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하나님이 행하시고, 사람이 믿는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예정론을 성경 전체로 다시 읽기,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 Dei)에 관한 하나의 연구가설」을 짧게 줄인 글입니다. 원문의 각주와 원어 분석, 증거본문 대조표는 본편에 있습니다.

 

 

 

 

 

프롤로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차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두 개의 질문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는 '예정된 자들'이라는 표현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표현보다 어딘지 배타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백서가 예정에서 선택으로, 중생으로, 믿음으로, 회개로, 견인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면, 우리 구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은 무엇이며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질문은 무지나 불신앙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백서를 성실하게 따라온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무엇보다 성경 자체가 이런 반문을 예상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자마자 스스로 묻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9:14),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9:19). 그는 그 반문을 지우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 글은 고백서를 변호하지도 공격하지도 않습니다. 두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 성경 본문과 교회 역사와 고백서 자체를 다시 펼쳐 놓고 대조해 볼 뿐입니다.

 

읽기 전에 알아 두실 표시가 있습니다. 이 글은 【A. 본문】(성경이 직접 말하는 것), 【B. 추론】(여러 본문을 종합할 때 강하게 추론되는 것), 【C. 구성】(후대 신학이 체계화하며 제안한 설명)을 계속 구별합니다. 이 셋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이 글이 바라는 가장 실용적인 열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의 물음을 내려놓습니다. 이 모든 주권적 은혜의 밑바닥에 놓인 것은 추상적인 '절대 의지'가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 아닐까 하는 물음입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결론이 아니라 연구가설입니다.

 

축약본

하나, 두 종류의 '배타성'

"배타적이다"라는 말에는 두 층위가 포개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론적 배타성 — 구원의 길이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것(요14:6, 행4:12). 그런데 이 배타성은 언제나 열린 문과 함께 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길은 하나지만 초청은 모두를 향합니다.

 

예정론적 특수성 — 왜 어떤 사람은 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아닌가. 이것은 다른 질문입니다. 앞의 것은 구원의 을, 뒤의 것은 왜 어떤 사람만 그 길에 들어서게 되는가를 묻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은 첫 번째 질문의 답이지 두 번째 질문의 답이 아닙니다.

 

둘, 성경은 두 가지를 함께 말한다

우리 직관은 하나님과 인간을 시소의 양 끝에 놓습니다.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내려가야 한다고요. 그런데 성경은 그 시소를 쓰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장. "너희 구원을 이루라"(명령). 그리고 곧바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이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은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 모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면 내가 할 필요 없다"로 흐르지만, 바울의 접속사는 "왜냐하면"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 너희가 이루라.

 

신명기. "여호와께서 네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 사랑하게 하실 것이며"(30:6). 그런데 같은 책에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10:16), "생명을 택하라"(30:19)도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내가 주겠다, 내가 제거하겠다 — 결과는 "너희가 지켜 행할지라". 하나님의 행하심의 종착점이 인간의 실제 행함입니다.

 

마태복음 11장. 숨기시고 나타내시는 아버지의 뜻(25–26절) 바로 다음에 "다 내게로 오라"(28절). 두 절 거리입니다.

성경은 조정하지 못해서 둘 다 남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인간관 자체가 둘을 경쟁으로 보지 않습니다.

 

셋, 왜 같은 성경에서 다른 신학이 나오는가

같은 문장을 읽어도 무엇을 먼저 보는지가 다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과하며 읽고, 루터는 죄책과 율법을 안고 읽고,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공의와 복음의 보편적 선포를 물으며 읽습니다. 본문은 같아도 질문이 다릅니다. 질문이 달라지면 눈에 들어오는 구절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이레나이우스가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 것은 인간을 본성으로 나누던 영지주의와 싸웠기 때문이고, 후기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의 시작 자체가 선물"이라고 한 것은 펠라기우스와 싸웠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를 반박한다기보다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개혁주의 자신에게도 아픈 질문이 돌아옵니다. 개혁주의자도 개혁주의 전통을 통해 성경을 읽습니다. 렌즈가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렌즈가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은 "전통 없이 읽는다"가 아니라 "성경으로 전통을 계속 교정한다"입니다.

 

덧붙여, 알미니안주의를 "인간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시작한다"로 요약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1610년 항론파 신조 제3조는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선한 것을 원할 수 없으며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진짜 쟁점은 은혜의 필요가 아니라, 그 은혜가 효력이 있는가·저항 가능한가, 그리고 최종적 차이를 무엇이 설명하는가입니다.

 

넷, 고백서를 펼쳐 놓고 대조하면

3장 1절. 예정론은 첫 문장부터 단서를 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작정하시지만 "피조물의 의지에 폭력이 가해지는 것도 아니며" 제2원인의 자유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WCF의 예정은 강제가 아닙니다.

 

9장. 고백서에는 「자유의지에 관하여」라는 장이 따로 있습니다. 인간은 로봇도 아바타도 아닙니다. 다만 타락한 인간은 영적 선을 향한 능력을 잃었습니다. 의지가 없는 것과 의지가 영적으로 무능한 것은 다릅니다. 불신자는 믿고 싶은데 막힌 사람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책임도 실제입니다.

 

10장 1절. 하나님이 마음을 밝히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리스도께 효력 있게 이끄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극히 자유롭게 나아오니,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본문은 겔 36:26, 신 30:6, 빌 2:13, 요 6:44–45 — 우리가 위에서 읽은 바로 그 본문들입니다. 여기서 핵심 구별이 나옵니다.

"구원의 근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다." — 참입니다.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는 무의미하다." — 거짓입니다.

 

다만 정직하게 말하면 WCF는 실제로 배타적입니다. 그러므로 "배타적으로 느껴진다"는 반응은 오해에서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왜 저 사람은 아닌가"에 고백서는 부분적으로만 답하며, 3장 8절은 이 교리를 특별한 신중함으로 다루라고 명합니다. 사실상 그 비밀을 안다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섯, 로마서 9장에서 멈추지 말 것

WCF 예정론의 상당 부분은 로마서 9장 독해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9장은 홀로 서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논증은 이렇게 흐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통곡 →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 → 그런데 그들이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했다(9:32) → 바울이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0:1) → "누구든지"(10:13) → "순종하지 아니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10:21) → 불신앙으로 꺾이고 믿음으로 선다(11:20) →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 다시 접붙임을 받는다(11:23) → 모두를 불순종 아래 가두심은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11:32) → 송영.

 

WCF 3장의 증거본문을 이 위에 칠해 보면 선택과 유기의 색은 9장에 몰려 있고, 9장 30절부터 10장 21절까지가 비어 있습니다. 11장 23절도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에 있죠?"라는 불편함의 상당 부분은 성경에 그 언어가 없어서가 아니라 조직신학적 재배열이 만드는 효과입니다.

 

다만 공정하게 볼 반전이 있습니다. 3장 8절의 증거본문에는 11장 20절 —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 이 함께 있습니다. 총회는 두 언어를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같은 비중을 부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대조는 고백서 자신의 원칙으로 수행됩니다. WCF 1장 9절은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라 하고, 31장 3절은 모든 공의회가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9:18만 읽지 말고 10:21도 읽으라. 9:22만 읽지 말고 11:23도 읽으라.

여섯, 바로의 마음 — 토라도 그렇게 말한다

두 행위 주체는 바울의 발명이 아닙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먼저 예고하십니다.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4:21). 그런데 실제 사건에서는 "바로가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8:15, 8:32)가 나오고, 9장 12절에서 처음으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가 나옵니다. 그리고 같은 장 34절에 "바로가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가 있습니다. 내레이터는 12절 때문에 34절에서 죄책을 물을 수 없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토라는 둘 사이의 철학적 접합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둘 다 말하고, 바로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바울도 똑같습니다.

일곱, 은혜는 강제인가 회복인가

"하나님이 주권자니까"만 반복하면 하나님의 의지를 그분의 본성에서 분리하게 됩니다. 칼빈 자신이 이 오해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법 없는 분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법이십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시119:68).

 

그렇다면 효력적 은혜의 그림도 달라집니다. 그것은 "싫습니다" 하는 사람을 강제로 믿게 만드는 힘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렸듯, 아버지의 이끄심은 밧줄로 끌고 가는 폭력이 아니라 마음이 그리스도를 기뻐하도록 이끄는 방식입니다. 은혜는 의지를 꺾기 전에 의지를 고칩니다. 신명기 30장 6절에서 마음의 할례의 목적은 "사랑하게 하사"입니다. 효력적 은혜의 종착점은 굴복이 아니라 사랑입니다【B. 추론】.

 

다만 경계선을 긋습니다. '회복'의 언어가 예정론을 물에 타는 데 쓰여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9장의 완악하게 하심은 여전히 본문에 있습니다.

여덟, 하나의 연구가설

여기서부터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불링거의 《De testamento》(1534)를 연구하며 자라난 연구가설이고, 층위로는 【C. 구성】입니다.

 

불링거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낮추어 언약을 맺으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본성인 순전한 선하심"에서 나온 일이라고 말합니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 10장도 선택이 값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목회적 규칙을 덧붙입니다 —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한 소망을 가지고, 아무도 경솔히 유기된 자로 단정하지 말라.

 

연구 질문은 이것입니다. 불링거에게 bonitas Dei는 여러 속성 중 하나인가, 아니면 언약과 선택과 인간의 응답까지 연결하는 더 근원적인 축인가?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불링거가 이것을 자기 신학의 공식 중심으로 선언했다"와 "그의 교리들을 추적하면 이것이 심층 논리로 반복 작동한다"는 다른 주장입니다. 전자를 지지할 증거는 없습니다. 검증하려는 것은 후자입니다. 작업가설은 이렇습니다.

"언약은 불링거 신학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취하는 관계적 형식이다."【C. 연구가설】

 

그리고 반증 조건도 함께 세웁니다. 선하심이 언약론에서만 중요하고 선택론에서는 주변적이라면, 선택의 근거를 선하심과 무관한 절대 의지에 두는 본문이 발견된다면 — 이 가설은 약해져야 합니다.

 

아홉, 가장 어려운 반론

피하지 않겠다고 한 질문 앞에 섭니다. 선하심을 앞세우면 질문은 오히려 날카로워집니다. 선하신 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왜 모두에게 하지 않으시는가.

 

성경이 명시하는 것【A】 — 하나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겔33:11),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딤전 2:4), 멸망하는 자는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습니다(요3:19).

 

개혁파가 추론하는 것【B/C】 — 아무도 받아 마땅한 것보다 나쁜 것을 받지 않고, 아무도 자격이 있어서 은혜를 받지 않습니다. 은혜는 빚이 아니므로 모두에게 주지 않으신다고 불의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별적인 '왜'에는 여전히 답하지 않습니다.

 

신비로 남는 것 — 바로 그 개별적 '왜'입니다. 성경도 고백서도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이 율법의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29:29). 신비는 우리를 사변이 아니라 순종으로 돌려보냅니다.

 

다만 신비의 자리는 논증의 앞이 아니라 끝입니다. 그리고 불링거 가설도 이 신비를 해소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하는 일은 다릅니다. 신비의 성격을 바꿉니다. 성품을 알 수 없는 권력 앞에서 묻는 것과, 온종일 손을 벌리시는 분의 선하심 앞에서 묻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전자의 신비는 공포이고, 후자의 신비는 깊이입니다.

 

열, 결론

"예정된 자들이라고 하면 배타적으로 느껴진다." 그 느낌은 오해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특수성은 성품 없는 권력의 명단 작성이 아닙니다. 성경의 선택은 선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하시려고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도 유기된 자로 단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 교리의 용도는 정반대입니다 — 믿는 자에게는 위로가 되고, 아직 믿지 않는 자를 향해서는 "하나님께는 그를 접붙이실 능력이 있다"는 소망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이 무엇인가." 구원의 근거로 말하면 —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입니다. 내 구원이 내 의지의 성능에 달렸다면 나는 하루도 확신 속에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으로 말하면 — 전부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내 대신 믿어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믿고, 내가 회개하고, 내가 사랑합니다. 다만 내가 그렇게 기꺼이 원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의지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 "내가 믿은 것인가, 하나님이 믿게 하신 것인가?"

 

원인과 응답을 구별해서 말하면 둘 다입니다. 그리고 그 순서가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먼저 믿게 하셨기 때문에, 정말로 내가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은혜로 주어졌고(빌1:29), 루디아가 정말로 듣고 따랐지만 그 마음을 여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행16:14).

 

이 글을 읽고 "이제 모든 문제가 풀렸다"고 느끼신다면 제가 글을 잘못 쓴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실제 응답을 얼마나 풍성하게, 얼마나 두려움 없이 함께 말하는지를 조금 더 보게 되셨기를. 그리고 그 풍성함 앞에서 바울이 도달했던 자리에 우리도 함께 서기를. 그 자리는 대답의 포기가 아닙니다. 물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물은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경배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11:33, 36)

말씀의 섭취 3부작 ㅡ 프롤로그와 축약본

  1. 「이 말씀을 먹으라!」
  2.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
  3. 「먹지 말라, 먹으라」

 

 

 

이 세 편의 글은 처음부터 3부작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했는데, 그 질문이 스스로 다음 질문을 불러왔고, 그렇게 세 번을 걸어오게 되었다. 그러니 이 프롤로그는 세 글의 내용을 다시 요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걸음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까지 갔는지를 짧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글 「이 말씀을 먹으라!」의 질문은 단순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고, 예레미야가 말씀을 얻어 먹고,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먹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신다. 성경 안에서 말씀은 반복해서 양식이 되고, 그 양식은 먹는 자에게로 들어가 그를 살린다. 그 흐름을 따라가 보니 말씀·양식·먹음·그리스도·연합·거함·성장·열매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첫 글은 말씀을 먹는다는 것을 지식을 쌓는 일이나 성경 읽는 기술로 좁히지 않고, 성령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 그분 안에 거하고 그 생명에 참여하며 그 말씀에 의해 빚어지는 삶으로 설명했다.

 

두 번째 글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는 첫 글을 넓히려고 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첫 글을 다시 의심하려고 쓴 글이었다. 교부들과 루터와 칼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의 원문과 초기 판본을 다시 펼쳐 놓고 물었다. 내가 처음 글에서 너무 멀리 나간 것은 없는가.

 

대답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어떤 문장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어떤 문장은 강도를 낮추어야 했다. 그리고 어떤 문장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한 역사적 근거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선이 분명해졌다. 본문을 직접 주해한 것과 신학적으로 공명하는 것은 다르다.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는 관계는 함부로 만들어 낼 수 없다. 교부를 개혁파 신학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신앙고백의 본문과 후대에 덧붙은 증거 구절은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먹음은 곧 믿음이다"라는 깔끔한 등식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 실제로 그분과 연합하고 그 생명에 참여한다는 더 두터운 구조가 원전에서 확인되었다. 교부와 종교개혁자들은 이 글의 결론을 승인해 주는 권위가 아니었다. 같은 본문 앞에서 먼저 씨름했던 선배들이었고, 그래서 이따금 나를 교정했다.

 

세 번째 글 「먹지 말라, 먹으라」는 첫 글에 '먹음 본문'을 몇 개 더 얹은 글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의 질문을 더 아래로 밀고 내려갔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서 누가 정하는가로, 그리고 누가 주는가로. 결국 이런 질문이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취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존재인가.

 

그래서 세 번째 글의 축은 취함과 받음이다.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자기 판단으로 취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 먹었다. 광야의 그리스도는 굶주림 속에서도 아버지의 말씀 아래 머무르셨다. 요한복음 6장에서 아버지께서는 마침내 생명의 떡을 주신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자기 오래된 기준으로 거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주어진 두루마리를 받아 먹고 다시 예언하러 나간다. 다만 이 본문들이 모두 같은 뜻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각 본문은 저마다의 문맥과 신학적 기능을 가진다. 여기서 한 일은 '먹음'이라는 단어 하나로 그것들을 묶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본문들 속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의 긴장, 곧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자기 판단 사이의 긴장을 정경 전체에 걸쳐 관찰한 것이다.

 

그러니 세 글의 관계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1부는 발견이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 안에서 찾았다. 2부는 검증이었다. 교회가 실제 원전 속에서 어디까지 그렇게 말해 왔는지를 물었다. 3부는 심화였다. 먹고 먹지 않는 행위 뒤에 어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놓여 있는지를 물었다.

 

이것을 새로운 학설이라거나 독창적인 신학 체계라고 부를 생각은 없다. 먹음과 양식, 연합과 순종은 오랜 연구사를 가진 주제이고, 교부와 종교개혁자들에게 이미 충분한 재료가 있었다. 여기서 한 일을 정확히 말하자면, 익숙한 성경적·역사신학적 재료들을 하나의 일관된 질문 아래 배열하고, 원전으로 검증하고, 다시 정경 전체로 돌아가 확장한 하나의 연구 궤적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세 글을 다 쓰고 나서 보니, 이 글들을 관통하는 진짜 중심은 '먹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먼저 주시며, 사람은 그 말씀을 자기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대신 믿음으로 받아 그 안에서 살도록 부름받는다.

 

복음의 순서도 언제나 같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 성령께서 믿게 하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받는다. 그리고 그 받은 생명이 우리를 거하게 하고,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한다.

 

처음의 질문은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그러나 세 글을 지나며 질문은 조금 달라졌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결국 어떤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가의 문제였다. 스스로 판단하여 취하는 인간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는 인간인가.

 

그래서 이 세 글의 중심에는 먹음보다 더 깊은 한 가지 고백이 남는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축약본

1부는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찾았고, 2부는 교회가 어디까지 그렇게 말해 왔는지 원전으로 검증했으며, 3부는 먹고 먹지 않는 행위 뒤에 어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1부 — 이 말씀을 먹으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실 때 설교문을 건네지 않으셨습니다. 읽으라고도, 외우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겔2:8). 말씀이 양식이라는 것은 비유적 장식이 아닙니다. 광야의 만나는 저장할 수 없었고 매일 아침 받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십 년 동안 자기 생존이 자기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 달려 있음을 몸으로 배웠습니다(신8:3). 에스겔이 받은 명령에는 순서가 있고, 그 순서가 곧 신학입니다.

 

받음 → 먹음 → 내면화 → 마음으로 받음 → 가서 말함

 

"가서 말하라"가 먹은 다음에 옵니다. 선지자는 우편배달부가 아니라, 전할 말씀을 먼저 자기 안에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먹는가. 묵상입니다. 읽고, 되새기고, 맛보고, 그 말씀으로 기도하고, 순종하고, 그렇게 말씀에 의해 빚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묵상은 기술이 아닙니다. 성경을 펴는 것은 우리가 하지만 믿음을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말씀에는 단맛만 있지 않습니다. 늘 단 것만 찾는 독서는 성경책을 들고 있어도 말씀을 먹는 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마침내 그 말씀이 한 인격으로 오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먹음"을 "믿음"이라는 한 단어로 바꿔치기하면,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만큼 거칠었던 그 언어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진술은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먹음의 언어가 곧 거함의 언어로 넘어갑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6:56). 소유가 아니라 상호 내주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그 거함이 포도나무와 가지로 펼쳐집니다. 가지는 열매를 만들지 않습니다. 붙어 있을 뿐이고, 열매는 그 결과입니다.

 

말씀 → 그리스도 → 믿음 → 연합 → 거함 → 성장 → 분별 → 열매 → 증언

 

 

2부 —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

1부의 각주 밑에 남겨 둔 숙제를 실제로 해 본 기록입니다. 이미 정한 결론을 증명하는 절차가 아니라, 이미 써 놓은 문장을 원전 앞에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결과는 "다 맞았다"가 아니었습니다.

 

낮추어야 했던 것. 이레네우스의 그 대목은 요한복음 6장의 주석이 아닙니다. 공명이라고 해야 합니다. 크리소스톰은 개혁파의 선구자가 아니라 성찬 앞에서 떨라고 권하는 4세기 동방의 설교자입니다. 하이델베르크 1563년 초판 여백에 요 15:1–6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문장들을 내려놓고 나서야 그 사람들이 실제로 한 말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의 증거본문 하나를 포기하고 나니, 76문 본문 자체가 이미 믿음과 죄 사함과 영생과 성령과 "점점 더 깊어지는 연합"을 다 말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적 주장은 좁아졌는데 신학적 논증은 오히려 견고해졌습니다.

 

더 강해진 것.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는 26논고가 아니라 25논고 12절이었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강해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이어 26논고에서 먹음이 거함으로 정의되고, 27논고에서 먹었다는 표지가 지금도 거하는가에 놓입니다. 루터는 바이마르판에서 훨씬 단호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성례에 관해 한 음절도 말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가 곧이어 인용한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문장이었습니다. 칼빈은 한 걸음 더 정밀합니다. 그는 "먹는 것은 곧 믿는 것"이라는 정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먹음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는 것입니다. "말의 차이는 작지만 실제의 차이는 작지 않다." 1부가 조심스럽게 피해 갔던 함정을 그는 이미 16세기에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주 하나도 신학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말했다"고만 쓰면 독자에게는 믿거나 믿지 않거나 두 선택지뿐입니다. 위치를 밝히는 순간 세 번째가 생깁니다. 직접 확인하는 것. 반박 가능한 글만이 신뢰할 수 있는 글입니다.

검증의 원리도 결국 같았습니다. 자료가 연구자의 말을 제한했고, 그 제한이 선물이었습니다.

 

 

3부 — 먹지 말라, 먹으라

질문이 더 아래로 내려갑니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서 누가 정하는가, 누가 주는가로. 에덴의 첫 명령은 금지가 아니라 허락으로 시작합니다.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하나님은 아담을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나무를 봅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취합니다. 문제는 배고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기 판단을 최종 판단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정확히 짚었습니다. 그 열매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금지되었기 때문에 문제였다고. 금지된 것이 그토록 사소했기 때문에, 순종할 이유는 하나만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에덴 금지된 것을 스스로 취함
에스겔 주시는 말씀을 받아 먹음
광야의 그리스도 말씀 밖에서 떡 취하기를 거절함
요한복음 6장 아버지께서 생명의 떡을 주심
사도행전 10장 깨끗하게 하신 것을 거부하지 않음
요한계시록 10장 주시는 계시를 받아 먹고 다시 전함

 

특히 베드로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는 자랑이 아니라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는 하나님의 뜻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충실함이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환상의 과녁은 식탁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행10:28). 에덴에서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인간이 허용하려 했고, 욥바에서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인간이 금지하려 했습니다. 방향은 정반대인데 뿌리는 닮았습니다. 한쪽은 욕망의 언어로, 다른 쪽은 경건의 언어로 말했지만 두 문장 모두 주어가 "내가"였습니다.

 

죄는 방종의 얼굴로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제까지 옳았던 경건의 얼굴로 옵니다. 다만 이 본문들을 하나로 눌러 붙이지는 않습니다. 열매와 두루마리와 떡과 짐승은 동일한 사물도, 동일한 기능도 아닙니다. 여기서 관찰한 것은 숨겨진 암호가 아니라, 서로 다른 본문들 가운데 반복되는 하나의 긴장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금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며, 인간은 자기 판단을 그 말씀 아래 두도록 부름받는다는 것. 그리고 "받는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에스겔은 입을 벌렸고 갔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문지방을 넘었습니다. 이것은 능동 대 수동이 아니라 누가 시작하는가의 대비입니다.

 

 

맺으며

"그러니 잘 순종하자"로 끝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내가"가 주어가 됩니다. 복음의 순서는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주시고, 아들을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 되시고, 성령께서 믿게 하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받고, 그 받은 생명이 우리를 순종하게 합니다. 생명의 떡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도, 빼앗은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입니다. 

 

처음의 질문은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러나 세 글을 지나며 질문은 달라졌습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결국 어떤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가의 문제였습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세 편의 긴 글을 한자리에서 읽을 수 있도록 줄인 것입니다. 원문의 논증 과정과 각주는 각 편의 본글에 있습니다.

 

 

에덴에서 베드로의 환상까지, 성경의 '먹음'과 순종 — 취하지 말고 받으라

 

 

 

 

들어가며 — 왜 성경에는 "먹으라"와 "먹지 말라"가 반복되는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상하리만큼 자주 마주치게 되는 명령이 하나 있다. "먹으라." 그리고 그 반대편에 늘 함께 서 있는 명령. "먹지 말라."

 

이 명령들은 아무 데서나 나오지 않는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결정되는 자리, 한 사람의 소명이 시작되는 자리, 교회의 문이 새롭게 열리는 자리에서 나온다. 에덴 동산 한복판에서, 바벨론 강가의 젊은 제사장에게, 사십 일을 굶주리신 그리스도의 광야에서, 갈릴리 회당의 강론에서, 욥바의 지붕 위에서, 그리고 밧모 섬의 환상 가운데서.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든다. "성경에 무슨 숨겨진 '먹음의 암호' 같은 것이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보론이 가장 경계하려는 것이 바로 그 유혹이다.

 

창세기 3장의 열매와 에스겔 3장의 두루마리와 마태복음 4장의 떡과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떡과 사도행전 10장의 짐승과 요한계시록 10장의 작은 두루마리는 같은 사물이 아니다. 같은 신학적 기능을 갖지도 않는다. 이것들을 "먹다"라는 동사 하나로 꿰어 하나의 도식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것은 성경신학이 아니라 말장난이 된다.

 

그러나 각 본문의 직접적인 의미를 충분히 존중하며 하나씩 읽어 나간 뒤에 그것들을 나란히 놓아 보면,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정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신학적 긴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 긴장은 이것이다.

먹는가 먹지 않는가 자체가 핵심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셨고 무엇을 금하셨으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앞세우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자기 판단을 두는가가 핵심이다.

 

그래서 이 보론의 중심 명제는 이렇게 정리된다.

성경에서 순종은 언제나 "먹는 것"이나 "먹지 않는 것" 자체에 있지 않다. 어떤 때에는 먹지 않는 것이 순종이고, 어떤 때에는 받아 먹는 것이 순종이며,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자기 기준으로 거부하지 않는 것이 순종이다.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판단을 앞세우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이 명제를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이 보론 전체를 떠받치는 하나의 대비에 이르게 된다.

 

자기 판단으로 취함 vs.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음

 

에덴의 손은 금하신 것을 스스로 취했고, 에스겔의 입은 주시는 것을 받아 먹었다. 광야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말씀 밖에서 떡을 취하기를 거절하셨고, 요한복음 6장에서 아버지께서는 친히 참 떡을 주신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자기 기준으로 거부하려다 제지당했고, 요한은 주어진 두루마리를 받아 먹고 다시 예언하러 나간다.

취함과 받음. 이것이 이 글의 축이다. 이제 하나씩 걸어 들어가 보자.


Ⅰ. 에덴 — 먹지 말라

성경의 첫 번째 "먹음" 명령은 금지가 아니라 허락으로 시작한다. 이 순서를 놓치면 창세기 2–3장 전체를 오해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17)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먹지 말라"가 아니라 "임의로 먹되"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굶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정반대다. 동산의 거의 모든 나무를 그의 식탁으로 내어 주셨다. "임의로"라는 말은 인색함의 언어가 아니라 넉넉함의 언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한 그루만 허락하고 나머지를 금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무를 주시고 단 한 그루에만 경계를 두셨다.

 

그러므로 선악과 명령을 금욕주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인간의 즐거움을 시기하셨다거나, 물질과 육체를 억누르는 것이 경건이라거나, 지식 자체가 위험한 것이라는 식의 해석은 이 본문이 말하려는 바와 정반대에 있다. 본문의 무게중심은 풍성함 가운데 놓인 하나의 경계에 있다. 그렇다면 그 하나의 경계는 왜 있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서라는 문제에 이른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자리는 인간의 자리가 아니다. 인간은 창조주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살아가도록 지어진 존재다. 동산 한가운데 서 있던 그 나무는, 인간이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니며 "나는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다"라는 사실을 몸으로 고백하게 하는 자리였다. 곧 그 명령의 핵심은 다음 네 가지다.

  •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
  • 피조물에게 주어진 경계
  •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서
  •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순종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이 순서가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지는 과정이 놀랍도록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6)

 

이 짧은 한 절 안에 죄의 해부도가 들어 있다. 순서를 따라가 보자.

 

하나님의 말씀 — "먹지 말라"는 분명한 말씀이 먼저 있었다.

 

뱀의 왜곡 —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뱀은 하나님의 넉넉함을 인색함으로 뒤집는다. 이어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인간의 자기 판단 — 이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나무를 "본다". 먹음직하다는 판단, 보암직하다는 판단,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판단. 이 세 가지는 모두 하와 자신의 감각과 이성이 내린 평가다.

 

경계의 재평가 —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선이 이제 인간의 검토 대상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스스로 취함 — 그리고 손을 뻗는다. "따먹고." 히브리어 본문의 동사 결합은 문자 그대로 "취하여 먹었다"이다.

 

먹음 → 죽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항목, "스스로 취함"이다. 성경은 하와가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만 기록하지 않는다. 그가 그 열매를 취했다고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먹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신 것에 손을 뻗어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에덴의 죄를 "먹고 싶어 했다"로 요약하는 것은 지나치게 얕은 독법이다. 배고픔이 문제가 아니었다. 동산은 먹을 것으로 가득했다. 문제는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기 판단을 최종 판단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서 있기를 그만두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그것을 심사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자. 그렇다고 해서 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물질이나 음식이 악한 것도 아니다. 나무도 악하지 않았고 열매도 악하지 않았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심히 좋았다고 선언한다. 문제는 사물에 있지 않고 관계에 있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보다 훨씬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이미 아주 분명하게 보았다.

 

 

 

Ⅱ. 교부들이 본 첫 먹음과 불순종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이 창세기 2–3장을 어떻게 읽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다. 왜 중요한가? 우리가 지금 잡고 있는 축—"열매가 아니라 불순종", "먹음이 아니라 자기 판단"—이 21세기에 새로 발명된 창의적 해석이 아니라, 교회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이 본문에서 실제로 읽어 낸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우리의 읽기를 검증해 주고, 동시에 우리가 지나치게 나아가지 않도록 제어해 준다.

2-1.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 죽음을 품고 있던 것은 나무가 아니었다

2세기 후반, 안디옥의 감독 테오필루스는 이교도 친구 아우톨리쿠스를 향해 쓴 변증서에서 선악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1 그의 대화 상대는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 신은 왜 인간에게 지식을 금했는가? 인간이 지혜로워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 아닌가?"

테오필루스의 대답은 단호하다. 그 나무 자체와 그 열매는 선했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쁜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동산에 심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가 남긴 그리스어 문장의 핵심은 이렇다.

οὐ ... θάνατον εἶχεν τὸ ξύλον, ἀλλ' ἡ παρακοή "죽음을 품고 있던 것은 나무가 아니라 불순종이었다."

 

여기서 쓰인 단어 파라코에(παρακοή)는 문자적으로 "곁에서 잘못 들음", 곧 듣기는 들었으나 그 말씀 아래 서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죽음의 원인은 나무의 성분에 있지 않았다. 들은 말씀에 순복하지 않은 데 있었다. 테오필루스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 명령을 통해 인간이 명령에 순종하는지를 보고자 하셨다고 설명한다.

 

이 한 문장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오늘날에도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이 "왜 사과 하나 때문에 인류가 저주를 받는가?"이기 때문이다. 테오필루스의 대답은 2세기의 답이지만 여전히 정확하다. 그것은 사과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씀의 문제였다.

2-2. 이레네우스 — "그들은 불순종하여 먹었다"

리옹의 이레네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먹음과 불순종을 문법적으로 아예 한 문장 안에 묶어 버린다. 『이단 논박』 5권의 고대 라틴어 전승에 남아 있는 문장은 이렇다.2

Simul enim cum esca et mortem adsciverunt, quoniam inobedientes manducabant: inobedientia autem Dei mortem infert. "그들은 음식과 함께 죽음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순종하여 먹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죽음을 가져온다."

 

이 문장의 힘은 inobedientes manducabant, 곧 "불순종하는 자로서 그들은 먹고 있었다"라는 구절에 있다. 이레네우스는 "그들이 먹었고, 그 후에 불순종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먹었고, 그것이 곧 불순종이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쓴 문장 구조에서 불순종은 먹음을 수식하는 상태다. 먹는 그 순간 그들은 이미 불순종의 자리에 서 있었다. 행위와 태도가 하나였다.

 

이레네우스에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 더 큰 그림이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온갖 양식을 풍성히 주시고 오직 한 나무만을 금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인류가 한 나무에서의 불순종으로 잃은 것을 그리스도께서 다른 한 나무—십자가—에서의 순종으로 회복하셨다고 본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재총괄(recapitulatio) 구조다.3

 

다만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이레네우스의 재총괄은 "선악과 = 십자가의 반대편"이라는 기계적 일대일 유형론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나무라는 사물의 대응이 아니라, 인류의 머리로 세워진 첫 사람의 불순종과 새 인류의 머리로 오신 둘째 아담의 순종 사이의 대응에 있다. 나무는 그 순종과 불순종이 드러난 자리였을 뿐이다. 이 구별을 지켜야 이레네우스를 그의 말대로 읽을 수 있다.

2-3. 아우구스티누스 — 금지되었기 때문에 문제였다

우리 보론의 논지를 가장 정면으로 진술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다. 『하나님의 도성』 14권 12장에서 그는 첫 사람의 죄를 "음식에 관한 사소한 잘못"으로 축소해 보려는 시도를 정면으로 거부한다.4 그의 핵심 문장은 이것이다.

non quidem mala nec noxia, nisi quia prohibita "그것 자체가 악하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라, 다만 금지되었기 때문에 문제였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다.

Sed oboedientia commendata est in praecepto "그 명령에서 권고된 것은 순종이었다."

 

이 두 문장을 나란히 놓고 천천히 읽어 보라.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가지를 동시에 부정하고 있다.

 

첫째, 그는 음식 자체의 악함을 부정한다. 열매에는 독이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좋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물질에 대한 혐오나 육체에 대한 경멸의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둘째, 그는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이 사소한 일이었다는 것도 부정한다. 오히려 정반대다. 금지된 것이 그토록 사소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서 시험된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더욱 선명해진다. 만약 하나님께서 살인이나 우상숭배를 금하셨다면, 순종의 동기 안에 "이것은 나쁜 일이니까"라는 인간 자신의 판단이 섞여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금지된 것이 그 자체로는 아무 해가 없는 열매였기 때문에, 순종할 이유는 오직 하나만 남는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라는 더 큰 원리로 나아간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 아래 있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유익이며, 자기 뜻을 창조주의 뜻보다 앞세우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파괴다. 첫 사람이 무너진 지점은 정확히 여기였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보는 것을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것 위에 놓았다.

 

이 세 사람—테오필루스, 이레네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은 놀랍도록 같은 곳을 가리킨다. 열매가 아니라 명령. 음식이 아니라 순종.

그러나 이들을 한 사람으로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 테오필루스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인간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교육적 지혜에 무게를 둔다. 이레네우스는 인류의 머리들과 재총괄이라는 구속사적 구조 안에 이 사건을 배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와 사랑의 방향이 뒤집히는 내면의 드라마를 파고든다. 강조점도 다르고, 신학적 관심사도 다르고, 살았던 시대의 논적도 다르다. 그럼에도 이 셋이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이 독법의 무게를 더해 준다.

 

 

 

Ⅲ. 루터와 칼빈 — 나무에 붙은 하나님의 말씀

천 년이 지나 종교개혁자들에게 오면, 같은 축이 훨씬 더 날카롭게 벼려진다.

3-1. 루터 — 아담의 교회이자 제단이며 강단

루터는 만년의 창세기 강해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읽는다.5 그에게 그 나무는 단지 "손대면 안 되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였다. 루터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이렇다.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는 성전도 없었고 성례도 없었고 설교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서 하나님을 예배했는가? 바로 그 나무 앞에서였다. 그 나무에 하나님의 말씀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매일 그 나무 앞을 지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다"라는 말씀을 기억했고, 그 기억 속에서 자기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임을 고백했다. 그래서 루터는 그 나무를 아담의 교회요, 제단이요, 강단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루터가 강조하는 것은 나무의 재질이나 열매의 성분이 아니다. 그 나무에 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무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말씀이었다. 말씀이 없었다면 그것은 동산의 수많은 나무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루터에게서 순종과 예배가 하나로 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자기를 두는 것, 그것이 곧 예배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기 판단을 놓는 것은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 예배의 전복이다. 아담이 그 열매에 손을 뻗었을 때, 그는 자기 교회의 제단을 무너뜨린 것이다. (다만 루터의 창세기 강해는 학생들의 필기와 편집을 거쳐 전해진 자료이므로, 확인된 범위를 넘어서는 긴 직접 인용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삼가는 것이 옳다. 여기서는 그의 해석의 취지를 요약해 소개한다.)

3-2. 칼빈 — 스스로 선악의 심판자가 되지 않도록

칼빈의 창세기 2장 주석은 우리 보론의 중심 문장과 거의 겹친다.6 칼빈은 먼저 오래된 오해 하나를 치운다. 하나님께서 그 나무를 금하신 것은 인간을 무지한 상태에 붙들어 두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지식을 시기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막으신 것인가? 칼빈에 따르면 세 가지다.

  • 인간이 자기 이해에 의존하는 것
  • 인간이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것
  •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심판자가 되는 것

특히 세 번째가 결정적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는 "선악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선악에 대한 판정권"이었다.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최종적으로 선언하는 자리는 창조주의 자리다. 인간이 그 자리를 탐냈을 때, 그는 지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 위치를 잃었다.

 

그리고 칼빈은 이 대목에서 아름다운 한 마디를 덧붙인다. 참된 지혜란 자기 지혜에 의존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어 순종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보론에서 세우고 있는 대비를 역사적으로 강하게 받쳐 준다.

"내가 보기에 좋으므로 내가 취하겠습니다."

대(Vs)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나는 그 경계를 신뢰하겠습니다."

 

에덴의 죄는 인간이 먹고 싶어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기 판단을 최종 판단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이제 이 판단의 문제를 머리에 담고, 정경의 반대편으로 건너가 보자.

 

 

 

Ⅳ. 에스겔 —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에덴에서 수천 년, 바벨론 강가. 사로잡혀 온 젊은 제사장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한복판에 다시 "먹으라"는 명령이 등장한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겔2:8)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채우며 네 창자에 가득하게 하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겔3:1–3)

 

이 짧은 대목에서 "내가 네게 주는"이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자. 두루마리는 에스겔이 발견해서 집어 든 물건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신 것이다. 본문은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라고 기록한다. 선지자는 입을 벌렸을 뿐이다.

 

여기서 서둘러 창세기와의 직접적인 문학적 평행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에스겔서 본문은 창세기 3장을 인용하지도, 암시하지도 않는다. 두 본문은 장르도 다르고 문맥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다. 그러나 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두 장면이 만들어 내는 대조는 선명하다.

 

에덴 —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인간이 자기 판단으로 취해 먹음.

 

에스겔 —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선지자가 받아 먹음.

이 대조를 두 단어로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취함 vs. 받음

에덴의 손은 뻗어 나간다. 에스겔의 입은 벌어진다. 손을 뻗는 것은 능동이고, 입을 벌리는 것은 수용이다. 둘 다 "먹음"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자세는 정반대다.

그리고 에스겔의 이야기는 먹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순서를 따라가 보자.

 

받음 → 먹음 → 내면화 → 마음으로 받음 → 가서 말함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들으라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겔3:10–11)

 

말씀은 선지자의 입에서 백성의 귀로 곧장 흘러가지 않는다. 먼저 선지자 자신의 배와 창자를 통과한다. 그를 형성하고, 그를 아프게 하고, 그를 바꾼다. 그러고 나서야 그의 입에서 나간다. 이것은 본편에서 우리가 붙들었던 문장과 정확히 맞물린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에스겔은 두루마리를 손에 쥐고 연구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삼켜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Ⅴ. 광야 — 먹지 않음으로 순종하신 그리스도

이제 신약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먹지 말라"의 자리로 돌아온다. 다만 이번에는 명령을 받는 쪽이 첫 사람이 아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4:1–2)

 

먼저 이 사실을 충분히 무겁게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 실제로 굶주리셨다. 이것은 상징적 표현이 아니다. 사십 일 만에 찾아온 진짜 배고픔이다. 신학적 논의로 서둘러 넘어가기 전에, 이 몸의 사실 앞에 잠시 머물러야 한다. 에덴의 아담은 배부른 상태에서 시험을 받았고, 광야의 그리스도는 굶주린 상태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시험하는 자가 말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이 유혹의 핵심을 잘못 짚기 쉽다. 사탄은 "음식을 먹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은 죄가 아니다. 사십 일 금식 후에 식사하는 것도 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도 물론 죄가 아니다.

 

유혹의 핵심은 이것이다. 아버지의 뜻과 말씀을 떠나, 자기 능력으로 자기 필요를 해결할 것인가.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로 이끄셨다. 그 굶주림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자리였다. 사탄의 제안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라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본문이 그 이상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유혹은 아버지의 뜻과 말씀에 대한 신뢰를 떠나 자신의 아들 됨을 자기 방식으로 증명하고 사용하라는 유혹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신명기 8장을 인용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4:4)

 

이 인용의 배경이 되는 신명기 본문은 이렇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인용하신 문맥이 광야의 이스라엘이라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주리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다. 그들은 그 만나를 받아 먹어야 했다. 스스로 취할 수도 없었고, 저장해 둘 수도 없었다. 매일 아침 하나님이 주시는 만큼만 받는 훈련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훈련에 반복해서 실패했다.

 

이제 참 이스라엘이신 분이 같은 광야에 서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첫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를 조심스럽게 놓아 보자.

 

첫 아담 — 풍성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 금지된 것을 취함.

 

그리스도 — 굶주림 속에서도, 아버지의 말씀 아래 머무심.

이 대비는 참으로 선명하다. 그러나 "마태복음 4장이 창세기 3장에 대한 직접적인 해설이다"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마태는 여기서 창세기 3장을 인용하지 않는다. 그가 인용하는 것은 신명기다. 마태의 직접적인 관심은 광야의 이스라엘과 참 이스라엘이신 아들의 대비에 있다.

 

그러므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는 마태복음 4장의 직접 주해가 아니라, 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성립하는 신학적·정경적 대비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물론 바울이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두 아담을 명시적으로 대조하고 있으므로, 이 대비 자체는 성경 내부에 충분한 근거를 가진다. 다만 그 근거가 마태복음 4장 본문에서 직접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구별을 지키자는 것이다.

 

 

 

Ⅵ. 생명의 떡 — 이제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신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 이르면, 이 모든 흐름이 뒤집힌다. 무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뒤 예수를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만나 이야기를 꺼낸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1). 곧, 모세는 우리에게 떡을 주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주겠느냐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2–35)

 

여기서 세 개의 동사를 눈여겨보자. 주신다, 내려온다, 주신다. 주어는 언제나 하나님이시다. 아버지께서 주신다. 떡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 떡이 세상에 생명을 준다. 이 문단 전체에서 인간은 주는 자가 아니라 받는 자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역전인지 보라.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스스로 취했다. 그 손이 뻗어 나갔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요한복음 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양식을 친히 주신다. 그리고 그 양식은 어떤 물건이 아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요6:51)

 

첫 사람이 손을 뻗어 취한 것은 생명을 주는 듯 보였으나 죽음을 가져왔다. 이제 하나님께서 내어 주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분의 살이며, 그것이 참으로 생명을 준다. 인간의 취함은 죽음을 낳고, 하나님의 주심은 생명을 낳는다. 그렇다면 이 떡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본편에서 세운 원칙으로 돌아간다. "먹음 = 믿음"이라는 단순한 등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요한복음 6장의 언어가 가진 육체성과 연합의 깊이가 다 날아가 버린다. 오히려 다음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자.

 

믿음으로 받음 → 그리스도 참여 → 연합 → 생명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6:56)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정보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분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는 상호 내주의 언어가 그것을 보여 준다. 이 구조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다시 나타나고,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의 성찬 언어에서도 울린다.


Ⅶ. 베드로 — "일어나 잡아 먹으라"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뜻밖의 "먹으라"를 만난다.

욥바의 지붕 위, 정오. 베드로는 기도하다가 시장기를 느낀다. 그리고 환상 가운데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 안에는 온갖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이 들어 있다.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10:13–15)

 

이 장면에서 베드로의 거절을 함부로 비웃어서는 안 된다. 그의 대답은 불경한 반항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온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말은 자랑이 아니라 고백이었다. 그는 자기가 아는 하나님의 뜻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충실함이 문제가 된다. 구속사의 새로운 단계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전 규례의 경계를 거두고 계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자.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새로운 계시로 옛 말씀을 계속 갱신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의식법의 그림자가 실체에 이르렀고, 그 전환을 사도에게 알리시는 사도 시대의 특별한 계시적 순간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그 전환이 이미 완료된 자리에 서 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문장의 문법을 보라. 깨끗하게 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속되다고 판정하려는 주체는 베드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판정권을 거두어 가신다.

 

그런데 이 환상을 "이제 모든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음식 규례의 전환도 실제 의미의 일부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가가 이야기 전체를 통해 보여 주는 결정적 적용은 다른 데 있다. 그리고 그 적용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베드로 자신이다. 환상 직후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다. 베드로는 그들을 따라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행10:28)

 

주목하라. 짐승에 대해 하신 말씀을 베드로는 사람에게 적용한다. "아무 것도"가 아니라 "아무도"다. 환상의 최종 과녁은 식탁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열고 계시던 것은 식단이 아니라 언약 백성의 문이었다. 이제 이 장면을 에덴과 조심스럽게 나란히 놓아 보자. 방향은 정반대다.

 

에덴 —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인간이 자기 판단으로 허용함.

 

행 10 —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인간이 자기 기존 판단으로 계속 금지하려 함.

한쪽은 하나님이 그으신 선을 지우려 하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이 지우신 선을 다시 그으려 한다. 정반대의 방향이다.

그런데 그 뿌리는 놀랍도록 닮았다.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 중 누가 최종적인가.

 

에덴의 인간은 "내가 보기에 좋으니 취하겠다"고 했고, 욥바의 베드로는 "내가 알기로 부정하니 먹지 않겠다"고 했다. 한쪽은 욕망의 언어로, 다른 한쪽은 경건의 언어로 말했다. 그러나 두 문장 모두 주어가 "내가"였다. 이것이 이 비교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닌 이유다. 죄는 방종의 얼굴로만 오지 않는다. 때로는 어제까지 옳았던 경건의 얼굴로 온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미 정하신 바보다 내가 익숙하게 배운 기준을 더 신뢰할 때, 우리는 아담과 정반대 방향으로 걸으면서도 같은 자리에 서게 된다.


Ⅷ. 크리소스톰과 칼빈이 본 베드로의 환상

이 독법이 현대인의 창의적 재해석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역사로 들어가 보자.

8-1. 크리소스톰 — 보자기는 세계요, 짐승은 이방인이다

4세기 말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에서 설교했던 요한 크리소스톰은 『사도행전 강해』 22편에서 이 환상을 다룬다.7 그의 해석은 대단히 명시적이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를 온 세계의 상징으로 읽는다. 그 안의 짐승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잡아 먹으라"는 명령은 베드로가 그들에게로 가야 한다는 사명의 선언이라고 푼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은 베드로 개인의 식습관에 관한 지침이 아니라, 유대인 전체를 향한 교훈이라고 본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가 이 보론에서 "행 10의 핵심은 음식이 아니라 이방인 수용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20세기 선교신학의 렌즈를 고대 본문에 덧씌운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은 1600년 전에 같은 것을 읽었다. 그리고 그는 누가가 10장 28절에서 보여 주는 적용을 그대로 따라간 것뿐이다.

 

다만 여기서 크리소스톰을 현대적 반율법주의의 선구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는 환상의 상징적 의미를 읽으면서도 음식 규례의 실제 전환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 환상을 "사람에 대한 알레고리일 뿐"이라고 축소하지 않는다. 상징과 실제를 함께 본다. 이 균형이 그의 해석의 미덕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는 베드로가 "나는 부정한 것을 먹은 적이 없다"고 항의한 것조차 섭리적으로 유익했다고 본다. 훗날 예루살렘의 유대계 신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했을 때, 그는 자기가 자원해서 그리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억지로 순복한 것임을 증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2. 칼빈 — 판정권은 하나님께 있다

칼빈의 사도행전 10장 주석은 우리 논지의 중심을 정면으로 진술한다.8 그는 15절을 설명하면서,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정죄할지는 인간의 자의적 판단에 달려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의 심판자이시라고 말한다. 사물의 정결과 부정을 결정하는 권한 자체가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의 그림자가 지나간 후 하나님께서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음을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의 성격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이 인간의 오래된 종교적 판단을 교정하는 장면이다. 베드로의 판단이 부도덕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에서 참으로 옳았던 판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새 단계에서 친히 폐하신 경계를 계속 절대화하면, 과거에 옳았던 규례 준수가 현재의 순종을 가로막는 자리에 설 수 있다. 진리가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가 이미 실체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그림자를 붙들고 있는 것이 문제다.

 

칼빈은 또한 베드로의 태도에서 배울 점도 짚는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도 곧바로 자기 해석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그 뜻이 무엇인지 속으로 의아해하며(행10:17), 하나님의 뜻이 더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불확실한 상태에서 섣불리 자기 판단으로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이것 역시 자기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는 한 방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흥미로운 대칭이 드러난다.

 

창세기 주석의 칼빈 —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심판자가 되지 말라.

 

사도행전 주석의 칼빈 —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인간이 다시 속되다고 판정하지 말라.

같은 원리가 정반대 방향에서 적용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인간이 금지된 것을 허용하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인간이 허용된 것을 금지하려 한다. 그러나 칼빈이 두 곳에서 붙들고 있는 원리는 하나다. 판정권은 하나님께 있다.

 

여기서 반드시 제한을 두어야 한다. 이 대칭은 칼빈이 두 본문을 서로 직접 연결했다는 뜻이 아니다. 필자가 아는 한 그는 창세기 주석에서 사도행전 10장을 끌어오지 않았고, 사도행전 주석에서 에덴을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그의 두 주석에서 같은 신학적 원리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Ⅸ. 요한 — 받아 먹고 다시 예언하라

정경의 마지막 책에서, 우리는 다시 두루마리를 먹는 사람을 만난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계10:8–11)

 

여기서는 에스겔 3장과의 문학적 공명을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없다. 요한계시록 본문 자체가 그것을 아주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두루마리, 먹으라는 명령, 꿀 같은 단맛, 그리고 이어지는 예언의 사명—에스겔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만큼 명백하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에스겔의 소명 장면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

그러나 요한은 단순히 복사하지 않는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 쓴맛이다. 에스겔에게 두루마리는 입에서 꿀 같이 달았다. 요한에게도 입에서는 달았다. 그러나 배에서는 썼다. 하나님의 말씀은 받는 순간 달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속으로 들어가 나의 것이 될 때, 그 안에 담긴 심판과 고난과 대가가 함께 소화된다. 말씀을 받는 자는 그 단맛만 골라 먹을 수 없다. 여기서도 순서가 중요하다.

 

받음 → 먹음 → 단맛과 쓴맛 → 다시 예언함

 

먹은 후에 곧바로 파송이 따라온다.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에스겔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씀은 사람을 통과한 뒤에 세상으로 나간다. 소화되지 않은 말씀은 전해질 수 없다.

 

그리고 에덴과의 대비도 다시 한 번 조용히 떠오른다. 첫 사람은 손을 뻗어 취했고, 요한은 천사의 손에서 받아 먹었다. 첫 사람이 취한 것은 그를 죽였고, 요한이 받아 먹은 것은 그를 파송했다.

 

다만 이것을 직접적인 유형론이라고 부르지는 말자. 요한계시록 10장은 창세기 3장을 인용하고 있지 않다. 그가 명시적으로 되짚는 것은 에스겔이다. 에덴과의 관계는 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드러나는 대비이지, 본문이 스스로 주장하는 연결이 아니다.

 

 

 

Ⅹ. 먹지 말라와 먹으라 사이 — 해석학적 안전장치

여기서 잠시 멈추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안전장치를 하나 박아 두어야겠다. 이 보론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성경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먹음 암호로 짜여 있구나!" 하는 흥분이 올라온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이 글이 의도한 결론이 아니며, 오히려 이 글이 가장 경계하는 오독이다. 다음 사실들을 분명히 하자.

  • 창세기 3장의 열매는 도덕적 시험의 대상이다. 그것은 계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예표도 아니며, 정결법의 대상도 아니다.
  • 에스겔의 두루마리는 선지자에게 주어진 계시다. 그것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사명의 내용이다.
  • 마태복음 4장의 떡은 실제 굶주림과 실제 시험의 문제다. 그것은 상징이 아니라 진짜 빵이다.
  • 요한복음 6장의 떡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항목과 질적으로 다르다. 다른 것들이 사물이거나 계시라면, 이것은 인격이다.
  • 사도행전 10장의 짐승은 정결법 및 이방인 수용과 연결된 환상 속의 상징이다.
  • 요한계시록 10장의 두루마리는 다시 예언해야 할 계시다.

이것들은 동일한 사물이 아니다. 동일한 신학적 기능을 갖지도 않는다. 이들 사이에는 문학 장르의 차이, 구속사적 위치의 차이, 언약적 상황의 차이가 겹겹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하나의 숨겨진 먹음 암호를 말한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서로 다른 본문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고 금하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명령하시는 분이며, 인간은 자기 판단을 그 말씀 아래 두도록 부름받는다는 반복되는 정경적 긴장이 보인다.

 

이 차이는 미묘해 보이지만 결정적이다. 앞의 진술은 본문들을 하나의 코드로 환원한다. 뒤의 진술은 각 본문을 그대로 두고, 그것들 위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부르심을 관찰한다.

 

그리고 이 구별을 지킬 때 얻는 것이 있다. 각 본문이 자기 목소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모든 목소리가 함께 울릴 때의 화음이 더 풍성해진다. 억지로 같은 음을 내게 만든 합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음을 내면서도 하나의 화성을 이루는 합창이 되는 것이다.\

 

 

 

Ⅺ. 역사신학적으로 무엇이 확인되는가

이제 지금까지 만나 온 해석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자. 다만 한 줄로 평면화해서는 안 된다. "교부와 종교개혁자는 모두 똑같이 해석했다"는 문장은 편리하지만 정직하지 않다.

 

테오필루스 — 나무가 아니라 불순종이 죽음을 품고 있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이 명령에 순복하는가에 있었다.

 

이레네우스 — 그들은 불순종하여 먹었고,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죽음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불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되감긴다.

 

아우구스티누스 — 금지된 음식 자체가 악하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 명령에서 권고된 것은 순종이었다.

 

루터 — 나무에 붙은 하나님의 말씀이 핵심이며, 그 나무 앞에서의 순종은 곧 예배였다.

 

칼빈(창세기) —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은 인간이 자기 이해에 의존하여 스스로 선악의 심판자가 되는 것이었다. 참된 지혜는 순종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크리소스톰(행10) — 보자기는 온 세계이고 짐승들은 이방인이며, "잡아 먹으라"는 그들에게 가라는 명령이다.

 

칼빈(행10) — 무엇을 허용하고 정죄할지는 인간의 자의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신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언어, 다른 논적 앞에서 글을 썼다. 테오필루스는 이교 지식인에게,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자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몰락 앞에서, 루터와 칼빈은 종교개혁의 한복판에서 썼다. 강조점도 방법론도 다르다. 이들을 하나의 "개혁파적 합의"로 묶는 것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고, 그들 각자에게도 무례한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사실은 남는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곳을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 반드시 제한을 두어야 한다.

이들이 창세기 3장과 사도행전 10장을 하나의 "먹음 모티프"로 직접 연결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확인한 범위에서, 교부들이나 종교개혁자들이 두 본문을 하나의 정경적 주제로 체계화한 전통적 정식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두 본문을 각각 해석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자율적 판단이라는 같은 신학적 긴장을 반복해서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가 전통적으로 이 둘을 이렇게 연결해 왔다"고 쓰면 과장이다. 그러나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교회의 오랜 주해 전통과 같은 신학적 축 위에 서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다.

 

이것이 우리가 이 둘을 정경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역사신학적 대화점이다. 증명이 아니라 대화다. 교부와 종교개혁자들은 우리의 결론을 승인해 주는 권위가 아니라, 같은 본문 앞에서 먼저 씨름했던 선배들이다. 그들이 도달한 곳과 우리가 도달한 곳이 겹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읽기가 본문에서 나온 것이지 우리의 시대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다.

 

 

 

Ⅻ. 취함에서 받음으로

이제 이 보론의 중심 대비를 충분히 펼칠 자리에 왔다. 지금까지 걸어온 본문들을 한 줄로 세워 보자.

 

에덴 — 금지된 것을 스스로 취함.

 

에스겔 —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 먹음.

 

광야의 그리스도 — 아버지의 말씀 밖에서 스스로 떡을 취하기를 거절함.

 

요한복음 6장 — 아버지께서 생명의 떡을 주심.

 

사도행전 10장 —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자기 판단으로 거부하지 않음.

 

요한계시록 10장 —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받아 먹고 다시 전함.

 

여섯 개의 서로 다른 본문이다.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사물이고,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상황이다. 그러나 이들을 나란히 놓고 볼 때 하나의 방향이 보인다. 인간의 손이 뻗어 나가는 자리에서, 인간의 손이 벌어지는 자리로. 이것을 하나의 명제로 정리해 보자.

성경적 신앙은 하나님이 주지 않으신 것을 움켜쥐는 삶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는 삶으로 인간을 돌려놓는다.

 

여기서 반드시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한다. 이 문장을 칭의의 교리를 단순한 "수동성"으로 축소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받는다"는 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에스겔은 입을 벌렸고, 두루마리를 먹었고, 사로잡힌 민족에게로 갔고,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했다. 요한은 천사에게 나아갔고, 두루마리를 달라고 했고, 그것을 먹었고, 쓴맛을 삼켰고, 다시 예언하러 갔다. 베드로는 일어나 이방인의 집 문지방을 넘었다—그것은 그의 평생의 습관과 정체성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받음은 살아 있는 믿음의 수용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반드시 순종과 열매로 이어진다. 죽은 손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열린 손만이 받는다. 그리고 받은 손은 반드시 움직인다.

 

그러므로 취함과 받음의 대비는 "능동 대 수동"의 대비가 아니다. 누가 시작하는가의 대비다. 취함은 인간에게서 시작하고, 받음은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 취함은 하나님이 아직 주지 않으신 것을 향하고, 받음은 하나님이 이미 내미신 것을 향한다.

 

이 구별이 왜 목회적으로 중요한가?

 

우리는 여전히 두 방향 모두로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아담처럼 하나님이 그으신 선을 자기 욕망으로 지우려 한다. 그것은 알아보기 쉬운 죄다. 그러나 어떤 이는 베드로처럼, 하나님이 이미 지우신 선을 자기 경건으로 다시 그으려 한다. 이것은 알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처럼 보이지 않고 신실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받으신 사람을 내 기준으로 여전히 밖에 세워 두려 할 때,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하신 영역에 내가 다시 사슬을 채우려 할 때, 우리는 정확히 욥바 지붕 위의 베드로와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물론 이것은 회개와 믿음, 교회의 권징과 분별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께서 허무신 것은 복음의 문 앞에 놓인 민족과 문화와 의식법의 장벽이지, 교회가 지켜야 할 신앙고백과 삶의 경계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받아들이신 자를 내 출신과 관습과 이미 성취된 규례의 기준으로 배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 귀에 들려야 할 음성도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한 가지만 덧붙이자. 사도행전 10장을 로마서 14장의 음식 문제와 무리하게 동일시하지는 말자. 로마서 14장은 이미 열린 교회 안에서 연약한 형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다루고, 사도행전 10장은 그 문이 열리는 순간 자체를 다룬다. 둘은 같은 원리를 공유하지만 같은 상황이 아니다.

 

 

 

결론 — 생명의 떡은 주어진다

이 보론을 도덕주의로 끝낼 수는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켜라"로 끝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정확히 반대로 되돌아가는 셈이 된다. 그런 결론은 다시 인간의 손을 주어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잘 순종하겠습니다, 이제 내가 취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내가 잘 받겠습니다—이 모든 문장의 주어는 여전히 "내가"다.

 

복음의 순서는 반대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신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 성령께서 믿게 하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받는다. 그 받은 생명이 우리를 순종하게 한다.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머무르기보다 스스로 취하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을 향해 손을 뻗는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기준으로 하나님의 선언을 심사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다시 받는 자리로 데려온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고,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자기 판단으로 거부하지 않는 자리. 손을 뻗는 자리가 아니라 손을 여는 자리. 심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순복하는 자리.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받는 것은 규칙이 아니다. 한 인격이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6:33)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생명의 떡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찾아낸 것도 아니다. 우리가 빼앗은 것도 아니다.

 

주어진 것이다.

 

첫 사람은 손을 뻗어 취했고 죽었다. 둘째 아담은 굶주림 속에서도 아버지의 말씀 아래 머무셨고, 마침내 자기 살을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어 주셨다. 에덴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얻으려 했던 생명을,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셨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작도 끝도 자기 힘으로 취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본편의 중심 문장과 만나는 자리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에덴에서 인간은 소유하려 했다. 선악을 자기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우리 손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삼키고, 우리 안에서 달고 쓰며, 우리를 바꾸어 다시 내보낸다.

 

먹지 말라 하실 때 멈추고, 먹으라 하실 때 받아 먹으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내 판단으로 거부하지 않는 것.

 

이것 또한 말씀을 먹는 삶의 한 모습이다.

 

 

 

 

 

각주

*성경 인용은 개역개정판 또는 개역한글판을 따랐다.

 

[^1]: Theophilus of Antioch, *Ad Autolycum* 2.25. 영역(ANF 2)은 온라인에서 전문 확인 가능: CCEL, [Theophilus to Autolycus, Book II](https://ccel.org/ccel/theophilus/autolycus_ii/anf02.iv.ii.ii.html); New Advent, [To Autolycus, Book II](https://www.newadvent.org/fathers/02042.htm). 그리스어 원문은 그리스어 위키문헌(el.wikisource.org)의 『Πρὸς Αὐτόλυκον』 제2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에 인용한 그리스어 구절은 해당 장의 핵심 문장이며, 여기서는 취지를 전달하는 범위에서 짧게 제시했다. 영역본은 원문 자체가 아니므로, 원어 확인이 필요한 대목은 그리스어 본문으로 대조할 것.

[^2]: Irenaeus, *Adversus haereses* 5.23.1. 인용한 라틴어 문장은 고대 라틴어 전승본에 근거한다. 표준판은 *Sources chrétiennes* 153 (Irénée de Lyon, *Contre les hérésies*, Livre V). 영역(ANF 1)은 온라인 확인 가능: CCEL, [Against Heresies, Book V](https://ccel.org/ccel/irenaeus/against_heresies_v/anf01.ix.vii.html); New Advent, [Against Heresies, Book V](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0.htm) (해당 페이지에서 장별 링크로 이동).

[^3]: Irenaeus, *Adversus haereses* 5.19 및 5권 관련 문맥. 재총괄(*recapitulatio*) 구조에 대해서는 3.18–23도 함께 볼 것. 온라인 접근점은 각주 2와 동일.

[^4]: Augustine, *De civitate Dei* 14.12. 영역은 New Advent, [City of God, Book XIV](https://www.newadvent.org/fathers/120114.htm)에서 전문 확인 가능(Marcus Dods 역, NPNF 1-2 계열). 라틴어 원문은 라틴어 위키문헌(la.wikisource.org)의 『De civitate Dei』 제14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평판은 *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47–48. 본문의 라틴어 두 구절은 원문에서 확인할 것.

[^5]: Martin Luther, *Lectures on Genesis*, 창 2:16–17 주해.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eimarer Ausgabe) 42권(창세기 강해 1–17장, 1535/38)의 해당 부분; 영역은 *Luther's Works*, vol. 1 (Concordia). 이 강해는 강의 필기와 편집을 거쳐 전해진 자료이므로, 여기서는 확인된 범위 안에서 그의 해석 취지만 요약했다. 인쇄본 기준 자료이며 공개 전문 링크는 제시하지 않는다.

[^6]: John Calvin, *Commentarius in Genesin*, 창 2:9, 2:16–17 주해. 영역은 CCEL, [Commentary on Genesis, Volume 1](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01.viii.i.html)에서 해당 대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창 2장 주해 수록). 라틴어 초판은 *In primum Mosis librum, qui Genesis vulgo dicitur, commentarius* (Geneva: Oliva Roberti Stephani, 1554)이며, 디지털 사본은 [e-rara](https://www.e-rara.ch/gep_g/doi/10.3931/e-rara-5739)에서 열람할 수 있다. 영역본에서 해당 표현은 인간이 오직 순종으로써 지혜로워진다는 취지로 옮겨져 있다.

[^7]: John Chrysostom, *Homiliae in Acta Apostolorum*, Homily 22. NPNF 판본에서 이 강해의 표제 본문은 행 10:1–4이지만, 강해 자체는 고넬료 이야기와 베드로의 환상을 함께 다룬다. 필요하면 Homily 24(행 10:44 이하)와 Homily 25(행 11:19 이하)도 함께 볼 것. 영역(NPNF 1-11)은 CCEL, [Homilies on the Acts of the Apostles 목차](https://www.ccel.org/ccel/schaff/npnf111.toc.html); New Advent, [Homilies on the Acts of the Apostles](https://www.newadvent.org/fathers/2101.htm); 강해 21–30편 묶음은 [EWTN 판](https://www.ewtn.com/catholicism/library/homilies-on-the-acts-of-the-apostles-2130-11685)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스어 원문은 *Patrologia Graeca* 60 수록. 본문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그리스어 문장을 직접 인용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8]: John Calvin, *Commentarii in Acta Apostolorum*, 행 10:15, 10:17, 10:28 주해. 영역은 CCEL, [Commentary on Acts, Volume 1](https://ccel.org/ccel/calvin/calcom36/calcom36.xvii.i.html)에서 행 10장 주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라틴어 초판은 *Commentariorum Ioannis Calvini in Acta Apostolorum liber primus* (Geneva: Ex officina Ioannis Crispini, 1552).

 

 

참고문헌

Chicago Notes and Bibliography 방식. 이 보론에서 직접 인용하거나 참조한 1차 자료만 수록했다.

교부 문헌

Augustine. De civitate Dei. Edited by Bernhard Dombart and Alfons Kalb. 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47–48. Turnhout: Brepols, 1955.

Augustine. The City of God against the Pagans. Translated by R. W. Dyson. Cambridge Texts in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Chrysostom, John. Homiliae in Acta Apostolorum. In Patrologia Graeca, vol. 60, edited by J.-P. Migne. Paris, 1862.

Chrysostom, John. Homilies on the Acts of the Apostles.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1, vol. 11.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Irenaeus. Against Heresies. Translated by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Ante-Nicene Fathers, vol. 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Irénée de Lyon. Contre les hérésies, Livre V. Edited by Adelin Rousseau, Louis Doutreleau, and Charles Mercier. 2 vols. Sources chrétiennes 152–153. Paris: Éditions du Cerf, 1969.

Theophilus of Antioch. Ad Autolycum. Edited and translated by Robert M. Grant. Oxford Early Christian Texts. Oxford: Clarendon Press, 1970.

Theophilus of Antioch. Theophilus to Autolycus. Translated by Marcus Dods. Ante-Nicene Fathers, vol. 2.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종교개혁 문헌

Calvin, Jean. Commentariorum Ioannis Calvini in Acta Apostolorum liber primus. Geneva: Ex officina Ioannis Crispini, 1552.

Calvin, Jean. In primum Mosis librum, qui Genesis vulgo dicitur, commentarius Johannis Calvini. Geneva: Oliva Roberti Stephani, 1554.

Calvin, John. Commentaries on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Translated by John King. 2 vols.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1850.

Calvin, John. Commentary upon the Acts of the Apostles. Translated by Christopher Fetherstone. Edited by Henry Beveridge. 2 vols.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4.

Calvin, John.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Edited by Guilielmus Baum, Eduardus Cunitz, and Eduardus Reuss. 59 vols. Corpus Reformatorum 29–87. Brunswick: C. A. Schwetschke, 1863–1900. [창세기 주석은 CO 23에 수록]

Luther, Martin.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42, Genesisvorlesung (cap. 1–17), 1535/38. Weimar: Hermann Böhlau, 1911.

Luther, Martin. Lectures on Genesis: Chapters 1–5. Translated by George V. Schick. Luther's Works, vol. 1. Edited by Jaroslav Pelikan. Saint Louis: Concordia, 1958.

온라인 접근점

아래는 위 판본들을 온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접근점이다.

 

 

 

AI 활용 안내 — 이 글의 문제의식과 중심 논지, 신학적 판단, 자료의 채택과 최종 문장은 필자에게 있다. 작성 과정에서는 생성형 AI를 연구와 편집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였다.
ChatGPT 5.6은 사전 조사와 쟁점의 구조화에, Claude Fable/Opus 5은 초고의 표현 및 참고문헌·각주 형식의 정돈에, Perplexity Pro는 관련 논문과 온라인 원문 자료의 탐색에 사용하였다.
AI가 제시한 내용은 그 자체를 권위 있는 출처로 삼지 않았으며, 접근 가능한 성경 원문, 교부 문헌, 신경과 공의회 문서, 공식 교리서 및 개혁파 신앙고백 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다시 대조하였다. 자료의 해석과 남아 있을 수 있는 오류를 포함한 글의 최종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이 말씀을 먹으라!』 후속 원전 검증기 — 여섯 가지 과제를 따라 교부에서 웨스트민스터까지

 

 

 

들어가며 — 본편을 쓰고 나서, 왜 다시 원전으로 돌아갔는가

『이 말씀을 먹으라!』를 쓸 때 나는 하나의 원칙을 세워 두었다. 확인되지 않은 인용문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부와 종교개혁자와 신앙고백 문서를 다룰 때, 온라인으로 열람 가능한 1차 자료와 표준 번역본을 직접 열어 논지를 확인하고, 그 위치를 각주에 밝혔다. 이레네우스는 『이단 논박』 5권 2장, 크리소스톰은 요한복음 강해 47편,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25~27논고,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 칼빈은 요한복음 주석,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76문과 웨스트민스터 29장 7항과 도르트 신조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각주 밑에 나는 여섯 가지 과제를 정직하게 적어 두었다.

  1. 교부 문헌 — PG·PL 대조 및 그리스어·라틴어 원문 확인. 이레네우스 → 크리소스톰 → 아우구스티누스 순서로.
  2. 루터 — 바이마르판(WA) 6:497–573의 라틴어 원문과 온라인 전자판 §2.3의 대조.
  3. 칼빈 — CTS 프링글(Pringle) 영역본의 주 163과 프랑스어판 계열의 관계 확인, 그리고 『기독교강요』 4권 17장과의 정합성 검토.
  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 1563년 초기 인쇄본과 후대 판본 사이의 증거본문(proof-text) 형성사 확인.
  5. 웨스트민스터 — 1646/47년 초기 인쇄본 및 대·소요리문답 원문 대조.
  6. 인용 형식 — Chicago Notes and Bibliography 체계에 따라 최초 인용(full note)과 재인용(shortened note)과 참고문헌 표기를 통일.

이 글은 그 여섯 과제를 실제로 수행하고 난 뒤의 기록이다.

 

먼저 밝혀 둘 것이 있다. 이 작업은 이미 정해 놓은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이미 써서 공개 준비까지 마친 문장들을 다시 원전 앞에 세워 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원전 앞에 세워 놓고 보면, 어떤 문장은 그대로 서 있었고, 어떤 문장은 조금 낮추어야 했으며, 어떤 문장은 내가 처음 썼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근거를 얻었다.

 

이 비대칭이 이 글의 핵심이다. 검증의 결과는 "우리가 다 맞았다"가 아니었다. 이레네우스와 크리소스톰과 하이델베르크와 웨스트민스터에서는 주장의 강도를 낮추어야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낮춤과 나란히,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와 칼빈에서는 예상보다 훨씬 견고하고 세밀한 근거가 나왔다. 실제 연구는 대개 이런 모습이다. 전부 무너지지도 않고 전부 이기지도 않는다. 정확해진다.

그리고 그 정확해짐의 방향이 흥미롭다. 본편의 중심 명제는 이랬다.

요한복음 6장의 "먹음"이란,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본편은 이것을 "먹음 = 믿음"이라는 한 단어짜리 공식으로 환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전체 흐름을 이렇게 잡았다.

 

말씀 → 그리스도 → 믿음 → 연합 → 거함 → 성장 → 분별 → 열매 → 증언

 

원전 검증의 결과, 이 구조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칼빈의 원문을 정밀하게 읽고 나자 "먹음 = 믿음"이라는 단순 등식이 왜 부족한지가 훨씬 선명해졌다. 본편이 조심스럽게 피해 갔던 그 함정을, 칼빈은 이미 16세기에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축이 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따라 발견했던 믿음 → 먹음 → 그리스도 참여 → 연합 → 거함 → 생명이라는 흐름은, 교회의 실제 원전 속에서도 확인되는가? 확인된다면 어디까지 확인되며, 어디서부터는 서로 다른 전통들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가?

 

가기 전에 약호를 몇 개 정리해 두자. 낯선 기호가 연달아 나오면 글이 갑자기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 PG(Patrologia Graeca) — 19세기 미뉴(J.-P. Migne)가 편집한 그리스 교부 전집. 그리스어와 라틴어 대역으로 되어 있다.
  • PL(Patrologia Latina) — 같은 미뉴가 편집한 라틴 교부 전집.
  • CCSL(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 20세기 이후 벨기에 브레폴스 출판사가 펴내는 라틴 교부 비평판. 미뉴보다 훨씬 엄밀한 본문을 제공한다.
  • SC(Sources Chrétiennes) — 프랑스에서 나오는 교부 원문·번역 대역 비평판 총서.
  • WA(Weimarer Ausgabe) — 루터 전집 바이마르 비평판.
  • CO(Calvini Opera) — 『종교개혁자 전집』(Corpus Reformatorum) 안에 수록된 칼빈 전집.
  • CPG(Clavis Patrum Graecorum) — 그리스 교부 저작의 표준 번호 목록.
  • VD16 — 16세기 독일어권 인쇄본의 표준 서지 번호.
  • ANF / NPNF — 19세기 영어 교부 번역 총서(Ante-Nicene Fathers /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이 약호들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다. 같은 문장이라도 어느 판본에서 읽었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무게의 차이를 성도들과 함께 걸어가 보려는 시도다.

 

 

 

Ⅰ. 교부들에게 다시 묻다

1. 이레네우스 — 맞았지만, "요한복음 6장 주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본편이 주목했던 구조

본편에서 나는 2세기 리옹의 이레네우스에게서 하나의 강력한 연결을 보았다. 그것은 이런 구조였다.

 

성육신 →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 → 성찬 → 우리의 육체 → 마지막 날 육체의 부활

 

이 구조는 원문 검증을 견뎠다. 『이단 논박』 5권 2장 2~3절에서 이레네우스는 육체의 구원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의 논증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고 강하다. 만일 육체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주께서 자기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도 아니고, 성찬의 잔이 그의 피에 참여함도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이 그의 몸에 참여함도 아니라는 것이다. 피는 혈관과 살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그런 존재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섞인 잔과 만들어진 떡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찬이 되고, 바로 그것으로 우리 육체의 실체가 자라고 지탱된다. 그렇다면 그 육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땅에 묻혀 썩는 밀알이 하나님의 영으로 자라나듯, 성찬으로 양육된 우리 몸도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부활에 참여한다.

 

그러니까 이레네우스에게는 성찬이 단순한 예식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과 육체가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의 증거다. 참된 성육신이 없으면 참된 피와 몸이 없고, 참된 피와 몸이 없으면 성찬이 없고, 성찬이 없으면 우리 육체의 부활도 없다. 이 사슬 전체가 하나로 걸려 있다. 본편의 요약은 실질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중요한 수정 — 이것은 요한복음 6장의 주석이 아니다

여기서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 있다. 『이단 논박』 5권 2장 2~3절은 요한복음 6장의 주석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이레네우스가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성경은 고린도전서 10:16(잔과 떡의 참여), 골로새서 1:14(피로 말미암은 구속), 에베소서 5:30(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 고린도전서 15:53(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등이다. 요한복음 6장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를 붙들고 그 본문을 풀어 가는 강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레네우스는 요한복음 6장을 이렇게 해석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더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이레네우스의 성육신·성찬·육체 부활 신학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의 참여와 마지막 날의 부활을 하나로 묶는다는 점에서 요한복음 6장의 주제와 강하게 공명한다.

 

이 차이가 사소해 보이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역사신학에서 가장 자주 어겨지는 경계선이 걸려 있다.

왜 이 구별이 중요한가 — 직접 주해와 신학적 공명

우리는 어떤 옛 신학자가 우리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을 발견하면, 곧바로 "그 사람도 이 본문을 이렇게 읽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층위다.

 

첫째, 직접 주해다. 그 신학자가 실제로 그 본문을 앞에 놓고 강해한 경우다.

 

둘째, 신학적 공명이다. 그 신학자가 다른 본문을 다루면서 전개한 신학이, 우리가 읽는 본문의 주제와 구조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경우다.

 

셋째, 역사적 영향 관계다. 후대의 누군가가 실제로 그 신학자를 읽고 그 영향 아래 이 본문을 그렇게 해석하게 된 경우다.

 

이레네우스의 경우는 둘째다. 그리고 둘째를 첫째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 논증은 검증 가능성을 잃는다. 누군가가 『이단 논박』 5권 2장을 펴 보고 "여기 요한복음 6장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대답할 것이 없다.

 

반대로 정직하게 "이것은 공명이다"라고 말하면, 우리 논증은 오히려 단단해진다. 왜냐하면 공명은 공명대로 진짜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이 "먹고 마심"과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를 네 번이나 나란히 놓는다는 사실(6:39, 40, 44, 54)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2세기의 이레네우스가 성찬과 육체의 부활을 하나로 묶어 논증했다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다. 두 증거는 서로 독립적으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독립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값지다.

텍스트 전승의 문제 — "라틴어 원문"이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한다. 본편의 각주에서 나는 "그리스어 원문은 이 대목에서 대부분 소실되었고 라틴어 역본으로 전한다"고 썼다. 이것도 조금 더 정밀해져야 한다.

 

『이단 논박』은 원래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전체 그리스어 본문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5권 2장을 읽을 때 실제로 읽는 것은 고대 라틴어 번역이 중심이고, 여기에 그리스어 단편들과 아르메니아어 전승이 보조 자료로 붙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그냥 "라틴어 원문"이라고 부르는 것도 부정확하다. 그것은 원문이 아니라 고대 역본이다. 이레네우스가 쓴 그리스어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옮긴 라틴어 문장을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레네우스를 인용할 때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특정 단어 하나에 논증 전체를 거는 일을 삼가게 하기 때문이다. 라틴어 역자가 선택한 단어가 이레네우스가 쓴 그리스어 단어와 완전히 같은 뉘앙스라고 보장할 수 없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단어가 아니라 논증의 구조다. 그리고 다행히 이레네우스의 논증 구조는 매우 뚜렷해서, 역본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비평판의 우선순위는 대략 이렇게 잡는 것이 옳다.

 

Sources Chrétiennes 153 > PG 7 > ANF(New Advent 등 온라인 접근판)

 

SC 153은 20세기 비평판으로 라틴어 본문과 그리스어 단편을 함께 제시하며, PG 7은 19세기 미뉴판이다. ANF와 그것을 실은 온라인 사이트는 19세기 영어 번역이다. 논지를 확인하는 데는 마지막 것으로도 충분하지만, 학술적 주장을 걸 때는 첫째와 둘째를 인용해야 한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위치는 다음과 같다.

 

Irenaeus, Adversus haereses 5.2.2–3; SC 153, 대략 pp. 34–35; cf. PG 7:1124B–1127B.1

 

한 가지 덧붙이자. PG의 단(column) 번호나 SC의 페이지를 인용할 때는 그것이 비평판과 구판 사이의 상호 참조라는 성격을 밝히는 것이 정직하다. SC 153을 직접 펴 본 사람과, PG 7의 단 번호를 2차 문헌에서 옮겨 적은 사람은 다르다. 이 글은 온라인 접근판(ANF/New Advent)에서 본문을 직접 확인했고, SC·PG의 위치는 표준 참조를 위해 병기한 것이다. 그 차이를 감추지 않는 편이 낫다.

2. 크리소스톰 — "육적인 청취"라는 예리한 진단, 그러나 개혁파의 선구자는 아니다

무엇을 확인했는가

4세기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의 설교자 요한 크리소스톰은 요한복음을 순서대로 강해했다. 요한복음 6:53 이하를 다루는 것이 강해 47편이다. 기준 자료는 이렇다. CPG 4425(그리스 교부 저작 표준 번호), PG 59:23–482에 요한복음 강해 전체가 수록되어 있고, 6:63을 다루는 대목은 대략 PG 59:265 부근이다. 영어로는 NPNF 제1시리즈 14권이 표준 번역이다.

 

여기서 확인해야 할 핵심은 6:63의 "육은 무익하니라"를 크리소스톰이 어떻게 읽는가였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매우 분명했다.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육체가 무익하다는 뜻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그는 오히려 되묻는다. 그렇다면 그의 살은 살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살이다. 그렇다면 왜 "육은 무익하다"고 하셨는가. 크리소스톰의 대답은, 그 말씀이 그리스도 자신의 육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그 말씀을 육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어 표현을 짚어 둘 만하다. PG 59:265의 그리스어 본문을 대조해 보면, 이 자리에서 크리소스톰이 실제로 쓰는 것은 명사구가 아니라 동사 형태다. σαρκικῶς ἀκούειν("육적으로 듣다"), 그리고 그것을 명사화한 τὸ σαρκικῶς ἀκοῦσαι("육적으로 듣는 것")이다. 표준 영어 번역이 "carnally hearing"으로 옮긴 것이 바로 이 표현이다. 우리말로는 "육적인 청취"라고 요약할 수 있으나, 이것은 개념적 요약이지 크리소스톰이 쓴 명사구 그대로는 아니다. 어느 쪽이든 요지는 같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살에 있지 않고, 듣는 귀에 있다.

 

크리소스톰은 그 "육적인 청취"가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 그를 요셉의 아들로만 여기는 것,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되묻는 것. 이 모두가 육적인 청취다. 그들은 이 문제를 신비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표현을 하나 덧붙인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내면의 눈"**으로 신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적으로 보는 것이다.

참고2: 위 진술의 내용은 NPNF 표준 영역본에서 확인했고, 그리스어 표현은 PG 59:265의 본문을 대조하여 σαρκικῶς ἀκούειν / τὸ σαρκικῶς ἀκοῦσαι 형태임을 확인했다. 한국어의 "육적인 청취"는 이 표현들에 대한 개념적 요약이며, 명사구 σαρκικὴ ἀκρόασις를 크리소스톰의 직접 인용처럼 제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반드시 지켜야 할 균형

여기서 매우 중요한 균형이 필요하다. 크리소스톰은 요한복음 6장을 매우 강하게 성찬적으로 읽는다. 그는 이 대목을 "신비"(τὰ μυστήρια, 곧 성찬)와 직접 연결하고, 그 상 앞에 나아가는 이들에게 두려움과 경외를 가지고 나아가라고 강력하게 권한다. 그의 강해에는 성찬 앞에서 떨라는 목회적 권면이 가득하다.

 

본편에서 나는 크리소스톰의 구별—실제적 참여는 있으나 조잡한 육적 이해는 아니라는 구별—을 소개한 뒤에 이렇게 썼다. "이 구별은 훗날 개혁파 성찬론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검증 후에 보니, 이 문장은 너무 강했다.

 

문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마치 크리소스톰의 구별이 개혁파 성찬론으로 흘러 들어간 직선적 계보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계보를 입증하려면 후대 개혁파 신학자들이 실제로 이 대목을 인용하고 이 구별을 받아들였다는 역사적 증거를 대야 한다. 흥미롭게도 칼빈은 『기독교강요』 4권 17장에서 크리소스톰을 인용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가 인용하는 문장은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만드시되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는 취지의 대목이다. 곧 칼빈은 크리소스톰을 믿음을 상상으로 축소하지 말라는 근거로 인용하지, 육적 이해를 반박하는 선구자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크리소스톰을 후대 개혁파 성찬론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는 개혁파 신학자가 아니라 4세기 동방 교회의 설교자이며, 그의 성찬 이해는 개혁파보다 훨씬 강한 신비적·제의적 색채를 지닌다. 그럼에도 그는 실제적 참여와 조잡한 육적 이해를 구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대화점을 제공한다.

왜 이 수정이 중요한가

이런 수정을 굳이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크리소스톰이 우리 편이라고 말하면 논증이 더 강해 보이지 않느냐고.

그렇지 않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이 아닌 것을 근거로 삼은 논증은 언젠가 무너진다. 크리소스톰의 강해 47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은 곧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이 사람은 개혁파가 아니라고. 그 순간 우리 글 전체의 신뢰가 흔들린다.

 

둘째,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옛 신학자를 우리 진영으로 끌어오는 순간, 우리는 그에게서 배울 기회를 잃는다. 크리소스톰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면 그에게 배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다른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문제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아니라 육적인 청취에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 밖에서 오는 목소리가 된다. 그리고 우리 밖에서 오는 목소리만이 우리를 실제로 교정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대목에서 크리소스톰은 우리 대부분보다 예리하다. 우리는 성경의 어려운 말씀을 만나면 그 말씀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크기로 줄이려 한다. 크리소스톰은 그것을 "육적인 청취"라고 부르고, 대신 기다리며 물으라고 말한다. "그들은 마땅히 때를 기다려 물어야 했고, 그분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이 말은 개혁파에게도, 아니 특히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필요한 말이다.

3. 아우구스티누스 — 검증하면서 오히려 더 강해진 연결

이 부분은 이번 검증에서 가장 많은 것이 나온 자리다. 충분히 길게 이야기하겠다.

기준판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복음 강해는 정식 명칭이 『요한복음 강해 124편』(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CXXIV)이다. 현재의 표준 비평판은 라드보두스 빌렘스(Radbodus Willems)가 편집하여 1954년 브레폴스에서 나온 CCSL 36권이며, 이전의 미뉴판은 PL 35에 실려 있다. 영어로는 NPNF 제1시리즈 7권이 표준이다.

첫 번째 발견 — 논고 번호가 틀렸다

본편의 첫 각주판에서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문장을 26논고에 있다고 적었다. 검증 결과 이것은 틀렸다.

문제의 문장은 이것이다.

Ut quid paras dentes et ventrem? Crede, et manducasti. "왜 이와 배를 준비하는가?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

 

정확한 위치는 25논고 12절이다. CCSL 36:254, PL 35:1602에 해당한다. 왜 26논고일 수 없는지는 사실 간단하다. 26논고는 요한복음 6:41–59를 다룬다. 그런데 이 문장은 요한복음 6:27–29의 문맥에 속한다. 6:29가 26논고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라틴어 본문을 보면 문맥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묻는 장면을 다루고, 예수의 대답을 인용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리고 곧바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먹는 것이다. 그러니 왜 이와 배를 준비하는가.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

 

이 발견이 왜 중요한가.

 

본편에서 나는 요한복음 6:28–29을 별도의 소제목으로 다루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인간의 질문에,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답하시는 그 구조를 이 장의 열쇠 가운데 하나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함"이 "믿음"으로 재정의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가 바로 그 구절의 강해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우연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6:29에서 같은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고, 예수는 믿음을 말씀하셨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곧바로 "먹음"으로 연결한 것이다.

 

요 6:29의 믿음과 요 6:35 이하의 먹음을 하나로 묶는 독법이 이미 4~5세기에 있었다. 본편의 Ⅵ장 논증이 여기서 예상보다 훨씬 오래된 뿌리를 얻었다.3

두 번째 발견 — 26논고 18절, 먹음에서 거함으로

26논고 18절은 요한복음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를 강해하는 자리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결정적인 한 문장을 남긴다.

Hoc est ergo manducare illam escam, et illum bibere potum, in Christo manere, et illum manentem in se habere. "그러므로 그 양식을 먹고 그 음료를 마신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거하시게 하는 것이다."

 

문장 구조를 잠시 보자. 라틴어에서 manducare(먹다)와 bibere(마시다)라는 두 동사가 manere(거하다)라는 동사로 곧장 옮겨간다. "이것이 곧 저것이다"라는 형식이다. 먹음이 거함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곧바로 그 역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지 않으시는 사람은, 몸과 피의 성례를 이로 씹는다 하더라도 참으로 그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큰 것의 성례를 자기 심판에 이르도록 먹고 마시는 것이다.

 

같은 논고 12절에서 그는 이것을 더 짧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참으로 먹는 사람은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먹는 사람이며, 이로 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 사람이다.

이것은 본편의 Ⅹ장 전체—"먹음에서 거함으로"—가 현대적 착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요한복음 강해 속에, 그것도 요한복음 6:56을 직접 주해하는 자리에 있다. 이레네우스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직접 주해라고 말할 수 있다.4

세 번째 발견 — 27논고 1절, 참으로 먹었다는 "표지"

27논고는 요한복음 6:60–72를 다룬다. 그 첫머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앞서 한 말을 요약하면서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는 묻는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먹고 마셨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그 표지(signum)를 이렇게 제시한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가. 그것이 표지다.

 

라틴어 표현을 짧게만 보이면 이렇다. Signum quia manducavit et bibit hoc est, si manet et manetur… 곧 "그가 먹고 마셨다는 표지는 이것이니, 곧 그가 거하고 또 그 안에 거하심을 받는가이다."

이 문장의 목회적 무게를 잠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자꾸 순간을 확인하려 한다. 내가 그때 진짜 믿었는가. 그날 성찬을 받을 때 내 마음이 충분히 뜨거웠는가.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표지를 순간에 두지 않고 머무름에 둔다. 먹었는지 아닌지는 그 사람이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로 드러난다. 거함이 곧 증거다.

 

이것은 본편의 Ⅺ장(성장)과 ⅩⅣ장(열매)이 왜 필요했는지를 다시 설명해 준다. 먹음은 순간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먹은 사람은 머물고, 머문 사람은 자라고, 자란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첫 고리를 이미 "표지"라는 말로 붙들고 있었다.

네 번째 발견 — 27논고 11절, "성령의 참여에 이르기까지"

이번 검증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이다. 27논고 11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찬을 받는 이들에게 권면하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단지 "in Sacramento", 곧 외적 성례 안에서만 먹는 데 머물지 말라고 말한다. 그가 권하는 것은 "usque ad spiritus participationem", 곧 "성령의 참여에 이르기까지"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이 짧은 어구에 놀랄 만큼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첫째, 여기에는 외적 성례 참여와 구원하는 참된 먹음 사이의 구별이 분명히 있다. 성례 안에서 먹는 것으로 그칠 수 있고, 그 너머로 나아갈 수도 있다.

 

둘째, 그 너머의 자리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참여라고 부른다. 참된 먹음의 종착지가 성령이다.

 

셋째, 그럼에도 그는 성례를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usque ad, 곧 "…에 이르기까지"는 성례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성례를 통과하여 더 나아가라는 말이다.5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경계하는 것은 외적 성례 참여 자체를 종착점으로 삼는 일이다. 성례가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에게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것이고, 곧 보겠지만 그는 성례의 객관성을 대단히 진지하게 다룬다. 다만 그 성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다 되었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감정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성령의 참여, 곧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를 칼빈으로 만들지 말자

여기서 반드시 멈추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읽고 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실상 칼빈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단히 강한 성찬적·교회론적 신학자다. 26논고 13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으라고 말하며, 그 몸을 교회로 설명한다. 15절에서는 이 먹음과 마심을 "그의 몸과 지체들의 교제, 곧 예정되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화롭게 될 성도들 안에 있는 거룩한 교회"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결코 개인의 내면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의 지체가 되는 일이다.

 

또한 그는 성례의 객관성을 매우 진지하게 다룬다. 26논고 11절에서 그는 성례 자체와 성례의 효력을 구별하면서, 유다가 받은 떡이 독이었던 것이 아니라 악한 자가 선한 것을 악하게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성례 자체를 폄하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진술은 이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개혁파의 선구자가 아니라, 개혁파와 로마 가톨릭이 함께 자기 아버지로 부르는 신학자다. 실제로 종교개혁기의 성찬 논쟁에서 양쪽 모두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했다. 그 사실 자체가 그가 어느 한쪽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이것은 종합된 구조다

또 하나 정직하게 밝혀야 할 것이 있다.

 

믿음 → 먹음 → 그리스도 안에 거함 → 성령의 참여와 생명

 

이 구조를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한 문장에서 공식처럼 진술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25논고 12절, 26논고 18절, 27논고 1절, 27논고 11절을 연속으로 읽으면서 종합한 구조다.

 

이 차이를 밝히는 것이 왜 중요한가. 만일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먹음-거함-성령이라는 네 단계 도식을 가르쳤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가 하지 않은 말을 그의 입에 넣는 일이 된다. 반면 "그의 연속된 강해를 따라가면 이런 흐름이 드러난다"고 말하면, 우리는 독자에게 확인 경로를 제공하는 셈이 된다. 독자가 25논고부터 27논고까지 읽고 "정말 그렇구나" 하고 스스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흐름은 강해 자체의 순서를 따른다. 25논고에서 믿음, 26논고에서 먹음과 거함, 27논고에서 표지와 성령의 참여. 아우구스티누스가 요한복음 6장을 순서대로 강해했기 때문에, 그 순서가 곧 본문의 순서이기도 하다. 우리가 본편에서 본문을 따라가며 얻은 흐름과 그의 강해 순서가 겹치는 것은, 결국 둘 다 같은 본문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번 검증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지점이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읽고 그 구조를 만든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6장을 읽고 그 구조에 이르렀는데, 나중에 가서 보니 아우구스티누스도 같은 본문을 따라가다가 같은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1600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본문이 두 독자를 같은 곳으로 데려간 것이다.

 

 

 

Ⅱ. 루터 — WA 6:502에서 확인한 믿음의 먹음

전자판 §2.3은 절 번호가 아니었다

본편의 각주에서 나는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인용하면서 "§2.3"이라는 위치를 적었다. 이것은 프로젝트 비텐베르크(Project Wittenberg) 전자판이 붙인 문단 번호였다.

 

후속 검증에서 확인된 것은, §2.3이 WA 자체의 절 번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전자판 편집자가 하이퍼링크와 인용의 편의를 위해 부여한 문단 numbering이다. 전자판 자체가 그렇게 밝히고 있다. 각 문단에 HTML 앵커를 달아 다른 문서가 정확히 링크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술적으로 인용할 때의 핵심 위치는 WA 6:502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소한 형식 문제로 보인다면,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 보라. 누군가 우리 글을 읽고 "루터가 그렇게 말했다고? 어디에?" 하고 물었을 때, "§2.3"이라고 답하면 그 사람은 WA를 아무리 뒤져도 §2.3을 찾을 수 없다. 그 번호는 WA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WA 6:502"라고 답하면 그는 도서관에서 바이마르판 6권 502쪽을 펴서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라틴어 원문에서 확인한 것

WA 6:502의 7행 이하에 다음 문장이 있다.

Primum, c. vi. Iohannis in totum est seponendum, ut quod nec syllaba de sacramento loquitur. "첫째로, 요한복음 6장은 전적으로 제쳐 두어야 한다. 그것은 성례에 관하여 한 음절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in totum est seponendum—"전적으로 제쳐 두어야 한다." 루터의 표현은 영역본에서 느낀 것보다 오히려 더 단호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이어진다. 요한복음 6장은 성례에 관해 한 음절(nec syllaba)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터가 제시하는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그때는 아직 성찬이 제정되지 않았다. 둘째, 문맥 전체가 성육신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de fide … incarnati verbi)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6:63의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를 근거로 이것이 영적인 먹음임을 논증한다.

 

이어지는 논리가 중요하다. 루터는 생명을 주는 먹음은 오직 믿음의 먹음뿐이라고 말한다. 성례적 먹음 자체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합당치 않게 먹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한다.

"왜 이와 배를 준비하는가?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6

두 검증이 만나는 자리

여기서 앞의 아우구스티누스 검증과 이 루터 검증이 만난다. 루터가 인용한 그 문장을, 우리는 이번에 아우구스티누스 25논고 12절, CCSL 36:254, PL 35:1602까지 추적했다. 곧 루터가 어림짐작으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이며, 그것도 요한복음 6:29를 강해하는 바로 그 자리의 문장이었다.

 

이것은 작지만 기쁜 확인이었다. 두 개의 독립적인 검증 작업이 하나의 지점에서 맞물린 것이다. 그리고 이 맞물림은 역사적 계보를 실제로 보여 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요한복음 6:29에서 믿음과 먹음을 연결했고, 1000년이 지나 루터가 성찬 논쟁 한복판에서 바로 그 문장을 끌어와 자기 논증의 기둥으로 삼았다. 이것은 공명이 아니라 역사적 영향 관계다. 앞에서 구별한 세 층위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본편의 루터 해석은 무너지지 않았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두자. 본편에서 나는 루터가 요한복음 6장을 성찬 제정 본문에서 제외하고 믿음의 먹음으로 읽는다고 서술했다. 이 서술은 영역본의 표현을 잘못 읽은 결과가 아니었다. WA의 라틴어에서 오히려 더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이것은 이번 검증에서 "원래 주장이 더 강하게 확인된"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반드시 붙여야 할 경고

동시에 반드시 경고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본편에서도 강조했지만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다.

 

루터가 요한복음 6장을 믿음의 먹음으로 읽는다는 것과, 루터의 성찬론 전체가 개혁파와 같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같은 『교회의 바벨론 포로』 안에서 루터는 화체설을 거부하면서도,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실재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이 떡이 내 몸이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붙들겠다고 말하고, 자기 이성을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게 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실재적 임재론이 훗날 마르부르크에서 츠빙글리와, 그리고 개혁파 전통 전체와 갈라서게 되는 지점이다.

개혁파의 입장은 다르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고, 성령께서 신자를 그리스도께 들어 올려 실제로 연합시키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 성령론적·천상적 참여라고 부른다.

 

이 차이는 진짜 차이다. 지워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가 루터에게서 확인한 것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6장이라는 한 본문의 주해에서 루터가 우리와 매우 가까운 자리에 선다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지다. 왜냐하면 성찬론에서 우리와 가장 크게 갈라선 종교개혁자조차, 요한복음 6장만큼은 믿음의 먹음을 말하는 본문으로 읽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의 증언이기에 더 무겁다.

 

 

 

Ⅲ. 칼빈 — "먹는 것은 단지 믿는 것인가?"

이번 검증에서 가장 흥미로운 수정이 나온 곳이 여기다. 그리고 그 수정은 본편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정밀하게 만들었다.

사용한 자료

칼빈의 요한복음 주석은 1553년 라틴어판(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이 원본이고, 같은 해에 프랑스어판(Commentaire … sur l'Evangile selon sainct Jean)이 나왔다. 표준 수록판은 CO 47권(Corpus Reformatorum 75권)이다. 영어로는 윌리엄 프링글(William Pringle)이 옮겨 1847년 칼빈번역협회(Calvin Translation Society)에서 낸 판본이 널리 쓰이며, 이것이 CCEL 등 온라인에 올라 있는 본문이다. 여기에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4권 17장을 함께 대조했다.

첫 번째 문제 — CTS 주 163의 정체

본편의 각주판에서 나는 하나의 판본 문제를 지적해 두었다. 칼빈이 성찬을 이 설교의 "인(seal)이요 확증(confirmation)"이라고 말하는 문장이 프링글 영역본에서 본문이 아니라 역주 163에 실려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 나는 이 문장을 본문처럼 인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면서, 그것이 프링글 자신의 신학적 덧붙임인지 칼빈의 다른 판본 계열에서 온 것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고 남겨 두었다.

 

검증 결과는 이렇다. 해당 표현은 프링글 개인의 발명이 아니라 칼빈의 1553년 프랑스어판 계열을 반영한 것이다. 프링글은 라틴어판을 옮기면서, 프랑스어판에만 있는 문장을 역주로 처리한 것이다. 실제로 그 역주에는 프랑스어 원문이 병기되어 있다.

특히 다음 문구가 그렇다.

de la maniere perpetuelle et ordinaire de manger la chair de Christ, qui se fait par la foy seulement "그리스도의 살을 지속적이고 통상적으로 먹는 방식,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이 프랑스어 문장은 라틴어 본문의 해당 대목("perpetua et ordinaria manducandi carnem Christi ratio"에 해당하는 취지)과 정확히 대응한다. 곧 프링글은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두 판본 사이의 차이를 성실하게 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두 갈래다.

 

첫째, 프링글의 주 163을 프링글 개인의 신학적 발명처럼 취급하면 안 된다. 그것은 칼빈에게서 온 것이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영어 본문 자체에 원래 있던 문장인 것처럼 인용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프랑스어판 계열의 문장이다.

정확한 인용 방식은 이렇게 된다. "칼빈은 요한복음 6:54를 주석하면서 …라고 말한다(라틴어판). 그리고 프랑스어판 계열은 여기에 성찬이 이 설교의 인이요 확증이라는 취지를 덧붙인다(CTS 역주 163 참조)."

번거로워 보이는가. 그러나 이 번거로움이 바로 정직함이다. 그리고 이 번거로움 덕분에 우리는 한 가지를 물어볼 수 있게 된다.7 왜 프랑스어판 계열에만 이 문장이 있는가.

 

여기서부터는 추론임을 밝혀 두어야 한다. 칼빈이 두 판본의 독자층을 달리 고려했다고 직접 말한 증거를 나는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판본 차이 자체로부터 이렇게 읽어 볼 수는 있다. 라틴어를 읽는 학자들에게는 요한복음 6장이 성찬 제정 본문이 아님을 논증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프랑스어로 읽는 회중에게는 그렇다고 성찬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한 번 더 덧붙일 필요가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개연성 있는 독법이며,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읽으면 목회자 칼빈의 모습이 얼핏 비치는 것도 사실이다.

두 번째 문제 — 『기독교강요』 4.17.5, 여기서 본편이 한 단계 정밀해진다

이번 검증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이것이다. 『기독교강요』 4권 17장 5절에서 칼빈은 어떤 사람들의 견해를 소개한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을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칼빈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저 위대한 설교에서 무언가 더 명확하고 더 숭고한 것을 가르치려 하셨다고 본다. 곧 우리가 그를 참으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살아난다는 것이며, 그것을 주께서 먹고 마신다는 말로 표현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누구도 그리스도에게서 얻는 생명을 단순한 지식으로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어지는 비유가 선명하다.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은 떡을 보는 것이 아니라 떡을 먹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그리스도를 참으로, 온전히 나누어 가져야 한다.

 

그리고 칼빈은 자기와 상대편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그들에 따르면 먹는 것은 곧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살이 믿음으로써 먹힌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그것이 우리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먹음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그들에게 먹음은 곧 믿음이지만, 내게 먹음은 오히려 믿음의 귀결로 보인다.

 

그리고 칼빈은 한마디를 덧붙인다. "말의 차이는 작지만, 실제의 차이는 작지 않다."8 이 문장 앞에서 나는 한참 멈추어 있었다. 칼빈은 같은 구별을 요한복음 주석 6:35에서도 한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곧 믿음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추론하는 사람들은 잘못 추론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를 먹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은 기꺼이 인정하지만, 먹음은 믿음 자체라기보다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껴안아 우리의 것이 되게 하고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우리를 그와 한 몸이 되게 하고, 그와 생명을 공유하게 하며, 한마디로 그와 하나가 되게 한다.

이것이 본편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편의 핵심 문장을 다시 보자.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이 문장이 칼빈의 구별과 얼마나 정확히 맞아떨어지는지 보라. 이 문장은 "먹음 =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받고, 연합하고, 참여한다고 말한다. 곧 믿음은 수단이고, 연합과 참여는 그 믿음이 낳는 실재다. 이것이 정확히 칼빈이 4.17.5에서 세우는 구별이다.

 

그러니까 본편이 이 문장을 신중하게 다듬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본편은 그렇게 다듬어야 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제 설명할 수 있다. 만일 먹음이 단지 믿음의 다른 이름이라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 그토록 강하고 충격적인 언어를 사용하실 이유가 없다. 그냥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 되었다. 그런데 그분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셨고, 그 말에 많은 제자가 떠나갔다.

 

칼빈의 통찰은 바로 이것이다. 그 강한 언어는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이 단순한 지식이나 동의가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받아 그의 생명을 나누어 갖는 일임을 알리기 위한 언어다. 먹음이라는 말이 지켜 내는 것은 그 실재성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본편의 다른 장들이 다시 이해된다. 본편 Ⅺ장에서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과 말씀에 의해 형성된 사람"을 구별한 것, ⅩⅣ장에서 열매를 다룬 것은 곁가지가 아니었다. 먹음이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면, 그 먹음은 반드시 사람을 변화시킨다. 먹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먹은 것이 아니다.

『기독교강요』 4.17.1 — 영혼의 유일한 양식

4권 17장의 첫머리에서 칼빈은 성찬을 "영적 잔치"(spirituale epulum)라고 부르며,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로 삼으신 뒤에, 아버지로서 우리를 먹이시고 평생 지탱하시려고 이 상을 베푸셨다는 것이다.

 

이 표현을 과도하게 인용할 필요는 없다. 다만 본편 Ⅰ장이 신명기 8:3과 마태복음 4:4에서 시작하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물었던 것과 이 표현이 같은 자리에 있다는 점만 짚어 두자. 칼빈에게도 성찬은 무엇보다 양식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굶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의 표지다.

『기독교강요』 4.17.12 — 끈과 통로

여기서 칼빈은 개혁파 성찬론의 심장에 해당하는 두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사람의 몸이 따르는 통상적 법칙을 따르며, 한 번 받아들여진 하늘에 담겨 있고, 심판하러 오실 때까지 거기 머무신다. 그러므로 그 몸을 썩을 요소들 아래로 다시 끌어내리거나 어디에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주께서 자기 영으로 우리에게 그와 하나 되는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은 말한다.

그 연결의 (vinculum)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니, 그가 우리를 그에게 연합시키시며,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모든 것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종의 통로(canalis)가 되신다.

 

그리고 그는 태양의 비유를 덧붙인다. 태양이 땅 위에 빛을 보내어 만물을 낳고 기르고 살리며 자기 실체를 거기 부어 넣는다면, 성령의 광채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교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일이 어찌 그보다 못하겠는가.

vinculum(끈)과 canalis(통로). 이 두 단어가 본편의 개혁파적 정식—성령으로 → 믿음을 통하여 → 참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한다—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보라.

 

성령은 이시다. 곧 떨어져 있는 두 존재를 실제로 잇는 분이다. 하늘의 그리스도와 땅의 신자 사이의 거리는 실재하는 거리다. 칼빈은 그 거리를 없애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거리를 건너는 분이 계시다고 말한다.

 

성령은 또한 통로이시다. 곧 무언가가 실제로 흘러오는 관이다. 통로에는 반드시 흐르는 것이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통로는 통로가 아니다. 칼빈이 이 이미지를 쓴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에게로 실제로 무언가가 온다는 뜻이다.

『기독교강요』 4.17.31 — "영적"이라는 말의 뜻

여기서 칼빈은 반대편의 논리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보이지 않고 무한해서 떡 아래 숨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떡 속으로 내려오시는 것 외에는 그와 교통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들어 올리시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장소적으로 떡 안에 갇혀 있어야 실재적 참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신자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로 들어 올려 실제로 연합시키신다. 방향이 반대다.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려진다.

그러므로 "영적 임재"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다음 어느 것도 뜻하지 않는다.

  • 비실재적
  • 상징적
  • 마음속 상상
  •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렇게 여기는 것

영적은 "성령께 속한", "성령으로 말미암은"이라는 뜻이다. 참여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참여의 방식을 규정하는 말이다.

이 점은 다음 장에서 웨스트민스터를 다룰 때 다시 나온다. 두 문서가 같은 것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9

이 검증이 본편에 갖는 의미

정리하자.

 

본편의 해석은 칼빈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본편은 요한복음 6장의 본문 구조를 따라갔다. 6:35의 병행법, 6:29의 믿음, 6:53–56의 강한 언어, 6:56의 거함, 6:63의 성령. 그렇게 따라가서 얻은 구조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함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기독교강요』 4권 17장을 펴 보니, 칼빈이 그 구조를 훨씬 정밀한 언어로 이미 세워 놓고 있었다. 먹음과 믿음을 구별하되 분리하지 않는 방식으로, 성령을 끈과 통로로 부르는 방식으로, 영적이라는 말이 덜 실제적이라는 뜻이 아님을 못 박는 방식으로.

 

이것은 우리가 칼빈을 잘 인용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본문이 우리를 데려간 자리와, 성경 본문이 칼빈을 데려간 자리가 같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주는 안도감은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을 통해 교회를 가르치신다는 것을, 400년의 간격을 두고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Ⅳ. 하이델베르크 — 요 6의 먹음과 요 15의 거함

무엇을 검증하려 했는가

본편에서 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6문을 다루면서, 널리 쓰이는 판본의 증거본문 목록에 요한복음 6장의 여러 구절과 함께 요한복음 15:1–6이 들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이 본편의 핵심 이동—요 6의 "먹음"에서 요 15의 "거함"으로—이 사적인 연상이 아님을 보여 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이미 한 차례 강도를 낮춘 바 있다. "1563년 원문이 명시적으로 그렇게 규정했다"는 역사적 확언이 아니라, 개혁파 전통이 두 본문을 같은 실재의 두 표현으로 읽어 왔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판본 대조를 후속 과제로 남겨 두었다.

판본사에 관하여 — "1563년 초판"이라는 말의 함정

먼저 알아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인쇄본이 하나가 아니었다. 그해에 여러 판이 나왔다. 각 판마다 조금씩 손질이 가해졌다. 예컨대 제80문답(로마 가톨릭 미사에 관한 문답)은 판을 거듭하며 확장되었다. 라틴어판도 별도로 나왔다. 그러므로 "1563년 초판"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이미 부정확하다. 어느 인쇄, 몇 번째 판인지를 밝혀야 한다. 대표적으로 하이델베르크의 요한 마이어(Johann Mayer)가 인쇄한 판본들이 있고, 서지학적으로는 VD16 번호로 식별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겹친다. 증거본문(proof-text) 목록은 요리문답 본문과 같은 무게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가 고백하는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고백을 성경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여백에 붙인 참조다. 그리고 이런 목록은 판을 거듭하면서 늘어나고 줄어들고 바뀐다. 후대의 편집자들이 보완한 경우도 많다.

이 두 사실을 합치면 결론은 이렇게 된다.

"1563년 독일어 초판 76문의 여백에 요한복음 15:1–6이 확실히 있었다"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초기 독일어판·라틴어판과 후대의 표준화된 증거본문 목록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 문제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공개한 디지털 영인본으로 1563년 제3판(Catechismus Oder Christlicher Vnderricht…, Heidelberg: Johann Mayer, 1563; VD16 P 2166)을 확인하면서 상당 부분 정리되었다. 확인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초기 인쇄본에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장·절 번호 체계가 그대로 찍혀 있지는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1563년의 초기 하이델베르크 전통 안에서 이미 요한복음 6장과 요한복음 15장이 76문의 같은 연합·생명 조항을 뒷받침하는 성경 근거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곧 "요 15:1–6"이라는 오늘날의 표기 형태는 후대 편집에서 명료화된 것이지만, 두 본문을 나란히 놓는 읽기 자체는 초기 전통에 속한다.

 

한 가지 더. 오늘날 유통되는 현대 독일어판이나 영어판의 표현을 1563년 독일어 원문에 그대로 역투사해서도 안 된다. 16세기 독일어와 현대 독일어는 어휘도 철자도 다르다. "이 표현이 원래 이랬다"고 말하려면 그 인쇄본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이 일어난다

이쯤 되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우리가 기대고 싶었던 증거 하나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역사적 주장은 좁아졌는데, 신학적 논증은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76문의 본문 자체가 이미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76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두 단계로 답한다.

 

첫째,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이다.

 

둘째, 여기에 더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또한 우리 안에도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거룩한 몸과 점점 더("more and more") 연합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으로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으나, 우리는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이며,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되 마치 우리 몸의 지체들이 한 영혼으로 그러하듯 한다.

 

이 답 안에 다음 구조가 전부 들어 있다.

 

믿는 마음 →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임 → 죄 사함 → 영생 → 성령 → 그리스도와 점점 더 깊어지는 연합

 

이것이 본편의 핵심 구조와 얼마나 정확히 겹치는지 보라.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이 있고(단순한 동의가 아니다), 죄 사함과 영생이 있고, 성령이 있고, 연합이 있다. 그리고 그 연합이 점점 더 깊어진다고 말한다. 곧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진행되는 실재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이 있다. 76문은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고 우리가 땅에 있다는 거리를 명시하면서도, 바로 그 문장에서 우리가 그의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다. 거리를 인정하면서 연합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를 건너는 분이 성령이시라고 말한다. 앞에서 본 칼빈의 vinculum(끈)이 여기 고백문서의 언어로 들어와 있다.

 

그러니까 요 15:1–6이 언제부터 여백에 붙었는가와 상관없이, 76문 본문은 이미 먹음이 연합이며 그 연합이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이 말하는 것이 정확히 그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음, 곧 거함이 생명의 공급이라는 것.

 

말하자면 우리는 요 15:1–6이라는 각주 하나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본문이 이미 더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증거본문 목록은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 위치를 정확히 알아 두면 된다. 널리 쓰이는 판본의 76문 증거본문을 보면, 요한복음 15:1–6은 답 전체가 아니라 마지막 조항—곧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의 증거로 요한복음 6:56–58과 나란히 붙어 있다. 여기에 에베소서 4:15–16과 요한일서 3:24가 함께 온다.

 

이것은 오히려 흥미로운 배치다. 요 6과 요 15가 같은 조항 아래 묶여 있고, 그 조항의 주제가 한 성령에 의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곧 이 목록을 만든 사람은 요 6의 먹음과 요 15의 거함을 서로 다른 두 주제로 본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한 생명이라는 같은 실재의 두 증언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요 6의 먹음에서 요 15의 거함으로 가는 이동은, 개혁파 전통이 자기 고백을 성경으로 뒷받침할 때 실제로 걸어간 길과 같은 방향에 서 있다. 그리고 그 길은 후대의 표준화된 목록에서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1563년의 초기 전통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쓰는 절 번호 표기가 그때 그대로 찍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정도가 증거가 허락하는 진술이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10

 

 

 

Ⅴ. 웨스트민스터 — 참으로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

판본에 관하여

웨스트민스터 문서들도 판본사가 있다. 지나치게 문헌목록처럼 늘어놓지는 않되, 알아 둘 만큼은 짚자.

신앙고백서는 1646년에 본문이 완성되어 의회에 제출되었다. 그런데 처음 제출된 본문에는 성경 증거구절이 붙어 있지 않았다. 의회가 성경 근거를 요구했고, 그래서 증거구절이 부착된 판이 뒤이어 나왔다. 그러므로 본문 완성 시점과 증거구절 부착판은 구별해야 한다.

 

대요리문답은 1647년에 완성되어 인쇄되었고, 증거구절이 붙은 판은 1648년에 나왔다. 소요리문답도 마찬가지로 1647년 초기판과 1648년 증거구절판을 구별한다.

 

이 구별이 왜 중요한가. 하이델베르크에서 본 것과 같은 이유다. 고백의 본문과 증거구절은 같은 무게가 아니다. 총회가 심의하고 확정한 것은 본문이고, 증거구절은 요구에 따라 뒤에 붙인 성경 참조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고 말하려면 매우 신중해야 한다.

WCF 29.7 — 두 어구를 함께 붙들라

신앙고백서 29장 7항의 핵심 문구는 이것이다.

inwardly by faith, really and indeed, yet not carnally and corporally but spiritually "내적으로 믿음으로, 참으로 그리고 실제로, 그러나 육체적으로나 신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두 부분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한다.

 

really and indeed — 참으로, 실제로. 이것은 실재를 확언하는 말이다. 무언가가 실제로 일어난다.

spiritually — 영적으로. 이것은 그 실재가 일어나는 방식을 규정하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뒤의 것만 읽으면 고백을 거꾸로 이해하게 된다. spiritually를 "상징적으로", "가상적으로",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지만 마음속으로"라고 옮기는 순간, 앞의 "참으로 그리고 실제로"가 무의미해진다. 총회가 두 어구를 나란히 놓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두 방향의 오류를 동시에 막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육체적 섭취를, 다른 쪽으로는 단순한 기념과 상상을. 그러니까 웨스트민스터의 "영적으로"는 참여를 줄이는 말이 아니라 참여의 주소를 밝히는 말이다. 어디서 일어나는가. 성령 안에서. 어떻게 받는가. 믿음으로.

 

앞에서 본 칼빈의 4.17.31이 여기서 고백문서의 언어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안에 갇혀야 실재적 참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신자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실제로 연합시키신다는 그 구조다.

WLC 170 — 더 명시적인 설명

대요리문답 170문은 같은 것을 더 풀어서 설명한다.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육체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 자기에게 적용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수찬자의 믿음에 영적으로(spiritually) 현존하며, 그럼에도 참으로 그리고 실제로(truly and really) 그러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의 모든 유익을 받아 누린다.

 

여기서도 두 어구가 함께 나온다. spiritually와 truly and really. 웨스트민스터는 이 짝을 놓치지 않는다. 두 문서에서 반복된다는 것은 이것이 우연한 표현이 아니라 의식적인 정식이라는 뜻이다.

 

후대의 전통적 증거구절 목록에는 이 대목에 요한복음 6:51, 53 등이 제시된다. 다만 앞에서 말한 대로, 증거구절은 본문과 같은 무게가 아니다.

중요한 수정 — 요한복음 6:63에 관하여

본편에서 나는 웨스트민스터 29장 7항을 다룬 뒤 이렇게 썼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6:63의 '살리는 것은 영이니'가 신앙고백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본다." 검증 후에 보니, 이 문장은 너무 강했다.

 

"신앙고백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는 표현은 마치 29장 7항이 요한복음 6:63을 직접 주해한 결과물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것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29장 7항은 성찬론을 진술하는 조항이지 요한복음 6:63을 강해하는 조항이 아니며, 총회가 이 조항을 작성하면서 6:63을 염두에 두었다는 문헌적 증거를 우리가 확보한 것도 아니다. 더 정확한 진술은 이렇다.

웨스트민스터의 표현은 요한복음 6:63과 잘 공명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 참여의 실재성을 유지하면서 그 방식을 육체적이 아니라 영적이라고 규정한다.

세 층위를 다시 확인하며

이 사례는 앞에서 이레네우스를 다루며 세운 구별을 다시 보여 준다. 다만 여기서는 층위가 하나 더 늘어난다.

 

첫째, 신학적 공명. 어떤 문서의 진술이 어떤 성경 본문의 주제와 구조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경우. 웨스트민스터 29.7과 요 6:63의 관계가 여기 해당한다.

 

둘째, 직접 문헌 의존. 그 문서가 실제로 그 본문을 근거로 삼아 작성된 경우. 이것을 주장하려면 총회 기록이나 작성자들의 저술 같은 증거가 필요하다.

 

셋째, 공식 증거구절. 그 문서에 공식적으로 부착된 성경 참조 목록. 이것은 문서와 함께 확정되기도 하고, 뒤에 붙기도 한다.

세 층위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저지르는 실수는 첫째를 둘째나 셋째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공명은 공명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데, 굳이 부풀리면 오히려 잃는다.11

WSC 88–90과 묵상 — 본편의 가장 중요한 수정이 확증되다

본편을 다듬는 과정에서 나는 한 문장을 크게 고쳤다. 처음에는 묵상을 이렇게 표현했었다. "묵상은 은혜의 방편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주시기로 정하신 통상적인 통로다." 이 문장이 고백적 개혁주의에서 너무 넓다는 지적을 받고, 다음과 같이 고쳤다.

묵상은 성령께서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우리 마음에 깊이 적용하시는 가운데, 성도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되새기고 기도로 응답하며 순종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경건의 실천이다.

 

이번 검증에서 이 수정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정확히 맞아떨어짐을 확인했다.

 

소요리문답 88문은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유익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외적이고 통상적인 방편은 무엇인가. 답은 이렇다. 그의 규례들이며,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다. 이 셋이 택함받은 자들에게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된다.

 

89문은 이어서 묻는다. 말씀은 어떻게 구원에 효력 있게 되는가. 답은 하나님의 영께서 말씀을 읽는 것과 특별히 말씀의 설교를 죄인을 깨우치고 회개시키고 거룩하게 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90문은 실천을 말한다. 말씀이 구원에 효력 있게 되도록 우리는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그것을 받고 들어야 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간직하며,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가 분명해진다.

 

첫째,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다. 묵상이 그 목록에 별도 항목으로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묵상을 말씀·성례와 나란히 놓인 독립적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백적으로 부정확하다.

 

둘째, 그런데 90문이 말하는 내용을 보라.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받고,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간직하고, 삶에서 실천하는 것. 이것이 묵상이 아니면 무엇인가. 곧 소요리문답은 묵상을 별도 방편으로 세우지 않으면서도, 말씀이라는 방편을 받는 방식으로서 묵상의 내용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본편의 수정된 문장은 소요리문답 88문과 90문 사이의 정확한 자리에 서 있다. 88문이 방편을 규정하고, 90문이 그 방편을 받는 방식을 규정하며, 묵상은 후자에 속한다.12

도르트의 보조 확인 — 지우지 말아야 할 발견

여섯 과제의 독립 항목은 아니었지만, 검증 과정에서 도르트 신조에서 중요한 보강이 나왔다. 이것은 본편의 묵상 논의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므로 반드시 남겨야 한다.

 

도르트 신조 셋째·넷째 교리 17항은 하나님께서 중생시키시는 초자연적 사역이 복음의 사용을 배제하거나 무효화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큰 지혜로 복음을 중생의 씨앗이자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다고 고백한다.

 

"영혼의 양식"이라는 표현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본편 전체가 말씀을 양식으로 읽어 온 글이었다. 신명기 8:3에서 시작하여 에스겔의 두루마리와 예레미야의 "얻어 먹었사오니"를 지나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떡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런데 17세기의 도르트가 복음을 정확히 그 말—영혼의 양식—로 부르고 있었다.

 

도르트 신조 다섯째 교리 14항은 더 직접적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선포로 이 은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처럼, 복음을 듣고 읽는 것과 그것을 묵상하는 것, 그리고 복음의 권면과 경고와 약속, 또한 성례의 사용을 통하여 그 사역을 보존하고 계속하고 완성하신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묵상이 명시적으로 등장한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은혜의 일을 계속하시는 통로들을 열거하는 자리에서.

그러나 정확히 읽어야 한다. 도르트는 여기서 묵상을 독립적 은혜의 방편으로 세우지 않는다.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이시고, 목적어는 복음이며, 묵상은 그 복음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방식들 가운데 하나로 열거된다. "복음을 듣고 읽고 묵상함으로"라는 어구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다.

 

그러니 소요리문답 88–90문과 도르트 V.14를 함께 읽으면 균형이 잡힌다. 묵상을 말씀과 나란한 독립 방편으로 격상시키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실제로 사용하시는 통로로 충분히 무겁게 평가할 수 있다.

 

한 가지 제한은 유지하자. 도르트는 성찬 교리를 해설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가 아니며, 요한복음 6장의 주석서는 더더욱 아니다. 도르트를 요 6의 해설자처럼 소개하는 것은 이레네우스를 요 6의 주석가로 만드는 것과 같은 종류의 과장이다.13

 

 

 

Ⅵ. 각주 하나도 신학이다 — 판본과 인용을 다시 정리하며

여섯 번째 과제는 인용 형식이었다. 이것을 단순한 형식론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다.

최초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본편의 첫 각주판에는 이런 항목들이 있었다.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Ante-Nicene Fathers 1,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

 

이 인용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묘한 문제가 있다. 이 형태로 적어 놓으면 New Advent라는 웹사이트가 출처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New Advent는 19세기 영어 번역을 웹에 올려 놓은 접근점이다. 출처는 이레네우스가 쓴 작품이고, 그 작품의 본문을 확정한 것은 비평판이다.

세 층위를 구분하다

후속 검증에서 나는 인용을 세 층위로 나누었다.

 

첫째, 작품 자체와 그 내부 위치. 저자가 쓴 작품과, 그 안의 권·장·절 또는 논고·절 번호. 이것은 어떤 판본을 쓰든 변하지 않는다. Adversus haereses 5.2.2–3은 어느 판본에서도 5.2.2–3이다.

 

둘째, 표준 비평판 또는 초기 인쇄본. SC 153, PG 7, CCSL 36, PL 35, WA 6:502, CO 47 같은 것들. 본문의 형태를 확정하는 근거다.

 

셋째, 온라인 접근점. New Advent, CCEL, Project Wittenberg 등. 독자가 실제로 열어 볼 수 있는 통로다.

이렇게 정리하면 인용이 이런 모양이 된다.

  • 이레네우스 → Adversus haereses 5.2.2–3 → SC 153 / PG 7 → New Advent는 영어 접근용
  • 크리소스톰 → In Iohannem hom. 47 → CPG 4425, PG 59 → NPNF / New Advent는 영어 접근용
  • 아우구스티누스 →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5–27 → CCSL 36 / PL 35 → New Advent는 영어 접근용
  • 루터 → De captivitate Babylonica → WA 6:502 → Project Wittenberg는 편의용
  • 칼빈 → 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 Institutio 4.17 → CO 47 → Pringle/CCEL은 영어 접근용

Chicago Notes & Bibliography의 원칙

시카고 방식의 실무 원칙 몇 가지를 정리해 둔다.

  • 최초 인용은 full note. 저자, 제목, 번역자·편집자, 출판지와 출판사와 연도, 위치를 모두 밝힌다.
  • 이후에는 shortened note. 저자의 성, 축약 제목, 위치만 적는다.
  • 무분별한 ibid. 의존을 피한다. 각주가 편집 과정에서 이동하면 *ibid.*는 엉뚱한 곳을 가리키게 된다. 축약 인용이 더 안전하다.
  • 참고문헌에서 같은 저자가 반복될 때 3-em dash(———)로 줄이는 방식 대신 저자명을 반복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다. 특히 온라인으로 읽히는 글에서는 항목이 잘려 나갈 때 저자를 알 수 없게 되는 사고를 막아 준다.
  • 성경은 일반적으로 본문 안에 장·절로 표기하고 참고문헌에 별도 항목으로 반복하지 않는다.
  • 역사적 주장을 걸 때는 작품 내부 locator를 우선한다. 페이지 번호는 판본마다 다르지만 장·절 번호는 대체로 공통이기 때문이다.
  • 웹사이트는 source identity가 아니라 access point로 취급한다.

왜 이것이 신학의 문제인가

여기서 형식 이야기를 끝내지 말자. 정확한 인용의 목적은 학문적 예의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검증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쓸 때, 독자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우리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런데 우리가 "25논고 12절, CCSL 36:254"라고 덧붙이는 순간 세 번째 선택지가 생긴다. 직접 확인하는 것.

 

이 세 번째 선택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 왜 중요한가. 개신교 신학의 근본 원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권위 때문에 무언가를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증거를 내놓고, 독자가 스스로 성경과 증거 앞에 서기를 바란다.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을 때(행 17:11), 누가는 그들을 "신사적"이라고 칭찬했다.

 

각주는 그 상고를 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다. 각주가 부정확하면 독자는 상고할 수 없고, 우리의 말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어진다. 그것은 개신교가 원래 거부한 구조다.

 

그러니 이렇게 부르자. 검증 가능성의 윤리. 우리가 각주를 다듬는 이유는 우리 글이 학술적으로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글이 반박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반박 가능한 글만이 신뢰할 수 있는 글이다.

 

 

 

Ⅶ. 무엇이 확인되고 무엇이 수정되었는가

이제 여섯 과제를 다시 나열하지 말고, 결과를 신학적으로 종합하자.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A. 원래 주장이 더 강하게 확인된 것

아우구스티누스. 믿음 → 먹음 → 그리스도 안에 거함 → 성령의 참여라는 흐름이 25논고에서 27논고까지 연속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26논고 18절은 요한복음 6:56을 직접 주해하면서 먹음을 거함으로 정의한다. 본편 Ⅹ장의 이동이 현대적 착상이 아님을, 그것도 직접 주해 층위에서 확인했다.

 

루터. 요한복음 6장을 성찬 논증에서 제외하고 믿음의 먹음으로 읽는다는 서술이 WA 6:502의 라틴어에서 오히려 더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in totum est seponendum, nec syllaba de sacramento loquitur—번역이 부드럽게 만든 부분이 있었을 뿐, 방향은 정확했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 문장의 출처까지 추적되었다.

 

칼빈.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실제로 참여한다는 구조가 요한복음 주석뿐 아니라 『기독교강요』 4권 17장에서 훨씬 깊고 조직적으로 확인되었다. vinculum(끈)과 canalis(통로)라는 성령론적 이미지, 그리고 4.17.31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들어 올리신다"는 구조가 그것이다.

 

웨스트민스터. really and indeed … spiritually가 고백의 실제 핵심 언어이며, 대요리문답 170문에서 truly and really … spiritually로 반복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 짝이 두 문서에서 반복된다는 사실은 그것이 의식적 정식임을 보여 준다.

 

소요리문답과 도르트. 묵상에 관한 본편의 수정된 표현이 소요리문답 88–90문과 정확히 맞물리며, 도르트 V.14가 하나님께서 은혜의 일을 계속하시는 통로 가운데 묵상을 명시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도르트 III/IV.17의 "영혼의 양식"이라는 표현은 본편 전체의 주제어와 겹친다.

B. 그대로 둘 수 없어서 더 조심스럽게 고친 것

이레네우스. 『이단 논박』 5.2.2–3은 요한복음 6장의 직접 주석이 아니다. "이레네우스는 요 6을 이렇게 해석했다"가 아니라 "그의 성육신·성찬·부활 신학이 요 6의 주제와 강하게 공명한다"로 낮추어야 한다. 아울러 이 대목의 본문은 그리스어 원문이 아니라 고대 라틴어 역본이 중심이라는 전승 사정도 밝혀야 한다.

 

크리소스톰. 그를 개혁파 성찬론의 직접 선구자로 만들 수 없다. 그는 요한복음 6장을 매우 강하게 성찬적으로 읽는 4세기 동방 설교자다. "이 구별이 훗날 개혁파 성찬론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계보적 진술은 "중요한 역사적 대화점을 제공한다"로 낮추어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1563년에는 여러 인쇄판이 있었고, 증거본문 목록은 고백 본문과 같은 무게를 갖지 않으며 판본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 인쇄본에는 현대식 장·절 번호 체계가 없으므로, 특정 초판 여백에 "요 15:1–6"이라는 표기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요 6과 요 15가 76문의 같은 조항을 뒷받침하는 성경 근거로 연결되는 읽기 자체는 1563년의 초기 전통에서 확인된다. 낮추어야 했던 것은 표기 형태에 대한 주장이지 연결 자체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29장 7항이 요한복음 6:63을 직접 주해하거나 그것을 고백의 언어로 옮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공명이라고 말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한 가지 교정). 유명한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는 26논고가 아니라 25논고 12절이다. 그리고 믿음-먹음-거함-성령이라는 네 단계는 그가 한 문장에서 공식화한 것이 아니라 연속된 강해를 종합한 구조다.

C. 단순한 표현보다 오히려 더 풍성해진 것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본편은 "먹음 = 믿음"이라는 등식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왜 피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칼빈의 4.17.5를 읽고 나서야 그 이유가 분명해졌다.

 

칼빈은 "먹는 것은 곧 믿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세운 구별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살은 믿음으로써 먹히며, 그 먹음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다. 말의 차이는 작지만 실제의 차이는 작지 않다.

 

그러므로 본편의 핵심 명제는 이렇게 다시 읽혀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읽으면 훨씬 풍성해진다.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곧 믿음으로 먹고, 그리스도께 실제로 참여하며, 성령으로 연합하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

 

여기에는 네 개의 서로 다른 동작이 있다. 믿음이 있고, 참여가 있고, 연합이 있고, 생명의 전달이 있다. 이것을 "먹음 = 믿음"이라는 한 줄로 압축하면 뒤의 셋이 사라진다.

이 변화가 본편의 중심 명제를 약화시켰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명제가 왜 그렇게 쓰여야만 했는지를 밝혀 주었다.


결론 — 원전 검증은 믿음을 메마르게 만드는가

우리가 왜 여기까지 갔는가

지금까지 PG와 PL, CCSL과 SC, WA와 CO, 그리고 16–17세기 초기 인쇄본까지 이야기했다. 성도들에게는 낯선 기호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왜 하는가. 옛 학자들의 이름을 많이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라틴어 문장을 인용하며 아는 척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 가운데서 자기 말씀을 어떻게 읽게 하셨는지를 더 정직하게 듣기 위해서다.

 

우리는 혼자 성경을 읽지 않는다. 우리보다 앞서 이 본문 앞에 앉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2세기의 리옹에서, 4세기의 안디옥에서, 5세기의 히포에서, 16세기의 비텐베르크와 제네바와 하이델베르크에서,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그들의 읽기를 듣는 것은 우리 읽기를 검증하는 일이다. 성경은 사적으로 풀 것이 아니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벧후 1:20), 그 말은 우리 각자가 혼자 옳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전을 확인하면 문장이 약해지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자. 이번 검증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던 문장 몇 개를 잃었다. "이레네우스는 요한복음 6장을 이렇게 읽었다"는 문장이 좋았다. 2세기의 증언이라는 무게가 있었으니까. "이 구별이 훗날 개혁파 성찬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문장도 좋았다. 크리소스톰에서 칼빈까지 곧게 이어지는 선이 그려졌으니까. "1563년의 하이델베르크가 이미 요 6과 요 15를 연결해 놓았다"는 문장은 특히 아까웠다.

 

그런데 그 문장들을 내려놓고 나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사람들이 실제로 한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레네우스가 요한복음 6장의 주석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그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가 보였다. 그는 육체를 경멸하는 사람들 앞에서 육체의 구원을 변호하고 있었다. 그 싸움은 요한복음 6장 강해보다 어쩌면 더 절박한 싸움이었다.

크리소스톰을 우리 편에서 놓아준 뒤에야, 그가 "육적인 청취"라고 부른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렸다. 그것은 4세기 안디옥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이델베르크의 증거본문 하나를 포기하고 나서야, 76문 본문 자체가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 보였다. 믿는 마음, 죄 사함, 영생, 성령, 그리고 점점 더 깊어지는 연합. 여백의 참조가 아니라 고백 자체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약화는 손실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 분명 이렇게 말했다"는 과장을 내려놓는 대신, 그 사람이 실제로 말한 것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자리에서는 예상보다 더 풍성했다

동시에, 내려놓은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하나의 완전한 흐름을 받았다. "믿으라, 그러면 먹었다"(25논고)에서 시작해서,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26논고)를 지나, "먹고 마셨다는 표지는 그가 거하고 있는가이다"(27논고 1절)를 거쳐, "성령의 참여에 이르기까지 먹고 마시라"(27논고 11절)에 이르는 흐름이다.

 

이것이 본편이 성경을 따라 얻은 흐름과 겹친다. 우연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요한복음 6장을 순서대로 강해했고, 우리도 요한복음 6장을 순서대로 따라갔기 때문이다. 같은 본문이 두 독자를 같은 곳으로 데려간 것이다.

 

루터에게서는 단호함을 받았다. 요한복음 6장은 성례에 관해 한 음절도 말하지 않는다는 그 문장은, 성찬론에서 우리와 가장 크게 갈라선 종교개혁자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겁다.

 

칼빈에게서는 정밀함을 받았다. 먹음이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는 구별, 성령이 끈이며 통로시라는 이미지,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 올려진다는 방향.

 

웨스트민스터에게서는 하나의 짝을 받았다. 참으로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 이 둘을 함께 붙드는 법.

이들을 하나의 목소리로 만들지 말자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이 모든 이름을 한 줄로 세워 놓고 "봐라, 교회는 언제나 이렇게 믿었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직하지 않고, 또 필요하지도 않다.

 

이레네우스는 성찬으로 양육된 육체가 부활한다고 말했다. 크리소스톰은 성찬 앞에서 떨라고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된 먹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라고 말하면서도 성례의 객관성을 진지하게 지켰다. 루터는 요한복음 6장을 성찬 논증에서 빼면서도 떡과 포도주 안의 실재적 임재를 끝까지 주장했다. 칼빈은 성령께서 우리를 하늘로 들어 올리신다고 말했다. 하이델베르크는 성령에 의한 연합을 고백했고, 웨스트민스터는 참으로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라고 고백했다.

 

이들은 한 목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실재하는 차이다. 지우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이 다양성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확신이 하나 있다. 본편에서 이미 말한 그것이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조잡한 육체적 섭취가 아니며, 동시에 단순한 심리적 회상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과 실제로 연결되는 일이다.

 

서로 다른 자리에 선 사람들이 이 한 가지에서 만난다는 사실이, 억지로 한 목소리로 만든 합창보다 훨씬 큰 증거다.

소유가 아니라 붙들림

본편은 이런 문장으로 끝났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이번 후속 검증도 같은 원리였다. 옛 문헌을 소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원어 단어와 판본 번호와 단(column) 숫자를 많이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런 것을 많이 아는 사람은 자기 주장을 더 그럴듯하게 만드는 재료를 더 많이 가진 사람일 뿐이다.

 

오히려 목적은 정반대다. 우리의 해석과 주장까지 말씀과 역사적 증거 앞에 붙들리게 하는 것이다. 이번 검증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그것이었다. 연구자가 자료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자료가 연구자의 말을 제한했다. 이레네우스의 본문은 내가 쓰고 싶었던 문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크리소스톰의 강해는 내가 그리고 싶었던 계보를 그리지 못하게 했다. 1563년의 인쇄 사정은 내가 걸고 싶었던 확언을 막았다.

 

그리고 바로 그 제한이 선물이었다. 왜냐하면 제한이 있는 곳에서만 실제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료가 내 말을 다 들어주면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자료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만 그 "예"에도 의미가 생긴다.

 

그러니 원전 검증도 결국 같은 종류의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주어진 말을 받아들이는 일.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 그러했다. 두루마리를 네 손으로 만들어 내라고 하지 않으셨다. 주는 것을 먹으라고 하셨다. 요한이 밧모에서 받은 명령도 그러했다. 천사의 손에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먹으라고 했다. 받는 자리에 서 있어야 먹을 수 있다.

원전 앞에 앉는 일도 그 자리에 서는 한 가지 방식이다. 우리가 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받는 자리. 우리 문장이 심판받는 자리. 그리고 놀랍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풍성한 것을 받게 되는 자리.

 

이 말씀을 먹으라.

 

그리고 우리가 그 말씀에 관하여 한 말까지도, 그 말씀 앞에 다시 가져가자.


각주

일러두기. 아래 각주는 시카고 방식(Notes and Bibliography)을 따르되, 각 자료에 대하여 ① 작품 내부 위치, ② 표준 비평판 또는 초기 인쇄본, ③ 필요할 경우 온라인 접근점의 순서로 제시한다. 필자가 본문을 직접 확인한 매체와, 표준 참조를 위해 병기한 위치를 구분하여 밝힌다. 라틴어·그리스어 인용은 실제로 확인한 것에 한정하며, 확인하지 못한 문장은 직접 인용 형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1]: Irenaeus, *Adversus haereses* 5.2.2–3. 본문은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에서 확인했다. 표준 참조 위치는 *Sources Chrétiennes* 153, 대략 pp. 34–35; cf. PG 7:1124B–1127B. 이 대목에서 이레네우스가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성경은 고전 10:16, 골 1:14, 엡 5:30, 눅 24:39, 고전 15:53, 고후 12:3 등이며 요한복음 6장은 인용되지 않는다. 이 사실이 본문에서 "직접 주석이 아니라 공명"이라고 진술한 근거다. 아울러 이 대목의 그리스어 원문은 전하지 않으며 고대 라틴어 역본이 본문의 기초가 된다. 라틴어 본문 대조는 W. Wigan Harvey, ed., *Sancti Irenaei Episcopi Lugdunensis 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 vol. 2 (Cambridge: Typis Academicis, 1857)를 참조할 수 있으나, 필자는 SC 153을 직접 열람하지 않았으므로 이 위치는 표준 참조로만 제시한다.

[^2]: John Chrysostom, *In Iohannem homiliae* 47 (CPG 4425), 요 6:53–70 주해. 본문은 John Chrysostom,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trans. Charles Marriot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14,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7.htm에서 확인했다. 표준 참조 위치는 PG 59:23–482 수록, 6:63 관련 대목은 대략 PG 59:265. 크리소스톰은 "육은 무익하다"가 그리스도의 육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육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명시하며, 표준 영역이 이를 "carnally hearing"으로 옮긴다. PG 59:265의 그리스어 본문을 대조한 결과, 이 자리에서 사용되는 표현은 명사구 σαρκικὴ ἀκρόασις가 아니라 동사 형태 σαρκικῶς ἀκούειν 및 그 명사화 형태 τὸ σαρκικῶς ἀκοῦσαι이다. 따라서 본문의 "육적인 청취"는 개념적 요약으로만 사용하며, σαρκικὴ ἀκρόασις를 크리소스톰의 직접 인용처럼 제시하지 않는다. 신학적 요지—곧 요 6:63의 문제가 그리스도의 육체가 아니라 말씀을 육적으로 듣는 태도에 있다는 것—는 그대로 확인된다.

[^3]: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5.12. 라틴어: "*Hoc est ergo manducare cibum non qui perit, sed qui permanet in vitam aeternam. Ut quid paras dentes et ventrem? Crede, et manducasti.*" 표준 참조 위치는 CCSL 36:254이며, 필자가 직접 확인한 라틴어 본문은 PL 35:1602 및 온라인 라틴어 전승에 근거한다. CCSL 36 자체의 비평본문과 비평장치 대조는 남은 문헌학적 최종 확인 과제다. 문맥은 요 6:27–29이며, 특히 6:29("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에 대한 강해다. 영역은 Augustine, "Tractate 25 (John 6:15–44),"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7,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8),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5.htm. 같은 논고 14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요 6:35의 "내게 오는 자"가 "나를 믿는 자"와 같으며 "주리지 아니하리라"가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와 같음을 명시한다. 본편의 첫 각주판이 이 문장을 26논고로 표기한 것은 오류이며, 이 글에서 25.12로 교정한다.

[^4]: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6.18. 라틴어: "*Hoc est ergo manducare illam escam, et illum bibere potum, in Christo manere, et illum manentem in se habere.*" 요 6:56에 대한 직접 주해다. 같은 논고 12절은 참된 먹음을 "안에서 먹는 것, 마음으로 먹는 것"으로, 곧 밖에서 이로 누르는 것과 구별한다. 표준 참조 위치는 CCSL 36이며, 직접 확인한 라틴어 본문은 PL 35 및 온라인 라틴어 전승에 근거한다(CCSL 36의 비평본문 대조는 남은 과제다). 영역은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6.htm.

[^5]: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7.1, 27.11. 27논고 1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먹고 마셨다는 표지(*signum*)를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가에 둔다. 11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성례 안에서만(*in Sacramento*) 먹는 데 그치지 말고 성령의 참여에 이르기까지(*usque ad spiritus participationem*) 먹고 마시라고 권한다. 표준 참조 위치는 CCSL 36이며, 직접 확인한 라틴어 본문은 PL 35 및 온라인 라틴어 전승에 근거한다(CCSL 36의 비평본문 대조는 남은 과제다). 영역은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7.htm. 본문에서 제시한 "믿음 → 먹음 → 거함 → 성령의 참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문장에서 공식화한 도식이 아니라 25–27논고를 연속으로 읽어 종합한 구조임을 밝힌다.

[^6]: Martin Luther,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1520), WA 6:502.7f.: "*Primum, c. vi. Iohannis in totum est seponendum, ut quod nec syllaba de sacramento loquitur.*" 루터는 요한복음 6장이 성찬 논증에서 전적으로 제쳐져야 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로 그때 성례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는 점과 문맥이 성육신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de fide … incarnati verbi*)을 다룬다는 점을 든다. 이어 생명을 주는 먹음은 믿음의 먹음뿐이라고 논증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Crede, et manducasti*"를 인용한다(같은 인용이 WA 6:518 부근, 전자판 §2.58에 다시 나온다). 표준판은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6 (Weimar: Hermann Böhlau, 1888), 497–573. 영역 접근점은 Martin Luther,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trans. Albert T. W. Steinhaeuser, ed.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본편 첫 각주판이 사용한 "§2.3"은 WA의 절 번호가 아니라 이 전자판이 부여한 문단 번호이므로, 학술 인용의 핵심 locator는 WA 6:502이다.

[^7]: John Calvin, *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 (1553), 요 6:54 주해. 칼빈은 요 6 전체를 성찬에 적용하는 해석을 거부하고, 여기서 말하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지속적이고 통상적인 방식"이라고 결론짓는다. CTS 영역본은 이 대목에 역주 163을 달아 프랑스어판 계열의 표현을 병기하는데, 그 문구가 "*de la maniere perpetuelle et ordinaire de manger la chair de Christ, qui se fait par la foy seulement*"이며, 성찬이 이 설교의 "*seal and confirmation*"이라는 취지가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이 표현은 프링글 개인의 신학적 덧붙임이 아니라 칼빈의 1553년 프랑스어판 계열을 반영한 것이나, 영어 본문 자체에 있던 문장인 것처럼 인용해서는 안 된다.** 요 6:56 주해에서 칼빈은 "내 안에 거하고"를 그리스도와 우리의 "*bond of union*"으로 풀이하고, 믿음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길을 상상하는 것은 헛되다고 말하며 믿음이 "영혼의 입이며 위장"이라고 표현한다. 표준 수록판은 CO 47 (*Corpus Reformatorum* 75). 영역 접근점은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trans.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4.xii.ix.html.

[^8]: John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4.17.5. 칼빈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상이 아니라고 정의하는 견해를 소개한 뒤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참으로 그를 나누어 가짐으로 살아난다는 더 명확하고 숭고한 것을 가르치려 하셨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과 상대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그들에게 먹음은 곧 믿음이지만,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살은 믿음으로써 먹히며 그 먹음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는 것이다. 이어 "말의 차이는 작지만 실제의 차이는 작지 않다"고 덧붙인다. 같은 구별이 요 6:35 주해에도 나타나며, 거기서 칼빈은 먹음이 믿음 자체라기보다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고 말한다. 영역 접근점은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vi.xviii.html.

[^9]: John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4.17.1, 4.17.12, 4.17.31. 4.17.1은 성찬을 영적 잔치(*spirituale epulum*)로, 그리스도를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으로 제시한다. 4.17.12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머문다고 말하면서, 그 연결의 (*vinculum*)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그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종의 통로(*canalis*)가 되신다고 설명하고 태양 광선의 비유를 덧붙인다. 4.17.31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아래 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들어 올리시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영역 접근점은 위와 같다.

[^10]: *Heidelberg Catechism* (1563), Q. 76. 76문 본문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우리 안에도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몸과 "more and more" 연합되어 가는 것을 고백하며,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고 우리가 땅에 있으나 우리가 그의 살 중의 살이며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고 진술한다. 널리 쓰이는 온라인 판본의 증거본문에서 **요 15:1–6은 마지막 조항의 증거로 요 6:56–58, 엡 4:15–16, 요일 3:24와 나란히 배치된다**(https://www.catechesis.app/heidelberg/76/). 1563년에는 복수의 독일어 인쇄판과 라틴어판이 존재하며, 증거본문 목록은 고백 본문과 동일한 규범적 무게를 갖지 않고 판본에 따라 달라진다. 후속 검증에서 하이델베르크 대학 공개 디지털 영인본으로 1563년 제3판(Catechismus Oder Christlicher Vnderricht…, Heidelberg: Johann Mayer, 1563; VD16 P 2166)을 확인한 결과, 초기 인쇄본에는 현대식 장·절 번호 체계가 그대로 적용되어 있지 않으나, 초기 하이델베르크 전통 안에서 요한복음 6장과 요한복음 15장이 76문의 같은 연합·생명 조항을 뒷받침하는 성경 근거로 연결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1563년 초판 여백에 요 15:1–6이라는 표기가 있었다"고 단정하지 않으며, 동시에 두 본문의 연결이 후대에 비로소 생겼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본문의 논증은 여전히 76문 본문 자체가 담고 있는 구조에 근거한다.

[^1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 29.7: "*inwardly by faith, really and indeed, yet not carnally and corporally but spiritually*." 접근점은 New Life Presbyterian Church (PCA), https://www.newlifepca.com/resources/the-westminster-confession-of-faith/. 아울러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7), Q. 170은 합당한 수찬자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spiritually*), 그러나 참으로 실제로(*truly and really*) 먹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그 죽음의 모든 유익을 자기에게 적용한다고 설명한다. 접근점은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a/anonymous/westminster2/cache/westminster2.pdf. 판본 사항: 신앙고백서는 1646년 본문 완성·제출 이후 성경 증거구절이 부착된 판이 별도로 간행되었고, 대·소요리문답은 1647년 초기판과 1648년 증거구절판을 구별한다. 따라서 증거구절을 고백 본문과 동일한 규범적 무게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또한 WCF 29.7이 요 6:63을 직접 주해하거나 그것을 고백의 언어로 옮긴 것이라는 문헌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본편의 해당 표현을 "공명"으로 교정한다.

[^12]: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7), qq. 88–90. 88문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유익을 전달하시는 외적이고 통상적인 방편을 그의 규례들,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로 규정한다. 89문은 성령께서 말씀의 읽기와 특별히 설교를 죄인을 깨우치고 회개시키며 거룩하게 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삼으신다고 답한다. 90문은 말씀을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받고 들으며,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간직하며, 삶에서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접근점은 Westminster Standards, https://westminsterstandards.org/westminster-shorter-catechism/.

[^13]: *Canons of Dort* (1618–19), 셋째·넷째 교리 17항; 다섯째 교리 14항. III/IV.17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중생 사역이 복음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큰 지혜로 복음을 중생의 씨앗이자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다고 고백한다. V.14는 하나님께서 복음의 선포로 시작하신 은혜의 사역을 복음을 듣고 읽는 것, 그것을 묵상하는 것, 복음의 권면과 경고와 약속, 그리고 성례의 사용을 통하여 보존하고 계속하고 완성하신다고 고백한다. 문장의 주어가 하나님이시고 목적어가 복음이므로, 이 조항이 묵상을 말씀·성례와 병렬하는 독립적 은혜의 방편으로 세우는 것은 아니다. 접근점은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The Canons of Dort,"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canons-dort?language=en. (해당 영역본은 2011년 승인 번역본으로 저작권이 있으므로 직접 인용 대신 요약으로 다루었다.)

 

참고문헌

1차 자료 — 교부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CXXIV. Edited by Radbodus Willems. 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36. Turnhout: Brepols, 1954.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CXXIV. Patrologia Latina 35. Edited by J.-P. Migne. Paris, 1841.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Translated by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7,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8.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htm.

Chrysostom, John. In Iohannem homiliae. CPG 4425. Patrologia Graeca 59:23–482. Edited by J.-P. Migne. Paris, 1862.

Chrysostom, John.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Translated by Charles Marriot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4,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9.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7.htm.

Irenaeus. Contre les hérésies, Livre V. Sources Chrétiennes 153. Paris: Éditions du Cerf, 1969.

Irenaeus. Adversus haereses. Patrologia Graeca 7. Edited by J.-P. Migne. Paris, 1857.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lated by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5.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

Irenaeus. Sancti Irenaei Episcopi Lugdunensis 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 Vol. 2. Edited by W. Wigan Harvey. Cambridge: Typis Academicis, 1857.

1차 자료 — 종교개혁

Calvin, John. 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 1553. In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vol. 47. Corpus Reformatorum 75. Brunswick: C. A. Schwetschke, 1892.

Calvin, John. Commentaire de M. Iean Calvin sur l'Evangile selon sainct Jean. 1553.

Calvin, Joh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Translated by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4.xii.ix.html.

Calvin, Joh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59. Book 4, chap. 17.

Calvin, Joh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lated by Henry Beveridg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vi.xviii.html.

Luther, Martin.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1520. In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6, 497–573. Weimar: Hermann Böhlau, 1888.

Luther, Martin.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Translated by Albert T. W. Steinhaeuser. Edited by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신앙고백 문서

Canons of Dort. 1618–19.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canons-dort?language=en.

Heidelberg Catechism. 1563. Question 76. Catechesis. https://www.catechesis.app/heidelberg/76/.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 Chapter 29. New Life Presbyterian Church (PCA). https://www.newlifepca.com/resources/the-westminster-confession-of-faith/.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7. Question 17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a/anonymous/westminster2/cache/westminster2.pdf.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7. Questions 88–90. Westminster Standards. https://westminsterstandards.org/westminster-shorter-catechism/.

 

남은 비평판 최종 확인

이 후속 검증으로 여섯 과제의 실질적 내용은 대체로 닫혔다. 크리소스톰의 그리스어 표현은 PG 59:265에서 확인했고, 하이델베르크는 1563년 제3판 영인본으로, 웨스트민스터는 1646/47–48년 본문판과 증거구절판의 관계로 정리되었다. 지금 남은 것은 현대 표준 비평판을 통한 문헌학적 최종 확인 두 가지이며, 이는 현재의 역사신학적 결론을 보류하게 만드는 성격의 미검증이 아니다.

  1. SC 153 직접 열람. 이레네우스 Adversus haereses 5.2.2–3의 고대 라틴어 본문, 현존 그리스어 단편, 비평장치(apparatus)를 Sources Chrétiennes 153에서 최종 대조하는 일.
  2. CCSL 36 직접 열람. 아우구스티누스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5–27의 비평본문을 확인하고, PL 35와의 이독(異讀) 및 비평장치를 점검하는 일.

이 목록을 남기는 이유는 앞의 본문에서 말한 것과 같다. 우리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을 확인한 것처럼 말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뒤에 오는 사람이 우리가 멈춘 자리에서 이어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1. Irenaeus, Adversus haereses 5.2.2–3. 본문은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 에서 확인했다. 표준 참조 위치는 Sources Chrétiennes 153, 대략 pp. 34–35; cf. PG 7:1124B–1127B. 이 대목에서 이레네우스가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성경은 고전 10:16, 골 1:14, 엡 5:30, 눅 24:39, 고전 15:53, 고후 12:3 등이며 요한복음 6장은 인용되지 않는다. 이 사실이 본문에서 "직접 주석이 아니라 공명"이라고 진술한 근거다. 아울러 이 대목의 그리스어 원문은 전하지 않으며 고대 라틴어 역본이 본문의 기초가 된다. 라틴어 본문 대조는 W. Wigan Harvey, ed., Sancti Irenaei Episcopi Lugdunensis 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 vol. 2 (Cambridge: Typis Academicis, 1857)를 참조할 수 있으나, 필자는 SC 153을 직접 열람하지 않았으므로 이 위치는 표준 참조로만 제시한다.
  2. John Chrysostom, In Iohannem homiliae 47 (CPG 4425), 요 6:53–70 주해. 본문은 John Chrysostom,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trans. Charles Marriot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14,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7.htm 에서 확인했다. 표준 참조 위치는 PG 59:23–482 수록, 6:63 관련 대목은 대략 PG 59:265. 크리소스톰은 "육은 무익하다"가 그리스도의 육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육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명시하며, 표준 영역이 이를 "carnally hearing"으로 옮긴다. 그리스어 개념은 σαρκικὴ ἀκρόασις("육적인 청취")이다. 다만 필자는 PG 59의 그리스어 본문을 직접 대조하지 않았으므로, 특정 그리스어 문장을 직접 인용 형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 대조는 후속 과제로 남긴다.
  3.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5.12. 라틴어: "Hoc est ergo manducare cibum non qui perit, sed qui permanet in vitam aeternam. Ut quid paras dentes et ventrem? Crede, et manducasti." 위치는 CCSL 36:254; PL 35:1602. 문맥은 요 6:27–29이며, 특히 6:29("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에 대한 강해다. 영역은 Augustine, "Tractate 25 (John 6:15–44),"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7,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8),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5.htm. 같은 논고 14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요 6:35의 "내게 오는 자"가 "나를 믿는 자"와 같으며 "주리지 아니하리라"가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와 같음을 명시한다. 본편의 첫 각주판이 이 문장을 26논고로 표기한 것은 오류이며, 이 글에서 25.12로 교정한다.
  4.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6.18. 라틴어: "Hoc est ergo manducare illam escam, et illum bibere potum, in Christo manere, et illum manentem in se habere." 요 6:56에 대한 직접 주해다. 같은 논고 12절은 참된 먹음을 "안에서 먹는 것, 마음으로 먹는 것"으로, 곧 밖에서 이로 누르는 것과 구별한다. 위치는 CCSL 36; PL 35. 영역은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6.htm.
  5.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27.1, 27.11. 27논고 1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먹고 마셨다는 표지(signum)를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가에 둔다. 11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성례 안에서만(in Sacramento) 먹는 데 그치지 말고 성령의 참여에 이르기까지(usque ad spiritus participationem) 먹고 마시라고 권한다. 위치는 CCSL 36; PL 35. 영역은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7.htm. 본문에서 제시한 "믿음 → 먹음 → 거함 → 성령의 참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문장에서 공식화한 도식이 아니라 25–27논고를 연속으로 읽어 종합한 구조임을 밝힌다.
  6. Martin Luther,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1520), WA 6:502.7f.: "Primum, c. vi. Iohannis in totum est seponendum, ut quod nec syllaba de sacramento loquitur." 루터는 요한복음 6장이 성찬 논증에서 전적으로 제쳐져야 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로 그때 성례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는 점과 문맥이 성육신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de fide … incarnati verbi)을 다룬다는 점을 든다. 이어 생명을 주는 먹음은 믿음의 먹음뿐이라고 논증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Crede, et manducasti"를 인용한다(같은 인용이 WA 6:518 부근, 전자판 §2.58에 다시 나온다). 표준판은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6 (Weimar: Hermann Böhlau, 1888), 497–573. 영역 접근점은 Martin Luther,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trans. Albert T. W. Steinhaeuser, ed.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본편 첫 각주판이 사용한 "§2.3"은 WA의 절 번호가 아니라 이 전자판이 부여한 문단 번호이므로, 학술 인용의 핵심 locator는 WA 6:502이다.
  7. John Calvin, 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 (1553), 요 6:54 주해. 칼빈은 요 6 전체를 성찬에 적용하는 해석을 거부하고, 여기서 말하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지속적이고 통상적인 방식"이라고 결론짓는다. CTS 영역본은 이 대목에 역주 163을 달아 프랑스어판 계열의 표현을 병기하는데, 그 문구가 "de la maniere perpetuelle et ordinaire de manger la chair de Christ, qui se fait par la foy seulement"이며, 성찬이 이 설교의 "seal and confirmation"이라는 취지가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이 표현은 프링글 개인의 신학적 덧붙임이 아니라 칼빈의 1553년 프랑스어판 계열을 반영한 것이나, 영어 본문 자체에 있던 문장인 것처럼 인용해서는 안 된다. 요 6:56 주해에서 칼빈은 "내 안에 거하고"를 그리스도와 우리의 "bond of union"으로 풀이하고, 믿음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길을 상상하는 것은 헛되다고 말하며 믿음이 "영혼의 입이며 위장"이라고 표현한다. 표준 수록판은 CO 47 (Corpus Reformatorum 75). 영역 접근점은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trans.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4.xii.ix.html.
  8. John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4.17.5. 칼빈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상이 아니라고 정의하는 견해를 소개한 뒤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참으로 그를 나누어 가짐으로 살아난다는 더 명확하고 숭고한 것을 가르치려 하셨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과 상대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그들에게 먹음은 곧 믿음이지만,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살은 믿음으로써 먹히며 그 먹음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는 것이다. 이어 "말의 차이는 작지만 실제의 차이는 작지 않다"고 덧붙인다. 같은 구별이 요 6:35 주해에도 나타나며, 거기서 칼빈은 먹음이 믿음 자체라기보다 믿음의 결과요 열매라고 말한다. 영역 접근점은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vi.xviii.html.
  9. John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4.17.1, 4.17.12, 4.17.31. 4.17.1은 성찬을 영적 잔치(spirituale epulum)로, 그리스도를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으로 제시한다. 4.17.12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머문다고 말하면서, 그 연결의 (vinculum)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그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종의 통로(canalis)가 되신다고 설명하고 태양 광선의 비유를 덧붙인다. 4.17.31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아래 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들어 올리시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영역 접근점은 위와 같다.
  10. Heidelberg Catechism (1563), Q. 76. 76문 본문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우리 안에도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몸과 "more and more" 연합되어 가는 것을 고백하며,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고 우리가 땅에 있으나 우리가 그의 살 중의 살이며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고 진술한다. 널리 쓰이는 온라인 판본의 증거본문에서 요 15:1–6은 마지막 조항의 증거로 요 6:56–58, 엡 4:15–16, 요일 3:24와 나란히 배치된다(https://www.catechesis.app/heidelberg/76/). 다만 1563년에는 복수의 인쇄판이 존재하며, 증거본문 목록은 본문과 동일한 규범적 무게를 갖지 않고 판본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 독일어판·라틴어판의 여백 참조가 어떤 형태였는지는 해당 인쇄본(예: Heidelberg: Johann Mayer, 1563; VD16 계열)의 영인본을 직접 대조해야 확정할 수 있으며, 필자는 이 대조를 완료하지 못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이 목록에 논증의 무게를 걸지 않고, 76문 본문 자체가 담고 있는 구조에 근거하여 진술했다.
  1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 29.7: "inwardly by faith, really and indeed, yet not carnally and corporally but spiritually." 접근점은 New Life Presbyterian Church (PCA), https://www.newlifepca.com/resources/the-westminster-confession-of-faith/. 아울러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7), Q. 170은 합당한 수찬자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spiritually), 그러나 참으로 실제로(truly and really) 먹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그 죽음의 모든 유익을 자기에게 적용한다고 설명한다. 접근점은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a/anonymous/westminster2/cache/westminster2.pdf. 판본 사항: 신앙고백서는 1646년 본문 완성·제출 이후 성경 증거구절이 부착된 판이 별도로 간행되었고, 대·소요리문답은 1647년 초기판과 1648년 증거구절판을 구별한다. 따라서 증거구절을 고백 본문과 동일한 규범적 무게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또한 WCF 29.7이 요 6:63을 직접 주해하거나 그것을 고백의 언어로 옮긴 것이라는 문헌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본편의 해당 표현을 "공명"으로 교정한다.
  12.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7), qq. 88–90. 88문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유익을 전달하시는 외적이고 통상적인 방편을 그의 규례들,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로 규정한다. 89문은 성령께서 말씀의 읽기와 특별히 설교를 죄인을 깨우치고 회개시키며 거룩하게 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삼으신다고 답한다. 90문은 말씀을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받고 들으며,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간직하며, 삶에서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접근점은 Westminster Standards, https://westminsterstandards.org/westminster-shorter-catechism/.
  13. Canons of Dort (1618–19), 셋째·넷째 교리 17항; 다섯째 교리 14항. III/IV.17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중생 사역이 복음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큰 지혜로 복음을 중생의 씨앗이자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다고 고백한다. V.14는 하나님께서 복음의 선포로 시작하신 은혜의 사역을 복음을 듣고 읽는 것, 그것을 묵상하는 것, 복음의 권면과 경고와 약속, 그리고 성례의 사용을 통하여 보존하고 계속하고 완성하신다고 고백한다. 문장의 주어가 하나님이시고 목적어가 복음이므로, 이 조항이 묵상을 말씀·성례와 병렬하는 독립적 은혜의 방편으로 세우는 것은 아니다. 접근점은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The Canons of Dort,"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canons-dort?language=en. (해당 영역본은 2011년 승인 번역본으로 저작권이 있으므로 직접 인용 대신 요약으로 다루었다.)

 

 

 

AI 활용 안내 — 이 글의 문제의식과 중심 논지, 신학적 판단, 자료의 채택과 최종 문장은 필자에게 있다. 작성 과정에서는 생성형 AI를 연구와 편집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였다.
ChatGPT 5.6은 사전 조사와 쟁점의 구조화에, Claude Fable/Opus 5은 초고의 표현 및 참고문헌·각주 형식의 정돈에, Perplexity Pro는 관련 논문과 온라인 원문 자료의 탐색에 사용하였다.
AI가 제시한 내용은 그 자체를 권위 있는 출처로 삼지 않았으며, 접근 가능한 성경 원문, 교부 문헌, 신경과 공의회 문서, 공식 교리서 및 개혁파 신앙고백 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다시 대조하였다. 자료의 해석과 남아 있을 수 있는 오류를 포함한 글의 최종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두루마리에서 생명의 떡까지, 말씀을 먹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삶


들어가며 — 왜 "읽으라"가 아니라 "먹으라"인가

성경에는 우리를 잠시 멈춰 세우는 기묘한 장면들이 있다. 에스겔 2–3장이 그렇다.

 

바벨론 그발 강가, 포로로 끌려온 백성 가운데 있던 한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지자로 세우신다. 그런데 그를 세우시는 방식이 우리의 예상과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설교문을 건네주지 않으신다. 말씀을 암송하라고 하지도, 받아 적으라고 하지도, 심지어 읽으라고 하지도 않으신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겔2:8)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앞에 두루마리를 펴신다.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겔2:10)

 

이어 3장의 첫 문장이 다시 한 번 못을 박는다.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겔3:1)

(개역한글은 이 대목을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로 옮긴다. 어느 번역을 따르든 명령의 핵심은 같다. 먹으라.)

 

읽으라가 아니다. 연구하라가 아니다. 외우라도 아니다.

 

먹으라.

 

이 한 마디에서 이 글은 출발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말씀을 읽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먹으라고 하셨을까? 이것은 단순한 수사(修辭)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성경이 처음부터 붙들고 있던 어떤 진실을 드러내는 표현일까?

 

이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우리는 놀랍게도 에스겔의 두루마리에서 멈추지 않고 광야의 만나로, 꿀보다 단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으로, 갈릴리 호숫가에서 떼어 주신 떡으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라는 선언으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젖과 단단한 음식의 비유로, 목마른 자에게 열린 생수의 강으로, 그리고 마침내 밧모 섬에서 또 하나의 두루마리를 삼키는 한 사도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이 글이 도달하려는 명제를 미리 밝혀 두는 것이 좋겠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오래 되새겨 그 맛을 알고, 성령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 그분 안에 거하며,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판단과 삶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씀에 의해 지각이 훈련되고 성도가 장성하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생명이 열매와 증언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다만 시작하면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이 글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먹음"이 같은 뜻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에스겔이 삼킨 두루마리, 예레미야가 얻어먹은 말씀,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이신 성자,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떡, 요한복음 15장의 "내 말", 히브리서 5장의 "의의 말씀", 요한계시록 10장의 작은 두루마리는 각각 자기 문맥과 자기 의미를 가진 본문들이다. 단어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이것들을 하나로 눌러 붙이면, 그것은 성경 연구가 아니라 성경을 재료 삼은 말장난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각 본문을 그 자리에서 읽고, 그 다음에 성경 전체에 걸쳐 반복되고 발전하는 하나의 모티프—말씀, 양식, 섭취, 생명, 내면화, 그리스도, 연합, 거함, 성장, 분별, 열매, 증언—가 어떻게 서로 울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수렴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직접적인 주해와 정경적 연결을 구별하는 이 태도는 글의 신중함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성경을 성경으로 대접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다

에스겔의 장면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장면을 성경의 더 큰 흐름에서 떼어놓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말씀을 듣는 것을 먹는 것으로 말하는 어법은 에스겔에게서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광야에서 시작되었다.

신명기 8:3 — 만나가 가르친 것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세는 지난 사십 년을 회고한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이 구절의 논리를 천천히 보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리게 하신 것도, 만나를 주신 것도, 하나의 교육 과정이었다.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서인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목할 것은 이 진리가 만나를 부정함으로써가 아니라 만나를 먹임으로써 가르쳐졌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굶주린 백성에게 실제로 양식을 주셨다. 그리고 그 양식은 밭에서 나지도, 저축할 수도, 사람이 만들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날 몫만 거둘 수 있었으며, 쌓아 두려 하면 썩었다. 이스라엘은 사십 년 동안 매일 아침 자신의 생존이 자기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달려 있음을 몸으로 배웠다.

 

여기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추상적인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만나를 있게 하시고, 거두게 하시고, 안식일에는 그치게 하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명령이다. 사람은 그 말씀에 의존하여 산다. 육체가 떡을 필요로 하는 것이 비유가 아니듯, 사람이 말씀으로 산다는 것도 비유적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실제 조건에 대한 진술이다.

마태복음 4:4 — 광야에서 다시 울리는 말씀

그리고 이 구절은 성경 안에서 다시 한 번, 결정적인 자리에서 인용된다. 사십 년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그 자리에, 사십 일을 금식하신 한 분이 서신다. 시험하는 자가 말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주님께서는 신명기 8:3을 인용하시면서, 그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신다. 참 이스라엘로서, 참 사람으로서 그분은 떡보다 아버지의 말씀에 매달리기를 택하신다. 배고픔이 거짓말이어서가 아니다. 배고픔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 매달려 있는 더 깊은 자리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사셨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알려 준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굶주린 사람에게 던지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 굶주림 한복판에서도 사람을 붙드는 실제적인 생명의 통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가장 철저하게 살아내신 분이 곧 나중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라고 말씀하실 그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 두어야 한다.

아모스 8:11 — 말씀의 기근

말씀이 양식이라면, 말씀의 부재는 기근이다. 아모스는 임할 심판을 이렇게 예고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재앙 가운데 하나가 말씀의 기근이라는 것이다. 곳간이 가득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지면 그 백성은 굶주린다. 이것은 말씀이 정말로 양식이라는 성경의 인식을 뒤집어 확인해 준다.

시편 119:103 — 꿀보다 단 말씀

말씀은 생존을 위한 배급 식량만이 아니다. 그것은 맛이 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맛본다. 그리고 그 맛을 표현할 때 꿀을 끌어온다.

여기서 잠깐 멈추어 물어야 한다. 말씀의 이 단맛은 어디에서 오는가? 본문을 한 번 눈으로 훑고 지나가는 사람은 이 맛을 알기 어렵다. 시편 119편 전체가 증언하듯이, 이 사람은 말씀을 밤낮 되새기고, 그 말씀 때문에 밤에 깨어 있고, 그 말씀을 사랑하여 종일 읊조리는 사람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시119:15)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119:97)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119:148)

 

맛은 오래 씹는 사람에게 열린다. 이 사실은 뒤에서 묵상을 다룰 때 다시 붙들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15:16 —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그리고 여기, 에스겔의 두루마리와 요한계시록의 작은 두루마리 사이를 잇는 매우 중요한 구약의 고리가 있다. 예레미야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

 

예레미야는 말씀을 "얻어 먹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기에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시편 119편의 단맛이 여기서 다시 들린다.

 

그러나 예레미야 15장의 문맥은 결코 달콤하지 않다. 이 고백 바로 앞뒤로 그는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자신이 온 땅에 다투는 자가 되었다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주께서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라고까지 부르짖는다. 말씀을 먹은 그 사람이 동시에 그 말씀 때문에 조롱과 고립과 고통 속에 있다.

 

이 조합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먹은 자에게 기쁨이 되지만, 그 기쁨은 고통을 면제해 주는 종류의 기쁨이 아니다. 이 긴장은 계시록 10장에서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배에서는 쓰다"는 이미지로 다시 우리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Ⅱ.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 — 말씀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다

이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자. 에스겔에게 주어진 명령은 하나의 순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순서 자체가 신학이다.

하나님의 순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3:2–3)

 

여기서 동사들을 차례로 따라가 보라.

 

받음 → 먹음 → 배에 넣음 → 창자에 채움 → 마음으로 받음 → 가서 말함.

 

앞의 셋은 이미 보았다. 나머지는 조금 뒤에 나온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3:10–11)

 

이 순서에서 무엇이 드러나는가?

 

첫째, 말씀이 선지자의 가장 바깥이 아니라 가장 안쪽으로 들어간다. 입에서 배로, 배에서 창자로, 그리고 마음으로. 히브리어의 이 표현들은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 감정과 의지와 존재의 중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에스겔의 손에 쥐어 주지 않으시고 그의 속에 넣으신다.

 

둘째, "가서 말하라"는 명령이 먹은 다음에 온다. 이 순서는 뒤집을 수 없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 옮기는 우편배달부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전할 말씀을 먼저 자기 안에 받은 사람이다. 말씀은 그를 통과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물러 그를 채운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입을 연다.

 

셋째, 그 말씀의 맛이 꿀 같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두루마리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 기억하라.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었다(겔2:10). 심판의 말씀이었다. 듣는 자들이 듣지 않을 말씀이었고, 전하는 자에게 고난을 안길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입에서 꿀같이 달았다.

 

왜 그런가? 그 말씀이 유쾌한 내용이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 자체,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그들에게 말을 거신다는 사실 자체가 이 선지자에게는 단 것이었다.

말씀은 사람을 통과하지 않고 사람을 채운다

에스겔의 이 장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경의 이해를 압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보 전달이 목적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는 명확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안개 같은 종교적 정서가 아니라 분명한 언어로 주어진 계시다. 그러나 그 말씀의 목적지는 사람의 기억 장치가 아니라 사람의 존재 전체다.

 

그러므로 "왜 읽으라가 아니라 먹으라인가?"라는 우리의 첫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이것이다.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읽기가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음식은 눈으로 보고 이름을 알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먹혀서 그 사람의 피와 살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그런 것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주 실제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좋다. 말씀을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먹는가? 우리 손에 있는 것은 두루마리가 아니라 성경책이고, 우리는 그것을 삼킬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해 성경 자신이 이미 하나의 대답을 마련해 두었다. 그것이 묵상이다.

 

 

 

Ⅲ. 읽는 데서 먹는 데로 — 묵상, 말씀을 오래 씹는 시간

성경을 읽는 것이 음식을 입 앞에 가져다 놓는 일이라면, 묵상은 그것을 입에 넣고 오래 씹어 삼키는 일이다. 이 비유를 기계적으로 밀어붙일 필요는 없지만, 성경 자체가 묵상을 말할 때 사용하는 언어는 놀랍도록 이 방향을 가리킨다.

시편 1편 —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시편 전체의 문을 여는 첫 시편이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묘사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여기서 "묵상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הגה, 하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생각한다는 뜻만이 아니다. 이 단어는 낮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 중얼거리는 것, 되뇌는 것을 가리킨다. 짐승이 먹은 것을 다시 되새기는 모습을 떠올려도 좋다. 시편 119편에서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라고 옮겨진 말이 바로 이 계열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한 번 읽고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 말씀을 입에 물고, 되뇌고, 낮에도 밤에도 그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이다. "주야로"라는 표현은 시간의 양을 말하기 전에 삶의 방향을 말한다. 그의 하루가 그 말씀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해 시편은 곧바로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3)

 

이 이미지를 자세히 보라.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그 열매의 근거는 나무의 노력이 아니라 나무가 심긴 자리다. 시냇가에 심겼기 때문에, 뿌리가 물에 닿아 있기 때문에, 그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가뭄이 와도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에세이 후반부에 다시 만나게 될 그림을 미리 보고 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 둘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조심스럽게 연결해야 한다. 시편 1편이 요한복음 15장의 직접적인 예표라고 주장할 근거는 본문에 없다. 시편 1편의 직접적인 주제는 토라를 묵상하는 의인과 바람에 나는 겨 같은 악인의 대조이며, 요한복음 15장의 직접적인 주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생명적 연합이다. 두 본문은 각각 자기 자리에서 읽혀야 한다.

 

그러나 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이 둘 사이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공명이 있다.

 

말씀 안에 머묾 → 생명의 근원에 뿌리내림 → 생명을 공급받음 → 때를 따라 열매를 맺음.

 

시편 1편에서는 그 머묾이 "주야로 묵상함"으로,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내 안에 거함"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함"으로 나타난다. 어휘를 등치시키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처음부터 열매 맺는 삶을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삶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에 붙어 있는 삶으로 그려 왔다는 것이다.

여호수아 1:8 — 묵상은 순종을 향한다

묵상이 자칫 내면의 취미처럼 오해될 수 있기에, 성경은 처음부터 묵상을 순종에 붙들어 매어 놓았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여기서 세 가지가 한 문장 안에 묶여 있다.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 것, 주야로 묵상하는 것, 그리고 기록된 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묵상은 전투와 분리된 경건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요단을 건너 전쟁을 치러야 할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에게 이 말씀을 주셨다.

 

그러므로 참된 묵상은 반드시 순종으로 향한다. 말씀을 깊이 생각했는데 삶의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묵상이 깊었던 것이 아니라 아직 삼키지 않은 것이다.

묵상이란 무엇인가

이제 묵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려 보자. 묵상은 성경을 천천히 읽는 기술이 아니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며,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읽음 → 되새김 → 맛봄 → 마음에 머물게 함 → 기도로 응답함 → 삶에 적용함 → 반복하여 살아냄 → 말씀에 의해 형성됨.

 

하나씩 보자.

 

읽음.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에서 시작한다. 묵상은 내 생각을 깊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앉는 일이다. 그러므로 본문 없는 묵상은 없다.

 

되새김. 한 번 읽고 넘어간 구절은 대개 우리 안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같은 구절로 돌아오고, 다시 읽고, 낮은 소리로 읊조리고, 하루 중에 다시 떠올릴 때 그 말씀은 비로소 우리 안에 자리를 잡는다. 시편 1편의 "주야로"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맛봄. 되새기는 사람에게 말씀은 맛을 낸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라는 고백은 분석의 결론이 아니라 경험의 고백이다. 시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도 권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맛보는 것과 아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마음에 머물게 함.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말씀이 마음에 있다는 것은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뜻을 넘어, 그 말씀이 우리가 판단하고 욕망하는 자리에 함께 있다는 뜻이다.

 

기도로 응답함. 이것이 결정적이다. 묵상은 독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대답한다. 읽은 말씀으로 감사하고, 그 말씀이 드러낸 죄를 자백하고, 그 말씀이 약속한 것을 구한다. 묵상과 기도를 분리하면 묵상은 종교적 사색으로 변질된다. 성경의 묵상은 언제나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삶에 적용하고 반복하여 살아냄. 그리고 그 말씀이 오늘 나의 어떤 판단, 어떤 관계, 어떤 습관을 건드리는지를 구체적으로 묻고 그대로 행한다. 여호수아 1:8이 말한 자리가 여기다.

 

말씀에 의해 형성됨. 이 모든 과정이 반복될 때 일어나는 일이 있다. 우리가 말씀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빚기 시작한다. 이것이 묵상의 목적지다.

묵상은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반드시 붙여야 할 말이 있다. 묵상을 정신집중이나 자기암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말씀을 읽고 되새기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하는 일이다. 성경을 펴는 것도, 시간을 내는 것도, 다시 읽는 것도 우리가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밝히 보여 주시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며, 믿음과 순종을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경은 이 사실을 곳곳에서 증언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하신 일도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신 것이었다(눅24:45).

 

그러므로 말씀을 맛보고 섭취하는 과정은 텍스트 + 집중력의 결과가 아니라,말씀 + 성령 + 믿음의 역사다. 이 구별은 매우 실제적이다. 앞의 공식을 따르면 묵상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나뉘는 기술 훈련이 되고, 결국 성과와 죄책감의 문제가 된다. 뒤의 공식을 따르면 묵상은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믿음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경건의 실천이 된다.

 

이 표현은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개혁파 신앙고백의 전통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정하신 통상적인 방편을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로 규정해 왔다. 그러므로 묵상 자체를 말씀·성례와 나란히 놓인 독립적인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렇다.

 

묵상은 성령께서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우리 마음에 깊이 적용하시는 가운데, 성도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되새기고 기도로 응답하며 순종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경건의 실천이다.[*1]

 

이 구별은 말장난이 아니다. 은혜를 주시는 통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말씀이지 우리의 묵상 행위가 아니다. 묵상은 그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가져다 놓고 머무는 일이지, 우리가 그 자리에서 은혜를 생산해 내는 일이 아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묵상은 곧바로 영적 성취의 도구가 되고, 우리는 다시 자기 경건의 성적표 앞에 서게 된다.

말씀에는 단맛만 있지 않다

묵상을 이야기할 때 조심해야 할 오해가 하나 더 있다. 묵상이 언제나 위로와 감동을 주는 시간이라는 기대다. 에스겔의 두루마리는 입에 꿀같이 달았지만 그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얻어 먹고 기쁨을 얻었지만 바로 그 말씀 때문에 홀로 앉아 분노와 조롱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뒤에서 보겠지만 요한이 삼킨 작은 두루마리는 입에서는 꿀 같았으나 배에서는 썼다.

 

말씀은 우리를 위로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고, 회개를 요구하고, 우리가 아끼는 욕망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말한다(히4:12).

 

그러므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골라 맛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묵상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위로만이 아니라 심판과 회개와 순종과 고난의 요구까지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 오히려 이 쓴맛을 견디지 못하고 늘 단 것만 찾는 독서는, 아무리 성경책을 손에 들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라 하기 어렵다.

성도에게 드리는 물음

그러니 잠시 자신의 성경 읽기를 돌아보아도 좋겠다. 다만 이것을 점수표로 삼지는 말자. 이 물음들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식탁으로 초대하려는 것이다.

  • 나는 그 말씀 앞에 잠시라도 머물렀는가, 아니면 진도만 나갔는가.
  • 한 구절을 하루 중에 다시 떠올려 되새긴 적이 있는가.
  • 그 말씀의 단맛뿐 아니라 나를 찌르는 쓴맛도 받아들였는가.
  • 읽은 그 말씀으로 하나님께 아뢰었는가.
  • 그 말씀이 나의 판단 하나를 바꾸도록 허락했는가.
  • 그리고 그 말씀을 오늘 한 가지라도 순종했는가.

성경을 몇 장 읽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 안에 머물렀는가이다. 많이 읽는 것은 좋은 일이고 권할 일이다. 그러나 많이 읽는 것과 먹는 것은 같지 않다.

 

 

 

Ⅳ. 잠깐 멈추어 — 같은 단어, 다른 본문

이제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두루마리에서 그리스도께로 건너가려 한다. 그 전에 앞서 예고한 주해적 안전장치를 분명히 세워 두어야 한다. 이 한 절(節)이 이 글의 신뢰성을 지탱한다. 성경에는 "말씀"이라는 단어가 매우 다양한 대상을 가리키며 사용된다.

  • 에스겔 3장의 두루마리는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에게 주신 구체적인 심판의 메시지를 담은 문서다.
  • 예레미야 15:16의 말씀은 예레미야가 받은 예언의 말씀이다.
  •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성자, 곧 인격이시다.
  •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떡은 성육신하여 자기 살을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 요한복음 15:7의 "내 말"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가르침의 말씀이다.
  • 히브리서 5장의 "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복음의 가르침, 특히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성숙과 연결된 표현이다.
  • 요한계시록 10장의 작은 두루마리는 요한이 다시 예언해야 할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문서다.

이것들을 어휘적으로 등치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특히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에스겔이 먹은 두루마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다."

 

요한은 요한복음 6장을 기록하면서 "나는 지금 에스겔 3장의 두루마리를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고 밝히지 않는다. 그러한 직접적 예표 관계를 본문이 주장하지 않는데 우리가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 위에 우리의 도식을 얹는 것이다.

또한 성경의 모든 "먹음"이 같은 신학적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먹는 것과 만나를 먹는 것과 두루마리를 먹는 것과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은 각각 다른 본문의 다른 행위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려는 일은 무엇인가? 이것이다. 각 본문을 먼저 그 문맥에서 읽은 뒤, 정경 전체에서 반복되고 발전하는 하나의 모티프—말씀은 생명을 주는 양식이며, 사람은 그것을 밖에서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안에 받아들여 그것으로 살아간다—가 어떻게 서로 울리며, 마침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안에서 수렴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어휘의 동일시가 아니라 계시의 흐름에 대한 관찰이다. 그리고 이 구별을 지킬 때에만, 다음 장에서 우리가 보게 될 놀라운 연결이 억지스러운 유비가 아니라 성경 자신이 만들어 낸 길로 남게 된다.

 

 

 

Ⅴ. 말씀이 육신이 되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창세기의 첫 문장을 의도적으로 되울리는 이 서두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문장이나 메시지가 아니라 한 분 인격으로 소개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몇 절 뒤, 성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문장 가운데 하나가 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여기서 "거하시매"로 옮겨진 말은 장막을 치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고 함께 계셨던 그 사건이, 이제 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앞서 세운 안전장치를 그대로 유지하자. 에스겔의 두루마리를 곧바로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시의 흐름 전체를 놓고 보면 우리는 하나의 발전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 사람은 그 말씀으로 산다. → 선지자는 그 말씀을 받아먹는다. → 마침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다.

 

이 흐름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시가 궁극적으로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한 인격을 향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명제들을 많이 갖게 되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그분의 아들을 알고 그 아들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는 데 있다. 예수께서 친히 이 점을 지적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

 

이 말씀은 성경 연구를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 연구의 목적지를 밝힌다.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그 읽기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식탁 앞에 앉아 메뉴판만 정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먹으라"는 이 글의 주제는 요한복음 1장에 이르러 결정적인 방향을 얻는다. 우리가 먹어야 할 궁극적인 양식은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증언하는 분, 곧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다. 그리고 바로 그분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시는지 이제 보게 된다.

 

 

 

Ⅵ.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 요한복음 6장 (1)

요한복음 6장은 이 에세이의 심장부다. 여기서 "먹음"은 더 이상 두루마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인격에 관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장은 서두르지 말고 본문의 흐름을 따라 읽어야 한다.

오병이어 — 떡을 먹은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다

장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시작한다.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고, 예수께서는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신다.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찬다. 사람들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6:14).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 예수께서는 홀로 산으로 떠나신다. 밤이 지나고, 무리는 배를 타고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까지 건너온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첫마디가 이 장 전체의 논쟁을 연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이것은 냉정한 진단이다. 그들은 표적을 보았으나 표적이 가리키는 것을 보지 않았다. 표적을 보는 눈은 떡에서 떡 주신 이에게로 옮겨 가지만, 배부름만 기억하는 눈은 계속 떡에 머문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시선을 옮기기 시작하신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여기서 두 종류의 양식이 대비된다. 썩을 양식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그리고 후자는 인자가 "주시는" 것이다. 노동의 대가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 — 요한복음 6:28–29

그런데 무리는 여전히 자기들 식으로 알아듣는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6:28)

 

이 질문은 매우 인간적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는 것이다. 규정을 주면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그들의 질문 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9)

 

그들은 "일들"을 물었고, 주님은 하나의 "일"로 답하신다. 그리고 그 일은 무엇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는 것이다.

 

이 한 절이 요한복음 6장 전체의 해석에 결정적이다. 뒤에 나올 "먹는다"는 격렬한 언어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주님께서 이미 여기서 방향을 잡아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는 길은 무언가를 성취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데 있다.

만나에서 참 떡으로

무리는 이제 표적을 요구하며 만나를 언급한다. 모세가 하늘에서 떡을 주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2–33)

 

여기서 두 가지가 교정된다. 만나를 준 이는 모세가 아니라 아버지시라는 것, 그리고 그 만나조차 "참떡"의 그림자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무리가 반응한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6:34). 사마리아 여인이 "그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라고 했던 것과 같은 반응이다. 그리고 그 요청에 대한 대답으로, 요한복음의 첫 번째 "내가 ~이다" 선언이 터져 나온다.

요한복음 6:35 — 해석의 열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이 한 절을 천천히 보아야 한다. 여기에 두 쌍의 병행이 있다.

내게 오는 자 나를 믿는 자
결코 주리지 아니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적 병행법의 관점에서 보면, 앞 행과 뒤 행은 같은 실재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 곧 그리스도께 오는 것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나란히 놓이고, 주리지 않음목마르지 않음이 나란히 놓인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이 장 후반부에서 예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실 때, 그 "먹음"과 "마심"을 우리가 어떤 범주에서 이해해야 할지를 본문 자체가 여기서 미리 알려 주기 때문이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해결되는 방식이 이미 35절에서 옴과 믿음으로 제시되었다. 즉, "먹음 = 믿음"이라는 독법은 우리가 밖에서 가져와 본문에 끼워 넣은 것이 아니다. 본문 자체가 그 방향으로 강하게 유도한다.[*2]

아버지께서 주시고 이끄시는 자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대목에서 이 "옴"의 근원이 밝혀진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사람이 그리스도께 오는 일에도 선행하는 은혜가 있다. 아버지께서 주시고, 이끄신다. 그리고 그렇게 온 자를 아들은 결코 내쫓지 않으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

 

이 구조는 뒤에서 도르트 신조를 다룰 때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미리 붙들어 둘 것은 이것이다. 이 에세이가 결국 "먹으라, 묵상하라, 자라라"는 권면으로 나아가겠지만, 그 권면의 토대는 언제나 우리가 먼저 붙잡은 무엇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먼저 주시고 이끄신 은혜라는 사실이다.

믿음과 영생

이어서 주님은 믿음과 영생의 관계를 두 번, 거의 같은 말로 못 박으신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47절의 시제에 주목하라. "가지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가졌다"이다. 영생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무엇이 아니라 믿는 자가 지금 가진 실재이며, 동시에 마지막 날의 부활을 향해 열려 있다. 그리고 곧바로 48절이 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8)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요6:49–50)

 

만나는 좋은 것이었으나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다. 만나를 먹은 세대는 광야에 묻혔다. 그러나 참 떡을 먹는 자는 죽지 않는다.

여기까지의 흐름을 정리하면 이렇다.

 

오병이어 → 광야의 만나 →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떡 → 생명의 떡 → 그리스도 자신.

 

표적에서 표적이 가리키는 분에게로, 양식에서 양식이신 분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Ⅶ.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 요한복음 6장 (2)

51절부터 예수의 언어는 갑자기 훨씬 더 거칠고 구체적이 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6:51)

 

여기서 "내 살"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표현은 즉시 유대인들의 격렬한 논쟁을 부른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6:52). 예수께서는 물러서기는커녕 표현을 더 강화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3–55)

 

먼저 51절의 "내 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보라. "세상의 생명을 위한" 살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가리킨다. 그리고 살과 피가 나뉘어 언급되는 것 자체가 죽음의 언어다. 곧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이며, 그 죽음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살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지나치게 성급한 단순화를 피해야 한다. "먹음은 곧 믿음이다"라고 한 단어로 바꿔치기해 버리면, 51–58절의 강렬함이 설명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왜 굳이 "믿으라"는 익숙한 말 대신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정도로 거친 표현을 쓰셨는가?

더 정확한 진술은 이것이다.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 그분과 연합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이 진술은 세 가지를 함께 담는다. 첫째, 그것은 믿음의 행위다(35, 40, 47절이 이를 확정한다). 둘째, 그 믿음의 대상은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셋째, 그 결과는 정보의 획득이 아니라 그분과의 실제적인 연합과 그분의 생명에의 참여다.

 

음식의 비유가 왜 그렇게 적절한지 이제 보인다. 우리가 먹은 음식은 우리 밖에 남아 있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몸의 일부가 되고, 우리를 살게 한다. 그리고 그 음식은 자신을 소모함으로써 우리를 살린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살을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신다고 하실 때, 그 안에 이미 십자가의 자기 내어 주심이 들어 있다.

요한복음 6:56 — 먹음에서 거함으로

그리고 이 단락의 정점에 우리가 이 글에서 여러 번 되돌아올 한 절이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6:56)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 "먹음"의 언어가 "거함"의 언어로 넘어갔다.

 

먹음 → 생명 → 그리스도와의 연합 → 상호 거함.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동이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의 결과가 단지 내가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먹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 소유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내주(內住)의 관계다.

그리고 57절이 그 생명의 근원을 아버지께까지 소급한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7)

 

아들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시는 그 관계가, 신자가 아들로 말미암아 사는 관계의 원형이 된다. 이보다 더 깊은 생명의 연결을 상상하기 어렵다.

요한복음 6:63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이 단락은 제자들의 걸려 넘어짐으로 이어진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60).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이 구절은 성급하게 읽으면 오해되기 쉽다. 마치 예수께서 방금 하신 살과 피에 관한 말씀을 취소하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다.

 

"육은 무익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육체가 무익하다는 뜻이 아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선언한 책이다. 여기서 "육"은 성령을 떠난 인간의 이해와 능력, 곧 사람이 육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들이 서 있던 자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정육점의 논리로 이 말씀을 이해하려 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이다. 이 말씀은 육적인 방식으로 파악될 수 없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다.

 

이 한 절이 이 장 전체의 해석에 성령론적 열쇠를 놓는다. 그리스도를 먹는 일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뒤에서 개혁파 신앙고백들이 성찬을 다룰 때 왜 그토록 성령을 강조하는지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이 장은 많은 제자들이 떠나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열둘에게 물으실 때,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베드로는 여전히 이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았다. 이것이 믿음이다.

 

 

 

Ⅷ. 그렇다면 요한복음 6장은 성찬 본문인가 — 교회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읽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피하지 말아야 할 질문 앞에 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말씀은 성찬을 가리키는가? 이 질문을 피하면 오히려 글이 약해진다. 교회는 이천 년 동안 이 본문을 붙들고 씨름해 왔고, 그 씨름의 역사는 우리에게 대화 상대가 되어 준다.

 

이 대목의 서술은 검증 가능한 수준의 신중한 요약을 원칙으로 삼는다. 각 인물의 논지는 아래 각주에 온라인으로 열람 가능한 1차 자료의 위치와 함께 밝혀 두었으므로, 독자는 직접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표준 비평판(PG·PL·WA 등)과의 대조, 그리스어·라틴어·독일어 원문의 정밀한 확인은 후속 단계의 과제로 남겨 둔다. 확인되지 않은 인용문이나 출처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이 글의 원칙이다.

이레네우스 — 성육신에서 몸의 부활까지

2세기의 이레네우스는 물질과 육체를 경시하는 영지주의를 반박하면서 성찬을 매우 중요하게 사용한다. 그의 논증은 대체로 이런 구조를 가진다. 그리스도께서 참된 육체를 취하셨고, 우리가 그 몸과 피에 참여하며,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 역시 하나님의 구원에 포함되어 마지막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레네우스에게는 성육신 → 성찬 → 몸의 구원 → 마지막 부활이라는 매우 물질적이고 종말론적인 연결이 있다. 이 본문은 요한복음 6장의 직접 주석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의 참여와 마지막 날의 육체적 부활을 함께 묶는다는 점에서 요한복음 6장의 주제와 강하게 공명한다. [*3]

요한 크리소스톰 — 강한 성찬적 독법, 그러나 육적 이해는 거부

4세기의 크리소스톰은 요한복음 강해에서 6장의 살과 피에 관한 말씀을 성찬과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그는 이 신비 앞에서 두려움과 경외를 가지고 나아갈 것을 강력하게 권한다. 그러나 그가 조잡한 육체적 이해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6:63의 "육은 무익하니라"를 다루면서, 문제는 그리스도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육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태도에 있다고 설명한다.

 

즉 크리소스톰에게는 실제적 참여는 있으나 조잡한 육체적 식육은 아니다라는 구별이 있다. 이것을 곧바로 후대 개혁파 성찬론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실제적 참여와 육적 오해를 구별한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대화점을 제공한다. [*4]

아우구스티누스 — 참으로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여기서 우리는 이 에세이의 논지와 매우 가까운 자리에 도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을 강해하면서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를 붙들고 하나의 결정적인 구별을 세운다. 곧 외적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것참으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게 참된 먹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떡과 잔을 입으로 받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먹은 것이 아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말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찬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대단히 성찬적인 신학자다. 그러나 그는 외적 참여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게 참된 식음은 믿음 → 그리스도와의 연합 → 그 안에 거함 → 성령으로 말미암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글에서 따라온 먹음 → 연합 → 거함 → 생명이라는 흐름은 현대의 착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매우 강하게 존재한다. [*5]

루터 — 실재적 임재를 주장하면서도 요한복음 6장은 성찬 본문이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있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했던 루터가, 정작 요한복음 6장에 대해서는 이 본문을 성찬 본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상당히 단호하게 말한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그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그의 근거는 대체로 두 가지다. 요한복음 6장의 시점에서 성찬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문맥 자체가 성육신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먹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 대목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온 유명한 요약을 사용한다. 흔히 "믿으라, 그러면 이미 먹은 것이다"라는 취지로 옮겨지는 표현이다. 곧 요한복음 6장의 먹음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이 루터의 성찬론이 개혁파와 같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루터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와 함께 참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했고, 이 문제로 개혁파와 격렬하게 갈라섰다. 요한복음 6장의 주해에서 그가 우리와 가까운 자리에 서 있다는 것과, 그의 성찬론 전체가 개혁파와 일치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 차이를 지워서는 안 된다. [*6]

칼빈 — 믿음으로 실제로 먹으며, 성찬은 그 실재를 인친다

칼빈은 요한복음 6:56을 주석하면서 이 본문의 직접적 주제를 외적인 성찬 표지 자체에 국한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 실제로 그분께 참여하고 그분과 연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불신자도 외적 표지는 받을 수 있지만, 참된 먹음은 믿음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논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별과 같은 방향에 서 있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처럼 요한복음 6장과 성찬을 완전히 잘라내지도 않는다. 그의 정리는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 요한복음 6장 자체의 직접적 주제 =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 실제로 그분께 참여하고 그분의 생명으로 사는 것.
  • 성찬 = 바로 그 실재를 하나님께서 표(sign)와 인(seal)으로 확증하시는 은혜의 방편. [*7]

그리고 칼빈이 성찬에서 강조하는 것은 성령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안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땅에 있는 신자를 실제로 연결하시고,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한다. 그러므로 개혁파의 입장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도 아니고, "떡을 보며 예수님을 기억한다" 정도의 단순 기념설도 아니다.

 

성령으로, 믿음을 통하여, 참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개혁파의 영적이면서 실제적인 임재다.

이 차이들을 억지로 없애지 말자

여기까지 살펴본 흐름을 정직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전통 요한복음 6장의 "먹고 마심"을 어떻게 읽었는가
이레네우스 성육신·성찬·육체의 구원·마지막 부활을 강하게 연결
크리소스톰 강한 성찬적 독법, 그러나 조잡한 육적 이해는 거부
아우구스티누스 성찬을 존중하되, 참된 먹음을 믿음과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규정
루터 요한복음 6장 자체는 성찬 제정이 아니라 믿음의 먹음
칼빈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실제로 받아 참여·연합함, 성찬은 이를 표하고 인침

이들은 한 목소리가 아니다. 교부들이 모두 같은 견해였던 것처럼 만들어서도 안 되고, 루터와 칼빈의 차이를 지워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 다양성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확신이 있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조잡한 육체적 섭취가 아니며, 동시에 단순한 심리적 회상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과 실제로 연결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 글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정직하겠다. 오늘날 복음주의라 불리는 넓은 진영 안에는 성찬을 순전한 기념으로 이해하는 전통에서부터 매우 강한 성례론을 견지하는 전통까지 상당한 폭이 있다. 이 에세이는 그 폭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 이 글은 성경의 최종 권위와 그리스도 중심성과 개인적 믿음이라는 복음주의적 확신 위에 서되, 성찬과 연합에 관해서는 분명히 개혁파의 고백을 따라 논의를 전개한다.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참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한다는 고전적 개혁파의 이해다. 그 확신이 개혁파의 신앙고백들 속에서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를 이제 보게 된다.

 

 

 

Ⅸ. 개혁파 신앙고백은 이것을 어떻게 고백했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6문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가장 놀라운 문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6문이다. 질문 자체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답은 크게 두 단계로 전개된다.

 

첫째,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둘째,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점점 더 연합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으나, 우리는 그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이며,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이 답을 우리의 논의에 비추어 보라. 여기에는 믿음이 있고, 죄 사함과 영생이 있고, 성령이 있고, 그리스도와의 점점 더 깊어지는 연합이 있다. 우리가 요한복음 6:35, 40, 47, 53–58을 따라가며 확인한 바로 그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 답에 붙어 전해지는 성경 근거를 보면 더 흥미롭다. 널리 사용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판본들은 76문의 근거 본문으로 요한복음 6:35, 40, 47–48, 50–56 같은 구절들과 함께 요한복음 15:1–6을 제시한다.

 

이것이 왜 흥미로운가? 우리가 이 에세이에서 따라가고 있는 연결, 곧

 

요한복음 6장의 "먹음" → 요한복음 15장의 "거함"

 

이 현대인의 사적인 착상이 아니라, 개혁파 교회가 자신의 신앙고백을 성경으로 뒷받침할 때 이미 함께 놓았던 두 본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56의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와 요한복음 15:5의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을 나란히 읽는 것은 개혁파의 연합 신학이 오랫동안 걸어온 길과 같은 방향에 서 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정직하게 밝혀 두는 편이 좋겠다. 요리문답에 붙은 증거 본문(proof-text) 목록은 판본과 시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1563년에도 여러 독일어 인쇄판과 라틴어판이 있었고, 그 초기 인쇄본에는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장·절 번호 체계가 그대로 찍혀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1563년 독일어 초판 여백에 정확히 요 15:1–6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후속 원전 검증에서 확인된 것은, 1563년의 초기 하이델베르크 전통 안에서 이미 요한복음 6장과 요한복음 15장이 76문의 같은 연합·생명 조항을 뒷받침하는 성경 근거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쓰는 "요 15:1–6"이라는 절 번호 표기는 후대 편집에서 명료화된 형태다. 그러므로 이 에세이가 주장하는 것은 표기 형태의 동일성이 아니라, 개혁파 전통이 요한복음 6장의 먹음과 요한복음 15장의 거함을 같은 실재의 두 표현으로 읽어 왔다는 사실이다. [*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장 7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같은 실재를 대단히 정밀한 언어로 진술한다. 29장 7항은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의 모든 유익을 받아 누리는 방식을 이렇게 표현한다.

 

"inwardly by faith, really and indeed" — 내적으로, 믿음으로, 참으로 그리고 실제로.

 

그러나 곧바로 이렇게 제한한다.

 

"not carnally and corporally, but spiritually" — 육체적으로나 신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두 어구를 함께 붙들어야 한다. 여기서 "영적으로"라는 말을 상징적으로 혹은 가상적으로라는 뜻으로 읽으면 이 고백을 정반대로 오해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는 일부러 "참으로 그리고 실제로"라는 표현을 함께 넣었다. 곧 이것은 실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실재의 방식을 규정하는 말이다.

 

성경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대개 "비물질적" 혹은 "허구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께 속한, 성령으로 말미암은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덜 실제적으로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실제로 먹는다는 뜻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 단순 기념설: 아니다.
  • 화체설: 아니다.
  • 육체적 섭취: 아니다.
  • 성령과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께의 실제적 참여: 그렇다.

이 고백은 요한복음 6:63의 "살리는 것은 영이니"와 잘 공명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 참여의 실재성은 유지하면서 그 방식은 육체적이 아니라 영적이라고 규정한다. 다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장 7항이 요한복음 6:63을 직접 해설하거나 그 절을 직접적인 증거 본문으로 삼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9]

도르트 신조

도르트 신조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범위를 밝혀야 한다.

 

도르트 신조는 성찬 교리를 해설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가 아니다. 이 문서는 알미니우스 논쟁 가운데서 선택, 속죄의 성격, 인간의 부패, 회심과 은혜, 성도의 견인 같은 구원론적 쟁점을 다룬다. 그러므로 도르트가 요한복음 6장의 "먹고 마심"을 하이델베르크처럼 직접 해설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도르트를 요한복음 6장의 주석처럼 소개하는 것은 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르트가 고백하는 은혜론과 요한복음 6장의 구조는 서로 깊이 대화한다.

 

도르트는 복음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셋째·넷째 교리에서는 그 믿음 자체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서 믿음을 실제로 일으키신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을 요한복음 6장에 비추어 보라.

 

성부께서 아들에게 사람을 주심(6:37) → 아버지께서 이끄심(6:44) → 그가 그리스도께 옴 → 믿음(6:29, 35, 40, 47) → 그리스도를 먹음, 곧 받아 연합함(6:53–56) → 영생 → 마지막 날의 부활(6:39, 40, 44, 54)

 

요한복음 6:37–44는 그 자체로 은혜의 주도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도르트가 직접 요한복음 6장을 해설하지 않더라도, 두 문서는 같은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덧붙일 것이 하나 더 있다. 도르트는 이 에세이가 다루어 온 주제와 놀랍도록 가까운 두 대목을 품고 있다. 셋째·넷째 교리 17항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중생의 씨앗이자 영혼의 양식으로 삼으셨다고 말하고, 다섯째 교리 14항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선포로 시작하신 은혜의 일을 복음을 듣고 읽는 것과 그것을 묵상하는 것, 그리고 성례의 사용을 통해 계속하시고 완성하신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앞에서 묵상을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믿음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경건의 실천"이라고 규정한 것은, 이 고백의 언어와 정확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10]

여기서 얻는 결론

개혁파 전통에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영적 양분을 섭취하여 자기 힘으로 성장하는 자력적 수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며,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 그 안에서 살게 하시는 은혜의 역사다. 이것을 붙들지 않으면, 이 에세이의 나머지 부분—성장, 분별, 장성, 열매—은 곧바로 종교적 자기계발의 언어로 변질되고 만다.

 

 

 

Ⅹ.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 먹음에서 거함으로

이제 요한복음 6:56에서 요한복음 15장으로 건너가자. 이 이동은 우리가 처음 생각해 낸 길이 아니라, 앞에서 보았듯 개혁파의 고백이 오래 걸어온 길과 같은 방향이다.

포도나무와 가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 비유는 다락방에서, 곧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가르침 가운데 주어졌다.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자주 이스라엘을 가리켰고, 대개 열매 맺지 못한 포도나무를 책망하는 문맥에서 등장했다(사 5장, 렘 2:21, 시 80편).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신다(15:1).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시는 참된 포도나무가 여기 계신다는 선언이다.

 

가지의 자리에서 이 비유를 보라. 가지는 열매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가지가 하는 일은 붙어 있는 것이다. 수액은 나무에서 온다. 가지는 그 수액이 흐르는 통로일 뿐이며, 열매는 그 흐름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말씀은 겸손을 권하는 수사가 아니라 생물학적 사실에 가까운 진술이다.

 

여기서 요한복음 6:56과의 연결이 분명해진다.

요한복음 6:56 요한복음 1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6장이 "먹음"으로 도달한 그 상호 거함을, 15장은 "붙어 있음"의 이미지로 펼쳐 놓는다. 그리고 15장은 6장이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을 하나 더한다. 열매다.

요한복음 15:7 —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런데 불과 두 절 뒤에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5절에서는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셨는데, 7절에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신다.

 

이 두 표현을 성급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다른 진술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안에서 이 둘이 이렇게 가까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말씀은 그분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분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며(6:63), 그 말씀으로 제자들은 이미 깨끗해졌다(15: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다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 잡아 우리를 그분께 붙들어 매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 에세이의 앞부분에서 다룬 묵상이 다시 살아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것이 바로 묵상이 지향하는 자리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있다는 것보다 훨씬 넓다.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욕망과 기도를 형성하며,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을 인간의 공로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묵상이 말씀을 우리 안에 "거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은혜가 흐르는 통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말씀이며,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일하실 때 성도는 믿음으로 그 말씀에 머물고 되새기며 순종한다. 묵상은 그 말씀 앞에 머무는 믿음의 자세이지, 은혜를 생산해 내는 공장이 아니다.

골로새서 3:16

바울에게 가면 거의 같은 표현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두 가지를 눈여겨보자.

 

첫째, "풍성히"라는 부사다. 말씀이 우리 안에 겨우 걸쳐 있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여러 방에, 삶의 여러 구석에 자리 잡는 것을 그린다.

 

둘째, 이 말씀의 내주가 공동체적이라는 사실이다.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결과로 나오는 것은 홀로 하는 명상이 아니라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함께 찬양하는 삶이다. 말씀을 먹는 일은 골방에서 시작되지만 골방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를 세운다.

시편 1편과 요한복음 15장이 다시 만나는 자리

이제 우리가 앞에서 미뤄 두었던 공명을 회수할 수 있다. 시편 1편의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그리고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5장의 제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한다. 그리고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두 본문의 직접적 문맥은 다르다. 시편 1편은 요한복음 15장의 예표가 아니다. 그러나 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두 그림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말씀 안에 머묾 → 생명의 근원에 뿌리내림 → 생명을 공급받음 → 열매를 맺음.

그리고 성경의 흐름 속에서 그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시편 1편에서 그것은 시냇물이었고, 요한복음 15장에서 그것은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묵상하는 사람의 뿌리가 닿아 있는 그 시냇물은, 결국 말씀이신 그리스도께로 흘러가는 물이었다.

 

 

 

ⅩⅠ. 젖에서 단단한 음식으로 — 먹는 사람은 자라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먹기는 먹는데, 무엇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 살아 있는 것은 자란다. 그리고 자라는 것은 먹는 것이 달라진다. 신약은 이 평범한 사실을 신앙의 성장에 적용한다.

베드로전서 2:2 — 사모하는 아기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여기서 두 가지를 보자.

 

첫째, 사모하라는 명령이다. 갓난아기가 젖을 찾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아기는 젖을 두고 논평하지 않는다. 아기는 젖을 원한다. 성경은 성도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기를 기대한다.

 

둘째, 그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사모하는 것의 목적지는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성장이다. 그리고 그 성장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 이 에세이의 주제와 직접 이어지는 표현이 나온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3).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은 이미 맛을 본 사람이다. 시편 34:8의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가 여기서 다시 울린다.

고린도전서 3:1–2 — 자라지 않은 사람들

그러나 성장은 자동적이지 않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안타까움을 담아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들의 미성숙을 어디에서 진단하는가이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이 부족한 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은 은사가 풍성했고 말과 지식이 넘쳤다(고전1:5).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어린아이라고 부른다.

 

왜인가? 바로 다음 절이 말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3:3). 그들의 미성숙은 아는 것의 양이 아니라 삶의 양상에서 드러났다. 이것은 우리가 곧 히브리서에서 만날 논지를 미리 보여 준다.

히브리서 5:11–14 — 지각이 연단된 사람

이제 이 에세이가 특별히 충분히 다루기로 한 본문에 도달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히5:11)

 

저자는 지금 깊은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려는 참인데, 독자들이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문제는 저자의 설명 능력이 아니라 독자들의 상태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라는 표현에 주목하라. 시간이 흘렀다는 것 자체는 성숙의 증거가 아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것과 장성한 것은 같지 않다. 그리고 결정적인 두 절이 이어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이 두 절을 천천히 분해해 보자.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특징은 의의 말씀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익숙하다/경험하다"로 옮겨진 말은 실제로 다루어 보아 손에 익은 상태를 가리킨다. 곧 그는 그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자기 삶에서 다루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이 표현이 이 본문의 핵심이다. 여기서 "연단"이라는 말은 운동선수의 훈련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왔다. 반복된 사용을 통해 몸에 익는 그런 종류의 훈련이다. 곧 장성함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반복된 사용을 통한 훈련의 결과다.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 그리고 그 훈련의 열매는 분별력이다. 옳고 그름이 명확히 라벨 붙어 있는 상황에서 정답을 고르는 능력이 아니라, 라벨이 없는 실제 삶의 국면에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알아보는 감각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리는 성숙의 경로는 이렇다.

 

말씀을 먹음 → 그 말씀을 실제로 사용함 → 지각이 연단됨 → 선악을 분별함 → 장성함.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과 말씀에 의해 형성된 사람

여기서 우리는 이 에세이에서 가장 목회적으로 아픈 지점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과 말씀에 의해 형성된 사람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성경 지식은 귀하다. 이 글은 결코 지식을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 자라는 신앙은 없다. 교리를 배우고, 본문을 정확히 읽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은 성도에게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를 더 묻는다. 그 지식이 나의 생각과 욕망과 선택과 행동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성경을 여러 번 통독하고도 여전히 자기 이익 앞에서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판단한다면, 교리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연약한 형제를 대할 때 냉담하다면, 우리는 아직 히브리서가 말하는 장성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정죄가 아니라 진단이다. 그리고 이 진단이 우리를 절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히브리서 저자는 이 말을 하고 나서 독자들을 포기하지 않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6:1)고 권한다.

 

여기서 앞에서 다룬 묵상이 다시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지각은 어떻게 연단되는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말씀이 우리의 판단에 반복적으로 적용될 때 된다. 오늘 읽은 말씀이 오늘의 한 결정에 닿고, 내일 되새긴 말씀이 내일의 한 관계에 닿고, 그렇게 반복될 때

 

생각 → 욕망 → 선택 → 행동 → 습관 → 분별

 

이 서서히 훈련된다. 그러므로 묵상은 영적 성장을 위한 장식적인 경건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말씀에 의해 우리의 지각 자체가 빚어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통상적인 과정이다.

 

에스겔이 들었던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는 명령이 여기서 다시 울린다. 말씀은 머리에 쌓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가장 안쪽으로 내려가 우리가 판단하고 갈망하는 자리를 채워야 한다.


ⅩⅡ. 목회적 보론 — 로마서 14:2에 대한 주의

여기서 한 가지 주해적 주의를 덧붙여야 한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롬14:2)

 

이 구절은 "먹음"과 "믿음의 강약"을 함께 말하기 때문에, 앞에서 본 젖과 단단한 음식의 논의와 쉽게 연결되어 보인다. 그래서 때때로 이렇게 해석되곤 한다. "채소 = 초보적인 말씀, 모든 음식 = 깊은 신학."

 

그러나 이것은 본문을 벗어난 해석이다. 로마서 14장의 직접적인 문맥은 음식과 절기를 둘러싼 양심의 문제, 곧 유대적 배경과 이방적 배경을 가진 신자들이 한 교회 안에서 부딪히던 실제적인 갈등이다. 여기서 "먹는 것"은 말씀의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식탁 위의 음식이다. 바울의 관심은 어떤 음식이 더 영적인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확신을 가진 형제자매가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가에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말씀의 양식"이라는 우리 논증의 주된 증거 본문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벧전2:2, 고전3:1–2, 히5:11–14가 그 역할을 충분히, 그리고 정당하게 감당한다.

 

다만 이 본문은 다른 방향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준다. 곧 성숙한 자가 연약한 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목회적 물음이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14:3)

 

이것은 히브리서 5장과 나란히 놓일 때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한다. 말씀을 더 깊이 먹고 자란 사람의 표지는 아직 젖을 먹는 형제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지각이 연단되어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은 연약한 자를 짓밟지 않고 사랑으로 품는다. 만일 성경 지식이 자라면서 형제를 업신여기는 마음도 함께 자랐다면, 그것은 장성의 증거가 아니라 히브리서가 말한 미성숙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ⅩⅢ.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방향이 바뀌는 자리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는 먹는 것을 말씀하셨다. 7장에서는 마시는 것을 말씀하신다. 무대는 초막절이다. 후대의 유대 문헌은 이 절기에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 성전 제단 곁에 붓는 의식이 있었다고 전한다.[*11] 요한복음 본문 자체는 이 의식을 명시하지 않지만,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외침이 울려 퍼진 절기의 정황을 짐작하게 해 준다. 바로 그 절기의 마지막 날, 가장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치신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7–38)

 

여기서도 6:35에서 보았던 병행이 반복된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나를 믿는 자는"이 나란히 놓인다. 오는 것, 마시는 것, 믿는 것이 서로를 해석한다. 그리고 요한은 곧바로 이 말씀의 의미를 자기 손으로 밝혀 준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9)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저자의 주석이다. 우리가 추측할 필요가 없다. 요한 자신이 이 생수를 성령과 연결한다. 그리고 그 성령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곧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이후에 부어지실 것이다.

방향이 바뀐다

이제 이 본문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전환을 보라.처음에 우리는 배고픈 자였다. 목마른 자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갔다. 그런데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이제 배부르다"가 아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받은 생명이 밖으로 흘러간다. 그것도 웅덩이가 아니라 강으로 흘러간다. 이것은 이 에세이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전환이다. 말씀을 먹고 그리스도를 마시는 일은 자기 안에 무언가를 저장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은 사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흘러넘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에스겔이 말씀을 먹은 후 "가서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는가? 여기서 그와 같은 구조가 다른 언어로 나타난다. 안으로 받은 것이 밖으로 흐른다.

 

 

 

ⅩⅣ. "열매를 많이 맺나니" — 먹음에서 열매로

이제 다시 요한복음 15장으로 돌아가자.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가지는 열매를 맺기 위해 포도나무에서 독립하여 애쓰지 않는다. 가지는 붙어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그 열매의 최종 목적지는 가지의 평판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다.

이제 우리가 이 글에서 따라온 전체 흐름을 한 줄로 놓아 보자.

 

말씀 → 그리스도 → 믿음 → 연합 → 거함 → 성장 → 분별 → 열매.

 

이 흐름에서 어느 단계도 인간의 자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자. 말씀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은 성자이시며, 믿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고, 연합시키시는 분도 성령이시며, 말씀을 통해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은 종교적 자기계발이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신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열매 맺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열매가 내 능력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절망하거나 자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열매가 붙어 있음에서 온다면,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진다. 붙어 있는 것이다. 말씀 앞에 머물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ⅩⅤ. 다시 "먹어 버리라" — 밧모 섬의 두루마리

이 에세이는 에스겔의 두루마리에서 출발했다. 이제 성경의 거의 마지막 책에서 그 장면이 다시 열린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10:9–10)

 

요한계시록 10장은 에스겔 2–3장을 의도적으로 불러온다. 두루마리가 있고, 먹으라는 명령이 있고, 입에서의 단맛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에스겔에게서 명시되지 않았던 것이 하나 더해진다.

 

배에서의 쓴맛이다.

이것을 "성경에는 은혜로운 말씀도 있고 부담스러운 말씀도 있다" 정도로 평면화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의 문맥에서 이 단맛과 쓴맛은 훨씬 구체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달다. 그 말씀이 어린양의 승리를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을 약속하며,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마침내 왕이심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동시에 쓰다. 같은 계시가 심판을 선포하고, 짐승의 압제 아래 있는 성도들의 인내와 죽음까지 이르는 증언을 말하며, 이 말씀을 전하는 자가 감당해야 할 고난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는 구원과 심판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증언의 고난이 함께 들어 있다. 이 둘을 분리해서 단 것만 취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입맛을 먹는 사람이다. 그리고 요한이 그 두루마리를 삼킨 직후, 말씀이 임한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10:11)

 

에스겔에게 주어진 순서가 여기서 그대로 반복된다.

 

먹으라 → 내면화하라 → 가서 말하라.

 

말씀을 먹은 사람은 침묵하지 않는다. 그가 삼킨 말씀은 그 안에 머물러 있다가 그의 입과 삶을 통해 다시 나온다. 다만 이제 그가 전하는 말씀은 그가 골라잡은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달게 하고 또한 쓰게 한 말씀, 그가 통째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 전체다.

 

 

 

결론 — 이 말씀을 먹으라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읽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먹으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이제 대답할 수 있다. 읽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읽기가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 있기를 원하신다. 말씀은 우리를 통과해 지나가는 정보가 아니라 우리를 채우고 우리로 살게 하는 양식이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걸어 보니, 그 양식이 마침내 한 인격으로 우리 앞에 서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그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다. 선지자는 그 말씀을 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분께서 갈릴리에서 떡을 떼어 주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그분께서 자기 살을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주셨고, 자신을 먹는 자가 자기 안에 거하고 자신도 그 안에 거한다고 하셨다. 그분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목마른 자의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모든 권면보다 먼저 놓여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다. 성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성령께서 믿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신다.

 

이 은혜가 먼저다.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가 이 모든 것의 토대다. 이것을 놓치면 "말씀을 먹으라"는 권면은 곧바로 또 하나의 종교적 과제가 되고, 우리는 성경 앞에서 성과를 계산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 은혜 위에서, 이제 권면이 온다.

 

말씀을 펼치라. 읽으라. 그러나 읽고 지나가지 말라. 머물러라. 되새겨라. 맛보라. 단맛도, 쓴맛도. 그 말씀으로 기도하라. 그 말씀이 너를 판단하게 하라. 그 말씀에 순종하라. 그 말씀이 네 안에 거하게 하라.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말라. 성령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거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젖을 사모하는 갓난아기처럼 말씀을 갈망하되, 영원히 젖에만 머물지 말라. 단단한 음식을 먹으며 지각을 사용하고, 말씀에 의해 연단되어 선악을 분별하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 가라. 그리고 자라난 그 자리에서 아직 젖을 먹는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고 사랑으로 품으라. 그러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열매를 맺을 것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듯이. 그 열매는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라신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그 열매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우리 안에 갇혀 있지 않을 것이다. 생수의 강처럼 흘러나갈 것이다.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요한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갖다 먹어 버리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을 먹은 사람은 다시 말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 한 문장을 남겨 두자.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다.

 

그 말씀에 붙들린 사람은 마침내 그 말씀으로 살고, 그 말씀에 의해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열매 맺으며, 받은 생명을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고 증언한다.

 

이 말씀을 먹으라.

 

 

 

각주

각주에 관한 일러두기. 아래 각주는 교부와 종교개혁자, 신앙고백 문서의 논지를 확인할 수 있는 1차 자료의 위치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본문의 서술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요약이며, 각주 안의 짧은 원어·영문 어구만이 해당 문헌에서 실제로 확인한 표현이다. 온라인 판본은 대체로 19세기 표준 영역(ANF·NPNF·CTS 등)에 기초하므로, 표준 비평판 및 원어 본문과의 대조는 후속 단계의 과제로 남겨 둔다. 판본 문제가 실제로 논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지점은 각주 안에 따로 표시했다.

 

  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8–90문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유익을 전달하시는 통상적 방편을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로 규정하고, 말씀이 유효하게 되도록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읽고 들으며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 마음에 간직하고 삶에서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본문은 묵상 자체를 말씀·성례와 병렬하는 독립적 은혜의 방편으로 부르지 않고,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경건의 실천으로 구별한다. 다만 이 구별이 묵상을 부차적인 것으로 낮추는 것은 아니다. 도르트 신조 다섯째 교리 14항은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일을 계속하시는 방식 가운데 복음을 듣고 읽는 것과 나란히 묵상을 명시적으로 포함시킨다(아래 도르트 신조 각주 참조).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7), qq. 88–90, Westminster Standards, https://westminsterstandards.org/westminster-shorter-catechism/.
  2. 요한복음 6:35의 병행 구조를 "오는 것 = 믿는 것"으로 읽는 것은 고대의 독법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절을 강해하면서 "내게 오는 자"가 "나를 믿는 자"와 같은 것을 말하며 "주리지 아니하리라"가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와 같은 것을 뜻한다고 명시한다. 같은 논고에서 그는 요한복음 6:29을 다루며 "이빨과 위장을 준비할 것이 무엇인가? 믿으라, 그러면 이미 먹은 것이다"라고 말한다(라틴어 전통에서 "crede, et manducasti"로 널리 인용되는 대목이다).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25.12, 25.14,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7,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8),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5.htm.
  3. Irenaeus, Against Heresies 5.2.2–3. 이레네우스는 육체의 구원을 부정하는 자들을 반박하면서, 만일 육체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주께서 자기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도 아니고 성찬의 잔이 그의 피에 참여함도 아니라고 논증한다. 이어 떡과 잔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찬이 되고, 바로 그것으로 자라고 지탱되는 우리의 육체가 때가 이르러 부활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곧 참된 성육신 → 참된 피와 몸 → 성찬 → 육체의 부활이 하나의 연속선에 놓인다.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 이 대목의 그리스어 원문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라틴어 역본으로 전한다. 라틴어 본문 대조는 W. Wigan Harvey, ed., Sancti Irenaei Episcopi Lugdunensis 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 vol. 2 (Cambridge: Typis Academicis, 1857)를 후속 단계에서 사용한다.
  4. John Chrysostom,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요 6:53–58 주해. 크리소스톰은 이 대목을 성찬의 "신비"(the Mysteries)와 직접 연결하여 매우 강한 성찬적 독법을 전개한다. 동시에 그는 6:63의 "육은 무익하니라"를 그리스도의 육체가 무익하다는 뜻으로 읽지 않고, 그 말씀을 육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태도에 대한 책망으로 풀이한다. John Chrysostom,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trans. Charles Marriot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14,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7.htm.
  5.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26.12, 26.18.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6:56을 강해하면서,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거하시게 하는 것이라고 명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지 않으시는 사람은, 몸과 피의 성례를 이로 씹는다 하더라도 참으로 그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같은 논고 12절에서는 참된 먹음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먹는 것, 이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 것"으로 표현한다. Augustine, "Tractate 26 (John 6:41–59)," trans.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7, ed.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8),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6.htm. 이어지는 27논고(요 6:60–72)도 함께 볼 것: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7.htm. 라틴어 본문은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CXXIV (PL 35)에 수록되어 있으며, 원문 대조는 후속 단계로 남겨 둔다.
  6. Martin Luther,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520), "The Sacrament of the Altar," §2.3. 루터는 요한복음 6장이 성찬 논의에서 "entirely excluded"되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그때는 아직 성찬이 제정되지 않았다. 둘째, 문맥 전체가 "육신이 되신 말씀에 대한 믿음"(faith in the Word made flesh)을 말하고 있으며, 6:63의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가 이것이 영적인 먹음임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여 "믿으라, 그러면 먹은 것이다"라고 요약한다(같은 인용이 §2.58에 다시 나온다). 영역: Martin Luther,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trans. Albert T. W. Steinhaeuser, ed.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라틴어 원전은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1520), WA 6:497–573. 이 문헌에서 루터가 신명기 8:3과 마태복음 4:4을 인용하여 믿음이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양육된다고 말하는 대목(§2.59)은, 이 에세이 Ⅰ장의 논지와도 공명한다.
  7.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요 6:54 및 6:56 주해. 칼빈은 요한복음 6장 전체를 성찬에 적용하는 해석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만일 주의 상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이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생명을 얻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이 자기 정죄에 이르도록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지속적이고 통상적인 방식"**이라고 그는 결론짓는다. 6:56 주해에서는 "내 안에 거하고"를 그리스도와 우리의 "bond of union"으로 풀이하며, 믿음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길을 상상하는 것은 헛되다고 말한다. 믿음이야말로 "영혼의 입이며 위장"이기 때문이다.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trans.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요 6:54, 56 주해,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4.xii.ix.html. 판본 주의: 칼빈이 이 설교의 내용을 성찬이 "인(seal)이요 확증(confirmation)"으로 확인한다고 말하는 문장은 CTS 영역본에서 본문이 아니라 역주(각주 163)로 실려 있으며, 프랑스어판 계열의 추가 문장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문에 곧바로 나오는 문장처럼 인용해서는 안 되며, 칼빈의 성찬론 전반은 Institutes 4.17을 함께 대조해야 한다.
  8. Heidelberg Catechism, Q. 76. 76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을, 첫째로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으로,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도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거룩한 몸과 "more and more" 연합되어 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으나 우리는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이며,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증거 본문의 위치에 관하여: 널리 사용되는 온라인 판본에서 76문의 증거 본문은 요 6:35, 6:40, 6:50–54, 6:55–56, 6:56–58과 고전 12:13, 고전 6:15–17, 엡 5:29–30, 요일 4:13 등으로 제시되며, 요 15:1–6은 마지막 조항—곧 "한 성령으로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의 증거 본문으로 요 6:56–58과 나란히 붙어 있다. 즉 요 6과 요 15가 같은 조항 아래 함께 놓인다. 후속 원전 검증에서 1563년 제3판(Catechismus Oder Christlicher Vnderricht…, Heidelberg: Johann Mayer, 1563; VD16 P 2166)의 디지털 영인본을 확인한 결과, 1563년에는 복수의 독일어 인쇄판과 라틴어판이 존재하며 초기 인쇄본에 현대식 장·절 번호 체계가 그대로 적용되어 있지 않다는 점, 그럼에도 초기 하이델베르크 전통 안에서 요한복음 6장과 요한복음 15장이 76문의 같은 조항을 뒷받침하는 성경 근거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1563년 초판 여백에 요 15:1–6이라는 표기가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지만, 두 본문의 연결 자체는 초기 전통에 속한다. Heidelberg Catechism (1563), Q. 76, Catechesis, https://www.catechesis.app/heidelberg/76/.
  9.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 29.7. 핵심 문구는 "inwardly by faith, really and indeed, yet not carnally and corporally but spiritually"이다. 곧 합당하게 참여하는 자는 육체적·신체적 방식이 아니라 영적으로, 그러나 참으로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의 모든 유익을 받아 먹는다. 같은 내용을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0문이 다시 풀어 설명하는데,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수찬자의 믿음에 영적으로 현존하며 그가 참으로 실제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고 진술한다.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chap. 29, New Life Presbyterian Church (PCA), https://www.newlifepca.com/resources/the-westminster-confession-of-faith/;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7), Q. 17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a/anonymous/westminster2/cache/westminster2.pdf.
  10. Canons of Dort (1618–19), 첫째 교리 4–5항; 셋째·넷째 교리 14항, 17항; 다섯째 교리 14항. 도르트는 복음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받아들여 구주 예수를 붙드는 자가 진노에서 건짐을 받고 영생의 선물을 받는다고 고백하며(I.4), 그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어서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믿으려는 의지와 믿음 자체를 일으키신다고 말한다(III/IV.14). 그리고 이 에세이의 주제와 직접 맞닿는 두 대목이 있다. III/IV.17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중생의 씨앗이자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다고 말하고, V.14는 하나님께서 복음의 선포로 시작하신 일을 복음을 듣고 읽는 것, 그것을 묵상하는 것, 복음의 권면과 경고와 약속, 그리고 성례의 사용을 통하여 계속하시고 완성하신다고 고백한다. 다만 도르트는 성찬 교리를 해설하기 위한 문서가 아니므로, 이를 요한복음 6장에 대한 직접적 주석처럼 소개해서는 안 된다.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The Canons of Dort,"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canons-dort?language=en. (인용한 영역본은 2011년 승인 번역본이며 저작권이 있으므로, 본문에서는 직접 인용 대신 요약으로 다루었다.)
  11. Mishnah Sukkah 4:9는 초막절 성전의 물 붓기 의식을 설명하면서, 금 항아리에 실로암의 물을 길어 성전으로 가지고 올라와 제단 곁에 붓는 절차를 전한다. 이 자료는 요한복음 7:37–39의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미쉬나는 신약보다 후대에 편집된 문헌이므로 예수 시대의 의식 세부를 그대로 입증하는 자료로 과도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요한복음 본문 자체는 이 의식을 명시하지 않는다. 요한이 명시적으로 밝히는 해석은 오직 하나, 곧 이 말씀이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킨다는 것이다(요 7:39). Mishnah Sukkah 4:9, Sefaria, https://www.sefaria.org/Mishnah_Sukkah.4.9.
 

 

 

 

참고문헌

1차 자료 — 교부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Translated by John Gibb.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7,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8.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htm.

———.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CXXIV. Patrologia Latina 35. Edited by J.-P. Migne. Paris, 1841. [후속 단계 대조 예정]

Chrysostom, John. "Homily 47 on the Gospel of John." Translated by Charles Marriot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4,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9.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7.htm.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V, Chapter 2." Translated by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5. New Advent.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502.htm.

———. Sancti Irenaei Episcopi Lugdunensis 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 Vol. 2. Edited by W. Wigan Harvey. Cambridge: Typis Academicis, 1857. [라틴어 본문 대조 예정]

1차 자료 — 종교개혁

Calvin, Joh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Translated by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4.xii.ix.html.

———.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ook 4, chap. 17. [성찬론 전반 대조 예정]

Luther, Martin. A Prelude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520. Translated by Albert T. W. Steinhaeuser. Edited by Robert E. Smith. Project Wittenberg. https://www.projectwittenberg.org/etext/luther/babylonian/babylonian.htm.

———.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1520. In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6, 497–573. Weimar: Hermann Böhlau, 1888. [원문 대조 예정]

신앙고백 문서

Canons of Dort. 1618–19.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https://www.crcna.org/welcome/beliefs/confessions/canons-dort?language=en.

Heidelberg Catechism. 1563. Question 76. Catechesis. https://www.catechesis.app/heidelberg/76/.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 Chapter 29. New Life Presbyterian Church (PCA). https://www.newlifepca.com/resources/the-westminster-confession-of-faith/.

———.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7. Question 170.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l/a/anonymous/westminster2/cache/westminster2.pdf.

———.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7. Questions 88–90. Westminster Standards. https://westminsterstandards.org/westminster-shorter-catechism/.

유대 문헌

Mishnah Sukkah. 4:9. Sefaria. https://www.sefaria.org/Mishnah_Sukkah.4.9.

 

 

후속 검증 과제

※ 아래 목록은 본편 작성 당시에 남겨 둔 연구 계획이다. 이후 후속 원전 검증(「믿으라, 그러면 먹었다」)에서 대부분 확인되었으며, 현재 문헌학적 최종 확인으로 남은 것은 SC 153(이레네우스)과 CCSL 36(아우구스티누스) 두 비평판의 직접 열람이다. 목록 자체는 연구 과정의 기록으로 그대로 둔다.

  1. 교부 문헌: PG·PL 대조 및 그리스어·라틴어 원문 확인 (이레네우스 → 크리소스톰 → 아우구스티누스 순).
  2. 루터: WA 6:497–573 라틴어 원문과 §2.3 대조.
  3. 칼빈: CTS 역본 역주 163의 프랑스어판 계열 문제 확인, Institutes 4.17과의 정합성 검토.
  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년 최초 인쇄본 및 주요 판본의 증거 본문 목록 형성사 확인.
  5. 웨스트민스터: 1646년 원판 및 대·소요리문답 원문 대조.
  6. 각주 형식: Chicago full note와 참고문헌 표기의 완전 통일, 최초 인용/재인용(short form) 구분.

 

 

 

 

 

AI 활용 안내 — 이 글의 문제의식과 중심 논지, 신학적 판단, 자료의 채택과 최종 문장은 필자에게 있다. 작성 과정에서는 생성형 AI를 연구와 편집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였다.
ChatGPT 5.6은 사전 조사와 쟁점의 구조화에, Claude Fable/Opus 5은 초고의 표현 및 참고문헌·각주 형식의 정돈에, Perplexity Pro는 관련 논문과 온라인 원문 자료의 탐색에 사용하였다.
AI가 제시한 내용은 그 자체를 권위 있는 출처로 삼지 않았으며, 접근 가능한 성경 원문, 교부 문헌, 신경과 공의회 문서, 공식 교리서 및 개혁파 신앙고백 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다시 대조하였다. 자료의 해석과 남아 있을 수 있는 오류를 포함한 글의 최종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 부활의 목격자들은 왜 오순절까지 기다려야 했는가

 

 

 

 

서론: 성경이 숨기지 않는 이상한 장면들

신약성경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부활절 아침"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안식 후 첫날 새벽,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천사에게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28:6)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첫 반응은 찬양이 아니었다. 마가는 여인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16:8)고 기록한다. 누가에 따르면 여인들이 마침내 사도들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렸을 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눅24:11)

 

부활의 첫 증언은 불신에 부딪혔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마을로 향한다. 놀랍게도 이들은 정보가 부족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알았고, 빈 무덤 소식을 알았고, 천사들이 "그가 살아나셨다"고 말했다는 여인들의 증언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눅24:22–24). 그런데도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눅24:21)

 

"바랐노라." 과거형이다. 그 소망은 십자가와 함께 끝난 것으로 그들은 여기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계속된다. 갈릴리 산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뵌 제자들에 대해 마태는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28:17)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눈앞에 서 계신데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두 번이나 만난 제자들이(요21:14)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장면을 본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다른 여섯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요21:3)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이상한 명령이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곧바로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눅24:49)

 

가라. 그러나 아직 가지 말라. 기다리라.

 

왜 그랬는가?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목격하는 것만으로는 왜 충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여기서 더 어려운 질문이 하나 겹친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왜 다시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필요했는가? 성령을 두 번 받았다는 말인가? 요한복음 20장의 성령과 사도행전 2장의 성령은 다른 성령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성경 퀴즈가 아니다. 이 질문을 따라가면 우리는 부활, 새 창조, 사도직, 승천, 성령의 파송, 그리고 교회의 세계 선교라는 신약 전체의 거대한 구조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자신의 길을 아직 찾지 못해 조급한 사람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삶이 작게만 보이는 사람에게 성경이 건네는 놀랍도록 실제적인 위로와 권면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글은 그 길을 복음서의 서사에서 시작하여, 초대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크리소스톰, 종교개혁자 칼빈과 루터,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의 투레틴과 오웬을 거쳐, 마지막으로 히브리어와 헬라어 본문 자체의 증거까지 확인하며 걸어가려 한다. 길지만, 서두르지 않고 가려 한다. 성경이 이 장면들을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기록한 데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 십자가에서 오순절까지: 복음서가 보여주는 제자들의 실제 모습

흩어진 사람들과 빈 무덤

먼저 복음서의 서사를 있는 그대로 따라가 보자.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마 26:56). 베드로는 세 번 부인했다. 십자가 아래에 남은 것은 소수의 여인들과 사랑하시는 제자뿐이었다. 그 후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닫아 걸고 모여 있었다(요20:19). 안식 후 첫날 새벽,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 천사가 말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28:5–6)

 

부활의 첫 소식은 이렇게 하늘로부터 왔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그 소식을 들은 인간의 반응은 두려움과 불신이었다. 마가는 두려움을(막16:8), 누가는 불신을(눅24:11) 기록한다. 성경은 제자들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크리소스톰이 주목했듯이, 복음서의 증언이 지닌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영웅적인 신앙인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흩어지고, 의심한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1]

엠마오 길: 정보는 있었으나 깨달음이 없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눅24:13–35)는 이 문제의 핵심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들의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눅24:19)이셨음을 알았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알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렇게까지 말한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눅24:22–24)

 

빈 무덤도 알았고, 천사들의 증언도 알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었고, 그들의 소망은 과거형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24:21). 사건에 대한 정보 자체가 그 사건의 의미를 자동으로 깨닫게 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곧바로 "내가 바로 그 예수다" 하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셨다. 그들의 눈은 가리어져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6). 예수께서 먼저 하신 일은 이것이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5–27)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첫 사역은 성경 강해였다. 그리고 떡을 떼실 때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분인 줄 알아보았고,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24:32)

 

그날 저녁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에게도 예수께서는 같은 방식으로 행하셨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24:45)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이 믿음을 자동으로 낳지 않았다. 사건은 말씀을 통해 해석되어야 했고, 마음은 열려야 했다. 이 관찰을 마음에 담아 두자. 뒤에서 이 구조가 이 글 전체의 뼈대가 될 것이다.

갈릴리의 고기잡이: 배교인가, 기다림인가

요한복음 21장의 고기잡이 장면은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 장면을 "제자들이 사도직을 완전히 버리고 옛 생업으로 배교하듯 돌아간 사건"으로 극적으로 읽는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는다.

 

우선 이 시점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두 번이나 만난 뒤다(요20:19–29; 21:14). 그리고 예수께서는 친히 갈릴리에서 그들을 만나겠다고 미리 말씀하셨다(마28:7, 10). 그러니 제자들이 갈릴리에 있었던 것 자체는 불순종이 아니라 오히려 지시를 따른 것일 수 있다. 갈릴리에서 예수를 기다리는 동안 생업으로 고기를 잡은 것으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성경 해석자 중 한 사람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로 이렇게 읽었다. 그는 요한복음 강해에서 이 고기잡이를 사도직의 포기나 타락으로 보지 않았다. 정당한 생업으로 돌아간 것이며, 사도들도 필요하다면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훗날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천막 만드는 일로 자비량했던 것(행18:3)과도 통하는 관점이다.[^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장면이 아무 신학적 의미 없는 일상 스케치인 것도 아니다. 요한이 이 장면을 복음서의 마지막 장에 배치한 효과는 강렬하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21:3)

 

그리스도 없이 밤새 수고함 — 아무것도 잡지 못함. 그리고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서 말씀하신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말씀대로 던지자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21:6).

 

그리스도의 말씀 — 충만한 그물.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기적 자체를 교회의 사도적 사역에 대한 상징으로도 읽었다. 그리스도의 지시 없이는 빈 그물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를 때 그물이 충만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예수께서는 숯불에 조반을 차려 주시고,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시며 세 번 사명을 회복시키신다.

"내 양을 먹이라" (요21:17)

 

그러므로 요한복음 21장이 보여주는 것은 제자들의 배교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만은 분명히 보여준다. 부활을 목격했다는 사실 자체가 제자들을 즉시 완성된 사도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이나 만난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는 빈 그물 앞에 서 있었고, 여전히 회복과 파송과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가라, 그러나 기다리라"

이제 이 서사의 마지막 긴장에 도달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 산에서 대위임령을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19–20)

 

그런데 누가는 같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렇게도 명령하셨다고 기록한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눅24:49)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서 이 명령이 다시 확인된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4, 8)

 

가라. 그러나 아직 가지 말라.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기다리라.

 

제자들은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고, 성경을 배웠고, 사명을 받았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아직 가지 마라, 기다려라" 하셨다. 이것은 부활의 목격과 사명의 수령만으로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무엇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 오순절이 온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하늘로부터 임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한다(행2:2–3).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4)

 

그리고 그 순간부터, 몇 주 전만 해도 한 여종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쳤던 베드로가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일어나 소리를 높인다.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도시의 사람들 앞에서, 그는 담대하게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한다(행2:14–36). 그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증인들이 되었는가? 교부들에게 이 변화의 원인은 "제자들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가 아니었다. 성령의 역사였다.

 

전체 흐름을 한눈에 정리하면 이렇다. 십자가 — 두려움과 흩어짐. 빈 무덤 — 놀람과 불신. 천사의 증언 — 들었으나 충분히 이해하지 못함. 엠마오 — 사실은 알았으나 의미를 알지 못함. 성경 해석 — 마음이 뜨거워짐. 부활 현현 — 보고 경배하나 일부는 여전히 의심함. 갈릴리 — 다시 그물을 던짐. 사명 부여 — "내 양을 먹이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승천 전 — 그래도 "기다리라". 오순절 — 성령의 권능. 그 이후 — 공개적인 복음 선포.

 

이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결론이 떠오른다. 부활의 객관적 사실성만으로 사도들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역사적 부활 없이 성령의 주관적 체험만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 사건을 해석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닫고 증언하게 하시는 성령 — 이 셋이 함께 움직였다.

 

 

 

2. 사건 — 말씀 — 성령: 종교개혁이 발견한 삼중 구조

이 지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의 통찰이 빛난다.

 

마르틴 루터는 부활 사건에 대한 지식과 구원하는 믿음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살아나셨다"는 복음을 믿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도 부활에 관한 파수꾼들의 보고를 들었지만(마28:11–15), 그 정보는 그들을 믿음으로 이끌지 않았고 오히려 은폐 공작으로 이끌었다. 그러므로 빈 무덤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이상한 예외가 아니다. 외적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선포하고 해석하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믿게 하시는 성령이 있다. 이것을 종교개혁의 언어로 다듬으면 아름다운 삼중 구조가 된다.

 

사건(Res) — 말씀(Verbum) — 성령(Spiritus)[^3]

칼빈의 엠마오 해석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칼빈이 보기에 엠마오 제자들의 문제는 단순히 "부활을 못 믿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는 말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기대가 담겨 있었는데, 그 기대는 고난받는 메시아를 알지 못하는 기대였다. 그 잘못된 기대가 십자가 앞에서 무너진 것이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먼저 보여주심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시고, 먼저 성경을 해석해 주셨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26). 개혁주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장면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가르치시는 방법이 성경이다. 부활하신 주님조차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때 기록된 말씀을 사용하셨다면, 오늘의 교회가 말씀 외의 다른 길로 그리스도를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할 이유가 없다.[^4]

 

다만 이 삼중 구조를 기계적인 공식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사건과 말씀과 성령은 조립 순서가 정해진 부품들이 아니다. 엠마오에서는 말씀의 해석이 먼저 오고 알아봄이 뒤따랐지만, 예루살렘 다락방에서는 주님을 뵌 기쁨 가운데 말씀의 깨달음이 주어졌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 말씀과 함께, 자유롭게 일하신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공식이 아니라 방향이다. 하나님의 구속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으로 깨달아진다. 이 방향이 이제 우리를 이 글의 중심 난제로 데려간다.

 

 

 

3. 중심 난제: 요한복음 20:22와 사도행전 2장

부활하신 날 저녁, 문들이 닫힌 다락방에 예수께서 오셔서 서시며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고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0:21–23)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숨을 내쉬시며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오십 일 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무엇인가?

여기서 흔히 두 가지 잘못된 단순화가 등장한다.

 

첫째는 이것이다. "요한복음 20:22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중생했다(거듭났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두 번째 성령을 받았다." 마치 성령을 1차와 2차로 나누어 받는 것처럼 읽는 방식이다.

 

둘째는 그 반대다. "요한복음 20:22는 실제 수여가 아니라 오순절에 대한 예고편, 빈 상징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을 사실상 무효로 만드는 방식이다. 이 두 단순화를 모두 피하려면, 먼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제자들은 요한복음 20장 이전에 성령이 없었는가?

그럴 수가 없다.

 

구약을 보라. 성령께서는 창조 때부터 일하셨고(창1:2), 선지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했다. 다윗은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23:2)라고 고백했고, 베드로는 훗날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고 확언한다.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눅1:15).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기뻐한 것 자체가 성령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했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7)

 

이 고백은 혈육에게서, 곧 인간의 자연적 통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원리는 분명하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3)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 안에 성령의 은혜가 이미 역사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예수께서는 열둘을 파송하실 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20)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20:22의 "성령을 받으라"는 성령이 전혀 없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처음 생긴 순간일 수 없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도 "성령이 처음으로 지상에 오신 날"일 수 없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일어난 것인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교회의 위대한 교사들이 무엇이라 답했는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하여 크리소스톰, 칼빈, 그리고 개혁파 정통주의까지 차례로 들어 보자. 미리 결론의 방향만 말해 두면 이렇다. 요한복음 20장과 사도행전 2장의 관계는 "성령 없음 → 성령 있음"의 두 단계가 아니다. 이미 역사하시던 동일한 성령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주어지고(요20), 승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새 언약의 충만함으로 온 교회에 공적으로 부어지는(행2) 구속사적 확대다.

 

 

 

4. 아우구스티누스: "가지고 있었고,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해석자다.

 

그는 우선 제자들이 요한복음 20장 이전에도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선지자들도 성령을 받았고, 제자들도 이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언뜻 모순처럼 들리는 표현을 사용한다. 제자들은 성령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그들은 이미 성령을 받아 누리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그 방식과 그 충만함으로는 아직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제자들이 이전에는 더 제한된 방식으로 가지고 있던 성령을 이후 더 풍성하게 받게 되었다고 설명한다.[^5]

 

그렇다면 요한복음 20:22 자체는 어떻게 이해했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장면을 빈 상징이나 장래 일에 대한 단순한 예고로 처리하지 않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때 실제로 성령을 주셨다고 보았다. 그리고 오순절에도 동일한 성령을 보내셨다고 보았다. 그는 도나투스파와 논쟁하는 가운데 이 점을 날카롭게 밀어붙인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주신 성령과 오순절에 보내신 성령이 다르다면, 성령이 둘이란 말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숨을 내쉬어 주신 성령과 하늘로부터 부으신 성령은 동일한 한 성령이시다.[^6]

 

그렇다면 왜 두 번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열쇠는 주어지는 방식(modus)의 차이다. 성령은 한 분이시지만, 그 한 성령이 주어지는 방식과 충만함과 목적은 구속의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달라진다. 구약에도 성령이 계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화(榮化) 이후에는 이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의 성령 수여가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특히 오순절의 만국 방언에 주목했다. 각 사람 위에 임한 성령으로 인해 온갖 민족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이 선포된 것은, 장차 교회가 모든 민족과 모든 언어로 확장될 것을 보여주는 표지라는 것이다.[^7]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은 이렇게 정리된다. 요한복음 20장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사건이고, 사도행전 2장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편적 교회에 성령을 부으신 사건이다. 동일한 성령, 다른 방식, 확대되는 범위.

창세기 2:7과 요한복음 20:22 — 첫 창조와 새 창조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대목이 하나 더 있다. 그는 요한복음 20:22의 "숨을 내쉬며"를 창세기 2:7과 연결해 읽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첫 창조에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지으신 사람에게 자신의 숨을 불어넣으셨고, 사람은 산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부활의 날 저녁,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주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장면의 연결을 명시적으로 읽어냈다. 인간에게 처음 생명을 주셨던 하나님의 호흡이,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호흡 속에서 다시 울려퍼진다. 첫 창조의 하나님이 새 창조를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8]

 

뒤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 본문을 직접 확인하며 보겠지만, 미리 말해 두자면 이 연결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경건한 상상이 아니라 본문의 언어 자체에 새겨져 있는 연결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주신다 — 그리고 Filioque 문제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이 장면에 삼위일체적 의미도 있었다. 요한복음 20:22에서 성령을 주시는 분은 성부가 아니라 성자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신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것은 성령께서 단지 성부의 영이실 뿐 아니라 성자의 영이기도 하시다는 표지였다. 그는 이 본문을, 성령께서 성부에게서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출하신다는 서방교회의 가르침 — 후대에 '필리오케'(Filioque, "그리고 아들에게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교리 — 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본문으로 사용했다.[^9]

 

이 논증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신중한 구별이 필요한 문제인데, 이는 개혁파 정통주의를 다룰 때 '영원한 발출'과 '구속사적 파송'의 구별과 함께 다시 살펴보겠다. 여기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주장과 우리의 신학적 평가를 구별해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실제로 주장한 것은, 요 20:22가 성자께서 성령을 주시는 분임을 보여주며 이것이 성령과 성자의 깊은 관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본문 하나가 필리오케 교리 전체를 얼마나 증명하는가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한 문제다.

 

어쨌든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이렇게 하나의 장대한 구조가 형성된다.

 

창조 —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니 아담이 살아남. 새 창조 — 부활하신 성자께서 숨을 내쉬시니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 오순절 — 승천하신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시니 만국의 교회가 세워짐.

 

 

 

5. 크리소스톰: 준비인가, 실제 수여인가 — 열려 있는 해석

요한의 크리소스톰(약 349–407), '황금의 입'이라 불린 콘스탄티노플의 설교자는 같은 본문 앞에서 조금 다른 결을 보여준다. 그의 정직함이 오히려 인상적인 대목이다.

 

크리소스톰은 요한복음 강해에서 요 20:22에 대해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을 나란히 제시한다.[^10]

 

첫 번째 가능성: 예수의 이 호흡은 제자들이 장차 오순절에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 행위다. 즉 성령의 충만한 강림은 오순절에 있고, 요 20:22는 그것을 향한 준비와 합당하게 하심이다.

 

두 번째 가능성: 그때 제자들은 실제로 어떤 성령의 은혜와 권능을 받았다. 다만 그것은 오순절에 받게 될 충만한 능력과는 구별되는 특정한 은혜였다.

 

그리고 크리소스톰은 두 번째 해석도 틀리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두 번째 해석에서 주목한 것은 바로 다음 절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요20:23)

 

요한복음 20장에서 성령의 수여는 죄 사함의 선포와 직결되어 있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을 사도들에게 주어진 죄 사함의 사도적 권위, 곧 복음의 직무와 연결된 특정한 은혜의 수여로 읽을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오순절에는 세계적 증언과 이적을 행하기 위한 훨씬 강력한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구조를 단순화하면 이렇다. 요 20:22 — 사도직을 위한 준비 혹은 특별한 은사, 특히 죄 사함의 복음적 직무. 행 2 — 충만한 능력, 기적과 담대한 증언, 세계 선교.

 

흥미롭게도 크리소스톰은 사도행전 강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 20:22를 앞으로 받을 은혜를 감당하도록 준비시키는 사건으로, 또는 미래에 확실히 이루어질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표현한 말씀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긴다.[^11]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 교부 시대부터 이미 이 본문의 해석은 한 가지로 완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실제 수여 쪽을 분명히 했고, 크리소스톰은 준비와 실제 수여 양쪽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두되 죄 사함의 직무와의 연결을 강조했다. 우리는 크리소스톰을 어느 한 해석의 독단적 대변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가 남겨 둔 해석의 여지 자체가 그의 해석이다. 그리고 그 여지에도 불구하고 교부들이 공유한 것이 있다. 요 20이든 행 2든, 성령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성령의 수여는 사도들의 직무와 교회의 증언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6. 칼빈: 파송 → 성령 → 복음의 직무

이제 종교개혁으로 건너오면, 장 칼빈(1509–1564)에게서 매우 개혁파다운 방향 전환이 일어난다. 칼빈은 요한복음 20:21–23을 무엇보다 교회의 직무와 말씀의 사역이라는 문맥에서 읽었다.

본문의 순서를 다시 보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1)

 

그다음,

"성령을 받으라" (요20:22)

 

그다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요20:23)

 

칼빈에게 이 순서는 우연이 아니다. 파송 → 성령 → 복음의 직무. 그리스도께서 먼저 보내시고, 보내신 자를 성령으로 무장시키시고, 그렇게 무장된 자에게 죄 사함의 복음을 선포하는 직무를 맡기신다.

 

칼빈이 여기서 힘주어 강조하는 원리가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는 일, 영원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자신의 자연적 능력으로 수행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학식이나 언변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보내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내시는 사람을 성령으로 준비시키신다. 칼빈이 본 요20:22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12]

 

이 강조는 우리가 앞에서 붙들었던 문제와 정확히 만난다. 부활을 목격했다는 것과 사도직을 수행할 능력을 얻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말씀을 알고, 그리스도를 보았고, 사명을 받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사명을 수행할 능력을 주셔야 한다. 그래서 칼빈은 사도행전 1장의 "기다리라"는 명령에서, 교회의 사역자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를 끌어냈다. 사도직은 인간의 용기나 재능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주님은 능력을 주시기 전에는 그들을 내보내지 않으셨다.

칼빈에게 오순절은 더 큰 구속사적 사건이다

그러면 칼빈은 오순절을 어떻게 보았는가? 그는 사도행전 2장의 바람과 불과 방언을, 개인들에게 성령을 "추가 충전"해 주는 사건 정도로 읽지 않았다.

 

칼빈이 특히 주목한 것은 방언이다. 각국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게 하신 이 표적은 사도들의 직무와 직결된다. 복음이 이제 한 민족 안에 머물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선포될 것을 보여주는 표지라는 것이다. 바벨에서 흩어졌던 언어들이, 오순절에는 하나의 복음을 실어 나르는 그릇들이 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칼빈은 오순절과 시내산을 연결하는 오래된 해석 — 아우구스티누스도 사용했던 해석 — 을 굳이 배척하지 않는다.[^13]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애굽에서 나온 뒤 오십 일 즈음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다면, 참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오순절에는 성령께서 임하여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기록하신다. 시내산에서는 돌판에 기록된 율법이, 오순절에는 성령으로 마음에 기록되는 법이 주어진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의 구조 그대로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31:33)

 

그러므로 칼빈에게 오순절은 단순한 능력 체험의 날이 아니라, 새 언약이 공적으로 개시되는 구속사적 사건이다.

요 20과 행 2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칼빈의 해석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면, 두 본문의 관계를 이렇게 대비해 볼 수 있다.

 

요한복음 20:21–23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며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시고, 사도적 직무죄 사함의 복음을 맡기신다. 성령의 수여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까이서, 사도단을 중심으로 행하신다.

 

사도행전 1–2장에서는 승천하여 보좌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고,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성령을 충만히 부으신다. 그 범위는 사도단을 넘어 교회 공동체 전체로 확대되고, 그 지향은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세계적 선교로 뻗어 나간다. 죄 사함의 복음이 이제 만국에 선포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분명해진다. 요20을 가짜 성령 수여로 만들 필요도 없고, 행2를 두 번째 중생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교부와 개혁파의 주요 해석을 종합할 때, 두 사건을 동일한 성령의 서로 다른 구속사적 수여와 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고 유력한 해석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것과,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으신 것. 같은 성령, 전진하는 구속사.

 

다만 정직하게 덧붙여 두자. 요20:22에서 그날 저녁 정확히 무엇이 어떤 방식으로 수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개혁파 해석자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실제적이되 제한적인 성령의 수여로 읽는 이들이 있고, 사도적 직무를 위한 특별한 은혜의 수여로 읽는 이들이 있으며, 오순절을 예표하고 보증하는 상징적·예기적 행위에 무게를 두는 이들도 있다. 크리소스톰에게서 이미 보았던 해석의 여지가 개혁파 전통 안에서도 이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울타리 안의 차이다. 어느 쪽을 취하든, 성령은 두 분이 아니고 중생이 두 번이 아니며, 성령을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고 그 수여가 교회의 직무와 증언을 위한 것이라는 중심에서는 모두가 일치한다.

 

 

 

7. 개혁파 정통주의: 요한복음 7:39와 두 가지 결정적 구별

16세기의 통찰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에서 더 정밀한 신학적 언어를 얻는다. 여기서 특히 유용한 인물이 프란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과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이다.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절대적으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먼저 이 논의 전체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던 한 본문을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초막절에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신 뒤, 요한은 이런 해설을 붙인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7:39)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그때까지 성령이 존재하지 않았다" 혹은 "그때까지 아무도 성령을 받은 적이 없다"로 읽으면, 성경 전체와 충돌한다. 구약의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있었고, 방금 확인했듯이 제자들 자신도 성령의 은혜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투레틴은 이 진술을 절대적으로(absolutely)가 아니라 상대적으로(relatively)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이전 시대에 성령이 안 계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화 이후에 있을 더 풍성한 부어주심과 비교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라는 뜻이다.[^14] 마치 해가 뜬 대낮에 비추어 새벽빛을 "아직 빛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새벽에도 빛은 있었다. 그러나 정오의 충만함에 비하면 "아직"이었다.

 

이것이 개혁파 정통주의의 결정적인 첫 번째 구별이다. 달라진 것은 성령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성령의 경륜적 분배 방식이다. 구약과 신약, 오순절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성령 없음 → 성령 있음"이 아니라, 동일한 성령께서 일하시는 구속사적 방식과 충만함과 범위의 차이다.

processio와 missio — 영원한 발출과 구속사적 파송

두 번째 구별은 더 깊은 곳, 삼위일체론에 놓여 있다. 개혁파 정통주의는 다음 두 가지를 반드시 구별했다.

하나는 영원한 발출(processio, spiratio)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고 내적인 관계에 관한 말이다. 성령께서는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다. 이것은 시간 속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속한 영원한 관계다.

 

다른 하나는 **경륜적 파송(missio)**이다. 이것은 구속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부께서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교회에 보내신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신자들에게 적용하시기 위해 역사 속으로 파송되어 오신다.

 

이 둘은 서로 상응하지만 동일하지 않다. 영원한 발출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한 것이고, 경륜적 파송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 속에서 무엇을 행하시는가에 관한 것이다.

 

존 오웬은 그의 방대한 성령론에서 바로 이 구별을 정교하게 전개했다. 그는 성령의 영원한 발출과,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제 역사 속에서 실행하시기 위해 나아오시는 구속사적·경륜적 나아오심을 구별했다.[^15] 오순절에 일어난 일은 후자에 속한다. 성령의 존재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 언약적 사역이 공적으로 개시된 것이다.

그러면 요20:22와 Filioque의 관계는?

이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미루어 두었던 문제로 돌아갈 수 있다. 요한복음 20:22는 필리오케를 증명하는가?

 

이 구별의 빛 아래서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요 20:22가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성자께서 성령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수여하신다. 이것은 경륜적 사실, 곧 missio의 차원이다. 투레틴을 비롯한 개혁파 신학자들은 성자께서 구속사 속에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이 사실을, 성령께서 영원 안에서 성자로부터도 발출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지로 읽었다. 경륜은 존재를 반영한다. 시간 속에서 성령을 보내시는 성자의 행위는, 영원 안에서 성령이 성자에게서도 나오신다는 것을 가리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요 20:22 하나만으로 필리오케의 존재론적 교리 전체가 자동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경륜적 파송에서 영원한 발출로 나아가는 논증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요15:26)와 같은 다른 삼위일체 본문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롬8:9)으로 불린다는 사실 등과 함께 종합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요20:22는 그 논증의 중요한 한 조각이지, 논증 전체가 아니다. 개혁파 전통은 필리오케를 고백하지만, 그 고백을 한 구절의 어깨에만 올려놓지는 않는다.

정통주의가 정리해 준 그림

이렇게 해서 사도행전 2장에서 "정말 새로 일어난 것"이 무엇인지 말할 언어가 갖추어졌다.

 

성령이 처음으로 지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의 새로움은 무엇인가?

 

첫째,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셨다. 요7:39의 논리가 여기서 작동한다. 성령의 새 언약적 부어주심은 그리스도의 영화를 뒤따른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라는 구속의 성취가 먼저 있고, 그 성취 위에서 성령이 부어진다.

 

둘째,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령을 부으신다. 이것은 우리의 추론이 아니라 베드로 자신의 오순절 설교가 선언하는 바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3)

 

이 한 절이 사실상 요 20과 행 2의 문제를 푸는 결정적인 열쇠다. 오순절은 그냥 "성령이 내려왔다"가 아니다. 왕위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으셨다. 성령강림은 하늘 보좌에서 집행된 즉위하신 왕의 통치 행위다.

 

 

 

8. 승천이 갑자기 중요해진다

우리는 흔히 구속의 이야기를 성탄 → 십자가 → 부활까지만 크게 그리고, 승천은 에필로그처럼, 예수님이 "퇴장하시는" 장면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신약의 구조는 그렇지 않다.

 

성육신 → 십자가 → 부활 → 승천과 즉위 → 성령의 부어주심 → 교회의 선교.

 

이 사슬에서 승천을 빼면 오순절이 공중에 뜬다. 베드로의 설교를 다시 보라. 그는 오순절의 현상을 설명하면서 곧장 시편 110편으로 간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2:34–36)

 

오순절은 부활의 단순한 후속 이벤트가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행하신 첫 번째 거대한 통치 행위다. 개혁파 그리스도론의 언어로 말하면, 이것은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왕직(munus regium)의 행사다.[^16] 왕이 즉위하셨다는 첫 번째 공적 증거가, 그 왕이 약속하신 성령을 그의 백성에게 부으신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가 처음에 발견했던 '이상한 제자들'이 갑자기 설명된다.

 

십자가 앞에서 — 도망간다. 부활 소식을 듣고 — 못 믿는다. 빈 무덤을 보고 — 혼란스러워한다. 엠마오로 — 떠난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 — 그래도 어떤 사람은 의심한다. 요한복음 20장 — "성령을 받으라." 갈릴리에서 — 물고기를 잡는다. 대위임령 — "복음을 전하라."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 "기다려라." 그리고 사도행전 2장. 그 순간부터 — 베드로가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공개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한다.

 

이 극적인 대비는 우연히 남은 기록의 조각들이 아니라,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걸쳐 의도적으로 구축한 신학적 구조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누가는 독자가 이 대비를 보기를 원한다. 부활의 목격자들조차 위로부터 오는 능력 없이는 증인이 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 능력이 임하자 그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처럼 일어섰다는 것을.

교부에서 정통주의까지: 흐름의 요약

여기까지의 해석사를 압축하면 이렇게 흘러간다.

 

아우구스티누스 — 성령은 이미 계셨고, 제자들도 이미 성령을 가지고 있었다. 요20에서 실제로 성령을 받았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동일한 성령이 더 충만하고 공개적이며 보편교회적인 방식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요20:22는 창2:7의 새 창조적 반향이다.

 

크리소스톰 — 요20은 오순절을 위한 준비로 볼 수도 있고, 실제 특별한 은혜의 수여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죄 사함의 사도적 직무와 연결된다. 오순절에는 증언과 기적을 위한 더욱 큰 능력이 주어졌다.

 

칼빈 — 교회의 사역은 인간의 능력으로 수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보내시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사역자를 준비시키신다(요20). 오순절은 약속된 성령이 교회의 만국 복음 선포를 위해 공개적으로 부어지는 새 언약의 구속사적 사건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 구약에도 성령은 역사하셨다. 차이는 성령의 유무가 아니라 구속사적 충만함과 경륜의 변화다. 영원한 발출(processio)과 경륜적 파송(missio)을 구별하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후, 높아지신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의 새 언약적 사역이 충만하게 전개된다.

 

강조점은 서로 다르지만, 이 전통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확신이 있다. 성령은 두 분이 아니며, 중생도 두 번이 아니다. 한 분 성령께서 전진하는 구속사의 각 단계에서,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주어지신다.

 

 

 

9. 본문 자체로: 원어가 보여주는 창조와 새 창조

지금까지의 해석사는 아름답다. 그러나 정직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창세기 2:7과 요한복음 20:22를 연결한 것은, 후대의 조직신학이 본문에 끼워 넣은 독법인가, 아니면 본문 자체에 실제로 그 연결고리가 있는가? 이제 히브리어와 헬라어 본문을 직접 확인할 차례다. 이 부분이 이 에세이의 성경신학적 중심부다. 원어가 낯선 독자도 염려할 필요 없다. 등장하는 모든 단어의 뜻을 바로바로 풀어 가며 가겠다.[^17]

창세기 2:7 — 히브리어 본문(MT)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MT)에서 창세기2:7의 핵심 어구는 이렇다.

וַיִּפַּח בְּאַפָּיו נִשְׁמַת חַיִּים (와이파흐 베아파우 니쉬마트 하임)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여기서 두 단어가 중요하다.

동사는 נפח(나파흐)로, "불다, 숨을 불어넣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것은 נְשָׁמָה(네샤마), 곧 "숨, 호흡"이다. 그 결과 사람은 נֶפֶשׁ חַיָּה(네페쉬 하야), "살아 있는 존재"(개역개정 "생령")가 되었다.

 

여기서 정직하게 짚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숨 = 하나님의 영"이라고 쉽게 연결하지만, 창세기 2:7에서 "생명의 숨"에 쓰인 명사는 구약에서 "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어 רוּחַ(루아흐)가 아니라 נְשָׁמָה(네샤마)다. 루아흐는 문맥에 따라 바람, 숨, 영을 뜻할 수 있는 단어인데, 창세기 2:7은 그 단어를 쓰지 않았다. 이 차이를 숨기면 안 된다. 히브리어 본문 차원에서는 "창 2:7의 숨"과 "성령"을 곧바로 같은 단어로 잇는 고리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연결은 근거 없는 연상이었는가? 아니다. 연결고리는 다른 곳에 있다. 바로 헬라어 구약, 칠십인역(LXX)이다.

창세기 2:7 — 칠십인역(LXX)

주전 3–2세기경 히브리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은 창세기 2:7을 이렇게 옮겼다.

καὶ ἐνεφύσησεν … πνοὴν ζωῆς (카이 에네퓌세센 … 프노엔 조에스)
"그리고 그가 …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숨"은 πνοή(프노에, 숨·바람)로 번역되었고, 결정적으로 "불어넣으셨다"는 동사가 ἐνεφύσησεν(에네퓌세센)이다. 이것은 ἐμφυσάω(엠퓌사오, "안으로 숨을 불어넣다")라는 동사의 부정과거형이다. 이 동사를 기억해 두자.

요한복음 20:22 — 헬라어 본문

이제 요한복음 20:22의 헬라어 본문을 보자.

 

καὶ τοῦτο εἰπὼν ἐνεφύσησεν καὶ λέγει αὐτοῖς· Λάβετε πνεῦμα ἅγιον
(카이 투토 에이폰 에네퓌세센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라베테 프뉴마 하기온)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에네퓌세센)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보이는가? 창세기 2:7 칠십인역의 바로 그 동사, ἐνεφύσησεν이 정확히 같은 형태로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에 결정적인 사실이 하나 더해진다. 이 동사 ἐμφυσάω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곳, 요한복음 20:22에 단 한 번 나온다.[^18] 신약의 다른 어느 저자도, 요한 자신도 다른 곳에서는 이 단어를 쓰지 않았다. 헬라어에는 "불다"를 나타내는 평범한 단어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바람이 "분다"고 할 때는 πνεῖ(프네이)라는 일반적인 동사가 쓰였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는 이 장면에서만, 요한은 칠십인역 창세기 2:7의 바로 그 이례적인 동사를 선택했다.

 

이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헬라어 성경으로 구약을 읽고 들었던 요한의 첫 독자들에게, 이 단어는 창조의 아침을 소환하는 단어였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 ἐνεφύσησεν — 사람이 살아났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ἐνεφύσησεν — "성령을 받으라."

 

창 2:7 — 하나님 → 에네퓌세센 → 첫 사람 → 생명. 요 20:22 — 부활하신 예수 → 에네퓌세센 → 제자들 → 성령.

 

따라서 창세기 2:7과 요한복음 20:22의 연결은 "숨과 영은 비슷하니까"라는 자유연상이 아니다. 칠십인역의 어휘 자체에 근거한 문학적 반향(allusion)이다. 그리고 이 관찰은 앞서 확인한 히브리어의 사실과도 정합적이다. 히브리어 차원에서는 네샤마와 루아흐라는 단어 차이가 있으므로, 요한이 이 장면을 창세기 2:7과 연결했다면 그 연결은 특히 그리스어 성경의 문구를 매개로 한 연결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요한이 "창조"를 생각했다는 근거는 막연한 "숨=영" 말장난이 아니라 동사 그 자체이며, 그래서 오히려 더 단단하다. 현대의 주석들도 바로 이 동사 때문에 요20:22를 창세기 2:7을 되돌아보는 새 창조 장면으로 읽는 데 대체로 일치한다.[^19]

 

아우구스티누스는 옳았다. 그의 새 창조 해석은 교리를 본문에 덧씌운 것이 아니라, 본문이 이미 발신하고 있던 문학적 신호를 신학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10. 에스겔 36–37장: 마른 뼈와 하나님의 영

그런데 창세기와 요한복음 사이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본문이 서 있다. 에스겔이다.

새 마음과 새 영 — 에스겔 36:26–27

바벨론 포로기의 선지자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회복의 약속을 주셨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6:26–27)

 

히브리어로 "새 마음"은 לֵב חָדָשׁ(레브 하다쉬), "새 영"은 רוּחַ חֲדָשָׁה(루아흐 하다샤)다. 칠십인역은 이것을 καρδίαν καινὴν καὶ πνεῦμα καινόν(카르디안 카이넨 카이 프뉴마 카이논)으로 옮겼다. 그리고 27절의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는 히브리어로 וְאֶת־רוּחִי אֶתֵּן בְּקִרְבְּכֶם(베에트-루히 에텐 베키르베켐), 칠십인역으로 τὸ πνεῦμά μου δώσω ἐν ὑμῖν(토 프뉴마 무 도소 엔 휘민)이다.

주목하라. 약속은 두 겹이다. 너희에게 "새 영"(새로워진 심령)을 주겠다는 약속과, "내 영"(하나님 자신의 영)을 너희 속에 두겠다는 약속.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 내주하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게 하시겠다는 것 — 이것이 새 언약의 핵심 약속이다.

마른 뼈 골짜기 — 에스겔 37:9

바로 다음 장에서 이 약속은 하나의 환상으로 극화된다. 에스겔은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된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가 뼈들에게 대언하자 뼈들이 맞추어지고 힘줄과 살과 가죽이 덮인다. 그러나 본문은 냉정하게 말한다.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겔37:8). 말씀은 선포되었는데, 아직 살아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명하신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37:9)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놀라운 결합이 있다.

מֵאַרְבַּע רוּחוֹת בֹּאִי הָרוּחַ וּפְחִי בַּהֲרוּגִים הָאֵלֶּה וְיִחְיוּ
"네 바람(루호트)으로부터 오라, 루아흐여. 이 죽임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라(우페히). 그리하면 그들이 살아나리라."

 

여기에는 두 요소가 한 문장 안에 함께 있다. רוּחַ(루아흐) — 바람이자 숨이자 영. 그리고 נפח(나파흐) — 창세기 2:7의 바로 그 동사, "불다."

 

즉 에스겔 37:9은 창세기 2:7의 동사(나파흐)와, 창세기 2:7에는 없던 단어인 루아흐(영/바람/숨)를 한 장면에서 결합시킨다. 창조의 "불어넣음"이 이제 "영"의 언어와 만난 것이다.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이렇게 옮겼다.

ἐκ τῶν τεσσάρων πνευμάτων ἐλθὲ καὶ ἐμφύσησον εἰς τοὺς νεκροὺς τούτους καὶ ζησάτωσαν
"네 프뉴마타(바람들/영들)로부터 와서 이 죽은 자들에게 엠퓌세손(ἐμφύσησον) — 불어넣으라. 그들이 살게 하라."

 

다시 그 동사다. 창세기 2:7 칠십인역의 ἐνεφύσησεν과 같은 동사 ἐμφυσάω의 명령형이 여기 나타난다.[^20]

 

이제 세 본문을 나란히 놓아 보라.

 

창2:7 LXX — ἐνεφύσησεν → 사람이 살아남. 겔37:9 LXX — ἐμφύσησον → 죽은 자들이 살아남. 요 20:22 — ἐνεφύσησεν → "성령을 받으라."

 

연결은 더 이상 막연한 분위기가 아니다. 동일한 어근의 동사 ἐμφυσάω + 생명 + 하나님의 호흡/영이라는 구조가 정경을 가로질러 반복된다. 그래서 현대의 본문 주석들도 요 20:22의 배경으로 창세기 2:7과 함께 에스겔 37:1–14의 이미지를 나란히 거론한다.

"내 영을 너희 속에 두리니" — 에스겔 37:14

그리고 마른 뼈 환상은 "바람이 불어 시체들이 움직였다"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환상의 의미를 친히 해석해 주신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7:14)

 

히브리어로 וְנָתַתִּי רוּחִי בָכֶם וִחְיִיתֶם(베나타티 루히 바켐 비흐이템) — "내 영(루히)을 너희 안에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 절이 결정적이다. 환상 속의 그 "생기/바람"이 무엇이었는지를 하나님 자신이 밝히신다. 그것은 나의 영이다. 에스겔서 자체의 해석이 이미 "하나님의 영 → 죽은 자의 생명"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에스겔 36–37장 안에서 하나의 흐름이 형성된다. 새 마음 → 새 영 → 하나님 자신의 영 → 그 영이 죽은 자들에게 들어감 → 생명. 에스겔 36장과 37장을 하나의 새 언약·새 창조 단위로 읽는 것은 전혀 억지가 아니라 본문 자체의 구성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20:22의 장면 —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분이 두려움에 갇혀 있던(문자 그대로 문을 닫아 걸고 있던)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 하시는 장면 — 을 에스겔 37장의 배경 없이 읽는 것보다, 그 배경과 함께 읽을 때 훨씬 자연스럽고 풍성하게 설명된다. 마른 뼈 같던 공동체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숨이 들어가고, 그들이 살아나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서는 것이다.

 

 

 

11. 요한복음 자신의 성령 신학: 요20:22는 갑자기 나온 장면이 아니다

요한복음 20:22를 고립된 한 절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요한복음 자체가 처음부터 생명과 영과 새 출생의 주제를 짜 놓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 성령으로 새로 남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3:5–8)

 

8절의 헬라어가 절묘하다. τὸ πνεῦμα ὅπου θέλει πνεῖ(토 프뉴마 호푸 텔레이 프네이) — "프뉴마는 원하는 곳으로 분다." 여기서 πνεῦμα(프뉴마)는 문맥상 '바람'이면서 동시에 '영'을 겹쳐 울리게 하는 단어이고, 동사 πνεῖ(프네이)는 "분다"이다. 요한은 복음서 초반부터 이미 영 — 바람 — 출생 — 새 생명을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어 놓았다. 에스겔 37장에서 루아흐가 바람이자 영이었던 것과 같은 이중주가 요한복음 3장에서도 연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예수께서는 이 대화에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3:10) 하셨다. 새 영과 살아남에 관한 에스겔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면 알았어야 할 성경이었다.

요한복음 7:37–39 — 생수와 성령, 그리고 "영화"

명절 끝날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7:37–39)

 

앞에서 투레틴과 함께 살펴본 바로 그 본문이다. 여기서 확인할 것은 요한 자신이 성령의 충만한 수여를 예수의 영화 이후로 명시적으로 위치시켰다는 사실이다. 생수의 강 같은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었다. 요한복음의 서사 논리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과 높아지심은 성령 수여의 전제다.

요한복음 14–16장 — 보혜사의 약속

다락방 강화에서 예수께서는 떠나가심과 성령의 오심을 직접 연결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요14:16–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놀라운 말씀이다. 지상에 계신 그리스도의 가시적 임재보다, 가시고 나서 보내실 성령의 임재가 제자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순서는 같다. 그리스도의 떠나가심(죽음·부활·승천) → 보혜사의 오심. 그리고 그 보혜사는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요15:26–27)는 말씀대로, 제자들을 증인으로 세우시는 영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이 모든 실이 요한복음 20장에서 매듭지어진다. 성령으로 나야 한다던 3장, 영화 이후의 성령을 말하던 7장, 보혜사를 약속하던 14–16장을 지나, 이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 곧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전체에서 생명 — 새 출생 — 성령 — 그리스도의 죽음과 영화 — 부활 — 성령의 수여라는 흐름이 이렇게 발전해 온 것이다. 요20:22는 갑작스러운 상징 하나가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의 생명·성령·새 창조 주제가 부활 이후 절정에 이르는 장면이다.

 

 

 

12. 사도행전 2장: 강한 바람, 그러나 명시적 성취는 요엘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의 "급하고 강한 바람"도 에스겔 37장과 직결되는가? 여기서는 한 단계 더 신중해야 한다. 좋은 성경 읽기는 연결을 발견하는 눈과 함께, 연결의 강도를 분별하는 절제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πνοή의 공명 — 그러나 인용이라 단정하지 말라

사도행전 2:2의 헬라어는 이렇다.

 

ἦχος ὥσπερ φερομένης πνοῆς βιαίας (에코스 호스페르 페로메네스 프노에스 비아이아스)

 

"급하고 강한 프노에(πνοή)가 몰아치는 것 같은 소리." 흥미로운 것은 누가가 여기서 성령을 가리키는 표준 단어 πνεῦμα(프뉴마)가 아니라 πνοή(프노에, 숨·바람)를 썼다는 점이다.[^21] 그런데 기억하는가? 창세기 2:7 칠십인역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불어넣으신 "생명의 숨"이 바로 πνοὴν ζωῆς(프노엔 조에스)였다.

 

창2:7 LXX — πνοή ζωῆς, 생명의 숨. 행2:2 — πνοή βιαία, 급하고 강한 바람.

 

어휘의 공명은 분명히 있다. 오순절의 소리를 창조의 호흡과 겹쳐 듣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누가가 창세기 2:7을 인용했다"고 단정하기에는 부족하다. πνοή는 바람과 호흡을 가리키는 자연스러운 일반 어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0:22의 ἐμφυσάω처럼 신약에서 유일하게 쓰인 이례적 동사가 만들어 내는 강한 신호와는 급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 연결은 이렇게 두는 것이 안전하다. 직접 인용은 아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공명은 있다. 겔37장의 바람·영·생명 이미지와 오순절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주제적 공명으로 읽을 수는 있으나, 본문이 직접 그 연결을 선언하지는 않는다.

사도행전 2장이 스스로 선언하는 성취: 요엘 2:28–32

과잉 연결을 절제해야 하는 더 적극적인 이유가 있다. 사도행전 2장은 자신이 성취하고 있는 구약 본문이 무엇인지 스스로 선언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일어나 소리 높여 말한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행2:16–18)

요엘 2:28–32의 인용이다. 선지자 요엘을 통해 하나님은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욜2:28) 약속하셨고,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라고 말씀하셨다. 헬라어로 행 2:17의 핵심 어구는 ἐκχεῶ ἀπὸ τοῦ πνεύματός μου(엑케오 아포 투 프뉴마토스 무), "내 영을 부어 주리라"이며, 이는 요엘 칠십인역의 표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부어 주리라"는 이 동사가 베드로의 설교 절정에서 다시 등장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3)

 

헬라어로 τὴν ἐπαγγελίαν τοῦ πνεύματος τοῦ ἁγίου λαβὼν παρὰ τοῦ πατρὸς ἐξέχεεν τοῦτο — "성령의 약속을 아버지께 받아서 이것을 부어 주셨다(엑세케엔)." 요엘서에서 "내가 부어 주리라"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부으심을, 베드로는 높임 받으신 예수께서 부으셨다고 선포한다. 요엘의 여호와의 약속이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손으로 집행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순절 설교의 담대함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의 가장 명시적인 성경신학적 축은 분명하다. 요엘의 약속 → 승천하신 그리스도 → 성령의 부어주심. 에스겔 36–37장과 창세기 2장은 그 뒤에 서 있는 더 넓은 새 언약적·새 창조적 배경이다. 사도행전 2장을 에스겔 37장의 "성취"라고 직접 부르는 것은 지나치다. 요엘이라는 명시적 축 위에, 창조와 에스겔의 성령-생명 전통이 함께 공명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엄밀하다.

 

 

 

13. 고린도전서 15:45: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

창조와 새 창조의 연결을 확인해 주는 증인이 신약 안에 하나 더 있다. 바울이다.

부활 장(章)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의 몸을 논증하다가 창세기 2:7을 직접 끌어온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5)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는 창세기 2:7의 인용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 위에 대조를 세운다. 첫 아담은 생명을 받은 자다 — 하나님의 숨을 받아 산 존재(생령)가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 "살려 주는 영"(πνεῦμα ζῳοποιοῦν, 프뉴마 조오포이운)이 되셨다.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바울은 이 대조를 확장한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15:47, 49)

 

이제 이것을 요한복음 20:22와 나란히 놓아 보라.

 

창2:7 —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아담은 생명을 받는 자.

고전15:45 —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 생명을 주시는 분.

요20:22 —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주심.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행동하심.

 

바울은 명제로 말했고, 요한은 장면으로 보여주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더 이상 단지 생명을 받은 피조물의 자리에 계시지 않고, 생명을 수여하시는 분으로 서 계신다.

 

다만 여기서도 절제가 필요하다. 요한이 바울에게서 이 사상을 직접 빌려왔다고 주장할 증거는 없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둘째 아담"이라고 명시적으로 부르지도 않는다. 그 명시적 표현은 바울의 것이다(고전15:45–49).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수렴이 더 흥미롭다. 서로 독립적인 신약의 증언들이 — 요한은 칠십인역의 동사로, 바울은 창세기 2:7의 직접 인용으로 — "창조 → 아담 → 그리스도 → 성령 → 새 생명"이라는 동일한 신학적 중심으로 수렴한다. 문헌적 의존 관계를 억지로 세울 필요 없이, 정경 전체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것이 더 안전하고 더 놀랍다.

 

 

 

14. 연결의 강도를 구별하기: 인용, 암시, 공명

여기까지 여러 겹의 연결을 살펴보았다. 이제 정직한 성경 읽기를 위해 꼭 필요한 작업 하나가 남았다. 모든 연결을 같은 확실성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신학에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구별이 쓰인다. 본문이 출처를 밝히거나 문구를 그대로 가져오는 인용(quotation), 명시하지는 않으나 특징적 어휘나 문구로 특정 본문을 의도적으로 가리키는 암시/반향(allusion), 어휘나 주제가 겹쳐 울리지만 의도적 지시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공명(echo), 그리고 정경 전체의 구조 속에서 성립하는 성경신학적·정경적 연결이다.[^22]

 

이 잣대로 지금까지의 연결들을 평가하면 이렇게 된다.

 

매우 강함. 창세기 2:7 LXX ↔ 요한복음 20:22 — 신약에서 단 한 번 쓰인 동사 ἐνεφύσησεν의 정확한 대응. 거의 확실한 의도적 반향이다. 요엘 2 ↔ 사도행전 2 — 베드로가 출처를 밝히며 직접 인용하고 성취를 선언한다. 명시적 인용이자 성취다.

 

강함. 에스겔 36–37 ↔ 요한복음 20 — 겔37:9 LXX의 ἐμφύσησον, 겔37:14의 "내 영을 너희 속에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그리고 죽음에서 생명으로라는 구조적 평행. 창 2:7만큼 단일 어휘로 못 박히지는 않으나 매우 강한 새 언약·새 창조 배경이다. 요한복음 20 ↔ 사도적 파송과 성령 — "보내노라 → 성령을 받으라 → 죄 사함"의 문맥적 결속은 본문 안에서 단단하다. 그리고 요20 ↔ 행2 — 동일한 성령, 부활 → 승천 → 공적 부어주심이라는 신약 내부의 연결 역시 강하다.

 

가능한 정경적 공명. 창세기 2:7 ↔ 사도행전 2:2의 πνοή — 어휘의 울림은 있으나 직접 인용의 증거는 약하다. 에스겔 37 ↔ 사도행전 2 — 바람·영·생명의 주제적 공명이되, 본문이 선언하는 성취의 축은 요엘이다.

 

이 등급 구별은 학자들의 소심함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성경 되게 하는 존중이다. 본문이 크게 말하는 곳에서 크게 말하고, 본문이 속삭이는 곳에서는 속삭임으로 듣는 것. 그렇게 할 때 "창조–새창조" 연결이 후대의 조직신학적 끼워맞추기가 아니라 본문 자체에서 올라오는 주제임이 오히려 더 설득력 있게 드러난다. 우리가 세웠던 가설 가운데 수정할 것이 있으면 수정했다. 히브리어 창2:7에 루아흐가 아닌 네샤마가 쓰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행2를 겔 37의 직접 성취로 부르는 데서 물러섰다. 그렇게 절제하고 나서도 남는 뼈대는 이토록 단단하다.

 

창2:7 — 생명의 호흡 → 겔36 — 새 마음과 하나님의 영 → 겔37 — 영이 죽은 자에게 들어가 살아남 → 요3 — 성령으로 새로 남 → 요7 — 영화 이후의 성령 → 요20:22 —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숨을 불어 성령을 주심 → 행2 —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약속된 성령을 만민에게 부으심.

 

 

 

15. 다시 처음 질문으로: 왜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는가

이제 이 모든 것을 손에 들고 처음의 질문들로 돌아가자.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제자들조차 자신의 힘으로 교회를 세울 수 없었는가? 왜 그리스도께서는 "가라"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기다리라" 하셨는가? 왜 엠마오 제자들에게 자신의 얼굴부터 보여주지 않으시고 먼저 성경을 풀어 주셨는가? 왜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 하고 자신의 결심을 내세웠을 때는 처참하게 실패했는데, 오순절 이후에는 그를 죽일 수도 있는 군중 앞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담대히 선포했는가?

 

이 글이 걸어온 길 전체가 하나의 대답을 이룬다.

 

부활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사건이었다. 무덤은 실제로 비었고,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살아나셨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정보가, 심지어 그 사건의 목격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자동으로 믿음과 이해와 담대함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그 증거다. 갈릴리 산 위에서 의심하던 이들이 그 증거다.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 만나고도 빈 그물 앞에 서 있던 일곱 사람이 그 증거다.

 

사건은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했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사역이 성경 강해였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가르치시는 방법이 성경이었다.

 

그리고 말씀은 성령으로 깨달아지고, 증언은 성령의 능력으로 수행되어야 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사도직은 인간의 용기나 자연적 재능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보내시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자들을 성령으로 준비시키고 입히셔야 했다.

 

그래서 "기다리라"는 명령은 지연이 아니라 은혜였다. 그것은 제자들의 무능에 대한 징계가 아니라,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준비 과정이었다. 그리고 오순절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여 왕으로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으셨을 때, 마른 뼈 같던 공동체가 살아 일어났다. 도망자들이 증인들이 되었다.

 

여기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도 함께 주어진다. 교회는 부활의 사실을 증언하는 공동체다. 그러나 인간의 확신과 능력으로 그 증언을 수행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성령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보내신다.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구속 사건 — 그 사건을 해석하는 성경 — 그 말씀을 밝히시고 적용하시는 성령 —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파송되는 교회. 이 네 겹의 관계가 사도행전 2장 이후 오늘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존재 방식이다.

 

이것은 이천 년 전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복음을 전할 때에도, 같은 구조가 작동한다. 우리는 더 나은 논증술이나 더 강한 확신을 확보함으로써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자신을 보이시고 성령으로 마음을 여실 때, 우리는 믿고, 깨닫고, 증언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사역 아래에는 이 고백이 놓여 있어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16. 사명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청지기의 시간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이 "기다림"을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성도의 삶과 연결하려 한다. 다만 처음부터 조심스럽게 시작하자.

 

사도들의 기다림은 구속사에서 단 한 번 있었던 특별한 자리였다. 그들은 부활의 목격자로서, 교회의 터를 놓는 유일무회의 사명을 위해 오순절의 성령을 기다렸다. 우리는 제2의 오순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며, 사도들의 특별한 구속사적 사명과 오늘날 각 성도의 개인적 진로를 단순히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도 없다. 또한 성경은 "지금 열심히 살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당신만의 위대한 사명을 극적으로 계시해 주실 것이다"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다메섹 도상의 빛이 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성공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기대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는 이름 아래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하고 현재를 공허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도들의 기다림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그대로 건너오는 것이 있다. 기다림은 공백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고, 기다리는 동안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행1:14).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표적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 이것이야말로 청지기적 충성, 하나님의 섭리, 말씀을 통한 분별, 기도하며 깨어 있음, 거룩하게 준비됨이라는 성경의 오랜 언어로 오늘 우리에게 건네지는 권면이다.

 

특히 두 부류의 독자를 마음에 두고 이야기하고 싶다.

아직 자신의 길을 찾고 있는 학생에게

첫째는 아직 자신의 길이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아직 명확하지 않을 때, 현재의 시간은 마치 본 게임이 시작되기 전의 무의미한 대기실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남들은 이미 달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출발선도 배정받지 못한 것 같은 조급함이 밀려온다.

 

그러나 성경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공부하고, 배우고, 사람을 섬기고, 작은 책임을 감당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지금의 시간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청지기의 시간이다. 청지기는 자기 인생의 대본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 오늘 맡기신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학생에게 오늘 맡겨진 것은 배움과 성장과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16:10)

 

작은 것에 충성하는 시간은 큰 것을 기다리며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기뻐하시는 충성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가 아직 평생의 직업을 알지 못해도, 너는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어서 언젠가 해독해야 할 암호가 아니다. 오늘 배우고, 성품을 훈련하고, 곁의 사람을 섬기고, 작은 책임에 충성하는 것 —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다. 하나님은 미래의 어느 날에야 당신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이 배움의 자리를 섭리 가운데 맡기신 분이다.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길을 여실 때, 그 길을 말씀으로 분별하여 걸으면 된다. 길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잊으셨다는 뜻이 아니다. 제자들도 갈릴리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물을 손질하고 배를 저었다. 그 기다림의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직장인에게

둘째는 매일 같은 출근과 같은 업무가 반복되어, 자신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직장인들이다. "이것이 정말 내 소명일까? 나는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 반복되는 지하철 안에서, 마감 앞에서, 회의실에서 고개를 든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반복되는 일상 속의 성실함은 "사명을 발견하기 전까지 견뎌야 하는 하찮은 일"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의 지극히 평범한 일꾼들에게 이렇게 썼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3:23)

 

"무슨 일을 하든지." 위대해 보이는 일만이 아니다. 오늘의 그 보고서, 그 상담, 그 배송, 그 수업, 그 돌봄이 "주께 하듯" 드려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예배와 잇닿아 있는 노동이다. 그리고 청지기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한 구절이 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2)

 

주인이 청지기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화려한 성과의 목록이 아니라 충성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직함이 아니라 우리의 신실함을 보신다. 반복이 소명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복 속의 충성이야말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만 아시는 방식으로 쌓여 가는 청지기의 열매다.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하라"

그렇다면 기다리는 사람은 무엇을 하며 기다리는가?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그림이 여기에 빛을 던진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2:20–21)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자. 이것은 "깨끗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크고 유명한 일을 맡기신다"는 보증이 아니다. 본문의 초점은 크고 유명해지는 데 있지 않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 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결정적인 사실 하나를 놓치지 말라. 그릇은 스스로 자신의 쓰임을 결정하지 않는다. 주인이 사용하신다.

 

바로 여기에 조급함을 내려놓게 하는 자유가 있다.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은 그릇의 쓰임이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힘써야 할 책임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그 준비와 충성조차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공로가 아니다.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 바로 다음 호흡에 그 이유를 밝힌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우리가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힘쓰는 그 힘씀 자체가,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혜는 분업 관계가 아니라, 은혜가 책임을 낳고 떠받치는 관계다. 그리고 그렇게 은혜로 준비된 그릇을 어디에 어떻게 쓰실지는 주인의 권한이다. 그렇다면 성도의 질문은 "하나님, 제 사명은 무엇입니까?"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주님, 오늘 제게 맡기신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주께서 다른 일을 맡기실 때 순종할 수 있도록, 제 삶은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습니까?"

 

이 질문들 앞에서 학생의 조급함은 낮아지고, 직장인의 반복되는 일상은 폄하되지 않으면서도, 소명과 섭리를 기다리는 거룩한 긴장은 살아 있게 된다.

"깨어 기도하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반복하여 명하신 또 하나의 말씀이 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막13:33)

 

그리고 바울은 권면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엡6:18)

 

여기서도 오해를 걷어내자. "깨어 있으라"는 미래의 비밀스러운 신호를 찾아내라는 뜻이 아니다. 구름의 모양이나 우연의 배열 속에서 나만을 위한 암호를 해독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성경적인 깨어 있음은 훨씬 건강하고 구체적이다. 말씀에 깨어 있는 것. 자신의 죄와 욕망을 살피는 것.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곁에 주어진 이웃과 책임을 돌아보는 것. 섭리 가운데 열리고 닫히는 기회를 겸손히 분별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며 맡은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 오순절을 기다리던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 그들은 하늘의 신호를 해독하려 하지 않았고, 모여서 기도했다.

제자들의 기다림과 오늘의 기다림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가라"고 하셨지만 동시에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기다림은 무기력한 공백이 아니라, 약속을 붙든 기다림이었다.

 

오늘의 성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힘으로 문을 부수어 "사명"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회피한 채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만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다음의 균형이 우리를 지켜 준다.

 

서두르지 말라. 그러나 게으르지도 말라.

 

스스로 위대한 사명을 만들어내지 말라. 그러나 오늘 맡겨진 작은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도 말라.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라.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 말씀과 기도와 충성으로 자신을 준비하라.

 

학생에게는 오늘의 배움이, 직장인에게는 오늘의 노동이, 부모에게는 오늘의 돌봄이, 교회 안의 성도에게는 오늘 맡겨진 작은 섬김이 — 모두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의 삶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새로운 길과 더 큰 책임을 열어 보이시는 날이 온다면, 이미 충성 가운데 훈련된 사람은 그것을 자기 영광을 위한 "꿈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주인이 맡기시는 또 하나의 책임으로 받게 될 것이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기 때문이다.

 

 

 

맺음말: 그릇이 아니라 주인을 바라보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세상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강한 의지나 더 원대한 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과 약속,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었다. 창조의 아침에 사람을 살리셨던 그 호흡이 부활의 저녁에 다시 불어왔고, 에스겔의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을 일으켰던 그 영이 오순절에 온 교회 위에 부어졌을 때, 비로소 도망자들은 증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해 조급한 사람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삶이 작아 보이는 사람도, 스스로 거대한 사명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오늘 맡겨진 것에 충성하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 늘 깨어 기도하라. 작은 일에서도 주께 하듯 행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앞질러 달려가지 말고, 주께서 다음 걸음을 열어 보이실 때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은 그릇의 쓰임이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감당할 책임은 그릇의 깨끗함과 충성이다. 그리고 그 깨끗함과 충성조차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다(빌2:13). 어디에 어떻게 쓰실지는 주인의 권한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우리의 평안이다. 왜냐하면 그 주인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보다 앞서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 승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시선을 옮기자. 우리 자신의 "위대한 사명"이 아니라, 주인이신 그리스도께로.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의 교회를 살리신다. 말씀으로 자신을 보이시고, 성령으로 마음을 여시고, 마른 뼈 같은 심령에 숨을 불어넣으신다. 그분은 그의 사람들을 성령으로 준비시키시고, 때를 따라 보내시며, 맡기신 자리에서 끝까지 충성하게 하신다. 처음 창조에서 생명을 불어넣으신 하나님, 에스겔에게 새 영을 약속하신 하나님, 부활의 저녁에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그리스도,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을 부으신 높임 받으신 왕 — 그분이 오늘도 우리의 주인이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1:6)

 

그 확신 안에서, 우리는 오늘의 자리에서 깨끗한 그릇으로, 깨어 기도하며, 맡은 것에 충성하며 — 주인의 쓰심을 기다린다.

 

 

 

일러두기

본문 안의 성경 표기는 개역개정을 따르며, 절 표시는 본문에 약식으로 두었다. 각주는 성경 구절이 아니라 주로 해석사적·신학사적 주장 — 곧 "누가 이렇게 해석했는가" — 와 원어·본문비평상의 주장에 달았다. 교부와 종교개혁자의 저작은 가능한 한 온라인으로 공개된 표준 영역본(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Calvin Translation Society 판 등)에서 해당 위치를 직접 확인하였고, 각주에 그 원문 링크를 함께 두어 독자가 바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확인하지 못한 위치는 각주에 그 사실을 명시했다.

각주

[^1] 제자들의 두려움·몰이해·의심을 감추지 않는 복음서 기록의 특징과 오순절 이후의 변화에 대한 크리소스톰의 주목은 그의 요한복음 강해 곳곳에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John Chrysostom, Homilies on the Gospel of St. John, Hom. 86 (요20:10–23 강해),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이하 NPNF), First Series, vol. 14,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86.htm 참조.

 

[^2]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22 (요21:1–11 강해), NPNF First Series, vol. 7,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122.htm.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제자들의 고기잡이를 사도직의 배반이 아니라 허용된 생업으로 해석하는 한편, 그물의 기적을 교회의 사역에 대한 상징으로 읽는다.

 

[^3] "사건 — 말씀 — 성령"(Res — Verbum — Spiritus)이라는 세 단어의 정형화된 공식 자체는 루터의 직접 표현이 아니라, 루터의 부활·복음·믿음 이해를 이 글에서 편의상 요약한 저자의 재구성이다. 루터에게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객관적 사건이 복음으로 선포되고 믿어져야 한다는 논지 자체는 분명하게 확인된다. 예: Martin Luther, Commentary on the Epistles of St. Peter and St. Jude, 벧전1:3 이하 강해, https://ccel.org/ccel/luther/stpeter_stjude/stpeter_stjude.iii.ii.html.

 

[^4]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눅24:25–27 주석. 칼빈은 엠마오 제자들의 문제를 단순한 불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그릇된 기대로 보고, 그리스도께서 성경 해석을 통해 자신을 가르치신 점을 강조한다. Calvin Translation Society 판 전체가 온라인 공개되어 있다: https://www.ccel.org/c/calvin/comment2/home.html.

 

[^5]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74.1–2 (요14:15–17 강해),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74.htm. 원문 확인: "제자들은 주께서 약속하신 그 성령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분 없이는 예수를 주라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 약속하신 그 방식으로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졌고, 또한 가지지 못했다. … 그들은 더 제한된 방식으로(in a more limited sense) 가졌고, 더 풍성한 분량으로(in an ampler measure) 받게 될 것이었다"(74.2, 필자 요약역).

 

[^6] Augustine, Answer to Petilian the Donatist, Book II, NPNF First Series, vol. 4, https://www.newadvent.org/fathers/14092.htm. 도나투스파 논박의 맥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요 20의 성령과 오순절의 성령이 서로 다른 두 성령일 수 없으며 동일한 한 성령의 두 차례 수여임을 논증한다.

 

[^7]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32.6–7 (요7:37–39 강해),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32.htm. 원문 확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시므온·안나·세례 요한·사가랴·마리아, 그리고 선지자들에게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화 이전에 이미 역사하셨음을 열거한 뒤, "그러나 이 수여에는 이전에 전혀 나타난 적이 없는 어떤 방식(a certain manner of this giving, which had not at all appeared before)이 있게 될 것이었다"고 말하고, 그 표지로 오순절의 만국 방언을 든다. 32.7에서는 방언을 "교회가 자라나 모든 민족의 언어로 말하게 될 것"의 표지로 해석한다.

 

[^8]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32.6. 원문 확인: "그분은 자신의 숨으로 첫 사람을 살리시고 진흙에서 일으키신 분이시다. 그 숨으로 지체들에게 혼을 주신 바로 그분이 그들의 얼굴에 숨을 내쉬셨음을 나타내신 것이다"(필자 요약역). 즉 창2:7과 요20:22의 연결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명시적 해석이다.

 

[^9] 필리오케(Filioque) 논쟁 개관. Filioque(라틴어 "그리고 아들에게서")는 381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성령 조항("성부에게서 나오시며")에 서방교회가 후대에 첨가한 표현으로, 원래 신경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동방교회는 성부의 단일한 원천성(monarchia)과 공의회적 합의 없는 신경의 일방적 변경을 이유로 이를 반대했고, 이는 1054년 동서 분열의 주요 신학적 쟁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서방의 고전적 정식화는 성부와 성자를 성령의 "두 원리"로 이해하지 않는다. 피렌체 공의회(1439)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하나의 원리(unum principium), 하나의 발출로" 나오신다고 명시했으며, 성자가 성령의 발출에 관계하는 것 자체도 성부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전통의 중요한 신학적 선례가 Augustine, De Trinitate 15.26–27 (NPNF First Series, vol. 3, https://www.newadvent.org/fathers/130115.htm)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요20:22의 숨 내쉬심을 성령이 성자로부터도 나오심을 나타내는 표지로 읽되 성부의 원천성을 유지한다. 같은 해석은 그의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21 (요20:10–29 강해,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121.htm)에도 나타난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는 이 서방 전통을 계승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에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고 고백한다(https://opc.org/WCF-WIP.html). 피렌체 공의회의 정식화 요지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246–248항에도 정리되어 있다(https://www.vatican.va/content/catechism/en/part_one/section_two/chapter_one/article_1/paragraph_2_the_father.html). 다만 본문에서 논한 대로, 요20:22의 경륜적 성령 수여(missio)와 성령의 영원한 존재론적 발출(processio)을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전자는 후자를 논증하는 성경신학적 자료 가운데 하나로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

 

[^10] John Chrysostom, Homilies on the Gospel of St. John, Hom. 86, NPNF First Series, vol. 14,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86.htm. 크리소스톰은 요20:22의 숨 내쉬심에 대해 (1) 장차 받을 성령을 위해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합당하게 하신 것, (2) 그때 실제로 어떤 영적 권능과 은혜 — 특히 요 20:23의 죄 사함의 권위 — 를 받은 것, 두 해석을 제시하고 후자도 틀리지 않다고 말하며, 오순절에는 이적과 증언을 위한 더 큰 능력이 주어졌다고 설명한다.

 

[^11] John Chrysostom, Homilies on the Acts of the Apostles, Hom. 1, NPNF First Series, vol. 11, https://www.newadvent.org/fathers/210101.htm.

 

[^12]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요20:21–23 주석, trans. William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온라인: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5.x.iv.html; https://sacred-texts.com/chr/calvin/cc35/cc35009.htm. 칼빈은 교회를 다스리고 영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직무가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보내시는 자들을 성령으로 준비시키신다고 해석한다. 본문의 "파송 → 성령 → 복음의 직무" 정리는 직접 인용이 아니라 칼빈 논증의 요약이다.

 

[^13] John Calvin, Commentary upon the Acts of the Apostles, 행2:1–4 주석, trans. Henry Beveridge (Calvin Translation Societ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6.ix.i.html. 칼빈은 방언을 복음의 만국 선포와 연결하며, 유월절 후 50일의 율법 수여와 그리스도의 부활 후 오순절의 성령을 대응시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을 소개한다. 다만 칼빈은 이 유형론을 소개하고 수용 가능하다고 보면서도, 그것을 본문의 필연적 의미로 강요하는 데에는 신중한 거리를 둔다.

 

[^14]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Third Topic("유일하시고 삼위이신 하나님"), trans. George Musgrave Giger, ed. James T. Dennison Jr. (Phillipsburg, NJ: P&R, 1992–97). 온라인 발췌: https://www.monergism.com/thethreshold/sdg/turretin/Turretin%20-%20One_True_God.html. 투레틴은 요 7:39의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를 절대적(absolute) 부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화 이후의 더 풍성한 부어주심과의 비교에서 상대적(relative)으로 말한 것으로 읽는다. 본서의 성격상 세부 문항(quaestio) 번호는 판본에 따라 확인이 필요하며, 저자는 위 온라인 판본으로 논지를 확인했다.

 

[^15] John Owen, Pneumatologia: A 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 Book I, ch. 5, i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vol. 3 (Edinburgh: Banner of Truth, 1965 재판). 온라인: https://www.sermonindex.net/books/20-owen-pneumatologia-part-1-john-owen/11. 오웬은 성령의 영원한 발출(eternal procession)과,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역사 속에서 실행하시기 위해 나아오시는 경륜적 나아오심(economical proceeding)을 구별한다.

 

[^16] 그리스도의 삼중직(선지자·제사장·왕) 가운데 왕직에 대해서는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15, trans. Ford Lewis Battles, ed. John T. McNeill (Philadelphia: Westminster, 1960) 참조.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으심으로 그의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이해는 행2:33–36에 대한 개혁파 주해 전통의 공통 자산이다.

 

[^17] 본 장의 원어 논의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BHS), 칠십인역은 Rahlfs-Hanhart, Septuaginta: Editio altera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06), 신약 본문은 Novum Testamentum Graece, 28th ed.(NA28)를 기준으로 삼았다. 온라인 대조: 창2:7 히브리어 어휘 분석 https://biblehub.com/lexicon/genesis/2-7.htm; 창2:7 LXX https://septuaginta.net/gn2-7; 요20:22 헬라어 본문 분석 https://biblehub.com/text/john/20-22.htm.

 

[^18] ἐμφυσάω가 신약에서 요20:22에만 나오는 단회 용례(hapax legomenon)라는 사실은 NA28 색인 및 표준 성구 사전으로 확인된다. 어휘 정보: BDAG(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3rd ed.), s.v. ἐμφυσάω; 온라인 본문 분석 https://biblehub.com/text/john/20-22.htm.

 

[^19] 예: Cambridge Greek Testament for Schools and Colleges, 요20:22 주석(온라인: https://www.bibliaplus.org/en/commentaries/236/cambridge-greek-testament-for-schools-and-colleges-commentary/john/20/22)은 바로 이 동사를 근거로 요 20:22를 창 2:7을 되돌아보는 새 창조 장면으로 읽는다. NET Bible의 요 20:22 본문 주석(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Joh&chapter=20&verse=22)도 창2:7과 함께 겔37:1–14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거론한다.

 

[^20] 겔37:9 히브리어(רוּחַ와 נפח의 결합): https://www.studylight.org/interlinear-study-bible/hebrew/ezekiel/37-9.html; 겔37장 LXX(ἐμφύσησον): https://www.bibbiaedu.it/GRECO_LXX/at/Ez/37/; 겔36:26–27 히브리어·LXX 대조: https://www.greeklab.org/interlinear.php?book=Ezekiel&cap=36&verse=26; https://studybible.info/interlinear/Ezekiel%2036%3A26-28; 겔37:14 히브리어: https://biblehub.com/text/ezekiel/37-14.htm.

 

[^21] 행2:2의 πνοή: https://openbible.com/text/acts/2-2.htm; 행2:17의 ἐκχεῶ ἀπὸ τοῦ πνεύματός μου: https://biblehub.com/text/acts/2-17.htm; 행2:33의 ἐξέχεεν: https://biblehub.com/text/acts/2-33.htm. πνοή는 신약에서 행 2:2와 행 17:25에만 나오는 드문 어휘이나, 바람·호흡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이기도 하므로 본문에서 논한 대로 창2:7 LXX와의 관계는 "공명"의 수준에서 다루는 것이 안전하다.

 

[^22] 인용(quotation)·암시(allusion)·공명(echo)의 방법론적 구별과 판별 기준에 대한 고전적 논의로 Richard B.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29–32 참조.


참고문헌 (Chicago Notes-Bibliography)

1차 자료 (Primary Sources)

성경 본문 및 판본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dited by Karl Elliger and Wilhelm Rudolph. 5th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97.

Novum Testamentum Graece. Edited by Barbara Aland et al. 28th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12.

Rahlfs, Alfred, and Robert Hanhart, eds. Septuaginta: Editio altera.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06.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1998.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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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The Trinity (De Trinitate). Translated by Arthur West Haddan.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3,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7. 온라인 확인판: https://www.newadvent.org/fathers/130115.htm.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Translated by John Gibb and James Innes.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7,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8. 온라인 확인판: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htm (Tractates 32, 74, 121, 122).

Chrysostom, John. Homilies on the Acts of the Apostles. Translated by J. Walker, J. Sheppard, and H. Browne.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1,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9. 온라인 확인판: https://www.newadvent.org/fathers/210101.htm.

Chrysostom, John. Homilies on the Gospel of St. John. Translated by Charles Marriot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4,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9. 온라인 확인판: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86.htm.

 

종교개혁·정통주의

Calvin, Joh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Translated by William Pringle. 3 vols.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46. 온라인 확인판: https://www.ccel.org/c/calvin/comment2/hom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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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 John. Commentary upon the Acts of the Apostles. Translated by Henry Beveridge. 2 vols.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4–46. 온라인 확인판: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6.ix.i.html.

Calvin, Joh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Edited by John T. McNeill. 2 vol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Luther, Martin. Commentary on the Epistles of St. Peter and St. Jude. Translated by E. H. Gillett. New York: Anson D. F. Randolph, 1859. 온라인 확인판: https://ccel.org/ccel/luther/stpeter_stjude/stpeter_stjude.iii.ii.html.

Owen, John. Pneumatologia: A 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 In The Works of John Owen, edited by William H. Goold, vol. 3. Edinburgh: Banner of Truth, 1965 (재판; 원판 1674). 온라인 확인판: https://www.sermonindex.net/books/20-owen-pneumatologia-part-1-john-owen/11.

Turretin, Francis.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Translated by George Musgrave Giger. Edited by James T. Dennison Jr. 3 vol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1992–97. 온라인 발췌 확인판: https://www.monergism.com/thethreshold/sdg/turretin/Turretin%20-%20One_True_God.html.

 

신앙고백 및 교회 문서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 2.3. 온라인: https://opc.org/WCF-WIP.html.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246–248 (필리오케와 피렌체 공의회 정식화 관련). 온라인: https://www.vatican.va/content/catechism/en/part_one/section_two/chapter_one/article_1/paragraph_2_the_father.html.

2차 자료 (Secondary Sources)

Bauer, Walter, Frederick W. Danker, William F. Arndt, and F. Wilbur Gingrich.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BDAG). 3r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Cambridge Greek Testament for Schools and Colleges: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온라인 확인판: https://www.bibliaplus.org/en/commentaries/236/cambridge-greek-testament-for-schools-and-colleges-commentary/john/20/22.

Hays, Richard B.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NET Bible, Full Notes Edition, 요20:22 본문 주석. 온라인: 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Joh&chapter=20&verse=22.

온라인 본문 대조 도구 (원어 검증에 사용)

BibleHub Interlinear and Lexicon. https://biblehub.com. — Septuaginta.net. https://septuaginta.net. — StudyLight Interlinear Study Bible. https://www.studylight.org. — Bibbia Edu (LXX 본문). https://www.bibbiaedu.it. — GreekLab Interlinear. https://www.greeklab.org. — StudyBible.info (Apostolic Bible Polyglot). https://studybible.info. — OpenBible Greek Text. https://open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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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예정론을 성경 전체로 다시 읽기,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 Dei)에 관한 하나의 연구가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3)

 

 

일러두기. 이 글에서 성경 인용은 별도 표기가 없는 한 개역개정을 따랐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하 WCF)는 원문을 직접 번역하되 중요한 표현은 영어 원문을 함께 적었다. WCF 증거본문(proof texts)은 판본에 따라 일부 차이가 있으므로, 이 글의 증거본문 분석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직접 심의하여 제출한 배열을 기준으로 한다. 증거본문은 고백서 본문과 동일한 지위를 갖는 문구가 아니라, 고백서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부착된 apparatus임을 구별한다. 그리고 이 글 전체에서 나는 세 가지 층위를 의식적으로 구별하려고 한다.

【A. 본문】 — 성경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

【B. 추론】 — 여러 본문을 종합할 때 강하게 추론되는 것.

【C. 구성】 — 후대 신학이 성경 자료를 체계화하면서 제안한 설명.

독자께서 이 세 층위를 혼동하지 않으시는 것, 그것이 이 긴 글이 바라는 가장 실용적인 열매 중 하나다.

 

 

 

 

1. 어느 토요일의 두 질문

최근 몇 차례의 수업에서, 이 글의 출발점이 된 질문들이 나왔다. 한 수업에서는 한 지체가, '예정된 자들'이라는 표현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표현보다 어딘지 배타적으로 느껴진다는 취지로 질문했다. 그리고 이어진 다른 수업에서는 질문이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고백서가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면, 우리 구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은 무엇이며,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이 두 질문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붙들수록 이 질문들이 무지나 불신앙의 질문이 아니라는 확신이 커졌다. 오히려 정반대다. 예정에서 선택으로, 중생으로, 믿음으로, 회개로, 성화로, 견인堅忍(굳을 견, 참을 인)ㅡ하나님이 택한 성도를 끝까지 붙드시고, 성도 역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한다, 구원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실패하지 않음을 뜻한다ㅡ으로 — 고백서의 구원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을 성실하게 따라온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고백서를 이해하지 못해서 나온 반발이 아니라, 고백서가 성경의 어느 한쪽 언어를 얼마나 강하게 체계화했는지를 정확하게 감지한 질문이다.

 

무엇보다, 성경 자체가 이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자마자 스스로 던지는 질문을 보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롬9:14)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롬9:19)

 

바울의 예정 교훈은 처음 들은 사람들에게서 정확히 이런 반문을 불러일으켰고, 바울은 그 반문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배우다가 "배타적으로 느껴진다", "자유의지는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바울의 실제 가르침 근처에 와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의무를 지운다. 바울이 대답한 만큼 대답하고, 바울이 대답하지 않은 것을 대답한 척하지 않을 의무다.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이 글은 당시 수업의 설명을 비평하거나 평가하려는 글이 아니다. 실제 수업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신뢰하는 가운데서도 인간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전도의 사명이 분명하게 강조되었고, 인간의 책임을 지워 버리는 극단적 칼빈주의에 대한 비판도 함께 있었다. 성령께서 신자를 '아바타'처럼 조종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역사하셔서 신자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반응하게 하신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 뒤에서 보겠지만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1절과 정확히 같은 방향의 설명이다.[^1] 그러니까 이 글은 수업이 부족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수업에서 나온 질문이 충분히 중요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나는 그 두 질문이 품고 있는 성경적·역사적 범위를, 감사한 마음으로 조금 더 멀리까지 따라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은 신앙고백서를 변호하는 글도, 공격하는 글도 아니다. 이 글이 하려는 일은 하나다. 그 두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서, 성경 본문과 교회 역사와 고백서 자체를 다시 펼쳐 놓고, 정직하게 감사(audit)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나는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연구에서 자라난 하나의 가설 — 이 모든 주권적 은혜의 밑바닥에 놓인 것은 추상적인 '절대 의지'가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 아닐까 하는 물음 — 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려 한다. 미리 말해 두지만 그것은 결론이 아니라 연구가설이다. 이 글은 모든 문을 닫고 끝나지 않는다.

 

 

 

2. 두 종류의 '배타성' —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선택의 특수성

첫 번째 질문부터 정돈하자. 그 질문이 나왔을 때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예수님만이 길"이라는 방향으로 이어졌고, 요한복음 14장 6절이 함께 읽혔다. 기독교는 실제로 배타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맞는 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4:12)

 

그런데 나중에 곰곰이 돌아보니, "배타적이다"라는 말 안에 사실 서로 다른 두 층위가 포개져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그 두 층위를 구별하고 나서야, 그날의 질문이 무엇을 더 묻고 있었는지가 내게 선명해졌다.

 

첫째는 그리스도론적 배타성이다.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주장. 이것은 기독교가 분명하게, 부끄러움 없이 주장하는 배타성이다【A. 본문】.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다. 이 배타성은 언제나 활짝 열린 문과 함께 온다. 길은 하나뿐이지만, 그 길로 들어오라는 초청은 "누구든지"를 향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10:13)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22:17)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좁은 문이되 잠긴 문이 아니다. 문은 하나지만 그 문으로 들어오라는 복음의 초청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고,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된다.

 

둘째는 예정론적 특수성이다. 질문자의 문제의식이 실제로 향하고 있었던 지점은 이쪽이었던 것 같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으시는가? 그렇다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실제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던 것인가?" 이것은 "구원자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와는 전혀 다른 층위의 질문이다. 전자는 구원의 에 관한 질문이고, 후자는 "왜 어떤 사람만 그 길로 들어서게 되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구별하지 않으면 두 층위가 서로 겹쳐 들리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예정론 자체에서 제기된 깊고 정당한 질문이 "기독교는 원래 배타적입니다"라는 — 그 자체로는 옳은 — 대답과 겹쳐지면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한 채 마음에 남을 수 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은 첫 번째 배타성에 대한 답이지, 두 번째 특수성에 대한 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로 예정론의 어려움 때문에 그리스도의 유일성까지 부끄러워하게 될 수도 있다. 이 둘은 다른 질문이고, 다른 대답을 요구한다.

 

이 글의 나머지 전부는 사실상 그 두 번째 질문 — 그리고 뒤이어 나온 자유의지 질문 — 을 정면으로 다루려는 시도다. 그런데 그 질문에 곧장 뛰어들기 전에, 먼저 한 걸음 물러나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도대체 왜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서로 다른 신학에 도달하는가?

 

 

 

3. 우리는 정말 늘 '같은 성경'을 읽어 왔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서들을 읽다 보면 로마 가톨릭, 알미니안, 때로는 극단적 칼빈주의가 번갈아 등장하며 성경을 "오독"하는 사례로 지목된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나는 오래 멈춰 서게 되었다. 어떻게 같은 말씀을 이렇게 다르게 읽을까? 아니, 잠깐 — 정말 언제나 '같은 말씀'이었을까?

 

이 질문은 사실 세 개의 서로 다른 질문을 하나로 묶고 있다. 첫째, 정말 같은 정경(canon)을 읽었는가. 둘째, 정말 같은 본문(text)을 읽었는가. 셋째, 같은 정경과 본문을 읽었다 해도 같은 해석의 세계 안에서 읽었는가.

 

먼저 정경의 문제. 초대교회가 오늘 우리 책상 위에 놓인 것과 똑같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이 한 권으로 묶인 성경을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소유하고 있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아야 정확하다. 하나는 정경의 범위 자체가 아직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신약 27권과 정확히 같은 책들을 명확하게 열거한 현존 최초의 목록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의 367년 제39차 부활절 서신이다.[^2] 사복음서와 바울서신 같은 핵심은 매우 일찍부터 널리 인정되었지만, 히브리서·야고보서·베드로후서·요한이서와 삼서·유다서·요한계시록 등에서는 지역별 차이가 실제로 있었다. [^3] 다른 하나는, 확정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던 책조차 모든 개교회가 물리적으로 전부 소장했다고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2세기의 한 그리스도인의 실제 '성경 경험'은 개인이 소유한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 공동체가 소유한 사본들, 예배에서 낭독되는 문서, 기억된 사도적 가르침, 설교와 교리교육, 그리고 구약성경에 가까웠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결론이 하나 나온다. 초대교부의 신학을, 현대의 조직신학처럼 66권 전체를 동시에 펼쳐 놓고 종합한 결과라고 전제하면 안 된다. 그가 어떤 책을 알고 있었는가, 실제로 어떤 본문을 사용할 수 있었는가, 그의 지역 교회에서 무엇을 공적으로 읽었는가까지 살펴야 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제를 너무 크게 잡아서도 안 된다. 교부들의 성경 인용은 본문비평의 세 증거 — 그리스어 사본, 고대 역본, 교부 인용 —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지만, 브루스 메츠거가 지적했듯 특히 다루기 까다로운 증거이며, [^4] 더 큰 그림에서 보면 로마 가톨릭과 개혁주의, 개혁파와 알미니안의 차이를 "서로 다른 신약 사본을 읽어서"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종교개혁자들이 접한 본문과 오늘날의 비평본문 사이에 물론 차이는 있다. 그러나 로마서 9장, 에베소서 1장, 요한복음 6장 같은 결정적 논쟁 본문들이 한쪽 성경에는 있고 다른 쪽 성경에는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해석은 갈라진다. 그러니 이 글에서 다루는 주요 교리적 분기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에는 본문비평적(textual criticism) 차이보다 해석학적(hermeneutics) 차이가 훨씬 더 큰 변수라고 보아야 한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층위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무엇을 먼저 보는지가 다르다. 에베소서 1장의 동일한 헬라어 문장을 놓고도,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과하면서 읽고, 중세 신학자는 은총과 공로와 성례라는 거대한 체계 안에서 읽고, 루터는 죄책과 율법과 복음이라는 문제를 안고 읽고,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확실성이라는 틀에서 읽고,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 책임과 복음의 보편적 선포라는 질문을 가지고 읽는다. 본문은 같아도 질문이 다르다. 그리고 질문이 달라지면 눈에 들어오는 구절의 무게가 달라진다. 이것은 누군가 악의적으로 성경을 비틀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런 전제 없이 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에서도 이미 확인되는 현상이다. "유대교는 구약성경만 읽는 종교"라고 생각하면 1세기의 상황을 심하게 단순화하게 된다. 제2성전기 유대교에는 기록된 토라와 함께 해석 전통, 서기관, 회당, 성전, 여러 종파의 논쟁이 있었다. [^5]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실 때 양쪽은 성경을 몰라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지극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성경 해석을 놓고 싸운다. 안식일 논쟁이 대표적이다. 양쪽 모두 토라를 인정한다. 그런데 해석이 다르다. 그러니 예수님 시대부터 이미 "성경 → 해석 → 전통 → 공동체의 실천"이라는 층위가 존재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독특함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칼빈은 '전통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성경을 읽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었고, 교부들을 읽었고, 중세 해석 전통을 알고 있었으며, 라틴어 불가타와 헬라어 본문을 비교하며 읽었다.  [^6] 따라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역사적으로 정교하게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전통 없이 성경을 읽는다"가 아니라, "성경으로 전통을 계속 심판하고 교정한다."

 

교회는 필요하다. 신앙고백도 필요하다. 그러나 둘 다 성경 아래 있다. 계시에서 성경으로, 성경에서 공동체의 독해로, 독해에서 신앙고백과 전통으로, 그리고 그 전통이 다음 세대의 성경 읽기를 다시 형성하는 — 이 흐름은 일방향 화살표라기보다 순환에 가깝다. 그리고 그 순환의 건강함은 단 하나의 조건에 달려 있다. 성경이 언제나 그 순환 위에서, 전통을 교정할 권리를 실제로 행사하고 있는가.

 

그런데 바로 여기서 개혁주의 자신에게도 꽤 아픈 질문이 돌아온다. 이 논리를 로마 가톨릭과 알미니안에게만 적용할 수는 없다. 개혁주의자도 개혁주의 전통을 통해 성경을 읽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오래 공부하면 로마서에서 언약, 작정, 유효한 부르심, 견인이 굉장히 잘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전통의 사람은 같은 로마서에서 다른 연결을 먼저 발견할 수 있다. 개혁주의 역시 하나의 역사적·신학적 렌즈다. 렌즈가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렌즈가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 문제다.

 

마지막으로 독해 조건의 차이를 기억하자. 정경 전체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인쇄술로 복제되고, 원어 연구와 색인과 성구사전, 오늘날에는 디지털 검색까지 가능해진 시대의 독자는 2세기 그리스도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지 않는다. 우리가 더 신앙이 좋아서가 아니라 물질적·정경적 조건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대교부가 사도 시대와 시간적으로 가깝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지만, 그것이 자동으로 66권 전체를 종합하는 정경적 시야가 종교개혁 이후보다 뛰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종교개혁자들이 완성된 정경 전체를 볼 수 있었다고 해서, 사도적 전승에 훨씬 가까웠던 이레나이우스 같은 인물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뜻도 아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역사적 이점과 한계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처음 질문 — "어떻게 같은 말씀을 다르게 읽을까? 아니, 정말 같은 말씀이었을까?" — 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리된다. 완전히 같지도 않았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았다. 사본의 차이가 있었고, 정경 인식의 차이가 있었고, 접근 가능한 성경책의 차이가 있었고, 언어도 달랐다. 그러나 기독교의 주요 교리적 분열을 그 차이만으로 설명할 만큼 본문 자체가 달랐던 것은 아니다. 훨씬 더 큰 변수는 "어떤 공동체가, 어떤 역사적 질문을 가지고, 어떤 전승 안에서, 성경의 어느 부분에 상대적으로 더 큰 해석적 무게를 두며 전체를 읽었느냐"였다.

 

그리고 이 관점은 역설적으로 개혁주의의 또 하나의 원리를 더 중요하게 만든다. '성경 전체'(Tota Scriptura)라는 원리다. Sola Scriptura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Sola Scriptura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Tota Scriptura가 필요하다. 어떤 한 구절이 아니라, 완성된 정경 전체가 다른 구절과 우리의 전통적 독법을 끊임없이 교정하게 하는 것. 이 명제는 이 글의 뼈대이므로 뒤에서 별도의 장으로 다시 다루겠다. 지금은 먼저, 성경 자체가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자.

 

 

 

4. 성경이 두 가지를 함께 말하는 방식

이 두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직관과 만나게 된다.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 대부분이 이 주제 앞에 설 때 거의 자동으로 갖게 되는 직관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인간이 하는 것"은 시소의 양 끝과 같아서,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내려가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주권이 100이면 인간의 몫은 0이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성경을 실제로 펼쳐 보면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그 시소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정말로 두 종류의 언어가 공존한다. 한쪽에는 하나님의 선행적이고 주권적인 행위가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6:44–45)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

 

다른 한쪽에는 인간을 향한 실제 명령과 초청, 그리고 인간의 실제 반응이 있다. 회개하라. 믿으라. 오라. 순종하라. 그리고 이 글의 서두에서 이미 인용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초청 —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22:17).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이 둘이 서로 다른 책에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문장, 같은 단락 안에 들어 있는 경우다. 몇 곳을 실제로 읽어 보자.

 

요한복음 6장 37절부터. 이 한 절 안에 세 개의 행위가 있다. 아버지께서 주신다(아버지의 행위). 그들이 온다(인간의 행위). 내가 내쫓지 않는다(그리스도의 행위). 헬라어로 "올 것이요"는 ἥξει헤크세이, 미래 직설법이다. "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의 "옴"을 미래의 사실로 서술한다. [^7] 그런데 그 확실하게 일어나는 일은 다름 아닌 그들의 옴이다. 아버지의 주심이 그들의 옴을 대신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주심이 그들의 옴을 확실하게 만든다. 44절은 더 강하다. "아무도 올 수 없으니"(οὐδεὶς δύναται ἐλθεῖν우데이스 뒤나타이 엘테인) — 인간의 무능에 대한 명시적 진술이다【A. 본문】. 그런데 45절은 그 이끄심의 내용을 "아버지께 듣고 배움"으로 설명하고, 듣고 배운 사람"마다"(πᾶς파스) 내게로 온다고 말한다. 이끄심은 옴을 폐기하지 않는다. 이끄심의 열매가 옴이다.

 

빌립보서 2장 12–13절. 이 본문은 거의 압축판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2–13)

 

12절의 "이루라"는 헬라어 κατεργάζεσθε카테르가제스데, 명령형이다. [^8] 바울은 실제 사람들에게 실제 행동을 요구한다. 그런데 13절이 곧바로 그 이유를 댄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ὁ ἐνεργῶν호 에네르곤)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리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이 무엇인가.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καὶ τὸ θέλειν καὶ τὸ ἐνεργεῖν카이 토 텔레인 카이 토 에네르게인) — 바울은 하나님이 신자들 안에서 원함과 행함 모두에 역사하신다고 말한다. 여기서 현대인의 직관과 바울의 논리가 정면으로 엇갈린다. 우리의 직관은 "하나님이 하신다면 → 내가 할 필요가 없다"로 흐르기 쉽다. 그런데 바울의 접속사는 γάρ가르, "왜냐하면"이다.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 너희가 이루라." 하나님의 행하심은 인간의 행함을 면제하는 근거가 아니라 명령하는 근거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divine agency, 하나님께서 행위의 주체가 되심)와 인간의 행위(human agency, 인간이 행위의 주체가 됨)를 제로섬 게임으로 만들지 않는다.

 

신명기 29–30장. 토라의 한복판에도 같은 구조가 있다. 모세는 먼저 이스라엘의 무능을 선언한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깨닫는 마음조차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인데, 아직 주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장 뒤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장차 하실 일을 약속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30:6)

 

마음의 할례를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목적은 "사랑하게 하사"다. 그런데 놀랍게도 같은 신명기 안에는 정반대 방향의 명령도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너희가 할례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할례하실 것이다 — 명령과 약속이 한 책 안에서 경쟁하지 않고 공존한다. [^9] 그리고 30장은 그 유명한 실제 선택의 촉구로 이어진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신30:19–20)

 

하나님이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이다(30:6). 그러니 생명을 택하라(30:19). 토라는 이 둘을 나란히 놓고 어느 쪽도 철회하지 않는다.

 

에스겔 36장.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새 언약의 약속에서는 주어가 거의 전부 하나님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6:26–27)

 

내가 두겠다, 내가 주겠다, 내가 제거하겠다, 내가 행하게 하겠다 — 그리고 그 결과는 "너희가 지켜 행할지라"다. 하나님의 행하심의 종착점이 인간의 실제 행함이다.

 

사도행전 16장의 루디아. 이 구조는 교리 본문만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도 나타난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행16:14)

 

주께서 마음을 여셨다. 그리고 루디아가 들었고, 따랐고, 세례를 받았고, 자기 집으로 사도들을 청했다. 마음을 여는 것은 주님의 일이고, 듣고 따르고 청하는 것은 루디아의 일이다. 누가는 이 둘을 한 문장에 담고 아무런 긴장도 느끼지 않는다.

 

마태복음 11장. 어쩌면 가장 놀라운 병치는 여기 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주권적인 숨기심과 나타내심을 감사하신 직후의 말씀을 보라.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기뻐하신 뜻이니이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5–26, 28)

 

숨기시고 나타내시는 아버지의 기뻐하신 뜻(주권) 바로 다음 숨에, "다 내게로 오라"(초청)가 나온다. [^1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7절이 유기 교리의 증거본문으로 바로 이 마태복음 11장 25–26절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뒤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11] 그런데 예수님 자신의 입에서는 그 주권의 선언과 만인을 향한 초청 사이에 단 두 절의 거리밖에 없다.

 

이 본문들을 나란히 놓고 나면 하나의 결론이 떠오른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실제 응답을 어설프게 조정하지 못해서 둘 다 남긴 것이 아니다. 성경의 인간관 자체가 둘을 경쟁 관계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일하실수록 인간의 인격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을 참으로 원하는 자, 믿는 자, 사랑하는 자, 순종하는 자로 만든다. 왜 성경 자체가 이 두 종류의 언어를 동시에 보존하고 있는지 — 그것을 묻는 것이 어느 한쪽을 지워 긴장을 없애는 것보다 훨씬 성경적인 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역사 속에서 이 두 언어를 어떻게 읽어 왔는가.

 

 

 

5. 초대교회는 어떻게 읽었는가 — 이레나이우스, 크리소스토무스, 그리고 후기 아우구스티누스

"초대교회는 이렇게 생각했다"라고 단수형으로 말하는 순간 이미 곤란해진다. 초대교회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시대마다 싸우고 있던 질문이 달랐다. 그래서 여기서는 "초대교회는 모두 자유의지를 믿었다"는 단순화도, "초대교회는 이미 칼빈주의였다"는 시대착오도 피하면서, 적어도 세 인물의 흐름을 따라가 보려 한다.

 

이레나이우스(약 130–202). 2세기 리옹의 감독 이레나이우스가 《이단논박》 4권에서 인간의 자유를 그토록 강조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의 적수는 영지주의자들, 특히 발렌티누스파였다. 이레나이우스의 보고에 따르면, 발렌티누스파는 인간을 본성(nature)에 따라 세 부류로 구분했으며, 어떤 부류는 본성상 구원받고 어떤 부류는 본성상 멸망한다고 가르쳤다. [^12] 구원과 멸망이 인격적 응답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앞에서 이레나이우스는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며,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존재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13]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책임을 질 수 있는 도덕적·인격적 피조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의 책임이 성립하려면 실제적인 순종과 불순종이 있어야 했다. 주목할 것은 그의 관심의 방향이다. 이레나이우스는 후기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타락한 인간에게서 믿음의 최초 원인은 정확히 어디서 오는가"를 미세하게 분석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가 지키려던 것은 "인간은 고정된 본성의 노예가 아니라 응답하는 인격이다"라는 사실이었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약 349–407). 4세기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의 이 위대한 설교자에게 요한복음 6장 44절은 피해 갈 수 없는 본문이었다. 그의 요한복음 강해(46번 설교)를 보면, 당시에 이미 이 구절을 들어 "그렇다면 우리에게 달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 크리소스토무스는 그 해석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그에게 아버지의 "이끄심"은 인간의 자유의지(그의 용어로는 τὸ αὐτεξούσιον토 아우텍수시온,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를 제거하는 강제가 아니라, 인간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크리소스토무스도 인간의 무능을 실제로 인정한다. 큰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올 수 없다. 다만 그는 그 도움이 의지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45절의 "듣고 배운 사람마다"를 조건 없는 모든 사람이라기보다 기꺼이 배우려는 자들 쪽으로 읽는다. 로마서 9장 강해에서도 그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와 토기장이 비유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본문을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읽지 않는다. [^15] 적어도 이 본문들에서 그의 직접적인 전선 가운데 하나는 마니교적 결정론과, 그로 인해 인간의 실제 책임과 권면이 무의미해지는 해석이었다.

 

후기 아우구스티누스(354–430). 그런데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서방에서 질문의 무게중심이 크게 이동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그 이동의 산 증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그런데 주후 396년경, 로마서 9장을 다시 붙들고 씨름하던 중(《심플리키아누스에게》) 그의 독법이 뒤집힌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시기의 작업을 회고하며, "이 문제를 풀면서 나는 인간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을 위해 애썼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이겼다"고 적었다. [^16] 그를 굴복시킨 결정적인 본문 하나가 고린도전서 4장 7절이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전4:7)

 

믿음까지 포함하여,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펠라기우스 논쟁과 그 이후의 반(半)펠라기우스 논쟁을 거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은 더욱 정밀해진다. "사람이 믿는 그 최초의 선한 움직임은 어디서 오는가?"(unde initium fidei?) 그의 후기 대답은 분명했다. 믿음의 시작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17] 그는 요한복음 6장 44–45절을 해석하면서 외적으로 복음을 듣는 것과 성부께 내적으로 배우는 것을 구별했고, 아버지께 참으로 듣고 배운 사람은 단지 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온다고 읽었다 — 그 내적 가르침 자체가 효력 있는(effectual) 은혜라는 것이다. [^18] 에베소서 1장 4절을 읽는 그의 방식도 유명하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4)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해질 것을 미리 보시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택하셨다. 선택은 예견된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거룩을 만들어 내는 은혜다.

 

이제 세 사람을 나란히 놓아 보자. 이레나이우스와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강제되는 기계로 만들지 않으셨다." 후기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그렇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그 선한 의지 자체는 어디서 왔는가? 은혜에서 왔다." 이 둘은 서로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기보다, 정확히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다. 전자의 전경에는 영지주의적 본성 결정론과 운명론이 있었고, 후자의 전경에는 펠라기우스가 있었다. 질문이 달라지자 같은 정경의 어떤 부분이 전경화되는지가 달라졌다. 우리가 3장에서 이론적으로 말했던 것 — 독자의 역사적 질문이 어떤 성경 구절을 전경으로 끌어올리는가 — 의 살아 있는 실례가 바로 초대교회 안에 있다.

 

 

 

6. 루터와 칼빈 — 의무와 능력,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

종교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후기 질문을 이어받아 훨씬 더 밀어붙인다.

 

루터. 1524년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내놓자, 루터는 이듬해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 1525)으로 응답한다. [^20] 에라스무스의 핵심 논거 중 하나는 상식적이다. 성경에 "회개하라", "믿으라", "생명을 택하라" 같은 명령이 가득하지 않은가.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부조리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명령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에게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루터의 대답이 이 논쟁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명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은혜 없이 그것을 수행할 자연적 능력이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21] 율법의 명령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의무, duty)을 보여 주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능력, ability)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의 무능을 드러내어 우리를 은혜로 내몬다 —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이처럼 명령이 무엇을 요구하는가와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구별하는 논리는 이후 개혁신학에서도 반복해서 사용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은혜 없이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가 논리적으로 따라 나오지 않는다. 덧붙이면, 루터가 인간의 모든 자유를 부정한 것도 아니다. 그는 '아래의 일들' — 먹고 마시고 일하는 시민적 삶 — 에서의 자유는 인정했다. 그가 부정한 것은 타락한 인간이 은혜 없이 '위의 일들', 곧 하나님을 향한 영적 선을 스스로 의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22]

 

칼빈. 칼빈은 우리가 4장에서 발견한 '두 언어'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의 도구는 두 가지 구별이다. 첫째, 필연(necessitas)과 강제(coactio)의 구별. 타락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만, 강제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꺼이, 자원하여 죄를 짓는다. 죄의 필연성은 외부의 강압이 아니라 부패한 본성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에, 죄인은 여전히 자기 죄에 책임이 있다. 칼빈은 이 구별을 아우구스티누스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서 물려받았다. 그에게 타락은 의지의 존재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의지의 건전함을 파괴한 것이다 — 사람에게서 제거된 것은 의지가 아니라 의지의 온전함이다(《기독교강요》 2권). [^23] 둘째, 외적 부르심과 내적·효력적 부르심의 구별. 복음은 실제로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선포된다(외적 부르심). 그러나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조명하시고 실제로 그리스도께 이끄시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내적 부르심). 칼빈은 요한복음 6장 44–45절을 후기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효력적 이끄심의 방향에서 읽으며, 다른 예정론 논의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해석을 명시적으로 원용한다. [^24] 아버지께 참으로 배운 사람은 올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실제로 온다. 그 내적 가르침은 효력이 있다. 그러면서도 칼빈은 인간의 실제 믿음과 불신앙을 지우지 않는다. "예루살렘아 …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같은 본문 앞에서 그는 인간의 실제 거부를 실제 거부로 남겨 둔다. [^25] 다만 그 거부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실패시키지는 못한다고 본다.

 

여기까지 오면 하나의 계보가 또렷하게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 → 루터·칼빈 → 웨스트민스터.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글의 방법론적 원칙 하나를 다시 새겨야 한다. 이레나이우스도, 크리소스토무스도, 아우구스티누스도, 루터도, 칼빈도 — 아무리 위대해도 — 성경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 층위를 구별해야 한다. 성경 본문 → 역사적 해석 → 조직신학적 체계. 종교개혁자들은 권위 있는 해석자이지, 성경 자체와 동일한 위치에 있지 않다. 이 구별은 그들 자신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원칙이기도 하다.

 

 

 

7. 요약과 실제 사이 —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실제 쟁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6/47)는 도르트 회의(1618–19) 이후의 문서다. [^26] 그러니 알미니안 논쟁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고백서의 강조점도 정확히 읽을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요약과 실제 사이의 거리를 한 번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교회 교육에서는 복잡한 역사 논쟁을 짧은 시간에 전달하기 위해 요약이 불가피하고, 나 역시 그 요약의 도움으로 배워 왔다. 다만 이 글의 목적상, 널리 쓰이는 요약과 역사적 아르미니우스·항론파의 자기진술을 한 번 구별해 둘 필요가 있다.

 

알미니안주의는 종종 이렇게 요약된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이다. 인간이 자기 의지로 회개할 수 있고,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좌우된다고 본다." 그런데 역사적 아르미니우스(1560–1609)와 1610년 항론파(Remonstrants)의 고전적 알미니안주의를 실제로 읽어 보면 그림이 다르다. 항론파 신조 제3조는 대략 이렇게 고백한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는 참으로 선한 것을 생각할 수도, 원할 수도, 행할 수도 없으며, 반드시 거듭나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새롭게 되지 않으면 구원 얻는 믿음에 이를 수 없다. [^27] 즉 고전적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전적 무능과 은혜의 절대적 필요를 인정한다. [^28] 그들이 이 논쟁에서 중요하게 사용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선행은총(先行恩寵, prevenient grace)이다. [^29] 아르미니우스와 항론파에게도 구원의 응답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만 이 선행은총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과 범위로 주어지는지를 후대 웨슬리안 알미니안주의의 보편적 선행은총 교리와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은혜 없이 스스로 구원을 시작한다"는 설명은, 고전적 알미니안주의 자체보다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더 가까운 묘사다. 요약으로는 유용할 수 있지만, 역사적 알미니안주의의 자기진술과는 구별해 두어야 한다.

 

요약과 실제를 구별하고 나면 진짜 쟁점이 선명해진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실제 논쟁은 은혜가 필요한가가 아니다. 양쪽 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논쟁은 세 지점에 있다. 첫째, 그 은혜는 효력이 있는가(effectual), 아니면 저항 가능한가(resistible)? 항론파 제4조는 은혜가 불가항력적이지 않다고 했고, [^30] 도르트는 중생시키는 은혜가 반드시 그 목적을 이룬다고 했다. [^31] 둘째,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최종적으로 구별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개혁파의 비판은 바로 여기에 집중된다. 동일하거나 충분한 은혜가 주어졌는데 어떤 이는 믿고 어떤 이는 믿지 않는다면, 그 최종적 차이를 무엇이 설명하는가. 개혁파는 그 구도에서 결정적 차이가 결국 인간의 비저항(non-resistance)에 귀속된다고 비판했고, 알미니안 측은 믿음이나 은혜를 받아들이는 행위를 독립적 공로나 은혜와 동등한 원인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32] 셋째, 선택의 조건과 믿음의 관계 — 선택은 믿는 자를 구원하기로 하신 조건적 작정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항론파), 아니면 특정한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선택이 믿음을 그 열매로 산출하는가(도르트 개혁파). [^33]

 

이 진짜 쟁점을 놓고 성경 본문을 다시 보면, 이 글은 양비론으로 도망가지 않겠다. 요한복음 6장 44절의 인간의 무능, 에스겔 36장의 하나님의 선행적 심령 갱신, 로마서 9장의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 빌립보서 2장 13절의 "원함"까지 일으키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6장 37절의 "주시는 자는 다 올 것이요"의 확실성 — 이 본문들은 하나님의 주도(divine initiative)와 은혜의 효력이라는 개혁파의 독법에 강한 본문적 근거를 제공한다【B. 추론】. 나는 이것을 명확히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 그리고 이것이 이 글 전체의 관건인데 — 로마서 10장의 믿음과 불순종, 로마서 11장 20–23절의 경고와 믿음·불신앙, 신명기 30장의 실제 명령과 선택, 출애굽기에서 바로 자신이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서술을, 조직신학적 체계를 지키기 위해 약화시켜서도 안 된다. 두 계열의 본문을 모두 보존하는 체계만이 성경 전체에 충실한 체계다. 그렇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어느 쪽인가. 이제 고백서 자체를 펼칠 차례다.

 

 

 

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9·10장을 감사(audit)하다

이제 이 글의 중심 작업으로 들어간다. 감사(audit)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고백서를 옹호하기 위해 읽지도, 공격하기 위해 읽지도 않을 것이다. 회계 감사관이 장부를 대조하듯, 다음 세 질문을 들고 공정하게 대조할 것이다.

WCF는 성경에 없는 체계를 성경 위에 덮어씌웠는가? 아니면 성경에 실제로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효력적 은혜의 언어를 정교하게 체계화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의 어떤 언어가 전경화(前景化)되고 어떤 언어가 후경화(後景化)되었는가?

8.1. WCF 3장 — 예정론의 첫 문장부터 자유의지를 보호한다

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관하여」의 첫 조항(3.1)을 직접 읽어 보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기 뜻의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유롭고 변함없이 정하셨다(ordain whatsoever comes to pass).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시는 것도 아니고, 피조물의 의지에 폭력이 가해지는 것도 아니며(nor is violence offered to the will of the creatures), 제2원인들의 자유나 우연성이 제거되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굳게 세워진다." (WCF 3.1) [^34]

 

놀랍게도 예정론은 그 첫 문장에서부터 단서를 단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작정하시지만, 피조물의 의지에 폭력이 가해지지 않는다. 이 단서를 빼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만 가르치면 WCF 예정론의 절반만 가르치는 셈이다. WCF가 말하는 예정은 강제(coercion)가 아니다.

 

이어서 3장은 선택과 유기를 전개한다.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미리 정해졌다(3.3). 선택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졌으며, 믿음이나 선행이나 그 견인을 미리 보셨기 때문이 아니다(3.5). 그리고 3.7은 이렇게 말한다.

"나머지 인류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자기 뜻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따라 — 그 뜻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며 —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을 지나치시고(to pass by), 그들의 죄로 인하여(for their sin) 치욕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시기를 기뻐하셨으니, 이는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WCF 3.7)

 

여기서 고백서 자체의 비대칭 하나를 눈여겨보라. 선택의 원인은 오직 은혜다. 그러나 정죄의 근거에는 "그들의 죄로 인하여"가 명시된다. [^35] 고백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죄와 무관하게 임의로 지옥에 던지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3.8은 이 교리 전체에 경고 표지판을 세운다.

"이 예정의 높은 신비의 교리는 특별한 신중함과 주의로 다루어져야 한다(handled with special prudence and care)…" (WCF 3.8) [^36]

 

예정론의 목적은 호기심의 충족이 아니라 겸손과 찬양과 위로, 그리고 복음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이다.

 

8.2. WCF 9장 — 자유의지에 통째로 바친 한 장

고백서가 자유의지를 부정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종종 놓치는 사실이 있다. 고백서에는 「자유의지에 관하여」라는 장이 따로 있다. 9장이다. 첫 조항은 노골적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지에 본성적 자유(natural liberty)를 부여하셨으니, 그것은 강요되지도 않고, 본성의 어떤 절대적 필연에 의하여 선이나 악으로 결정되지도 않는다." (WCF 9.1) [^37]

 

인간은 로봇도, 아바타도 아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질문이 중요하다. 여기서 '자유'란 무엇을 뜻하는가. WCF가 말하는 자유는 "동일한 조건에서 A와 B 중 어느 쪽이든 똑같이 선택할 수 있어야 자유다"라는 현대적 의미의 자유 — 철학에서 자유지상주의적 자유(libertarian freedom)라고 부르는, 모든 선행 조건이 동일해도 달리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자유 — 가 아니다. 고백서의 자유는 그보다 "강제 없이, 자신의 본성과 원함을 따라 자발적으로 행한다"에 가깝다. 하나님의 결정적 주권과 인간의 자유·책임이 양립할 수 있다고 보는 이런 구조는 오늘날 흔히 양립론적(compatibilist)이라고 설명되지만, WCF의 자유론을 현대 철학의 특정한 양립론과 그대로 동일시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38] 물론 17세기 문서에 20세기 철학 용어를 그대로 붙이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 최근 연구는 개혁파 정통주의의 자유론을 현대 양립론과 단순 동일시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시대착오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최소한 이것은 분명하다. WCF는 근대적 자유지상주의적 자유를 전제하지 않으며, 그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인간의 실제 자발성과 책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9.3은 자유와 능력을 분리한다.

"사람은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써, 구원에 수반되는 영적 선을 향한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그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고 죄 가운데 죽어 있어서, 자기 힘으로 회심할 수도 없고 스스로 회심을 준비할 수도 없다." (WCF 9.3) [^39]

 

이 조항의 증거본문이 바로 요한복음 6장 44절과 65절이다. 여기서 핵심 구별이 나온다. 의지가 없는 것과 의지가 영적으로 무능한 것은 다르다. WCF에게 불신자는 "그리스도를 너무나 믿고 싶은데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막고 계신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타락한 본성을 따라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불신은 여전히 그 사람 자신의 실제 의지에서 나오고, 책임도 실제다.

그러면 중생 때 하나님은 그 의지를 없애 버리시는가. 9.4가 답한다.

"하나님이 죄인을 회심시키셔서 은혜의 상태로 옮기실 때, 그를 죄 아래 있던 본성적 속박에서 해방하시고, 오직 그의 은혜로 그가 영적으로 선한 것을 자유롭게 원하고 행할 수 있게 하신다(freely to will and to do that which is spiritually good)." (WCF 9.4) [^40]

 

이 조항의 증거본문이 빌립보서 2장 13절이다. 은혜는 의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한다.

 

8.3. WCF 10.1 — 우리가 4장에서 읽은 바로 그 본문들의 모자이크

그리고 10장 「유효한 부르심에 관하여」의 첫 조항. 이 조항은 이 글의 4장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들이 거의 그대로 짜여 들어간 모자이크다. 길지만 전문을 읽을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생명으로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오직 그들만을(those only), 정하시고 받으신 때에 자기의 말씀과 성령으로써, 그들이 본성상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효력 있게 부르신다.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밝혀 하나님의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 같은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renewing their wills),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의지를 선한 것으로 결정하시며(determining them to that which is good),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효력 있게 이끄신다. 그러나 그들은 지극히 자유롭게 나아오니,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yet so, as they come most freely, being made willing by his grace)." (WCF 10.1) [^41]

 

증거본문 배치를 보면 이 조항이 어디서 왔는지 그대로 드러난다. [^42]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 같은 마음을 주시며"에는 에스겔 36장 26절이,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 선한 것으로 결정하시며"에는 신명기 30장 6절, 에스겔 11장 19절과 36장 27절, 빌립보서 2장 13절이, "효력 있게 이끄신다"에는 요한복음 6장 44–45절이 붙어 있다(판본에 따라 세부는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마지막의 "기꺼이 원하게 되었기 때문"에는 전통적으로 시편 110편 3절 — 흠정역으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자원하리이다(Thy people shall be willing)" — 과 요한복음 6장 37절이 놓인다. 적어도 고백서에 부착된 증거본문 배열은, 10.1의 각 표현이 우리가 이미 읽은 겔 36장, 신 30장, 빌 2장, 요 6장의 성경 언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특별히 인상적인 사실 하나.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부착한 증거본문 배열에서는 신명기 30장의 양쪽이 모두 사용된다. 9.1(의지는 강요되지 않는다)의 증거본문은 신명기 30장 19절 — "생명을 택하라" — 이고, 10.1(하나님이 의지를 새롭게 하신다)의 증거본문은 신명기 30장 6절 — "여호와께서 네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 이다. 같은 장의 명령과 약속을 각각 제자리에 배치한 것이다. 적어도 여기서는 "WCF가 인간 책임의 언어를 지웠다"고 비판하기 어렵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수업에서는 성령께서 사람을 "아바타"처럼 조종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마음과 힘을 주셔서 신자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반응하게 하신다고 설명하셨다. 그 설명은 사실 WCF 10.1의 마지막 문장과 정확히 같은 말이다. 다만 한 가지를 더 정밀하게 말할 수 있다. WCF 10.2는 사람이 성령으로 살아나 새롭게 되기까지는 이 부르심에 대하여 전적으로 수동적(altogether passive)이라고 말한다. [^43]중생을 일으키는 원인에 관해서라면 하나님 100, 인간 0이다 — 이것을 신학 용어로 단독사역론(monergism, '홀로'를 뜻하는 monos와 '일'을 뜻하는 ergon의 합성어로, 중생이 하나님 홀로의 사역이라는 뜻)이라 부른다. 그러나 중생한 인간이 믿고 회개하고 응답하는 행위에서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이 대신 믿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대신 회개하시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죄를 슬퍼하고,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내가 하나님께 돌아간다. 다만 내가 그렇게 기꺼이 원하도록 하나님께서 나의 의지를 새롭게 하신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 질문에 대한 개혁파의 정밀한 답이 나온다. 수업에서 일상의 선택을 예로 들어 인간 의지의 실재를 설명하고, 이어서 성령의 인격적 역사와 신자의 자발적 반응을 말한 것은 정확히 이 방향이었다. 여기서는 수업에서 이미 나온 그 통찰을 WCF 9장과 10장의 용어로 한 단계만 더 구분해 보려 한다. 핵심은 다음 두 명제가 전혀 다른 명제라는 것이다.

"구원의 근거(ground)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다." — 이것은 참이다.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는 무의미하다." — 이것은 거짓이다.

 

구원의 원인과 근거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의 경험과 삶에서 인간의 의지는 무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은혜는 의지를 되살려 실제로 원하고 믿고 사랑하게 만든다.

8.4. 중간 감사 결과 — 그리고 남는 것

여기까지의 감사 결과를 층위별로 정리하면 이렇다. 타락한 인간의 영적 무능(9.3)은 요한복음 6장 44절 등에서 강하게 추론된다【B. 추론】.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신다는 10.1의 언어는 상당 부분 성경 본문의 직접 인용에 가깝다【A. 본문】. 그러나 영생과 영원한 사망을 함께 작정의 범주 안에 놓는 3.3의 포괄적 구조, 그리고 작정과 피조물의 자유가 어떻게 양립하는지에 대한 3.1의 통합적 설명은, 성경 자료를 아우구스티누스-개혁파의 질문에 따라 정리한 조직신학적 구성이다【C. 구성】 — 뒤에서 보겠지만 그 구성 자체도 성경의 서술 방식에 뿌리가 없지 않다.

 

그런데 첫 번째 질문, "배타적이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고백서를 변호하려고 너무 빨리 넘어가면 안 된다. 정직하게 말하자. WCF는 실제로 배타적이다.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10.4는 그리스도 밖의 별도 구원의 길을 인정하지 않는다(그리스도론적 배타성). 그리고 3장과 10.1의 "오직 그들만을"은 선택이 보편적이지 않다고 명시한다(선택의 특수성). 그러므로 "예정된 자들이라고 하니 배타적으로 느껴진다"는 반응은 WCF를 오해해서 생긴 감정만은 아니다. WCF가 실제로 주장하는 내용에서 발생하는 정당한 신학적 질문이다. 그러면 WCF는 "왜 그 사람은 선택받지 못했는가"에 답하는가. 부분적으로만 답한다. 3.7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뜻, 주권, 긍휼을 베풀거나 거두시는 자유, 죄에 대한 공의를 말한다. 그러나 "왜 A는 택하고 B는 택하지 않으셨는가"의 개별적인 이유는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3.8은 이 교리를 특별한 신중함으로 다루라고 명하며 사실상 이렇게 말한다. 그 비밀을 네가 안다고 주장하지 말라. 이것은 고백서 스스로 세운 한계선이다.

 

그렇다면 이제 결정적인 검증이 남았다. 고백서의 이 모든 명제는 로마서 9장의 특정한 독해 위에 서 있다. WCF 3장의 증거본문 배열을 보면 [^44] 3.1에 로마서 9장 15, 18절과 11장 33절, 3.2에 9장 11, 13, 16, 18절, 3.3에 9장 22–23절, 3.5에 9장 11, 13, 16절, 3.7에 9장 17–18, 21–22절이 집중적으로 사용된다. 즉 WCF 예정론의 상당 부분이 로마서 9장의 독해에 달려 있다. 그런데 로마서 9장은 원래 홀로 서 있는 장이 아니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하나의 연속된 논증이다. 그 논증 전체를 복원한 다음, 그 위에 WCF 3장의 형광펜을 칠해 보자.

 

 

 

9. 로마서 9–11장 — 잘려 나간 논증을 복원하기

로마서 9장은 예정론 논쟁에서 너무 자주 '떼어져서' 읽혀 왔다. 그러나 바울은 9장을 쓰고 붓을 놓지 않았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하나의 문제에서 출발해 하나의 송영으로 끝나는 긴 연속 논증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45] 형광펜을 들기 전에, 먼저 아무 색도 칠하지 않은 채 그 논증 전체를 통독해 보자.

 

9:1–5 — 문제는 교리가 아니라 통곡에서 시작된다. 바울의 출발점은 "하나님은 개인을 어떻게 천국과 지옥으로 예정하시는가"라는 추상적 질문이 아니다. 그의 출발점은 찢어지는 마음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1–3)

 

이스라엘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들과 조상들이 있고,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까지 그들에게서 나셨다(9:4–5). 그런데 왜 그토록 많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메시아를 거부하는가. 그렇다면 이 신학적 위기가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실패한 것인가? 로마서 9–11장 전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46]

 

9:6–29 — 첫 번째 답: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9:6)

 

바울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 에서가 아닌 야곱의 사례로 논증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문장들이 나온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9:11–13)

그러자 바울 스스로 반문을 제기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9:14). 그리고 출애굽기 33장의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하며 결론짓는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5–16)

 

이어서 바로가 등장한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9:17–18)

 

바울은 두 번째 반문도 스스로 제기한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9:19). 그리고 토기장이의 비유로 답한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롬9:20–23)

 

여기까지가 WCF 3장이 가장 진하게 칠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정직하게 인정하자. 이 본문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의 자유를 정말로, 매우 강하게 말한다【A. 본문】. 반대로 로마서 9장을 오직 민족적·구속사적 선택만의 문제로 제한하여 개인의 구원과 전혀 무관한 본문으로 만드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바울의 논증은 이스라엘이라는 구속사적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그 안에서 부르심·긍휼·믿음·구원의 문제를 함께 다룬다. 다만 두 가지는 함께 기억해야 한다. 첫째, 바울의 출발 질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구속사적 문제였다는 것. 둘째, 토기장이 비유의 중요한 구약 배경 가운데 하나인 예레미야 18장에서 토기장이는[^47] 고정된 운명을 찍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진흙의 상태에 따라 그릇을 다시 만들고,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내리려던 재앙을 돌이키시는 분으로 그려진다는 것(렘 18:1–10). 그리고 9:22의 "멸하기로 준비된"(κατηρτισμένα)은 준비한 주체를 명시하지 않는 수동 표현인 반면, 9:23의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προητοίμασεν)은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능동 표현이다[^48] —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이 예비하셨다고 명시하면서,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는 문장이 미묘하게 절제한다. 이 문법적 비대칭만으로 바울의 예정론 전체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후대의 개혁파 정통주의가 선택과 유기를 정확히 대칭으로 다루지 않으려 했던 것(WCF 3.7의 "그들의 죄로 인하여")과 공명하는 것은 사실이다【B. 추론】.

 

9:30–10:21 — 두 번째 답: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인간의 책임으로 전환한다.[^49] 여기가 결정적이다.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9:18)라고 썼던 바로 그 바울이, 같은 논증의 바로 다음 단락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롬9:30–32)

 

이스라엘은 왜 실패했는가.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셨기 때문에? 바울이 여기서 실제로 쓴 대답은 이것이다.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에. 두 대답은 같은 논증 안에 나란히 있고, 바울은 어느 쪽도 철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10장이 열리면 바울은 기도한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롬10:1)

 

주목하라. 9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그토록 강하게 말한 사람이, 10장 첫 절에서는 현재 복음을 믿지 않는 동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바울에게 예정 교리는 전도와 기도를 무력화하는 교리가 아니었다. 이어서 10장은 신약에서 가장 열린 초청의 언어를 쏟아낸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10:9–13)

 

"누구든지." 그리고 그 초청이 실제로 사람에게 닿기 위한 사슬 — 보냄, 전파, 들음, 믿음 — 이 이어진다(10:14–15).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는가.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6–17)

 

그리고 10장의 마지막 절, 이 논증 전체에서 가장 가슴 아픈 문장이 나온다. 이사야 65장 2절의 인용이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롬10:21)

 

9장의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는" 분이다. 10장의 하나님은 그 완악한 백성에게 온종일 손을 벌리고 계신 분이다. 같은 하나님, 같은 바울, 같은 논증이다.

 

11:1–10 —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롬11:1)

 

바울 자신이 반례다. 그리고 엘리야 시대의 칠천 명처럼, 지금도 남은 자가 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롬11:5–6)

 

나머지는 우둔하여졌다(11:7). 그런데 바울이 그 우둔함을 설명하며 인용하는 본문이 어디인지 보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11:8) — 이 문장은 신명기 29장 4절과 이사야 29장 10절의 언어를 함께 반향한다.[^50] 우리가 4장에서 읽었던 "보는 눈과 듣는 귀"의 토라적 언어가 여기 다시 등장한다. 바울의 완악 신학은 토라에서 왔다. 이 실마리는 12장에서 다시 붙잡을 것이다.

 

11:11–24 — 이스라엘의 넘어짐도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11:11)

 

이스라엘의 넘어짐 → 이방인의 구원 → 이스라엘의 시기 → 이스라엘을 다시 얻음. 논증이 또 한 번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감람나무 비유에서, 이 글 전체의 열쇠가 되는 구절들이 나온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롬11:20–23)

 

꺾인 이유는 믿지 아니함이고, 서 있는 근거는 믿음이다. 이방인 신자를 향해서는 교만하지 말고 두려워하라는 실제 명령이 떨어진다. 그리고 지금 꺾여 있는 가지들조차,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 다시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 —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11:25–32 —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신비'라고 부른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롬11:25)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전체가 아니라 "부분적으로"(ἀπὸ μέρους) 일어난 것이며, 바울은 그것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ἄχρι οὗ)라는 구속사적 시간표 안에 놓는다.[^51] 이 표현만으로 이후의 모든 세부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바울이 이스라엘의 현재 완악함을 단순히 정적인 최종 상태로만 기술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11:28–29)

 

원수이면서 동시에 사랑을 입은 자 — 바울은 이 모순 같은 이중 서술을 태연히 유지한다. 그리고 논증 전체의 대단원이 온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11:30–32)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가 불순종 아래 있었고, 모두가 긍휼 외에는 살 길이 없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 논증의 마지막에야 — 송영이 터져 나온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11:33). 이 송영은 결론에서 전문을 읽을 것이다.

 

이제 로마서 9–11장의 전체 모양이 보인다. 그것은 "예정 → 끝"이 아니다. 대략 이런 흐름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이라는 문제 →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 → 이스라엘 자신의 불신앙과 책임 → 누구든지를 향한 복음의 보편적 선포 → 은혜로 택하신 남은 자 → 이방인의 구원 → 이방인을 향한 교만 금지 경고 → 꺾인 가지의 재접붙임 가능성 → 부분적이고 한시적인 완악함이라는 신비 → 모두를 불순종 아래 가두심은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 → 송영. 바울은 이 긴장 자체를 제거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신다. 동시에 인간이 믿고,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복음을 들어야 하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바울은 그 완전한 작동 원리를 다 설명했다고 주장하는 대신 경배한다.

 

이것이 캔버스다. 이제 형광펜을 들자.

 

 

 

10. 형광펜을 들고 — WCF 3장의 증거본문을 로마서 9–11장 위에 칠하면

이제 실험을 하나 하자. 방금 통독한 로마서 9–11장 위에, WCF 3장이 실제로 증거본문으로 사용하는 구절들을 색깔별로 칠해 보는 것이다. 미리 한 가지 사실을 바로잡아 두자. WCF 3장은 로마서 9장만 사용하지 않는다. 11장도 사용한다.[^52] 그런데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9장은 주로 작정·선택·유기를 세우는 데 사용하고, 11장은 주로 신비·은혜·겸손을 말하는 3.8에 사용한다. 색상 범례는 다음과 같다.

  • [파랑 — 선택·작정] WCF 3장이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의 주권을 논증하기 위해 사용
  • [빨강 — 유기·심판] WCF 3장이 완악하게 하심과 진노의 그릇, 유기를 논증하기 위해 사용
  • [노랑 — 신비·겸손·위로] WCF 3.8이 예정론의 신중한 사용을 위해 인용
  • [흰색 — 미채택] 바울의 논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WCF 3장의 직접 증거본문으로는 사용되지 않음

주의할 점: [흰색]은 "WCF 전체가 이 본문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고백서의 다른 장들은 로마서 10장을 사용한다. 오직 제3장 예정론의 직접 증거본문 배열에서 사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증거본문의 세부 배열은 후대 판본에서 차이가 생길 수 있으므로, 아래 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직접 심의하여 제출한 원래의 증거본문을 기준으로 한다.[^53] 증거본문은 고백서 본문 자체와는 구별되지만, 총회가 각 명제를 어떤 성경 본문으로 뒷받침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다.)

 

로마서 바울 논증에서의 기능 WCF 3장
9:1–5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통곡 [흰색]
9:6–10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음 / 약속의 자녀 [흰색]
9:11, 13 행위 이전의 선택 / 야곱과 에서 [파랑] 3.2, 3.5
9:15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파랑] 3.1
9:16 원함·달음박질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파랑] 3.2, 3.5
9:17 바로를 세우심 [빨강] 3.7
9:18 긍휼과 완악하게 하심 [파랑] 3.1, 3.2 + [빨강] 3.7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노랑] 3.8
9:21 토기장이의 권한 [빨강] 3.7 
9:22 진노의 그릇 [빨강] 3.7 + 3.3
9:23 긍휼의 그릇 [파랑] 3.3
9:24–29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 / 호세아·이사야 [흰색]
9:30–33 이스라엘이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함 [흰색]
10:1 바울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함 [흰색]
10:9–13 믿고 시인하라 / "누구든지" [흰색]
10:14–17 보냄 → 전파 → 들음 → 믿음 [흰색]
10:21 불순종하는 백성에게 종일 벌리신 손 [흰색]
11:1–4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심 [흰색]
11:5–6 은혜로 택하심을 따른 남은 자 [노랑] 3.8
11:7–10 택하심을 입은 자와 우둔하여진 자 [흰색]
11:11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 "그럴 수 없느니라" [흰색]
11:20 불신앙으로 꺾임 / 믿음으로 섬 [노랑] 3.8
11:21–22 교만 금지 /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흰색]
11:23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 다시 접붙임 [흰색]
11:25–29 부분적 완악함 /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 없음 [흰색]
11:30–32 모두를 불순종 아래 가두심은 모두에게 긍휼을 [흰색]
11:33 헤아리지 못할 판단 [노랑] 3.1, 3.8

이 표를 흐름으로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바울의 논증은 "선택(9A) → 불신앙(9B) → 보편적 복음 선포와 책임(10) → 남은 자(11A) → 믿음/불신앙(11B) → 재접붙임 가능성(11C) → 부분적 완악함의 신비(11D) → 모두를 긍휼로(11E) → 송영"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WCF 3장의 형광펜 자국만 남기면 "**[파랑] 9:11–18 → [빨강] 9:17–23 → (긴 공백) → [노랑] 11:5–6, 11:20 → (공백) → [노랑] 11:33**"이 된다. **중간이 비어 있다.** 특히 로마서 9장 30절부터 10장 21절까지 — 이스라엘의 실제 불신앙, "누구든지"의 초청, 복음 전파의 사슬, 종일 벌리신 하나님의 손 — 가 통째로 비어 있다.[^54]

 

이 공백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이것을 "WCF가 로마서 10장을 무시했다"고 말하면 부정확하다. WCF의 다른 장들은 로마서 10장을 사용한다.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WCF 제3장이라는 예정론의 조직 안에서는, 로마서 10장의 믿음·복음 선포·인간 책임의 언어가 직접 증거본문으로 전경화되지 않는다. 그 결과 3장의 범주로 로마서를 배우는 청자는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있죠?" 그런데 바울의 원래 논증에서는 바로 다음 문단에 인간이 있다. 그들이 걸려 넘어졌다. 믿지 않았다. 자기 의를 세우려 했다.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다. 믿으라. 주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니까 수업에서 느꼈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게 뭐가 있느냐"는 불편함의 상당 부분은, 성경에 그 언어가 없어서가 아니라, 조직신학적 재배열이 만들어 내는 효과다. 고백서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고백서 제3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선택이라는 교리적 주제를 조직하면서 그 주제를 직접 뒷받침하는 특정 본문들을 전경화했고, 그 선택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저 공백이다.

 

그런데 아주 공정하게 보아야 할 반전이 하나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이 문제의 언어를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3.8의 증거본문을 보라. 거기에는 로마서 11장 5–6절(은혜의 선택)만이 아니라 11장 20절 —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 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55] 예정론 장의 마지막 조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선택의 언어와 믿음·불신앙의 언어를 나란히 놓고, 이 교리를 신중하게 다루며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주의하고 순종하라고, 자신의 유효한 부르심을 확인함으로써 선택의 확신에 이르러 겸손과 근면과 위로를 얻으라고 권한다. 그러니까 그들도 바울의 두 언어 — 선택과 믿음/불신앙 — 를 알고 있었다. 다만 제3장의 교리 구조 안에서 두 언어에 같은 조직적 비중을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11장 23절의 미채택은 특별히 흥미롭다. 11장 20절은 3.8에 들어갔는데, 불과 세 절 뒤의 23절 —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 은 3장의 증거본문이 아니다.[^56] 왜 이 차이가 중요한가. 11장 20절만 떼면 "불신앙 → 꺾임, 믿음 → 섬"이라는 책임 구조가 보인다. 그런데 23절까지 읽으면 한 가지가 더 보인다. 바울은 현재 꺾여 있는 자들의 상태를, 인간의 눈에서 폐쇄된 운명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물론 개혁파는 이 구절을 "유기된 자가 나중에 택자로 바뀔 수 있다"는 뜻으로 읽지 않을 것이고, 그 독법 자체는 가능하다 — 여기서 다루어지는 것은 일차적으로 감람나무 비유 속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속사적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건 그냥 외적 언약 관계 이야기니까 개인의 믿음과 불신앙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지워 버리는 것도 본문보다 멀리 간다. 바울 자신이 조건을 명백하게 '불신앙'(ἀπιστία)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한 판독은 이것이다. 바울은 청중이 지금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유기되었으니 끝났다"고 판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포한다 — 하나님께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작정을 읽어낼 수 없으므로, 어떤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복음의 가능성을 닫을 수 없다【B. 추론】. 이것은 예정 교리의 목회적 사용에 로마서 11장이 걸어 놓은 강력한 제약이다.

 

11장 25절의 "부분적 완악함"도 마찬가지 방향을 가리킨다. WCF 3장의 범주를 먼저 들고 로마서를 읽으면 '택자/유기자'라는 안정된 두 집합이 먼저 보인다. 그런데 로마서 11장의 실제 논증에서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부분적이고(ἀπὸ μέρους),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ἄχρι οὗ)라는 시간축 위에 있다. 바울은 영원한 작정의 관점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불신앙과 믿음과 완악함과 회복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말하고 있다. WCF 3장의 주요 렌즈가 작정의 렌즈(decretal lens)라면, 로마서 9–11장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렌즈는 구속사의 렌즈(salvation-historical lens)다. 둘은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지만, 동일하지도 않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 감사가 WCF 자신의 원칙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WCF 1.9는 이렇게 선언한다.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느 성경 본문의 참되고 온전한 의미에 관하여 의문이 있을 때에는(그 의미는 여럿이 아니요 하나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는 다른 본문들로 그것을 찾아 알아야 한다." (WCF 1.9) [^57]

 

이 원칙을 WCF 3장 자신의 로마서 사용에 적용하면 네 개의 읽기 규칙이 나온다.

로마서 9:16만 읽지 말고 로마서 10:13도 읽으라.
로마서 9:18만 읽지 말고 로마서 10:21도 읽으라.
로마서 9:22만 읽지 말고 로마서 11:23도 읽으라.
로마서 9:20만 읽지 말고 로마서 11:32도 읽으라.

 

이것은 WCF를 거부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WCF의 성경 해석 원칙을 WCF 자신의 예정론에 적용하는 작업이다.

 

이번 감사의 결과를 정리하자. WCF 3장은 로마서 9–11장과 모순되는 별개의 예정론을 만들어 낸 문서가 아니다. 행위 이전의 선택, 하나님께 달린 긍휼, 완악하게도 하시는 하나님, 은혜로 택하신 남은 자, 헤아릴 수 없는 판단 — 이 모든 것은 실제로 바울에게 있다. 파랑과 빨강 형광펜이 칠해진 자리에는 정말로 그 색의 본문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서 9–11장 전체는 WCF 3장보다 더 넓고 더 역동적이며, 인간의 믿음과 불신앙, 복음의 초청, 역사적 회복의 가능성, 모두를 향한 긍휼의 신비를 한 논증 속에 그대로 보존한다. WCF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작정을 특별히 전경화하여 정교하게 체계화했다. 그러므로 예정론을 배우고 가르칠 때 가장 안전한 길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로마서 9장에서 멈추지 말고, 바울과 함께 10장과 11장까지 계속 읽는 것.

 

그리고 그 길 위에 특별히 밝은 다섯 개의 이정표가 있다. 9:18, 10:21, 11:20, 11:23, 11:32. 이 다섯 절을 한 줄에 놓고, 이번에는 교리 용어를 잠시 내려놓은 채, 헬라어 문장 속에서 실제로 누가 주어이고 누가 무엇을 하는지만 추적해 보자.

 

 

 

11. 다섯 구절의 문법 — 누가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의 주권 100% + 인간의 책임 100%"라는 공식을 들어 보셨을 것이다. 방향은 옳다. 그러나 바울은 퍼센트를 말하지 않는다. 바울의 문장은 훨씬 구체적이다. 다섯 절의 헬라어를 차례로 뜯어 보자. 원어가 낯선 분은 굵게 표시한 우리말 분석만 따라오셔도 충분하다.

 

① 로마서 9:18 — 행위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이다.

ἄρα οὖν ὃν θέλει ἐλεεῖ, ὃν δὲ θέλει σκληρύνει아라 운 혼 델레이 엘레에이, 혼 데 델레이 스클레뤼네이.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세 개의 동사 — θέλει델레이(원하신다), ἐλεεῖ엘레에이(긍휼히 여기신다), σκληρύνει스클레뤼네이(완악하게 하신다) — 가 모두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이고, 주어는 문맥상 하나님이다.[^58] 두 절은 거의 완전한 평행 구조다. 이 문장에서 인간의 의지, 믿음, 반응은 주어 자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한 절만 확대하면 WCF 3장의 색깔이 진하게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롬9:18은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는 본문"이라고 약화시키는 독법은 본문을 거스른다. 바울은 여기서 정말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를 말하고 있다.

 

② 로마서 10:21 — 같은 바울의 문장이 완전히 달라진다.

Ὅλην τὴν ἡμέραν ἐξεπέτασα τὰς χεῖράς μου πρὸς λαὸν ἀπειθοῦντα καὶ ἀντιλέγοντα  홀렌 텐 헤메란 / 엑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 무 /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티레곤타.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이 한 문장 안에 두 행위 주체가 동시에 있다. 하나님의 행위: ἐξεπέτασα엑세페타사, "내가 벌렸다" — 1인칭 단수 부정과거 능동태다. ἐξεπέτασα 자체는 부정과거지만, 그 행위에는 "온종일"(ὅλην τὴν ἡμέραν)이라는 시간 표현이 붙는다. 따라서 문장의 그림은 한순간의 손짓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백성을 향해 종일 손을 벌리고 계시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그 손이 향하는 백성에게는 두 개의 현재 능동 분사가 붙어 있다. ἀπειθοῦντα아페이둔타(불순종하는), ἀντιλέγοντα안티레곤타(거슬러 말하는). 이스라엘은 수동태가 아니다. 하나님도 능동이고, 인간도 능동이다. [^59] 9:18에서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신다"고 썼던 바로 그 바울이, 10:21에서는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거슬러 말한다"고 쓴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디에도 "앞의 표현은 오해였으므로 철회한다"는 문장이 없다. 두 진술이 모두 그대로 유지된다.

 

③ 로마서 11:20 — 네 개의 층이 한 절에 겹친다.

τῇ ἀπιστίᾳ ἐξεκλάσθησαν, σὺ δὲ τῇ πίστει ἕστηκας. μὴ ὑψηλὰ φρόνει, ἀλλὰ φοβοῦ  테 아피스티아 엑세클라스테산, 쉬 데 테 피스tei 헤스테카스. 메 휲셀라 프로네이, 알라 포부.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ἐξεκλάσθησαν엑세클라스테산(꺾였다)은 부정과거 수동태다. 가지가 스스로 부러진 것이 아니라 꺾임을 당했다. 꺾은 암묵적 행위자는 문맥상 하나님이다. 그런데 왜 꺾였는가. τῇ ἀπιστίᾳ테 아피스티아 — 여격으로,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측의 꺾으심과 인간 측의 불신앙이라는 설명이 한 절 안에 함께 있다.[^60]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ἕστηκας헤스테카스(네가 서 있다)는 완료형이고, 그 근거는 τῇ πίστει테 피스테이, "믿음으로"다. 눈여겨보라 — 바울은 여기서 "너는 선택받았으므로 서 있다"라고 쓰지 않았다. 이 문장의 설명 방식은 "너는 믿음으로 서 있다"이다. 그리고 곧바로 두 개의 명령형이 떨어진다. μὴ ὑψηλὰ φρόνει메 휲셀라 프로네이(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 φοβοῦ포부(두려워하라). 만약 바울의 논리가 "영원한 작정이 모든 결과를 결정하므로 인간의 반응은 설명상 무의미하다"였다면 이 경고는 장식품이 된다. 그러나 바울에게 경고는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사람을 실제로 다루시는 수단이다. 요컨대 이 한 절에 하나님의 행위, 인간의 불신앙, 인간의 믿음, 인간을 향한 명령 — 네 개의 층이 모두 들어 있다.

 

④ 로마서 11:23 — 가장 흥미로운 문법.

κἀκεῖνοι δέ, ἐὰν μὴ ἐπιμένωσιν τῇ ἀπιστίᾳ, ἐγκεντρισθήσονται· δυνατὸς γάρ ἐστιν ὁ θεὸς πάλιν ἐγκεντρίσαι αὐτούς캉케이노이 데, 에안 메 에피메노신 테 아피스티아, 엥켄트리스테손타이, 뒤나토스 가르 에스틴 호 테오스 팔린 엥켄트리사이 아우투스.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조건절의 동사 ἐπιμένωσιν에피메노신(머무르다)은 현재 능동 접속법이고, 주어는 그들, 곧 인간이다. 인간이 불신앙에 머무르거나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데 결과절의 동사 ἐγκεντρισθήσονται엥켄트리스테손타이(접붙임을 받을 것이다)는 미래 수동태다. 그들이 자기를 접붙이는 것이 아니다. 누가 접붙이는가 — 바로 다음 절이 명시한다. δυνατὸς ὁ θεός뒤나토스 호 테오스, "하나님께 능력이 있다." 조건절에는 그들이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놓이고, 주절에는 그들이 "접붙임을 받을 것"이라는 수동형이 놓인다. 그리고 그 접붙임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이 명시된다.[^61] 따라서 인간의 불신앙은 의미 없는 변수가 아니지만, 회복의 행위자는 인간 자신이 아니다【B. 추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불신앙 여부가 아무 의미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바울의 문법 자체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긴장이다.

 

⑤ 로마서 11:32 — 주어가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온다.

συνέκλεισεν γὰρ ὁ θεὸς τοὺς πάντας εἰς ἀπείθειαν, ἵνα τοὺς πάντας ἐλεήσῃ스네클레이센 가르 호 테오스 투스 판타스 에이스 아페이데이안, 히나 투스 판타스 엘레에세.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주어는 ὁ θεός, 하나님. 첫 동사 συνέκλεισεν스네클레이센(함께 가두셨다)은 부정과거 능동태. 그리고 목적절 ἵνα … ἐλεήσῃ히나 엘레에세(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의 주어도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가두시고,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 [^62] 논증은 하나님의 행위로 시작해서(9:18) 하나님의 행위로 끝난다(11:32).

 

그런데 9:18과 11:32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변화가 하나 보인다. 두 절에 같은 동사가 쓰였다. ἐλεέω, 긍휼히 여기다. 9:18에서는 "원하시는 자를(ὃν θέλει혼 델레이)" 긍휼히 여기신다. 11:32에서는 "모든 사람에게(τοὺς πάντας투스 판타스)"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물론 여기서 πάντας판타스가 "예외 없이 모든 개인이 결국 구원받는다"는 보편구원론을 뜻한다고 결론 낼 수는 없다 — 바로 앞의 30–31절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교차하여 다루고 있으므로, τοὺς πάντας는 문맥상 적어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괄한다. 그러나 이 표현만으로 예외 없이 모든 개인이 최종적으로 구원된다는 보편구원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의 수사적 움직임 자체는 분명하다. 9:18만 읽으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실지 결정하신다"에서 멈춘다. 11:32까지 읽으면, 그 하나님의 계획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불순종 아래 드러내어 모두가 긍휼 외에는 살 길이 없도록 만드는 데까지 나아간다. 후자의 시야가 훨씬 크다.

 

이제 다섯 절의 행위자만 뽑아 정리해 보자.

본문 행위자 행위
9:18 하나님 원하심, 긍휼히 여기심, 완악하게 하심 (모두 능동)
10:21 하나님 종일 손을 벌리심 (능동)
  이스라엘 불순종함, 거슬러 말함 (능동)
11:20 하나님(암시) 가지들을 꺾으심
  그들 불신앙 (꺾임의 근거)
  믿음으로 서 있음 / 교만 금지·두려워하라는 명령의 수신자
11:23 그들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음 (현재 능동 접속법)
  그들 접붙임을 받음 (미래 수동태)
  하나님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음 (능동 부정사)
11:32 하나님 모두를 가두심, 긍휼히 여기심 (능동)

이렇게 놓으면 하나의 패턴이 또렷해진다. 하나님의 행위는 9:18에서 사라지지 않고 11:32까지 간다. 그런데 인간의 행위도 10:21에서 등장한 뒤 사라지지 않는다. 둘은 교대하면서 한 논증 속을 같이 간다. 더 중요한 것은 능동과 수동의 배치다. 하나님의 긍휼, 호소와 초청, 심판과 회복의 행위는 계속 실제적이고 능동적으로 서술된다. 동시에 인간의 불신앙·반역·믿음 역시 실제 설명 언어로 남아 있다. 11:20에서 인간은 "꺾임을 당하고", 11:23에서는 다시 "접붙임을 받는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이 자신에게 그 사건을 수행하는 주체는 아니다. 그러나 꺾임에는 불신앙이 명시되고, 재접붙임은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절과 함께 제시된다. 바울의 문법은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믿음·불신앙을 어느 한쪽으로 지우지 않는다. 이 배치가 말해 주는 바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개혁파가 "구원의 최종 행위자는 하나님이다"라고 읽은 데에는 상당히 강한 본문적 기반이 있다【B. 추론】.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하나님의 작정을 말한 다음에도 역사 속의 실제 인간에게 믿음, 불신앙, 순종, 불순종, 경고, 두려움, 복음 선포, 회복 가능성이라는 언어를 결코 가상의 것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100% + 100%"라는 공식보다 바울 자신의 문법에 더 가까운 요약은 다음 다섯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① 이 논증에서 하나님의 행위는 더 근원적인 설명으로 제시된다(9:18, 11:32).
② 그러나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을 문법적·도덕적 비행위자로 만들지 않는다(10:21).
③ 믿음과 불신앙은 바울에게 실제 설명 변수다(11:20).
④ 회복 역시 인간의 자력 행위가 아니다 — 접붙이시는 분은 하나님이다(11:23).
⑤ 구원의 마지막 설명어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다(11:32).

 

그리고 마지막 관찰 하나. WCF는 이 자료를 가져와 "작정 → 선택/유기 → 유효한 부르심 → 견인"이라는 논리적으로 매우 정돈된 개념 체계를 만든다. 그런데 바울의 실제 문장은 이렇게 움직인다.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신다 → 그런데 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 하나님은 온종일 그들에게 손을 벌리셨다 → 그들은 불순종한다 → 그들은 불신앙 때문에 꺾였다 → 너도 교만하지 말고 두려워하라 → 그들이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 다시 접붙임을 받을 것이다 →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다 → 하나님은 모두를 불순종 아래 두어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 "깊도다!" 마지막이 체계의 완결(system closure)이 아니라 송영(doxology)이다. 바울은 두 행위 주체의 철학적 접합부를 설명하는 대신, 두 행위 주체를 같은 이야기 안에 함께 놓는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확인하러 가자. 바울이 이 서술 방식을 어디서 배웠는지 — 로마서 9장 18절의 "완악하게 하신다"를 그 원산지인 출애굽기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12. 바울을 출애굽기로 되돌려 보내기 — 바로의 마음

로마서 9장 17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것은 출애굽기 9장 16절이다. 바울의 독자에게 '바로'는 추상적인 철학 사례가 아니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 서사 전체가 따라온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검증이 하나 남는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보여 준 저 이중의 행위 구조 — 하나님도 행하시고 인간도 실제로 행하는 — 는 바울의 발명인가, 아니면 토라 자체의 서술 방식을 계승한 것인가. 출애굽기의 바로 완악함 본문들을 순서대로 읽어 보면 답이 나온다.

 

먼저 알아 둘 것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완악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동사가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세 어근은 의미영역이 겹치지만 서로 다른 기본 이미지를 가진다. חזק(하자크)는 '강하다, 강하게 하다'의 의미영역을 가지며 — 여호수아에게 주신 "강하고 담대하라"(수 1:6)의 바로 그 어근이 바로에게서는 하나님을 향해 굳게 버티는 완강함이 된다 — כבד(카베드)는 '무겁다, 무겁게 하다', קשה(카샤)는 '딱딱하다, 완고하게 하다'의 의미영역을 가진다.[^63] 개역개정은 이 셋을 대체로 '완악하다'와 '완강하다'로 옮기기 때문에 원문의 결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가 주어인지와 함께, 어떤 동사가 쓰였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먼저 예고하신다.[^64]  재앙이 시작되기도 전, 모세가 아직 미디안을 떠나기도 전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אֲחַזֵּק 아하젝, 하자크의 강의형)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출4:21)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אַקְשֶׁה 아크셰, 카샤의 사역형)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출7:3)

 

그러므로 출애굽기의 독자는 처음부터 "바로의 완악함은 하나님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간의 독자적 결정이었다"라고 읽을 수 없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이 서사의 문 앞에 먼저 서 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로마서 9장 18절과 거의 같은 방향이다.

 

그런데 실제 사건이 시작되면, 내러티브는 곧바로 '바로의 마음'을 주어 자리에 놓는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וַיֶּחֱזַק 바이헤자크, 마음이 굳어졌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7: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כָּבֵד 카베드, 무겁다)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출7:14)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7:22)

 

4장 21절에서 "내가 그의 마음을 강하게 하겠다"고 예고하신 하나님인데도, 실제 사건의 서술은 "하나님이 그를 조종하셔서 그가 아무 의지 없이 움직였다"가 아니다. 바로의 마음이 굳어졌고, 바로가 듣지 않았다. [^65] 그리고 재앙이 거듭되면서, 이번에는 바로 자신이 명시적 행위자가 된다.

""그러나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כבד의 Hiphil 형태로, 문맥상 바로가 자기 마음을 "무겁게 했다"고 서술한다)[^66]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더라" (출8:15)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8:19)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출8:32)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출 9:7)

 

8장 15절의 심리적 계기를 놓치지 말라. 바로가 재앙이 그친 것을 보고 — 숨 돌릴 틈이 생긴 것을 보고 — 자기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인간 행위의 실제 동기와 정황이 서술되어 있다. 하나님의 예고가 바로의 의지를 증발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출애굽기 9장 12절, 처음으로 내러티브 자체가 하나님을 명시적 행위자로 내세운다. [^67] 여섯 번째 재앙, 악성 종기 재앙에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וַיְחַזֵּק יְהוָה 바이하젝 아도나이— 여호와가 문법적 주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출9:12)

 

이 절은 "하나님이 허용만 하셨다" 정도로 무마하기 어렵다. 문법적으로 여호와가 실제 동사의 주어다. "하나님은 전혀 완악하게 하지 않으셨고 바로만 스스로 완악해졌다"고 말하면 출애굽기 9장 12절 자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재앙에서, 다시 바로 자신의 죄가 나온다.

"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출9:34–35)

 

같은 9장 안에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12절)와 "바로가 다시 범죄하여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34절)가 함께 있다. 그리고 내레이터는 12절 때문에 34절에서 바로에게 죄책을 물을 수 없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34절은 바로의 행위에 "다시 범죄하여"라는 도덕적 평가까지 붙인다. [^68] 그리고 10장 1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와 그 목적을 직접 설명하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הִכְבַּדְתִּי 히크바드티 — 내가 무겁게 하였다)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출10:1–2)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은 출애굽기에서 한 개인의 심리를 조작하는 사적인 일이 아니다. 그것은 표징을 보이고, 그 이야기를 자손 대대로 전하게 하고,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게" 하는 구속사적 자기계시의 행위 안에 들어 있다【B. 추론】.[^69] 그리고 이것이 정확히 바울이 로마서 9장 17절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바울이 임의로 바로를 '개인 예정의 사례'로 뽑아낸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자체가 이미 바로의 완악함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과 연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서사에서는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이 점점 전경으로 나오고(10:20, 27; 11:10; 14:8), 홍해 앞에서 절정에 이른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וְחִזַּקְתִּי 베히자크티)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וְאִכָּבְדָה 베익카베다)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출14:4)

 

여기에는 적어도 히브리어 독자가 포착할 수 있는 어근의 울림이 있다. 바로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데 사용된 כבד카베드가, 하나님이 바로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신다"는 표현에도 다시 등장한다.[^70] 이 어근의 반복은 바로의 완악함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두 주제를 문학적으로 연결해 읽게 한다【B. 추론】.

 

이제 전체 패턴을 표로 놓아 보자. (장절 구분과 동사의 뉘앙스에 따라 세부 집계는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큰 흐름은 다음과 같다.)

본문 행위자 표현
출 4:21 하나님(예고)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다 (חזק 하작)
출 7:3 하나님(예고)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다 (קשה 카샤)
출 7:13, 22; 8:19 바로의 마음(상태) 마음이 완악하여 듣지 않음 (חזק 하작)
출 7:14; 9:7 바로의 마음(상태) 마음이 완강함 (כבד 카베드)
출 8:15, 32 바로 자신 자기 마음을 완강하게 함 (כבד 카베드)
출 9:12 여호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 (חזק 하작) — 내러티브 최초의 명시적 신적 주어
출 9:34–35 바로 자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함 (כבד 카베드)
출 10:1 여호와 내가 그 마음을 완강하게 하였다 (כבד 카베드) + 구속사적 목적
출 10:20, 27; 11:10; 14:4, 8 여호와 완악하게 하심이 전경화 (חזק 하작)

패턴이 보인다. 재앙 서사의 앞부분에서는 바로의 완악한 상태와 바로 자신의 완악하게 함이 주로 서술되고, 뒤로 갈수록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이 전면에 나온다. 그렇다고 후반의 신적 행위가 전반의 인간 행위를 취소하지 않고, 전반의 인간 행위가 서두의 신적 예고(4:21; 7:3)를 무효화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설교에서 흔히 듣는 설명 — "바로가 먼저 여러 번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했고, 하나님은 나중에 그것을 심판으로 굳히셨다" — 은 절반만 맞다. 내러티브의 진행 순서만 보면 근거가 있다. 하나님이 명시적 주어가 되는 9장 12절 이전에 바로 자신의 완악함이 거듭 서술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장 21절과 7장 3절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본문 전체를 가장 잘 보존하는 진술은 이 정도일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이 처음부터 존재한다. 동시에 그 목적이 역사 속에서 실현될 때 바로는 실제로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실제로 죄를 짓는다. 그리고 일정 시점 이후 내러티브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완악함을 직접 행하시는 것을 더욱 전면에 내놓으며, 이것을 바로의 반복된 죄와 거부 이후 나타나는 심판적 완악화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다【B. 추론】.

 

그렇다면 로마서 9장 18절은 출애굽기의 바로 완악함 전승을 압축해 제시한다고 할 수 있는가. 적어도 바울이 바로의 이름과 완악하게 하심을 불러올 때, 그 배후에는 한 절이 아니라 출애굽기의 전체 서사가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축약문을 "그러므로 바로 자신의 행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로 읽으면,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원본문 자체를 절단하는 셈이 된다. 원본문에는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과, 바로의 마음이 완악함과, 바로가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함과, 바로가 듣지 않음과, 바로가 죄를 지음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가 로마서 9–11장에서 발견한 구조와 놀라울 만큼 닮았다. 출애굽기: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신다 → 바로가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 → 바로가 듣지 않는다 → 바로가 죄를 짓는다 → 하나님이 그 완악함을 구속사적 목적에 사용하신다. 로마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9:18) →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거슬러 말한다(10:21) → 불신앙 때문에 꺾인다(11:20) →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 회복될 수 있다(11:23) → 하나님이 모두를 불순종 아래 두어 긍휼을 베푸신다(11:32).

 

결론은 이것이다. 바울에게 '두 행위 주체'는 새로운 철학적 발명이 아니다. 바울의 서술 방식은 토라에서 이미 발견되는 이중 행위자 구조와 깊이 연속되어 있다【B. 추론】. 토라는 이미 한 사건을 두 수준에서 말한다. 하나님이 하셨다. 그리고 인간도 실제로 했다. 그리고 둘 사이의 형이상학적 접합부를 설명하는 별도의 장을 쓰지 않는다. 출애굽기 저자는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셨는데 어떻게 바로도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 문제를 풀어 주지 않는다. 그냥 둘 다 말한다. 그리고 바로에게 죄책을 묻는다. 바울도 똑같다.

 

마지막으로, 출애굽기가 우리의 질문 자체를 교정해 주는 지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이야기를 따라 읽다 보면, "바로에게 자유의지가 있었는가?"라는 질문 — 곧 '모든 조건이 같아도 달리 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추상적 질문 — 이 본문의 관심과 미묘하게 어긋나 있음을 느끼게 된다. 본문이 계속 묻는 것은 이런 것이다. 바로는 누구의 말을 듣는가. 여호와를 누구라고 인정하는가. 이스라엘을 보낼 것인가. 하나님의 표징을 보고도 어떻게 반응하는가. 성경적 인간 행위의 핵심은 '언제나 열려 있는 대안적 가능성'보다 "그가 무엇을 원했고, 누구에게 순종했고, 실제로 무엇을 했으며, 그것에 책임이 있는가"에 가깝다. 이 관찰은 뒤에서 다시 중요해진다.

 

 

 

13. 토라에서 웨스트민스터까지 — 이야기가 체계가 되기까지

이제 지금까지의 발견을 한 줄에 놓을 수 있다.

 

토라는 두 행위 주체를 이야기 속에 병치한다.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셨다. 바로가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 설명 없이, 취소 없이. 바울은 토라의 이중 행위자 구조를 구속사적 논증 안에서 다시 사용한다.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이스라엘이 믿지 않고 불순종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송영이다. 초대교회는 각자의 전선에서 그 유산의 서로 다른 면을 지켰다 — 이레나이우스와 크리소스토무스는 운명론에 맞서 인간의 실제 응답을, 후기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에 맞서 은혜의 선행성과 효력을.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자들은 토라와 바울이 병치해 놓은 두 언어 '사이의 관계'를 묻기 시작했다. 믿음의 시작은 어디서 오는가. 은혜는 저항될 수 있는가. 그리고 웨스트민스터는 그 물음의 대답들을 작정, 자유의지, 유효한 부르심이라는 교리적 범주로 체계화했다.

 

이 사슬 위에서 12장의 발견은 WCF에 대한 평가를 한 번 더 정밀하게 만들어 준다. 앞서 우리는 WCF의 양립론적 설명을 조직신학적 구성【C. 구성】으로 분류했다. 그 분류는 유지하되, 이제 이렇게 덧붙여야 공정하다. 후대에 양립론적 언어로 체계화될 수 있는 방향 자체는 성경 본문 안에 이미 존재한다. 출애굽기가 이미 한 사건에 신적 결정과 진정한 인간 책임을 함께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WCF 3.1의 "피조물의 의지에 폭력이 가해지지 않으며 제2원인의 자유가 제거되지 않는다"는 문장은 17세기 철학을 성경에 덮어씌운 것만은 아니다. 출애굽기의 내러티브를 개념 언어로 풀어 쓴 측면이 분명히 있다. 다만 WCF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사실이다. 성경은 말한다 —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셨다. 바로가 완악하게 했다." WCF 3.1은 하나님의 작정과 피조물의 의지, 그리고 제2원인의 자유와 우연성을 함께 보존하는 방식으로 이 관계를 개념화한다.[^71] 바로 이 걸음에서 성경의 내러티브가 신학의 체계로 이동한다. 체계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체계와 원본문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사슬을 그리면서 두 가지 시대착오를 피해 가자. 첫째, 중세 가톨릭을 '면죄부와 공로주의'로만 환원하는 것. 사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예정을 다루며(제1부 23문) 예견된 공로가 예정의 원인이 아니라고 명시했고, 예정론의 이 지점에서 강한 아우구스티누스적 입장을 보였다.[^72] 종교개혁 직전의 문제는 '가톨릭 전체'라기보다, 후기 중세의 일부 *via moderna* 신학, 특히 가브리엘 비엘에게서 발전한 *facere quod in se est* 전통 — 인간이 자신에게 가능한 바를 행할 때 하나님이 언약에 따라 은혜를 베푸신다는 준비 사상 — 이었다. 이러한 후기 중세 은혜론은 루터가 초기부터 비판한 중요한 표적 가운데 하나였다.[^73] 둘째, 도르트와 웨스트민스터의 알미니안 비판을 근거로 알미니안을 펠라기우스로 환원하는 것 — 이것은 7장에서 이미 구별해 둔 지점이다. 역사를 정직하게 그려야 우리의 결론도 정직해진다.

 

그리고 이 사슬의 끝에서, 처음 질문이 다시 나타난다. 왜 같은 말씀을 다르게 읽는가. 성경은 먼저 이야기와 문장으로 긴장을 보존했고, 후대의 신학은 그 긴장 앞에서 각자의 시대가 던진 질문을 따라 체계를 만들었다. 이레나이우스의 신학적 응답,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 트리엔트의 교리적 정식화, 도르트의 교회적 판정, 웨스트민스터의 조직적 체계화. 어떤 체계는 본문에 더 충실하고 어떤 체계는 덜 충실하다 — 그 평가는 가능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체계도 본문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체계를 무엇으로 검증하는가. 이제 이 글의 방법론을 정면으로 말할 차례다.

 

 

 

14. Sola Scriptura는 Tota Scriptura를 요구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자주 오해된다. 그것은 오늘날 흔히 "Solo Scriptura"라고 비판적으로 부르는, 교회와 신앙고백과 교사의 역할을 사실상 불필요하게 만드는 개인주의적 성경주의를 뜻하지 않는다.[^74]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것을 가르친 적이 없다. 칼빈은 키프리아누스의 유명한 교회-어머니 전통을 이어받아, 《기독교강요》 4권 1장에서 교회를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로 부르고 그 품 밖에서 신앙의 양육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75] 개혁주의가 말하는 '오직 성경'은 교회를 부정하는 구호가 아니라, 오직 성경만이 오류 없는 최종 심판자라는 선언이다. 신학의 언어로 하면, 성경은 규범을 규정하는 규범(norma normans)이고, 신앙고백은 규범에 의해 규정되는 규범(norma normata)이다. 고백서는 실제적 권위를 갖지만 그것은 종속적 권위이며, 성경을 대신하는 권위가 아니라 성경을 섬기는 권위다.

 

놀라운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자신이 이 구조를 명문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1.9 —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이다" — 를 보았다.[^76] 그런데 31장은 더 나아간다. 공의회와 회의에 관하여 고백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도 시대 이후의 모든 공의회는, 총회든 지역회든,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많은 공의회가 실제로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신앙과 실천의 규칙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둘 다를 돕는 보조로 사용하여야 한다." (WCF 31장, 사역)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신도 오류 불가능한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는 회의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31.3의 원칙은 고백서 자체를 성경 아래에서 검증하는 일을 금지하지 않는다【B. 추론】. 우리가 이 글에서 수행한 작업 — WCF 3장의 증거본문 배열을 로마서 9–11장 전체로 검증하는 일 — 은 고백서를 배반하는 일이 아니라, 고백서 1.9와 31장이 명령하는 바로 그 일이다.

 

그러나 원칙과 실제 독서 습관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든 잘 정리된 교리 체계는 성경을 읽도록 돕는 지도인 동시에, 잘못 사용하면 성경을 펼치기 전에 결론을 먼저 결정하는 틀이 될 수 있다. 이 위험은 개혁파 전통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자체가 성경을 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후대의 교육과 논쟁 현장에서 고백서나 교리 공식이 성경 본문보다 먼저 기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후대 장로교 전통도 이런 종속 관계를 반복해서 명문화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secondary standards'로 받아들여졌고, 성경만이 유일한 오류 없는 신앙과 실천의 규칙으로 고백되었다. 고백서의 권위는 성경과 경쟁하는 독립적·무오한 권위가 아니라,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공적으로 고백하며 행사하는 종속적이고 사역적인 권위다. 따라서 그 권위는 언제나 말씀 아래 있으며 말씀에 의해 검증된다.[^77]

 

그런데 이 글의 여정은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보태 준다. Sola Scriptura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Tota Scriptura — 성경 전체다.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성경의 일부만 읽는다면, 그 일부에 대한 나의 전통적 독법이 사실상 최종 권위가 되어 버린다. 우리가 형광펜 실험에서 확인한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로마서 9장만 읽으면 하나의 그림이 나오고, 9–11장 전체를 읽으면 더 크고 더 역동적인 그림이 나온다. 이 원리는 양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로마서 9:18만 읽고 10:21을 지우는 것도 Tota Scriptura의 위반이고, 반대로 10:13의 "누구든지"만 읽고 9:11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를 지우는 것도 똑같은 위반이다. 선택의 본문으로 초청의 본문을 누르는 것도, 초청의 본문으로 선택의 본문을 누르는 것도, 둘 다 성경 전체보다 내 체계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글이 도달한 방법론적 결론은 이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백서를 버리는 것도, 고백서 뒤에 숨는 것도 아니다. 완성된 정경 전체가, 우리의 모든 부분적 독법과 전통적 체계를 — 웨스트민스터의 체계를 포함하여 — 끊임없이 교정하게 하는 것. 그것은 적어도 Sola Scriptura라는 개혁주의 원리와 가장 일관된 응답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방법론이 정리되고 나면, 미뤄 두었던 가장 깊은 질문이 마침내 정면으로 다가온다. 좋다 — 하나님은 의지를 폭력 없이 새롭게 하시고, 사람은 지극히 자유롭게 나아온다고 하자. 그런데 그 주권적이고 효력 있는, 그러면서도 의지를 파괴하지 않는 은혜의 궁극적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그렇게 일하시는가.

 

 

 

15. 은혜는 강제인가, 회복인가 — 하나님의 선한 본성이라는 근거

"하나님의 주권"에서 출발하면 논리는 이렇게 흐르기 쉽다. 하나님은 주권자다 → 원하시는 자를 택하신다 → 은혜를 효력 있게 베푸신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곧 질문이 남는다. 그렇게 하시는가. 그 선택은 단순히 절대자의 의지인가. "하나님이 주권자니까"만 반복하면, 자칫 하나님의 의지(voluntas)를 하나님의 본성(natura)에서 분리할 위험이 생긴다. 마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무관하게 임의로 무엇이든 의지하실 수 있는 절대 권력인 것처럼.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칼빈 자신이 이 오해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의의 최고 규칙이라고 말하면서도, 곧바로 덧붙인다 — 우리는 법도 없이 무엇이든 하는 '절대 권력'이라는 허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법 없는 분(exlex)이 아니시며,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 법이시다.[^78] 칼빈에게 하나님의 뜻은 어떤 외부의 법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뜻은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운 존재와 분리된 자의적 능력도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법이시며, 그의 뜻은 모든 악에서 자유롭고 의의 최고 규칙이다. 성경의 언어가 이것을 지탱한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시119:6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시25: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8)

 

주는 선하시다 — 그러므로 선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선하게 의지하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며,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롭게 판단하신다【B. 추론】. 예수께서도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 19:17) 하셨다. 그렇다면 주권적·효력적 은혜의 밑바닥에 놓아야 할 것은 벌거벗은 '의지'가 아니라 선하신 본성이다【B. 추론 — 이 명제 자체는 여러 본문의 종합에서 나온다】.

 

이 관점을 얻고 나면,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본문들이 한 번 더 새롭게 읽힌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파괴하지 않고 갱신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사람을 돌덩이처럼 끌고 가시는 대신 —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권면하시고, 성령으로 변화시키시고, 믿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는가. 그것이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인간의 의지를 파괴하지 않고 갱신하여 자발적으로 응답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타협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 인격적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방식 그 자체가 된다. 이 지점에서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은 더 이상 적대 관계가 아니다.

 

효력적 은혜(effectual grace)의 그림도 달라진다. 효력적 은혜를 이렇게 상상하면 문제가 생긴다 — 인간: "싫습니다." 하나님: "내가 주권자니까 네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믿게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WCF 10.1이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개혁파의 실제 모델은 이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죄 때문에 병들어 하나님을 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 인간을 치유하고 새롭게 하신다. 그래서 그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을 원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요한복음 강해에서 그린 그림이 정확히 이것이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각 사람은 자기의 즐거움에 이끌린다"(trahit sua quemque voluptas)라는 구절을 끌어와 말한다 — 아버지의 이끄심은 의지에 반하여 밧줄로 끌고 가는 폭력이 아니라, 마음이 그리스도 안의 진리와 의와 복됨을 기뻐하도록 이끄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사랑하는 자를 내게 데려오라, 그러면 그가 내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Da amantem, et sentit quod dico).[^79]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을 이 글의 언어로 요약하면, 은혜는 의지를 외적으로 꺾는 힘이라기보다 의지를 안에서 치유하고 새롭게 하는 힘이다. 은혜의 효력(efficacy)은 인간의 인격을 압도하는 능력이기 이전에, 인간의 인격을 회복시키는 선하심의 능력이다.

 

에스겔 36장과 신명기 30장도 이 빛 아래서 다시 읽힌다.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삭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병든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꾸신다 — 돌을 제거하고 살을 주신다. 그리고 신명기 30장 6절에서 마음의 할례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보라.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효력적 은혜의 종착점은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혜의 가장 깊은 논리는 지배(domination)가 아니라 교제(communion)다【C. 구성】. 하나님은 인간을 굴복시켜 로봇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과 언약적 사귐을 누릴 수 있도록 인간을 회복하신다.

 

선택(election)의 그림도 달라진다. 예정을 먼저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를 결정해 둔 명단"으로 상상하면 배타성의 문제가 맨 앞에 온다. 그러나 성경이 선택을 말할 때의 실제 문장 구조를 보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4)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9)

 

성경의 중요한 선택 본문들은 선택을 단순한 최종 목적지의 결정으로만 말하지 않고, 선택받은 자가 무엇이 되도록 하시는지 그 목적을 함께 밝히는 경우가 많다. 엡 1:4에서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이, 롬 8:29에서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이 그 목적이다. 선택은 단순한 목적지 배정(destination assignment)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목적(transformative purpose)을 가진 선택이다 — 아우구스티누스가 읽은 그대로, 거룩할 것을 미리 보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려고 택하신 것이다.[^80]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경계선을 분명히 긋자. '회복'과 '치유'의 언어가 개혁파 예정론을 물에 타서 흐리게 만드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 은혜가 회복이라는 말은, 선택이 특수하다는 사실이나 하나님의 심판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는다. 로마서 9장의 완악하게 하심과 진노의 그릇은 여전히 본문에 있다. 우리가 한 일은 주권을 부드러운 말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주권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물음에서, 나의 오랜 불링거 연구가 이 글과 만난다.

 

 

 

16. 불링거의 bonitas Dei — 하나의 연구가설

여기서부터는 글의 성격이 조금 달라진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지금까지는 성경 본문과 확립된 역사적 사실을 다루었다면, 이 장은 내가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의 《하나님의 유일하고 영원한 언약 혹은 유언에 관하여》(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et aeterno, 1534)를 독립적으로 연구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라난 하나의 연구가설을 다룬다. 층위로 말하면 전형적인 【C. 구성】이고, 그중에서도 아직 검증이 진행 중인 구성이다. 결론으로 읽지 마시고, 함께 검토할 물음으로 읽어 주시기 바란다.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후계자로 취리히 교회를 사십여 년 이끈 인물이다. 《De testamento》는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을 독립적 주제로 집중적으로 다룬 종교개혁기 최초기의 중요한 저술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며, 취리히 종교개혁 연구에서 그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81] 이 소책자에서 불링거는 창세기 17장의 아브라함 언약을 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관습과 연약함에 자신을 맞추어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 — 후대 신학의 용어로 말하면 accommodatio, 곧 신적 적응·자기 낮추심 — 을 강조한다.[^82] 그리고 그 언약의 출발점을 인간에게서 찾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제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약에 응하신 것이 아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죄로 타락한 유한한 인간에게 먼저 자신을 낮추어 언약을 맺으신 것 자체가, 불링거의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본성인 순전한 선하심(the sheer goodness which is God's nature)에서 나온 일이다.[^83] 그리고 그는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과 자비(misericordia)에서 나온다는 것을 신앙의 근본 자리에 놓는다.

 

이 대목을 번역하다가 나는 오래 멈춰 서 있었다. 우리가 15장에서 성경 본문으로부터 도달한 지점 — 주권적 은혜의 밑바닥에 놓인 것은 벌거벗은 의지가 아니라 선하신 본성이라는 것 — 을, 16세기 취리히의 개혁자가 언약론의 첫 페이지에서 이미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선하심의 언어가 언약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링거의 《50편 설교집》(Decades, 1549–51) 제4권의 섭리와 예정 설교를 보면, 그는 예정론이 잘못 다루어질 때 단순한 신자들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을 경고한다 —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시기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나를 멸망하도록 정해 두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 수업에서 나온 바로 그 정서 아닌가. 그런데 불링거의 목회적 처방은 감추어진 작정을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의 가치나 무가치에 달려 있지 않고 성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와 자비(mere grace and mercy of God the Father)에서 나오며,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구원의 확신은 감추어진 선택 명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라는 것이다[^84] — 그에게 믿음은 선택의 가장 확실한 표지다. 그가 기초한 《제2스위스 신앙고백》(1566) 10장도 같은 방향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값없이, 순전한 은혜로(freely, and of his mere grace), 아무런 인간적 조건 없이 성도들을 택하시되, 그 선택은 추상적인 절대 의지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o) 이루어졌다. 그리고 같은 장은 목회적 규칙을 덧붙인다 —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한 소망을 가져야 하며, 아무도 경솔하게 유기된 자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a 로마서 11장 23절 앞에서 우리가 도달했던 바로 그 제약이다.[^85] 눈여겨볼 것은 불링거에게 잘못된 예정론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인간의 자유'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더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게 만드는 예정론 — 신자가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을 아까워하시는 적대적 존재로 상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예정론에는 하나의 해석학적 통제 장치가 있다. 예정 교리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복음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운 성품과 충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의 연구 질문은 이렇게 세워진다.

불링거에게 bonitas Dei(하나님의 선하심)는 여러 속성 중 하나에 머무는가, 아니면 언약(covenant)뿐 아니라 선택(election), 인간의 응답(human response), 은혜의 효력(divine efficacy)까지를 생성하고 연결하는 더 근원적인 신학적 축인가?

 

이 질문을 논문 수준의 가설로 만들려면 반드시 해 두어야 할 구별이 하나 있다. "불링거가 bonitas Dei를 자기 신학의 공식적 중심 교리로 선언했다"는 주장과, "불링거의 여러 교리를 추적해 보면 bonitas Dei가 그것들을 생성하고 연결하는 심층 논리로 반복해서 작동한다"는 주장은 다른 주장이다. 전자를 지지할 증거는 내가 아는 한 없다. 내가 검증하려는 것은 후자다.

 

현재까지의 근거 상태를 영역별로 정직하게 적어 둔다. 언약에서는 상당히 확실하다. 《De testamento》 자체가 선하심 → 자비 → 자기 낮추심 → 언약 → 약속 → 믿음과 순종이라는 방향을 보여 주고, 최근 연구는 1534년 이후 불링거가 언약을 단순한 법적 계약(pactum)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과 사귐(societas, coniunctio)이라는 유기적 언어로 발전시켰음을 지적한다. 선택에서도 선하심의 언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방금 본 Decades와 제2스위스 신앙고백이 그 증거다. 인간의 응답에서는 신중해야 한다. 과거 베이커(J. Wayne Baker, 1980)의 연구는 불링거의 언약을 쌍무적·조건적으로 읽고, 그를 칼빈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개혁 전통'의 원조로 세웠다. *b  그러나 이 해석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베네마(Venema, 2002)는 불링거의 예정론과 언약론을 칼빈 및 후대 개혁파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개혁 전통'으로 읽는 베이커의 구도를 재검토했고, 오피츠(Opitz, 2004)는 이 연구를 비평적으로 검토했다.[^86] 힐데브란트(Hildebrand)의 최근 연구(2024)는 미출간 창세기 설교들을 근거로 언약과 선택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다시 복원하면서, 동시에 1534년 이후 불링거 신학에서 언약이 폭넓은 중심성(centrality of covenant)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c 그러므로 내가 물어야 할 것은 "불링거는 칼빈보다 인간의 자유를 높게 평가했는가" 같은 단순 비교가 아니라, 선행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가 인간의 믿음·사랑·순종이라는 실제 언약적 응답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가이다 — 우리가 성경 본문에서 발견한 바로 그 구조다. *d 은혜의 효력에서는 가장 신중해야 한다. 불링거가 은혜를 효력 없는 단순 제안으로 이해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는 타락한 인간에게 믿음과 사랑의 원천이 인간 자신일 수 없음을 명시했고,[^87] 제2스위스 신앙고백의 배열도 타락과 자유의지(8–9장), 예정과 그리스도(10–11장), 복음과 회개·회심(13–14장)을 차례로 다루어, 인간의 무능과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 믿음과 회심의 논의로 연결한다. 그러나 이것을 웨스트민스터의 '유효한 부르심'과 정확히 동일한 기제로 단정하면 불링거를 웨스트민스터화하는 시대착오가 된다. 여기는 원문 검증이 더 필요한 영역이다.

 

독립적 방증도 하나 있다. 불링거의 신론을 분석한 한 연구(2014)는 그의 창조론·섭리론·예정론 전체의 밑바닥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강조가 놓여 있다고 결론지었다.[^88] 언약 연구와 신론 연구가 서로 다른 길로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면, 두 흐름을 bonitas Dei라는 질문으로 교차시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연구 설계가 된다.

 

그렇다면 가설의 모양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처음에 나는 "선하심 → 언약 → 선택 → 은혜 → 응답"이라는 일직선 파이프라인을 생각했다. 그러나 불링거의 실제 본문들은 그보다 방사형 구조에 가까워 보인다. 하나의 중심에서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구조다.

BONITAS DEI — 하나님의 선하심
misericordia / gratia — 자비와 은혜
→ accommodatio — 인간에게 자신을 낮추어 알리심
→ foedus / testamentum — 언약
→ electio in Christo —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 promissio / evangelium — 약속과 복음
→ Spiritus / renovatio — 성령의 갱신
→ fides / amor / obedientia — 인간의 실제 응답인 믿음, 사랑, 순종
→ societas / coniunctio cum Deo — 하나님과의 사귐과 연합

 

이 도식의 개별 연결선은 앞으로 1차문헌으로 검증해야 할 연구항목이며, 현재는 작업모형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 가설의 가장 흥미로운 함의가 나온다. 힐데브란트가 논증하듯 불링거 신학을 조직하는 중심 개념이 언약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중심 개념'(central organizing concept)과 '궁극적 근거'(ultimate theological ground)는 같은 말이 아니다. 왜 언약인가 — 하나님께서 선하시므로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 주시기 때문이다. 왜 선택인가 —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인가 — 하나님의 은혜가 추상적인 비밀 의지가 아니라 구원자 안에서 계시되기 때문이다. 왜 인간의 응답이 진지하게 요구되는가 — 언약의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의 실제 사귐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들이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면, 다음의 명제를 작업가설로 세울 수 있다.

"언약은 불링거 신학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취하는 관계적 형식이다." (Covenant is the relational form of the divine goodness in Bullinger's theology.) 【C. 연구가설】

 

즉 언약이 중심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언약 그 자체도 더 깊은 곳 —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 주시는 그 선하심 — 에서 흘러나온다는 말이다.

 

과학적 가설이 그렇듯, 이 가설에도 반증 조건을 함께 세워 두어야 한다. 불링거의 저작 전체를 조사했을 때 다음 중 하나라도 확인되면 이 가설은 약해져야 한다. 첫째, bonitas가 언약론에서는 중요하지만 선택론과 섭리론에서는 주변적인 경우. 둘째, 선택의 궁극적 근거를 선하심과 무관한 절대 의지(voluntas absoluta)에 두는 본문이 발견되는 경우. 셋째, 인간의 믿음과 순종이 하나님의 선하심 및 은혜와 별개의 독립 원리로 작동하는 경우. 넷째, 후기 불링거에서 이 구조가 사라지는 경우. 반대로 1534년의 《De testamento》에서 1549–51년의 《Decades》, 1566년의 《제2스위스 신앙고백》, 그리고 후기 주석들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구조가 반복해서 확인된다면, 그때는 "불링거는 언약신학자였다"보다 한 층 더 깊은 명제를 제안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 나는 이 문장을 결론이 아니라, 검증할 가치가 매우 높은 작업가설(working thesis)로 잡는다. 그 이상을 주장하는 것은 이 글이 처음부터 경계해 온 바로 그 잘못 — 체계를 본문 위에 올려놓는 잘못 — 을 불링거 연구에서 반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가설이 우리의 두 수업 질문에 무엇을 주는지도 정확히 말해 두자. 이 가설이 성립한다면, 15장에서 성경 본문으로 그렸던 그림에 역사적 깊이가 더해진다. 그때 선택은 이렇게 서술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이며, 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하나님과의 언약적 사귐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은혜의 효력은 인간의 인격과 의지를 파괴하는 강제가 아니라, 죄에 매인 의지를 갱신하여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는 선한 회복이다.

 

'예정된 자들'이라는 말이 차갑게 들렸던 이유의 일부는, 예정이 마치 성품 없는 절대 권력의 명단 작성처럼 상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상상 속의 하나님과, 온종일 손을 벌리시고(롬 10:21), 돌 같은 마음 대신 살 같은 마음을 주시며(겔 36:26), 사랑하게 하시려고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는(신 30:6) 성경의 하나님은 같은 분이 아니다. 그러나 — 그리고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 장 전체가 부정직해진다 — 이 가설은 가장 어려운 질문을 풀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날카롭게 만든다.

 

 

 

17. 가장 어려운 반론 — 그 은혜가 왜 모두에게는 아닌가

이제 이 글이 끝까지 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질문 앞에 선다.

효력적 은혜가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의 표현이라면, 왜 하나님은 그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베풀지 않으시는가?

 

정직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뜻"을 앞세우는 대답은 이 질문 앞에서 비교적 이른 지점에 멈춤선을 그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대답이 게으르다는 뜻은 아니다 — 롬 9:20 자체가 그 멈춤선의 성경적 근거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15장과 16장에서 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앞세우면, 질문은 오히려 더 날카로워진다. 선하심은 본성상 어떻게 특정한 선택(particular election)과 관계하는가. 선하신 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왜 모두에게 하지 않으시는가. 이 무게를 회피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층위를 나누자.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이 명시적으로 답하는 것과, 개혁파 조직신학이 추론하는 것과, 신비로 남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첫째, 성경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들【A. 본문】. 성경은 하나님이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명시한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겔33:1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2:4)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동시에 성경은 멸망하는 자의 멸망을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랑의 방향에 돌린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9)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판단이 의로울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 아브라함의 기도가 그 확신 위에 서 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18:25)

 

또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은혜의 불균등한 분배에 항의하는 자에게 주어진 대답은 하나님의 선하심 그 자체였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20:15)

 

주목하라. 이 비유에서 주인의 자유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는 자유, 약속한 것보다 덜 주지 않으면서 어떤 이에게는 더 주는 자유다. 성경이 그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는 언제나 그런 종류의 자유다 — 누구에게도 불의하지 않으면서, 어떤 이에게 갚을 수 없는 선을 베푸는 자유.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11:35).

 

둘째, 개혁파 조직신학이 여기서 추론하는 것들【B/C】. 개혁신학은 이 본문들을 종합하여 대략 이렇게 정리해 왔다. 멸망하는 자는 자기 죄와 불신앙 때문에, 곧 공의에 따라 멸망한다 — 아무도 받아 마땅한 것보다 나쁜 것을 받지 않는다. 구원받는 자는 순전한 은혜로 구원받는다 — 아무도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은혜는 갚아야 할 빚이 아니며, 빚이 아닌 것을 모두에게 주지 않으신다고 해서 불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딤전 2:4 같은 본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모든 사람을 향한 진실한 복음의 초청과 기뻐하심)과 '작정하신 뜻'(실제로 이루기로 정하신 것)을 구별하는 설명이 제시되어 왔다. 이 구별은 성경의 두 계열 본문을 모두 보존하려는 진지한 시도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이것은 본문이 직접 주는 설명이라기보다 본문들을 함께 설명하기 위한 조직신학적 구성이며【C. 구성】,[^89] "왜 A에게는 주시고 B에게는 주지 않으시는가"라는 개별적 '왜'에는 여전히 답하지 않는다.

 

셋째, 신비로 남는 것. 바로 그 개별적 '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성경의 명시적 진술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개별적인 '왜'에 대해서는 이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WCF 3.7은 긍휼을 베풀기도 거두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뜻을 말할 뿐 개별적 이유를 제공하지 않고, 3.8은 이 교리를 특별한 신중함으로 다루라고 명한다.[^90] 바울은 어떤가. 로마서 9–11장의 그 긴 논증 끝에서 바울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메커니즘의 공개가 아니라 송영이었다. 그리고 모세는 이미 오래 전에 그 경계선을 그어 두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29:29)

 

감추어진 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했다. 그러나 이 구절의 강조점은 앞부분이 아니라 뒷부분이다 —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했고, 그것은 행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비는 우리를 사변의 미로가 아니라 순종의 길로 돌려보낸다.

 

다만 '신비'라는 말이 오용되지 않도록 두 가지를 분명히 하자. 첫째, 신비는 질문을 금지하는 딱지가 아니다. "신비니까 그만 물으라"는 말로 이 장의 질문들을 봉쇄한다면, 그것은 롬9:14과 9:19에서 반문을 스스로 기록하고 세 장에 걸쳐 대답한 바울보다, 그리고 자유의지에 한 장을 통째로 바친 웨스트민스터 총회보다 게으른 태도다. 신비의 자리는 논증의 이 아니라 이다 — 물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묻고,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안 다음에야 도달하는 자리. 둘째, 그러나 그 끝은 실제로 존재한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야말로 가장 비성경적인 기대다. 바울이 "깊도다"라고 외친 것은 논증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논증이 다다른 곳에서 본 것이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링거의 가설에 대해서도 같은 정직함을 유지하자. 16장의 가설은 이 신비를 해소하지 못한다. 그것이 하는 일은 다른 것이다. 그 가설은 신비의 성격을 바꾼다. "왜 모두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성품을 알 수 없는 절대 권력의 자의성 앞에서 묻는 것과, 온종일 손을 벌리시고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아들을 내어 주기까지 하신 분의 선하심 앞에서 묻는 것은 — 질문의 문장은 같아도 — 전혀 다른 경험이다. 전자의 신비는 공포이고, 후자의 신비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깊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서야 할 곳은 그 깊이 앞이다.

 

 

 

18. 깊도다 — 결론

긴 길을 걸었다. 이제 처음의 두 질문 앞으로 돌아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답으로 내어놓자.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가지를 함께 말한다. 하나님이 행하신다 — 택하시고, 이끄시고, 마음을 여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그리고 사람이 실제로 행한다 — 원하고, 믿고, 오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또한 믿지 않고, 거스르고,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그 모든 것에 실제로 책임을 진다. 토라는 이 둘을 바로의 이야기 속에 설명 없이 병치했고, 바울의 로마서 9–11장 논증은 토라에서 이미 보았던 이중 행위자 구조와 깊은 연속성을 보이며,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9:18)과 이스라엘의 불순종(10:21)과 불신앙으로 인한 꺾임(11:20)과 회복의 가능성(11:23)과 모두를 향한 긍휼(11:32)을 한 논증 안에 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자들은 그 두 언어 사이의 관계를 물었고, 웨스트민스터는 그 대답을 작정과 자유의지와 유효한 부르심이라는 범주로 체계화했다. 그 체계는 성경에 깊이 뿌리내린 훌륭한 체계다. 그러나 어떤 체계도 — 웨스트민스터의 체계조차 — 성경 본문 그 자체를 대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오직 성경'은 '성경 전체'를 요구한다. 9:18과 함께 10:21을, 9:22와 함께 11:23을, 선택의 본문과 함께 초청의 본문을 읽는 것 — 그것은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라고 한 WCF 1.9의 원리를 이 문제에 적용하는 한 방식이다.[^91]

 

이제 두 질문에 차례로 답하자.

 

"예정된 자들이라고 하면 배타적으로 느껴진다." 그 느낌은 오해가 아니다. 성경과 고백서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하고, 실제로 선택의 특수성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 특수성은 성품 없는 권력의 명단 작성이 아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선택은 선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하시고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같은 성경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선포하시고, 순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온종일 손을 벌리시며,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도 유기된 자로 단정할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 예정 교리가 어떤 사람을 향해 "당신은 아마 아닐 것"이라고 속삭이는 데 쓰인다면 그것은 이 교리의 오용이다. 이 교리의 성경적 용도는 정반대다 — 믿는 자에게는 "네 구원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하나님의 선물이니 아무것도 너를 그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위로가 되고, 아직 믿지 않는 자를 향해서는 "하나님께는 그를 접붙이실 능력이 있다"는 소망으로 기도하고 전도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이 뭐가 있는가." 정확히 답하면 이렇다. 구원의 근거로 말하면 — 없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다. 내 구원이 내 의지의 성능에 근거했다면 나는 단 하루도 확신 속에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으로 말하면 — 전부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나를 아바타처럼 조종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내 대신 믿어 주시지 않는다. 내가 믿고, 내가 회개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순종한다. 다만 내가 그렇게 기꺼이 원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 의지를 새롭게 하셨다. "그들은 지극히 자유롭게 나아오니,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WCF 10.1). [^92]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개인적인 질문 — "내가 믿은 것인가, 하나님이 믿게 하신 것인가?" — 에 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원인과 응답을 구별해서 말하면 둘 다다. 그리고 그 순서가 복음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먼저 내 마음과 의지를 새롭게 하셔서 믿게 하셨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내가 믿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심 → 의지가 새로워짐 → 내가 기꺼이 믿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1:29)

 

엡 2:8은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구원 전체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하고, 빌1:29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은혜로 주어졌다고 더욱 직접적으로 말한다.[^93] 믿음은 나의 행위이면서 하나님의 선물이다. 루디아가 정말로 들었고 정말로 따랐지만, 그 마음을 여신 분은 주님이셨다(행16:14).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 — 믿었다(행13:48).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관하여, 나는 이 글의 끝에서 하나의 가설을 열린 채로 남긴다. 인간의 의지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그 의지를 되살리고 새롭게 하여 기꺼이 당신께로 나아오게 하시는 이 주권적이고 효력 있는 은혜의 궁극적 근거는, 벌거벗은 절대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bonitas Dei)이 아닐까. 그리고 언약이란, 불링거의 여러 본문을 따라 제안해 보자면, 그 선하심이 역사 속에서 취하는 관계적 형식이 아닐까. 이것은 아직 검증 중인 작업가설이며, 《De testamento》와 《Decades》와 《제2스위스 신앙고백》을 관통하는 원문 연구로 확인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가설이 설령 확증되더라도, "왜 그 선하신 은혜가 모두에게는 아닌가"라는 가장 어려운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나는 그 질문을 봉합하지 않은 채로 이 글을 닫는다. 다만 그 질문을 들고 서 있는 자리가 달라졌기를 바란다 — 성품을 알 수 없는 권력 앞이 아니라, 온종일 손을 벌리시는 선하신 하나님 앞에.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이제 예정론의 모든 문제가 풀렸다"고 느끼신다면, 그것은 내가 글을 잘못 쓴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실제 응답을 얼마나 풍성하게, 얼마나 두려움 없이 함께 말하고 있는지를 — 조금 더 보게 되셨기를. 그리고 그 풍성함 앞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이라는 가장 아픈 질문을 세 장에 걸쳐 정면으로 다룬 바울이 마지막에 도달했던 그 자리에, 우리도 함께 도달하기를. 그 자리는 대답의 포기가 아니다. 물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물은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경배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11:33–36)

 

 

 

각주

 

[^1]: Westminster Assembly,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10.1, hosted by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Confession of Faith," https://opc.org/wcf.html.고백서는 유효한 부르심에서 하나님이 피택자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renewing their wills) 그리스도께 효력 있게 이끄시되, 그들이 "지극히 자유롭게 나아오며,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원하게 된다"(they come most freely, being made willing by his grace)고 진술한다.

 

[^2]: Athanasius of Alexandria, "Thirty-Ninth Festal Letter" (367), secs. 4–7, especially sec. 5, trans. Archibald Robertson,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2nd ser., vol. 4, ed.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92), https://www.newadvent.org/fathers/2806039.htm.이 서신 5절은 사복음서, 사도행전, 일곱 공동서신, 바울서신 14권, 요한계시록을 열거하고, 6절은 이 책들만을 구원의 샘으로 부르며, 7절은 정경 밖이지만 교훈을 위해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별도로 구분한다. 다만 이것이 367년에 모든 지역 교회의 신약 정경 논쟁이 종료되었다는 뜻은 아니며, 오늘날 연구는 이 서신을 정경 형성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중요한 이정표로 본다.

 

[^3]: Eusebius of Caesarea, *Ecclesiastical History* 3.25, trans. Arthur Cushman McGiffer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2nd ser., vol. 1, ed.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90), https://www.newadvent.org/fathers/250103.htm.유세비우스는 아타나시우스보다 앞서 "인정된 책"(homologoumena)과 "논쟁되는 책"(antilegomena)을 구별하면서 야고보서·유다서·베드로후서·요한이서·삼서 등을 후자에 넣었고,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고 적었다.

 

[^4]: Bruce M. Metzger, "Patristic Evidence and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New Testament Studies* 18, no. 4 (1972): 379–400, especially 379. 메츠거는 신약 본문비평의 증거를 그리스어 사본, 고대 역본, 교부 인용으로 나눈 뒤, 그 가운데 교부 인용이 가장 큰 어려움과 문제를 수반한다고 지적한다.

 

[^5]: 제2성전기에는 성경의 권위가 강화되는 동시에 그 권위 있는 전승을 해석하고 다시 쓰고 적용하는 서기관 문화가 매우 활발했으며, 쿰란 문헌은 동일한 성경 전승이 문자적·해석적·종파적으로 다양하게 적용된 사례를 잘 보여 준다. Molly M. Zahn, *Genres of Rewriting in Second Temple Judaism: Scribal Composition and Transmiss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especially 196–226; Jonathan G. Campbell, "Scriptural Interpretation at Qumran," in *The New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vol. 1, *From the Beginnings to 600*, ed. James Carleton Paget and Joachim Schap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242–266.

 

[^6]: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반에는 아우구스티누스, 키프리아누스, 크리소스토무스, 베르나르 등 고대·중세 저자들이 빈번하게 인용된다. 예컨대 교회론을 다루는 4권 1장에서도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직접 원용한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1, trans. Henry Beveridge (1845),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institutes.

 

[^7]: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ed. Michael W. Holmes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Logos Bible Software, 2010), John 6:37, 44–45. 37절의 ἥξει는 미래 능동 직설법 3인칭 단수이며, 44–45절은 οὐδεὶς δύναται ἐλθεῖν("아무도 올 수 없다")과 πᾶς … ἔρχεται("…하는 사람마다 온다")를 나란히 놓는다.

 

[^8]: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Phil. 2:12–13. κατεργάζεσθε는 현재형 2인칭 복수 명령이며, 13절의 γάρ가 그 명령에 근거를 잇는다. ὁ ἐνεργῶν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역사 범위는 τὸ θέλειν과 τὸ ἐνεργεῖν, 곧 "원함"과 "행함" 모두에 미친다.

 

[^9]: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d. Karl Elliger and Wilhelm Rudolph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97), Deut. 10:16; 30:6, 19. 신 30:6의 וּמָל יְהוָה אֱלֹהֶיךָ אֶת־לְבָבְךָ에서는 YHWH가 마음의 할례를 행하시는 명시적 주어이고 이어지는 לְאַהֲבָה가 "사랑하도록"이라는 목적·결과 방향을 나타내는 반면, 신 10:16에서는 이스라엘 자신에게 마음의 할례가 명령되고, 신 30:19에서는 다시 "생명을 택하라"는 명령이 이어진다.

 

[^10]: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Matt. 11:25–28. 헬라어 본문에서도 ἔκρυψας/ἀπεκάλυψας("감추셨다/나타내셨다")와 아버지의 εὐδοκία가 먼저 진술되고 두 절 뒤에 Δεῦτε πρός με πάντες("다 내게로 오라")가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두 교리를 철학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태가 두 언어를 동일한 단락 안에 실제로 병치한다는 사실이다.

 

[^1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7 and accompanying proof texts. 3.7의 증거본문 배열은 하나님의 "지나치심"(passing by)과 긍휼을 베풀거나 거두시는 자유를 뒷받침하는 본문군에 마 11:25–26을 포함한다.

 

[^12]: Irenaeus of Lyons, *Against Heresies* 1.6.1–2,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https://ccel.org/ccel/irenaeus/against_heresies_i/anf01.ix.ii.vii.html. 이레나이우스는 발렌티누스파가 물질적(hylic)·혼적(psychic)·영적(pneumatic) 인간을 구별하고 영적 부류가 행위가 아니라 본성 때문에 구원된다고 가르친다고 비판적으로 보고한다.

 

[^13]: Irenaeus, *Against Heresies*, 4.37.1, 4–5,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437.htm. 이레나이우스는 인간이 처음부터 자유로운 행위자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종하도록 지음받았으며, 믿음과 불신앙에도 인간의 실제 의지가 관련된다고 논한다.

 

[^14]: John Chrysostom, *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 46, on John 6:44–45, trans. Philip Schaff,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14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6.htm.크리소스토무스는 마니교도들이 이 구절을 들어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고 직접 소개한 뒤, 이 말씀은 자유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큰 도움을 필요로 함을 보여 준다고 답한다. 그는 이끄심이 원하지 않는 자를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45절의 "다"를 기꺼이 배우려는 자들로 읽는다.

 

[^15]: John Chrysostom, *Homilies on Romans* 16, on Rom. 9:14–24, trans. J. B. Morris, W. H. Simcox, and George B. Stevens,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11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https://www.newadvent.org/fathers/210216.htm.크리소스토무스는 토기장이 비유가 자유의지를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명시하며, 바로의 경우를 그 자신의 완고함과 연결하는 동시에 위로부터 오는 은혜의 필요를 함께 말한다.

 

[^16]: Augustine, *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1.3, recalling his earlier treatment in *To Simplicianus* and his later *Retractations*, trans. Peter Holmes and Robert Ernest Wallis,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5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7), https://www.newadvent.org/fathers/15121.htm.아우구스티누스는 심플리키아누스에게 보낸 글에서 이 문제와 씨름하던 시기를 돌아보며 자유로운 선택을 위해 애썼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이겼다고 회고하고, 고전 4:7을 자신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결정적 증언으로 든다.

 

[^17]: Augustin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1.3. 후기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의 증가만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정면으로 논증한다.

 

[^18]: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26.4–5, on John 6:44–45, trans. John Gibb and James Innes,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7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8),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6.htm.아우구스티누스는 이끌림이 의지에 반하여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사람이 사랑과 즐거움에 이끌린다고 설명한다.

 

[^19]: Augustin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1.35–36, https://www.ccel.org/ccel/schaff/npnf105.xxi.ii.xxxvii.html. 그는 엡 1:4를 주해하며 우리가 장차 거룩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도록 택하셨다고 직접 논증한다.

 

[^20]: Desiderius Erasmus, *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latio* (Basel, 1524) [판본 확인 필요]; Martin Luther, *De servo arbitrio* (Wittenberg, 1525). 영역본은 Martin Luther, *The Bondage of the Will*, trans. Henry Cole (T. Bensley, 1823), https://ccel.org/ccel/luther/bondage/bondage.html.

 

[^21]: Martin Luther, *The Bondage of the Will*, secs. LVII, LXV, trans. Henry Cole (T. Bensley, 1823), https://ccel.org/ccel/luther/bondage.xi.xvii.html. 루터는 신 30장의 "택하라," "돌이키라," "지키라" 등의 명령형에서 인간의 영적 능력을 추론하는 에라스무스의 논리를 거부한다. 모세는 명령할 뿐 "너에게 선택할 능력과 힘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성경의 명령·권고·책망이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이지 은혜 없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2]: Luther, *Bondage of the Will*, sec. [locator 확인 필요]. 루터의 "아래의 것들 / 위의 것들" 구별에서 인간은 창조세계의 하위 사물과 시민적 행위에 대해서는 제한된 자유를 행사하지만,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영적 선에서는 스스로를 하나님께 돌이킬 능력을 갖지 못한다.

 

[^23]: Calvin, *Institutes*, 2.3.5,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iv.iv.html. 칼빈은 타락으로 인간이 의지 자체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의지의 건전함"(soundness of will)을 상실했다고 설명하고, 죄를 짓는 필연성(necessity)을 외부의 강압적 강제(compulsion)와 구별한다. 그는 바로 이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의 필연적 속박 논의를 언급하고, 이어 베르나르의 "자발적 필연성"(voluntary necessity) 논의를 길게 인용한다.

 

[^24]: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on John 6:44–45, trans. William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https://ccel.org/ccel/calvin/calcom34/calcom34.xii.vii.html.칼빈은 44절의 "이끄심"을 외적 강제가 아니라 성령께서 지성을 밝히고 마음을 순종으로 빚으시는 강력한 역사로 이해하며, 이 역사가 이전에 원하지 않고 주저하던 자를 기꺼이 원하는 자로 만든다고 설명한다. 45절의 하나님의 가르침 역시 외적 음성만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역사와 마음의 내적 조명을 포함한다고 해석한다.

 

[^25]: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on Matt. 23:37, trans. William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3.all.html.칼빈은 예루살렘의 거부를 실제적이고 유죄한 거부로 해석하면서도, 이 역사적·외적 부르심의 거부를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목적의 실패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26]: Synod of Dort, *The Canons of Dort* (1619), introduction and Heads I–V, https://www.ccel.org/creeds/canons-of-dort.html.1610년 항론파의 다섯 조항에 대한 개혁교회의 공식적 대응이 도르트 총회의 신조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보다 약 30년 뒤에 작성되었다. 도르트의 조항 배열 자체가 항론파의 논점을 순서대로 반박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27]: The Remonstrants, "The 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1610), art. 3, https://evangelicalarminians.org/the-five-articles-of-remonstrance/.제3조는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게서 또는 자유의지의 힘에서 나오는 구원하는 은혜가 있음을 부정하며,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참된 선을 생각하거나 원하거나 행할 수 없고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 이해·성향·의지와 모든 능력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명시한다.

 

[^28]: Jacobus Arminius, "Grace and Free Will," in *The Works of James Arminius*, trans. James Nichols and William Nichols, vol. 2 (Longman, Hurst, Rees, Orme, Brown, and Green, 1828) [판본 통일 필요], https://www.ccel.org/ccel/arminius/works2.html. 아르미니우스는 자유의지가 은혜 없이는 어떠한 참되고 영적인 선도 시작하거나 완성할 수 없다고 하고, 자신이 말하는 은혜가 단순한 자연적 도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중생에 속한 은혜로서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움직인다고 명시한다.

 

[^29]: Remonstrants, "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art. 4. 제4조는 선행하는(prevenient), 돕는, 깨우는, 뒤따르는, 협력하는 은혜를 명시하며 모든 선한 움직임을 하나님의 은혜에 귀속시킨다.

 

[^30]: Remonstrants, "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art. 4. 제4조는 은혜의 작용 방식이 불가항력적이지 않다고 명시하며, 사람이 성령을 거스를 수 있다는 사도행전 7장의 언어를 근거로 든다.

 

[^31]: Synod of Dort, *Canons of Dort*, Third and Fourth Heads of Doctrine, arts. 11–12, 16. 11조는 성령께서 닫힌 마음을 열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의지에 새로운 성질을 부어 죽은 의지를 살리시고 악하고 반역적인 의지를 선하고 순종적인 것으로 만드신다고 진술한다. 12조는 이 중생이 단순한 외적 설교나 도덕적 설득이 아니며 하나님이 자기 몫을 한 뒤 최종 결정을 사람에게 남기는 방식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것이 확실하고 무오하며 효력 있게(certainly, infallibly, and effectually) 이루어져 그들이 실제로 믿게 된다고 말한다. 동시에 16조는 이 은혜가 사람을 나무토막이나 돌덩이처럼 다루거나 의지를 없애거나 의지에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32]: Arminius, *Works of James Arminius*, vol. 1, response to Article XXVII, https://ccel.org/ccel/arminius/works1/works1.iv.xxiv.html.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이 믿음을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부분적으로 자유의지"에 의존시키는 것으로 묘사된 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33]: Remonstrants, "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art. 1; Synod of Dort, *Canons of Dort*, First Head of Doctrine, arts. 7, 9. 항론파 제1조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과 순종 안에 끝까지 머무는 자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고 진술한다.

 

[^34]: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1. 원문은 "nor is violence offered to the will of the creatures; nor is the liberty or contingency of second causes taken away, but rather established"이다.

 

[^35]: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5, 3.7. 3.5는 선택이 오직 값없는 은혜와 사랑("free grace and love alone")에 근거하며 믿음이나 선행을 미리 보셨기 때문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반면, 3.7은 지나치심(passing by)과 정죄를 말하면서 "for their sin"을 명시한다.

 

[^36]: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8.

 

[^37]: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9.1. 원문은 의지가 "neither forced, nor, by any absolute necessity of nature determined, to good or evil"이라고 진술한다.

 

[^38]: 개혁파의 자유 이해를 현대 철학 용어로 양립론이라 분류하는 논의,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전통을 현대의 특정 자유 이론과 그대로 동일시하는 데 대한 경고로는 Oliver D. Crisp, "Libertarian Calvinism," in *Free Will and Classical Theism: The Significance of Freedom in Perfect Being Theology*, ed. Hugh J. McCann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112–130을 보라. 크리스프는 WCF와 양립 가능한 "자유지상주의적 칼빈주의"의 가능성까지 검토한다.

 

[^39]: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9.3 and Scripture proofs. 증거본문 배열은 9.3에 요 6:44, 65 등을 연결한다. 다만 증거본문은 고백서 본문 자체와 동일한 지위를 갖지 않으며 판본별 차이가 있다.

 

[^40]: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9.4 and Scripture proofs.

 

[^4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0.1. 고백서는 유효한 부르심을 "renewing their wills," "determining them to that which is good," "effectually drawing them to Jesus Christ"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most freely" 나아온다고 명시한다.

 

[^42]: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0.1, Scripture proofs, https://opc.org/confessions.html.

 

[^43]: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0.2.

 

[^44]: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chap. 3, Scripture proofs. 이 글의 증거본문 분석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제출한 배열을 기준으로 한다(각주 52 참조).

 

[^45]: Pablo T. Gadenz, *Called from the Jews and from the Gentiles: Pauline Ecclesiology in Romans 9–11* (Mohr Siebeck, 2009). 현대 연구는 흔히 9:1–5를 서론, 11:33–36을 송영으로 하여 9:6–29; 9:30–10:21; 11:1–32의 세 단락으로 구획한다.

 

[^46]: Gadenz, *Called from the Jews and from the Gentiles*, 9–11장 개관. 여러 현대 주석이 9:6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를 9–11장 전체의 문제제기로 읽고 9:6–11:32를 그 답변으로 정리한다.

 

[^47]: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Jer. 18:1–10, especially vv. 4, 7–10.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망가지자 다른 그릇으로 다시 만들어지고(18:4), 뽑고 파괴하겠다고 선언된 나라라도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이 돌이켜지며(18:7–8), 반대로 복이 선언된 나라가 악을 행하면 복이 돌이켜진다(18:9–10).

 

[^48]: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9:22–23. 22절의 κατηρτισμένα는 명시적 행위자가 표현되지 않은 완료 수동 분사이고, 23절의 προητοίμασεν은 하나님을 문맥상의 주어로 하는 부정과거 능동 직설법이다. κατηρτισμένα의 태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는 Daniel B. Wallace, *Greek Grammar Beyond the Basics: An Exegetical Syntax of the New Testament* (Zondervan, 1996), 417–18을 보라.

 

[^49]: Gadenz, *Called from the Jews and from the Gentiles*, Rom. 9:30–10:21 논의. 현대 연구의 공통 구획도 이 단락을 별도 단위로 잡으며, 이 부분의 요지를 이스라엘이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다는 것으로 요약한다.

 

[^50]: Cf. Deut. 29:4 and Isa. 29:10 in Rom. 11:8.

 

[^51]: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11:25. ἀπὸ μέρους는 완악함이 "부분적으로" 일어났음을, ἄχρι οὗ는 그것을 "~하기까지"라는 시간 구조 안에 놓음을 나타낸다. 다만 이스라엘의 이후 구원에 대한 정확한 함의는 주해상 논쟁이 계속된다.

 

[^52]: Westminster Assembly, *Confession of Faith*, chap. 3, Scripture proofs. 3.1과 3.8은 롬 11:33을, 3.8은 또한 롬 11:5–6과 11:20을 사용한다. 로마서 9장은 3.1·3.2·3.3·3.5·3.7·3.8에 걸쳐 광범위하게 쓰이는 반면, 로마서 11장의 사용은 이 세 곳에 집중된다.

 

[^53]: Westminster Assembly, *The Confession of Faith of the 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chap. 3, with the Assembly's Scripture proofs, in S. W. Carruthers, ed.,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Being an Account of the Preparation and Printing of Its Seven Leading Editions, to Which Is Appended a Critical Text of the Confession with Notes Thereon* (R. Aikman & Son, 1937), https://www.westminsterconfession.org/resources/confessional-standards/the-confession-of-faith-of-the-westminster-assembly-of-divines/. 총회는 1646년 완성판에는 증거본문을 붙이지 않았고, 의회의 요구에 따라 1647년 1월부터 이를 심의하여 4월 29일 증거본문이 포함된 고백서를 제출했다. 증거본문은 고백서 본문과 동일한 문학적·교리적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며, 각 조항을 어떤 성경 본문으로 뒷받침했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적 자료다.

 

[^54]: Westminster Assembly, *Confession of Faith*, chap. 3, Scripture proofs. 롬 9:30–10:21은 총회가 제3장에 부착한 증거본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55]: Westminster Assembly, *Confession of Faith*, 3.8, Scripture proofs: Rom. 11:5–6, 20; 2 Pet. 1:10; Rom. 8:33; Luke 10:20.

 

[^56]: Westminster Assembly, *Confession of Faith*, chap. 3, Scripture proofs. 롬 11:20은 3.8에 인용되지만, 롬 11:23은 제3장 어디에도 인용되지 않는다.

 

[^57]: Westminster Assembly, *Confession of Faith*, 1.9. 원문은 "The infallible rule of interpretation of Scripture is the Scripture itself"로 시작한다.

 

[^58]: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9:18. θέλει, ἐλεεῖ, σκληρύνει는 모두 현재 능동 직설법 3인칭 단수이며, 생략된 주어는 앞 문맥의 하나님이다.

 

[^59]: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10:21. ἐξεπέτασα는 부정과거 능동 직설법 1인칭 단수이고, ἀπειθοῦντα와 ἀντιλέγοντα는 λαόν을 수식하는 현재 능동 분사다.

 

[^60]: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11:20. ἐξεκλάσθησαν은 부정과거 수동 직설법 3인칭 복수이고 ἕστηκας는 완료 능동 직설법 2인칭 단수이며, τῇ ἀπιστίᾳ와 τῇ πίστει는 각각 꺾임과 서 있음에 대한 여격이다.

 

[^61]: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11:23. ἐπιμένωσι는 현재 능동 접속법 3인칭 복수, ἐγκεντρισθήσονται는 미래 수동 직설법 3인칭 복수이며, 이어지는 절은 하나님을 πάλιν ἐγκεντρίσαι αὐτούς("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는 분으로 명시한다.

 

[^62]: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11:32. συνέκλεισεν은 ὁ θεός를 명시적 주어로 하는 부정과거 능동 직설법 3인칭 단수이고, 이어지는 ἵνα절의 ἐλεήσῃ는 같은 주어를 갖는 부정과거 능동 접속법 3인칭 단수다.

 

[^63]: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4:21; 7:3; 8:15; 10:1. 완악함 서사는 חזק, כבד, קשה 세 어근의 형태들을 사용한다. 출 4:21의 אֲחַזֵּק은 Piel 미완료 1인칭 단수, 출 7:3의 אַקְשֶׁה는 Hiphil 미완료 1인칭 단수다.

 

[^64]: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4:21; 7:3. 두 본문 모두에서 하나님은 예고된 완악하게 하심의 명시적 1인칭 주어다.

 

[^65]: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7:13–14, 22; 8:19. "마음이 굳어졌다"는 상태 서술은 "바로가 스스로 굳혔다"는 능동 행위와 구별된다.

 

[^66]: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8:15, 32. 8:15의 וְהַכְבֵּד은 כבד의 Hiphil 부정사 절대형으로, 앞의 וַיַּרְא("바로가 보았다")의 주어를 이어받아 그가 자기 마음을 무겁게 했음을 서술한다. 8:32에서는 바로가 명시적 주어다.

 

[^67]: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9:12. 재앙 사건의 진행을 서술하는 내러티브 안에서 YHWH가 완악하게 하는 동사의 명시적 문법 주어로 등장하는 첫 사례다(וַיְחַזֵּק יְהוָה אֶת־לֵב פַּרְעֹה).

 

[^68]: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9:34–35.

 

[^69]: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10:1–2. הִכְבַּדְתִּי는 Hiphil 완료 1인칭 단수이며, 이어지는 לְמַעַן 절들이 완악하게 하심을 YHWH의 표징을 보이는 일 및 그것을 후대에 전하는 일과 연결한다.

 

[^70]: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10:1; 14:4. 10:1의 완악하게 하는 동사 הִכְבַּדְתִּי와 14:4의 영광을 얻으시는 동사 וְאִכָּבְדָה는 같은 어근 כבד에서 나온다.

 

[^7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1.

 

[^72]: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 q. 23, a. 5, "Whether the Foreknowledge of Merits Is the Cause of Predestination?" https://www.newadvent.org/summa/1023.htm.아퀴나스의 답은 명백히 부정이다. 그는 예정의 효과 전체가 우리에게서 나오는 어떤 원인에 의존할 수 없다고 설명하며, 은혜를 위한 준비(preparation for grace) 자체도 하나님의 도움 아래 있다고 본다. 나아가 그는 예정의 효과 전체의 이유를 하나님의 선하심(the goodness of God)에 둔다.

 

[^73]: *via moderna*의 배경과 루터에게서 가브리엘 비엘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Volker Leppin, "Nominalism and the Via Moderna in Luther's Theological Work," in *Oxford Research Encyclopedia of Relig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7)을 보라. 루터는 에르푸르트에서 이 전통 아래 교육받았고 이후 비엘의 은혜론을 주요 비판 대상으로 삼았다. 다만 *facere quod in se est*를 후기 중세 전체의 단일 공식으로 평면화해서는 안 되며, 아퀴나스·비엘·루터가 이 표현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는 연구도 있다.

 

[^74]: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6–1.10; Calvin, *Institutes*, 4.1. "Solo Scriptura"는 종교개혁 당시의 공식 표어가 아니라, 오늘날 개인주의적 성경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분석적 표현에 가깝다.

 

[^75]: Cyprian of Carthage, *On the Unity of the Church* 6, in *Ante-Nicene Fathers*, vol. 5, https://biblehub.com/library/cyprian/the_treatises_of_cyprian/treatise_i_on_the_unity.htm; Calvin, *Institutes*, 4.1.4–5,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vi.ii.html. 교회를 어머니로 갖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는 격언의 고전적 출처는 키프리아누스이며, 칼빈은 4권 1장에서 이 모성 이미지를 계승한다.

 

[^76]: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9; 31.3.

 

[^77]: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1.2–3. 31.2는 총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할 경우(consonant to the Word of God) 경외와 복종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하면서, 그 회의체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라는 데서 오는 사역적 권위도 함께 말한다. 후대 장로교 전통 역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secondary standards"로, 성경을 유일한 오류 없는 신앙과 실천의 규칙으로 규정해 왔다.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Confession and Catechisms," https://opc.org/confessions.html.

 

[^78]: Calvin, *Institutes*, 3.23.2, https://ccel.org/ccel/calvin/institutes/institutes.v.xxiv.html.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의의 최고 규칙(supreme rule of righteousness)이라 하면서도, 이로써 법 없이 무엇이든 하는 "절대 권력"이라는 허구를 승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못박는다. 하나님은 법 없는 분(exlex)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법이시며, 그의 뜻은 모든 악에서 자유로운 "모든 법의 법"이다.

 

[^79]: Augustine, *Tractates on John*, 26.4, https://www.ccel.org/ccel/schaff/npnf107.iii.xxvii.html. 아우구스티누스는 요 6:44에 대해 "네가 네 뜻에 반하여 이끌린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며, 사람이 의지뿐 아니라 사랑과 기쁨(delight)에 의해서도 이끌린다고 설명한다. 그는 베르길리우스 *Eclogue* 2.65의 *trahit sua quemque voluptas*를 인용한 뒤, 이 이끌림이 필연이 아니라 기쁨이며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이라고 풀이하고, "사랑하는 자를 내게 데려오라, 그러면 그가 내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80]: Augustin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1.35–36.

 

[^81]: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11–202, esp. chs. 3–4. 힐데브란트는 1534년의 《De testamento》를 언약에 전적으로 바쳐진 저술로 확인하고 취리히 언약신학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본다.

 

[^82]: Bullinger, *De testamento*, fols. [확인 필요]. 불링거는 하나님이 인간의 언약 관습에 따라 행하셨다고 말한다. 다만 그가 이 문맥에서 명사 *accommodatio*를 기술용어로 사용했는지와, 후대 신학이 이를 신적 적응으로 명명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83]: Heinrich Bullinger,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et aeterno* (Zurich: Christoph Froschauer, 1534), fol. [folio 확인 필요 — 소장 라틴 원문 기준으로 고정할 것]. 불링거는 인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인 순전한 선하심 때문에 하나님이 언약을 제시하신다고 말하며, 같은 문맥에서 우리 종교의 기원이자 첫째 요점은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과 자비(misericordia)에서 나온다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영역 대조는 Charles S. McCoy and J. Wayne Baker, *Fountainhead of Federalism: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al Tradition*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1), 103–4 참조.

 

[^84]: Heinrich Bullinger, *The Decades*, sermon on God's providence and predestination, trans. H. I., ed. Thomas Hard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for the Parker Society, 1849–52) [decade·sermon·page 확인 필요]. 불링거는 단순한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구원을 시기하시거나 자신을 멸망하도록 정하셨다고 생각하게 되는 유혹을 경고하고, 예정이 인간의 가치나 무가치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와 자비에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본다고 답한다.

 

[^85]: Heinrich Bullinger, *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chap. 10, "Of the Predestination of God and the Election of the Saints," https://www.ccel.org/creeds/helvetic.htm.10장은 하나님이 값없이, 순전한 은혜로, 사람에 대한 어떤 고려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택하셨다고 진술하며, 같은 장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한 소망을 가질 것과 아무도 경솔히 유기된 자로 판정하지 말 것을 명시한다.

 

[^86]: Cornelis P. Venema, *Heinrich Bullinger and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Author of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Baker Academic, 2002); Peter Opitz, review of *Heinrich Bullinger and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by Cornelis P. Venema, *Journal of Ecclesiastical History* 55, no. 3 (2004): 592–93.

 

[^87]: Bullinger, *Second Helvetic Confession*, chap. 16; Bullinger, *Decades*, IV, 복음과 은혜에 관한 설교. SHC 16장은 믿음을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순전한 선물로 규정하고 성령을 통한 복음 설교로 주어진다고 말한다.

 

[^88]: W. Peter Stephens, "The Place and Understanding of the Doctrine of God in Heinrich Bullinger's Theology," *Reformation & Renaissance Review* 16, no. 2 (2014): 163–180. 스티븐스는 창조주·섭리·예정 등 주요 요소들 밑에 놓인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강조라고 결론짓는다.

 

[^89]: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trans. George Musgrave Giger, ed. James T. Dennison Jr., 3 vols. (P&R Publishing, 1992–97), Topic 3, Q. 15–16. 개혁파 정통주의는 이 구별을 voluntas decreti(작정의 뜻)와 voluntas praecepti(계명·계시의 뜻)라는 용어로 정식화했으며, 이것이 하나님 안의 두 의지가 아니라 한 뜻을 우리와의 관계에서 두 측면으로 구별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90]: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7–8.

 

[^9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9.

 

[^92]: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0.1.

 

[^93]: Eph. 2:8; Phil. 1:29. 엡 2:8의 중성 지시대명사 τοῦτο는 여성명사 πίστις만을 좁게 가리킨다기보다 앞의 "은혜로 믿음을 통한 구원"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믿는 것 자체가 은혜로 주어진다는 진술은 빌 1:29에서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며(ὑμῖν ἐχαρίσθη … τὸ εἰς αὐτὸν πιστεύειν), 행 16:14와도 부합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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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각주

 

각주 일러두기. 이 문서는 본문 18개 장이 완성된 이후 추가로 진행된 연구사 논의(J. Wayne Baker와 Pierrick Hildebrand의 불링거 언약 연구)를 정리한 보완 자료다.

 

*a. 보편적 복음 제시와 자유로운 거부 (Baker의 해석). Baker는 자신의 불링거 해석을 회고하며 요약하는 자리에서, 불링거에게 복음과 그리스도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제시되며,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자유롭게 거부한다"(Those who reject it do so freely)라고 설명한다. 유의할 점: 이 문장은 불링거 자신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Baker가 불링거를 해석하여 요약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불링거가 이렇게 말했다"가 아니라 "Baker의 해석에 따르면 불링거에게…"로 읽어야 한다. 이 보편적 복음 제시 논의의 배경으로는 Baker(1980)의 중기 예정론 서술도 참고하라.

Baker, "Bullinger, the Covenant,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Retrospect," 371; 참고로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31, 34. 

 

*b. Baker의 쌍무적·조건적 언약 테제. Baker의 고전적 연구는 불링거의 언약을 쌍무적(bilateral)이면서 조건적(conditional)인 구조로 읽는다. 여기서 '쌍무적'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대등한 계약 당사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와 약속에서 시작된 언약 안에서 인간의 믿음·순종·신실함이 언약 관계의 실질적 구성 요소, 곧 실제 언약적 응답으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Baker는 이 구조를 선택 중심적이고 상대적으로 일방적(unilateral)·무조건적인 칼빈의 경향과 대조하여, 취리히의 불링거에게서 제네바와 구별되는 독자적 개혁파 궤적 — 그의 표현으로 "또 하나의 개혁 전통"(the other Reformed tradition) — 을 읽어냈다. 두 궤적을 구성하는 논의는 특히 Baker(1980), 193–198을 보라. 약 이십 년 뒤의 회고 논문에서도 그는 "불링거는 조건적이고 쌍무적인 언약을 가르쳤다"(Bullinger taught a conditional, bilateral covenant)라고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한다.

J. Wayne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Athens, OH: Ohio University Press, 1980), 193–198;

J. Wayne Baker, "Heinrich Bullinger, the Covenant,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Retrospect,"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29, no. 2 (Summer 1998): 359–376, cited 370.

 

*c. Hildebrand의 Baker 테제 재검토. Hildebrand의 공헌 하나는 기존 연구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않았던 불링거의 미출간 창세기 설교 노트를 검토한 것이다. 그는 두 물음 — 불링거에게 타락 이전 언약(prelapsarian covenant)의 요소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불링거가 창세기 17장 해석에서 언약과 선택을 실제로 연결하는가 — 을 던지고 둘 모두에 긍정적으로 답한다. 이어 "Covenant and Election" 절에서 그는 Baker의 구도 — 불링거의 쌍무적·조건적 언약 대(對) 선택에 근거한 칼빈의 일방적·무조건적 유언 — 를 정리한 뒤, 불링거의 언약신학 자체 안에 "선택에 뿌리내린 진정한 일방적 측면"(a genuine unilateral aspect grounded in election)이 존재함을 논증한다. 즉 쌍무적 언약과 일방적 선택은 불링거 안에서 서로 배타적인 두 원리로 분리되지 않는다. 언약의 중심성 논의 전체는 같은 책 4장 "The Centrality of the Covenant, 1534–1551"을 보라.

Pierrick Hildebrand, The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24), 175(미출간 창세기 설교 자료), 183–187("Covenant and Election"), 직접 인용은 184; 4장 전체는 "The Centrality of the Covenant, 1534–1551," 165–202.

 

*d. "Fundamentum foederis est gratuita receptio". 이 질문의 무게를 보여 주는 자료가 있다. Hildebrand가 창세기 17장 관련 미출간 자료에서 인용하는 불링거의 라틴어 문장이다. "Fundamentum foederis est gratuita receptio." 신중하게 옮기면 "언약의 기초는 값없이 받아주심이다" 정도가 되며, 문맥에 따라 "언약의 토대는 하나님의 무상(無償)한 수납이다"로도 새길 수 있다. 다만 gratuita receptio를 후대의 교리 용어인 '무조건적 선택'으로 곧장 번역하는 것은 과도하다. 이 문장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다 — 불링거의 언약이 조건적·쌍무적 차원을 지닌다 하더라도, 그 토대(fundamentum)는 인간의 선행하는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받아주심이라고 불링거 자신의 언어로 서술된다. 그러므로 조건성은 언약에, 선택은 별도의 일방적 원리에 배속하는 식의 경직된 이분법은 자료 차원에서 복잡해진다. Hildebrand는 불링거가 언약 안에서 믿음을 요구하면서도 그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그리스도의 의, 갱신과 함께 연결한다는 점도 지적한다.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85.

 

 

부록 — Baker Thesis 이후의 Bullinger 언약 연구: Covenant, Election, 그리고 새로운 질문

이 부록은 본문 18개 장이 완성된 뒤 추가로 진행된 연구사 검토를 별도로 정리한 것이다. 본문의 논증을 소급하여 수정하지 않으며, 본문과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다.

 

본문 16장에서 나는 하인리히 불링거 연구사를 한 문단으로 압축해 지나갔다. 베이커가 불링거의 언약을 쌍무적·조건적으로 읽고 그를 '또 하나의 개혁 전통'의 원조로 세웠으며, 후속 연구가 그 해석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한 문단 뒤에는 사십여 년에 걸친 연구사의 드라마가 있고, 그 드라마의 최근 국면은 본문의 연구가설에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다. 여기서 그 흐름을 조금 더 정직하게 펼쳐 둔다.

 

Baker가 왜 중요했는가. 1980년 이전의 표준적인 서사에서 불링거는 대체로 츠빙글리의 온건한 계승자, 그리고 칼빈이라는 거인의 그림자 속 인물로 취급되었다. J. Wayne Baker의 단행본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The Other Reformed Tradition》(1980)은 이 구도를 흔들었다.1 Baker는 불링거에게서 언약(foedus, testamentum)이 단지 여러 주제 중 하나가 아니라 그의 신학과 윤리, 나아가 취리히의 교회·사회 이해 전반을 관통하는 축임을 보였고, 무엇보다 취리히 종교개혁을 제네바의 부록이 아닌 독자적 연구 대상으로 세웠다.

 

쌍무적·조건적 언약이란 무엇인가. Baker의 핵심 주장은 불링거의 언약이 쌍무적(bilateral)이면서 조건적(conditional)이라는 것이다. 용어를 정확히 하자. '쌍무적'이란 양 당사자가 실제 관계적 의무와 응답을 지는 구조를 말하며, 하나님과 인간이 대등한 계약 당사자라는 뜻이 아니다. '조건적'이란 언약 안에서 믿음과 순종 같은 인간의 응답이 실제 조건의 언어로 표현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을 곧바로 펠라기우스주의나 신인협력적 구원론, 공로적 기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Baker 자신도 언약이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와 약속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강조한 것은, 그 은혜로 시작된 언약 안에서 인간의 믿음·순종·신실함이 장식이 아니라 언약 관계의 실질적 구성 요소로 기능한다는 점이었다.

 

'또 하나의 개혁 전통' 테제. Baker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이 구조를 칼빈과 대조하여 두 개의 서로 구별되는 개혁파 궤적을 구성했다.2 취리히의 불링거 — 언약 중심, 쌍무적·조건적, 인간의 실제 언약적 응답 강조, 언약과 선택 사이의 상대적 구별. 제네바의 칼빈 — 선택 중심, 보다 일방적·무조건적 경향, 언약이 선택에 더 강하게 종속. 요컨대 칼빈 중심으로 개혁파 전통 전체를 설명해서는 안 되며, 불링거에게서 독자적인 개혁파 궤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십 년 가까이 지난 회고 논문에서도 "불링거는 조건적이고 쌍무적인 언약을 가르쳤다"(Bullinger taught a conditional, bilateral covenant)라고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했고,3 자신의 불링거 해석을 요약하면서 복음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며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자유롭게 거부한다"(Those who reject it do so freely)라고 설명했다.4 이 마지막 문장은 불링거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Baker의 해석적 요약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자.

 

이 해석의 강점. Baker 테제의 공헌은 지금도 유효하다. 불링거의 언약이 인간의 응답을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 쌍무적·조건적 언어가 실제 자료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불링거를 칼빈의 각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 — 이 세 가지를 연구사에 각인시킨 것은 Baker다. 본문 16장이 '인간의 응답' 영역을 진지한 검증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부분적으로는 그의 유산이다.

 

후속 연구에서 드러난 한계.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이 대조가 지나치게 선명하게 그어졌을 가능성이 지적되었다. 칼빈에게도 언약의 상호성(mutuality)과 조건적 언어가 실재하고, 불링거에게도 하나님의 선택과 일방적 은혜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불링거 대 칼빈'을 서로 대립하는 두 신학 체계처럼 세우는 것은 양극화일 수 있다. 문제는 어느 교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같은 교리들이 어떻게 배열되고 강조되느냐일지 모른다.

 

Hildebrand의 2024년 연구. 이 재검토를 자료 차원에서 밀고 나간 것이 Pierrick Hildebrand의 《The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Oxford, 2024), 특히 4장 "The Centrality of the Covenant, 1534–1551"이다.5 Hildebrand는 한편으로 Baker의 큰 직관 — 언약이 불링거 신학의 중심 조직 개념이라는 것 — 을 강화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Baker 테제의 핵심 이분법을 직접 재검토한다.

 

미출간 창세기 설교 노트의 의미. Hildebrand의 중요한 공헌 하나는 기존 연구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않았던 불링거의 미출간 창세기 설교 자료를 사용한 것이다. 그는 이 자료를 통해 두 가지를 묻는다. 불링거에게 타락 이전 언약의 요소가 존재하는가. 불링거는 창세기 17장 해석에서 언약과 선택을 실제로 연결하는가. 그의 답은 둘 다 긍정이다.6 곧 언약과 선택의 밀접한 관계는 후대 해석자의 조화 시도가 아니라 불링거 자신의 주석 작업 안에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언약과 선택의 연결. "Covenant and Election" 절에서 Hildebrand는 먼저 Baker의 구도 — 불링거의 쌍무적·조건적 언약 대 칼빈의 선택에 근거한 일방적·무조건적 유언, 그리고 거기서 갈라지는 두 개의 개혁파 궤적 — 를 정리한 뒤,7 결정적인 수정을 가한다. 불링거의 언약신학 자체 안에 **"선택에 뿌리내린 진정한 일방적 측면"(a genuine unilateral aspect grounded in election)**이 존재한다는 것이다.8 이 수정의 요점은 "불링거도 예정론을 믿었다"는 밋밋한 확인이 아니다. 요점은 구조적이다. 쌍무적 언약과 일방적 선택이 불링거 안에서 서로 배타적인 두 원리로 분리되지 않는다면, 조건성은 언약의 몫으로, 선택은 별도의 일방적 원리의 몫으로 나누어 두 전통의 표지로 삼는 방식 자체가 흔들린다.

 

"Fundamentum foederis est gratuita receptio." 이 지점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Hildebrand가 창세기 17장 관련 미출간 자료에서 인용하는 불링거의 라틴어 한 문장이다. Fundamentum foederis est gratuita receptio — 신중하게 옮기면 "언약의 기초는 값없이 받아주심이다."9 번역에 주의가 필요하다. gratuita receptio를 후대 교리 용어인 '무조건적 선택'으로 곧장 옮기는 것은 과도한 번역이다. 그러나 절제해서 읽어도 이 문장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불링거의 언약이 조건적·쌍무적 차원을 지닌다 해도, 그 토대는 인간의 선행하는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상한 받아주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조건적'이라는 말을, 구원의 성취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조건 충족 여부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언약이 요구하는 믿음과 순종은 그 값없는 토대 위에서, 그 토대로부터 가능해지는 응답이지, 토대를 대신하거나 토대에 앞서는 자격 요건이 아니다. 그리고 Hildebrand의 분석에 따르면 불링거는 언약 안에서 믿음을 요구하면서도, 그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그리스도의 의, 갱신과 함께 엮는다. 조건적 응답의 언어와 값없는 토대의 언어가 한 신학자 안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칼빈과의 더 큰 연속성. Hildebrand는 같은 절에서 칼빈의 창세기 17장 해석도 나란히 검토한다. 칼빈에게도 언약의 양면성, 값없는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인간의 순종이 함께 존재한다. 그렇다면 "칼빈은 순수하게 일방적, 불링거는 쌍무적"이라는 도식 역시 유지되기 어렵다. Hildebrand는 언약의 상호성과 조건성이라는 면에서 두 사람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으며, Baker 테제가 허용한 것보다 더 큰 연속성(greater continuity)을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10 그리고 책의 후반부 칼빈 장에서 그는 '두 개의 개혁 전통' 문제 자체를 재검토하는데, 그 방향은 칼빈을 취리히 언약신학과 경쟁하는 별개 전통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츠빙글리와 불링거의 언약적 통찰을 칼빈 역시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하나의 더 넓은 개혁 전통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쪽이다.11

 

Baker 테제를 폐기가 아니라 수정으로. 그렇다면 Baker는 '틀린 옛 연구자'인가. 그렇게 처리하는 것은 부당하다. 불링거의 독자적 중요성을 칼빈의 그림자에서 끌어낸 것, 언약의 쌍무적·조건적 차원을 부각한 것, 인간의 실제 언약적 응답을 신학적 의제로 만든 것, 취리히 종교개혁을 독자적 연구 영역으로 세운 것 — 이 공헌들은 그대로 남는다. 수정되어야 할 것은 그 공헌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진 경직된 대립 구도다. 최근 연구가 그리는 그림은 이렇다. 불링거 안에서도 언약과 선택이 맞물려 있고, 칼빈 안에서도 선택과 언약이 맞물려 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어느 교리의 유무나 '일방 대 쌍무'의 단순 대립이라기보다, 강조점과 배열, 성경 해석의 방식, 수사적·목회적 사용의 차이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요컨대 Baker 테제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수정되고 재구성되고 있는 연구사적 논제다.

 

이것이 bonitas Dei 가설에 새롭게 묻게 하는 것. 마지막으로, 이 연구사가 본문 16장의 작업가설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정확한 크기로 말해 두자. Baker의 모델에서는 언약·조건성·인간의 응답이라는 계열과 선택·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계열이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보일 수 있었다. 그런데 Hildebrand의 자료에서는 불링거 자신 안에서 그 두 계열 — 언약과 선택 — 이 훨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불링거에게 언약과 선택을 함께 묶어 주는 더 깊은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이 질문의 자리에서 본문 16장은 bonitas Dei — 하나님의 선하심 — 를 하나의 후보로 제안했다. 그러나 분명히 하자. Hildebrand가 불링거의 중심이 bonitas Dei라고 입증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정확한 관계는 이것이다. Hildebrand가 언약과 선택 사이의 긴밀한 연결을 복원함으로써, 그 둘의 더 깊은 공통 신학적 근거를 묻는 새로운 연구 질문이 가능해졌다.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답변 후보를 본문의 작업가설이 제안하고 있을 뿐이며, 그 가설의 운명은 본문 16장에 세워 둔 반증 조건과 원문 검증에 달려 있다.

편집자 주. 이 부록의 연구사적 보완은 본문 16장에서 제안된 bonitas Dei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Baker 이후의 불링거 연구에서 언약과 선택의 관계가 새롭게 평가되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그 둘을 더 깊은 층위에서 연결하는 신학적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추가 연구 질문의 역사신학적 배경을 제공한다.

 

참고문헌 추가 항목

Baker, J. Wayne.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Athens, OH: Ohio University Press, 1980.

———. "Heinrich Bullinger, the Covenant,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Retrospect."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29, no. 2 (Summer 1998): 359–376.

Hildebrand, Pierrick. The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24.

  1. J. Wayne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Athens, OH: Ohio University Press, 1980).
  2.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193–198.
  3. J. Wayne Baker, "Heinrich Bullinger, the Covenant,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Retrospect,"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29, no. 2 (Summer 1998): 359–376, cited 370.
  4. Baker, "Bullinger, the Covenant,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Retrospect," 371. 이 논의의 배경으로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31, 34 참조.
  5. Pierrick Hildebrand, The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24), 4장 "The Centrality of the Covenant, 1534–1551," 165–202.
  6.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75.
  7.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83–184.
  8.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84.
  9.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85.
  10.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86–187, 결론은 특히 187.
  11.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6장 중 특히 241–243 (장 전체는 241–275).

 

 

 

이 글은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함께 공부하던 중에 나온 두 질문에서 시작하여, 성경 본문(개역개정)과 교부·종교개혁 문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증거본문 배열, 그리고 필자의 하인리히 불링거 《De testamento》(1534)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16장의 bonitas Dei 명제는 확립된 학설이 아니라 필자가 검증 중인 연구가설임을 다시 밝혀 둔다.

 

 

 

AI 활용 안내 — 이 글의 문제의식과 중심 논지, 신학적 판단, 자료의 채택과 최종 문장은 필자에게 있다. 작성 과정에서는 생성형 AI를 연구와 편집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였다.
ChatGPT 5.6은 사전 조사와 쟁점의 구조화에, Claude Fable/Opus 5은 초고의 표현 및 참고문헌·각주 형식의 정돈에, Perplexity Pro는 관련 논문과 온라인 원문 자료의 탐색에 사용하였다.
AI가 제시한 내용은 그 자체를 권위 있는 출처로 삼지 않았으며, 접근 가능한 성경 원문, 교부 문헌, 신경과 공의회 문서, 공식 교리서 및 개혁파 신앙고백 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다시 대조하였다. 자료의 해석과 남아 있을 수 있는 오류를 포함한 글의 최종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 세상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가라

 

 

 

 

두 팔을 벌리던 순간

영화 《사랑의 기적》(Awakenings, 1990)에는 오래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기면성 뇌염의 후유증으로 수십 년 동안 몸이 굳은 채 외부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던 레너드.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아들 곁을 지켜 온 어머니. 새로운 치료를 통해 잠에서 깨어나듯 돌아온 레너드가 어느 순간 어머니를 알아본다. 그리고 웃으며 두 팔을 벌려 어머니를 맞이한다. 이 글은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글이 아니다. 그 장면의 줄거리와 연출을 더 설명할 생각도 없다. 다만 그 장면이 우리 마음에 남긴 질문 하나를 붙들고 시작하려 한다.

 

한 인간이 다시 한 인간에게 돌아오는 이 순간의 가치를, 우리는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레너드를 깨운 것은 L-DOPA라는 약물이었다. 의학은 놀랍고 귀하다.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을 밝혀내고, 굳어 있던 몸을 움직이게 하고, 닫혀 있던 사람을 세상으로 다시 불러낸 그 지식과 헌신을 우리는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뇌과학은 레너드가 어떻게 어머니의 얼굴을 인식했는지, 그 순간 그의 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명이 끝난 뒤에도 질문 하나는 여전히 남는다.

 

왜 저 한 사람이 그렇게 귀중한가?

 

어떤 이는 이 장면 앞에서 "노벨의학상 이상의 가치"라는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이 표현은 의학을 폄하하거나 학문에 서열을 매기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의학적 발견이 위대한 이유도 결국, 치료받는 한 인간이 귀하기 때문이다. 순서를 분명히 하자. 약이 귀해서 사람이 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귀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려는 의학이 귀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질문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귀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 전체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달라진다.

 

 

 

기능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가치가 회복된 것은 아니다

레너드가 침대에 굳은 채 누워 있던 때와, 어머니를 알아보고 두 팔을 벌리던 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능의 차이다.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이 회복을 진심으로 기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몸과 마음이 제 기능을 되찾는 것은 좋은 일이며,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심스럽게, 그리고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그 두 상태 사이에 인간으로서의 가치의 차이가 생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능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가치가 회복된 것은 아니다. 그의 가치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굳은 몸으로 누워 있던 레너드와 두 팔을 벌리던 레너드는 동일하게 귀한 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수십 년 동안 아들 곁을 떠나지 않은 이유도, 아들이 말을 하고 걸을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랑은 아들의 기능을 향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존재를 향한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존엄을 인간의 능력과 슬며시 바꿔치기한다. 말할 수 있는 능력, 걸을 수 있는 능력, 일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 높은 지능과 명료한 의식,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능력, 사회에 무언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 재산과 소유, 심지어 "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능력"까지. 이런 것들이 한 사람의 값을 매기는 기준처럼 통용된다.

 

물론 이러한 능력들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것들은 한 사람의 기능이나 삶의 조건을 살피는 기준은 될 수 있다. 재활 치료의 목표가 될 수도 있고, 복지 정책의 지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간 존재 자체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능력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며,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쇠하여 간다. 능력 위에 세운 존엄은 능력과 함께 무너진다. 만일 인간의 가치가 기능에서 나온다면, 우리는 모두 시한부 존엄을 살고 있는 셈이다.

 

성경은 전혀 다른 대답을 준다.

 

 

 

생명은 받은 것이다

성경이 인간에 관해 말하는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흙으로 지음받았고,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산 존재가 되었다. 인간 생명의 기원은 인간 바깥에, 곧 하나님께 있다. 전도서는 인생의 끝자락을 바라보며 같은 진리를 다른 방향에서 고백한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12:7)

 

"그것을 주신 하나님." 이 짧은 표현 안에 성경적 인간론의 뼈대가 들어 있다. 영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신 것이다. 시작에서도 받았고, 마지막에도 주신 분께로 돌아간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선포한 대로,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행17:25)이시다.

 

여기에서 한 가지를 신중하게 짚고 가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영(spirit)을 현대 의학이 말하는 의식(consciousness)과 단순하게 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뇌의 기능과 의식의 상태는 의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영역이며, 실제로 약물이나 질병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레너드의 이야기가 바로 그 증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오류를 모두 피해야 한다. 하나는 뇌과학이 의식을 설명해 냈으니 인간의 영과 인간의 궁극적 가치까지 다 설명되었다고 주장하는 오류이고, 다른 하나는 거꾸로 어떤 신경학적 현상을 붙들고 영혼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이겠다고 나서는 오류다. 성경은 실험실의 언어로 영혼을 계측하지 않는다. 성경이 선포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은 자기 생명의 궁극적인 원천이 아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받은 생명이라는 사실은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가치를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 세운다. 내 가치의 근거가 내 안에 있다면, 내 능력과 함께 흥하고 쇠할 것이다. 그러나 내 가치의 근거가 나를 지으신 분께 있다면, 내 기능이 무너지는 날에도 그 근거는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 — 기능 이전에 주어진 존엄

성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께 생명을 받은 피조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6–27)

 

이것이 교회가 오랫동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불러 온 교리다. 인간의 존엄은 인간이 성취한 것이 아니라 창조에서 주어진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게 되기 전에, 무엇을 이루기 전에, 갓 지음받은 그 순간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존엄이 기능보다 앞선다.

 

그렇다면 타락 이후에는 어떠한가? 죄는 인간의 전 영역을 부패시켰고, 하나님의 형상은 깊이 훼손되고 왜곡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타락 이후에도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홍수 이후 노아에게 주신 말씀을 보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라" (창9:6)

 

타락한 세상 한복판에서, 사람의 생명이 침해될 수 없는 이유로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형상"을 말씀하신다. 야고보 역시 혀의 죄를 책망하면서 같은 근거를 든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3:9)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은 이를 형상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심각한 부패와 왜곡으로 이해해 왔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왜곡되었지만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거울은 심하게 흐려지고 일그러졌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교리의 함의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넓다. 장애를 가진 사람도, 중증 지적장애인도, 치매로 기억을 잃어 가는 어르신도, 의식장애로 반응하지 못하는 환자도,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아도,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인도, 사회가 '생산성이 낮다'고 분류하는 사람도, 그리고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 이들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존엄을 지닌다. 그 존엄은 우리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박탈할 수도 없다.

 

다만 여기에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과, 모든 인간이 자동적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에 근거한 모든 인간의 존엄을 말하는 것이지,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존엄론이 구원론을 삼켜 버리면, 복음은 더 이상 전할 것이 없는 덕담이 되고 만다. 이 구별은 글의 뒷부분에서 다시 중요해질 것이다.

 

 

 

계수되지 않은 사람들, 그러나 잊히지 않은 사람들

구약을 읽다 보면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다. 광야의 인구조사다. 민수기 1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시는데, 그 대상은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민1:3), 곧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성인 남자들이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그 수에 들지 않았다. 이것을 두고 "성경은 여자와 어린아이를 사람으로 세지도 않았다"고 단순화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본문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민수기 1장의 계수는 오늘날 국가가 전 국민을 파악하는 인구총조사(census)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을 앞둔 공동체가 군사적 목적을 위해 시행한, 목적이 분명한 계수였다. 실제로 레위인들은 이 군사적 계수에서 제외되었고, 대신 민수기 3장에서 성막 봉사라는 전혀 다른 목적을 따라 생후 한 달 이상의 남자가 별도로 계수되었다(민3:15 참조). 계수의 기준은 그때그때의 목적을 따랐다. 다시 말해, 그것은 행정적·군사적 역할의 구분이었지 존재 가치의 등급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핵심 명제는 이것이다. 계수되지 않음은 가치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은 여기에서 놀라운 역설을 보여 준다. 고대 사회의 장부에서 가장 뒤로 밀려나 있던 사람들 — 과부, 고아, 나그네 — 이 하나님의 관심에서는 결코 주변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율법은 이렇게 명령한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출22:22–23)

 

고대 근동에서 과부와 고아는 자기를 변호해 줄 힘 있는 사람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직접 들으시겠다고 하신다. 힘없는 자의 후견인으로 하나님 자신이 나서시는 것이다. 신명기는 이 하나님의 성품을 더 분명하게 선언한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신10:17–18)

 

우주의 주권자를 소개하는 가장 장엄한 호칭들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것이 고아과부나그네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자리에, 세상이 가장 하찮게 여기던 사람들의 이름이 놓인다. 신명기 24장의 규례들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밭에서 곡식 한 뭇을 잊고 왔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24:19). 추수의 경제 한 귀퉁이를 하나님은 처음부터 약자의 몫으로 떼어 두셨다. 시편 기자는 이 하나님을 한 문장으로 노래한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68:5)

 

사람들의 사회적 장부에서는 주변부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주변부가 아니다. 이것이 구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교회는 이 시선을 물려받았다

이 흐름은 신약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예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다가가셨는지를 보라.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을 제자들이 꾸짖었을 때, 예수께서는 도리어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막10:14) 하시며 그들을 안으시고 축복하셨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한 상에 앉으셨으며, 사회가 눈길을 주지 않던 병자와 소외된 자들 곁으로 몸소 가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계신 자리가 곧 하나님의 관심이 있는 자리였다.

 

초대교회는 이 시선을 물려받았다. 예루살렘 교회가 급성장하던 시기, 공동체 안에서 처음 불거진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었는가?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빠지고 있다는 문제였다(행6:1). 사도들은 이것을 사소한 행정 문제로 치부하지 않았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을 세워 이 섬김을 맡겼고(행6:3–6), 말씀 사역과 구제 사역이 함께 굴러가도록 교회의 구조 자체를 손질했다. 과부가 굶는 문제가 교회의 직분 구조를 낳은 것이다.

 

야고보는 참된 경건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1:27)

 

바울도 디모데에게 교회 안의 과부 돌봄에 관해 상세히 지시하며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딤전5:3)고 명한다. 디모데전서 5장 전체가 보여 주듯, 초대교회에서 약자 돌봄은 감정에 따라 하다 말다 하는 선행이 아니라 질서 있게 지속되는 교회의 일이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 교회의 이 돌봄을 현대의 복지 개념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복지 제도는 귀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가 약자를 돌보는 근거는 인간의 선의나 사회적 합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행위다.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백성이, 그 아버지의 성품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받은 은혜의 방향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뿌리가 다르면 열매의 지속력도 다르다. 인간의 선의는 지치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누가 정말 보고 있는가 — 요한복음 9장

이제 이 글의 성경적 중심축이 될 본문 앞에 서자. 요한복음 9장이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9:1–3)

 

제자들의 질문을 잘 들어 보라. 그들은 그 사람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그는 한 사람이라기보다 하나의 신학적 사례였다. 이 고난의 원인은 누구의 죄인가 — 본인인가, 부모인가. 그 사람은 제자들의 토론 주제가 되어 길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을 묻는 사람도, 그의 하루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예수의 대답은 그 틀 자체를 깨뜨리신다. 이 사람의 존재는 누군가의 죄를 계산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의 자리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을 "모든 장애와 질병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 주시려고 의도적으로 주신 것"이라는 일반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본문은 고난의 기원에 관한 보편 이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죄과 계산의 시선을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시선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 전체를 읽으면 더 깊은 역전이 드러난다. 눈을 뜬 그 사람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점점 더 알아 간다. 처음에 그는 자기를 고친 이를 "예수라 하는 그 사람"(요9:11)이라고만 부른다. 바리새인들의 심문 앞에서는 "선지자니이다"(요9:17)라고 고백한다. 논쟁이 깊어지자 그는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3)라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다시 만났을 때,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요9:38). 맹인이었던 사람이 가장 밝히 보는 사람이 되었다.

 

반면 육신의 눈이 멀쩡했던 사람들, 증거를 조사하고 부모까지 소환하며 사실 관계를 따졌던 종교 지도자들은 끝내 예수를 보지 못한다. 이 장의 결말에서 예수께서는 이 역전을 친히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39–41)

 

여기에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제자들은 그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 사람을 보고 있었는가? 그들이 본 것은 한 인간이었는가, 아니면 '맹인'이라는 범주, '누구의 죄인가'라는 문제였는가? 그리고 오늘의 교회에게 같은 질문이 온다. 우리는 사람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의 장애를, 직업을, 재산을, 생산성을, 학력을, 사회적 지위를 보고 있는가? 우리가 어떤 사람 앞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우리가 무엇을 '보는'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기능과 소유가 가치가 되어 버린 시대

이 질문이 유독 오늘날 절실한 이유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기능과 소유 쪽으로 이동해 왔기 때문이다. 생산성, 경제력, 소유, 학력, 인지능력, 신체적 능력, 자율성과 독립성, 사회적 영향력, 자기실현, 그리고 이제는 자기브랜딩까지. 한 사람의 '스펙'이 그 사람의 값처럼 통용되고, 스스로를 하나의 상품처럼 관리하고 전시하는 일이 성실함의 표준이 되었다.

 

이 현상을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때문"이라고 한마디로 진단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진단이 아니다. 이 흐름은 어느 한 사조의 산물이 아니라 여러 겹의 역사가 쌓인 결과다. 개인을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은 근대적 개인주의, 사람을 노동력 단위로 계산한 산업사회의 생산성 논리, 모든 가치를 시장의 가격으로 번역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가치, 성취가 곧 자격이라는 능력주의, 소유와 소비로 자기를 증명하는 소비문화, 효율과 관리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를 대체해 가는 기술관료주의, 그리고 자기실현과 자기연출을 최고의 과제로 삼는 후기근대의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포스트모던 사상이라 불리는 흐름의 일부는 오히려 근대가 세운 '정상성'과 생산성의 기준, 그리고 그 기준으로 약자를 배제해 온 권력의 구조를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어느 시대나 사조를 통째로 정죄하는 문화전쟁의 글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분명히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이 자기 가치의 궁극적 근거를 자기 안에서 — 자기 기능에서, 소유에서, 타인의 인정에서 — 찾으려 할 때, 그 시도는 반드시 사람을 지치게 하고 결국 사람을 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근거가 내 안에 있다면 나는 끝없이 증명해야 하고, 근거가 기능에 있다면 기능을 잃은 사람은 근거를 잃는다. 그 논리의 끝에서 사회는 '쓸모'를 다한 사람들을 조용히 가장자리로 밀어낸다. 요양병원의 어느 병실로,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반지하 방으로, 통계 속의 숫자로. 창조주를 잃은 인간론은, 결국 인간을 잃는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상 갱신

그렇다면 복음은 이 시대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여러분 모두는 소중합니다"라는 말로 충분한가?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창조의 하나님의 형상이다. 앞서 살핀 대로 이것은 모든 인간의 존엄의 근거이며, 타락 이후에도 소멸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상 갱신이다. 이것은 구원과 성화의 방향이며, 창조의 존엄과는 구별되는 은혜의 새 사역이다.

 

죄로 깨어지고 일그러진 형상을 인간은 스스로 회복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형상이신 아들을 보내셨다. 이것은 신학적 수사가 아니라 성경 자신의 증언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 (골1:15)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고후4:4)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시기에, 깨어진 형상의 갱신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성경은 믿는 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3:9–10)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하심." 구원은 창조와 무관한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에서 강조되는 것은 창조 때의 상태로 단순히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 새롭게 되는 갱신이다. 그 갱신의 모형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9)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으로 일어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이 모든 본문의 밑바닥에 흐르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해 자라 간다. 이것은 "자존감을 회복하자"는 심리적 격려로 축소될 수 없는 이야기다. 복음은 인간에게 "당신은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은 죄로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셨으며, 믿는 자를 성령으로 자기와 연합시키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하신다고 선포한다. 존엄의 확인이 아니라 존재의 구원, 그것이 복음이다.

 

 

 

세상 끝날까지, 그리고 땅 끝까지

이제 이 글은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에 관한 물음은 개인의 내면에서 끝나는 물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참이라면, 그리고 그 형상의 회복이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것이 참이라면, 교회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교회를 밖으로 보내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1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두 본문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끝'이 나온다. 이 둘을 정확히 구별해서 읽어야 한다. 마태복음 28:20의 "세상 끝날까지"는 시간의 끝, 곧 역사의 종말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임재 약속이다. 반면 사도행전 1:8의 "땅 끝까지"는 공간의 끝, 곧 복음 증언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과 지역으로 확장되어 가는 지리적·민족적 지평이다. 하나는 '언제까지'에 대한 답이고, 다른 하나는 '어디까지'에 대한 답이다. 두 본문을 억지로 한 구절처럼 붙여 읽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구별된 두 본문이 함께 그려 내는 그림은 하나다. 주님은 시간의 끝까지 교회와 함께하시고, 교회는 공간의 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아간다. 임재의 약속과 파송의 명령. 이 둘이 교회의 존재 방식이다. 교회는 주님과 함께 머무는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주님께 보냄받은 공동체다. 머무름 없는 나아감은 소진되고, 나아감 없는 머무름은 변질된다.

 

 

 

세상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여기에서 이 글의 제목에 담긴 표현을 꺼내 놓으려 한다. "세상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가라." 미리 분명히 해 두자. 이것은 성경 구절의 직접 인용이 아니다. 마태복음 28장과 사도행전 1:8이 그려 낸 선교의 그림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한 표현이다. 성경 본문과 우리의 적용을 뒤섞지 않는 것이 말씀을 대하는 정직한 태도다.

 

또 하나 지워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땅 끝까지"의 본래 의미, 곧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과 지역을 향한 지리적·민족적 선교다. 이 본래 의미는 오늘도 유효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복음이 닿지 않은 땅과 민족이 있고, 교회는 여전히 그곳으로 부름받고 있다. "세상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적용이 이 본래의 부르심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본래 의미 위에서, 우리는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끝'은 지도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사회의 끝으로 밀어낸다. 그런데 세상이 어떤 사람들을 끝으로 밀어냈다면, 교회는 그들에게 갈 이유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 때문에 그들에게 갈 이유를 발견한다. 땅 끝까지 가라고 보냄받은 교회가, 세상이 만들어 낸 끝을 지나쳐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사람. 있어도 보이지 않는 사람. 가난한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 병든 사람. 고아와 과부. 문 잠긴 방에서 홀로 하루를 보내는 노인. 어떤 사회적 영향력도 없는 사람. 그리고 교회에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사람. 교회가 가야 할 '끝'은 멀리 있지 않을 때가 많다.

 

다만 여기에서도 시선을 점검해야 한다. 이들을 '불쌍한 사람들', 우리의 선행을 받아 줄 대상으로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다시 길가의 맹인을 사례로 취급하던 제자들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들은 시혜의 대상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며, 복음을 들어야 할 우리의 이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가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흙으로 지음받고 같은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 사람에게 가는 것이다.

 

 

 

"당신도 소중합니다"에서 멈출 수 없는 이유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힘주어 말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주변부로 가는 이유를 휴머니즘이나 사회복지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 존엄의 확인은 귀하다. 돌봄과 보호와 자비는 교회의 사명에서 떼어낼 수 없는 삶과 소명이다. 앞서 보았듯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복음은 "당신도 소중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만일 거기서 끝난다면 교회는 세상의 여러 좋은 단체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가 전할 소식 중 가장 좋은 소식을 정작 전하지 않은 셈이 된다.

 

복음의 내용을 흐리지 말고 말하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그 단절은 우리의 선행이나 존엄 선언으로 메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으며, 믿는 자를 성령으로 자기와 연합시키시고 새롭게 하신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 끝에 서 있는 사람에게 들고 가는 소식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에는 함께 있어 줌과 돌봄과 보호와 정의와 자비뿐 아니라, 복음 증언과 제자 삼음이 반드시 포함된다. 마태복음 28장의 명령이 정확히 그것이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 가르쳐 지키게 하라." 돌봄 없는 전도는 사랑을 잃고, 전도 없는 돌봄은 소망을 잃는다. 교회는 이 둘을 분리할 권한을 받은 적이 없다.

 

 

 

"가라" 그리고 "내가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장의 선교 명령을 다시 천천히 읽어 보면, 명령의 앞뒤를 감싸고 있는 두 선언이 눈에 들어온다. 명령 앞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가 있고, 명령 뒤에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가 있다. "가라"는 명령은 권세의 선언과 임재의 약속 사이에 놓여 있다.

 

이 배치가 말해 주는 것이 있다. 교회는 자기 능력으로 세상을 구하러 가는 영웅 집단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마치 그분이 계시지 않은 곳에 그분을 '배달'하듯 세상 끝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고, 그 권세의 주님이 자기 교회를 보내시며, 보내시는 그 길에 자기의 임재를 약속하신다. 선교의 근거는 인간의 자신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세와 임재다.

 

그래서 교회는 초라한 모습으로도 갈 수 있다. 자원이 부족해도, 사람이 적어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갈 수 있다. 가는 이유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 보내시는 분께 있으며, 견디는 힘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함께하시는 분께 있기 때문이다.

 

 

 

보는 것에서 가는 것으로

글을 맺기 전에, 요한복음 9장의 길가로 한 번 더 돌아가자.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 된 그 사람을 보았다. 관찰했고, 분류했고, 신학적으로 토론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이 기록하는 예수의 모습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본문이 전하는 대로,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 관해 말씀하신 뒤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으며(요9:6–7), 그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를 만나 "네가 인자를 믿느냐"(요9:35) 물으셨다. 관찰이 아니라 행동이었고, 분석이 아니라 만남이었다.

 

오늘의 교회도 사람을 '보는 것'에서 멈추기 쉽다. 통계로 보고, 사회문제로 보고, 심지어 '선교 대상'이라는 이름으로 본다. 그러나 통계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분석은 손을 잡지 않는다. 요한복음 9장이 교회에게 요구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보는 것에서 가는 것으로. 분석하는 것에서 만나는 것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것에서 사랑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그 사람에게로.

 

 

 

먼저 교회에게 묻는다

이제 결론이다. 그러나 이 결론은 세상을 향한 정죄로 끝나서는 안 된다. 세상이 사람을 기능과 소유로 평가한다고 개탄하는 것은 쉽다. 교회만이 옳다고 선언하는 것은 더 쉽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의 경고가 향했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본다고" 자부하던 종교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질문은 먼저 우리 자신에게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정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조차 사람을 헌금 액수로, 직분으로, 사회적 지위로, 학력으로, 말솜씨로, 봉사 능력으로, 건강으로, 영향력으로 — 결국 "이 사람이 교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로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의 계수 방식이 예배당 문 앞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 안까지 들어와 있지는 않은가? 새로 온 사람의 직업을 확인한 다음에야 환대의 온도가 정해지는 공동체라면, 우리는 세상을 비판할 자리에 서 있지 않다.

 

복음을 받은 교회가 할 일은 자기 의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하고, 다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인간적 가치를 기능과 성취로 재지 않으시고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하나님, 우리가 아무것도 드릴 수 없을 때에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보내시는 곳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마28:20). 그 주님께서 교회를 땅 끝까지 보내신다(행1:8).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 땅으로 가고, 동시에 세상이 가장 끝으로 밀어낸 사람에게도 간다. 거기가 지도의 끝이든. 갈 수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보내시고 함께하시는 분이 계시기에 간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기에, 우리는 세상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간다

ㅡ 영화 《덩케르크(Dunkirk)》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개역개정





서문 — 바다 앞에 선 사람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덩케르크》(2017)는 이상한 전쟁영화다. 이 영화에는 승리의 함성이 없다. 적군의 얼굴조차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위대한 장군의 작전 회의도, 극적인 반격도 없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잿빛 바다와 잿빛 하늘, 그리고 그 사이의 좁은 모래사장에 줄지어 선 채 하늘만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얼굴이다. 그들은 여기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1940년 5월 말,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덩케르크. 독일군의 전격전에 밀린 영국 원정군과 연합군 약 40만 명이 이 해변에 고립되었다. 등 뒤에는 진격해 오는 독일군, 눈앞에는 도버 해협의 차가운 바다. 조국 영국은 수평선 너머 고작 40여 킬로미터 앞에 있었지만, 그 바다를 건널 배가 없었다. 인간의 계산으로 이 이야기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전멸이거나, 항복이거나.
그런데 역사는 다르게 흘러갔다. 구축함만이 아니라 요트, 어선, 유람선, 심지어 강에서나 다니던 작은 나룻배들까지—영국의 민간 선박 수백 척이 바다를 건너왔고, 열흘도 안 되는 기간에 33만 8천여 명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이것을 "덩케르크의 기적(Miracle of Dunkirk)"이라 불렀다. 당시 영국의 조지 6세는 이 철수를 앞두고 국가 기도의 날(National Day of Prayer)을 선포했고, 교회들은 무릎을 꿇었다. 철수가 끝난 뒤 영국의 많은 강단에서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읽혔다.

이 글은 영화평이 아니다. 《덩케르크》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며, 놀런 감독이 복음을 전하려고 이 영화를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들은 만든 사람의 의도를 넘어,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과 구원에 관해 새겨 두신 더 큰 이야기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절망의 해변, 뜻밖의 구조, 자기 목숨을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살아 있다면 우리가 가야 한다"는 한 아버지의 말. 이 글은 그 장면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성경이 말하는 영적 전쟁과 복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아름다움을 함께 묵상하려는 시도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소재이고, 중심은 언제나 성경과 복음이다.

한 가지를 처음부터 밝혀 둔다. 당연하게도, 이 글의 제목 "우리의 유일한 구조선이신 그리스도"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는 주님의 자기 계시와, 물을 통과하여 건져지는 구원의 예표인 노아의 방주(벧전3:21)의 이미지를 현대의 언어로 연결한 비유적 표현이다. 비유는 진리를 밝히는 창(窓)이지 진리 자체가 아니므로, 이 글 전체에서 '구조선'이라는 말은 끝까지 비유로 다루어질 것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라도 염려할 필요는 없다. 각 장면을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를 먼저 마음에 담아 두자. 이 영화의 바다는 단지 도버 해협이 아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종종 인간이 스스로 건널 수 없는 것, 죽음과 혼돈과 심판의 깊음을 가리킨다(출애굽기, 요나서, 복음서, 사도행전 등). 그리고 그 바다 앞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는, 알고 보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1. 덩케르크 해변 — 홍해 앞에 선 사람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자리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젊은 병사 토미는 총알이 날아드는 골목을 필사적으로 달려 해변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관객의 눈앞에, 덩케르크 해변이 펼쳐진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방파제와 모래사장에 길게 줄지어 서 있다. 그들은 소리치지 않는다. 뛰지도 않는다. 그저 서 있다. 기다림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해변의 절망에는 특별한 성격이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절망이 아니라 '거의 다 왔는데 건널 수 없는' 절망이다. 맑은 날이면 수평선 너머로 고국의 땅이 보일 듯한 거리. 그러나 그 바다가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였다. 큰 군함은 얕은 해변에 접안할 수 없었고, 하나뿐인 방파제는 폭격의 표적이 되었으며, 구조하러 온 배들은 눈앞에서 어뢰에 맞아 가라앉았다. 영화 속 병사들은 배에 오르고, 그 배가 침몰하고, 다시 헤엄쳐 해변으로 돌아오고, 또 다른 배에 오르는 일을 반복한다. 구원이 보이는데 잡히지 않는 것—그것이 덩케르크의 절망이다.

성경을 아는 독자라면 이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섰던 그 날이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애굽기 14:10, 개역개정

구조는 놀랍도록 닮았다. 등 뒤에는 바로의 군대, 눈앞에는 바다. 인간적으로는 퇴로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도 덩케르크 해변의 병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낸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출14:11). 절망은 사람을 시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절망은 사람을 원망하는 자로 만든다. 이것 역시 두 이야기가 정직하게 공유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두 이야기 모두,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길이 열린다. 이스라엘에게는 바다가 갈라졌고, 덩케르크의 병사들에게는 바다 건너에서 작은 배들이 왔다. 모세가 백성에게 외친 말은 덩케르크 해변에도 그대로 울려 퍼질 수 있는 말이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기 14:13–14, 개역개정

"가만히 서서 구원을 보라." 덩케르크 해변에서 병사들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널 수 없었다. 헤엄쳐서 도버 해협을 건넌 사람은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바깥에서, 바다 건너편에서 와야 했다.

닮은 점과 다른 점을 함께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정직한 묵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두 이야기의 차이도 살펴야 한다. 유비(類比)는 닮은 점만이 아니라 다른 점을 알 때 비로소 안전해진다.

첫째, 홍해 사건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미리 약속하시고, 직접 말씀하시고,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 구속사(救贖史)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내가 바로의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출14:17)라고 그 목적까지 계시하셨다. 반면 덩케르크는 특별계시가 주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역사와 날씨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통치—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는 덩케르크를 '제2의 홍해'라고 신학적으로 선언할 권한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 철수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의도하셨는지는 하나님께 속한 비밀이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29:29).

둘째, 홍해에서 이스라엘은 바다를 '건너서' 자유를 얻었지만, 덩케르크의 병사들은 바다를 건너 '집으로 돌아갔을' 뿐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처칠 수상이 철수 직후 의회에서 냉정하게 말했듯, 철수는 승리가 아니었다. 전쟁은 그 후로도 5년을 더 이어졌다. 이 차이는 오히려 우리의 신앙 현실을 비추어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도 아직 전쟁이 끝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다(다만,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ㅡ요16:33, 남은 고난을ㅡ골1:24). 우리는 구조되었으나, 여전히 싸움이 계속되는 시대 속으로 돌아와 산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 사이—신학자들이 "이미와 아직(already, not yet)"이라 부르는 그 긴장 속에 우리가 서 있다.

그럼에도 두 이야기가 함께 증언하는 하나의 진리가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계산이 끝난 자리에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이 상상한 어떤 시나리오에도 '바다가 갈라진다'는 항목은 없었다. 덩케르크 해변의 병사들이 기대한 어떤 구조 계획에도 '주말에 요트 타던 민간인들이 온다'는 항목은 없었다.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개역개정

바다 앞에 선 채 하늘만 바라보는 사람들. 그것은 패배의 자세처럼 보이지만, 성경의 문법 안에서는 구원이 시작되는 자세다. 자기 힘의 끝에 도달한 사람만이 바깥에서 오는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국가의 역사보다 한 영혼의 역사에서 더 선명하다. 죄인은 자신이 덩케르크 해변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까지, 바다 건너에서 오는 배를 기다리지 않는다.




2. 민간 선박들의 출항 — "혹시 살아 있다면, 우리가 가야 한다"

문스톤호의 아버지
영화의 세 축—해변의 일주일, 바다의 하루, 하늘의 한 시간—가운데 바다의 이야기를 이끄는 것은 '문스톤(Moonstone)'이라는 작은 목선이다. 영국 해군은 병사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민간 선박들을 징발했다. 그런데 문스톤호의 선주인 도슨 씨는 해군이 배를 가져가도록 내어 주는 대신, 직접 키를 잡는다. 백발이 성성한 이 아버지는 아들 피터, 그리고 배에서 일을 돕던 소년 조지와 함께, 군복도 무기도 없이 전쟁의 바다로 나아간다.

항해 중에 그들은 침몰한 배의 잔해 위에서 홀로 떨고 있는 한 군인을 건져 올린다. 그러나 구조된 이 군인은 U보트의 어뢰 공격의 충격으로 마음이 무너진 상태였다. 그는 배가 덩케르크로—자신이 방금 빠져나온 그 지옥으로—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격렬하게 저항한다. 그 몸싸움 속에서 소년 조지가 계단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다. 구조하러 가는 길이 결코 안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일찍부터 보여 준다.

그리고 문제의 장면이 온다. 하늘에서 영국 공군의 전투기 한 대가 격추되어 바다로 떨어진다. 조종석 덮개가 열리지 않은 채 기체는 가라앉기 시작한다. 아들 피터가 판단한다. 추락의 충격, 닫힌 캐노피, 흘러간 시간—이미 죽었을 것이다. 선박엔진을 최대출력으로 높여 태워 가며 서둘러 갈 이유가 없다. 그것은 냉정하지만 합리적인 계산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쓰로틀을 올리며 말한다.
"혹시 살아 있다면, 우리가 구조하러 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간다. 조종사 콜린스는 살아 있었다. 가라앉는 조종석 안에서 열리지 않는 캐노피를 힘없이 두드리던 그는, 익사하기 직전에 구조된다. 아들의 계산대로 갔다면 그는 죽었다. 아버지의 원칙대로 갔기에 그는 살았다.

이 장면은 개혁주의 전도관의 그림이다
나는 이 짧은 대화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신학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대화는, 놀랍게도, 개혁주의 신앙이 '선택 교리와 전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과 정확히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칼빈주의) 신앙은 성경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고백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결단에서 시작되지 않고, 영원 전 하나님의 은혜로운 작정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진리다.

그런데 바로 이 교리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받을 사람을 정해 놓으셨다면, 전도가 무슨 소용인가? 택자는 어차피 구원받을 것이고, 유기된 자는 어차피 믿지 않을 텐데." 이 질문은 논리적으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을 놓치고 있다. 선택의 명단은 하나님의 손에 있고, 우리 손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도슨 씨의 논리를 다시 보라. 그는 조종사가 살아 있다고 확신해서 간 것이 아니다. 그도 모른다. 아들도 모른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는 것은 그들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모름'이, 가지 않을 이유가 아니라 가야 할 이유가 된다. 혹시 살아 있다면—그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구조하러 가는 것이 배를 가진 자의 의무다. 판단은 유보하고, 구조는 실행한다. 이것이 아버지의 원칙이었다.

개혁주의 전도관이 정확히 이렇다. 누가 택함을 받았는지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우리에게는 그 명단을 들여다볼 창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 앞에서도 "이 사람은 어차피 안 믿을 사람"이라고 선고할 권한이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 하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뿐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만민에게—선별된 유망 고객에게가 아니라.

역사 속의 개혁주의자들이 실제로 이렇게 살았다.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높이 고백한 사람들이 가장 멀리까지 복음을 들고 갔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고, 인도로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로부터 큰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시도하라." 조나단 에드워즈는 선택 교리를 설교하던 바로 그 강단에서 대각성의 불길을 보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은 전도의 브레이크가 아니라 엔진이었다.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확신이야말로, 실패가 뻔해 보이는 바다로도 배를 몰고 나가게 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낙심했을 때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주신 말씀이 바로 이 구조를 보여 준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사도행전 18:9–10, 개역개정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아직 믿지 않은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인지 바울에게는 알려 주지 않으신다. 명단 대신 명령을 주신다.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택자가 그 성에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입을 다물어도 되는 이유가 아니라, 바울이 계속 외쳐야 하는 이유였다. 하나님은 목적(백성의 구원)만 작정하신 것이 아니라 수단(복음 전파)도 함께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슨 씨의 한마디는 전도자의 신조로 옮겨 적을 수 있다. "혹시 택함을 받았다면, 우리가 전하러 가야 한다." 우리는 바다 위의 생사를 판정하는 재판관이 아니라, 배를 몰고 나가는 선원이다. 판정은 하나님의 것이고, 출항은 우리의 것이다.

계산보다 자비가 먼저다
이 장면에는 또 하나의 결이 있다. 아들 피터의 판단은 틀린 계산이 아니었다. 확률로 말하면 그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문제는 계산의 정확성이 아니라, 생명 앞에서 계산이 가져야 할 자리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부정을 입을 위험, 강도의 잔존 가능성, 이미 죽었을 확률.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 가까이 갔다. 계산이 멈추라고 말하는 지점에서, 자비는 가까이 간다. 도슨 씨의 뱃머리가 향한 방향은, 계산의 방향이 아니라 자비의 방향이었다.

훗날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도슨 씨의 큰아들은 개전 초기에 공군 조종사로 전사했다. 그가 선박연료와 과부하로 타버릴수도 있는 선박엔진을 아끼지 않고 추락 지점으로 달려간 것은, 바다에 빠진 그 낯선 조종사에게서 자기 아들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남의 아들을 건지러 바다로 나간다—이 문장을 천천히 읽어 보라. 복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는가. 우리의 구원 이야기도 결국, 아들을 내어 주신 아버지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건지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3. 구조선의 비유 — 그리스도만이 건너가게 하신다

비유를 사용하기 전에 분명히 해 둘 것
이 글의 제목은 "우리의 유일한 구조선이신 그리스도"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 비유를 펼치기 전에, 한 가지를 정직하게 밝혀 두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구조선"이라고 직접 부르지 않는다. 성경 어느 곳에도 그런 칭호는 없다. 이 표현은 성경의 칭호가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낸 현대적 비유다.

이 구분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건강한 신앙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유추한 것을 구별할 줄 안다. 성경 자체가 그리스도를 여러 비유로 계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비유들의 문법을 따라 조심스럽게 새로운 적용을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요10:11), "참 포도나무"(요15:1), "생명의 떡"(요6:35), "세상의 빛"(요8:12)이라 하셨고, 사도들은 그분을 "모퉁잇돌"(벧전2:6)로 증언했다. 또한 베드로는 노아의 방주를 구원의 예표로 읽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3:21). 물을 통과하여 건져지는 구원—방주의 이미지는 성경 자체가 승인한 구원의 그림이다. '구조선'은 그 방주 이미지의 현대적 사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담아내려는 성경의 진리는 무엇인가. 두 가지다. 구원의 배타성과 구원의 은혜성이다.

길은 하나다 — 요한복음 14장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둔 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개역개정

이 선언의 앞부분("내가 곧 길이요")만큼이나 뒷부분("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 올 자가 없느니라")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여러 길 중 좋은 길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유일한 길이라고 하셨다. 사도들의 증언도 같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덩케르크의 그림으로 옮겨 보자. 해변에 고립된 병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더 나은 참호가 아니다. 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아니다. 수영 강습도 아니다—누구도 그 바다를 헤엄쳐 건널 수 없었다.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바다 건너에서 오는 배였다. 구원은 해변 안에서 만들어질 수 없었고, 오직 바깥에서 와야 했다.

인간의 영적 상태가 정확히 이렇다. 성경은 죄인을 '노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엡2:1)로 진단한다. 죽은 자는 스스로를 살릴 수 없다. 바다에 빠진 자는 자기 머리채를 잡고 자신을 끌어올릴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자력 구원의 종교와 철학은, 결국 해변 위에 더 멋진 모래성을 쌓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파도는 그 모든 것을 쓸어 갈 것이다.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다를 건너온 배의 모습으로, 바깥에서, 위로부터 와야 한다. 그리고 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성육신이란, 하늘의 구조선이 죽음의 바다를 건너 우리 해변에 닻을 내린 사건이다.

배가 대신 바다를 통과한다
구조선 비유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 구조선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치는 법을 가르치러 오지 않는다. 구조선은 그 사람이 통과할 수 없는 물을 대신 통과해서 그에게로 오고, 그를 태워서 그가 갈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간다. 병사가 하는 일은 배를 만드는 것도, 바다를 잠재우는 것도 아니다. 내려온 손을 잡고 배에 오르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이렇다. 그분은 우리가 통과할 수 없는 것—죄의 형벌, 하나님의 진노, 죽음의 깊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통과하셨다. 시편 기자가 노래한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시42:7)라는 고백은, 궁극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다. 심판의 모든 파도가 그분 위로 지나갔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그분은 죽음의 바다 저편에 먼저 도달하신 첫 열매가 되셨다. 우리가 배에 오른다는 것—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그분이 통과하신 죽음과 그분이 도달하신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구원은 배 밖에서 배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배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배가 아니라 선원이다
그런데 이 비유는 우리의 자리도 정확하게 지정해 준다. 문스톤호의 도슨 부자는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했지만, 그들이 생명의 근원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배 위로 끌어올렸고, 배가 그들을 집으로 데려갔다. 마찬가지로 전도자는 구원자가 아니다. 목사도, 교회도, 어떤 위대한 신앙의 선배도 구조선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징발된 선원으로서,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선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자들일 뿐이다.

바울은 이 구분을 목숨처럼 지켰다. 고린도 교회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하며 사람을 중심으로 갈라졌을 때,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5–7, 개역개정

선원이 자신을 배로 착각하는 순간, 두 가지 재앙이 일어난다. 하나는 교만이다—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에게 매달리게 만든다. 다른 하나는 탈진이다—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 곧 영혼을 살리는 무게를 스스로 지려다 부서진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사람에게 가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이 구분이 무너지면 전도는 교만이 되거나 절망이 된다. 이 구분이 서 있으면 전도는 자유가 된다.



4. 전투기 조종사 — 좋은 병사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고장 난 연료계 앞에서
영화의 세 번째 축은 하늘이다. 영국 공군의 스핏파이어 세 대가 덩케르크 상공을 향해 날아간다. 임무 초반, 편대장의 기체가 격추되고, 조종사 파리어(Farrier)의 기체는 연료계가 총격으로 부서진다. 이제 그는 자기에게 연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남은 방법은 손목시계와 분필뿐이다. 그는 계기판에 분필로 숫자를 적어 가며, 감각과 계산으로 남은 시간을 어림한다.

여기서 냉정한 계산이 등장한다. 영국으로 돌아가려면 돌아갈 만큼의 연료를 남겨 두어야 한다. 싸움을 계속할수록 귀환의 가능성은 줄어든다. 어느 시점부터 그의 모든 선택은 단순한 형태가 된다. 지금 돌아가면 나는 산다. 남아서 싸우면 저들이 산다.

그리고 파리어는 남는다. 동료 콜린스가 격추되어 바다에 떨어진 뒤에도, 사실상 혼자가 된 하늘에서 그는 해변과 구조 선단 위를 지킨다. 영화의 절정에서, 연료가 완전히 바닥난 그의 스핏파이어는 엔진이 멈춘 채 활공한다. 프로펠러가 돌지 않는 침묵의 비행. 바로 그 상태에서 그는 방파제의 병사들을 향해 급강하하던 마지막 독일 폭격기를 격추한다. 해변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그러나 그 환호의 대가로, 그는 아군 지역으로 돌아갈 동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는 적진의 해변에 조용히 활공 착륙하고, 자기 손으로 기체를 불태운 뒤, 다가오는 독일군을 향해 돌아선다. 그렇게 그는 포로가 된다. 영화는 그의 개선(凱旋)을 보여 주지 않는다.

디모데후서 2장 — 병사의 단순한 삶
감옥에서 순교를 앞둔 바울이 젊은 디모데에게 남긴 말이 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2:3–4, 개역개정

바울이 병사의 이미지에서 주목한 것은 용맹이 아니라 단순함이다. 병사의 삶이 단순한 이유는 그의 인생의 중심 질문이 하나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를 모집한 분이 기뻐하시는가?" 민간인의 삶을 지배하는 수많은 계산—이익, 안전, 평판, 노후—이 병사에게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그는 자기 인생의 소유주가 아니라 파송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파리어의 조종석이 바로 그 단순함의 그림이다. 고장 난 연료계는, 어쩌면 은혜다. 연료계가 멀쩡했다면 그는 매 순간 잔량을 확인하며 '아직 돌아갈 수 있는가'를 계산했을 것이다. 계기가 부서진 순간, 질문은 하나만 남았다. '지금 이 하늘에서 내 임무는 무엇인가.' 그는 귀환이 아니라 사명을 기준으로 비행했다.

그리스도인의 제자도가 이와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의 길을 이렇게 요약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삶이란, 연료계를 흘끔거리며 언제든 귀환할 여지를 남겨 두는 비행이다. 그런 비행으로는 아무도 지킬 수 없다. 바울 자신이 파리어처럼 살았고, 파리어보다 먼저 그렇게 고백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세상의 눈에 보이지 않는 승리
파리어의 결말을 다시 보자. 그는 수천 명을 살렸지만, 그 수천 명 대부분은 자기들을 살린 조종사의 이름을 모른다. 그는 승리의 순간에 포로가 되었다. 세상의 회계 장부에서 그의 하루는 '기체 손실 +1, 조종사 포로 +1'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우리는 안다. 그 하루가 어떤 하루였는지.

하나님 나라의 회계도 세상의 장부와 다르게 기록된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히11:33) 승리했지만, 어떤 이들은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히11:37) 세상의 눈에는 완패한 채 생을 마쳤다. 그런데 성경은 그 둘을 같은 명단, 같은 "믿음으로"라는 표제 아래 기록한다. 그리고 그 장은 이렇게 끝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11:39). 그들은 자기 이야기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자기 자리를 지켰다. 결말의 해석은 하나님과 후대의 몫이었다.

바울의 마지막 고백이 파리어의 마지막 활공 위에 겹쳐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딤후4:7–8). 감옥에서 쓴 문장이다. 세상의 판정이 아니라 "의로우신 재판장"의 판정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연료가 다한 뒤에도 평안히 활공할 수 있다.




5. "공군은 뭐 했어?" —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오해받는 충성
살아서 영국 땅을 밟은 병사들의 마음은 복잡했다. 영화 속에서, 구조되어 문스톤호에 오른 병사들 가운데 누군가가 하늘을 향해 내뱉는다. "공군은 도대체 어디 있었어?" 해변에서 폭격을 견딘 그들의 눈에 하늘은 텅 비어 있었다. 자기들이 죽어 가는 동안 공군은 안전한 본토에 있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몰랐다. 스핏파이어들이 해변 훨씬 앞쪽 상공과 바다 위에서 폭격기들을 요격하고 있었다는 것을. 해변에 떨어지지 '않은' 폭탄들, 침몰하지 '않은' 배들이 곧 공군의 전과였다는 것을. 막아낸 재앙은 통계에 잡히지 않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감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덩케르크에서 돌아온 병사들 사이에 공군을 향한 원망이 널리 퍼져 있었고, 공군 조종사들은 목숨 걸고 싸우고도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 원망의 말이 떨어졌을 때, 조종사 콜린스—격추되어 바다에 빠졌다가 문스톤호에 구조된 바로 그 조종사—는 변명하지 않는다. 그때 키를 잡았던 도슨 씨가 조용히 말한다.
"신경 쓰지 말게. 우리는 아니까(We know what you did)."
짧은 한마디다. 그러나 이 한마디에는, 오해받는 사람을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도슨 씨는 병사들의 원망을 꾸짖지도 않고, 콜린스의 전과를 나열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건넨다. 모두가 몰라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마태복음 6장 — 갚으시는 분이 보고 계신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경건 생활의 은밀함에 대해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구제에 대해, 기도에 대해, 금식에 대해, 같은 후렴구가 세 번 울린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3–4, 6, 개역개정

이 말씀은 흔히 '자랑하지 말라'는 금지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 밑바닥에는 금지보다 깊은 약속이 놓여 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골방, 왼손도 모르는 오른손의 수고, 아무도 세어 주지 않는 충성—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야 안에 있다. 신앙의 은밀함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관객 없이 사는 데 익숙해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한 분의 감독이 항상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복된 소식인가. 이 땅에서 충성은 자주 오해와 함께 온다. 부모의 수고를 자녀는 모른다. 중보 기도자의 밤을 교회는 모른다. 묵묵히 감당한 궂은일을 공동체는 당연하게 여긴다. 심지어 잘한 일이 비난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파리어는 해변을 지켰기에 포로가 되었고, 지킴받은 자들에게 "공군은 뭐 했냐"는 말을 들었다. 만약 사람의 인정이 충성의 연료라면, 그 연료는 반드시 바닥난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연료로 살았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3–4).

도슨 씨의 "우리는 아니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영원 전부터 해 오신 말씀의 희미한 메아리다. 하갈은 광야에서 그 하나님을 만나고 이렇게 불렀다. "당신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창16:13). 보시는 하나님, 아시는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 날, 그 하나님은 은밀한 충성들을 공개적으로 갚으실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마25:21). 그날의 "잘하였도다" 한마디를 미리 당겨 사는 것—그것이 오해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충성의 비밀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 도슨 씨의 역할은 우리 공동체를 향한 부드러운 권면이기도 하다. 하나님만 아시면 충분하지만, 하나님은 종종 사람의 입을 통해 그 앎을 전달하게 하신다. 교회 안에서 오해받는 지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우리는 압니다"라고 말해 주는 사람—그런 사람이 있는 공동체에서 지친 파리어들과 콜린스들이 다시 하늘로 오른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5:11).




6. 버려진 어선 — 성경은 인간을 미화하지 않는다

좁은 배 안의 진실
영화에서 가장 보기 불편한 장면은 거듭되는 폭격 장면만이 아니다. 버려진 어선 안의 장면이다. 해변 탈출에 거듭 실패한 토미와 알렉스 일행은 만조가 되면 물에 뜰 좌초된 어선 한 척을 발견하고, 그 어두운 선체 안에 숨어 물때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 배는 독일군의 사격 연습 표적이 되고 만다. 총알이 선체를 뚫고 들어와 벽에 구멍을 낼 때마다, 그 구멍으로 바닷물이 새어 들기 시작한다. 배가 뜨려면 가벼워야 한다. 누군가 내려야 한다.

그때 그 좁은 어둠 속에서 인간의 밑바닥이 드러난다. 병사들의 눈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 향한다. 말없이 함께 있던 병사 깁슨이다. 그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알렉스가 그를 지목한다. 영국군 군복을 입었지만 영국인이 아닐 것이다, 독일 간첩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 자가 반드시 내려야 한다. 추궁 끝에 깁슨은 입을 연다. 그는 프랑스 병사였다. 전사한 영국군의 군복을 입고 영국행 배에 오르려 했던 것이다. 함께 싸운 연합군이었고, 심지어 앞선 침몰 사고에서 토미와 알렉스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물이 차오르는 배 안에서 그 사실은 힘을 잃는다. 그는 '우리'가 아니었고, 우리가 아닌 자가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한 병사가 자조하듯 말한다. 생존이란 결국 운(luck)의 문제라고, 공평도 정의도 아닌 운명의 장난이라고.

전쟁 영화를 전투 장면이 아니라 인간 묘사 때문에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감상법이다. 전쟁은 인간을 영웅으로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평소에는 예의와 제도와 여유가 덮어 두었던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압력이다. 넉넉할 때 우리는 모두 관대하다. 그러나 배에 물이 차오르면? 자리가 하나 모자라면? 좁은 배는 인간성의 실험실이고, 그 실험의 결과는 우리를 몹시 부끄럽게 한다.

성경의 정직한 인간 묘사
놀라운 것은, 성경이 인간을 그리는 방식이 이 어선 장면만큼—아니 그보다 더—정직하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경전과 위인전은 대개 창시자와 영웅을 미화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부끄러운 순간들을 지우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베드로를 보라. 그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라고 장담했던 수제자다. 그러나 몇 시간 뒤, 대제사장의 뜰에서 한 여종 앞에서 그는 무너진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마26:74).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다. 칼과 감옥 앞이 아니라, 모닥불 곁,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였다.

제자들 전체는 어떠했는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성경은 단 한 문장으로 기록한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56). '다' 버리고 도망했다. 삼 년을 동고동락한 스승이 결박당하는 순간, 배에 물이 차오르자, 그들은 각자 자기 목숨의 계산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데마가 있다. 바울의 동역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사람(골4:14, 몬1:24). 그러나 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쓴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 박해가 아니라 세상 사랑이 그를 데려갔다. 침몰하는 배처럼 보이는 바울의 사역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조용히 내렸다.

선교와 사역의 현장에서 오래 산 사람이라면 이 구절들이 남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을 것이다. 함께 헌신을 다짐했던 동역자가 떠나는 아픔, 이단의 공격 앞에서 드러나는 공동체의 균열, 그리고 무엇보다—압박이 커질 때 내 안에서 올라오는 계산과 의심. 어선 안에서 깁슨을 지목하던 손가락이, 그것이 내 손가락이 아니라고, 우리는 장담할 수 있는가.

정직한 진단이 있어야 참된 복음이 있다
성경이 이토록 인간을 정직하게 그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성경의 인간론은 성경의 구원론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개혁주의 신앙이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라고 부르는 이 진단은 인간을 모욕하려는 교리가 아니라, 인간을 정확하게 진찰하려는 살아있는 교리다. 병명을 축소한 진단서로는 바른 처방이 나올 수 없다.

만약 인간의 문제가 '약간의 미숙함'이라면 필요한 것은 교양 교육일 것이다. 문제가 '환경'이라면 필요한 것은 제도 개혁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마음의 부패라면, 필요한 것은 개선이 아니라 구원이고, 교사가 아니라 구주(메시야ㅡ그리스도)다. 어선 안의 병사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도덕 강연이 아니라 물 밖으로 건져 줄 배였던 것처럼.

그리고 여기에 복음의 눈부신 반전이 있다. 그 어선 같은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이 다르게 행동하셨다. 모두가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배 밖으로 밀어낼 때, 그분은 남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배 밖으로 걸어 나가셨다. 요나가 마지못해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욘1:12) 했던 그 자리에서, 요나보다 크신 이는 자원하여 심판의 바다로 내려가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 8). 그리고 그 도망갔던 제자들,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찾아오셔서 다시 사명을 맡기셨다. 복음은 어선 안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바로 그 인간을 위해 죽으신 사랑을 선포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깁슨의 결말은 아프다. 만조가 되어 배가 떠오르고 사람들이 탈출한 뒤, 그는 배의 구멍을 막고 있다가 침몰하는 어선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물에 잠긴다. 자기 이름도 아닌 이름 '깁슨'으로 불리다가, 남을 구하고 자신은 가라앉은 이방인. 영화는 그를 애도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분은 그 바다 밑까지 보고 계셨다는 것을.




7. 기차 장면 — 예상하지 못한 환대

비난을 준비한 군인들
구조된 병사들이 영국의 기차에 오른다. 창밖으로 고향의 들판이 흘러가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안도가 없다. 알렉스는 창가에 몸을 숨기듯 웅크린 채 말한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침을 뱉을 거라고. 그들의 자기 인식은 명확했다. 우리는 이기지 못했다. 우리는 프랑스 전선을 버리고 도망쳐 왔다. 우리는 패잔병이다. 그러니 조국이 우리를 어떻게 맞이하겠는가.

기차가 워킹 역에 정차하고, 알렉스는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 시선을 떨군다. 그때 창밖에서 한 노인이 창을 두드린다. 알렉스는 비난받는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으나 그 노인은 맥주를 두손 가득 건넨다. 플랫폼의 시민들이 환호하며 담요와 음식을 내민다. 어리둥절한 알렉스가 말한다. "우리는 그저 살아 돌아왔을 뿐인데요." 그러자 맥주를 건네던 노인이 답한다. "그거면 충분하네(That's enough)."

토미는 신문을 집어 들고, 처칠의 연설문을 더듬더듬 읽는다. 항복이 아니라 항전을 선언하는 그 유명한 연설. 그리고 신문의 지면은 이 철수를 패배가 아니라 '덩케르크의 기적'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 순간 병사들의 얼굴 위로 낯선 표정이 지나간다. 우리는 도망쳐 온 것이 아니라, 살아 돌아온 것이었구나. 우리의 귀환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기쁨이었구나.

누가복음 15장 — 달려오시는 아버지
이 장면을 읽는 열쇠는 '받을 자격'과 '받은 환대' 사이의 간격이다. 병사들이 계산한 자기 몫은 비난이었다. 오히려 그들이 받은 것은 맥주와 환호였다. 이 간격에는 이름이 있다. 은혜다. 은혜란 자격의 계산서를 찢고 주어지는 환대다.

예수님께서 이 간격을 가장 아름답게 그리신 이야기가 탕자의 비유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챙겨 떠났던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 쥐엄 열매 앞에서 정신이 든다. 그리고 그는 돌아가는 길에 인사말을 준비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15:18–19). 정확한 자기 평가였다. 아들의 자격은 소진되었으니, 품꾼의 처우가 그가 계산한 최선이었다. 기차 안의 알렉스처럼, 그는 비난 혹은 냉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아버지의 집 문 앞까지 가지도 못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개역개정

"아직도 거리가 먼데"—아버지가 먼저 보았다는 것은 아버지가 날마다 그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달려간다. 그 시대의 근동 문화에서 가장(家長)이 겉옷을 걷고 달리는 것은 체통을 버리는 일이었다. 아들이 준비한 변명과도 같은 연설은 중간에 끊긴다.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마지막 문장은 입 밖에 나오지도 못한다. 아버지는 협상하지 않는다. 제일 좋은 옷, 가락지, 신발, 살진 송아지—아들의 신분을 회복시키는 것들이 쏟아진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4). 돌아온 것, 살아 있는 것—그거면 충분했다.

복음이 이렇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밀 수 있는 계산서에는 비난받을 항목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계산서가 아니라 아들의 의(義)로 맞아 주신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4–5). 은혜는 언제나 예상을 배반한다. 좋은 쪽으로.

환대는 공로를 아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기차의 병사들이 받은 환대는 절반의 오해 위에 있었다. 시민들은 병사들을 실제 이상으로 영웅시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대는 오해에 기초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다 알면서 달려갔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선 안 모습까지, 부인과 도망과 배신까지 다 아시면서 우리를 안으신다. "여호와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4). 다 알고 베푸는 환대—그것만이 무너지지 않는 환대다. 사람의 박수는 진실이 밝혀지면 철회되지만,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하나님의 영접은 철회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환대는 교회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돌아온 자에게 "그동안 어디 있었느냐"고 정산부터 요구하는 공동체와, 살아 돌아온 것 자체를 기뻐하며 달려 나가는 공동체. 탕자의 비유에는 환대를 거부한 큰아들도 등장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는 아버지의 잔치 밖에 서서 동생의 계산서를 읊었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플랫폼에서 맥주를 건네는 노인인가, 밭에서 돌아와 잔치 소리에 얼굴을 굳히는 큰아들인가.





8. 영적 덩케르크 — 지금도 해변에는 사람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해변

여기까지 우리는 1940년의 해변에 서 있었다. 이제 시선을 들어 2026년의 세상을 보자. 포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도시는 환하고, 사람들은 바쁘고, 화면들은 즐겁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는 지금도 덩케르크 해변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등 뒤에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조여 오고, 눈앞의 바다는 스스로 건널 수 없으며, 하늘을 바라보아도 도움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겉으로는 멀쩡하게 줄 서 있지만 속으로는 침몰 중인 사람들.

죄책 속에 있는 사람이 있다. 오래전의 일이 밤마다 해변의 파도처럼 되돌아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서 있는 사람.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이 있다. 사업의 침몰, 관계의 침몰, 건강의 침몰을 연달아 겪고, 이제는 구조선이 와도 오르지 않겠다고 마음이 굳어 버린 사람. 중독에 붙들린 사람이 있다. 술과 도박과 음란과 화면에 조금씩 영혼을 내어 주며, 자기 힘으로는 그 배에서 내릴 수 없게 된 사람. 거짓 복음과 이단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다. 구조선인 줄 알고 올라탄 배가 실은 더 깊은 바다로 데려가는 배였던 사람—이단의 공격을 받아 본 공동체는 이 아픔이 관념이 아님을 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사람이 있다. 다른 곳도 아닌 교회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구조선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는 사람.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표류하고 있다는 것. 성경은 인간의 자연 상태를 정박이 아니라 표류로 그린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 물살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 흐른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떠내려가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응원이 아니라 구조다.

교회는 구조선을 띄우는 공동체다
1940년 5월, 영국 해군성이 민간 선박 소유주들에게 징발령을 내렸을 때, 템스강의 유람선과 해안의 어선들이 바다로 나갔다. 훗날 사람들은 그 배들을 "작은 배들(Little Ships)"이라 불렀다. 전함이 아니었다. 무장도 없었다. 그러나 얕은 해변에 접안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그 작은 배들이었다. 큰 군함이 들어갈 수 없는 얕은 물가—바로 거기에 병사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일이 이것이다. 교회는 해변을 구경하는 관중석이 아니라, 구조선이신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들의 선단(船團)이다.

다만 이 그림 안에서도 질서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배를 띄우는 것이 곧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교회가 구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구원하신다.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쓰시는 정해진 수단은 복음의 말씀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교회는 그 복음을 맡아 전하는 도구요 그릇이다(고후4:7). 이 질서를 붙들 때에만 '구조선을 띄우는 공동체'라는 표현이 안전해진다. 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보내심—교회의 본질에는 출항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작은 배들'의 원리를 기억하자. 하나님은 대형 전함만 쓰지 않으신다. 아니, 얕은 물가일수록 작은 배가 필요하다. 신학 학위가 없는 성도의 식탁이, 화려한 언변이 없는 이웃의 안부 전화가, 직장 동료 곁의 한결같은 자리가—큰 배가 닿지 못하는 얕은 해변에 닿는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7). 당신의 배가 작다는 것은 자격 미달의 증거가 아니라, 어쩌면 특정한 해변을 위한 설계일 수 있다.

다만 순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바다로 나가는 배는 먼저 자기 배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구조하러 간 문스톤호 안에서도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 교회는 완성된 자들의 함대가 아니라, 구조된 죄인들이 노를 잡은 배다. 그래서 교회의 전도는 우월한 자의 시혜가 아니라,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빵이 있는 곳을 알려 주는 일"이다. 우리도 그 해변에 서 있었다. 우리도 건짐받았다. 그 기억이 흐려질 때 구조는 정복이 되고, 그 기억이 선명할 때 구조는 사랑이 된다.

구조 신호에 민감한 귀
덩케르크 작전의 암호명은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이었다. 작전이 성립하려면 먼저 무전이 닿아야 했다. 고립된 자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의 위치, 그들의 숫자. 신호가 무시되었다면 배들은 뜨지 않았을 것이다.

영적 구조 신호는 대개 암호화되어 온다. "요즘 잠이 안 와요"라는 말로, 갑자기 끊긴 연락으로, 지나가듯 던지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뭐가 달라요?"라는 질문으로, 냉소의 형태를 한 갈망으로.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그 신호를 알아듣는 귀를 주신다. 문제는 우리의 수신기가 늘 켜져 있느냐다. 자기 항해에만 몰두한 배는 조난 주파수를 듣지 못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권면했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4:5–6). 세월을 아끼라—기회를 사들이라는 말이다. 구조의 기회는 물때와 같아서, 늘 열려 있지 않다.




9.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 이 에세이의 심장

두 진리를 함께 붙드는 신앙
이제 이 글의 심장부에 이르렀다. 앞의 모든 장면 묵상은 사실 이 하나의 주제를 향해 걸어왔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개혁주의 신앙이 결코 어느 한쪽을 놓치지 않으려고 씨름해 온 두 진리다.

성경은 두 가지를 모두, 조금도 물러섬 없이 가르친다.

한편으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그리고 그 이끄심은 실패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택하심(엡1:4), 부르심(롬8:30), 거듭나게 하심(요3:8), 믿음을 선물로 주심(빌1:29)—사슬의 모든 고리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요약하듯, 하나님은 "당신의 뜻의 계획에 따라 …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유롭고 불변하게 작정하셨다"(제3장 1항).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복음 전파를 인간에게 명령으로 주셨고, 그 명령의 무게를 조금도 덜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28:19). 바울의 논리를 들어 보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4–15, 개역개정

부르려면 믿어야 하고, 믿으려면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로마서 9장에서 토기장이의 절대 주권을 선포한 바로 그 바울이, 한 장 뒤에서 전도자의 발이 없으면 들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바울에게 이 둘은 모순이 아니었다. 에스겔에게 주신 파수꾼의 책임은 더 엄중하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3:18).

어떻게 둘이 함께 서는가
많은 사람이 이 두 진리를 시소처럼 다룬다. 주권을 올리면 책임이 내려가고, 책임을 올리면 주권이 내려간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두 가지 오류가 생긴다.

하나는 주권을 빙자한 게으름이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텐데 내가 왜?" 이것은 초기 근대 선교 운동 때 실제로 있었던 목소리다. 젊은 윌리엄 캐리가 이방 선교의 필요를 제기했을 때, 한 원로가 이렇게 응수했다고 전해진다. "젊은이, 앉게.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자네나 나의 도움 없이도 하실 걸세." 경건해 보이는 말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절반만 이해한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목적만 작정하시고 수단은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추수를 작정하시면서 씨 뿌리는 자도 함께 세우신다. 사도행전 27장의 바울을 보라. 하나님은 배에 탄 모든 사람의 생명을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행27:24). 그런데 선원들이 몰래 배를 버리려 하자 바울은 말한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27:31). 결과는 확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확정된 결과는 선원들이 배에 남아 있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함께 작정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행동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다른 하나는 책임을 빙자한 교만과 탈진이다. 회심이 내 설득력과 전략에 달려 있다고 믿는 순간, 전도는 실적이 되고 영혼은 숫자가 된다. 열매가 있으면 내 공로가 되어 교만해지고, 열매가 없으면 내 실패가 되어 무너진다. 얼마나 많은 전도자가 이 무게에 눌려 탈진했는가.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의 능력 범위 밖의 일이었다. 에스겔이 마른 뼈들에게 대언할 때, 뼈를 일으킨 것은 에스겔의 웅변이 아니라 생기, 곧 하나님의 영이었다(겔37장). 씨 뿌리는 자는 밤낮 자고 깨는 동안 "씨가 나서 자라되 그가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4:27).

개혁주의의 균형은 시소가 아니라 두 개의 기둥이다. 두 진리는 서로를 깎아 먹지 않고 서로를 떠받친다. 하나님의 주권은 전도의 가능 근거이고, 인간의 책임은 전도의 실행 통로다. 만약 구원이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에만 달려 있다면, 완악한 마음 앞에서 전도자는 절망해야 한다. 죽은 자에게 아무리 외쳐도 죽은 자는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도자의 유일한 소망은, 내 말이 전해질 때 하나님께서 죽은 마음을 살리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루디아의 회심 기사가 이 순서를 보여 준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16:14). 바울은 말했고, 주께서 마음을 여셨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이 한 문장 안에서 손을 잡고 있다.

다시, 덩케르크의 해변으로
이 균형을 덩케르크의 그림으로 정리해 보자.
작전 사령부는 도버의 절벽 아래 있었다. 어느 배가 어느 해역으로 가는지, 물때와 항로와 호위는 사령부가 관할했다. 문스톤호의 도슨 씨는 전체 작전 상황판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몇 명이 구조될지 몰랐고, 자신이 몇 명을 태우게 될지도 몰랐다. 그가 아는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바다 건너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에게 배와 명령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거면 출항에 충분했다.

전도자의 자리가 정확히 여기다. 선택의 명단은 사령부의 금고에 있다. 우리는 그 금고를 열 수 없고, 열 필요도 없다. 명단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항해가 우리의 소관이다. 스펄전은 이 마음을 특유의 재치로 표현한 바 있다. 택자들의 등에 표식이 있다면 그 등을 일일이 들춰 보며 다니겠지만, 표식이 없으니 자신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복음의 초청장에는 '누구든지'라고 적혀 있고, 우리는 그 초청장을 조건 없이 돌리는 배달부다.

그러므로 이중예정 교리는, 바르게 이해될 때, 전도의 담요가 아니라 전도의 돛이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준다. 겸손—열매가 있어도 그것은 내 솜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담대함—아무리 강퍅해 보이는 사람 앞에서도 포기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다메섹으로 가던 박해자도 부르셨다. 그리고 인내—오늘 거절당했다고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나의 방문 일정보다 길다. 도슨 씨는 옳았다. 혹시 살아 있다면, 우리가 가야 한다. 그리고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는, 가 보기 전까지—아니, 마지막 날까지—우리가 판정할 수 없다.




10. 결론 — 우리는 선원이다

이제 처음의 해변으로 돌아가 이 묵상을 맺자.
맺기 전에 한 번 더 분명히 해 두자. 덩케르크는 출애굽의 성취도, 재현도 아니다. 그것은 출애굽을 통해 특별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인간의 계산이 끝난 자리에서 길을 여시는 그 섭리—을 떠올리게 하는 역사적 사건일 뿐이다. 유비는 계시가 아니고, 묵상은 교리가 아니다. 우리 확신의 반석은 영화도 역사의 기적담도 아니며,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글이 영화의 장면들을 오래 걸어온 이유도, 결국 독자를 영화가 아니라 성경 앞에 데려다 놓기 위해서였다.

1940년의 그 열흘 동안, 바다에는 세 종류의 존재가 있었다. 해변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을 실어 나른 크고 작은 배들. 그리고 그 배들을 몰았던 선원들. 이 셋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이 글 전체의 결론이다.

우리는 구조선이 아니다. 교회도, 목회자도, 어떤 헌신된 성도도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가 구조선 행세를 하는 순간, 우리에게 매달린 사람들과 함께 가라앉을 뿐이다. 구조선은 오직 한 분, 죽음의 바다를 대신 건너시고 부활로 저편 항구에 먼저 닿으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구조선'은 여전히 비유다. 서문에서 밝혔듯 이것은 성경이 주신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옮긴 그림이다. 그림은 실물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에만 가치가 있으며, 그림이 낡으면 버려도 좋으나 실물은 영원하다.

그러나 우리는 관중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징발된 선원이다. 좋은 병사가 자기를 병사로 모집한 분을 기쁘시게 하려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듯(딤후 2:4), 선원은 자기 항해 계획이 아니라 사령부의 명령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그 명령은 이미 내려져 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세상은 아직도 덩케르크다. 오늘 밤에도 어떤 해변에서는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다. 어떤 어선 안에서는 물이 차오르고 있다. 어떤 이는 이미 바다에 뛰어들어 표류하며, 들어 줄 이가 있는지도 모른 채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다. 우리 가족 중에, 직장 동료 중에, 매일 스치는 이웃 중에 그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인지, 우리는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바로 그 모름 때문에—우리는 모두에게 간다.

언젠가 항해가 끝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 우리는 우리가 실어 나른 사람들과 함께 저편 항구에 설 것이다. 요한이 미리 본 그 항구의 풍경은 이렇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7:9–10). 그날의 찬송을 보라. "구원하심이 …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어떤 선원의 이름도 그 찬송에 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선원들의 가장 큰 기쁨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배가 아니었음을 그날 가장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의 기도는 단순하다.
주님, 오늘도 제 눈을 열어 고립된 해변을 보게 하소서. 구조 신호에 둔해진 제 귀를 깨우소서. "이미 늦었다"는 계산이 올라올 때, "혹시 살아 있다면 우리가 가야 한다"던 그 원칙을 기억하게 하소서. 남은 연료계를 흘끔거리는 비행이 아니라 사명을 기준 삼는 비행을 하게 하시고, 사람이 몰라주어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한 분의 시선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배가 아니라 선원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의 유일한 구조선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살게 하소서.

바다는 넓고, 물때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 없다. 바다도, 바람도, 명단도, 결과도—모두 우리를 보내신 분의 손안에 있다. 우리는 다만 닻을 올리면 된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로마서 10:15, 개역개정

오늘 하루도 출항하라. 혹시 살아 있다면, 우리가 가야 한다.





참고설교;

https://www.youtube.com/live/AKFmg9m5h8E?si=36j31_LKg_4UE4WV

[삼능교회] 2026-08-02(주일) 주일 오전 2부 예배│이상욱 목사

삼능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서서울노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건강한 교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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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바울의 생질의 도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https://www.youtube.com/live/E-BIwbccg74?si=eYvarL24cyCaRoWW

2026. 07. 26. 마포성산교회 주일 2부 예배 (강한일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성산교회교회표어 : 회복을 넘어 성장으로 가는 해서울특별시 마포구 성미산로1길 10002)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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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의 아론인가? 훌인가; 동역하는 믿음의 공동체

ㅡ 에스겔의 파수꾼과 눈물로 뿌리는 씨앗

 

 

 

 

질문을 읽으며, 문장 뒤에 오래 쌓인 고단함과 외로움이 먼저 느껴졌습니다. 맡은 자리에서 애써 왔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을 때의 허탈함은 겪어 본 사람만 아는 무게입니다.

 

 

1. 우리에게 맡겨진 몫

그런데 에스겔에게 맡겨진 사명을 천천히 다시 보면, 하나님은 그에게 백성을 반드시 돌이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맡기신 것은 받은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전하지 않으면 책임을 물으셨지만, 전했는데도 백성이 거부한 그 반응까지 에스겔에게 돌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몫도 그렇습니다. 맡겨진 자리에서 사랑하고 말하고 섬기는 것까지가 우리의 책임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모든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에스겔서의 두려운 심판도 이스라엘이 충분한 결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완고하게 거스른 반역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고 싶지만 연약해 자꾸 넘어지는 자녀와, 완고하게 하나님을 거스르는 반역을 같은 눈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시는 분은 아니지만, 애쓰는 자녀를 성과표로 재며 다그치는 감독자도 아니십니다.

 

 

2. 내가 지지 않아도 될 짐

혹시 지금 "더 잘했어야 했는데",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하는 말로 스스로를 혼내고 계시지는 않은지요. 부모의 갈등이나 헤어짐을 지켜보는 어린아이가 "내가 말을 더 잘 들었더라면 부모님이 싸우지 않았을 텐데" 하고 우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의 관계와 선택은 아이가 일으킨 일이 아니었지요. 아이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원인을 제 안에서 찾고, 자기가 더 착해지면 상황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으며, 제 몫이 아닌 짐까지 끌어안은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 아이처럼, 다른 사람의 선택과 상처와 시간이 함께 빚어낸 결과까지 "내 탓"으로 짊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상담자 숀(로빈 윌리엄스)은 어린 시절 학대당한 상처받은 천재 청년 윌(맷 데이먼)에게 거듭 말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의 모든 행동에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맞은 아이가 맞을 만해서 맞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참된 위로는 책임을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져야 할 몫과 지지 않아도 될 몫을 구별하게 해 줍니다.*1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회개하고 고치면 됩니다. 그러나 성실히 감당해 오셨다면, 이제 자신을 벌주듯 몰아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께서는 넘어지는 자녀를 내치시기보다 붙들어 다시 걷게 하시는 분입니다.

 

 

3. 눈물로 뿌리는 씨앗

시편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거둔다고 노래합니다.*2 다만 그 열매를 내가, 내가 기대한 사람에게서, 내가 기대한 때에 본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내가 뿌린 씨를 다른 이가 거두기도 하고, 오래전 누군가 뿌린 씨를 내가 거두기도 합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달라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3

 

 

당신의 몫은 그 자리에서 사랑하며 충실히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눈물로 뿌린 씨를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당신이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자라게 하십니다. 누가 뿌리고 누가 거두었든, 그 모든 열매는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참고구절

 

*1. 갈6:2, 5, 롬14:12

*2. 시126:5–6

*3. 고전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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