그 신학자가 다른 본문을 다루면서 전개한 신학이, 우리가 읽는 본문의 주제와 구조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경우다.

 

셋째, 역사적 영향 관계다. 후대의 누군가가 실제로 그 신학자를 읽고 그 영향 아래 이 본문을 그렇게 해석하게 된 경우다.

 

이레네우스의 경우는 둘째다. 그리고 둘째를 첫째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 논증은 검증 가능성을 잃는다. 누군가가 『이단 논박』 5권 2장을 펴 보고 "여기 요한복음 6장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대답할 것이 없다.

 

반대로 정직하게 "이것은 공명이다"라고 말하면, 우리 논증은 오히려 단단해진다. 왜냐하면 공명은 공명대로 진짜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이 "먹고 마심"과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를 네 번이나 나란히 놓는다는 사실(6:39, 40, 44, 54)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2세기의 이레네우스가 성찬과 육체의 부활을 하나로 묶어 논증했다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다. 두 증거는 서로 독립적으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독립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값지다.

텍스트 전승의 문제 — "라틴어 원문"이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한다. 본편의 각주에서 나는 "그리스어 원문은 이 대목에서 대부분 소실되었고 라틴어 역본으로 전한다"고 썼다. 이것도 조금 더 정밀해져야 한다.

 

『이단 논박』은 원래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전체 그리스어 본문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5권 2장을 읽을 때 실제로 읽는 것은 고대 라틴어 번역이 중심이고, 여기에 그리스어 단편들과 아르메니아어 전승이 보조 자료로 붙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그냥 "라틴어 원문"이라고 부르는 것도 부정확하다. 그것은 원문이 아니라 고대 역본이다. 이레네우스가 쓴 그리스어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옮긴 라틴어 문장을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레네우스를 인용할 때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특정 단어 하나에 논증 전체를 거는 일을 삼가게 하기 때문이다. 라틴어 역자가 선택한 단어가 이레네우스가 쓴 그리스어 단어와 완전히 같은 뉘앙스라고 보장할 수 없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단어가 아니라 논증의 구조다. 그리고 다행히 이레네우스의 논증 구조는 매우 뚜렷해서, 역본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비평판의 우선순위는 대략 이렇게 잡는 것이 옳다.

 

Sources Chrétiennes 153 > PG 7 > ANF(New Advent 등 온라인 접근판)

 

SC 153은 20세기 비평판으로 라틴어 본문과 그리스어 단편을 함께 제시하며, PG 7은 19세기 미뉴판이다. ANF와 그것을 실은 온라인 사이트는 19세기 영어 번역이다. 논지를 확인하는 데는 마지막 것으로도 충분하지만, 학술적 주장을 걸 때는 첫째와 둘째를 인용해야 한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위치는 다음과 같다.

 

Irenaeus, Adversus haereses 5.2.2–3; SC 153, 대략 pp. 34–35; cf. PG 7:1124B–1127B.1

 

한 가지 덧붙이자. PG의 단(column) 번호나 SC의 페이지를 인용할 때는 그것이 비평판과 구판 사이의 상호 참조라는 성격을 밝히는 것이 정직하다. SC 153을 직접 펴 본 사람과, PG 7의 단 번호를 2차 문헌에서 옮겨 적은 사람은 다르다. 이 글은 온라인 접근판(ANF/New Advent)에서 본문을 직접 확인했고, SC·PG의 위치는 표준 참조를 위해 병기한 것이다. 그 차이를 감추지 않는 편이 낫다.

2. 크리소스톰 — "육적인 청취"라는 예리한 진단, 그러나 개혁파의 선구자는 아니다

무엇을 확인했는가

4세기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의 설교자 요한 크리소스톰은 요한복음을 순서대로 강해했다. 요한복음 6:53 이하를 다루는 것이 강해 47편이다. 기준 자료는 이렇다. CPG 4425(그리스 교부 저작 표준 번호), PG 59:23–482에 요한복음 강해 전체가 수록되어 있고, 6:63을 다루는 대목은 대략 PG 59:265 부근이다. 영어로는 NPNF 제1시리즈 14권이 표준 번역이다.

 

여기서 확인해야 할 핵심은 6:63의 "육은 무익하니라"를 크리소스톰이 어떻게 읽는가였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매우 분명했다.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육체가 무익하다는 뜻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그는 오히려 되묻는다. 그렇다면 그의 살은 살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살이다. 그렇다면 왜 "육은 무익하다"고 하셨는가. 크리소스톰의 대답은, 그 말씀이 그리스도 자신의 육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그 말씀을 육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어 표현을 짚어 둘 만하다. PG 59:265의 그리스어 본문을 대조해 보면, 이 자리에서 크리소스톰이 실제로 쓰는 것은 명사구가 아니라 동사 형태다. σαρκικῶς ἀκούειν("육적으로 듣다"), 그리고 그것을 명사화한 τὸ σαρκικῶς ἀκοῦσαι("육적으로 듣는 것")이다. 표준 영어 번역이 "carnally hearing"으로 옮긴 것이 바로 이 표현이다. 우리말로는 "육적인 청취"라고 요약할 수 있으나, 이것은 개념적 요약이지 크리소스톰이 쓴 명사구 그대로는 아니다. 어느 쪽이든 요지는 같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살에 있지 않고, 듣는 귀에 있다.

 

크리소스톰은 그 "육적인 청취"가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 그를 요셉의 아들로만 여기는 것,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되묻는 것. 이 모두가 육적인 청취다. 그들은 이 문제를 신비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표현을 하나 덧붙인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내면의 눈"으로 신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적으로 보는 것이다.

참고2: 위 진술의 내용은 NPNF 표준 영역본에서 확인했고, 그리스어 표현은 PG 59:265의 본문을 대조하여 σαρκικῶς ἀκούειν / τὸ σαρκικῶς ἀκοῦσαι 형태임을 확인했다. 한국어의 "육적인 청취"는 이 표현들에 대한 개념적 요약이며, 명사구 σαρκικὴ ἀκρόασις를 크리소스톰의 직접 인용처럼 제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반드시 지켜야 할 균형

여기서 매우 중요한 균형이 필요하다. 크리소스톰은 요한복음 6장을 매우 강하게 성찬적으로 읽는다. 그는 이 대목을 "신비"(τὰ μυστήρια, 곧 성찬)와 직접 연결하고, 그 상 앞에 나아가는 이들에게 두려움과 경외를 가지고 나아가라고 강력하게 권한다. 그의 강해에는 성찬 앞에서 떨라는 목회적 권면이 가득하다.

 

본편에서 나는 크리소스톰의 구별—실제적 참여는 있으나 조잡한 육적 이해는 아니라는 구별—을 소개한 뒤에 이렇게 썼다. "이 구별은 훗날 개혁파 성찬론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검증 후에 보니, 이 문장은 너무 강했다.

 

문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마치 크리소스톰의 구별이 개혁파 성찬론으로 흘러 들어간 직선적 계보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계보를 입증하려면 후대 개혁파 신학자들이 실제로 이 대목을 인용하고 이 구별을 받아들였다는 역사적 증거를 대야 한다. 흥미롭게도 칼빈은 『기독교강요』 4권 17장에서 크리소스톰을 인용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가 인용하는 문장은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만드시되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는 취지의 대목이다. 곧 칼빈은 크리소스톰을 믿음을 상상으로 축소하지 말라는 근거로 인용하지, 육적 이해를 반박하는 선구자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크리소스톰을 후대 개혁파 성찬론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는 개혁파 신학자가 아니라 4세기 동방 교회의 설교자이며, 그의 성찬 이해는 개혁파보다 훨씬 강한 신비적·제의적 색채를 지닌다. 그럼에도 그는 실제적 참여와 조잡한 육적 이해를 구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대화점을 제공한다.

왜 이 수정이 중요한가

이런 수정을 굳이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크리소스톰이 우리 편이라고 말하면 논증이 더 강해 보이지 않느냐고.

그렇지 않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이 아닌 것을 근거로 삼은 논증은 언젠가 무너진다. 크리소스톰의 강해 47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은 곧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이 사람은 개혁파가 아니라고. 그 순간 우리 글 전체의 신뢰가 흔들린다.

 

둘째,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옛 신학자를 우리 진영으로 끌어오는 순간, 우리는 그에게서 배울 기회를 잃는다. 크리소스톰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면 그에게 배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다른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문제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아니라 육적인 청취에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 밖에서 오는 목소리가 된다. 그리고 우리 밖에서 오는 목소리만이 우리를 실제로 교정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대목에서 크리소스톰은 우리 대부분보다 예리하다. 우리는 성경의 어려운 말씀을 만나면 그 말씀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크기로 줄이려 한다. 크리소스톰은 그것을 "육적인 청취"라고 부르고, 대신 기다리며 물으라고 말한다. "그들은 마땅히 때를 기다려 물어야 했고, 그분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이 말은 개혁파에게도, 아니 특히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필요한 말이다.

3. 아우구스티누스 — 검증하면서 오히려 더 강해진 연결

이 부분은 이번 검증에서 가장 많은 것이 나온 자리다. 충분히 길게 이야기하겠다.

기준판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복음 강해는 정식 명칭이 『요한복음 강해 124편』(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CXXIV)이다. 현재의 표준 비평판은 라드보두스 빌렘스(Radbodus Willems)가 편집하여 1954년 브레폴스에서 나온 CCSL 36권이며, 이전의 미뉴판은 PL 35에 실려 있다. 영어로는 NPNF 제1시리즈 7권이 표준이다.

첫 번째 발견 — 논고 번호가 틀렸다

본편의 첫 각주판에서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문장을 26논고에 있다고 적었다. 검증 결과 이것은 틀렸다.

문제의 문장은 이것이다.

Ut quid paras dentes et ventrem? Crede, et manducasti. "왜 이와 배를 준비하는가?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

 

정확한 위치는 25논고 12절이다. CCSL 36:254, PL 35:1602에 해당한다. 왜 26논고일 수 없는지는 사실 간단하다. 26논고는 요한복음 6:41–59를 다룬다. 그런데 이 문장은 요한복음 6:27–29의 문맥에 속한다. 6:29가 26논고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라틴어 본문을 보면 문맥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묻는 장면을 다루고, 예수의 대답을 인용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리고 곧바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먹는 것이다. 그러니 왜 이와 배를 준비하는가.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

 

이 발견이 왜 중요한가.

 

본편에서 나는 요한복음 6:28–29을 별도의 소제목으로 다루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인간의 질문에,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답하시는 그 구조를 이 장의 열쇠 가운데 하나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함"이 "믿음"으로 재정의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가 바로 그 구절의 강해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우연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6:29에서 같은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고, 예수는 믿음을 말씀하셨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곧바로 "먹음"으로 연결한 것이다.

 

요 6:29의 믿음과 요 6:35 이하의 먹음을 하나로 묶는 독법이 이미 4~5세기에 있었다. 본편의 Ⅵ장 논증이 여기서 예상보다 훨씬 오래된 뿌리를 얻었다.3

두 번째 발견 — 26논고 18절, 먹음에서 거함으로

26논고 18절은 요한복음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를 강해하는 자리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결정적인 한 문장을 남긴다.

Hoc est ergo manducare illam escam, et illum bibere potum, in Christo manere, et illum manentem in se habere. "그러므로 그 양식을 먹고 그 음료를 마신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거하시게 하는 것이다."

 

문장 구조를 잠시 보자. 라틴어에서 manducare(먹다)와 bibere(마시다)라는 두 동사가 manere(거하다)라는 동사로 곧장 옮겨간다. "이것이 곧 저것이다"라는 형식이다. 먹음이 거함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곧바로 그 역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지 않으시는 사람은, 몸과 피의 성례를 이로 씹는다 하더라도 참으로 그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큰 것의 성례를 자기 심판에 이르도록 먹고 마시는 것이다.

 

같은 논고 12절에서 그는 이것을 더 짧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참으로 먹는 사람은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먹는 사람이며, 이로 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 사람이다.

이것은 본편의 Ⅹ장 전체—"먹음에서 거함으로"—가 현대적 착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요한복음 강해 속에, 그것도 요한복음 6:56을 직접 주해하는 자리에 있다. 이레네우스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직접 주해라고 말할 수 있다.4

세 번째 발견 — 27논고 1절, 참으로 먹었다는 "표지"

27논고는 요한복음 6:60–72를 다룬다. 그 첫머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앞서 한 말을 요약하면서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는 묻는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먹고 마셨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그 표지(signum)를 이렇게 제시한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가. 그것이 표지다.

 

라틴어 표현을 짧게만 보이면 이렇다. Signum quia manducavit et bibit hoc est, si manet et manetur… 곧 "그가 먹고 마셨다는 표지는 이것이니, 곧 그가 거하고 또 그 안에 거하심을 받는가이다."

이 문장의 목회적 무게를 잠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자꾸 순간을 확인하려 한다. 내가 그때 진짜 믿었는가. 그날 성찬을 받을 때 내 마음이 충분히 뜨거웠는가.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표지를 순간에 두지 않고 머무름에 둔다. 먹었는지 아닌지는 그 사람이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로 드러난다. 거함이 곧 증거다.

 

이것은 본편의 Ⅺ장(성장)과 ⅩⅣ장(열매)이 왜 필요했는지를 다시 설명해 준다. 먹음은 순간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먹은 사람은 머물고, 머문 사람은 자라고, 자란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첫 고리를 이미 "표지"라는 말로 붙들고 있었다.

네 번째 발견 — 27논고 11절, "성령의 참여에 이르기까지"

이번 검증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이다. 27논고 11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찬을 받는 이들에게 권면하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단지 "in Sacramento", 곧 외적 성례 안에서만 먹는 데 머물지 말라고 말한다. 그가 권하는 것은 "usque ad spiritus participationem", 곧 "성령의 참여에 이르기까지"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이 짧은 어구에 놀랄 만큼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첫째, 여기에는 외적 성례 참여와 구원하는 참된 먹음 사이의 구별이 분명히 있다. 성례 안에서 먹는 것으로 그칠 수 있고, 그 너머로 나아갈 수도 있다.

 

둘째, 그 너머의 자리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참여라고 부른다. 참된 먹음의 종착지가 성령이다.

 

셋째, 그럼에도 그는 성례를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usque ad, 곧 "…에 이르기까지"는 성례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성례를 통과하여 더 나아가라는 말이다.5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경계하는 것은 외적 성례 참여 자체를 종착점으로 삼는 일이다. 성례가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에게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것이고, 곧 보겠지만 그는 성례의 객관성을 대단히 진지하게 다룬다. 다만 그 성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다 되었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감정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성령의 참여, 곧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를 칼빈으로 만들지 말자

여기서 반드시 멈추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읽고 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실상 칼빈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단히 강한 성찬적·교회론적 신학자다. 26논고 13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으라고 말하며, 그 몸을 교회로 설명한다. 15절에서는 이 먹음과 마심을 "그의 몸과 지체들의 교제, 곧 예정되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화롭게 될 성도들 안에 있는 거룩한 교회"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결코 개인의 내면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의 지체가 되는 일이다.

 

또한 그는 성례의 객관성을 매우 진지하게 다룬다. 26논고 11절에서 그는 성례 자체와 성례의 효력을 구별하면서, 유다가 받은 떡이 독이었던 것이 아니라 악한 자가 선한 것을 악하게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성례 자체를 폄하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진술은 이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개혁파의 선구자가 아니라, 개혁파와 로마 가톨릭이 함께 자기 아버지로 부르는 신학자다. 실제로 종교개혁기의 성찬 논쟁에서 양쪽 모두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했다. 그 사실 자체가 그가 어느 한쪽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이것은 종합된 구조다

또 하나 정직하게 밝혀야 할 것이 있다.

 

믿음 → 먹음 → 그리스도 안에 거함 → 성령의 참여와 생명

 

이 구조를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한 문장에서 공식처럼 진술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25논고 12절, 26논고 18절, 27논고 1절, 27논고 11절을 연속으로 읽으면서 종합한 구조다.

 

이 차이를 밝히는 것이 왜 중요한가. 만일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먹음-거함-성령이라는 네 단계 도식을 가르쳤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가 하지 않은 말을 그의 입에 넣는 일이 된다. 반면 "그의 연속된 강해를 따라가면 이런 흐름이 드러난다"고 말하면, 우리는 독자에게 확인 경로를 제공하는 셈이 된다. 독자가 25논고부터 27논고까지 읽고 "정말 그렇구나" 하고 스스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흐름은 강해 자체의 순서를 따른다. 25논고에서 믿음, 26논고에서 먹음과 거함, 27논고에서 표지와 성령의 참여. 아우구스티누스가 요한복음 6장을 순서대로 강해했기 때문에, 그 순서가 곧 본문의 순서이기도 하다. 우리가 본편에서 본문을 따라가며 얻은 흐름과 그의 강해 순서가 겹치는 것은, 결국 둘 다 같은 본문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번 검증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지점이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읽고 그 구조를 만든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6장을 읽고 그 구조에 이르렀는데, 나중에 가서 보니 아우구스티누스도 같은 본문을 따라가다가 같은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1600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본문이 두 독자를 같은 곳으로 데려간 것이다.

 

 

 

Ⅱ. 루터 — WA 6:502에서 확인한 믿음의 먹음

전자판 §2.3은 절 번호가 아니었다

본편의 각주에서 나는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인용하면서 "§2.3"이라는 위치를 적었다. 이것은 프로젝트 비텐베르크(Project Wittenberg) 전자판이 붙인 문단 번호였다.

 

후속 검증에서 확인된 것은, §2.3이 WA 자체의 절 번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전자판 편집자가 하이퍼링크와 인용의 편의를 위해 부여한 문단 numbering이다. 전자판 자체가 그렇게 밝히고 있다. 각 문단에 HTML 앵커를 달아 다른 문서가 정확히 링크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술적으로 인용할 때의 핵심 위치는 WA 6:502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소한 형식 문제로 보인다면,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 보라. 누군가 우리 글을 읽고 "루터가 그렇게 말했다고? 어디에?" 하고 물었을 때, "§2.3"이라고 답하면 그 사람은 WA를 아무리 뒤져도 §2.3을 찾을 수 없다. 그 번호는 WA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WA 6:502"라고 답하면 그는 도서관에서 바이마르판 6권 502쪽을 펴서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라틴어 원문에서 확인한 것

WA 6:502의 7행 이하에 다음 문장이 있다.

Primum, c. vi. Iohannis in totum est seponendum, ut quod nec syllaba de sacramento loquitur. "첫째로, 요한복음 6장은 전적으로 제쳐 두어야 한다. 그것은 성례에 관하여 한 음절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in totum est seponendum—"전적으로 제쳐 두어야 한다." 루터의 표현은 영역본에서 느낀 것보다 오히려 더 단호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이어진다. 요한복음 6장은 성례에 관해 한 음절(nec syllaba)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터가 제시하는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그때는 아직 성찬이 제정되지 않았다. 둘째, 문맥 전체가 성육신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de fide … incarnati verbi)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6:63의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를 근거로 이것이 영적인 먹음임을 논증한다.

 

이어지는 논리가 중요하다. 루터는 생명을 주는 먹음은 오직 믿음의 먹음뿐이라고 말한다. 성례적 먹음 자체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합당치 않게 먹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한다.

"왜 이와 배를 준비하는가?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6

두 검증이 만나는 자리

여기서 앞의 아우구스티누스 검증과 이 루터 검증이 만난다. 루터가 인용한 그 문장을, 우리는 이번에 아우구스티누스 25논고 12절, CCSL 36:254, PL 35:1602까지 추적했다. 곧 루터가 어림짐작으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이며, 그것도 요한복음 6:29를 강해하는 바로 그 자리의 문장이었다.

 

이것은 작지만 기쁜 확인이었다. 두 개의 독립적인 검증 작업이 하나의 지점에서 맞물린 것이다. 그리고 이 맞물림은 역사적 계보를 실제로 보여 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요한복음 6:29에서 믿음과 먹음을 연결했고, 1000년이 지나 루터가 성찬 논쟁 한복판에서 바로 그 문장을 끌어와 자기 논증의 기둥으로 삼았다. 이것은 공명이 아니라 역사적 영향 관계다. 앞에서 구별한 세 층위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본편의 루터 해석은 무너지지 않았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두자. 본편에서 나는 루터가 요한복음 6장을 성찬 제정 본문에서 제외하고 믿음의 먹음으로 읽는다고 서술했다. 이 서술은 영역본의 표현을 잘못 읽은 결과가 아니었다. WA의 라틴어에서 오히려 더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이것은 이번 검증에서 "원래 주장이 더 강하게 확인된"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반드시 붙여야 할 경고

동시에 반드시 경고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본편에서도 강조했지만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다.

 

루터가 요한복음 6장을 믿음의 먹음으로 읽는다는 것과, 루터의 성찬론 전체가 개혁파와 같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같은 『교회의 바벨론 포로』 안에서 루터는 화체설을 거부하면서도,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실재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이 떡이 내 몸이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붙들겠다고 말하고, 자기 이성을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게 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실재적 임재론이 훗날 마르부르크에서 츠빙글리와, 그리고 개혁파 전통 전체와 갈라서게 되는 지점이다.

개혁파의 입장은 다르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고, 성령께서 신자를 그리스도께 들어 올려 실제로 연합시키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 성령론적·천상적 참여라고 부른다.

 

이 차이는 진짜 차이다. 지워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가 루터에게서 확인한 것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6장이라는 한 본문의 주해에서 루터가 우리와 매우 가까운 자리에 선다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지다. 왜냐하면 성찬론에서 우리와 가장 크게 갈라선 종교개혁자조차, 요한복음 6장만큼은 믿음의 먹음을 말하는 본문으로 읽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의 증언이기에 더 무겁다.

 

 

 

Ⅲ. 칼빈 — "먹는 것은 단지 믿는 것인가?"

이번 검증에서 가장 흥미로운 수정이 나온 곳이 여기다. 그리고 그 수정은 본편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정밀하게 만들었다.

사용한 자료

칼빈의 요한복음 주석은 1553년 라틴어판(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이 원본이고, 같은 해에 프랑스어판(Commentaire … sur l'Evangile selon sainct Jean)이 나왔다. 표준 수록판은 CO 47권(Corpus Reformatorum 75권)이다. 영어로는 윌리엄 프링글(William Pringle)이 옮겨 1847년 칼빈번역협회(Calvin Translation Society)에서 낸 판본이 널리 쓰이며, 이것이 CCEL 등 온라인에 올라 있는 본문이다. 여기에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4권 17장을 함께 대조했다.

첫 번째 문제 — CTS 주 163의 정체

본편의 각주판에서 나는 하나의 판본 문제를 지적해 두었다. 칼빈이 성찬을 이 설교의 "인(seal)이요 확증(confirmation)"이라고 말하는 문장이 프링글 영역본에서 본문이 아니라 역주 163에 실려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 나는 이 문장을 본문처럼 인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면서, 그것이 프링글 자신의 신학적 덧붙임인지 칼빈의 다른 판본 계열에서 온 것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고 남겨 두었다.

 

검증 결과는 이렇다. 해당 표현은 프링글 개인의 발명이 아니라 칼빈의 1553년 프랑스어판 계열을 반영한 것이다. 프링글은 라틴어판을 옮기면서, 프랑스어판에만 있는 문장을 역주로 처리한 것이다. 실제로 그 역주에는 프랑스어 원문이 병기되어 있다.

특히 다음 문구가 그렇다.

de la maniere perpetuelle et ordinaire de manger la chair de Christ, qui se fait par la foy seulement "그리스도의 살을 지속적이고 통상적으로 먹는 방식,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이 프랑스어 문장은 라틴어 본문의 해당 대목("perpetua et ordinaria manducandi carnem Christi ratio"에 해당하는 취지)과 정확히 대응한다. 곧 프링글은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두 판본 사이의 차이를 성실하게 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두 갈래다.

 

첫째, 프링글의 주 163을 프링글 개인의 신학적 발명처럼 취급하면 안 된다. 그것은 칼빈에게서 온 것이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영어 본문 자체에 원래 있던 문장인 것처럼 인용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프랑스어판 계열의 문장이다.

정확한 인용 방식은 이렇게 된다. "칼빈은 요한복음 6:54를 주석하면서 …라고 말한다(라틴어판). 그리고 프랑스어판 계열은 여기에 성찬이 이 설교의 인이요 확증이라는 취지를 덧붙인다(CTS 역주 163 참조)."

번거로워 보이는가. 그러나 이 번거로움이 바로 정직함이다. 그리고 이 번거로움 덕분에 우리는 한 가지를 물어볼 수 있게 된다.7 왜 프랑스어판 계열에만 이 문장이 있는가.

 

여기서부터는 추론임을 밝혀 두어야 한다. 칼빈이 두 판본의 독자층을 달리 고려했다고 직접 말한 증거를 나는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판본 차이 자체로부터 이렇게 읽어 볼 수는 있다. 라틴어를 읽는 학자들에게는 요한복음 6장이 성찬 제정 본문이 아님을 논증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프랑스어로 읽는 회중에게는 그렇다고 성찬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한 번 더 덧붙일 필요가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개연성 있는 독법이며,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읽으면 목회자 칼빈의 모습이 얼핏 비치는 것도 사실이다.

두 번째 문제 — 『기독교강요』 4.17.5, 여기서 본편이 한 단계 정밀해진다

이번 검증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이것이다. 『기독교강요』 4권 17장 5절에서 칼빈은 어떤 사람들의 견해를 소개한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을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칼빈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저 위대한 설교에서 무언가 더 명확하고 더 숭고한 것을 가르치려 하셨다고 본다. 곧 우리가 그를 참으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살아난다는 것이며, 그것을 주께서 먹고 마신다는 말로 표현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누구도 그리스도에게서 얻는 생명을 단순한 지식으로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어지는 비유가 선명하다.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은 떡을 보는 것이 아니라 떡을 먹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그리스도를 참으로, 온전히 나누어 가져야 한다.

 

그리고 칼빈은 자기와 상대편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그들에 따르면 먹는 것은 곧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살이 믿음으로써 먹힌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그것이 우리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먹음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그들에게 먹음은 곧 믿음이지만, 내게 먹음은 오히려 믿음의 귀결로 보인다.

 

그리고 칼빈은 한마디를 덧붙인다. "말의 차이는 작지만, 실제의 차이는 작지 않다."8 이 문장 앞에서 나는 한참 멈추어 있었다. 칼빈은 같은 구별을 요한복음 주석 6:35에서도 한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곧 믿음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추론하는 사람들은 잘못 추론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를 먹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은 기꺼이 인정하지만, 먹음은 믿음 자체라기보다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껴안아 우리의 것이 되게 하고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우리를 그와 한 몸이 되게 하고, 그와 생명을 공유하게 하며, 한마디로 그와 하나가 되게 한다.

이것이 본편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편의 핵심 문장을 다시 보자.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이 문장이 칼빈의 구별과 얼마나 정확히 맞아떨어지는지 보라. 이 문장은 "먹음 =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받고, 연합하고, 참여한다고 말한다. 곧 믿음은 수단이고, 연합과 참여는 그 믿음이 낳는 실재다. 이것이 정확히 칼빈이 4.17.5에서 세우는 구별이다.

 

그러니까 본편이 이 문장을 신중하게 다듬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본편은 그렇게 다듬어야 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제 설명할 수 있다. 만일 먹음이 단지 믿음의 다른 이름이라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 그토록 강하고 충격적인 언어를 사용하실 이유가 없다. 그냥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 되었다. 그런데 그분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셨고, 그 말에 많은 제자가 떠나갔다.

 

칼빈의 통찰은 바로 이것이다. 그 강한 언어는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이 단순한 지식이나 동의가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받아 그의 생명을 나누어 갖는 일임을 알리기 위한 언어다. 먹음이라는 말이 지켜 내는 것은 그 실재성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본편의 다른 장들이 다시 이해된다. 본편 Ⅺ장에서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과 말씀에 의해 형성된 사람"을 구별한 것, ⅩⅣ장에서 열매를 다룬 것은 곁가지가 아니었다. 먹음이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면, 그 먹음은 반드시 사람을 변화시킨다. 먹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먹은 것이 아니다.

『기독교강요』 4.17.1 — 영혼의 유일한 양식

4권 17장의 첫머리에서 칼빈은 성찬을 "영적 잔치"(spirituale epulum)라고 부르며,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로 삼으신 뒤에, 아버지로서 우리를 먹이시고 평생 지탱하시려고 이 상을 베푸셨다는 것이다.

 

이 표현을 과도하게 인용할 필요는 없다. 다만 본편 Ⅰ장이 신명기 8:3과 마태복음 4:4에서 시작하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물었던 것과 이 표현이 같은 자리에 있다는 점만 짚어 두자. 칼빈에게도 성찬은 무엇보다 양식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굶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의 표지다.

『기독교강요』 4.17.12 — 끈과 통로

여기서 칼빈은 개혁파 성찬론의 심장에 해당하는 두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사람의 몸이 따르는 통상적 법칙을 따르며, 한 번 받아들여진 하늘에 담겨 있고, 심판하러 오실 때까지 거기 머무신다. 그러므로 그 몸을 썩을 요소들 아래로 다시 끌어내리거나 어디에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주께서 자기 영으로 우리에게 그와 하나 되는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은 말한다.

그 연결의 (vinculum)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니, 그가 우리를 그에게 연합시키시며,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모든 것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종의 통로(canalis)가 되신다.

 

그리고 그는 태양의 비유를 덧붙인다. 태양이 땅 위에 빛을 보내어 만물을 낳고 기르고 살리며 자기 실체를 거기 부어 넣는다면, 성령의 광채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교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일이 어찌 그보다 못하겠는가.

vinculum(끈)과 canalis(통로). 이 두 단어가 본편의 개혁파적 정식—성령으로 → 믿음을 통하여 → 참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한다—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보라.

 

성령은 이시다. 곧 떨어져 있는 두 존재를 실제로 잇는 분이다. 하늘의 그리스도와 땅의 신자 사이의 거리는 실재하는 거리다. 칼빈은 그 거리를 없애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거리를 건너는 분이 계시다고 말한다.

 

성령은 또한 통로이시다. 곧 무언가가 실제로 흘러오는 관이다. 통로에는 반드시 흐르는 것이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통로는 통로가 아니다. 칼빈이 이 이미지를 쓴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에게로 실제로 무언가가 온다는 뜻이다.

『기독교강요』 4.17.31 — "영적"이라는 말의 뜻

여기서 칼빈은 반대편의 논리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보이지 않고 무한해서 떡 아래 숨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떡 속으로 내려오시는 것 외에는 그와 교통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들어 올리시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장소적으로 떡 안에 갇혀 있어야 실재적 참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신자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로 들어 올려 실제로 연합시키신다. 방향이 반대다.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려진다.

그러므로 "영적 임재"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다음 어느 것도 뜻하지 않는다.

  • 비실재적
  • 상징적
  • 마음속 상상
  •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렇게 여기는 것

영적은 "성령께 속한", "성령으로 말미암은"이라는 뜻이다. 참여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참여의 방식을 규정하는 말이다.

이 점은 다음 장에서 웨스트민스터를 다룰 때 다시 나온다. 두 문서가 같은 것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9

이 검증이 본편에 갖는 의미

정리하자.

 

본편의 해석은 칼빈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본편은 요한복음 6장의 본문 구조를 따라갔다. 6:35의 병행법, 6:29의 믿음, 6:53–56의 강한 언어, 6:56의 거함, 6:63의 성령. 그렇게 따라가서 얻은 구조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함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기독교강요』 4권 17장을 펴 보니, 칼빈이 그 구조를 훨씬 정밀한 언어로 이미 세워 놓고 있었다. 먹음과 믿음을 구별하되 분리하지 않는 방식으로, 성령을 끈과 통로로 부르는 방식으로, 영적이라는 말이 덜 실제적이라는 뜻이 아님을 못 박는 방식으로.

 

이것은 우리가 칼빈을 잘 인용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본문이 우리를 데려간 자리와, 성경 본문이 칼빈을 데려간 자리가 같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주는 안도감은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을 통해 교회를 가르치신다는 것을, 400년의 간격을 두고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Ⅳ. 하이델베르크 — 요 6의 먹음과 요 15의 거함

무엇을 검증하려 했는가

본편에서 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6문을 다루면서, 널리 쓰이는 판본의 증거본문 목록에 요한복음 6장의 여러 구절과 함께 요한복음 15:1–6이 들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이 본편의 핵심 이동—요 6의 "먹음"에서 요 15의 "거함"으로—이 사적인 연상이 아님을 보여 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이미 한 차례 강도를 낮춘 바 있다. "1563년 원문이 명시적으로 그렇게 규정했다"는 역사적 확언이 아니라, 개혁파 전통이 두 본문을 같은 실재의 두 표현으로 읽어 왔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판본 대조를 후속 과제로 남겨 두었다.

판본사에 관하여 — "1563년 초판"이라는 말의 함정

먼저 알아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인쇄본이 하나가 아니었다. 그해에 여러 판이 나왔다. 각 판마다 조금씩 손질이 가해졌다. 예컨대 제80문답(로마 가톨릭 미사에 관한 문답)은 판을 거듭하며 확장되었다. 라틴어판도 별도로 나왔다. 그러므로 "1563년 초판"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이미 부정확하다. 어느 인쇄, 몇 번째 판인지를 밝혀야 한다. 대표적으로 하이델베르크의 요한 마이어(Johann Mayer)가 인쇄한 판본들이 있고, 서지학적으로는 VD16 번호로 식별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겹친다. 증거본문(proof-text) 목록은 요리문답 본문과 같은 무게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가 고백하는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고백을 성경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여백에 붙인 참조다. 그리고 이런 목록은 판을 거듭하면서 늘어나고 줄어들고 바뀐다. 후대의 편집자들이 보완한 경우도 많다.

이 두 사실을 합치면 결론은 이렇게 된다.

"1563년 독일어 초판 76문의 여백에 요한복음 15:1–6이 확실히 있었다"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초기 독일어판·라틴어판과 후대의 표준화된 증거본문 목록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 문제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공개한 디지털 영인본으로 1563년 제3판(Catechismus Oder Christlicher Vnderricht…, Heidelberg: Johann Mayer, 1563; VD16 P 2166)을 확인하면서 상당 부분 정리되었다. 확인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초기 인쇄본에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장·절 번호 체계가 그대로 찍혀 있지는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1563년의 초기 하이델베르크 전통 안에서 이미 요한복음 6장과 요한복음 15장이 76문의 같은 연합·생명 조항을 뒷받침하는 성경 근거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곧 "요 15:1–6"이라는 오늘날의 표기 형태는 후대 편집에서 명료화된 것이지만, 두 본문을 나란히 놓는 읽기 자체는 초기 전통에 속한다.

 

한 가지 더. 오늘날 유통되는 현대 독일어판이나 영어판의 표현을 1563년 독일어 원문에 그대로 역투사해서도 안 된다. 16세기 독일어와 현대 독일어는 어휘도 철자도 다르다. "이 표현이 원래 이랬다"고 말하려면 그 인쇄본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이 일어난다

이쯤 되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우리가 기대고 싶었던 증거 하나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역사적 주장은 좁아졌는데, 신학적 논증은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76문의 본문 자체가 이미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76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두 단계로 답한다.

 

첫째,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이다.

 

둘째, 여기에 더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또한 우리 안에도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거룩한 몸과 점점 더("more and more") 연합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으로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으나, 우리는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이며,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되 마치 우리 몸의 지체들이 한 영혼으로 그러하듯 한다.

 

이 답 안에 다음 구조가 전부 들어 있다.

 

믿는 마음 →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임 → 죄 사함 → 영생 → 성령 → 그리스도와 점점 더 깊어지는 연합

 

이것이 본편의 핵심 구조와 얼마나 정확히 겹치는지 보라.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이 있고(단순한 동의가 아니다), 죄 사함과 영생이 있고, 성령이 있고, 연합이 있다. 그리고 그 연합이 점점 더 깊어진다고 말한다. 곧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진행되는 실재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이 있다. 76문은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고 우리가 땅에 있다는 거리를 명시하면서도, 바로 그 문장에서 우리가 그의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다. 거리를 인정하면서 연합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를 건너는 분이 성령이시라고 말한다. 앞에서 본 칼빈의 vinculum(끈)이 여기 고백문서의 언어로 들어와 있다.

 

그러니까 요 15:1–6이 언제부터 여백에 붙었는가와 상관없이, 76문 본문은 이미 먹음이 연합이며 그 연합이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이 말하는 것이 정확히 그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음, 곧 거함이 생명의 공급이라는 것.

 

말하자면 우리는 요 15:1–6이라는 각주 하나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본문이 이미 더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증거본문 목록은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 위치를 정확히 알아 두면 된다. 널리 쓰이는 판본의 76문 증거본문을 보면, 요한복음 15:1–6은 답 전체가 아니라 마지막 조항—곧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의 증거로 요한복음 6:56–58과 나란히 붙어 있다. 여기에 에베소서 4:15–16과 요한일서 3:24가 함께 온다.

 

이것은 오히려 흥미로운 배치다. 요 6과 요 15가 같은 조항 아래 묶여 있고, 그 조항의 주제가 한 성령에 의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곧 이 목록을 만든 사람은 요 6의 먹음과 요 15의 거함을 서로 다른 두 주제로 본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한 생명이라는 같은 실재의 두 증언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요 6의 먹음에서 요 15의 거함으로 가는 이동은, 개혁파 전통이 자기 고백을 성경으로 뒷받침할 때 실제로 걸어간 길과 같은 방향에 서 있다. 그리고 그 길은 후대의 표준화된 목록에서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1563년의 초기 전통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쓰는 절 번호 표기가 그때 그대로 찍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정도가 증거가 허락하는 진술이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10

 

 

 

Ⅴ. 웨스트민스터 — 참으로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

판본에 관하여

웨스트민스터 문서들도 판본사가 있다. 지나치게 문헌목록처럼 늘어놓지는 않되, 알아 둘 만큼은 짚자.

신앙고백서는 1646년에 본문이 완성되어 의회에 제출되었다. 그런데 처음 제출된 본문에는 성경 증거구절이 붙어 있지 않았다. 의회가 성경 근거를 요구했고, 그래서 증거구절이 부착된 판이 뒤이어 나왔다. 그러므로 본문 완성 시점과 증거구절 부착판은 구별해야 한다.

 

대요리문답은 1647년에 완성되어 인쇄되었고, 증거구절이 붙은 판은 1648년에 나왔다. 소요리문답도 마찬가지로 1647년 초기판과 1648년 증거구절판을 구별한다.

 

이 구별이 왜 중요한가. 하이델베르크에서 본 것과 같은 이유다. 고백의 본문과 증거구절은 같은 무게가 아니다. 총회가 심의하고 확정한 것은 본문이고, 증거구절은 요구에 따라 뒤에 붙인 성경 참조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고 말하려면 매우 신중해야 한다.

WCF 29.7 — 두 어구를 함께 붙들라

신앙고백서 29장 7항의 핵심 문구는 이것이다.

inwardly by faith, really and indeed, yet not carnally and corporally but spiritually "내적으로 믿음으로, 참으로 그리고 실제로, 그러나 육체적으로나 신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두 부분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한다.

 

really and indeed — 참으로, 실제로. 이것은 실재를 확언하는 말이다. 무언가가 실제로 일어난다.

spiritually — 영적으로. 이것은 그 실재가 일어나는 방식을 규정하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뒤의 것만 읽으면 고백을 거꾸로 이해하게 된다. spiritually를 "상징적으로", "가상적으로",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지만 마음속으로"라고 옮기는 순간, 앞의 "참으로 그리고 실제로"가 무의미해진다. 총회가 두 어구를 나란히 놓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두 방향의 오류를 동시에 막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육체적 섭취를, 다른 쪽으로는 단순한 기념과 상상을. 그러니까 웨스트민스터의 "영적으로"는 참여를 줄이는 말이 아니라 참여의 주소를 밝히는 말이다. 어디서 일어나는가. 성령 안에서. 어떻게 받는가. 믿음으로.

 

앞에서 본 칼빈의 4.17.31이 여기서 고백문서의 언어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안에 갇혀야 실재적 참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신자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실제로 연합시키신다는 그 구조다.

WLC 170 — 더 명시적인 설명

대요리문답 170문은 같은 것을 더 풀어서 설명한다.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육체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 자기에게 적용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수찬자의 믿음에 영적으로(spiritually) 현존하며, 그럼에도 참으로 그리고 실제로(truly and really) 그러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의 모든 유익을 받아 누린다.

 

여기서도 두 어구가 함께 나온다. spiritually와 truly and really. 웨스트민스터는 이 짝을 놓치지 않는다. 두 문서에서 반복된다는 것은 이것이 우연한 표현이 아니라 의식적인 정식이라는 뜻이다.

 

후대의 전통적 증거구절 목록에는 이 대목에 요한복음 6:51, 53 등이 제시된다. 다만 앞에서 말한 대로, 증거구절은 본문과 같은 무게가 아니다.

중요한 수정 — 요한복음 6:63에 관하여

본편에서 나는 웨스트민스터 29장 7항을 다룬 뒤 이렇게 썼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6:63의 '살리는 것은 영이니'가 신앙고백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본다." 검증 후에 보니, 이 문장은 너무 강했다.

 

"신앙고백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는 표현은 마치 29장 7항이 요한복음 6:63을 직접 주해한 결과물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것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29장 7항은 성찬론을 진술하는 조항이지 요한복음 6:63을 강해하는 조항이 아니며, 총회가 이 조항을 작성하면서 6:63을 염두에 두었다는 문헌적 증거를 우리가 확보한 것도 아니다. 더 정확한 진술은 이렇다.

웨스트민스터의 표현은 요한복음 6:63과 잘 공명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 참여의 실재성을 유지하면서 그 방식을 육체적이 아니라 영적이라고 규정한다.

세 층위를 다시 확인하며

이 사례는 앞에서 이레네우스를 다루며 세운 구별을 다시 보여 준다. 다만 여기서는 층위가 하나 더 늘어난다.

 

첫째, 신학적 공명. 어떤 문서의 진술이 어떤 성경 본문의 주제와 구조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경우. 웨스트민스터 29.7과 요 6:63의 관계가 여기 해당한다.

 

둘째, 직접 문헌 의존. 그 문서가 실제로 그 본문을 근거로 삼아 작성된 경우. 이것을 주장하려면 총회 기록이나 작성자들의 저술 같은 증거가 필요하다.

 

셋째, 공식 증거구절. 그 문서에 공식적으로 부착된 성경 참조 목록. 이것은 문서와 함께 확정되기도 하고, 뒤에 붙기도 한다.

세 층위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저지르는 실수는 첫째를 둘째나 셋째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공명은 공명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데, 굳이 부풀리면 오히려 잃는다.11

WSC 88–90과 묵상 — 본편의 가장 중요한 수정이 확증되다

본편을 다듬는 과정에서 나는 한 문장을 크게 고쳤다. 처음에는 묵상을 이렇게 표현했었다. "묵상은 은혜의 방편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주시기로 정하신 통상적인 통로다." 이 문장이 고백적 개혁주의에서 너무 넓다는 지적을 받고, 다음과 같이 고쳤다.

묵상은 성령께서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우리 마음에 깊이 적용하시는 가운데, 성도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되새기고 기도로 응답하며 순종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경건의 실천이다.

 

이번 검증에서 이 수정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정확히 맞아떨어짐을 확인했다.

 

소요리문답 88문은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유익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외적이고 통상적인 방편은 무엇인가. 답은 이렇다. 그의 규례들이며,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다. 이 셋이 택함받은 자들에게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된다.

 

89문은 이어서 묻는다. 말씀은 어떻게 구원에 효력 있게 되는가. 답은 하나님의 영께서 말씀을 읽는 것과 특별히 말씀의 설교를 죄인을 깨우치고 회개시키고 거룩하게 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90문은 실천을 말한다. 말씀이 구원에 효력 있게 되도록 우리는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그것을 받고 들어야 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간직하며,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가 분명해진다.

 

첫째,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다. 묵상이 그 목록에 별도 항목으로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묵상을 말씀·성례와 나란히 놓인 독립적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백적으로 부정확하다.

 

둘째, 그런데 90문이 말하는 내용을 보라.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받고,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간직하고, 삶에서 실천하는 것. 이것이 묵상이 아니면 무엇인가. 곧 소요리문답은 묵상을 별도 방편으로 세우지 않으면서도, 말씀이라는 방편을 받는 방식으로서 묵상의 내용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본편의 수정된 문장은 소요리문답 88문과 90문 사이의 정확한 자리에 서 있다. 88문이 방편을 규정하고, 90문이 그 방편을 받는 방식을 규정하며, 묵상은 후자에 속한다.12

도르트의 보조 확인 — 지우지 말아야 할 발견

여섯 과제의 독립 항목은 아니었지만, 검증 과정에서 도르트 신조에서 중요한 보강이 나왔다. 이것은 본편의 묵상 논의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므로 반드시 남겨야 한다.

 

도르트 신조 셋째·넷째 교리 17항은 하나님께서 중생시키시는 초자연적 사역이 복음의 사용을 배제하거나 무효화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큰 지혜로 복음을 중생의 씨앗이자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다고 고백한다.

 

"영혼의 양식"이라는 표현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본편 전체가 말씀을 양식으로 읽어 온 글이었다. 신명기 8:3에서 시작하여 에스겔의 두루마리와 예레미야의 "얻어 먹었사오니"를 지나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떡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런데 17세기의 도르트가 복음을 정확히 그 말—영혼의 양식—로 부르고 있었다.

 

도르트 신조 다섯째 교리 14항은 더 직접적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선포로 이 은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처럼, 복음을 듣고 읽는 것과 그것을 묵상하는 것, 그리고 복음의 권면과 경고와 약속, 또한 성례의 사용을 통하여 그 사역을 보존하고 계속하고 완성하신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묵상이 명시적으로 등장한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은혜의 일을 계속하시는 통로들을 열거하는 자리에서.

그러나 정확히 읽어야 한다. 도르트는 여기서 묵상을 독립적 은혜의 방편으로 세우지 않는다.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이시고, 목적어는 복음이며, 묵상은 그 복음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방식들 가운데 하나로 열거된다. "복음을 듣고 읽고 묵상함으로"라는 어구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다.

 

그러니 소요리문답 88–90문과 도르트 V.14를 함께 읽으면 균형이 잡힌다. 묵상을 말씀과 나란한 독립 방편으로 격상시키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실제로 사용하시는 통로로 충분히 무겁게 평가할 수 있다.

 

한 가지 제한은 유지하자. 도르트는 성찬 교리를 해설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가 아니며, 요한복음 6장의 주석서는 더더욱 아니다. 도르트를 요 6의 해설자처럼 소개하는 것은 이레네우스를 요 6의 주석가로 만드는 것과 같은 종류의 과장이다.13

 

 

 

Ⅵ. 각주 하나도 신학이다 — 판본과 인용을 다시 정리하며

여섯 번째 과제는 인용 형식이었다. 이것을 단순한 형식론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다.

최초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본편의 첫 각주판에는 이런 항목들이 있었다.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Ante-Nicene Fathers 1,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

 

이 인용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묘한 문제가 있다. 이 형태로 적어 놓으면 New Advent라는 웹사이트가 출처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New Advent는 19세기 영어 번역을 웹에 올려 놓은 접근점이다. 출처는 이레네우스가 쓴 작품이고, 그 작품의 본문을 확정한 것은 비평판이다.

세 층위를 구분하다

후속 검증에서 나는 인용을 세 층위로 나누었다.

 

첫째, 작품 자체와 그 내부 위치. 저자가 쓴 작품과, 그 안의 권·장·절 또는 논고·절 번호. 이것은 어떤 판본을 쓰든 변하지 않는다. Adversus haereses 5.2.2–3은 어느 판본에서도 5.2.2–3이다.

 

둘째, 표준 비평판 또는 초기 인쇄본. SC 153, PG 7, CCSL 36, PL 35, WA 6:502, CO 47 같은 것들. 본문의 형태를 확정하는 근거다.

 

셋째, 온라인 접근점. New Advent, CCEL, Project Wittenberg 등. 독자가 실제로 열어 볼 수 있는 통로다.

이렇게 정리하면 인용이 이런 모양이 된다.

  • 이레네우스 → Adversus haereses 5.2.2–3 → SC 153 / PG 7 → New Advent는 영어 접근용
  • 크리소스톰 → In Iohannem hom. 47 → CPG 4425, PG 59 → NPNF / New Advent는 영어 접근용
  • 아우구스티누스 →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5–27 → CCSL 36 / PL 35 → New Advent는 영어 접근용
  • 루터 → De captivitate Babylonica → WA 6:502 → Project Wittenberg는 편의용
  • 칼빈 → 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 Institutio 4.17 → CO 47 → Pringle/CCEL은 영어 접근용

Chicago Notes & Bibliography의 원칙

시카고 방식의 실무 원칙 몇 가지를 정리해 둔다.

  • 최초 인용은 full note. 저자, 제목, 번역자·편집자, 출판지와 출판사와 연도, 위치를 모두 밝힌다.
  • 이후에는 shortened note. 저자의 성, 축약 제목, 위치만 적는다.
  • 무분별한 ibid. 의존을 피한다. 각주가 편집 과정에서 이동하면 ibid.는 엉뚱한 곳을 가리키게 된다. 축약 인용이 더 안전하다.
  • 참고문헌에서 같은 저자가 반복될 때 3-em dash(———)로 줄이는 방식 대신 저자명을 반복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다. 특히 온라인으로 읽히는 글에서는 항목이 잘려 나갈 때 저자를 알 수 없게 되는 사고를 막아 준다.
  • 성경은 일반적으로 본문 안에 장·절로 표기하고 참고문헌에 별도 항목으로 반복하지 않는다.
  • 역사적 주장을 걸 때는 작품 내부 locator를 우선한다. 페이지 번호는 판본마다 다르지만 장·절 번호는 대체로 공통이기 때문이다.
  • 웹사이트는 source identity가 아니라 access point로 취급한다.

왜 이것이 신학의 문제인가

여기서 형식 이야기를 끝내지 말자. 정확한 인용의 목적은 학문적 예의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검증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쓸 때, 독자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우리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런데 우리가 "25논고 12절, CCSL 36:254"라고 덧붙이는 순간 세 번째 선택지가 생긴다. 직접 확인하는 것.

 

이 세 번째 선택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 왜 중요한가. 개신교 신학의 근본 원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권위 때문에 무언가를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증거를 내놓고, 독자가 스스로 성경과 증거 앞에 서기를 바란다.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을 때(행 17:11), 누가는 그들을 "신사적"이라고 칭찬했다.

 

각주는 그 상고를 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다. 각주가 부정확하면 독자는 상고할 수 없고, 우리의 말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어진다. 그것은 개신교가 원래 거부한 구조다.

 

그러니 이렇게 부르자. 검증 가능성의 윤리. 우리가 각주를 다듬는 이유는 우리 글이 학술적으로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글이 반박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반박 가능한 글만이 신뢰할 수 있는 글이다.

 

 

 

Ⅶ. 무엇이 확인되고 무엇이 수정되었는가

이제 여섯 과제를 다시 나열하지 말고, 결과를 신학적으로 종합하자.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A. 원래 주장이 더 강하게 확인된 것

아우구스티누스. 믿음 → 먹음 → 그리스도 안에 거함 → 성령의 참여라는 흐름이 25논고에서 27논고까지 연속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26논고 18절은 요한복음 6:56을 직접 주해하면서 먹음을 거함으로 정의한다. 본편 Ⅹ장의 이동이 현대적 착상이 아님을, 그것도 직접 주해 층위에서 확인했다.

 

루터. 요한복음 6장을 성찬 논증에서 제외하고 믿음의 먹음으로 읽는다는 서술이 WA 6:502의 라틴어에서 오히려 더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in totum est seponendum, nec syllaba de sacramento loquitur—번역이 부드럽게 만든 부분이 있었을 뿐, 방향은 정확했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 문장의 출처까지 추적되었다.

 

칼빈.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실제로 참여한다는 구조가 요한복음 주석뿐 아니라 『기독교강요』 4권 17장에서 훨씬 깊고 조직적으로 확인되었다. vinculum(끈)과 canalis(통로)라는 성령론적 이미지, 그리고 4.17.31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들어 올리신다"는 구조가 그것이다.

 

웨스트민스터. really and indeed … spiritually가 고백의 실제 핵심 언어이며, 대요리문답 170문에서 truly and really … spiritually로 반복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 짝이 두 문서에서 반복된다는 사실은 그것이 의식적 정식임을 보여 준다.

 

소요리문답과 도르트. 묵상에 관한 본편의 수정된 표현이 소요리문답 88–90문과 정확히 맞물리며, 도르트 V.14가 하나님께서 은혜의 일을 계속하시는 통로 가운데 묵상을 명시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도르트 III/IV.17의 "영혼의 양식"이라는 표현은 본편 전체의 주제어와 겹친다.

B. 그대로 둘 수 없어서 더 조심스럽게 고친 것

이레네우스. 『이단 논박』 5.2.2–3은 요한복음 6장의 직접 주석이 아니다. "이레네우스는 요 6을 이렇게 해석했다"가 아니라 "그의 성육신·성찬·부활 신학이 요 6의 주제와 강하게 공명한다"로 낮추어야 한다. 아울러 이 대목의 본문은 그리스어 원문이 아니라 고대 라틴어 역본이 중심이라는 전승 사정도 밝혀야 한다.

 

크리소스톰. 그를 개혁파 성찬론의 직접 선구자로 만들 수 없다. 그는 요한복음 6장을 매우 강하게 성찬적으로 읽는 4세기 동방 설교자다. "이 구별이 훗날 개혁파 성찬론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계보적 진술은 "중요한 역사적 대화점을 제공한다"로 낮추어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1563년에는 여러 인쇄판이 있었고, 증거본문 목록은 고백 본문과 같은 무게를 갖지 않으며 판본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 인쇄본에는 현대식 장·절 번호 체계가 없으므로, 특정 초판 여백에 "요 15:1–6"이라는 표기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요 6과 요 15가 76문의 같은 조항을 뒷받침하는 성경 근거로 연결되는 읽기 자체는 1563년의 초기 전통에서 확인된다. 낮추어야 했던 것은 표기 형태에 대한 주장이지 연결 자체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29장 7항이 요한복음 6:63을 직접 주해하거나 그것을 고백의 언어로 옮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공명이라고 말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한 가지 교정). 유명한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는 26논고가 아니라 25논고 12절이다. 그리고 믿음-먹음-거함-성령이라는 네 단계는 그가 한 문장에서 공식화한 것이 아니라 연속된 강해를 종합한 구조다.

C. 단순한 표현보다 오히려 더 풍성해진 것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본편은 "먹음 = 믿음"이라는 등식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왜 피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칼빈의 4.17.5를 읽고 나서야 그 이유가 분명해졌다.

 

칼빈은 "먹는 것은 곧 믿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세운 구별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살은 믿음으로써 먹히며, 그 먹음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다. 말의 차이는 작지만 실제의 차이는 작지 않다.

 

그러므로 본편의 핵심 명제는 이렇게 다시 읽혀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읽으면 훨씬 풍성해진다.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곧 믿음으로 먹고, 그리스도께 실제로 참여하며, 성령으로 연합하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

 

여기에는 네 개의 서로 다른 동작이 있다. 믿음이 있고, 참여가 있고, 연합이 있고, 생명의 전달이 있다. 이것을 "먹음 = 믿음"이라는 한 줄로 압축하면 뒤의 셋이 사라진다.

이 변화가 본편의 중심 명제를 약화시켰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명제가 왜 그렇게 쓰여야만 했는지를 밝혀 주었다.


결론 — 원전 검증은 믿음을 메마르게 만드는가

우리가 왜 여기까지 갔는가

지금까지 PG와 PL, CCSL과 SC, WA와 CO, 그리고 16–17세기 초기 인쇄본까지 이야기했다. 성도들에게는 낯선 기호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왜 하는가. 옛 학자들의 이름을 많이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라틴어 문장을 인용하며 아는 척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 가운데서 자기 말씀을 어떻게 읽게 하셨는지를 더 정직하게 듣기 위해서다.

 

우리는 혼자 성경을 읽지 않는다. 우리보다 앞서 이 본문 앞에 앉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2세기의 리옹에서, 4세기의 안디옥에서, 5세기의 히포에서, 16세기의 비텐베르크와 제네바와 하이델베르크에서,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그들의 읽기를 듣는 것은 우리 읽기를 검증하는 일이다. 성경은 사적으로 풀 것이 아니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벧후 1:20), 그 말은 우리 각자가 혼자 옳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전을 확인하면 문장이 약해지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자. 이번 검증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던 문장 몇 개를 잃었다. "이레네우스는 요한복음 6장을 이렇게 읽었다"는 문장이 좋았다. 2세기의 증언이라는 무게가 있었으니까. "이 구별이 훗날 개혁파 성찬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문장도 좋았다. 크리소스톰에서 칼빈까지 곧게 이어지는 선이 그려졌으니까. "1563년의 하이델베르크가 이미 요 6과 요 15를 연결해 놓았다"는 문장은 특히 아까웠다.

 

그런데 그 문장들을 내려놓고 나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사람들이 실제로 한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레네우스가 요한복음 6장의 주석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그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가 보였다. 그는 육체를 경멸하는 사람들 앞에서 육체의 구원을 변호하고 있었다. 그 싸움은 요한복음 6장 강해보다 어쩌면 더 절박한 싸움이었다.

크리소스톰을 우리 편에서 놓아준 뒤에야, 그가 "육적인 청취"라고 부른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렸다. 그것은 4세기 안디옥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이델베르크의 증거본문 하나를 포기하고 나서야, 76문 본문 자체가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 보였다. 믿는 마음, 죄 사함, 영생, 성령, 그리고 점점 더 깊어지는 연합. 여백의 참조가 아니라 고백 자체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약화는 손실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 분명 이렇게 말했다"는 과장을 내려놓는 대신, 그 사람이 실제로 말한 것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자리에서는 예상보다 더 풍성했다

동시에, 내려놓은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하나의 완전한 흐름을 받았다.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25논고)에서 시작해서,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26논고)를 지나, "먹고 마셨다는 표지는 그가 거하고 있는가이다"(27논고 1절)를 거쳐, "성령의 참여에 이르기까지 먹고 마시라"(27논고 11절)에 이르는 흐름이다.

 

이것이 본편이 성경을 따라 얻은 흐름과 겹친다. 우연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요한복음 6장을 순서대로 강해했고, 우리도 요한복음 6장을 순서대로 따라갔기 때문이다. 같은 본문이 두 독자를 같은 곳으로 데려간 것이다.

 

루터에게서는 단호함을 받았다. 요한복음 6장은 성례에 관해 한 음절도 말하지 않는다는 그 문장은, 성찬론에서 우리와 가장 크게 갈라선 종교개혁자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겁다.

 

칼빈에게서는 정밀함을 받았다. 먹음이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는 구별, 성령이 끈이며 통로시라는 이미지,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 올려진다는 방향.

 

웨스트민스터에게서는 하나의 짝을 받았다. 참으로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 이 둘을 함께 붙드는 법.

이들을 하나의 목소리로 만들지 말자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이 모든 이름을 한 줄로 세워 놓고 "봐라, 교회는 언제나 이렇게 믿었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직하지 않고, 또 필요하지도 않다.

 

이레네우스는 성찬으로 양육된 육체가 부활한다고 말했다. 크리소스톰은 성찬 앞에서 떨라고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된 먹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라고 말하면서도 성례의 객관성을 진지하게 지켰다. 루터는 요한복음 6장을 성찬 논증에서 빼면서도 떡과 포도주 안의 실재적 임재를 끝까지 주장했다. 칼빈은 성령께서 우리를 하늘로 들어 올리신다고 말했다. 하이델베르크는 성령에 의한 연합을 고백했고, 웨스트민스터는 참으로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라고 고백했다.

 

이들은 한 목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실재하는 차이다. 지우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이 다양성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확신이 하나 있다. 본편에서 이미 말한 그것이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조잡한 육체적 섭취가 아니며, 동시에 단순한 심리적 회상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과 실제로 연결되는 일이다.

 

서로 다른 자리에 선 사람들이 이 한 가지에서 만난다는 사실이, 억지로 한 목소리로 만든 합창보다 훨씬 큰 증거다.

소유가 아니라 붙들림

본편은 이런 문장으로 끝났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이번 후속 검증도 같은 원리였다. 옛 문헌을 소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원어 단어와 판본 번호와 단(column) 숫자를 많이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런 것을 많이 아는 사람은 자기 주장을 더 그럴듯하게 만드는 재료를 더 많이 가진 사람일 뿐이다.

 

오히려 목적은 정반대다. 우리의 해석과 주장까지 말씀과 역사적 증거 앞에 붙들리게 하는 것이다. 이번 검증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그것이었다. 연구자가 자료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자료가 연구자의 말을 제한했다. 이레네우스의 본문은 내가 쓰고 싶었던 문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크리소스톰의 강해는 내가 그리고 싶었던 계보를 그리지 못하게 했다. 1563년의 인쇄 사정은 내가 걸고 싶었던 확언을 막았다.

 

그리고 바로 그 제한이 선물이었다. 왜냐하면 제한이 있는 곳에서만 실제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료가 내 말을 다 들어주면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자료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만 그 "예"에도 의미가 생긴다.

 

그러니 원전 검증도 결국 같은 종류의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주어진 말을 받아들이는 일.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 그러했다. 두루마리를 네 손으로 만들어 내라고 하지 않으셨다. 주는 것을 먹으라고 하셨다. 요한이 밧모에서 받은 명령도 그러했다. 천사의 손에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먹으라고 했다. 받는 자리에 서 있어야 먹을 수 있다.

원전 앞에 앉는 일도 그 자리에 서는 한 가지 방식이다. 우리가 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받는 자리. 우리 문장이 심판받는 자리. 그리고 놀랍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풍성한 것을 받게 되는 자리.

 

이 말씀을 먹으라.

 

그리고 우리가 그 말씀에 관하여 한 말까지도, 그 말씀 앞에 다시 가져가자.


각주

일러두기. 아래 각주는 시카고 방식(Notes and Bibliography)을 따르되, 각 자료에 대하여 ① 작품 내부 위치, ② 표준 비평판 또는 초기 인쇄본, ③ 필요할 경우 온라인 접근점의 순서로 제시한다. 필자가 본문을 직접 확인한 매체와, 표준 참조를 위해 병기한 위치를 구분하여 밝힌다. 라틴어·그리스어 인용은 실제로 확인한 것에 한정하며, 확인하지 못한 문장은 직접 인용 형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1]: Irenaeus, Adversus haereses 5.2.2–3. 본문은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에서 확인했다. 표준 참조 위치는 Sources Chrétiennes 153, 대략 pp. 34–35; cf. PG 7:1124B–1127B. 이 대목에서 이레네우스가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성경은 고전 10:16, 골 1:14, 엡 5:30, 눅 24:39, 고전 15:53, 고후 12:3 등이며 요한복음 6장은 인용되지 않는다. 이 사실이 본문에서 "직접 주석이 아니라 공명"이라고 진술한 근거다. 아울러 이 대목의 그리스어 원문은 전하지 않으며 고대 라틴어 역본이 본문의 기초가 된다. 라틴어 본문 대조는 W. Wigan Harvey, ed., Sancti Irenaei Episcopi Lugdunensis 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 vol. 2 (Cambridge: Typis Academicis, 1857)를 참조할 수 있으나, 필자는 SC 153을 직접 열람하지 않았으므로 이 위치는 표준 참조로만 제시한다.

[^2]: John Chrysostom, In Iohannem homiliae 47 (CPG 4425), 요 6:53–70 주해. 본문은 John Chrysostom,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trans. Charles Marriot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14,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7.htm에서 확인했다. 표준 참조 위치는 PG 59:23–482 수록, 6:63 관련 대목은 대략 PG 59:265. 크리소스톰은 "육은 무익하다"가 그리스도의 육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육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명시하며, 표준 영역이 이를 "carnally hearing"으로 옮긴다. PG 59:265의 그리스어 본문을 대조한 결과, 이 자리에서 사용되는 표현은 명사구 σαρκικὴ ἀκρόασις가 아니라 동사 형태 σαρκικῶς ἀκούειν 및 그 명사화 형태 τὸ σαρκικῶς ἀκοῦσαι이다. 따라서 본문의 "육적인 청취"는 개념적 요약으로만 사용하며, σαρκικὴ ἀκρόασις를 크리소스톰의 직접 인용처럼 제시하지 않는다. 신학적 요지—곧 요 6:63의 문제가 그리스도의 육체가 아니라 말씀을 육적으로 듣는 태도에 있다는 것—는 그대로 확인된다.

[^3]: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5.12. 라틴어: "Hoc est ergo manducare cibum non qui perit, sed qui permanet in vitam aeternam. Ut quid paras dentes et ventrem? Crede, et manducasti." 표준 참조 위치는 CCSL 36:254이며, 필자가 직접 확인한 라틴어 본문은 PL 35:1602 및 온라인 라틴어 전승에 근거한다. CCSL 36 자체의 비평본문과 비평장치 대조는 남은 문헌학적 최종 확인 과제다. 문맥은 요 6:27–29이며, 특히 6:29("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에 대한 강해다. 영역은 Augustine, "Tractate 25 (John 6:15–44),"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7,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8),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5.htm. 같은 논고 14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요 6:35의 "내게 오는 자"가 "나를 믿는 자"와 같으며 "주리지 아니하리라"가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와 같음을 명시한다. 본편의 첫 각주판이 이 문장을 26논고로 표기한 것은 오류이며, 이 글에서 25.12로 교정한다.

[^4]: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6.18. 라틴어: "Hoc est ergo manducare illam escam, et illum bibere potum, in Christo manere, et illum manentem in se habere." 요 6:56에 대한 직접 주해다. 같은 논고 12절은 참된 먹음을 "안에서 먹는 것, 마음으로 먹는 것"으로, 곧 밖에서 이로 누르는 것과 구별한다. 표준 참조 위치는 CCSL 36이며, 직접 확인한 라틴어 본문은 PL 35 및 온라인 라틴어 전승에 근거한다(CCSL 36의 비평본문 대조는 남은 과제다). 영역은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6.htm.

[^5]: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7.1, 27.11. 27논고 1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먹고 마셨다는 표지(signum)를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가에 둔다. 11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성례 안에서만(in Sacramento) 먹는 데 그치지 말고 성령의 참여에 이르기까지(usque ad spiritus participationem) 먹고 마시라고 권한다. 표준 참조 위치는 CCSL 36이며, 직접 확인한 라틴어 본문은 PL 35 및 온라인 라틴어 전승에 근거한다(CCSL 36의 비평본문 대조는 남은 과제다). 영역은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7.htm. 본문에서 제시한 "믿음 → 먹음 → 거함 → 성령의 참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문장에서 공식화한 도식이 아니라 25–27논고를 연속으로 읽어 종합한 구조임을 밝힌다.

[^6]: Martin Luther,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1520), WA 6:502.7f.: "Primum, c. vi. Iohannis in totum est seponendum, ut quod nec syllaba de sacramento loquitur." 루터는 요한복음 6장이 성찬 논증에서 전적으로 제쳐져야 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로 그때 성례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는 점과 문맥이 성육신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de fide … incarnati verbi)을 다룬다는 점을 든다. 이어 생명을 주는 먹음은 믿음의 먹음뿐이라고 논증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Crede, et manducasti"를 인용한다(같은 인용이 WA 6:518 부근, 전자판 §2.58에 다시 나온다). 표준판은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6 (Weimar: Hermann Böhlau, 1888), 497–573. 영역 접근점은 Martin Luther,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trans. Albert T. W. Steinhaeuser, ed.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본편 첫 각주판이 사용한 "§2.3"은 WA의 절 번호가 아니라 이 전자판이 부여한 문단 번호이므로, 학술 인용의 핵심 locator는 WA 6:502이다.

[^7]: John Calvin, 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 (1553), 요 6:54 주해. 칼빈은 요 6 전체를 성찬에 적용하는 해석을 거부하고, 여기서 말하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지속적이고 통상적인 방식"이라고 결론짓는다. CTS 영역본은 이 대목에 역주 163을 달아 프랑스어판 계열의 표현을 병기하는데, 그 문구가 "de la maniere perpetuelle et ordinaire de manger la chair de Christ, qui se fait par la foy seulement"이며, 성찬이 이 설교의 "seal and confirmation"이라는 취지가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이 표현은 프링글 개인의 신학적 덧붙임이 아니라 칼빈의 1553년 프랑스어판 계열을 반영한 것이나, 영어 본문 자체에 있던 문장인 것처럼 인용해서는 안 된다. 요 6:56 주해에서 칼빈은 "내 안에 거하고"를 그리스도와 우리의 "bond of union"으로 풀이하고, 믿음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길을 상상하는 것은 헛되다고 말하며 믿음이 "영혼의 입이며 위장"이라고 표현한다. 표준 수록판은 CO 47 (Corpus Reformatorum 75). 영역 접근점은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trans.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4.xii.ix.html.

[^8]: John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4.17.5. 칼빈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상이 아니라고 정의하는 견해를 소개한 뒤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참으로 그를 나누어 가짐으로 살아난다는 더 명확하고 숭고한 것을 가르치려 하셨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과 상대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그들에게 먹음은 곧 믿음이지만,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살은 믿음으로써 먹히며 그 먹음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는 것이다. 이어 "말의 차이는 작지만 실제의 차이는 작지 않다"고 덧붙인다. 같은 구별이 요 6:35 주해에도 나타나며, 거기서 칼빈은 먹음이 믿음 자체라기보다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고 말한다. 영역 접근점은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vi.xviii.html.

[^9]: John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4.17.1, 4.17.12, 4.17.31. 4.17.1은 성찬을 영적 잔치(spirituale epulum)로, 그리스도를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으로 제시한다. 4.17.12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머문다고 말하면서, 그 연결의 (vinculum)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그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종의 통로(canalis)가 되신다고 설명하고 태양 광선의 비유를 덧붙인다. 4.17.31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아래 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들어 올리시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영역 접근점은 위와 같다.

[^10]: Heidelberg Catechism (1563), Q. 76. 76문 본문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우리 안에도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몸과 "more and more" 연합되어 가는 것을 고백하며,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고 우리가 땅에 있으나 우리가 그의 살 중의 살이며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고 진술한다. 널리 쓰이는 온라인 판본의 증거본문에서 요 15:1–6은 마지막 조항의 증거로 요 6:56–58, 엡 4:15–16, 요일 3:24와 나란히 배치된다(https://www.catechesis.app/heidelberg/76/). 1563년에는 복수의 독일어 인쇄판과 라틴어판이 존재하며, 증거본문 목록은 고백 본문과 동일한 규범적 무게를 갖지 않고 판본에 따라 달라진다. 후속 검증에서 하이델베르크 대학 공개 디지털 영인본으로 1563년 제3판(Catechismus Oder Christlicher Vnderricht…, Heidelberg: Johann Mayer, 1563; VD16 P 2166)을 확인한 결과, 초기 인쇄본에는 현대식 장·절 번호 체계가 그대로 적용되어 있지 않으나, 초기 하이델베르크 전통 안에서 요한복음 6장과 요한복음 15장이 76문의 같은 연합·생명 조항을 뒷받침하는 성경 근거로 연결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1563년 초판 여백에 요 15:1–6이라는 표기가 있었다"고 단정하지 않으며, 동시에 두 본문의 연결이 후대에 비로소 생겼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본문의 논증은 여전히 76문 본문 자체가 담고 있는 구조에 근거한다.

[^1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 29.7: "inwardly by faith, really and indeed, yet not carnally and corporally but spiritually." 접근점은 New Life Presbyterian Church (PCA), https://www.newlifepca.com/resources/the-westminster-confession-of-faith/. 아울러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7), Q. 170은 합당한 수찬자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spiritually), 그러나 참으로 실제로(truly and really) 먹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그 죽음의 모든 유익을 자기에게 적용한다고 설명한다. 접근점은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a/anonymous/westminster2/cache/westminster2.pdf. 판본 사항: 신앙고백서는 1646년 본문 완성·제출 이후 성경 증거구절이 부착된 판이 별도로 간행되었고, 대·소요리문답은 1647년 초기판과 1648년 증거구절판을 구별한다. 따라서 증거구절을 고백 본문과 동일한 규범적 무게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또한 WCF 29.7이 요 6:63을 직접 주해하거나 그것을 고백의 언어로 옮긴 것이라는 문헌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본편의 해당 표현을 "공명"으로 교정한다.

[^12]: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7), qq. 88–90. 88문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유익을 전달하시는 외적이고 통상적인 방편을 그의 규례들,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로 규정한다. 89문은 성령께서 말씀의 읽기와 특별히 설교를 죄인을 깨우치고 회개시키며 거룩하게 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삼으신다고 답한다. 90문은 말씀을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받고 들으며,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간직하며, 삶에서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접근점은 Westminster Standards, https://westminsterstandards.org/westminster-shorter-catechism/.

[^13]: Canons of Dort (1618–19), 셋째·넷째 교리 17항; 다섯째 교리 14항. III/IV.17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중생 사역이 복음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큰 지혜로 복음을 중생의 씨앗이자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다고 고백한다. V.14는 하나님께서 복음의 선포로 시작하신 은혜의 사역을 복음을 듣고 읽는 것, 그것을 묵상하는 것, 복음의 권면과 경고와 약속, 그리고 성례의 사용을 통하여 보존하고 계속하고 완성하신다고 고백한다. 문장의 주어가 하나님이시고 목적어가 복음이므로, 이 조항이 묵상을 말씀·성례와 병렬하는 독립적 은혜의 방편으로 세우는 것은 아니다. 접근점은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The Canons of Dort,"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canons-dort?language=en. (해당 영역본은 2011년 승인 번역본으로 저작권이 있으므로 직접 인용 대신 요약으로 다루었다.)

 

참고문헌

1차 자료 — 교부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CXXIV. Edited by Radbodus Willems. 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36. Turnhout: Brepols, 1954.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CXXIV. Patrologia Latina 35. Edited by J.-P. Migne. Paris, 1841.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Translated by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7,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8.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htm.

Chrysostom, John. In Iohannem homiliae. CPG 4425. Patrologia Graeca 59:23–482. Edited by J.-P. Migne. Paris, 1862.

Chrysostom, John.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Translated by Charles Marriot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4,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9.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7.htm.

Irenaeus. Contre les hérésies, Livre V. Sources Chrétiennes 153. Paris: Éditions du Cerf, 1969.

Irenaeus. Adversus haereses. Patrologia Graeca 7. Edited by J.-P. Migne. Paris, 1857.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lated by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5.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

Irenaeus. Sancti Irenaei Episcopi Lugdunensis 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 Vol. 2. Edited by W. Wigan Harvey. Cambridge: Typis Academicis, 1857.

1차 자료 — 종교개혁

Calvin, John. 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 1553. In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vol. 47. Corpus Reformatorum 75. Brunswick: C. A. Schwetschke, 1892.

Calvin, John. Commentaire de M. Iean Calvin sur l'Evangile selon sainct Jean. 1553.

Calvin, Joh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Translated by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4.xii.ix.html.

Calvin, Joh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59. Book 4, chap. 17.

Calvin, Joh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lated by Henry Beveridg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vi.xviii.html.

Luther, Martin.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1520. In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6, 497–573. Weimar: Hermann Böhlau, 1888.

Luther, Martin.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Translated by Albert T. W. Steinhaeuser. Edited by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신앙고백 문서

Canons of Dort. 1618–19.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canons-dort?language=en.

Heidelberg Catechism. 1563. Question 76. Catechesis. https://www.catechesis.app/heidelberg/76/.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 Chapter 29. New Life Presbyterian Church (PCA). https://www.newlifepca.com/resources/the-westminster-confession-of-faith/.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7. Question 17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a/anonymous/westminster2/cache/westminster2.pdf.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7. Questions 88–90. Westminster Standards. https://westminsterstandards.org/westminster-shorter-catechism/.

 

남은 비평판 최종 확인

이 후속 검증으로 여섯 과제의 실질적 내용은 대체로 닫혔다. 크리소스톰의 그리스어 표현은 PG 59:265에서 확인했고, 하이델베르크는 1563년 제3판 영인본으로, 웨스트민스터는 1646/47–48년 본문판과 증거구절판의 관계로 정리되었다. 지금 남은 것은 현대 표준 비평판을 통한 문헌학적 최종 확인 두 가지이며, 이는 현재의 역사신학적 결론을 보류하게 만드는 성격의 미검증이 아니다.

  1. SC 153 직접 열람. 이레네우스 Adversus haereses 5.2.2–3의 고대 라틴어 본문, 현존 그리스어 단편, 비평장치(apparatus)를 Sources Chrétiennes 153에서 최종 대조하는 일.
  2. CCSL 36 직접 열람. 아우구스티누스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5–27의 비평본문을 확인하고, PL 35와의 이독(異讀) 및 비평장치를 점검하는 일.

이 목록을 남기는 이유는 앞의 본문에서 말한 것과 같다. 우리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을 확인한 것처럼 말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뒤에 오는 사람이 우리가 멈춘 자리에서 이어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1. Irenaeus, Adversus haereses 5.2.2–3. 본문은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 에서 확인했다. 표준 참조 위치는 Sources Chrétiennes 153, 대략 pp. 34–35; cf. PG 7:1124B–1127B. 이 대목에서 이레네우스가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성경은 고전 10:16, 골 1:14, 엡 5:30, 눅 24:39, 고전 15:53, 고후 12:3 등이며 요한복음 6장은 인용되지 않는다. 이 사실이 본문에서 "직접 주석이 아니라 공명"이라고 진술한 근거다. 아울러 이 대목의 그리스어 원문은 전하지 않으며 고대 라틴어 역본이 본문의 기초가 된다. 라틴어 본문 대조는 W. Wigan Harvey, ed., Sancti Irenaei Episcopi Lugdunensis 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 vol. 2 (Cambridge: Typis Academicis, 1857)를 참조할 수 있으나, 필자는 SC 153을 직접 열람하지 않았으므로 이 위치는 표준 참조로만 제시한다.
  2. John Chrysostom, In Iohannem homiliae 47 (CPG 4425), 요 6:53–70 주해. 본문은 John Chrysostom,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trans. Charles Marriot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14,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7.htm 에서 확인했다. 표준 참조 위치는 PG 59:23–482 수록, 6:63 관련 대목은 대략 PG 59:265. 크리소스톰은 "육은 무익하다"가 그리스도의 육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육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명시하며, 표준 영역이 이를 "carnally hearing"으로 옮긴다. 그리스어 개념은 σαρκικὴ ἀκρόασις("육적인 청취")이다. 다만 필자는 PG 59의 그리스어 본문을 직접 대조하지 않았으므로, 특정 그리스어 문장을 직접 인용 형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 대조는 후속 과제로 남긴다.
  3.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5.12. 라틴어: "Hoc est ergo manducare cibum non qui perit, sed qui permanet in vitam aeternam. Ut quid paras dentes et ventrem? Crede, et manducasti." 위치는 CCSL 36:254; PL 35:1602. 문맥은 요 6:27–29이며, 특히 6:29("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에 대한 강해다. 영역은 Augustine, "Tractate 25 (John 6:15–44),"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7,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8),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5.htm. 같은 논고 14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요 6:35의 "내게 오는 자"가 "나를 믿는 자"와 같으며 "주리지 아니하리라"가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와 같음을 명시한다. 본편의 첫 각주판이 이 문장을 26논고로 표기한 것은 오류이며, 이 글에서 25.12로 교정한다.
  4.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6.18. 라틴어: "Hoc est ergo manducare illam escam, et illum bibere potum, in Christo manere, et illum manentem in se habere." 요 6:56에 대한 직접 주해다. 같은 논고 12절은 참된 먹음을 "안에서 먹는 것, 마음으로 먹는 것"으로, 곧 밖에서 이로 누르는 것과 구별한다. 위치는 CCSL 36; PL 35. 영역은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6.htm.
  5.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7.1, 27.11. 27논고 1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먹고 마셨다는 표지(signum)를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가에 둔다. 11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성례 안에서만(in Sacramento) 먹는 데 그치지 말고 성령의 참여에 이르기까지(usque ad spiritus participationem) 먹고 마시라고 권한다. 위치는 CCSL 36; PL 35. 영역은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7.htm. 본문에서 제시한 "믿음 → 먹음 → 거함 → 성령의 참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문장에서 공식화한 도식이 아니라 25–27논고를 연속으로 읽어 종합한 구조임을 밝힌다.
  6. Martin Luther,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1520), WA 6:502.7f.: "Primum, c. vi. Iohannis in totum est seponendum, ut quod nec syllaba de sacramento loquitur." 루터는 요한복음 6장이 성찬 논증에서 전적으로 제쳐져야 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로 그때 성례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는 점과 문맥이 성육신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de fide … incarnati verbi)을 다룬다는 점을 든다. 이어 생명을 주는 먹음은 믿음의 먹음뿐이라고 논증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Crede, et manducasti"를 인용한다(같은 인용이 WA 6:518 부근, 전자판 §2.58에 다시 나온다). 표준판은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6 (Weimar: Hermann Böhlau, 1888), 497–573. 영역 접근점은 Martin Luther,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trans. Albert T. W. Steinhaeuser, ed.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본편 첫 각주판이 사용한 "§2.3"은 WA의 절 번호가 아니라 이 전자판이 부여한 문단 번호이므로, 학술 인용의 핵심 locator는 WA 6:502이다.
  7. John Calvin, 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 (1553), 요 6:54 주해. 칼빈은 요 6 전체를 성찬에 적용하는 해석을 거부하고, 여기서 말하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지속적이고 통상적인 방식"이라고 결론짓는다. CTS 영역본은 이 대목에 역주 163을 달아 프랑스어판 계열의 표현을 병기하는데, 그 문구가 "de la maniere perpetuelle et ordinaire de manger la chair de Christ, qui se fait par la foy seulement"이며, 성찬이 이 설교의 "seal and confirmation"이라는 취지가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이 표현은 프링글 개인의 신학적 덧붙임이 아니라 칼빈의 1553년 프랑스어판 계열을 반영한 것이나, 영어 본문 자체에 있던 문장인 것처럼 인용해서는 안 된다. 요 6:56 주해에서 칼빈은 "내 안에 거하고"를 그리스도와 우리의 "bond of union"으로 풀이하고, 믿음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길을 상상하는 것은 헛되다고 말하며 믿음이 "영혼의 입이며 위장"이라고 표현한다. 표준 수록판은 CO 47 (Corpus Reformatorum 75). 영역 접근점은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trans.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4.xii.ix.html.
  8. John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4.17.5. 칼빈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상이 아니라고 정의하는 견해를 소개한 뒤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참으로 그를 나누어 가짐으로 살아난다는 더 명확하고 숭고한 것을 가르치려 하셨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과 상대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그들에게 먹음은 곧 믿음이지만,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살은 믿음으로써 먹히며 그 먹음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는 것이다. 이어 "말의 차이는 작지만 실제의 차이는 작지 않다"고 덧붙인다. 같은 구별이 요 6:35 주해에도 나타나며, 거기서 칼빈은 먹음이 믿음 자체라기보다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고 말한다. 영역 접근점은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vi.xviii.html.
  9. John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4.17.1, 4.17.12, 4.17.31. 4.17.1은 성찬을 영적 잔치(spirituale epulum)로, 그리스도를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으로 제시한다. 4.17.12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머문다고 말하면서, 그 연결의 (vinculum)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그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종의 통로(canalis)가 되신다고 설명하고 태양 광선의 비유를 덧붙인다. 4.17.31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아래 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들어 올리시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영역 접근점은 위와 같다.
  10. Heidelberg Catechism (1563), Q. 76. 76문 본문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우리 안에도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몸과 "more and more" 연합되어 가는 것을 고백하며,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고 우리가 땅에 있으나 우리가 그의 살 중의 살이며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고 진술한다. 널리 쓰이는 온라인 판본의 증거본문에서 요 15:1–6은 마지막 조항의 증거로 요 6:56–58, 엡 4:15–16, 요일 3:24와 나란히 배치된다(https://www.catechesis.app/heidelberg/76/). 다만 1563년에는 복수의 인쇄판이 존재하며, 증거본문 목록은 본문과 동일한 규범적 무게를 갖지 않고 판본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 독일어판·라틴어판의 여백 참조가 어떤 형태였는지는 해당 인쇄본(예: Heidelberg: Johann Mayer, 1563; VD16 계열)의 영인본을 직접 대조해야 확정할 수 있으며, 필자는 이 대조를 완료하지 못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이 목록에 논증의 무게를 걸지 않고, 76문 본문 자체가 담고 있는 구조에 근거하여 진술했다.
  1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 29.7: "inwardly by faith, really and indeed, yet not carnally and corporally but spiritually." 접근점은 New Life Presbyterian Church (PCA), https://www.newlifepca.com/resources/the-westminster-confession-of-faith/. 아울러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7), Q. 170은 합당한 수찬자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spiritually), 그러나 참으로 실제로(truly and really) 먹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그 죽음의 모든 유익을 자기에게 적용한다고 설명한다. 접근점은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a/anonymous/westminster2/cache/westminster2.pdf. 판본 사항: 신앙고백서는 1646년 본문 완성·제출 이후 성경 증거구절이 부착된 판이 별도로 간행되었고, 대·소요리문답은 1647년 초기판과 1648년 증거구절판을 구별한다. 따라서 증거구절을 고백 본문과 동일한 규범적 무게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또한 WCF 29.7이 요 6:63을 직접 주해하거나 그것을 고백의 언어로 옮긴 것이라는 문헌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본편의 해당 표현을 "공명"으로 교정한다.
  12.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7), qq. 88–90. 88문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유익을 전달하시는 외적이고 통상적인 방편을 그의 규례들,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로 규정한다. 89문은 성령께서 말씀의 읽기와 특별히 설교를 죄인을 깨우치고 회개시키며 거룩하게 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삼으신다고 답한다. 90문은 말씀을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받고 들으며,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간직하며, 삶에서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접근점은 Westminster Standards, https://westminsterstandards.org/westminster-shorter-catechism/.
  13. Canons of Dort (1618–19), 셋째·넷째 교리 17항; 다섯째 교리 14항. III/IV.17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중생 사역이 복음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큰 지혜로 복음을 중생의 씨앗이자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다고 고백한다. V.14는 하나님께서 복음의 선포로 시작하신 은혜의 사역을 복음을 듣고 읽는 것, 그것을 묵상하는 것, 복음의 권면과 경고와 약속, 그리고 성례의 사용을 통하여 보존하고 계속하고 완성하신다고 고백한다. 문장의 주어가 하나님이시고 목적어가 복음이므로, 이 조항이 묵상을 말씀·성례와 병렬하는 독립적 은혜의 방편으로 세우는 것은 아니다. 접근점은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The Canons of Dort,"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canons-dort?language=en. (해당 영역본은 2011년 승인 번역본으로 저작권이 있으므로 직접 인용 대신 요약으로 다루었다.)

 

 

 

AI 활용 안내 — 이 글의 문제의식과 중심 논지, 신학적 판단, 자료의 채택과 최종 문장은 필자에게 있다. 작성 과정에서는 생성형 AI를 연구와 편집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였다.
ChatGPT 5.6은 사전 조사와 쟁점의 구조화에, Claude Fable/Opus 5은 초고의 표현 및 참고문헌·각주 형식의 정돈에, Perplexity Pro는 관련 논문과 온라인 원문 자료의 탐색에 사용하였다.
AI가 제시한 내용은 그 자체를 권위 있는 출처로 삼지 않았으며, 접근 가능한 성경 원문, 교부 문헌, 신경과 공의회 문서, 공식 교리서 및 개혁파 신앙고백 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다시 대조하였다. 자료의 해석과 남아 있을 수 있는 오류를 포함한 글의 최종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두루마리에서 생명의 떡까지, 말씀을 먹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삶


들어가며 — 왜 "읽으라"가 아니라 "먹으라"인가

성경에는 우리를 잠시 멈춰 세우는 기묘한 장면들이 있다. 에스겔 2–3장이 그렇다.

 

바벨론 그발 강가, 포로로 끌려온 백성 가운데 있던 한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지자로 세우신다. 그런데 그를 세우시는 방식이 우리의 예상과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설교문을 건네주지 않으신다. 말씀을 암송하라고 하지도, 받아 적으라고 하지도, 심지어 읽으라고 하지도 않으신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겔2:8)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앞에 두루마리를 펴신다.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겔2:10)

 

이어 3장의 첫 문장이 다시 한 번 못을 박는다.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겔3:1)

(개역한글은 이 대목을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로 옮긴다. 어느 번역을 따르든 명령의 핵심은 같다. 먹으라.)

 

읽으라가 아니다. 연구하라가 아니다. 외우라도 아니다.

 

먹으라.

 

이 한 마디에서 이 글은 출발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말씀을 읽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먹으라고 하셨을까? 이것은 단순한 수사(修辭)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성경이 처음부터 붙들고 있던 어떤 진실을 드러내는 표현일까?

 

이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우리는 놀랍게도 에스겔의 두루마리에서 멈추지 않고 광야의 만나로, 꿀보다 단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으로, 갈릴리 호숫가에서 떼어 주신 떡으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라는 선언으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젖과 단단한 음식의 비유로, 목마른 자에게 열린 생수의 강으로, 그리고 마침내 밧모 섬에서 또 하나의 두루마리를 삼키는 한 사도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이 글이 도달하려는 명제를 미리 밝혀 두는 것이 좋겠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오래 되새겨 그 맛을 알고, 성령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 그분 안에 거하며,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판단과 삶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씀에 의해 지각이 훈련되고 성도가 장성하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생명이 열매와 증언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다만 시작하면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이 글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먹음"이 같은 뜻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에스겔이 삼킨 두루마리, 예레미야가 얻어먹은 말씀,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이신 성자,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떡, 요한복음 15장의 "내 말", 히브리서 5장의 "의의 말씀", 요한계시록 10장의 작은 두루마리는 각각 자기 문맥과 자기 의미를 가진 본문들이다. 단어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이것들을 하나로 눌러 붙이면, 그것은 성경 연구가 아니라 성경을 재료 삼은 말장난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각 본문을 그 자리에서 읽고, 그 다음에 성경 전체에 걸쳐 반복되고 발전하는 하나의 모티프—말씀, 양식, 섭취, 생명, 내면화, 그리스도, 연합, 거함, 성장, 분별, 열매, 증언—가 어떻게 서로 울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수렴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직접적인 주해와 정경적 연결을 구별하는 이 태도는 글의 신중함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성경을 성경으로 대접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다

에스겔의 장면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장면을 성경의 더 큰 흐름에서 떼어놓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말씀을 듣는 것을 먹는 것으로 말하는 어법은 에스겔에게서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광야에서 시작되었다.

신명기 8:3 — 만나가 가르친 것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세는 지난 사십 년을 회고한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이 구절의 논리를 천천히 보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리게 하신 것도, 만나를 주신 것도, 하나의 교육 과정이었다.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서인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목할 것은 이 진리가 만나를 부정함으로써가 아니라 만나를 먹임으로써 가르쳐졌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굶주린 백성에게 실제로 양식을 주셨다. 그리고 그 양식은 밭에서 나지도, 저축할 수도, 사람이 만들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날 몫만 거둘 수 있었으며, 쌓아 두려 하면 썩었다. 이스라엘은 사십 년 동안 매일 아침 자신의 생존이 자기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달려 있음을 몸으로 배웠다.

 

여기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추상적인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만나를 있게 하시고, 거두게 하시고, 안식일에는 그치게 하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명령이다. 사람은 그 말씀에 의존하여 산다. 육체가 떡을 필요로 하는 것이 비유가 아니듯, 사람이 말씀으로 산다는 것도 비유적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실제 조건에 대한 진술이다.

마태복음 4:4 — 광야에서 다시 울리는 말씀

그리고 이 구절은 성경 안에서 다시 한 번, 결정적인 자리에서 인용된다. 사십 년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그 자리에, 사십 일을 금식하신 한 분이 서신다. 시험하는 자가 말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주님께서는 신명기 8:3을 인용하시면서, 그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신다. 참 이스라엘로서, 참 사람으로서 그분은 떡보다 아버지의 말씀에 매달리기를 택하신다. 배고픔이 거짓말이어서가 아니다. 배고픔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 매달려 있는 더 깊은 자리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사셨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알려 준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굶주린 사람에게 던지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 굶주림 한복판에서도 사람을 붙드는 실제적인 생명의 통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가장 철저하게 살아내신 분이 곧 나중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라고 말씀하실 그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 두어야 한다.

아모스 8:11 — 말씀의 기근

말씀이 양식이라면, 말씀의 부재는 기근이다. 아모스는 임할 심판을 이렇게 예고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재앙 가운데 하나가 말씀의 기근이라는 것이다. 곳간이 가득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지면 그 백성은 굶주린다. 이것은 말씀이 정말로 양식이라는 성경의 인식을 뒤집어 확인해 준다.

시편 119:103 — 꿀보다 단 말씀

말씀은 생존을 위한 배급 식량만이 아니다. 그것은 맛이 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맛본다. 그리고 그 맛을 표현할 때 꿀을 끌어온다.

여기서 잠깐 멈추어 물어야 한다. 말씀의 이 단맛은 어디에서 오는가? 본문을 한 번 눈으로 훑고 지나가는 사람은 이 맛을 알기 어렵다. 시편 119편 전체가 증언하듯이, 이 사람은 말씀을 밤낮 되새기고, 그 말씀 때문에 밤에 깨어 있고, 그 말씀을 사랑하여 종일 읊조리는 사람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시119:15)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119:97)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119:148)

 

맛은 오래 씹는 사람에게 열린다. 이 사실은 뒤에서 묵상을 다룰 때 다시 붙들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15:16 —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그리고 여기, 에스겔의 두루마리와 요한계시록의 작은 두루마리 사이를 잇는 매우 중요한 구약의 고리가 있다. 예레미야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

 

예레미야는 말씀을 "얻어 먹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기에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시편 119편의 단맛이 여기서 다시 들린다.

 

그러나 예레미야 15장의 문맥은 결코 달콤하지 않다. 이 고백 바로 앞뒤로 그는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자신이 온 땅에 다투는 자가 되었다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주께서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라고까지 부르짖는다. 말씀을 먹은 그 사람이 동시에 그 말씀 때문에 조롱과 고립과 고통 속에 있다.

 

이 조합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먹은 자에게 기쁨이 되지만, 그 기쁨은 고통을 면제해 주는 종류의 기쁨이 아니다. 이 긴장은 계시록 10장에서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배에서는 쓰다"는 이미지로 다시 우리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Ⅱ.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 — 말씀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다

이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자. 에스겔에게 주어진 명령은 하나의 순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순서 자체가 신학이다.

하나님의 순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3:2–3)

 

여기서 동사들을 차례로 따라가 보라.

 

받음 → 먹음 → 배에 넣음 → 창자에 채움 → 마음으로 받음 → 가서 말함.

 

앞의 셋은 이미 보았다. 나머지는 조금 뒤에 나온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3:10–11)

 

이 순서에서 무엇이 드러나는가?

 

첫째, 말씀이 선지자의 가장 바깥이 아니라 가장 안쪽으로 들어간다. 입에서 배로, 배에서 창자로, 그리고 마음으로. 히브리어의 이 표현들은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 감정과 의지와 존재의 중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에스겔의 손에 쥐어 주지 않으시고 그의 속에 넣으신다.

 

둘째, "가서 말하라"는 명령이 먹은 다음에 온다. 이 순서는 뒤집을 수 없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 옮기는 우편배달부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전할 말씀을 먼저 자기 안에 받은 사람이다. 말씀은 그를 통과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물러 그를 채운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입을 연다.

 

셋째, 그 말씀의 맛이 꿀 같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두루마리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 기억하라.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었다(겔2:10). 심판의 말씀이었다. 듣는 자들이 듣지 않을 말씀이었고, 전하는 자에게 고난을 안길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입에서 꿀같이 달았다.

 

왜 그런가? 그 말씀이 유쾌한 내용이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 자체,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그들에게 말을 거신다는 사실 자체가 이 선지자에게는 단 것이었다.

말씀은 사람을 통과하지 않고 사람을 채운다

에스겔의 이 장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경의 이해를 압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보 전달이 목적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는 명확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안개 같은 종교적 정서가 아니라 분명한 언어로 주어진 계시다. 그러나 그 말씀의 목적지는 사람의 기억 장치가 아니라 사람의 존재 전체다.

 

그러므로 "왜 읽으라가 아니라 먹으라인가?"라는 우리의 첫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이것이다.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읽기가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음식은 눈으로 보고 이름을 알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먹혀서 그 사람의 피와 살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그런 것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주 실제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좋다. 말씀을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먹는가? 우리 손에 있는 것은 두루마리가 아니라 성경책이고, 우리는 그것을 삼킬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해 성경 자신이 이미 하나의 대답을 마련해 두었다. 그것이 묵상이다.

 

 

 

Ⅲ. 읽는 데서 먹는 데로 — 묵상, 말씀을 오래 씹는 시간

성경을 읽는 것이 음식을 입 앞에 가져다 놓는 일이라면, 묵상은 그것을 입에 넣고 오래 씹어 삼키는 일이다. 이 비유를 기계적으로 밀어붙일 필요는 없지만, 성경 자체가 묵상을 말할 때 사용하는 언어는 놀랍도록 이 방향을 가리킨다.

시편 1편 —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시편 전체의 문을 여는 첫 시편이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묘사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여기서 "묵상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הגה, 하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생각한다는 뜻만이 아니다. 이 단어는 낮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 중얼거리는 것, 되뇌는 것을 가리킨다. 짐승이 먹은 것을 다시 되새기는 모습을 떠올려도 좋다. 시편 119편에서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라고 옮겨진 말이 바로 이 계열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한 번 읽고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 말씀을 입에 물고, 되뇌고, 낮에도 밤에도 그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이다. "주야로"라는 표현은 시간의 양을 말하기 전에 삶의 방향을 말한다. 그의 하루가 그 말씀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해 시편은 곧바로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3)

 

이 이미지를 자세히 보라.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그 열매의 근거는 나무의 노력이 아니라 나무가 심긴 자리다. 시냇가에 심겼기 때문에, 뿌리가 물에 닿아 있기 때문에, 그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가뭄이 와도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에세이 후반부에 다시 만나게 될 그림을 미리 보고 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 둘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조심스럽게 연결해야 한다. 시편 1편이 요한복음 15장의 직접적인 예표라고 주장할 근거는 본문에 없다. 시편 1편의 직접적인 주제는 토라를 묵상하는 의인과 바람에 나는 겨 같은 악인의 대조이며, 요한복음 15장의 직접적인 주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생명적 연합이다. 두 본문은 각각 자기 자리에서 읽혀야 한다.

 

그러나 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이 둘 사이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공명이 있다.

 

말씀 안에 머묾 → 생명의 근원에 뿌리내림 → 생명을 공급받음 → 때를 따라 열매를 맺음.

 

시편 1편에서는 그 머묾이 "주야로 묵상함"으로,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내 안에 거함"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함"으로 나타난다. 어휘를 등치시키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처음부터 열매 맺는 삶을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삶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에 붙어 있는 삶으로 그려 왔다는 것이다.

여호수아 1:8 — 묵상은 순종을 향한다

묵상이 자칫 내면의 취미처럼 오해될 수 있기에, 성경은 처음부터 묵상을 순종에 붙들어 매어 놓았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여기서 세 가지가 한 문장 안에 묶여 있다.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 것, 주야로 묵상하는 것, 그리고 기록된 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묵상은 전투와 분리된 경건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요단을 건너 전쟁을 치러야 할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에게 이 말씀을 주셨다.

 

그러므로 참된 묵상은 반드시 순종으로 향한다. 말씀을 깊이 생각했는데 삶의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묵상이 깊었던 것이 아니라 아직 삼키지 않은 것이다.

묵상이란 무엇인가

이제 묵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려 보자. 묵상은 성경을 천천히 읽는 기술이 아니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며,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읽음 → 되새김 → 맛봄 → 마음에 머물게 함 → 기도로 응답함 → 삶에 적용함 → 반복하여 살아냄 → 말씀에 의해 형성됨.

 

하나씩 보자.

 

읽음.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에서 시작한다. 묵상은 내 생각을 깊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앉는 일이다. 그러므로 본문 없는 묵상은 없다.

 

되새김. 한 번 읽고 넘어간 구절은 대개 우리 안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같은 구절로 돌아오고, 다시 읽고, 낮은 소리로 읊조리고, 하루 중에 다시 떠올릴 때 그 말씀은 비로소 우리 안에 자리를 잡는다. 시편 1편의 "주야로"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맛봄. 되새기는 사람에게 말씀은 맛을 낸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라는 고백은 분석의 결론이 아니라 경험의 고백이다. 시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도 권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맛보는 것과 아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마음에 머물게 함.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말씀이 마음에 있다는 것은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뜻을 넘어, 그 말씀이 우리가 판단하고 욕망하는 자리에 함께 있다는 뜻이다.

 

기도로 응답함. 이것이 결정적이다. 묵상은 독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대답한다. 읽은 말씀으로 감사하고, 그 말씀이 드러낸 죄를 자백하고, 그 말씀이 약속한 것을 구한다. 묵상과 기도를 분리하면 묵상은 종교적 사색으로 변질된다. 성경의 묵상은 언제나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삶에 적용하고 반복하여 살아냄. 그리고 그 말씀이 오늘 나의 어떤 판단, 어떤 관계, 어떤 습관을 건드리는지를 구체적으로 묻고 그대로 행한다. 여호수아 1:8이 말한 자리가 여기다.

 

말씀에 의해 형성됨. 이 모든 과정이 반복될 때 일어나는 일이 있다. 우리가 말씀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빚기 시작한다. 이것이 묵상의 목적지다.

묵상은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반드시 붙여야 할 말이 있다. 묵상을 정신집중이나 자기암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말씀을 읽고 되새기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하는 일이다. 성경을 펴는 것도, 시간을 내는 것도, 다시 읽는 것도 우리가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밝히 보여 주시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며, 믿음과 순종을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경은 이 사실을 곳곳에서 증언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하신 일도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신 것이었다(눅24:45).

 

그러므로 말씀을 맛보고 섭취하는 과정은 텍스트 + 집중력의 결과가 아니라,말씀 + 성령 + 믿음의 역사다. 이 구별은 매우 실제적이다. 앞의 공식을 따르면 묵상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나뉘는 기술 훈련이 되고, 결국 성과와 죄책감의 문제가 된다. 뒤의 공식을 따르면 묵상은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믿음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경건의 실천이 된다.

 

이 표현은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개혁파 신앙고백의 전통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정하신 통상적인 방편을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로 규정해 왔다. 그러므로 묵상 자체를 말씀·성례와 나란히 놓인 독립적인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렇다.

 

묵상은 성령께서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우리 마음에 깊이 적용하시는 가운데, 성도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되새기고 기도로 응답하며 순종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경건의 실천이다.[*1]

 

이 구별은 말장난이 아니다. 은혜를 주시는 통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말씀이지 우리의 묵상 행위가 아니다. 묵상은 그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가져다 놓고 머무는 일이지, 우리가 그 자리에서 은혜를 생산해 내는 일이 아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묵상은 곧바로 영적 성취의 도구가 되고, 우리는 다시 자기 경건의 성적표 앞에 서게 된다.

말씀에는 단맛만 있지 않다

묵상을 이야기할 때 조심해야 할 오해가 하나 더 있다. 묵상이 언제나 위로와 감동을 주는 시간이라는 기대다. 에스겔의 두루마리는 입에 꿀같이 달았지만 그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얻어 먹고 기쁨을 얻었지만 바로 그 말씀 때문에 홀로 앉아 분노와 조롱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뒤에서 보겠지만 요한이 삼킨 작은 두루마리는 입에서는 꿀 같았으나 배에서는 썼다.

 

말씀은 우리를 위로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고, 회개를 요구하고, 우리가 아끼는 욕망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말한다(히4:12).

 

그러므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골라 맛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묵상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위로만이 아니라 심판과 회개와 순종과 고난의 요구까지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 오히려 이 쓴맛을 견디지 못하고 늘 단 것만 찾는 독서는, 아무리 성경책을 손에 들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라 하기 어렵다.

성도에게 드리는 물음

그러니 잠시 자신의 성경 읽기를 돌아보아도 좋겠다. 다만 이것을 점수표로 삼지는 말자. 이 물음들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식탁으로 초대하려는 것이다.

  • 나는 그 말씀 앞에 잠시라도 머물렀는가, 아니면 진도만 나갔는가.
  • 한 구절을 하루 중에 다시 떠올려 되새긴 적이 있는가.
  • 그 말씀의 단맛뿐 아니라 나를 찌르는 쓴맛도 받아들였는가.
  • 읽은 그 말씀으로 하나님께 아뢰었는가.
  • 그 말씀이 나의 판단 하나를 바꾸도록 허락했는가.
  • 그리고 그 말씀을 오늘 한 가지라도 순종했는가.

성경을 몇 장 읽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 안에 머물렀는가이다. 많이 읽는 것은 좋은 일이고 권할 일이다. 그러나 많이 읽는 것과 먹는 것은 같지 않다.

 

 

 

Ⅳ. 잠깐 멈추어 — 같은 단어, 다른 본문

이제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두루마리에서 그리스도께로 건너가려 한다. 그 전에 앞서 예고한 주해적 안전장치를 분명히 세워 두어야 한다. 이 한 절(節)이 이 글의 신뢰성을 지탱한다. 성경에는 "말씀"이라는 단어가 매우 다양한 대상을 가리키며 사용된다.

  • 에스겔 3장의 두루마리는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에게 주신 구체적인 심판의 메시지를 담은 문서다.
  • 예레미야 15:16의 말씀은 예레미야가 받은 예언의 말씀이다.
  •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성자, 곧 인격이시다.
  •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떡은 성육신하여 자기 살을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 요한복음 15:7의 "내 말"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가르침의 말씀이다.
  • 히브리서 5장의 "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복음의 가르침, 특히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성숙과 연결된 표현이다.
  • 요한계시록 10장의 작은 두루마리는 요한이 다시 예언해야 할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문서다.

이것들을 어휘적으로 등치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특히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에스겔이 먹은 두루마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다."

 

요한은 요한복음 6장을 기록하면서 "나는 지금 에스겔 3장의 두루마리를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고 밝히지 않는다. 그러한 직접적 예표 관계를 본문이 주장하지 않는데 우리가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 위에 우리의 도식을 얹는 것이다.

또한 성경의 모든 "먹음"이 같은 신학적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먹는 것과 만나를 먹는 것과 두루마리를 먹는 것과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은 각각 다른 본문의 다른 행위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려는 일은 무엇인가? 이것이다. 각 본문을 먼저 그 문맥에서 읽은 뒤, 정경 전체에서 반복되고 발전하는 하나의 모티프—말씀은 생명을 주는 양식이며, 사람은 그것을 밖에서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안에 받아들여 그것으로 살아간다—가 어떻게 서로 울리며, 마침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안에서 수렴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어휘의 동일시가 아니라 계시의 흐름에 대한 관찰이다. 그리고 이 구별을 지킬 때에만, 다음 장에서 우리가 보게 될 놀라운 연결이 억지스러운 유비가 아니라 성경 자신이 만들어 낸 길로 남게 된다.

 

 

 

Ⅴ. 말씀이 육신이 되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창세기의 첫 문장을 의도적으로 되울리는 이 서두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문장이나 메시지가 아니라 한 분 인격으로 소개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몇 절 뒤, 성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문장 가운데 하나가 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여기서 "거하시매"로 옮겨진 말은 장막을 치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고 함께 계셨던 그 사건이, 이제 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앞서 세운 안전장치를 그대로 유지하자. 에스겔의 두루마리를 곧바로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시의 흐름 전체를 놓고 보면 우리는 하나의 발전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 사람은 그 말씀으로 산다. → 선지자는 그 말씀을 받아먹는다. → 마침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다.

 

이 흐름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시가 궁극적으로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한 인격을 향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명제들을 많이 갖게 되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그분의 아들을 알고 그 아들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는 데 있다. 예수께서 친히 이 점을 지적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

 

이 말씀은 성경 연구를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 연구의 목적지를 밝힌다.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그 읽기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식탁 앞에 앉아 메뉴판만 정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먹으라"는 이 글의 주제는 요한복음 1장에 이르러 결정적인 방향을 얻는다. 우리가 먹어야 할 궁극적인 양식은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증언하는 분, 곧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다. 그리고 바로 그분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시는지 이제 보게 된다.

 

 

 

Ⅵ.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 요한복음 6장 (1)

요한복음 6장은 이 에세이의 심장부다. 여기서 "먹음"은 더 이상 두루마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인격에 관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장은 서두르지 말고 본문의 흐름을 따라 읽어야 한다.

오병이어 — 떡을 먹은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다

장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시작한다.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고, 예수께서는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신다.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찬다. 사람들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6:14).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 예수께서는 홀로 산으로 떠나신다. 밤이 지나고, 무리는 배를 타고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까지 건너온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첫마디가 이 장 전체의 논쟁을 연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이것은 냉정한 진단이다. 그들은 표적을 보았으나 표적이 가리키는 것을 보지 않았다. 표적을 보는 눈은 떡에서 떡 주신 이에게로 옮겨 가지만, 배부름만 기억하는 눈은 계속 떡에 머문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시선을 옮기기 시작하신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여기서 두 종류의 양식이 대비된다. 썩을 양식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그리고 후자는 인자가 "주시는" 것이다. 노동의 대가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 — 요한복음 6:28–29

그런데 무리는 여전히 자기들 식으로 알아듣는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6:28)

 

이 질문은 매우 인간적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는 것이다. 규정을 주면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그들의 질문 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9)

 

그들은 "일들"을 물었고, 주님은 하나의 "일"로 답하신다. 그리고 그 일은 무엇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는 것이다.

 

이 한 절이 요한복음 6장 전체의 해석에 결정적이다. 뒤에 나올 "먹는다"는 격렬한 언어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주님께서 이미 여기서 방향을 잡아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는 길은 무언가를 성취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데 있다.

만나에서 참 떡으로

무리는 이제 표적을 요구하며 만나를 언급한다. 모세가 하늘에서 떡을 주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2–33)

 

여기서 두 가지가 교정된다. 만나를 준 이는 모세가 아니라 아버지시라는 것, 그리고 그 만나조차 "참떡"의 그림자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무리가 반응한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6:34). 사마리아 여인이 "그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라고 했던 것과 같은 반응이다. 그리고 그 요청에 대한 대답으로, 요한복음의 첫 번째 "내가 ~이다" 선언이 터져 나온다.

요한복음 6:35 — 해석의 열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이 한 절을 천천히 보아야 한다. 여기에 두 쌍의 병행이 있다.

내게 오는 자 나를 믿는 자
결코 주리지 아니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적 병행법의 관점에서 보면, 앞 행과 뒤 행은 같은 실재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 곧 그리스도께 오는 것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나란히 놓이고, 주리지 않음목마르지 않음이 나란히 놓인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이 장 후반부에서 예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실 때, 그 "먹음"과 "마심"을 우리가 어떤 범주에서 이해해야 할지를 본문 자체가 여기서 미리 알려 주기 때문이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해결되는 방식이 이미 35절에서 옴과 믿음으로 제시되었다. 즉, "먹음 = 믿음"이라는 독법은 우리가 밖에서 가져와 본문에 끼워 넣은 것이 아니다. 본문 자체가 그 방향으로 강하게 유도한다.[*2]

아버지께서 주시고 이끄시는 자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대목에서 이 "옴"의 근원이 밝혀진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사람이 그리스도께 오는 일에도 선행하는 은혜가 있다. 아버지께서 주시고, 이끄신다. 그리고 그렇게 온 자를 아들은 결코 내쫓지 않으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

 

이 구조는 뒤에서 도르트 신조를 다룰 때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미리 붙들어 둘 것은 이것이다. 이 에세이가 결국 "먹으라, 묵상하라, 자라라"는 권면으로 나아가겠지만, 그 권면의 토대는 언제나 우리가 먼저 붙잡은 무엇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먼저 주시고 이끄신 은혜라는 사실이다.

믿음과 영생

이어서 주님은 믿음과 영생의 관계를 두 번, 거의 같은 말로 못 박으신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47절의 시제에 주목하라. "가지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가졌다"이다. 영생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무엇이 아니라 믿는 자가 지금 가진 실재이며, 동시에 마지막 날의 부활을 향해 열려 있다. 그리고 곧바로 48절이 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8)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요6:49–50)

 

만나는 좋은 것이었으나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다. 만나를 먹은 세대는 광야에 묻혔다. 그러나 참 떡을 먹는 자는 죽지 않는다.

여기까지의 흐름을 정리하면 이렇다.

 

오병이어 → 광야의 만나 →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떡 → 생명의 떡 → 그리스도 자신.

 

표적에서 표적이 가리키는 분에게로, 양식에서 양식이신 분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Ⅶ.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 요한복음 6장 (2)

51절부터 예수의 언어는 갑자기 훨씬 더 거칠고 구체적이 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6:51)

 

여기서 "내 살"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표현은 즉시 유대인들의 격렬한 논쟁을 부른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6:52). 예수께서는 물러서기는커녕 표현을 더 강화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3–55)

 

먼저 51절의 "내 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보라. "세상의 생명을 위한" 살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가리킨다. 그리고 살과 피가 나뉘어 언급되는 것 자체가 죽음의 언어다. 곧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이며, 그 죽음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살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지나치게 성급한 단순화를 피해야 한다. "먹음은 곧 믿음이다"라고 한 단어로 바꿔치기해 버리면, 51–58절의 강렬함이 설명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왜 굳이 "믿으라"는 익숙한 말 대신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정도로 거친 표현을 쓰셨는가?

더 정확한 진술은 이것이다.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이 진술은 세 가지를 함께 담는다. 첫째, 그것은 믿음의 행위다(35, 40, 47절이 이를 확정한다). 둘째, 그 믿음의 대상은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셋째, 그 결과는 정보의 획득이 아니라 그분과의 실제적인 연합과 그분의 생명에의 참여다.

 

음식의 비유가 왜 그렇게 적절한지 이제 보인다. 우리가 먹은 음식은 우리 밖에 남아 있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몸의 일부가 되고, 우리를 살게 한다. 그리고 그 음식은 자신을 소모함으로써 우리를 살린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살을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신다고 하실 때, 그 안에 이미 십자가의 자기 내어 주심이 들어 있다.

요한복음 6:56 — 먹음에서 거함으로

그리고 이 단락의 정점에 우리가 이 글에서 여러 번 되돌아올 한 절이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6:56)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 "먹음"의 언어가 "거함"의 언어로 넘어갔다.

 

먹음 → 생명 → 그리스도와의 연합 → 상호 거함.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동이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의 결과가 단지 내가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먹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 소유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내주(內住)의 관계다.

그리고 57절이 그 생명의 근원을 아버지께까지 소급한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7)

 

아들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시는 그 관계가, 신자가 아들로 말미암아 사는 관계의 원형이 된다. 이보다 더 깊은 생명의 연결을 상상하기 어렵다.

요한복음 6:63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이 단락은 제자들의 걸려 넘어짐으로 이어진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60).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이 구절은 성급하게 읽으면 오해되기 쉽다. 마치 예수께서 방금 하신 살과 피에 관한 말씀을 취소하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다.

 

"육은 무익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육체가 무익하다는 뜻이 아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선언한 책이다. 여기서 "육"은 성령을 떠난 인간의 이해와 능력, 곧 사람이 육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들이 서 있던 자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정육점의 논리로 이 말씀을 이해하려 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이다. 이 말씀은 육적인 방식으로 파악될 수 없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다.

 

이 한 절이 이 장 전체의 해석에 성령론적 열쇠를 놓는다. 그리스도를 먹는 일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뒤에서 개혁파 신앙고백들이 성찬을 다룰 때 왜 그토록 성령을 강조하는지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이 장은 많은 제자들이 떠나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열둘에게 물으실 때,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베드로는 여전히 이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았다. 이것이 믿음이다.

 

 

 

Ⅷ. 그렇다면 요한복음 6장은 성찬 본문인가 — 교회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읽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피하지 말아야 할 질문 앞에 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말씀은 성찬을 가리키는가? 이 질문을 피하면 오히려 글이 약해진다. 교회는 이천 년 동안 이 본문을 붙들고 씨름해 왔고, 그 씨름의 역사는 우리에게 대화 상대가 되어 준다.

 

이 대목의 서술은 검증 가능한 수준의 신중한 요약을 원칙으로 삼는다. 각 인물의 논지는 아래 각주에 온라인으로 열람 가능한 1차 자료의 위치와 함께 밝혀 두었으므로, 독자는 직접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표준 비평판(PG·PL·WA 등)과의 대조, 그리스어·라틴어·독일어 원문의 정밀한 확인은 후속 단계의 과제로 남겨 둔다. 확인되지 않은 인용문이나 출처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이 글의 원칙이다.

이레네우스 — 성육신에서 몸의 부활까지

2세기의 이레네우스는 물질과 육체를 경시하는 영지주의를 반박하면서 성찬을 매우 중요하게 사용한다. 그의 논증은 대체로 이런 구조를 가진다. 그리스도께서 참된 육체를 취하셨고, 우리가 그 몸과 피에 참여하며,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 역시 하나님의 구원에 포함되어 마지막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레네우스에게는 성육신 → 성찬 → 몸의 구원 → 마지막 부활이라는 매우 물질적이고 종말론적인 연결이 있다. 이 본문은 요한복음 6장의 직접 주석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의 참여와 마지막 날의 육체적 부활을 함께 묶는다는 점에서 요한복음 6장의 주제와 강하게 공명한다. [*3]

요한 크리소스톰 — 강한 성찬적 독법, 그러나 육적 이해는 거부

4세기의 크리소스톰은 요한복음 강해에서 6장의 살과 피에 관한 말씀을 성찬과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그는 이 신비 앞에서 두려움과 경외를 가지고 나아갈 것을 강력하게 권한다. 그러나 그가 조잡한 육체적 이해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6:63의 "육은 무익하니라"를 다루면서, 문제는 그리스도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육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태도에 있다고 설명한다.

 

즉 크리소스톰에게는 실제적 참여는 있으나 조잡한 육체적 식육은 아니다라는 구별이 있다. 이것을 곧바로 후대 개혁파 성찬론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실제적 참여와 육적 오해를 구별한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대화점을 제공한다. [*4]

아우구스티누스 — 참으로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여기서 우리는 이 에세이의 논지와 매우 가까운 자리에 도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을 강해하면서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를 붙들고 하나의 결정적인 구별을 세운다. 곧 외적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것참으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게 참된 먹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떡과 잔을 입으로 받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먹은 것이 아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말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찬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대단히 성찬적인 신학자다. 그러나 그는 외적 참여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게 참된 식음은 믿음 → 그리스도와의 연합 → 그 안에 거함 → 성령으로 말미암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글에서 따라온 먹음 → 연합 → 거함 → 생명이라는 흐름은 현대의 착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매우 강하게 존재한다. [*5]

루터 — 실재적 임재를 주장하면서도 요한복음 6장은 성찬 본문이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있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했던 루터가, 정작 요한복음 6장에 대해서는 이 본문을 성찬 본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상당히 단호하게 말한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그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그의 근거는 대체로 두 가지다. 요한복음 6장의 시점에서 성찬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문맥 자체가 성육신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먹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 대목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온 유명한 요약을 사용한다. 흔히 "믿으라, 그러면 이미 먹은 것이다"라는 취지로 옮겨지는 표현이다. 곧 요한복음 6장의 먹음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이 루터의 성찬론이 개혁파와 같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루터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와 함께 참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했고, 이 문제로 개혁파와 격렬하게 갈라섰다. 요한복음 6장의 주해에서 그가 우리와 가까운 자리에 서 있다는 것과, 그의 성찬론 전체가 개혁파와 일치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 차이를 지워서는 안 된다. [*6]

칼빈 — 믿음으로 실제로 먹으며, 성찬은 그 실재를 인친다

칼빈은 요한복음 6:56을 주석하면서 이 본문의 직접적 주제를 외적인 성찬 표지 자체에 국한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 실제로 그분께 참여하고 그분과 연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불신자도 외적 표지는 받을 수 있지만, 참된 먹음은 믿음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논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별과 같은 방향에 서 있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처럼 요한복음 6장과 성찬을 완전히 잘라내지도 않는다. 그의 정리는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 요한복음 6장 자체의 직접적 주제 =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 실제로 그분께 참여하고 그분의 생명으로 사는 것.
  • 성찬 = 바로 그 실재를 하나님께서 표(sign)와 인(seal)으로 확증하시는 은혜의 방편. [*7]

그리고 칼빈이 성찬에서 강조하는 것은 성령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안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땅에 있는 신자를 실제로 연결하시고,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한다. 그러므로 개혁파의 입장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도 아니고, "떡을 보며 예수님을 기억한다" 정도의 단순 기념설도 아니다.

 

성령으로, 믿음을 통하여, 참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개혁파의 영적이면서 실제적인 임재다.

이 차이들을 억지로 없애지 말자

여기까지 살펴본 흐름을 정직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전통 요한복음 6장의 "먹고 마심"을 어떻게 읽었는가
이레네우스 성육신·성찬·육체의 구원·마지막 부활을 강하게 연결
크리소스톰 강한 성찬적 독법, 그러나 조잡한 육적 이해는 거부
아우구스티누스 성찬을 존중하되, 참된 먹음을 믿음과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규정
루터 요한복음 6장 자체는 성찬 제정이 아니라 믿음의 먹음
칼빈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실제로 받아 참여·연합함, 성찬은 이를 표하고 인침

이들은 한 목소리가 아니다. 교부들이 모두 같은 견해였던 것처럼 만들어서도 안 되고, 루터와 칼빈의 차이를 지워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 다양성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확신이 있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조잡한 육체적 섭취가 아니며, 동시에 단순한 심리적 회상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과 실제로 연결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 글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정직하겠다. 오늘날 복음주의라 불리는 넓은 진영 안에는 성찬을 순전한 기념으로 이해하는 전통에서부터 매우 강한 성례론을 견지하는 전통까지 상당한 폭이 있다. 이 에세이는 그 폭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 이 글은 성경의 최종 권위와 그리스도 중심성과 개인적 믿음이라는 복음주의적 확신 위에 서되, 성찬과 연합에 관해서는 분명히 개혁파의 고백을 따라 논의를 전개한다.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참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한다는 고전적 개혁파의 이해다. 그 확신이 개혁파의 신앙고백들 속에서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를 이제 보게 된다.

 

 

 

Ⅸ. 개혁파 신앙고백은 이것을 어떻게 고백했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6문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가장 놀라운 문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6문이다. 질문 자체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답은 크게 두 단계로 전개된다.

 

첫째,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둘째,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점점 더 연합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으나, 우리는 그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이며,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이 답을 우리의 논의에 비추어 보라. 여기에는 믿음이 있고, 죄 사함과 영생이 있고, 성령이 있고, 그리스도와의 점점 더 깊어지는 연합이 있다. 우리가 요한복음 6:35, 40, 47, 53–58을 따라가며 확인한 바로 그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 답에 붙어 전해지는 성경 근거를 보면 더 흥미롭다. 널리 사용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판본들은 76문의 근거 본문으로 요한복음 6:35, 40, 47–48, 50–56 같은 구절들과 함께 요한복음 15:1–6을 제시한다.

 

이것이 왜 흥미로운가? 우리가 이 에세이에서 따라가고 있는 연결, 곧

 

요한복음 6장의 "먹음" → 요한복음 15장의 "거함"

 

이 현대인의 사적인 착상이 아니라, 개혁파 교회가 자신의 신앙고백을 성경으로 뒷받침할 때 이미 함께 놓았던 두 본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56의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와 요한복음 15:5의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을 나란히 읽는 것은 개혁파의 연합 신학이 오랫동안 걸어온 길과 같은 방향에 서 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정직하게 밝혀 두는 편이 좋겠다. 요리문답에 붙은 증거 본문(proof-text) 목록은 판본과 시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1563년에도 여러 독일어 인쇄판과 라틴어판이 있었고, 그 초기 인쇄본에는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장·절 번호 체계가 그대로 찍혀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1563년 독일어 초판 여백에 정확히 요 15:1–6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후속 원전 검증에서 확인된 것은, 1563년의 초기 하이델베르크 전통 안에서 이미 요한복음 6장과 요한복음 15장이 76문의 같은 연합·생명 조항을 뒷받침하는 성경 근거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쓰는 "요 15:1–6"이라는 절 번호 표기는 후대 편집에서 명료화된 형태다. 그러므로 이 에세이가 주장하는 것은 표기 형태의 동일성이 아니라, 개혁파 전통이 요한복음 6장의 먹음과 요한복음 15장의 거함을 같은 실재의 두 표현으로 읽어 왔다는 사실이다. [*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장 7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같은 실재를 대단히 정밀한 언어로 진술한다. 29장 7항은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의 모든 유익을 받아 누리는 방식을 이렇게 표현한다.

 

"inwardly by faith, really and indeed" — 내적으로, 믿음으로, 참으로 그리고 실제로.

 

그러나 곧바로 이렇게 제한한다.

 

"not carnally and corporally, but spiritually" — 육체적으로나 신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두 어구를 함께 붙들어야 한다. 여기서 "영적으로"라는 말을 상징적으로 혹은 가상적으로라는 뜻으로 읽으면 이 고백을 정반대로 오해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는 일부러 "참으로 그리고 실제로"라는 표현을 함께 넣었다. 곧 이것은 실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실재의 방식을 규정하는 말이다.

 

성경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대개 "비물질적" 혹은 "허구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께 속한, 성령으로 말미암은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덜 실제적으로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실제로 먹는다는 뜻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 단순 기념설: 아니다.
  • 화체설: 아니다.
  • 육체적 섭취: 아니다.
  • 성령과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께의 실제적 참여: 그렇다.

이 고백은 요한복음 6:63의 "살리는 것은 영이니"와 잘 공명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 참여의 실재성은 유지하면서 그 방식은 육체적이 아니라 영적이라고 규정한다. 다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장 7항이 요한복음 6:63을 직접 해설하거나 그 절을 직접적인 증거 본문으로 삼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9]

도르트 신조

도르트 신조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범위를 밝혀야 한다.

 

도르트 신조는 성찬 교리를 해설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가 아니다. 이 문서는 알미니우스 논쟁 가운데서 선택, 속죄의 성격, 인간의 부패, 회심과 은혜, 성도의 견인 같은 구원론적 쟁점을 다룬다. 그러므로 도르트가 요한복음 6장의 "먹고 마심"을 하이델베르크처럼 직접 해설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도르트를 요한복음 6장의 주석처럼 소개하는 것은 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르트가 고백하는 은혜론과 요한복음 6장의 구조는 서로 깊이 대화한다.

 

도르트는 복음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셋째·넷째 교리에서는 그 믿음 자체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서 믿음을 실제로 일으키신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을 요한복음 6장에 비추어 보라.

 

성부께서 아들에게 사람을 주심(6:37) → 아버지께서 이끄심(6:44) → 그가 그리스도께 옴 → 믿음(6:29, 35, 40, 47) → 그리스도를 먹음, 곧 받아 연합함(6:53–56) → 영생 → 마지막 날의 부활(6:39, 40, 44, 54)

 

요한복음 6:37–44는 그 자체로 은혜의 주도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도르트가 직접 요한복음 6장을 해설하지 않더라도, 두 문서는 같은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덧붙일 것이 하나 더 있다. 도르트는 이 에세이가 다루어 온 주제와 놀랍도록 가까운 두 대목을 품고 있다. 셋째·넷째 교리 17항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중생의 씨앗이자 영혼의 양식으로 삼으셨다고 말하고, 다섯째 교리 14항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선포로 시작하신 은혜의 일을 복음을 듣고 읽는 것과 그것을 묵상하는 것, 그리고 성례의 사용을 통해 계속하시고 완성하신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앞에서 묵상을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믿음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경건의 실천"이라고 규정한 것은, 이 고백의 언어와 정확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10]

여기서 얻는 결론

개혁파 전통에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영적 양분을 섭취하여 자기 힘으로 성장하는 자력적 수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며,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 그 안에서 살게 하시는 은혜의 역사다. 이것을 붙들지 않으면, 이 에세이의 나머지 부분—성장, 분별, 장성, 열매—은 곧바로 종교적 자기계발의 언어로 변질되고 만다.

 

 

 

Ⅹ.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 먹음에서 거함으로

이제 요한복음 6:56에서 요한복음 15장으로 건너가자. 이 이동은 우리가 처음 생각해 낸 길이 아니라, 앞에서 보았듯 개혁파의 고백이 오래 걸어온 길과 같은 방향이다.

포도나무와 가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 비유는 다락방에서, 곧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가르침 가운데 주어졌다.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자주 이스라엘을 가리켰고, 대개 열매 맺지 못한 포도나무를 책망하는 문맥에서 등장했다(사 5장, 렘 2:21, 시 80편).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신다(15:1).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시는 참된 포도나무가 여기 계신다는 선언이다.

 

가지의 자리에서 이 비유를 보라. 가지는 열매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가지가 하는 일은 붙어 있는 것이다. 수액은 나무에서 온다. 가지는 그 수액이 흐르는 통로일 뿐이며, 열매는 그 흐름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말씀은 겸손을 권하는 수사가 아니라 생물학적 사실에 가까운 진술이다.

 

여기서 요한복음 6:56과의 연결이 분명해진다.

요한복음 6:56 요한복음 1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6장이 "먹음"으로 도달한 그 상호 거함을, 15장은 "붙어 있음"의 이미지로 펼쳐 놓는다. 그리고 15장은 6장이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을 하나 더한다. 열매다.

요한복음 15:7 —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런데 불과 두 절 뒤에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5절에서는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셨는데, 7절에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신다.

 

이 두 표현을 성급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다른 진술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안에서 이 둘이 이렇게 가까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말씀은 그분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분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며(6:63), 그 말씀으로 제자들은 이미 깨끗해졌다(15: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다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 잡아 우리를 그분께 붙들어 매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 에세이의 앞부분에서 다룬 묵상이 다시 살아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것이 바로 묵상이 지향하는 자리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있다는 것보다 훨씬 넓다.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욕망과 기도를 형성하며,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을 인간의 공로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묵상이 말씀을 우리 안에 "거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은혜가 흐르는 통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말씀이며,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일하실 때 성도는 믿음으로 그 말씀에 머물고 되새기며 순종한다. 묵상은 그 말씀 앞에 머무는 믿음의 자세이지, 은혜를 생산해 내는 공장이 아니다.

골로새서 3:16

바울에게 가면 거의 같은 표현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두 가지를 눈여겨보자.

 

첫째, "풍성히"라는 부사다. 말씀이 우리 안에 겨우 걸쳐 있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여러 방에, 삶의 여러 구석에 자리 잡는 것을 그린다.

 

둘째, 이 말씀의 내주가 공동체적이라는 사실이다.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결과로 나오는 것은 홀로 하는 명상이 아니라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함께 찬양하는 삶이다. 말씀을 먹는 일은 골방에서 시작되지만 골방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를 세운다.

시편 1편과 요한복음 15장이 다시 만나는 자리

이제 우리가 앞에서 미뤄 두었던 공명을 회수할 수 있다. 시편 1편의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그리고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5장의 제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한다. 그리고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두 본문의 직접적 문맥은 다르다. 시편 1편은 요한복음 15장의 예표가 아니다. 그러나 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두 그림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말씀 안에 머묾 → 생명의 근원에 뿌리내림 → 생명을 공급받음 → 열매를 맺음.

그리고 성경의 흐름 속에서 그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시편 1편에서 그것은 시냇물이었고, 요한복음 15장에서 그것은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묵상하는 사람의 뿌리가 닿아 있는 그 시냇물은, 결국 말씀이신 그리스도께로 흘러가는 물이었다.

 

 

 

ⅩⅠ. 젖에서 단단한 음식으로 — 먹는 사람은 자라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먹기는 먹는데, 무엇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 살아 있는 것은 자란다. 그리고 자라는 것은 먹는 것이 달라진다. 신약은 이 평범한 사실을 신앙의 성장에 적용한다.

베드로전서 2:2 — 사모하는 아기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여기서 두 가지를 보자.

 

첫째, 사모하라는 명령이다. 갓난아기가 젖을 찾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아기는 젖을 두고 논평하지 않는다. 아기는 젖을 원한다. 성경은 성도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기를 기대한다.

 

둘째, 그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사모하는 것의 목적지는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성장이다. 그리고 그 성장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 이 에세이의 주제와 직접 이어지는 표현이 나온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3).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은 이미 맛을 본 사람이다. 시편 34:8의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가 여기서 다시 울린다.

고린도전서 3:1–2 — 자라지 않은 사람들

그러나 성장은 자동적이지 않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안타까움을 담아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들의 미성숙을 어디에서 진단하는가이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이 부족한 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은 은사가 풍성했고 말과 지식이 넘쳤다(고전1:5).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어린아이라고 부른다.

 

왜인가? 바로 다음 절이 말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3:3). 그들의 미성숙은 아는 것의 양이 아니라 삶의 양상에서 드러났다. 이것은 우리가 곧 히브리서에서 만날 논지를 미리 보여 준다.

히브리서 5:11–14 — 지각이 연단된 사람

이제 이 에세이가 특별히 충분히 다루기로 한 본문에 도달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히5:11)

 

저자는 지금 깊은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려는 참인데, 독자들이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문제는 저자의 설명 능력이 아니라 독자들의 상태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라는 표현에 주목하라. 시간이 흘렀다는 것 자체는 성숙의 증거가 아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것과 장성한 것은 같지 않다. 그리고 결정적인 두 절이 이어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이 두 절을 천천히 분해해 보자.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특징은 의의 말씀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익숙하다/경험하다"로 옮겨진 말은 실제로 다루어 보아 손에 익은 상태를 가리킨다. 곧 그는 그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자기 삶에서 다루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이 표현이 이 본문의 핵심이다. 여기서 "연단"이라는 말은 운동선수의 훈련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왔다. 반복된 사용을 통해 몸에 익는 그런 종류의 훈련이다. 곧 장성함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반복된 사용을 통한 훈련의 결과다.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 그리고 그 훈련의 열매는 분별력이다. 옳고 그름이 명확히 라벨 붙어 있는 상황에서 정답을 고르는 능력이 아니라, 라벨이 없는 실제 삶의 국면에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알아보는 감각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리는 성숙의 경로는 이렇다.

 

말씀을 먹음 → 그 말씀을 실제로 사용함 → 지각이 연단됨 → 선악을 분별함 → 장성함.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과 말씀에 의해 형성된 사람

여기서 우리는 이 에세이에서 가장 목회적으로 아픈 지점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과 말씀에 의해 형성된 사람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성경 지식은 귀하다. 이 글은 결코 지식을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 자라는 신앙은 없다. 교리를 배우고, 본문을 정확히 읽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은 성도에게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를 더 묻는다. 그 지식이 나의 생각과 욕망과 선택과 행동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성경을 여러 번 통독하고도 여전히 자기 이익 앞에서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판단한다면, 교리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연약한 형제를 대할 때 냉담하다면, 우리는 아직 히브리서가 말하는 장성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정죄가 아니라 진단이다. 그리고 이 진단이 우리를 절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히브리서 저자는 이 말을 하고 나서 독자들을 포기하지 않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6:1)고 권한다.

 

여기서 앞에서 다룬 묵상이 다시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지각은 어떻게 연단되는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말씀이 우리의 판단에 반복적으로 적용될 때 된다. 오늘 읽은 말씀이 오늘의 한 결정에 닿고, 내일 되새긴 말씀이 내일의 한 관계에 닿고, 그렇게 반복될 때

 

생각 → 욕망 → 선택 → 행동 → 습관 → 분별

 

이 서서히 훈련된다. 그러므로 묵상은 영적 성장을 위한 장식적인 경건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말씀에 의해 우리의 지각 자체가 빚어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통상적인 과정이다.

 

에스겔이 들었던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는 명령이 여기서 다시 울린다. 말씀은 머리에 쌓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가장 안쪽으로 내려가 우리가 판단하고 갈망하는 자리를 채워야 한다.


ⅩⅡ. 목회적 보론 — 로마서 14:2에 대한 주의

여기서 한 가지 주해적 주의를 덧붙여야 한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롬14:2)

 

이 구절은 "먹음"과 "믿음의 강약"을 함께 말하기 때문에, 앞에서 본 젖과 단단한 음식의 논의와 쉽게 연결되어 보인다. 그래서 때때로 이렇게 해석되곤 한다. "채소 = 초보적인 말씀, 모든 음식 = 깊은 신학."

 

그러나 이것은 본문을 벗어난 해석이다. 로마서 14장의 직접적인 문맥은 음식과 절기를 둘러싼 양심의 문제, 곧 유대적 배경과 이방적 배경을 가진 신자들이 한 교회 안에서 부딪히던 실제적인 갈등이다. 여기서 "먹는 것"은 말씀의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식탁 위의 음식이다. 바울의 관심은 어떤 음식이 더 영적인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확신을 가진 형제자매가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가에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말씀의 양식"이라는 우리 논증의 주된 증거 본문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벧전2:2, 고전3:1–2, 히5:11–14가 그 역할을 충분히, 그리고 정당하게 감당한다.

 

다만 이 본문은 다른 방향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준다. 곧 성숙한 자가 연약한 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목회적 물음이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14:3)

 

이것은 히브리서 5장과 나란히 놓일 때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한다. 말씀을 더 깊이 먹고 자란 사람의 표지는 아직 젖을 먹는 형제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지각이 연단되어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은 연약한 자를 짓밟지 않고 사랑으로 품는다. 만일 성경 지식이 자라면서 형제를 업신여기는 마음도 함께 자랐다면, 그것은 장성의 증거가 아니라 히브리서가 말한 미성숙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ⅩⅢ.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방향이 바뀌는 자리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는 먹는 것을 말씀하셨다. 7장에서는 마시는 것을 말씀하신다. 무대는 초막절이다. 후대의 유대 문헌은 이 절기에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 성전 제단 곁에 붓는 의식이 있었다고 전한다.[*11] 요한복음 본문 자체는 이 의식을 명시하지 않지만,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외침이 울려 퍼진 절기의 정황을 짐작하게 해 준다. 바로 그 절기의 마지막 날, 가장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치신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7–38)

 

여기서도 6:35에서 보았던 병행이 반복된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나를 믿는 자는"이 나란히 놓인다. 오는 것, 마시는 것, 믿는 것이 서로를 해석한다. 그리고 요한은 곧바로 이 말씀의 의미를 자기 손으로 밝혀 준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9)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저자의 주석이다. 우리가 추측할 필요가 없다. 요한 자신이 이 생수를 성령과 연결한다. 그리고 그 성령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곧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이후에 부어지실 것이다.

방향이 바뀐다

이제 이 본문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전환을 보라.처음에 우리는 배고픈 자였다. 목마른 자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갔다. 그런데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이제 배부르다"가 아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받은 생명이 밖으로 흘러간다. 그것도 웅덩이가 아니라 강으로 흘러간다. 이것은 이 에세이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전환이다. 말씀을 먹고 그리스도를 마시는 일은 자기 안에 무언가를 저장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은 사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흘러넘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에스겔이 말씀을 먹은 후 "가서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는가? 여기서 그와 같은 구조가 다른 언어로 나타난다. 안으로 받은 것이 밖으로 흐른다.

 

 

 

ⅩⅣ. "열매를 많이 맺나니" — 먹음에서 열매로

이제 다시 요한복음 15장으로 돌아가자.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가지는 열매를 맺기 위해 포도나무에서 독립하여 애쓰지 않는다. 가지는 붙어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그 열매의 최종 목적지는 가지의 평판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다.

이제 우리가 이 글에서 따라온 전체 흐름을 한 줄로 놓아 보자.

 

말씀 → 그리스도 → 믿음 → 연합 → 거함 → 성장 → 분별 → 열매.

 

이 흐름에서 어느 단계도 인간의 자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자. 말씀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은 성자이시며, 믿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고, 연합시키시는 분도 성령이시며, 말씀을 통해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은 종교적 자기계발이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신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열매 맺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열매가 내 능력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절망하거나 자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열매가 붙어 있음에서 온다면,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진다. 붙어 있는 것이다. 말씀 앞에 머물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ⅩⅤ. 다시 "먹어 버리라" — 밧모 섬의 두루마리

이 에세이는 에스겔의 두루마리에서 출발했다. 이제 성경의 거의 마지막 책에서 그 장면이 다시 열린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10:9–10)

 

요한계시록 10장은 에스겔 2–3장을 의도적으로 불러온다. 두루마리가 있고, 먹으라는 명령이 있고, 입에서의 단맛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에스겔에게서 명시되지 않았던 것이 하나 더해진다.

 

배에서의 쓴맛이다.

이것을 "성경에는 은혜로운 말씀도 있고 부담스러운 말씀도 있다" 정도로 평면화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의 문맥에서 이 단맛과 쓴맛은 훨씬 구체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달다. 그 말씀이 어린양의 승리를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을 약속하며,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마침내 왕이심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동시에 쓰다. 같은 계시가 심판을 선포하고, 짐승의 압제 아래 있는 성도들의 인내와 죽음까지 이르는 증언을 말하며, 이 말씀을 전하는 자가 감당해야 할 고난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는 구원과 심판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증언의 고난이 함께 들어 있다. 이 둘을 분리해서 단 것만 취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입맛을 먹는 사람이다. 그리고 요한이 그 두루마리를 삼킨 직후, 말씀이 임한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10:11)

 

에스겔에게 주어진 순서가 여기서 그대로 반복된다.

 

먹으라 → 내면화하라 → 가서 말하라.

 

말씀을 먹은 사람은 침묵하지 않는다. 그가 삼킨 말씀은 그 안에 머물러 있다가 그의 입과 삶을 통해 다시 나온다. 다만 이제 그가 전하는 말씀은 그가 골라잡은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달게 하고 또한 쓰게 한 말씀, 그가 통째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 전체다.

 

 

 

결론 — 이 말씀을 먹으라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읽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먹으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이제 대답할 수 있다. 읽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읽기가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 있기를 원하신다. 말씀은 우리를 통과해 지나가는 정보가 아니라 우리를 채우고 우리로 살게 하는 양식이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걸어 보니, 그 양식이 마침내 한 인격으로 우리 앞에 서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그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다. 선지자는 그 말씀을 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분께서 갈릴리에서 떡을 떼어 주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그분께서 자기 살을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주셨고, 자신을 먹는 자가 자기 안에 거하고 자신도 그 안에 거한다고 하셨다. 그분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목마른 자의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모든 권면보다 먼저 놓여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다. 성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성령께서 믿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신다.

 

이 은혜가 먼저다.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가 이 모든 것의 토대다. 이것을 놓치면 "말씀을 먹으라"는 권면은 곧바로 또 하나의 종교적 과제가 되고, 우리는 성경 앞에서 성과를 계산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 은혜 위에서, 이제 권면이 온다.

 

말씀을 펼치라. 읽으라. 그러나 읽고 지나가지 말라. 머물러라. 되새겨라. 맛보라. 단맛도, 쓴맛도. 그 말씀으로 기도하라. 그 말씀이 너를 판단하게 하라. 그 말씀에 순종하라. 그 말씀이 네 안에 거하게 하라.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말라. 성령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거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젖을 사모하는 갓난아기처럼 말씀을 갈망하되, 영원히 젖에만 머물지 말라. 단단한 음식을 먹으며 지각을 사용하고, 말씀에 의해 연단되어 선악을 분별하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 가라. 그리고 자라난 그 자리에서 아직 젖을 먹는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고 사랑으로 품으라. 그러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열매를 맺을 것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듯이. 그 열매는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라신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그 열매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우리 안에 갇혀 있지 않을 것이다. 생수의 강처럼 흘러나갈 것이다.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요한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갖다 먹어 버리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을 먹은 사람은 다시 말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 한 문장을 남겨 두자.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그 말씀에 붙들린 사람은 마침내 그 말씀으로 살고, 그 말씀에 의해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열매 맺으며, 받은 생명을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고 증언한다.

 

이 말씀을 먹으라.

 

 

 

각주

각주에 관한 일러두기. 아래 각주는 교부와 종교개혁자, 신앙고백 문서의 논지를 확인할 수 있는 1차 자료의 위치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본문의 서술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요약이며, 각주 안의 짧은 원어·영문 어구만이 해당 문헌에서 실제로 확인한 표현이다. 온라인 판본은 대체로 19세기 표준 영역(ANF·NPNF·CTS 등)에 기초하므로, 표준 비평판 및 원어 본문과의 대조는 후속 단계의 과제로 남겨 둔다. 판본 문제가 실제로 논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지점은 각주 안에 따로 표시했다.

 

  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8–90문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유익을 전달하시는 통상적 방편을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로 규정하고, 말씀이 유효하게 되도록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읽고 들으며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 마음에 간직하고 삶에서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본문은 묵상 자체를 말씀·성례와 병렬하는 독립적 은혜의 방편으로 부르지 않고,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경건의 실천으로 구별한다. 다만 이 구별이 묵상을 부차적인 것으로 낮추는 것은 아니다. 도르트 신조 다섯째 교리 14항은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일을 계속하시는 방식 가운데 복음을 듣고 읽는 것과 나란히 묵상을 명시적으로 포함시킨다(아래 도르트 신조 각주 참조).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7), qq. 88–90, Westminster Standards, https://westminsterstandards.org/westminster-shorter-catechism/.
  2. 요한복음 6:35의 병행 구조를 "오는 것 = 믿는 것"으로 읽는 것은 고대의 독법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절을 강해하면서 "내게 오는 자"가 "나를 믿는 자"와 같은 것을 말하며 "주리지 아니하리라"가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와 같은 것을 뜻한다고 명시한다. 같은 논고에서 그는 요한복음 6:29을 다루며 "이빨과 위장을 준비할 것이 무엇인가? 믿으라, 그러면 이미 먹은 것이다"라고 말한다(라틴어 전통에서 "crede, et manducasti"로 널리 인용되는 대목이다).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25.12, 25.14,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7,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8),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5.htm.
  3. Irenaeus, Against Heresies 5.2.2–3. 이레네우스는 육체의 구원을 부정하는 자들을 반박하면서, 만일 육체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주께서 자기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도 아니고 성찬의 잔이 그의 피에 참여함도 아니라고 논증한다. 이어 떡과 잔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찬이 되고, 바로 그것으로 자라고 지탱되는 우리의 육체가 때가 이르러 부활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곧 참된 성육신 → 참된 피와 몸 → 성찬 → 육체의 부활이 하나의 연속선에 놓인다.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 이 대목의 그리스어 원문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라틴어 역본으로 전한다. 라틴어 본문 대조는 W. Wigan Harvey, ed., Sancti Irenaei Episcopi Lugdunensis 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 vol. 2 (Cambridge: Typis Academicis, 1857)를 후속 단계에서 사용한다.
  4. John Chrysostom,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요 6:53–58 주해. 크리소스톰은 이 대목을 성찬의 "신비"(the Mysteries)와 직접 연결하여 매우 강한 성찬적 독법을 전개한다. 동시에 그는 6:63의 "육은 무익하니라"를 그리스도의 육체가 무익하다는 뜻으로 읽지 않고, 그 말씀을 육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태도에 대한 책망으로 풀이한다. John Chrysostom,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trans. Charles Marriot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14,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7.htm.
  5.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26.12, 26.18.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6:56을 강해하면서,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거하시게 하는 것이라고 명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지 않으시는 사람은, 몸과 피의 성례를 이로 씹는다 하더라도 참으로 그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같은 논고 12절에서는 참된 먹음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먹는 것, 이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 것"으로 표현한다. Augustine, "Tractate 26 (John 6:41–59),"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7,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8),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6.htm. 이어지는 27논고(요 6:60–72)도 함께 볼 것: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7.htm. 라틴어 본문은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CXXIV (PL 35)에 수록되어 있으며, 원문 대조는 후속 단계로 남겨 둔다.
  6. Martin Luther,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520), "The Sacrament of the Altar," §2.3. 루터는 요한복음 6장이 성찬 논의에서 "entirely excluded"되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그때는 아직 성찬이 제정되지 않았다. 둘째, 문맥 전체가 "육신이 되신 말씀에 대한 믿음"(faith in the Word made flesh)을 말하고 있으며, 6:63의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가 이것이 영적인 먹음임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여 "믿으라, 그러면 먹은 것이다"라고 요약한다(같은 인용이 §2.58에 다시 나온다). 영역: Martin Luther,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trans. Albert T. W. Steinhaeuser, ed.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라틴어 원전은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1520), WA 6:497–573. 이 문헌에서 루터가 신명기 8:3과 마태복음 4:4을 인용하여 믿음이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양육된다고 말하는 대목(§2.59)은, 이 에세이 Ⅰ장의 논지와도 공명한다.
  7.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요 6:54 및 6:56 주해. 칼빈은 요한복음 6장 전체를 성찬에 적용하는 해석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만일 주의 상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이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생명을 얻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이 자기 정죄에 이르도록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지속적이고 통상적인 방식"**이라고 그는 결론짓는다. 6:56 주해에서는 "내 안에 거하고"를 그리스도와 우리의 "bond of union"으로 풀이하며, 믿음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길을 상상하는 것은 헛되다고 말한다. 믿음이야말로 "영혼의 입이며 위장"이기 때문이다.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trans.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요 6:54, 56 주해,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4.xii.ix.html. 판본 주의: 칼빈이 이 설교의 내용을 성찬이 "인(seal)이요 확증(confirmation)"으로 확인한다고 말하는 문장은 CTS 영역본에서 본문이 아니라 역주(각주 163)로 실려 있으며, 프랑스어판 계열의 추가 문장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문에 곧바로 나오는 문장처럼 인용해서는 안 되며, 칼빈의 성찬론 전반은 Institutes 4.17을 함께 대조해야 한다.
  8. Heidelberg Catechism, Q. 76. 76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을, 첫째로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으로,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도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거룩한 몸과 "more and more" 연합되어 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으나 우리는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이며,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증거 본문의 위치에 관하여: 널리 사용되는 온라인 판본에서 76문의 증거 본문은 요 6:35, 6:40, 6:50–54, 6:55–56, 6:56–58과 고전 12:13, 고전 6:15–17, 엡 5:29–30, 요일 4:13 등으로 제시되며, 요 15:1–6은 마지막 조항—곧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의 증거 본문으로 요 6:56–58과 나란히 붙어 있다. 즉 요 6과 요 15가 같은 조항 아래 함께 놓인다. 후속 원전 검증에서 1563년 제3판(Catechismus Oder Christlicher Vnderricht…, Heidelberg: Johann Mayer, 1563; VD16 P 2166)의 디지털 영인본을 확인한 결과, 1563년에는 복수의 독일어 인쇄판과 라틴어판이 존재하며 초기 인쇄본에 현대식 장·절 번호 체계가 그대로 적용되어 있지 않다는 점, 그럼에도 초기 하이델베르크 전통 안에서 요한복음 6장과 요한복음 15장이 76문의 같은 조항을 뒷받침하는 성경 근거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1563년 초판 여백에 요 15:1–6이라는 표기가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지만, 두 본문의 연결 자체는 초기 전통에 속한다. Heidelberg Catechism (1563), Q. 76, Catechesis, https://www.catechesis.app/heidelberg/76/.
  9.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 29.7. 핵심 문구는 "inwardly by faith, really and indeed, yet not carnally and corporally but spiritually"이다. 곧 합당하게 참여하는 자는 육체적·신체적 방식이 아니라 영적으로, 그러나 참으로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의 모든 유익을 받아 먹는다. 같은 내용을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0문이 다시 풀어 설명하는데,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수찬자의 믿음에 영적으로 현존하며 그가 참으로 실제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고 진술한다.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chap. 29, New Life Presbyterian Church (PCA), https://www.newlifepca.com/resources/the-westminster-confession-of-faith/;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7), Q. 17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a/anonymous/westminster2/cache/westminster2.pdf.
  10. Canons of Dort (1618–19), 첫째 교리 4–5항; 셋째·넷째 교리 14항, 17항; 다섯째 교리 14항. 도르트는 복음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받아들여 구주 예수를 붙드는 자가 진노에서 건짐을 받고 영생의 선물을 받는다고 고백하며(I.4), 그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어서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믿으려는 의지와 믿음 자체를 일으키신다고 말한다(III/IV.14). 그리고 이 에세이의 주제와 직접 맞닿는 두 대목이 있다. III/IV.17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중생의 씨앗이자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다고 말하고, V.14는 하나님께서 복음의 선포로 시작하신 일을 복음을 듣고 읽는 것, 그것을 묵상하는 것, 복음의 권면과 경고와 약속, 그리고 성례의 사용을 통하여 계속하시고 완성하신다고 고백한다. 다만 도르트는 성찬 교리를 해설하기 위한 문서가 아니므로, 이를 요한복음 6장에 대한 직접적 주석처럼 소개해서는 안 된다.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The Canons of Dort,"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canons-dort?language=en. (인용한 영역본은 2011년 승인 번역본이며 저작권이 있으므로, 본문에서는 직접 인용 대신 요약으로 다루었다.)
  11. Mishnah Sukkah 4:9는 초막절 성전의 물 붓기 의식을 설명하면서, 금 항아리에 실로암의 물을 길어 성전으로 가지고 올라와 제단 곁에 붓는 절차를 전한다. 이 자료는 요한복음 7:37–39의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미쉬나는 신약보다 후대에 편집된 문헌이므로 예수 시대의 의식 세부를 그대로 입증하는 자료로 과도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요한복음 본문 자체는 이 의식을 명시하지 않는다. 요한이 명시적으로 밝히는 해석은 오직 하나, 곧 이 말씀이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킨다는 것이다(요 7:39). Mishnah Sukkah 4:9, Sefaria, https://www.sefaria.org/Mishnah_Sukkah.4.9.
 

 

 

 

참고문헌

1차 자료 — 교부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Translated by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7,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8.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htm.

———.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CXXIV. Patrologia Latina 35. Edited by J.-P. Migne. Paris, 1841. [후속 단계 대조 예정]

Chrysostom, John.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Translated by Charles Marriot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4,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9.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7.htm.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lated by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5.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

———. Sancti Irenaei Episcopi Lugdunensis 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 Vol. 2. Edited by W. Wigan Harvey. Cambridge: Typis Academicis, 1857. [라틴어 본문 대조 예정]

1차 자료 — 종교개혁

Calvin, Joh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Translated by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4.xii.ix.html.

———.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ook 4, chap. 17. [성찬론 전반 대조 예정]

Luther, Martin.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520. Translated by Albert T. W. Steinhaeuser. Edited by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1520. In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6, 497–573. Weimar: Hermann Böhlau, 1888. [원문 대조 예정]

신앙고백 문서

Canons of Dort. 1618–19.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canons-dort?language=en.

Heidelberg Catechism. 1563. Question 76. Catechesis. https://www.catechesis.app/heidelberg/76/.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 Chapter 29. New Life Presbyterian Church (PCA). https://www.newlifepca.com/resources/the-westminster-confession-of-faith/.

———.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7. Question 17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a/anonymous/westminster2/cache/westminster2.pdf.

———.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7. Questions 88–90. Westminster Standards. https://westminsterstandards.org/westminster-shorter-catechism/.

유대 문헌

Mishnah Sukkah. 4:9. Sefaria. https://www.sefaria.org/Mishnah_Sukkah.4.9.

 

 

후속 검증 과제

※ 아래 목록은 본편 작성 당시에 남겨 둔 연구 계획이다. 이후 후속 원전 검증(「믿으라, 그러면 먹었다」)에서 대부분 확인되었으며, 현재 문헌학적 최종 확인으로 남은 것은 SC 153(이레네우스)과 CCSL 36(아우구스티누스) 두 비평판의 직접 열람이다. 목록 자체는 연구 과정의 기록으로 그대로 둔다.

  1. 교부 문헌: PG·PL 대조 및 그리스어·라틴어 원문 확인 (이레네우스 → 크리소스톰 → 아우구스티누스 순).
  2. 루터: WA 6:497–573 라틴어 원문과 §2.3 대조.
  3. 칼빈: CTS 역본 역주 163의 프랑스어판 계열 문제 확인, Institutes 4.17과의 정합성 검토.
  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년 최초 인쇄본 및 주요 판본의 증거 본문 목록 형성사 확인.
  5. 웨스트민스터: 1646년 원판 및 대·소요리문답 원문 대조.
  6. 각주 형식: Chicago full note와 참고문헌 표기의 완전 통일, 최초 인용/재인용(short form) 구분.

 

 

 

 

 

AI 활용 안내 — 이 글의 문제의식과 중심 논지, 신학적 판단, 자료의 채택과 최종 문장은 필자에게 있다. 작성 과정에서는 생성형 AI를 연구와 편집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였다.
ChatGPT 5.6은 사전 조사와 쟁점의 구조화에, Claude Fable/Opus 5은 초고의 표현 및 참고문헌·각주 형식의 정돈에, Perplexity Pro는 관련 논문과 온라인 원문 자료의 탐색에 사용하였다.
AI가 제시한 내용은 그 자체를 권위 있는 출처로 삼지 않았으며, 접근 가능한 성경 원문, 교부 문헌, 신경과 공의회 문서, 공식 교리서 및 개혁파 신앙고백 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다시 대조하였다. 자료의 해석과 남아 있을 수 있는 오류를 포함한 글의 최종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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