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예정론을 성경 전체로 다시 읽기,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 Dei)에 관한 하나의 연구가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3)
일러두기. 이 글에서 성경 인용은 별도 표기가 없는 한 개역개정을 따랐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하 WCF)는 원문을 직접 번역하되 중요한 표현은 영어 원문을 함께 적었다. WCF 증거본문(proof texts)은 판본에 따라 일부 차이가 있으므로, 이 글의 증거본문 분석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직접 심의하여 제출한 배열을 기준으로 한다. 증거본문은 고백서 본문과 동일한 지위를 갖는 문구가 아니라, 고백서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부착된 apparatus임을 구별한다. 그리고 이 글 전체에서 나는 세 가지 층위를 의식적으로 구별하려고 한다.
【A. 본문】 — 성경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
【B. 추론】 — 여러 본문을 종합할 때 강하게 추론되는 것.
【C. 구성】 — 후대 신학이 성경 자료를 체계화하면서 제안한 설명.
독자께서 이 세 층위를 혼동하지 않으시는 것, 그것이 이 긴 글이 바라는 가장 실용적인 열매 중 하나다.
1. 어느 토요일의 두 질문
최근 몇 차례의 수업에서, 이 글의 출발점이 된 질문들이 나왔다. 한 수업에서는 한 지체가, '예정된 자들'이라는 표현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표현보다 어딘지 배타적으로 느껴진다는 취지로 질문했다. 그리고 이어진 다른 수업에서는 질문이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고백서가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면, 우리 구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은 무엇이며,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이 두 질문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붙들수록 이 질문들이 무지나 불신앙의 질문이 아니라는 확신이 커졌다. 오히려 정반대다. 예정에서 선택으로, 중생으로, 믿음으로, 회개로, 성화로, 견인堅忍(굳을 견, 참을 인)ㅡ하나님이 택한 성도를 끝까지 붙드시고, 성도 역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한다, 구원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실패하지 않음을 뜻한다ㅡ으로 — 고백서의 구원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을 성실하게 따라온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고백서를 이해하지 못해서 나온 반발이 아니라, 고백서가 성경의 어느 한쪽 언어를 얼마나 강하게 체계화했는지를 정확하게 감지한 질문이다.
무엇보다, 성경 자체가 이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자마자 스스로 던지는 질문을 보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롬9:14)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롬9:19)
바울의 예정 교훈은 처음 들은 사람들에게서 정확히 이런 반문을 불러일으켰고, 바울은 그 반문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배우다가 "배타적으로 느껴진다", "자유의지는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바울의 실제 가르침 근처에 와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의무를 지운다. 바울이 대답한 만큼 대답하고, 바울이 대답하지 않은 것을 대답한 척하지 않을 의무다.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이 글은 당시 수업의 설명을 비평하거나 평가하려는 글이 아니다. 실제 수업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신뢰하는 가운데서도 인간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전도의 사명이 분명하게 강조되었고, 인간의 책임을 지워 버리는 극단적 칼빈주의에 대한 비판도 함께 있었다. 성령께서 신자를 '아바타'처럼 조종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역사하셔서 신자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반응하게 하신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 뒤에서 보겠지만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1절과 정확히 같은 방향의 설명이다.[^1] 그러니까 이 글은 수업이 부족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수업에서 나온 질문이 충분히 중요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나는 그 두 질문이 품고 있는 성경적·역사적 범위를, 감사한 마음으로 조금 더 멀리까지 따라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은 신앙고백서를 변호하는 글도, 공격하는 글도 아니다. 이 글이 하려는 일은 하나다. 그 두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서, 성경 본문과 교회 역사와 고백서 자체를 다시 펼쳐 놓고, 정직하게 감사(audit)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나는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연구에서 자라난 하나의 가설 — 이 모든 주권적 은혜의 밑바닥에 놓인 것은 추상적인 '절대 의지'가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 아닐까 하는 물음 — 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려 한다. 미리 말해 두지만 그것은 결론이 아니라 연구가설이다. 이 글은 모든 문을 닫고 끝나지 않는다.
2. 두 종류의 '배타성' —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선택의 특수성
첫 번째 질문부터 정돈하자. 그 질문이 나왔을 때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예수님만이 길"이라는 방향으로 이어졌고, 요한복음 14장 6절이 함께 읽혔다. 기독교는 실제로 배타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맞는 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4:12)
그런데 나중에 곰곰이 돌아보니, "배타적이다"라는 말 안에 사실 서로 다른 두 층위가 포개져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그 두 층위를 구별하고 나서야, 그날의 질문이 무엇을 더 묻고 있었는지가 내게 선명해졌다.
첫째는 그리스도론적 배타성이다.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주장. 이것은 기독교가 분명하게, 부끄러움 없이 주장하는 배타성이다【A. 본문】.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다. 이 배타성은 언제나 활짝 열린 문과 함께 온다. 길은 하나뿐이지만, 그 길로 들어오라는 초청은 "누구든지"를 향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10:13)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22:17)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좁은 문이되 잠긴 문이 아니다. 문은 하나지만 그 문으로 들어오라는 복음의 초청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고,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된다.
둘째는 예정론적 특수성이다. 질문자의 문제의식이 실제로 향하고 있었던 지점은 이쪽이었던 것 같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으시는가? 그렇다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실제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던 것인가?" 이것은 "구원자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와는 전혀 다른 층위의 질문이다. 전자는 구원의 길에 관한 질문이고, 후자는 "왜 어떤 사람만 그 길로 들어서게 되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구별하지 않으면 두 층위가 서로 겹쳐 들리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예정론 자체에서 제기된 깊고 정당한 질문이 "기독교는 원래 배타적입니다"라는 — 그 자체로는 옳은 — 대답과 겹쳐지면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한 채 마음에 남을 수 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은 첫 번째 배타성에 대한 답이지, 두 번째 특수성에 대한 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로 예정론의 어려움 때문에 그리스도의 유일성까지 부끄러워하게 될 수도 있다. 이 둘은 다른 질문이고, 다른 대답을 요구한다.
이 글의 나머지 전부는 사실상 그 두 번째 질문 — 그리고 뒤이어 나온 자유의지 질문 — 을 정면으로 다루려는 시도다. 그런데 그 질문에 곧장 뛰어들기 전에, 먼저 한 걸음 물러나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도대체 왜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서로 다른 신학에 도달하는가?
3. 우리는 정말 늘 '같은 성경'을 읽어 왔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서들을 읽다 보면 로마 가톨릭, 알미니안, 때로는 극단적 칼빈주의가 번갈아 등장하며 성경을 "오독"하는 사례로 지목된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나는 오래 멈춰 서게 되었다. 어떻게 같은 말씀을 이렇게 다르게 읽을까? 아니, 잠깐 — 정말 언제나 '같은 말씀'이었을까?
이 질문은 사실 세 개의 서로 다른 질문을 하나로 묶고 있다. 첫째, 정말 같은 정경(canon)을 읽었는가. 둘째, 정말 같은 본문(text)을 읽었는가. 셋째, 같은 정경과 본문을 읽었다 해도 같은 해석의 세계 안에서 읽었는가.
먼저 정경의 문제. 초대교회가 오늘 우리 책상 위에 놓인 것과 똑같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이 한 권으로 묶인 성경을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소유하고 있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아야 정확하다. 하나는 정경의 범위 자체가 아직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신약 27권과 정확히 같은 책들을 명확하게 열거한 현존 최초의 목록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의 367년 제39차 부활절 서신이다.[^2] 사복음서와 바울서신 같은 핵심은 매우 일찍부터 널리 인정되었지만, 히브리서·야고보서·베드로후서·요한이서와 삼서·유다서·요한계시록 등에서는 지역별 차이가 실제로 있었다. [^3] 다른 하나는, 확정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던 책조차 모든 개교회가 물리적으로 전부 소장했다고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2세기의 한 그리스도인의 실제 '성경 경험'은 개인이 소유한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 공동체가 소유한 사본들, 예배에서 낭독되는 문서, 기억된 사도적 가르침, 설교와 교리교육, 그리고 구약성경에 가까웠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결론이 하나 나온다. 초대교부의 신학을, 현대의 조직신학처럼 66권 전체를 동시에 펼쳐 놓고 종합한 결과라고 전제하면 안 된다. 그가 어떤 책을 알고 있었는가, 실제로 어떤 본문을 사용할 수 있었는가, 그의 지역 교회에서 무엇을 공적으로 읽었는가까지 살펴야 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제를 너무 크게 잡아서도 안 된다. 교부들의 성경 인용은 본문비평의 세 증거 — 그리스어 사본, 고대 역본, 교부 인용 —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지만, 브루스 메츠거가 지적했듯 특히 다루기 까다로운 증거이며, [^4] 더 큰 그림에서 보면 로마 가톨릭과 개혁주의, 개혁파와 알미니안의 차이를 "서로 다른 신약 사본을 읽어서"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종교개혁자들이 접한 본문과 오늘날의 비평본문 사이에 물론 차이는 있다. 그러나 로마서 9장, 에베소서 1장, 요한복음 6장 같은 결정적 논쟁 본문들이 한쪽 성경에는 있고 다른 쪽 성경에는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해석은 갈라진다. 그러니 이 글에서 다루는 주요 교리적 분기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에는 본문비평적(textual criticism) 차이보다 해석학적(hermeneutics) 차이가 훨씬 더 큰 변수라고 보아야 한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층위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무엇을 먼저 보는지가 다르다. 에베소서 1장의 동일한 헬라어 문장을 놓고도,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과하면서 읽고, 중세 신학자는 은총과 공로와 성례라는 거대한 체계 안에서 읽고, 루터는 죄책과 율법과 복음이라는 문제를 안고 읽고,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확실성이라는 틀에서 읽고,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 책임과 복음의 보편적 선포라는 질문을 가지고 읽는다. 본문은 같아도 질문이 다르다. 그리고 질문이 달라지면 눈에 들어오는 구절의 무게가 달라진다. 이것은 누군가 악의적으로 성경을 비틀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런 전제 없이 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에서도 이미 확인되는 현상이다. "유대교는 구약성경만 읽는 종교"라고 생각하면 1세기의 상황을 심하게 단순화하게 된다. 제2성전기 유대교에는 기록된 토라와 함께 해석 전통, 서기관, 회당, 성전, 여러 종파의 논쟁이 있었다. [^5]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실 때 양쪽은 성경을 몰라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지극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성경 해석을 놓고 싸운다. 안식일 논쟁이 대표적이다. 양쪽 모두 토라를 인정한다. 그런데 해석이 다르다. 그러니 예수님 시대부터 이미 "성경 → 해석 → 전통 → 공동체의 실천"이라는 층위가 존재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독특함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칼빈은 '전통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성경을 읽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었고, 교부들을 읽었고, 중세 해석 전통을 알고 있었으며, 라틴어 불가타와 헬라어 본문을 비교하며 읽었다. [^6] 따라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역사적으로 정교하게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전통 없이 성경을 읽는다"가 아니라, "성경으로 전통을 계속 심판하고 교정한다."
교회는 필요하다. 신앙고백도 필요하다. 그러나 둘 다 성경 아래 있다. 계시에서 성경으로, 성경에서 공동체의 독해로, 독해에서 신앙고백과 전통으로, 그리고 그 전통이 다음 세대의 성경 읽기를 다시 형성하는 — 이 흐름은 일방향 화살표라기보다 순환에 가깝다. 그리고 그 순환의 건강함은 단 하나의 조건에 달려 있다. 성경이 언제나 그 순환 위에서, 전통을 교정할 권리를 실제로 행사하고 있는가.
그런데 바로 여기서 개혁주의 자신에게도 꽤 아픈 질문이 돌아온다. 이 논리를 로마 가톨릭과 알미니안에게만 적용할 수는 없다. 개혁주의자도 개혁주의 전통을 통해 성경을 읽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오래 공부하면 로마서에서 언약, 작정, 유효한 부르심, 견인이 굉장히 잘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전통의 사람은 같은 로마서에서 다른 연결을 먼저 발견할 수 있다. 개혁주의 역시 하나의 역사적·신학적 렌즈다. 렌즈가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렌즈가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 문제다.
마지막으로 독해 조건의 차이를 기억하자. 정경 전체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인쇄술로 복제되고, 원어 연구와 색인과 성구사전, 오늘날에는 디지털 검색까지 가능해진 시대의 독자는 2세기 그리스도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지 않는다. 우리가 더 신앙이 좋아서가 아니라 물질적·정경적 조건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대교부가 사도 시대와 시간적으로 가깝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지만, 그것이 자동으로 66권 전체를 종합하는 정경적 시야가 종교개혁 이후보다 뛰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종교개혁자들이 완성된 정경 전체를 볼 수 있었다고 해서, 사도적 전승에 훨씬 가까웠던 이레나이우스 같은 인물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뜻도 아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역사적 이점과 한계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처음 질문 — "어떻게 같은 말씀을 다르게 읽을까? 아니, 정말 같은 말씀이었을까?" — 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리된다. 완전히 같지도 않았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았다. 사본의 차이가 있었고, 정경 인식의 차이가 있었고, 접근 가능한 성경책의 차이가 있었고, 언어도 달랐다. 그러나 기독교의 주요 교리적 분열을 그 차이만으로 설명할 만큼 본문 자체가 달랐던 것은 아니다. 훨씬 더 큰 변수는 "어떤 공동체가, 어떤 역사적 질문을 가지고, 어떤 전승 안에서, 성경의 어느 부분에 상대적으로 더 큰 해석적 무게를 두며 전체를 읽었느냐"였다.
그리고 이 관점은 역설적으로 개혁주의의 또 하나의 원리를 더 중요하게 만든다. '성경 전체'(Tota Scriptura)라는 원리다. Sola Scriptura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Sola Scriptura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Tota Scriptura가 필요하다. 어떤 한 구절이 아니라, 완성된 정경 전체가 다른 구절과 우리의 전통적 독법을 끊임없이 교정하게 하는 것. 이 명제는 이 글의 뼈대이므로 뒤에서 별도의 장으로 다시 다루겠다. 지금은 먼저, 성경 자체가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자.
4. 성경이 두 가지를 함께 말하는 방식
이 두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직관과 만나게 된다.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 대부분이 이 주제 앞에 설 때 거의 자동으로 갖게 되는 직관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인간이 하는 것"은 시소의 양 끝과 같아서,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내려가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주권이 100이면 인간의 몫은 0이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성경을 실제로 펼쳐 보면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그 시소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정말로 두 종류의 언어가 공존한다. 한쪽에는 하나님의 선행적이고 주권적인 행위가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6:44–45)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
다른 한쪽에는 인간을 향한 실제 명령과 초청, 그리고 인간의 실제 반응이 있다. 회개하라. 믿으라. 오라. 순종하라. 그리고 이 글의 서두에서 이미 인용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초청 —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22:17).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이 둘이 서로 다른 책에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문장, 같은 단락 안에 들어 있는 경우다. 몇 곳을 실제로 읽어 보자.
요한복음 6장 37절부터. 이 한 절 안에 세 개의 행위가 있다. 아버지께서 주신다(아버지의 행위). 그들이 온다(인간의 행위). 내가 내쫓지 않는다(그리스도의 행위). 헬라어로 "올 것이요"는 ἥξει헤크세이, 미래 직설법이다. "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의 "옴"을 미래의 사실로 서술한다. [^7] 그런데 그 확실하게 일어나는 일은 다름 아닌 그들의 옴이다. 아버지의 주심이 그들의 옴을 대신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주심이 그들의 옴을 확실하게 만든다. 44절은 더 강하다. "아무도 올 수 없으니"(οὐδεὶς δύναται ἐλθεῖν우데이스 뒤나타이 엘테인) — 인간의 무능에 대한 명시적 진술이다【A. 본문】. 그런데 45절은 그 이끄심의 내용을 "아버지께 듣고 배움"으로 설명하고, 듣고 배운 사람"마다"(πᾶς파스) 내게로 온다고 말한다. 이끄심은 옴을 폐기하지 않는다. 이끄심의 열매가 옴이다.
빌립보서 2장 12–13절. 이 본문은 거의 압축판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2–13)
12절의 "이루라"는 헬라어 κατεργάζεσθε카테르가제스데, 명령형이다. [^8] 바울은 실제 사람들에게 실제 행동을 요구한다. 그런데 13절이 곧바로 그 이유를 댄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ὁ ἐνεργῶν호 에네르곤)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리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이 무엇인가.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καὶ τὸ θέλειν καὶ τὸ ἐνεργεῖν카이 토 텔레인 카이 토 에네르게인) — 바울은 하나님이 신자들 안에서 원함과 행함 모두에 역사하신다고 말한다. 여기서 현대인의 직관과 바울의 논리가 정면으로 엇갈린다. 우리의 직관은 "하나님이 하신다면 → 내가 할 필요가 없다"로 흐르기 쉽다. 그런데 바울의 접속사는 γάρ가르, "왜냐하면"이다.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 너희가 이루라." 하나님의 행하심은 인간의 행함을 면제하는 근거가 아니라 명령하는 근거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divine agency, 하나님께서 행위의 주체가 되심)와 인간의 행위(human agency, 인간이 행위의 주체가 됨)를 제로섬 게임으로 만들지 않는다.
신명기 29–30장. 토라의 한복판에도 같은 구조가 있다. 모세는 먼저 이스라엘의 무능을 선언한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깨닫는 마음조차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인데, 아직 주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장 뒤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장차 하실 일을 약속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30:6)
마음의 할례를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목적은 "사랑하게 하사"다. 그런데 놀랍게도 같은 신명기 안에는 정반대 방향의 명령도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너희가 할례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할례하실 것이다 — 명령과 약속이 한 책 안에서 경쟁하지 않고 공존한다. [^9] 그리고 30장은 그 유명한 실제 선택의 촉구로 이어진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신30:19–20)
하나님이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이다(30:6). 그러니 생명을 택하라(30:19). 토라는 이 둘을 나란히 놓고 어느 쪽도 철회하지 않는다.
에스겔 36장.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새 언약의 약속에서는 주어가 거의 전부 하나님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6:26–27)
내가 두겠다, 내가 주겠다, 내가 제거하겠다, 내가 행하게 하겠다 — 그리고 그 결과는 "너희가 지켜 행할지라"다. 하나님의 행하심의 종착점이 인간의 실제 행함이다.
사도행전 16장의 루디아. 이 구조는 교리 본문만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도 나타난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행16:14)
주께서 마음을 여셨다. 그리고 루디아가 들었고, 따랐고, 세례를 받았고, 자기 집으로 사도들을 청했다. 마음을 여는 것은 주님의 일이고, 듣고 따르고 청하는 것은 루디아의 일이다. 누가는 이 둘을 한 문장에 담고 아무런 긴장도 느끼지 않는다.
마태복음 11장. 어쩌면 가장 놀라운 병치는 여기 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주권적인 숨기심과 나타내심을 감사하신 직후의 말씀을 보라.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기뻐하신 뜻이니이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5–26, 28)
숨기시고 나타내시는 아버지의 기뻐하신 뜻(주권) 바로 다음 숨에, "다 내게로 오라"(초청)가 나온다. [^1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7절이 유기 교리의 증거본문으로 바로 이 마태복음 11장 25–26절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뒤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11] 그런데 예수님 자신의 입에서는 그 주권의 선언과 만인을 향한 초청 사이에 단 두 절의 거리밖에 없다.
이 본문들을 나란히 놓고 나면 하나의 결론이 떠오른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실제 응답을 어설프게 조정하지 못해서 둘 다 남긴 것이 아니다. 성경의 인간관 자체가 둘을 경쟁 관계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일하실수록 인간의 인격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을 참으로 원하는 자, 믿는 자, 사랑하는 자, 순종하는 자로 만든다. 왜 성경 자체가 이 두 종류의 언어를 동시에 보존하고 있는지 — 그것을 묻는 것이 어느 한쪽을 지워 긴장을 없애는 것보다 훨씬 성경적인 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역사 속에서 이 두 언어를 어떻게 읽어 왔는가.
5. 초대교회는 어떻게 읽었는가 — 이레나이우스, 크리소스토무스, 그리고 후기 아우구스티누스
"초대교회는 이렇게 생각했다"라고 단수형으로 말하는 순간 이미 곤란해진다. 초대교회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시대마다 싸우고 있던 질문이 달랐다. 그래서 여기서는 "초대교회는 모두 자유의지를 믿었다"는 단순화도, "초대교회는 이미 칼빈주의였다"는 시대착오도 피하면서, 적어도 세 인물의 흐름을 따라가 보려 한다.
이레나이우스(약 130–202). 2세기 리옹의 감독 이레나이우스가 《이단논박》 4권에서 인간의 자유를 그토록 강조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의 적수는 영지주의자들, 특히 발렌티누스파였다. 이레나이우스의 보고에 따르면, 발렌티누스파는 인간을 본성(nature)에 따라 세 부류로 구분했으며, 어떤 부류는 본성상 구원받고 어떤 부류는 본성상 멸망한다고 가르쳤다. [^12] 구원과 멸망이 인격적 응답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앞에서 이레나이우스는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며,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존재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13]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책임을 질 수 있는 도덕적·인격적 피조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의 책임이 성립하려면 실제적인 순종과 불순종이 있어야 했다. 주목할 것은 그의 관심의 방향이다. 이레나이우스는 후기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타락한 인간에게서 믿음의 최초 원인은 정확히 어디서 오는가"를 미세하게 분석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가 지키려던 것은 "인간은 고정된 본성의 노예가 아니라 응답하는 인격이다"라는 사실이었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약 349–407). 4세기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의 이 위대한 설교자에게 요한복음 6장 44절은 피해 갈 수 없는 본문이었다. 그의 요한복음 강해(46번 설교)를 보면, 당시에 이미 이 구절을 들어 "그렇다면 우리에게 달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 크리소스토무스는 그 해석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그에게 아버지의 "이끄심"은 인간의 자유의지(그의 용어로는 τὸ αὐτεξούσιον토 아우텍수시온,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를 제거하는 강제가 아니라, 인간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크리소스토무스도 인간의 무능을 실제로 인정한다. 큰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올 수 없다. 다만 그는 그 도움이 의지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45절의 "듣고 배운 사람마다"를 조건 없는 모든 사람이라기보다 기꺼이 배우려는 자들 쪽으로 읽는다. 로마서 9장 강해에서도 그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와 토기장이 비유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본문을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읽지 않는다. [^15] 적어도 이 본문들에서 그의 직접적인 전선 가운데 하나는 마니교적 결정론과, 그로 인해 인간의 실제 책임과 권면이 무의미해지는 해석이었다.
후기 아우구스티누스(354–430). 그런데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서방에서 질문의 무게중심이 크게 이동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그 이동의 산 증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그런데 주후 396년경, 로마서 9장을 다시 붙들고 씨름하던 중(《심플리키아누스에게》) 그의 독법이 뒤집힌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시기의 작업을 회고하며, "이 문제를 풀면서 나는 인간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을 위해 애썼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이겼다"고 적었다. [^16] 그를 굴복시킨 결정적인 본문 하나가 고린도전서 4장 7절이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전4:7)
믿음까지 포함하여,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펠라기우스 논쟁과 그 이후의 반(半)펠라기우스 논쟁을 거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은 더욱 정밀해진다. "사람이 믿는 그 최초의 선한 움직임은 어디서 오는가?"(unde initium fidei?) 그의 후기 대답은 분명했다. 믿음의 시작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17] 그는 요한복음 6장 44–45절을 해석하면서 외적으로 복음을 듣는 것과 성부께 내적으로 배우는 것을 구별했고, 아버지께 참으로 듣고 배운 사람은 단지 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온다고 읽었다 — 그 내적 가르침 자체가 효력 있는(effectual) 은혜라는 것이다. [^18] 에베소서 1장 4절을 읽는 그의 방식도 유명하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4)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해질 것을 미리 보시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택하셨다. 선택은 예견된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거룩을 만들어 내는 은혜다.
이제 세 사람을 나란히 놓아 보자. 이레나이우스와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강제되는 기계로 만들지 않으셨다." 후기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그렇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그 선한 의지 자체는 어디서 왔는가? 은혜에서 왔다." 이 둘은 서로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기보다, 정확히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다. 전자의 전경에는 영지주의적 본성 결정론과 운명론이 있었고, 후자의 전경에는 펠라기우스가 있었다. 질문이 달라지자 같은 정경의 어떤 부분이 전경화되는지가 달라졌다. 우리가 3장에서 이론적으로 말했던 것 — 독자의 역사적 질문이 어떤 성경 구절을 전경으로 끌어올리는가 — 의 살아 있는 실례가 바로 초대교회 안에 있다.
6. 루터와 칼빈 — 의무와 능력,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
종교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후기 질문을 이어받아 훨씬 더 밀어붙인다.
루터. 1524년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내놓자, 루터는 이듬해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 1525)으로 응답한다. [^20] 에라스무스의 핵심 논거 중 하나는 상식적이다. 성경에 "회개하라", "믿으라", "생명을 택하라" 같은 명령이 가득하지 않은가.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부조리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명령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에게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루터의 대답이 이 논쟁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명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은혜 없이 그것을 수행할 자연적 능력이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21] 율법의 명령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의무, duty)을 보여 주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능력, ability)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의 무능을 드러내어 우리를 은혜로 내몬다 —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이처럼 명령이 무엇을 요구하는가와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구별하는 논리는 이후 개혁신학에서도 반복해서 사용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은혜 없이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가 논리적으로 따라 나오지 않는다. 덧붙이면, 루터가 인간의 모든 자유를 부정한 것도 아니다. 그는 '아래의 일들' — 먹고 마시고 일하는 시민적 삶 — 에서의 자유는 인정했다. 그가 부정한 것은 타락한 인간이 은혜 없이 '위의 일들', 곧 하나님을 향한 영적 선을 스스로 의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22]
칼빈. 칼빈은 우리가 4장에서 발견한 '두 언어'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의 도구는 두 가지 구별이다. 첫째, 필연(necessitas)과 강제(coactio)의 구별. 타락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만, 강제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꺼이, 자원하여 죄를 짓는다. 죄의 필연성은 외부의 강압이 아니라 부패한 본성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에, 죄인은 여전히 자기 죄에 책임이 있다. 칼빈은 이 구별을 아우구스티누스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서 물려받았다. 그에게 타락은 의지의 존재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의지의 건전함을 파괴한 것이다 — 사람에게서 제거된 것은 의지가 아니라 의지의 온전함이다(《기독교강요》 2권). [^23] 둘째, 외적 부르심과 내적·효력적 부르심의 구별. 복음은 실제로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선포된다(외적 부르심). 그러나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조명하시고 실제로 그리스도께 이끄시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내적 부르심). 칼빈은 요한복음 6장 44–45절을 후기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효력적 이끄심의 방향에서 읽으며, 다른 예정론 논의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해석을 명시적으로 원용한다. [^24] 아버지께 참으로 배운 사람은 올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실제로 온다. 그 내적 가르침은 효력이 있다. 그러면서도 칼빈은 인간의 실제 믿음과 불신앙을 지우지 않는다. "예루살렘아 …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같은 본문 앞에서 그는 인간의 실제 거부를 실제 거부로 남겨 둔다. [^25] 다만 그 거부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실패시키지는 못한다고 본다.
여기까지 오면 하나의 계보가 또렷하게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 → 루터·칼빈 → 웨스트민스터.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글의 방법론적 원칙 하나를 다시 새겨야 한다. 이레나이우스도, 크리소스토무스도, 아우구스티누스도, 루터도, 칼빈도 — 아무리 위대해도 — 성경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 층위를 구별해야 한다. 성경 본문 → 역사적 해석 → 조직신학적 체계. 종교개혁자들은 권위 있는 해석자이지, 성경 자체와 동일한 위치에 있지 않다. 이 구별은 그들 자신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원칙이기도 하다.
7. 요약과 실제 사이 —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실제 쟁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6/47)는 도르트 회의(1618–19) 이후의 문서다. [^26] 그러니 알미니안 논쟁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고백서의 강조점도 정확히 읽을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요약과 실제 사이의 거리를 한 번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교회 교육에서는 복잡한 역사 논쟁을 짧은 시간에 전달하기 위해 요약이 불가피하고, 나 역시 그 요약의 도움으로 배워 왔다. 다만 이 글의 목적상, 널리 쓰이는 요약과 역사적 아르미니우스·항론파의 자기진술을 한 번 구별해 둘 필요가 있다.
알미니안주의는 종종 이렇게 요약된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이다. 인간이 자기 의지로 회개할 수 있고,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좌우된다고 본다." 그런데 역사적 아르미니우스(1560–1609)와 1610년 항론파(Remonstrants)의 고전적 알미니안주의를 실제로 읽어 보면 그림이 다르다. 항론파 신조 제3조는 대략 이렇게 고백한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는 참으로 선한 것을 생각할 수도, 원할 수도, 행할 수도 없으며, 반드시 거듭나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새롭게 되지 않으면 구원 얻는 믿음에 이를 수 없다. [^27] 즉 고전적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전적 무능과 은혜의 절대적 필요를 인정한다. [^28] 그들이 이 논쟁에서 중요하게 사용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선행은총(先行恩寵, prevenient grace)이다. [^29] 아르미니우스와 항론파에게도 구원의 응답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만 이 선행은총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과 범위로 주어지는지를 후대 웨슬리안 알미니안주의의 보편적 선행은총 교리와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은혜 없이 스스로 구원을 시작한다"는 설명은, 고전적 알미니안주의 자체보다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더 가까운 묘사다. 요약으로는 유용할 수 있지만, 역사적 알미니안주의의 자기진술과는 구별해 두어야 한다.
요약과 실제를 구별하고 나면 진짜 쟁점이 선명해진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실제 논쟁은 은혜가 필요한가가 아니다. 양쪽 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논쟁은 세 지점에 있다. 첫째, 그 은혜는 효력이 있는가(effectual), 아니면 저항 가능한가(resistible)? 항론파 제4조는 은혜가 불가항력적이지 않다고 했고, [^30] 도르트는 중생시키는 은혜가 반드시 그 목적을 이룬다고 했다. [^31] 둘째,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최종적으로 구별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개혁파의 비판은 바로 여기에 집중된다. 동일하거나 충분한 은혜가 주어졌는데 어떤 이는 믿고 어떤 이는 믿지 않는다면, 그 최종적 차이를 무엇이 설명하는가. 개혁파는 그 구도에서 결정적 차이가 결국 인간의 비저항(non-resistance)에 귀속된다고 비판했고, 알미니안 측은 믿음이나 은혜를 받아들이는 행위를 독립적 공로나 은혜와 동등한 원인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32] 셋째, 선택의 조건과 믿음의 관계 — 선택은 믿는 자를 구원하기로 하신 조건적 작정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항론파), 아니면 특정한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선택이 믿음을 그 열매로 산출하는가(도르트 개혁파). [^33]
이 진짜 쟁점을 놓고 성경 본문을 다시 보면, 이 글은 양비론으로 도망가지 않겠다. 요한복음 6장 44절의 인간의 무능, 에스겔 36장의 하나님의 선행적 심령 갱신, 로마서 9장의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 빌립보서 2장 13절의 "원함"까지 일으키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6장 37절의 "주시는 자는 다 올 것이요"의 확실성 — 이 본문들은 하나님의 주도(divine initiative)와 은혜의 효력이라는 개혁파의 독법에 강한 본문적 근거를 제공한다【B. 추론】. 나는 이것을 명확히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 그리고 이것이 이 글 전체의 관건인데 — 로마서 10장의 믿음과 불순종, 로마서 11장 20–23절의 경고와 믿음·불신앙, 신명기 30장의 실제 명령과 선택, 출애굽기에서 바로 자신이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서술을, 조직신학적 체계를 지키기 위해 약화시켜서도 안 된다. 두 계열의 본문을 모두 보존하는 체계만이 성경 전체에 충실한 체계다. 그렇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어느 쪽인가. 이제 고백서 자체를 펼칠 차례다.
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9·10장을 감사(audit)하다
이제 이 글의 중심 작업으로 들어간다. 감사(audit)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고백서를 옹호하기 위해 읽지도, 공격하기 위해 읽지도 않을 것이다. 회계 감사관이 장부를 대조하듯, 다음 세 질문을 들고 공정하게 대조할 것이다.
WCF는 성경에 없는 체계를 성경 위에 덮어씌웠는가? 아니면 성경에 실제로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효력적 은혜의 언어를 정교하게 체계화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의 어떤 언어가 전경화(前景化)되고 어떤 언어가 후경화(後景化)되었는가?
8.1. WCF 3장 — 예정론의 첫 문장부터 자유의지를 보호한다
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관하여」의 첫 조항(3.1)을 직접 읽어 보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기 뜻의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유롭고 변함없이 정하셨다(ordain whatsoever comes to pass).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시는 것도 아니고, 피조물의 의지에 폭력이 가해지는 것도 아니며(nor is violence offered to the will of the creatures), 제2원인들의 자유나 우연성이 제거되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굳게 세워진다." (WCF 3.1) [^34]
놀랍게도 예정론은 그 첫 문장에서부터 단서를 단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작정하시지만, 피조물의 의지에 폭력이 가해지지 않는다. 이 단서를 빼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만 가르치면 WCF 예정론의 절반만 가르치는 셈이다. WCF가 말하는 예정은 강제(coercion)가 아니다.
이어서 3장은 선택과 유기를 전개한다.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미리 정해졌다(3.3). 선택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졌으며, 믿음이나 선행이나 그 견인을 미리 보셨기 때문이 아니다(3.5). 그리고 3.7은 이렇게 말한다.
"나머지 인류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자기 뜻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따라 — 그 뜻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며 —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을 지나치시고(to pass by), 그들의 죄로 인하여(for their sin) 치욕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시기를 기뻐하셨으니, 이는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WCF 3.7)
여기서 고백서 자체의 비대칭 하나를 눈여겨보라. 선택의 원인은 오직 은혜다. 그러나 정죄의 근거에는 "그들의 죄로 인하여"가 명시된다. [^35] 고백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죄와 무관하게 임의로 지옥에 던지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3.8은 이 교리 전체에 경고 표지판을 세운다.
"이 예정의 높은 신비의 교리는 특별한 신중함과 주의로 다루어져야 한다(handled with special prudence and care)…" (WCF 3.8) [^36]
예정론의 목적은 호기심의 충족이 아니라 겸손과 찬양과 위로, 그리고 복음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이다.
8.2. WCF 9장 — 자유의지에 통째로 바친 한 장
고백서가 자유의지를 부정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종종 놓치는 사실이 있다. 고백서에는 「자유의지에 관하여」라는 장이 따로 있다. 9장이다. 첫 조항은 노골적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지에 본성적 자유(natural liberty)를 부여하셨으니, 그것은 강요되지도 않고, 본성의 어떤 절대적 필연에 의하여 선이나 악으로 결정되지도 않는다." (WCF 9.1) [^37]
인간은 로봇도, 아바타도 아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질문이 중요하다. 여기서 '자유'란 무엇을 뜻하는가. WCF가 말하는 자유는 "동일한 조건에서 A와 B 중 어느 쪽이든 똑같이 선택할 수 있어야 자유다"라는 현대적 의미의 자유 — 철학에서 자유지상주의적 자유(libertarian freedom)라고 부르는, 모든 선행 조건이 동일해도 달리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자유 — 가 아니다. 고백서의 자유는 그보다 "강제 없이, 자신의 본성과 원함을 따라 자발적으로 행한다"에 가깝다. 하나님의 결정적 주권과 인간의 자유·책임이 양립할 수 있다고 보는 이런 구조는 오늘날 흔히 양립론적(compatibilist)이라고 설명되지만, WCF의 자유론을 현대 철학의 특정한 양립론과 그대로 동일시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38] 물론 17세기 문서에 20세기 철학 용어를 그대로 붙이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 최근 연구는 개혁파 정통주의의 자유론을 현대 양립론과 단순 동일시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시대착오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최소한 이것은 분명하다. WCF는 근대적 자유지상주의적 자유를 전제하지 않으며, 그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인간의 실제 자발성과 책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9.3은 자유와 능력을 분리한다.
"사람은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써, 구원에 수반되는 영적 선을 향한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그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고 죄 가운데 죽어 있어서, 자기 힘으로 회심할 수도 없고 스스로 회심을 준비할 수도 없다." (WCF 9.3) [^39]
이 조항의 증거본문이 바로 요한복음 6장 44절과 65절이다. 여기서 핵심 구별이 나온다. 의지가 없는 것과 의지가 영적으로 무능한 것은 다르다. WCF에게 불신자는 "그리스도를 너무나 믿고 싶은데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막고 계신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타락한 본성을 따라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불신은 여전히 그 사람 자신의 실제 의지에서 나오고, 책임도 실제다.
그러면 중생 때 하나님은 그 의지를 없애 버리시는가. 9.4가 답한다.
"하나님이 죄인을 회심시키셔서 은혜의 상태로 옮기실 때, 그를 죄 아래 있던 본성적 속박에서 해방하시고, 오직 그의 은혜로 그가 영적으로 선한 것을 자유롭게 원하고 행할 수 있게 하신다(freely to will and to do that which is spiritually good)." (WCF 9.4) [^40]
이 조항의 증거본문이 빌립보서 2장 13절이다. 은혜는 의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한다.
8.3. WCF 10.1 — 우리가 4장에서 읽은 바로 그 본문들의 모자이크
그리고 10장 「유효한 부르심에 관하여」의 첫 조항. 이 조항은 이 글의 4장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들이 거의 그대로 짜여 들어간 모자이크다. 길지만 전문을 읽을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생명으로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오직 그들만을(those only), 정하시고 받으신 때에 자기의 말씀과 성령으로써, 그들이 본성상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효력 있게 부르신다.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밝혀 하나님의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 같은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renewing their wills),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의지를 선한 것으로 결정하시며(determining them to that which is good),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효력 있게 이끄신다. 그러나 그들은 지극히 자유롭게 나아오니,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yet so, as they come most freely, being made willing by his grace)." (WCF 10.1) [^41]
증거본문 배치를 보면 이 조항이 어디서 왔는지 그대로 드러난다. [^42]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 같은 마음을 주시며"에는 에스겔 36장 26절이,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 선한 것으로 결정하시며"에는 신명기 30장 6절, 에스겔 11장 19절과 36장 27절, 빌립보서 2장 13절이, "효력 있게 이끄신다"에는 요한복음 6장 44–45절이 붙어 있다(판본에 따라 세부는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마지막의 "기꺼이 원하게 되었기 때문"에는 전통적으로 시편 110편 3절 — 흠정역으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자원하리이다(Thy people shall be willing)" — 과 요한복음 6장 37절이 놓인다. 적어도 고백서에 부착된 증거본문 배열은, 10.1의 각 표현이 우리가 이미 읽은 겔 36장, 신 30장, 빌 2장, 요 6장의 성경 언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특별히 인상적인 사실 하나.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부착한 증거본문 배열에서는 신명기 30장의 양쪽이 모두 사용된다. 9.1(의지는 강요되지 않는다)의 증거본문은 신명기 30장 19절 — "생명을 택하라" — 이고, 10.1(하나님이 의지를 새롭게 하신다)의 증거본문은 신명기 30장 6절 — "여호와께서 네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 이다. 같은 장의 명령과 약속을 각각 제자리에 배치한 것이다. 적어도 여기서는 "WCF가 인간 책임의 언어를 지웠다"고 비판하기 어렵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수업에서는 성령께서 사람을 "아바타"처럼 조종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마음과 힘을 주셔서 신자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반응하게 하신다고 설명하셨다. 그 설명은 사실 WCF 10.1의 마지막 문장과 정확히 같은 말이다. 다만 한 가지를 더 정밀하게 말할 수 있다. WCF 10.2는 사람이 성령으로 살아나 새롭게 되기까지는 이 부르심에 대하여 전적으로 수동적(altogether passive)이라고 말한다. [^43] 즉 중생을 일으키는 원인에 관해서라면 하나님 100, 인간 0이다 — 이것을 신학 용어로 단독사역론(monergism, '홀로'를 뜻하는 monos와 '일'을 뜻하는 ergon의 합성어로, 중생이 하나님 홀로의 사역이라는 뜻)이라 부른다. 그러나 중생한 인간이 믿고 회개하고 응답하는 행위에서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이 대신 믿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대신 회개하시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죄를 슬퍼하고,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내가 하나님께 돌아간다. 다만 내가 그렇게 기꺼이 원하도록 하나님께서 나의 의지를 새롭게 하신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 질문에 대한 개혁파의 정밀한 답이 나온다. 수업에서 일상의 선택을 예로 들어 인간 의지의 실재를 설명하고, 이어서 성령의 인격적 역사와 신자의 자발적 반응을 말한 것은 정확히 이 방향이었다. 여기서는 수업에서 이미 나온 그 통찰을 WCF 9장과 10장의 용어로 한 단계만 더 구분해 보려 한다. 핵심은 다음 두 명제가 전혀 다른 명제라는 것이다.
"구원의 근거(ground)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다." — 이것은 참이다.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는 무의미하다." — 이것은 거짓이다.
구원의 원인과 근거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의 경험과 삶에서 인간의 의지는 무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은혜는 의지를 되살려 실제로 원하고 믿고 사랑하게 만든다.
8.4. 중간 감사 결과 — 그리고 남는 것
여기까지의 감사 결과를 층위별로 정리하면 이렇다. 타락한 인간의 영적 무능(9.3)은 요한복음 6장 44절 등에서 강하게 추론된다【B. 추론】.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신다는 10.1의 언어는 상당 부분 성경 본문의 직접 인용에 가깝다【A. 본문】. 그러나 영생과 영원한 사망을 함께 작정의 범주 안에 놓는 3.3의 포괄적 구조, 그리고 작정과 피조물의 자유가 어떻게 양립하는지에 대한 3.1의 통합적 설명은, 성경 자료를 아우구스티누스-개혁파의 질문에 따라 정리한 조직신학적 구성이다【C. 구성】 — 뒤에서 보겠지만 그 구성 자체도 성경의 서술 방식에 뿌리가 없지 않다.
그런데 첫 번째 질문, "배타적이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고백서를 변호하려고 너무 빨리 넘어가면 안 된다. 정직하게 말하자. WCF는 실제로 배타적이다.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10.4는 그리스도 밖의 별도 구원의 길을 인정하지 않는다(그리스도론적 배타성). 그리고 3장과 10.1의 "오직 그들만을"은 선택이 보편적이지 않다고 명시한다(선택의 특수성). 그러므로 "예정된 자들이라고 하니 배타적으로 느껴진다"는 반응은 WCF를 오해해서 생긴 감정만은 아니다. WCF가 실제로 주장하는 내용에서 발생하는 정당한 신학적 질문이다. 그러면 WCF는 "왜 그 사람은 선택받지 못했는가"에 답하는가. 부분적으로만 답한다. 3.7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뜻, 주권, 긍휼을 베풀거나 거두시는 자유, 죄에 대한 공의를 말한다. 그러나 "왜 A는 택하고 B는 택하지 않으셨는가"의 개별적인 이유는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3.8은 이 교리를 특별한 신중함으로 다루라고 명하며 사실상 이렇게 말한다. 그 비밀을 네가 안다고 주장하지 말라. 이것은 고백서 스스로 세운 한계선이다.
그렇다면 이제 결정적인 검증이 남았다. 고백서의 이 모든 명제는 로마서 9장의 특정한 독해 위에 서 있다. WCF 3장의 증거본문 배열을 보면 [^44] 3.1에 로마서 9장 15, 18절과 11장 33절, 3.2에 9장 11, 13, 16, 18절, 3.3에 9장 22–23절, 3.5에 9장 11, 13, 16절, 3.7에 9장 17–18, 21–22절이 집중적으로 사용된다. 즉 WCF 예정론의 상당 부분이 로마서 9장의 독해에 달려 있다. 그런데 로마서 9장은 원래 홀로 서 있는 장이 아니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하나의 연속된 논증이다. 그 논증 전체를 복원한 다음, 그 위에 WCF 3장의 형광펜을 칠해 보자.
9. 로마서 9–11장 — 잘려 나간 논증을 복원하기
로마서 9장은 예정론 논쟁에서 너무 자주 '떼어져서' 읽혀 왔다. 그러나 바울은 9장을 쓰고 붓을 놓지 않았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하나의 문제에서 출발해 하나의 송영으로 끝나는 긴 연속 논증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45] 형광펜을 들기 전에, 먼저 아무 색도 칠하지 않은 채 그 논증 전체를 통독해 보자.
9:1–5 — 문제는 교리가 아니라 통곡에서 시작된다. 바울의 출발점은 "하나님은 개인을 어떻게 천국과 지옥으로 예정하시는가"라는 추상적 질문이 아니다. 그의 출발점은 찢어지는 마음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1–3)
이스라엘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들과 조상들이 있고,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까지 그들에게서 나셨다(9:4–5). 그런데 왜 그토록 많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메시아를 거부하는가. 그렇다면 이 신학적 위기가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실패한 것인가? 로마서 9–11장 전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46]
9:6–29 — 첫 번째 답: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9:6)
바울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 에서가 아닌 야곱의 사례로 논증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문장들이 나온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9:11–13)
그러자 바울 스스로 반문을 제기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9:14). 그리고 출애굽기 33장의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하며 결론짓는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5–16)
이어서 바로가 등장한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9:17–18)
바울은 두 번째 반문도 스스로 제기한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9:19). 그리고 토기장이의 비유로 답한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롬9:20–23)
여기까지가 WCF 3장이 가장 진하게 칠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정직하게 인정하자. 이 본문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의 자유를 정말로, 매우 강하게 말한다【A. 본문】. 반대로 로마서 9장을 오직 민족적·구속사적 선택만의 문제로 제한하여 개인의 구원과 전혀 무관한 본문으로 만드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바울의 논증은 이스라엘이라는 구속사적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그 안에서 부르심·긍휼·믿음·구원의 문제를 함께 다룬다. 다만 두 가지는 함께 기억해야 한다. 첫째, 바울의 출발 질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구속사적 문제였다는 것. 둘째, 토기장이 비유의 중요한 구약 배경 가운데 하나인 예레미야 18장에서 토기장이는[^47] 고정된 운명을 찍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진흙의 상태에 따라 그릇을 다시 만들고,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내리려던 재앙을 돌이키시는 분으로 그려진다는 것(렘 18:1–10). 그리고 9:22의 "멸하기로 준비된"(κατηρτισμένα)은 준비한 주체를 명시하지 않는 수동 표현인 반면, 9:23의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προητοίμασεν)은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능동 표현이다[^48] —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이 예비하셨다고 명시하면서,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는 문장이 미묘하게 절제한다. 이 문법적 비대칭만으로 바울의 예정론 전체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후대의 개혁파 정통주의가 선택과 유기를 정확히 대칭으로 다루지 않으려 했던 것(WCF 3.7의 "그들의 죄로 인하여")과 공명하는 것은 사실이다【B. 추론】.
9:30–10:21 — 두 번째 답: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인간의 책임으로 전환한다.[^49] 여기가 결정적이다.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9:18)라고 썼던 바로 그 바울이, 같은 논증의 바로 다음 단락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롬9:30–32)
이스라엘은 왜 실패했는가.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셨기 때문에? 바울이 여기서 실제로 쓴 대답은 이것이다.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에. 두 대답은 같은 논증 안에 나란히 있고, 바울은 어느 쪽도 철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10장이 열리면 바울은 기도한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롬10:1)
주목하라. 9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그토록 강하게 말한 사람이, 10장 첫 절에서는 현재 복음을 믿지 않는 동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바울에게 예정 교리는 전도와 기도를 무력화하는 교리가 아니었다. 이어서 10장은 신약에서 가장 열린 초청의 언어를 쏟아낸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10:9–13)
"누구든지." 그리고 그 초청이 실제로 사람에게 닿기 위한 사슬 — 보냄, 전파, 들음, 믿음 — 이 이어진다(10:14–15).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는가.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6–17)
그리고 10장의 마지막 절, 이 논증 전체에서 가장 가슴 아픈 문장이 나온다. 이사야 65장 2절의 인용이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롬10:21)
9장의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는" 분이다. 10장의 하나님은 그 완악한 백성에게 온종일 손을 벌리고 계신 분이다. 같은 하나님, 같은 바울, 같은 논증이다.
11:1–10 —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롬11:1)
바울 자신이 반례다. 그리고 엘리야 시대의 칠천 명처럼, 지금도 남은 자가 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롬11:5–6)
나머지는 우둔하여졌다(11:7). 그런데 바울이 그 우둔함을 설명하며 인용하는 본문이 어디인지 보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11:8) — 이 문장은 신명기 29장 4절과 이사야 29장 10절의 언어를 함께 반향한다.[^50] 우리가 4장에서 읽었던 "보는 눈과 듣는 귀"의 토라적 언어가 여기 다시 등장한다. 바울의 완악 신학은 토라에서 왔다. 이 실마리는 12장에서 다시 붙잡을 것이다.
11:11–24 — 이스라엘의 넘어짐도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11:11)
이스라엘의 넘어짐 → 이방인의 구원 → 이스라엘의 시기 → 이스라엘을 다시 얻음. 논증이 또 한 번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감람나무 비유에서, 이 글 전체의 열쇠가 되는 구절들이 나온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롬11:20–23)
꺾인 이유는 믿지 아니함이고, 서 있는 근거는 믿음이다. 이방인 신자를 향해서는 교만하지 말고 두려워하라는 실제 명령이 떨어진다. 그리고 지금 꺾여 있는 가지들조차,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 다시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 —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11:25–32 —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신비'라고 부른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롬11:25)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전체가 아니라 "부분적으로"(ἀπὸ μέρους) 일어난 것이며, 바울은 그것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ἄχρι οὗ)라는 구속사적 시간표 안에 놓는다.[^51] 이 표현만으로 이후의 모든 세부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바울이 이스라엘의 현재 완악함을 단순히 정적인 최종 상태로만 기술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11:28–29)
원수이면서 동시에 사랑을 입은 자 — 바울은 이 모순 같은 이중 서술을 태연히 유지한다. 그리고 논증 전체의 대단원이 온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11:30–32)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가 불순종 아래 있었고, 모두가 긍휼 외에는 살 길이 없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 논증의 마지막에야 — 송영이 터져 나온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11:33). 이 송영은 결론에서 전문을 읽을 것이다.
이제 로마서 9–11장의 전체 모양이 보인다. 그것은 "예정 → 끝"이 아니다. 대략 이런 흐름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이라는 문제 →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 → 이스라엘 자신의 불신앙과 책임 → 누구든지를 향한 복음의 보편적 선포 → 은혜로 택하신 남은 자 → 이방인의 구원 → 이방인을 향한 교만 금지 경고 → 꺾인 가지의 재접붙임 가능성 → 부분적이고 한시적인 완악함이라는 신비 → 모두를 불순종 아래 가두심은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 → 송영. 바울은 이 긴장 자체를 제거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신다. 동시에 인간이 믿고,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복음을 들어야 하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바울은 그 완전한 작동 원리를 다 설명했다고 주장하는 대신 경배한다.
이것이 캔버스다. 이제 형광펜을 들자.
10. 형광펜을 들고 — WCF 3장의 증거본문을 로마서 9–11장 위에 칠하면
이제 실험을 하나 하자. 방금 통독한 로마서 9–11장 위에, WCF 3장이 실제로 증거본문으로 사용하는 구절들을 색깔별로 칠해 보는 것이다. 미리 한 가지 사실을 바로잡아 두자. WCF 3장은 로마서 9장만 사용하지 않는다. 11장도 사용한다.[^52] 그런데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9장은 주로 작정·선택·유기를 세우는 데 사용하고, 11장은 주로 신비·은혜·겸손을 말하는 3.8에 사용한다. 색상 범례는 다음과 같다.
- [파랑 — 선택·작정] WCF 3장이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의 주권을 논증하기 위해 사용
- [빨강 — 유기·심판] WCF 3장이 완악하게 하심과 진노의 그릇, 유기를 논증하기 위해 사용
- [노랑 — 신비·겸손·위로] WCF 3.8이 예정론의 신중한 사용을 위해 인용
- [흰색 — 미채택] 바울의 논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WCF 3장의 직접 증거본문으로는 사용되지 않음
주의할 점: [흰색]은 "WCF 전체가 이 본문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고백서의 다른 장들은 로마서 10장을 사용한다. 오직 제3장 예정론의 직접 증거본문 배열에서 사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증거본문의 세부 배열은 후대 판본에서 차이가 생길 수 있으므로, 아래 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직접 심의하여 제출한 원래의 증거본문을 기준으로 한다.[^53] 증거본문은 고백서 본문 자체와는 구별되지만, 총회가 각 명제를 어떤 성경 본문으로 뒷받침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다.)
| 로마서 |
바울 논증에서의 기능 |
WCF 3장 |
| 9:1–5 |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통곡 |
[흰색] |
| 9:6–10 |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음 / 약속의 자녀 |
[흰색] |
| 9:11, 13 |
행위 이전의 선택 / 야곱과 에서 |
[파랑] 3.2, 3.5 |
| 9:15 |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
[파랑] 3.1 |
| 9:16 |
원함·달음박질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
[파랑] 3.2, 3.5 |
| 9:17 |
바로를 세우심 |
[빨강] 3.7 |
| 9:18 |
긍휼과 완악하게 하심 |
[파랑] 3.1, 3.2 + [빨강] 3.7 |
| 9:20 |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
[노랑] 3.8 |
| 9:21 |
토기장이의 권한 |
[빨강] 3.7 |
| 9:22 |
진노의 그릇 |
[빨강] 3.7 + 3.3 |
| 9:23 |
긍휼의 그릇 |
[파랑] 3.3 |
| 9:24–29 |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 / 호세아·이사야 |
[흰색] |
| 9:30–33 |
이스라엘이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함 |
[흰색] |
| 10:1 |
바울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함 |
[흰색] |
| 10:9–13 |
믿고 시인하라 / "누구든지" |
[흰색] |
| 10:14–17 |
보냄 → 전파 → 들음 → 믿음 |
[흰색] |
| 10:21 |
불순종하는 백성에게 종일 벌리신 손 |
[흰색] |
| 11:1–4 |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심 |
[흰색] |
| 11:5–6 |
은혜로 택하심을 따른 남은 자 |
[노랑] 3.8 |
| 11:7–10 |
택하심을 입은 자와 우둔하여진 자 |
[흰색] |
| 11:11 |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 "그럴 수 없느니라" |
[흰색] |
| 11:20 |
불신앙으로 꺾임 / 믿음으로 섬 |
[노랑] 3.8 |
| 11:21–22 |
교만 금지 /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
[흰색] |
| 11:23 |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 다시 접붙임 |
[흰색] |
| 11:25–29 |
부분적 완악함 /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 없음 |
[흰색] |
| 11:30–32 |
모두를 불순종 아래 가두심은 모두에게 긍휼을 |
[흰색] |
| 11:33 |
헤아리지 못할 판단 |
[노랑] 3.1, 3.8 |
이 표를 흐름으로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바울의 논증은 "선택(9A) → 불신앙(9B) → 보편적 복음 선포와 책임(10) → 남은 자(11A) → 믿음/불신앙(11B) → 재접붙임 가능성(11C) → 부분적 완악함의 신비(11D) → 모두를 긍휼로(11E) → 송영"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WCF 3장의 형광펜 자국만 남기면 "**[파랑] 9:11–18 → [빨강] 9:17–23 → (긴 공백) → [노랑] 11:5–6, 11:20 → (공백) → [노랑] 11:33**"이 된다. **중간이 비어 있다.** 특히 로마서 9장 30절부터 10장 21절까지 — 이스라엘의 실제 불신앙, "누구든지"의 초청, 복음 전파의 사슬, 종일 벌리신 하나님의 손 — 가 통째로 비어 있다.[^54]
이 공백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이것을 "WCF가 로마서 10장을 무시했다"고 말하면 부정확하다. WCF의 다른 장들은 로마서 10장을 사용한다.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WCF 제3장이라는 예정론의 조직 안에서는, 로마서 10장의 믿음·복음 선포·인간 책임의 언어가 직접 증거본문으로 전경화되지 않는다. 그 결과 3장의 범주로 로마서를 배우는 청자는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있죠?" 그런데 바울의 원래 논증에서는 바로 다음 문단에 인간이 있다. 그들이 걸려 넘어졌다. 믿지 않았다. 자기 의를 세우려 했다.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다. 믿으라. 주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니까 수업에서 느꼈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게 뭐가 있느냐"는 불편함의 상당 부분은, 성경에 그 언어가 없어서가 아니라, 조직신학적 재배열이 만들어 내는 효과다. 고백서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고백서 제3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선택이라는 교리적 주제를 조직하면서 그 주제를 직접 뒷받침하는 특정 본문들을 전경화했고, 그 선택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저 공백이다.
그런데 아주 공정하게 보아야 할 반전이 하나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이 문제의 언어를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3.8의 증거본문을 보라. 거기에는 로마서 11장 5–6절(은혜의 선택)만이 아니라 11장 20절 —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 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55] 예정론 장의 마지막 조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선택의 언어와 믿음·불신앙의 언어를 나란히 놓고, 이 교리를 신중하게 다루며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주의하고 순종하라고, 자신의 유효한 부르심을 확인함으로써 선택의 확신에 이르러 겸손과 근면과 위로를 얻으라고 권한다. 그러니까 그들도 바울의 두 언어 — 선택과 믿음/불신앙 — 를 알고 있었다. 다만 제3장의 교리 구조 안에서 두 언어에 같은 조직적 비중을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11장 23절의 미채택은 특별히 흥미롭다. 11장 20절은 3.8에 들어갔는데, 불과 세 절 뒤의 23절 —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 은 3장의 증거본문이 아니다.[^56] 왜 이 차이가 중요한가. 11장 20절만 떼면 "불신앙 → 꺾임, 믿음 → 섬"이라는 책임 구조가 보인다. 그런데 23절까지 읽으면 한 가지가 더 보인다. 바울은 현재 꺾여 있는 자들의 상태를, 인간의 눈에서 폐쇄된 운명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물론 개혁파는 이 구절을 "유기된 자가 나중에 택자로 바뀔 수 있다"는 뜻으로 읽지 않을 것이고, 그 독법 자체는 가능하다 — 여기서 다루어지는 것은 일차적으로 감람나무 비유 속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속사적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건 그냥 외적 언약 관계 이야기니까 개인의 믿음과 불신앙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지워 버리는 것도 본문보다 멀리 간다. 바울 자신이 조건을 명백하게 '불신앙'(ἀπιστία)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한 판독은 이것이다. 바울은 청중이 지금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유기되었으니 끝났다"고 판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포한다 — 하나님께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작정을 읽어낼 수 없으므로, 어떤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복음의 가능성을 닫을 수 없다【B. 추론】. 이것은 예정 교리의 목회적 사용에 로마서 11장이 걸어 놓은 강력한 제약이다.
11장 25절의 "부분적 완악함"도 마찬가지 방향을 가리킨다. WCF 3장의 범주를 먼저 들고 로마서를 읽으면 '택자/유기자'라는 안정된 두 집합이 먼저 보인다. 그런데 로마서 11장의 실제 논증에서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부분적이고(ἀπὸ μέρους),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ἄχρι οὗ)라는 시간축 위에 있다. 바울은 영원한 작정의 관점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불신앙과 믿음과 완악함과 회복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말하고 있다. WCF 3장의 주요 렌즈가 작정의 렌즈(decretal lens)라면, 로마서 9–11장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렌즈는 구속사의 렌즈(salvation-historical lens)다. 둘은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지만, 동일하지도 않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 감사가 WCF 자신의 원칙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WCF 1.9는 이렇게 선언한다.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느 성경 본문의 참되고 온전한 의미에 관하여 의문이 있을 때에는(그 의미는 여럿이 아니요 하나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는 다른 본문들로 그것을 찾아 알아야 한다." (WCF 1.9) [^57]
이 원칙을 WCF 3장 자신의 로마서 사용에 적용하면 네 개의 읽기 규칙이 나온다.
로마서 9:16만 읽지 말고 로마서 10:13도 읽으라.
로마서 9:18만 읽지 말고 로마서 10:21도 읽으라.
로마서 9:22만 읽지 말고 로마서 11:23도 읽으라.
로마서 9:20만 읽지 말고 로마서 11:32도 읽으라.
이것은 WCF를 거부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WCF의 성경 해석 원칙을 WCF 자신의 예정론에 적용하는 작업이다.
이번 감사의 결과를 정리하자. WCF 3장은 로마서 9–11장과 모순되는 별개의 예정론을 만들어 낸 문서가 아니다. 행위 이전의 선택, 하나님께 달린 긍휼, 완악하게도 하시는 하나님, 은혜로 택하신 남은 자, 헤아릴 수 없는 판단 — 이 모든 것은 실제로 바울에게 있다. 파랑과 빨강 형광펜이 칠해진 자리에는 정말로 그 색의 본문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서 9–11장 전체는 WCF 3장보다 더 넓고 더 역동적이며, 인간의 믿음과 불신앙, 복음의 초청, 역사적 회복의 가능성, 모두를 향한 긍휼의 신비를 한 논증 속에 그대로 보존한다. WCF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작정을 특별히 전경화하여 정교하게 체계화했다. 그러므로 예정론을 배우고 가르칠 때 가장 안전한 길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로마서 9장에서 멈추지 말고, 바울과 함께 10장과 11장까지 계속 읽는 것.
그리고 그 길 위에 특별히 밝은 다섯 개의 이정표가 있다. 9:18, 10:21, 11:20, 11:23, 11:32. 이 다섯 절을 한 줄에 놓고, 이번에는 교리 용어를 잠시 내려놓은 채, 헬라어 문장 속에서 실제로 누가 주어이고 누가 무엇을 하는지만 추적해 보자.
11. 다섯 구절의 문법 — 누가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의 주권 100% + 인간의 책임 100%"라는 공식을 들어 보셨을 것이다. 방향은 옳다. 그러나 바울은 퍼센트를 말하지 않는다. 바울의 문장은 훨씬 구체적이다. 다섯 절의 헬라어를 차례로 뜯어 보자. 원어가 낯선 분은 굵게 표시한 우리말 분석만 따라오셔도 충분하다.
① 로마서 9:18 — 행위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이다.
ἄρα οὖν ὃν θέλει ἐλεεῖ, ὃν δὲ θέλει σκληρύνει아라 운 혼 델레이 엘레에이, 혼 데 델레이 스클레뤼네이.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세 개의 동사 — θέλει델레이(원하신다), ἐλεεῖ엘레에이(긍휼히 여기신다), σκληρύνει스클레뤼네이(완악하게 하신다) — 가 모두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이고, 주어는 문맥상 하나님이다.[^58] 두 절은 거의 완전한 평행 구조다. 이 문장에서 인간의 의지, 믿음, 반응은 주어 자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한 절만 확대하면 WCF 3장의 색깔이 진하게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롬9:18은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는 본문"이라고 약화시키는 독법은 본문을 거스른다. 바울은 여기서 정말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를 말하고 있다.
② 로마서 10:21 — 같은 바울의 문장이 완전히 달라진다.
Ὅλην τὴν ἡμέραν ἐξεπέτασα τὰς χεῖράς μου πρὸς λαὸν ἀπειθοῦντα καὶ ἀντιλέγοντα 홀렌 텐 헤메란 / 엑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 무 /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티레곤타.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이 한 문장 안에 두 행위 주체가 동시에 있다. 하나님의 행위: ἐξεπέτασα엑세페타사, "내가 벌렸다" — 1인칭 단수 부정과거 능동태다. ἐξεπέτασα 자체는 부정과거지만, 그 행위에는 "온종일"(ὅλην τὴν ἡμέραν)이라는 시간 표현이 붙는다. 따라서 문장의 그림은 한순간의 손짓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백성을 향해 종일 손을 벌리고 계시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그 손이 향하는 백성에게는 두 개의 현재 능동 분사가 붙어 있다. ἀπειθοῦντα아페이둔타(불순종하는), ἀντιλέγοντα안티레곤타(거슬러 말하는). 이스라엘은 수동태가 아니다. 하나님도 능동이고, 인간도 능동이다. [^59] 9:18에서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신다"고 썼던 바로 그 바울이, 10:21에서는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거슬러 말한다"고 쓴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디에도 "앞의 표현은 오해였으므로 철회한다"는 문장이 없다. 두 진술이 모두 그대로 유지된다.
③ 로마서 11:20 — 네 개의 층이 한 절에 겹친다.
τῇ ἀπιστίᾳ ἐξεκλάσθησαν, σὺ δὲ τῇ πίστει ἕστηκας. μὴ ὑψηλὰ φρόνει, ἀλλὰ φοβοῦ 테 아피스티아 엑세클라스테산, 쉬 데 테 피스tei 헤스테카스. 메 휲셀라 프로네이, 알라 포부.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ἐξεκλάσθησαν엑세클라스테산(꺾였다)은 부정과거 수동태다. 가지가 스스로 부러진 것이 아니라 꺾임을 당했다. 꺾은 암묵적 행위자는 문맥상 하나님이다. 그런데 왜 꺾였는가. τῇ ἀπιστίᾳ테 아피스티아 — 여격으로,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측의 꺾으심과 인간 측의 불신앙이라는 설명이 한 절 안에 함께 있다.[^60]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ἕστηκας헤스테카스(네가 서 있다)는 완료형이고, 그 근거는 τῇ πίστει테 피스테이, "믿음으로"다. 눈여겨보라 — 바울은 여기서 "너는 선택받았으므로 서 있다"라고 쓰지 않았다. 이 문장의 설명 방식은 "너는 믿음으로 서 있다"이다. 그리고 곧바로 두 개의 명령형이 떨어진다. μὴ ὑψηλὰ φρόνει메 휲셀라 프로네이(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 φοβοῦ포부(두려워하라). 만약 바울의 논리가 "영원한 작정이 모든 결과를 결정하므로 인간의 반응은 설명상 무의미하다"였다면 이 경고는 장식품이 된다. 그러나 바울에게 경고는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사람을 실제로 다루시는 수단이다. 요컨대 이 한 절에 하나님의 행위, 인간의 불신앙, 인간의 믿음, 인간을 향한 명령 — 네 개의 층이 모두 들어 있다.
④ 로마서 11:23 — 가장 흥미로운 문법.
κἀκεῖνοι δέ, ἐὰν μὴ ἐπιμένωσιν τῇ ἀπιστίᾳ, ἐγκεντρισθήσονται· δυνατὸς γάρ ἐστιν ὁ θεὸς πάλιν ἐγκεντρίσαι αὐτούς캉케이노이 데, 에안 메 에피메노신 테 아피스티아, 엥켄트리스테손타이, 뒤나토스 가르 에스틴 호 테오스 팔린 엥켄트리사이 아우투스.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조건절의 동사 ἐπιμένωσιν에피메노신(머무르다)은 현재 능동 접속법이고, 주어는 그들, 곧 인간이다. 인간이 불신앙에 머무르거나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데 결과절의 동사 ἐγκεντρισθήσονται엥켄트리스테손타이(접붙임을 받을 것이다)는 미래 수동태다. 그들이 자기를 접붙이는 것이 아니다. 누가 접붙이는가 — 바로 다음 절이 명시한다. δυνατὸς ὁ θεός뒤나토스 호 테오스, "하나님께 능력이 있다." 조건절에는 그들이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놓이고, 주절에는 그들이 "접붙임을 받을 것"이라는 수동형이 놓인다. 그리고 그 접붙임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이 명시된다.[^61] 따라서 인간의 불신앙은 의미 없는 변수가 아니지만, 회복의 행위자는 인간 자신이 아니다【B. 추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불신앙 여부가 아무 의미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바울의 문법 자체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긴장이다.
⑤ 로마서 11:32 — 주어가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온다.
συνέκλεισεν γὰρ ὁ θεὸς τοὺς πάντας εἰς ἀπείθειαν, ἵνα τοὺς πάντας ἐλεήσῃ스네클레이센 가르 호 테오스 투스 판타스 에이스 아페이데이안, 히나 투스 판타스 엘레에세.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주어는 ὁ θεός, 하나님. 첫 동사 συνέκλεισεν스네클레이센(함께 가두셨다)은 부정과거 능동태. 그리고 목적절 ἵνα … ἐλεήσῃ히나 엘레에세(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의 주어도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가두시고,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 [^62] 논증은 하나님의 행위로 시작해서(9:18) 하나님의 행위로 끝난다(11:32).
그런데 9:18과 11:32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변화가 하나 보인다. 두 절에 같은 동사가 쓰였다. ἐλεέω, 긍휼히 여기다. 9:18에서는 "원하시는 자를(ὃν θέλει혼 델레이)" 긍휼히 여기신다. 11:32에서는 "모든 사람에게(τοὺς πάντας투스 판타스)"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물론 여기서 πάντας판타스가 "예외 없이 모든 개인이 결국 구원받는다"는 보편구원론을 뜻한다고 결론 낼 수는 없다 — 바로 앞의 30–31절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교차하여 다루고 있으므로, τοὺς πάντας는 문맥상 적어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괄한다. 그러나 이 표현만으로 예외 없이 모든 개인이 최종적으로 구원된다는 보편구원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의 수사적 움직임 자체는 분명하다. 9:18만 읽으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실지 결정하신다"에서 멈춘다. 11:32까지 읽으면, 그 하나님의 계획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불순종 아래 드러내어 모두가 긍휼 외에는 살 길이 없도록 만드는 데까지 나아간다. 후자의 시야가 훨씬 크다.
이제 다섯 절의 행위자만 뽑아 정리해 보자.
| 본문 |
행위자 |
행위 |
| 9:18 |
하나님 |
원하심, 긍휼히 여기심, 완악하게 하심 (모두 능동) |
| 10:21 |
하나님 |
종일 손을 벌리심 (능동) |
| |
이스라엘 |
불순종함, 거슬러 말함 (능동) |
| 11:20 |
하나님(암시) |
가지들을 꺾으심 |
| |
그들 |
불신앙 (꺾임의 근거) |
| |
너 |
믿음으로 서 있음 / 교만 금지·두려워하라는 명령의 수신자 |
| 11:23 |
그들 |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음 (현재 능동 접속법) |
| |
그들 |
접붙임을 받음 (미래 수동태) |
| |
하나님 |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음 (능동 부정사) |
| 11:32 |
하나님 |
모두를 가두심, 긍휼히 여기심 (능동) |
이렇게 놓으면 하나의 패턴이 또렷해진다. 하나님의 행위는 9:18에서 사라지지 않고 11:32까지 간다. 그런데 인간의 행위도 10:21에서 등장한 뒤 사라지지 않는다. 둘은 교대하면서 한 논증 속을 같이 간다. 더 중요한 것은 능동과 수동의 배치다. 하나님의 긍휼, 호소와 초청, 심판과 회복의 행위는 계속 실제적이고 능동적으로 서술된다. 동시에 인간의 불신앙·반역·믿음 역시 실제 설명 언어로 남아 있다. 11:20에서 인간은 "꺾임을 당하고", 11:23에서는 다시 "접붙임을 받는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이 자신에게 그 사건을 수행하는 주체는 아니다. 그러나 꺾임에는 불신앙이 명시되고, 재접붙임은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절과 함께 제시된다. 바울의 문법은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믿음·불신앙을 어느 한쪽으로 지우지 않는다. 이 배치가 말해 주는 바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개혁파가 "구원의 최종 행위자는 하나님이다"라고 읽은 데에는 상당히 강한 본문적 기반이 있다【B. 추론】.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하나님의 작정을 말한 다음에도 역사 속의 실제 인간에게 믿음, 불신앙, 순종, 불순종, 경고, 두려움, 복음 선포, 회복 가능성이라는 언어를 결코 가상의 것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100% + 100%"라는 공식보다 바울 자신의 문법에 더 가까운 요약은 다음 다섯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① 이 논증에서 하나님의 행위는 더 근원적인 설명으로 제시된다(9:18, 11:32).
② 그러나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을 문법적·도덕적 비행위자로 만들지 않는다(10:21).
③ 믿음과 불신앙은 바울에게 실제 설명 변수다(11:20).
④ 회복 역시 인간의 자력 행위가 아니다 — 접붙이시는 분은 하나님이다(11:23).
⑤ 구원의 마지막 설명어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다(11:32).
그리고 마지막 관찰 하나. WCF는 이 자료를 가져와 "작정 → 선택/유기 → 유효한 부르심 → 견인"이라는 논리적으로 매우 정돈된 개념 체계를 만든다. 그런데 바울의 실제 문장은 이렇게 움직인다.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신다 → 그런데 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 하나님은 온종일 그들에게 손을 벌리셨다 → 그들은 불순종한다 → 그들은 불신앙 때문에 꺾였다 → 너도 교만하지 말고 두려워하라 → 그들이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 다시 접붙임을 받을 것이다 →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다 → 하나님은 모두를 불순종 아래 두어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 "깊도다!" 마지막이 체계의 완결(system closure)이 아니라 송영(doxology)이다. 바울은 두 행위 주체의 철학적 접합부를 설명하는 대신, 두 행위 주체를 같은 이야기 안에 함께 놓는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확인하러 가자. 바울이 이 서술 방식을 어디서 배웠는지 — 로마서 9장 18절의 "완악하게 하신다"를 그 원산지인 출애굽기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12. 바울을 출애굽기로 되돌려 보내기 — 바로의 마음
로마서 9장 17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것은 출애굽기 9장 16절이다. 바울의 독자에게 '바로'는 추상적인 철학 사례가 아니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 서사 전체가 따라온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검증이 하나 남는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보여 준 저 이중의 행위 구조 — 하나님도 행하시고 인간도 실제로 행하는 — 는 바울의 발명인가, 아니면 토라 자체의 서술 방식을 계승한 것인가. 출애굽기의 바로 완악함 본문들을 순서대로 읽어 보면 답이 나온다.
먼저 알아 둘 것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완악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동사가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세 어근은 의미영역이 겹치지만 서로 다른 기본 이미지를 가진다. חזק(하자크)는 '강하다, 강하게 하다'의 의미영역을 가지며 — 여호수아에게 주신 "강하고 담대하라"(수 1:6)의 바로 그 어근이 바로에게서는 하나님을 향해 굳게 버티는 완강함이 된다 — כבד(카베드)는 '무겁다, 무겁게 하다', קשה(카샤)는 '딱딱하다, 완고하게 하다'의 의미영역을 가진다.[^63] 개역개정은 이 셋을 대체로 '완악하다'와 '완강하다'로 옮기기 때문에 원문의 결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가 주어인지와 함께, 어떤 동사가 쓰였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먼저 예고하신다.[^64] 재앙이 시작되기도 전, 모세가 아직 미디안을 떠나기도 전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אֲחַזֵּק 아하젝, 하자크의 강의형)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출4:21)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אַקְשֶׁה 아크셰, 카샤의 사역형)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출7:3)
그러므로 출애굽기의 독자는 처음부터 "바로의 완악함은 하나님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간의 독자적 결정이었다"라고 읽을 수 없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이 서사의 문 앞에 먼저 서 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로마서 9장 18절과 거의 같은 방향이다.
그런데 실제 사건이 시작되면, 내러티브는 곧바로 '바로의 마음'을 주어 자리에 놓는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וַיֶּחֱזַק 바이헤자크, 마음이 굳어졌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7: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כָּבֵד 카베드, 무겁다)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출7:14)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7:22)
4장 21절에서 "내가 그의 마음을 강하게 하겠다"고 예고하신 하나님인데도, 실제 사건의 서술은 "하나님이 그를 조종하셔서 그가 아무 의지 없이 움직였다"가 아니다. 바로의 마음이 굳어졌고, 바로가 듣지 않았다. [^65] 그리고 재앙이 거듭되면서, 이번에는 바로 자신이 명시적 행위자가 된다.
""그러나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כבד의 Hiphil 형태로, 문맥상 바로가 자기 마음을 "무겁게 했다"고 서술한다)[^66]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더라" (출8:15)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8:19)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출8:32)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출 9:7)
8장 15절의 심리적 계기를 놓치지 말라. 바로가 재앙이 그친 것을 보고 — 숨 돌릴 틈이 생긴 것을 보고 — 자기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인간 행위의 실제 동기와 정황이 서술되어 있다. 하나님의 예고가 바로의 의지를 증발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출애굽기 9장 12절, 처음으로 내러티브 자체가 하나님을 명시적 행위자로 내세운다. [^67] 여섯 번째 재앙, 악성 종기 재앙에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וַיְחַזֵּק יְהוָה 바이하젝 아도나이— 여호와가 문법적 주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출9:12)
이 절은 "하나님이 허용만 하셨다" 정도로 무마하기 어렵다. 문법적으로 여호와가 실제 동사의 주어다. "하나님은 전혀 완악하게 하지 않으셨고 바로만 스스로 완악해졌다"고 말하면 출애굽기 9장 12절 자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재앙에서, 다시 바로 자신의 죄가 나온다.
"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출9:34–35)
같은 9장 안에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12절)와 "바로가 다시 범죄하여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34절)가 함께 있다. 그리고 내레이터는 12절 때문에 34절에서 바로에게 죄책을 물을 수 없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34절은 바로의 행위에 "다시 범죄하여"라는 도덕적 평가까지 붙인다. [^68] 그리고 10장 1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와 그 목적을 직접 설명하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הִכְבַּדְתִּי 히크바드티 — 내가 무겁게 하였다)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출10:1–2)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은 출애굽기에서 한 개인의 심리를 조작하는 사적인 일이 아니다. 그것은 표징을 보이고, 그 이야기를 자손 대대로 전하게 하고,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게" 하는 구속사적 자기계시의 행위 안에 들어 있다【B. 추론】.[^69] 그리고 이것이 정확히 바울이 로마서 9장 17절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바울이 임의로 바로를 '개인 예정의 사례'로 뽑아낸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자체가 이미 바로의 완악함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과 연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서사에서는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이 점점 전경으로 나오고(10:20, 27; 11:10; 14:8), 홍해 앞에서 절정에 이른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וְחִזַּקְתִּי 베히자크티)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וְאִכָּבְדָה 베익카베다)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출14:4)
여기에는 적어도 히브리어 독자가 포착할 수 있는 어근의 울림이 있다. 바로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데 사용된 כבד카베드가, 하나님이 바로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신다"는 표현에도 다시 등장한다.[^70] 이 어근의 반복은 바로의 완악함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두 주제를 문학적으로 연결해 읽게 한다【B. 추론】.
이제 전체 패턴을 표로 놓아 보자. (장절 구분과 동사의 뉘앙스에 따라 세부 집계는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큰 흐름은 다음과 같다.)
| 본문 |
행위자 |
표현 |
| 출 4:21 |
하나님(예고) |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다 (חזק 하작) |
| 출 7:3 |
하나님(예고) |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다 (קשה 카샤) |
| 출 7:13, 22; 8:19 |
바로의 마음(상태) |
마음이 완악하여 듣지 않음 (חזק 하작) |
| 출 7:14; 9:7 |
바로의 마음(상태) |
마음이 완강함 (כבד 카베드) |
| 출 8:15, 32 |
바로 자신 |
자기 마음을 완강하게 함 (כבד 카베드) |
| 출 9:12 |
여호와 |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 (חזק 하작) — 내러티브 최초의 명시적 신적 주어 |
| 출 9:34–35 |
바로 자신 |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함 (כבד 카베드) |
| 출 10:1 |
여호와 |
내가 그 마음을 완강하게 하였다 (כבד 카베드) + 구속사적 목적 |
| 출 10:20, 27; 11:10; 14:4, 8 |
여호와 |
완악하게 하심이 전경화 (חזק 하작) |
패턴이 보인다. 재앙 서사의 앞부분에서는 바로의 완악한 상태와 바로 자신의 완악하게 함이 주로 서술되고, 뒤로 갈수록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이 전면에 나온다. 그렇다고 후반의 신적 행위가 전반의 인간 행위를 취소하지 않고, 전반의 인간 행위가 서두의 신적 예고(4:21; 7:3)를 무효화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설교에서 흔히 듣는 설명 — "바로가 먼저 여러 번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했고, 하나님은 나중에 그것을 심판으로 굳히셨다" — 은 절반만 맞다. 내러티브의 진행 순서만 보면 근거가 있다. 하나님이 명시적 주어가 되는 9장 12절 이전에 바로 자신의 완악함이 거듭 서술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장 21절과 7장 3절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본문 전체를 가장 잘 보존하는 진술은 이 정도일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이 처음부터 존재한다. 동시에 그 목적이 역사 속에서 실현될 때 바로는 실제로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실제로 죄를 짓는다. 그리고 일정 시점 이후 내러티브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완악함을 직접 행하시는 것을 더욱 전면에 내놓으며, 이것을 바로의 반복된 죄와 거부 이후 나타나는 심판적 완악화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다【B. 추론】.
그렇다면 로마서 9장 18절은 출애굽기의 바로 완악함 전승을 압축해 제시한다고 할 수 있는가. 적어도 바울이 바로의 이름과 완악하게 하심을 불러올 때, 그 배후에는 한 절이 아니라 출애굽기의 전체 서사가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축약문을 "그러므로 바로 자신의 행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로 읽으면,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원본문 자체를 절단하는 셈이 된다. 원본문에는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과, 바로의 마음이 완악함과, 바로가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함과, 바로가 듣지 않음과, 바로가 죄를 지음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가 로마서 9–11장에서 발견한 구조와 놀라울 만큼 닮았다. 출애굽기: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신다 → 바로가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 → 바로가 듣지 않는다 → 바로가 죄를 짓는다 → 하나님이 그 완악함을 구속사적 목적에 사용하신다. 로마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9:18) →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거슬러 말한다(10:21) → 불신앙 때문에 꺾인다(11:20) → 불신앙에 머무르지 않으면 회복될 수 있다(11:23) → 하나님이 모두를 불순종 아래 두어 긍휼을 베푸신다(11:32).
결론은 이것이다. 바울에게 '두 행위 주체'는 새로운 철학적 발명이 아니다. 바울의 서술 방식은 토라에서 이미 발견되는 이중 행위자 구조와 깊이 연속되어 있다【B. 추론】. 토라는 이미 한 사건을 두 수준에서 말한다. 하나님이 하셨다. 그리고 인간도 실제로 했다. 그리고 둘 사이의 형이상학적 접합부를 설명하는 별도의 장을 쓰지 않는다. 출애굽기 저자는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셨는데 어떻게 바로도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 문제를 풀어 주지 않는다. 그냥 둘 다 말한다. 그리고 바로에게 죄책을 묻는다. 바울도 똑같다.
마지막으로, 출애굽기가 우리의 질문 자체를 교정해 주는 지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이야기를 따라 읽다 보면, "바로에게 자유의지가 있었는가?"라는 질문 — 곧 '모든 조건이 같아도 달리 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추상적 질문 — 이 본문의 관심과 미묘하게 어긋나 있음을 느끼게 된다. 본문이 계속 묻는 것은 이런 것이다. 바로는 누구의 말을 듣는가. 여호와를 누구라고 인정하는가. 이스라엘을 보낼 것인가. 하나님의 표징을 보고도 어떻게 반응하는가. 성경적 인간 행위의 핵심은 '언제나 열려 있는 대안적 가능성'보다 "그가 무엇을 원했고, 누구에게 순종했고, 실제로 무엇을 했으며, 그것에 책임이 있는가"에 가깝다. 이 관찰은 뒤에서 다시 중요해진다.
13. 토라에서 웨스트민스터까지 — 이야기가 체계가 되기까지
이제 지금까지의 발견을 한 줄에 놓을 수 있다.
토라는 두 행위 주체를 이야기 속에 병치한다.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셨다. 바로가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 설명 없이, 취소 없이. 바울은 토라의 이중 행위자 구조를 구속사적 논증 안에서 다시 사용한다.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이스라엘이 믿지 않고 불순종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송영이다. 초대교회는 각자의 전선에서 그 유산의 서로 다른 면을 지켰다 — 이레나이우스와 크리소스토무스는 운명론에 맞서 인간의 실제 응답을, 후기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에 맞서 은혜의 선행성과 효력을.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자들은 토라와 바울이 병치해 놓은 두 언어 '사이의 관계'를 묻기 시작했다. 믿음의 시작은 어디서 오는가. 은혜는 저항될 수 있는가. 그리고 웨스트민스터는 그 물음의 대답들을 작정, 자유의지, 유효한 부르심이라는 교리적 범주로 체계화했다.
이 사슬 위에서 12장의 발견은 WCF에 대한 평가를 한 번 더 정밀하게 만들어 준다. 앞서 우리는 WCF의 양립론적 설명을 조직신학적 구성【C. 구성】으로 분류했다. 그 분류는 유지하되, 이제 이렇게 덧붙여야 공정하다. 후대에 양립론적 언어로 체계화될 수 있는 방향 자체는 성경 본문 안에 이미 존재한다. 출애굽기가 이미 한 사건에 신적 결정과 진정한 인간 책임을 함께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WCF 3.1의 "피조물의 의지에 폭력이 가해지지 않으며 제2원인의 자유가 제거되지 않는다"는 문장은 17세기 철학을 성경에 덮어씌운 것만은 아니다. 출애굽기의 내러티브를 개념 언어로 풀어 쓴 측면이 분명히 있다. 다만 WCF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사실이다. 성경은 말한다 —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셨다. 바로가 완악하게 했다." WCF 3.1은 하나님의 작정과 피조물의 의지, 그리고 제2원인의 자유와 우연성을 함께 보존하는 방식으로 이 관계를 개념화한다.[^71] 바로 이 걸음에서 성경의 내러티브가 신학의 체계로 이동한다. 체계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체계와 원본문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사슬을 그리면서 두 가지 시대착오를 피해 가자. 첫째, 중세 가톨릭을 '면죄부와 공로주의'로만 환원하는 것. 사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예정을 다루며(제1부 23문) 예견된 공로가 예정의 원인이 아니라고 명시했고, 예정론의 이 지점에서 강한 아우구스티누스적 입장을 보였다.[^72] 종교개혁 직전의 문제는 '가톨릭 전체'라기보다, 후기 중세의 일부 *via moderna* 신학, 특히 가브리엘 비엘에게서 발전한 *facere quod in se est* 전통 — 인간이 자신에게 가능한 바를 행할 때 하나님이 언약에 따라 은혜를 베푸신다는 준비 사상 — 이었다. 이러한 후기 중세 은혜론은 루터가 초기부터 비판한 중요한 표적 가운데 하나였다.[^73] 둘째, 도르트와 웨스트민스터의 알미니안 비판을 근거로 알미니안을 펠라기우스로 환원하는 것 — 이것은 7장에서 이미 구별해 둔 지점이다. 역사를 정직하게 그려야 우리의 결론도 정직해진다.
그리고 이 사슬의 끝에서, 처음 질문이 다시 나타난다. 왜 같은 말씀을 다르게 읽는가. 성경은 먼저 이야기와 문장으로 긴장을 보존했고, 후대의 신학은 그 긴장 앞에서 각자의 시대가 던진 질문을 따라 체계를 만들었다. 이레나이우스의 신학적 응답,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 트리엔트의 교리적 정식화, 도르트의 교회적 판정, 웨스트민스터의 조직적 체계화. 어떤 체계는 본문에 더 충실하고 어떤 체계는 덜 충실하다 — 그 평가는 가능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체계도 본문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체계를 무엇으로 검증하는가. 이제 이 글의 방법론을 정면으로 말할 차례다.
14. Sola Scriptura는 Tota Scriptura를 요구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자주 오해된다. 그것은 오늘날 흔히 "Solo Scriptura"라고 비판적으로 부르는, 교회와 신앙고백과 교사의 역할을 사실상 불필요하게 만드는 개인주의적 성경주의를 뜻하지 않는다.[^74]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것을 가르친 적이 없다. 칼빈은 키프리아누스의 유명한 교회-어머니 전통을 이어받아, 《기독교강요》 4권 1장에서 교회를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로 부르고 그 품 밖에서 신앙의 양육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75] 개혁주의가 말하는 '오직 성경'은 교회를 부정하는 구호가 아니라, 오직 성경만이 오류 없는 최종 심판자라는 선언이다. 신학의 언어로 하면, 성경은 규범을 규정하는 규범(norma normans)이고, 신앙고백은 규범에 의해 규정되는 규범(norma normata)이다. 고백서는 실제적 권위를 갖지만 그것은 종속적 권위이며, 성경을 대신하는 권위가 아니라 성경을 섬기는 권위다.
놀라운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자신이 이 구조를 명문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1.9 —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이다" — 를 보았다.[^76] 그런데 31장은 더 나아간다. 공의회와 회의에 관하여 고백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도 시대 이후의 모든 공의회는, 총회든 지역회든,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많은 공의회가 실제로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신앙과 실천의 규칙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둘 다를 돕는 보조로 사용하여야 한다." (WCF 31장, 사역)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신도 오류 불가능한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는 회의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31.3의 원칙은 고백서 자체를 성경 아래에서 검증하는 일을 금지하지 않는다【B. 추론】. 우리가 이 글에서 수행한 작업 — WCF 3장의 증거본문 배열을 로마서 9–11장 전체로 검증하는 일 — 은 고백서를 배반하는 일이 아니라, 고백서 1.9와 31장이 명령하는 바로 그 일이다.
그러나 원칙과 실제 독서 습관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든 잘 정리된 교리 체계는 성경을 읽도록 돕는 지도인 동시에, 잘못 사용하면 성경을 펼치기 전에 결론을 먼저 결정하는 틀이 될 수 있다. 이 위험은 개혁파 전통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자체가 성경을 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후대의 교육과 논쟁 현장에서 고백서나 교리 공식이 성경 본문보다 먼저 기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후대 장로교 전통도 이런 종속 관계를 반복해서 명문화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secondary standards'로 받아들여졌고, 성경만이 유일한 오류 없는 신앙과 실천의 규칙으로 고백되었다. 고백서의 권위는 성경과 경쟁하는 독립적·무오한 권위가 아니라,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공적으로 고백하며 행사하는 종속적이고 사역적인 권위다. 따라서 그 권위는 언제나 말씀 아래 있으며 말씀에 의해 검증된다.[^77]
그런데 이 글의 여정은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보태 준다. Sola Scriptura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Tota Scriptura — 성경 전체다.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성경의 일부만 읽는다면, 그 일부에 대한 나의 전통적 독법이 사실상 최종 권위가 되어 버린다. 우리가 형광펜 실험에서 확인한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로마서 9장만 읽으면 하나의 그림이 나오고, 9–11장 전체를 읽으면 더 크고 더 역동적인 그림이 나온다. 이 원리는 양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로마서 9:18만 읽고 10:21을 지우는 것도 Tota Scriptura의 위반이고, 반대로 10:13의 "누구든지"만 읽고 9:11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를 지우는 것도 똑같은 위반이다. 선택의 본문으로 초청의 본문을 누르는 것도, 초청의 본문으로 선택의 본문을 누르는 것도, 둘 다 성경 전체보다 내 체계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글이 도달한 방법론적 결론은 이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백서를 버리는 것도, 고백서 뒤에 숨는 것도 아니다. 완성된 정경 전체가, 우리의 모든 부분적 독법과 전통적 체계를 — 웨스트민스터의 체계를 포함하여 — 끊임없이 교정하게 하는 것. 그것은 적어도 Sola Scriptura라는 개혁주의 원리와 가장 일관된 응답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방법론이 정리되고 나면, 미뤄 두었던 가장 깊은 질문이 마침내 정면으로 다가온다. 좋다 — 하나님은 의지를 폭력 없이 새롭게 하시고, 사람은 지극히 자유롭게 나아온다고 하자. 그런데 그 주권적이고 효력 있는, 그러면서도 의지를 파괴하지 않는 은혜의 궁극적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그렇게 일하시는가.
15. 은혜는 강제인가, 회복인가 — 하나님의 선한 본성이라는 근거
"하나님의 주권"에서 출발하면 논리는 이렇게 흐르기 쉽다. 하나님은 주권자다 → 원하시는 자를 택하신다 → 은혜를 효력 있게 베푸신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곧 질문이 남는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 선택은 단순히 절대자의 의지인가. "하나님이 주권자니까"만 반복하면, 자칫 하나님의 의지(voluntas)를 하나님의 본성(natura)에서 분리할 위험이 생긴다. 마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무관하게 임의로 무엇이든 의지하실 수 있는 절대 권력인 것처럼.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칼빈 자신이 이 오해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의의 최고 규칙이라고 말하면서도, 곧바로 덧붙인다 — 우리는 법도 없이 무엇이든 하는 '절대 권력'이라는 허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법 없는 분(exlex)이 아니시며,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 법이시다.[^78] 칼빈에게 하나님의 뜻은 어떤 외부의 법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뜻은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운 존재와 분리된 자의적 능력도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법이시며, 그의 뜻은 모든 악에서 자유롭고 의의 최고 규칙이다. 성경의 언어가 이것을 지탱한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시119:6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시25: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8)
주는 선하시다 — 그러므로 선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선하게 의지하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며,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롭게 판단하신다【B. 추론】. 예수께서도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 19:17) 하셨다. 그렇다면 주권적·효력적 은혜의 밑바닥에 놓아야 할 것은 벌거벗은 '의지'가 아니라 선하신 본성이다【B. 추론 — 이 명제 자체는 여러 본문의 종합에서 나온다】.
이 관점을 얻고 나면,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본문들이 한 번 더 새롭게 읽힌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파괴하지 않고 갱신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사람을 돌덩이처럼 끌고 가시는 대신 —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권면하시고, 성령으로 변화시키시고, 믿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는가. 그것이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인간의 의지를 파괴하지 않고 갱신하여 자발적으로 응답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타협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 인격적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방식 그 자체가 된다. 이 지점에서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은 더 이상 적대 관계가 아니다.
효력적 은혜(effectual grace)의 그림도 달라진다. 효력적 은혜를 이렇게 상상하면 문제가 생긴다 — 인간: "싫습니다." 하나님: "내가 주권자니까 네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믿게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WCF 10.1이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개혁파의 실제 모델은 이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죄 때문에 병들어 하나님을 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 인간을 치유하고 새롭게 하신다. 그래서 그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을 원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요한복음 강해에서 그린 그림이 정확히 이것이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각 사람은 자기의 즐거움에 이끌린다"(trahit sua quemque voluptas)라는 구절을 끌어와 말한다 — 아버지의 이끄심은 의지에 반하여 밧줄로 끌고 가는 폭력이 아니라, 마음이 그리스도 안의 진리와 의와 복됨을 기뻐하도록 이끄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사랑하는 자를 내게 데려오라, 그러면 그가 내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Da amantem, et sentit quod dico).[^79]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을 이 글의 언어로 요약하면, 은혜는 의지를 외적으로 꺾는 힘이라기보다 의지를 안에서 치유하고 새롭게 하는 힘이다. 은혜의 효력(efficacy)은 인간의 인격을 압도하는 능력이기 이전에, 인간의 인격을 회복시키는 선하심의 능력이다.
에스겔 36장과 신명기 30장도 이 빛 아래서 다시 읽힌다.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삭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병든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꾸신다 — 돌을 제거하고 살을 주신다. 그리고 신명기 30장 6절에서 마음의 할례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보라.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효력적 은혜의 종착점은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혜의 가장 깊은 논리는 지배(domination)가 아니라 교제(communion)다【C. 구성】. 하나님은 인간을 굴복시켜 로봇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과 언약적 사귐을 누릴 수 있도록 인간을 회복하신다.
선택(election)의 그림도 달라진다. 예정을 먼저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를 결정해 둔 명단"으로 상상하면 배타성의 문제가 맨 앞에 온다. 그러나 성경이 선택을 말할 때의 실제 문장 구조를 보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4)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9)
성경의 중요한 선택 본문들은 선택을 단순한 최종 목적지의 결정으로만 말하지 않고, 선택받은 자가 무엇이 되도록 하시는지 그 목적을 함께 밝히는 경우가 많다. 엡 1:4에서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이, 롬 8:29에서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이 그 목적이다. 선택은 단순한 목적지 배정(destination assignment)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목적(transformative purpose)을 가진 선택이다 — 아우구스티누스가 읽은 그대로, 거룩할 것을 미리 보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려고 택하신 것이다.[^80]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경계선을 분명히 긋자. '회복'과 '치유'의 언어가 개혁파 예정론을 물에 타서 흐리게 만드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 은혜가 회복이라는 말은, 선택이 특수하다는 사실이나 하나님의 심판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는다. 로마서 9장의 완악하게 하심과 진노의 그릇은 여전히 본문에 있다. 우리가 한 일은 주권을 부드러운 말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주권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물음에서, 나의 오랜 불링거 연구가 이 글과 만난다.
16. 불링거의 bonitas Dei — 하나의 연구가설
여기서부터는 글의 성격이 조금 달라진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지금까지는 성경 본문과 확립된 역사적 사실을 다루었다면, 이 장은 내가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의 《하나님의 유일하고 영원한 언약 혹은 유언에 관하여》(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et aeterno, 1534)를 독립적으로 연구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라난 하나의 연구가설을 다룬다. 층위로 말하면 전형적인 【C. 구성】이고, 그중에서도 아직 검증이 진행 중인 구성이다. 결론으로 읽지 마시고, 함께 검토할 물음으로 읽어 주시기 바란다.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후계자로 취리히 교회를 사십여 년 이끈 인물이다. 《De testamento》는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을 독립적 주제로 집중적으로 다룬 종교개혁기 최초기의 중요한 저술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며, 취리히 종교개혁 연구에서 그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81] 이 소책자에서 불링거는 창세기 17장의 아브라함 언약을 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관습과 연약함에 자신을 맞추어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 — 후대 신학의 용어로 말하면 accommodatio, 곧 신적 적응·자기 낮추심 — 을 강조한다.[^82] 그리고 그 언약의 출발점을 인간에게서 찾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제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약에 응하신 것이 아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죄로 타락한 유한한 인간에게 먼저 자신을 낮추어 언약을 맺으신 것 자체가, 불링거의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본성인 순전한 선하심(the sheer goodness which is God's nature)에서 나온 일이다.[^83] 그리고 그는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과 자비(misericordia)에서 나온다는 것을 신앙의 근본 자리에 놓는다.
이 대목을 번역하다가 나는 오래 멈춰 서 있었다. 우리가 15장에서 성경 본문으로부터 도달한 지점 — 주권적 은혜의 밑바닥에 놓인 것은 벌거벗은 의지가 아니라 선하신 본성이라는 것 — 을, 16세기 취리히의 개혁자가 언약론의 첫 페이지에서 이미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선하심의 언어가 언약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링거의 《50편 설교집》(Decades, 1549–51) 제4권의 섭리와 예정 설교를 보면, 그는 예정론이 잘못 다루어질 때 단순한 신자들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을 경고한다 —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시기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나를 멸망하도록 정해 두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 수업에서 나온 바로 그 정서 아닌가. 그런데 불링거의 목회적 처방은 감추어진 작정을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의 가치나 무가치에 달려 있지 않고 성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와 자비(mere grace and mercy of God the Father)에서 나오며,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구원의 확신은 감추어진 선택 명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라는 것이다[^84] — 그에게 믿음은 선택의 가장 확실한 표지다. 그가 기초한 《제2스위스 신앙고백》(1566) 10장도 같은 방향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값없이, 순전한 은혜로(freely, and of his mere grace), 아무런 인간적 조건 없이 성도들을 택하시되, 그 선택은 추상적인 절대 의지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o) 이루어졌다. 그리고 같은 장은 목회적 규칙을 덧붙인다 —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한 소망을 가져야 하며, 아무도 경솔하게 유기된 자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a 로마서 11장 23절 앞에서 우리가 도달했던 바로 그 제약이다.[^85] 눈여겨볼 것은 불링거에게 잘못된 예정론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인간의 자유'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더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게 만드는 예정론 — 신자가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을 아까워하시는 적대적 존재로 상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예정론에는 하나의 해석학적 통제 장치가 있다. 예정 교리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복음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운 성품과 충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의 연구 질문은 이렇게 세워진다.
불링거에게 bonitas Dei(하나님의 선하심)는 여러 속성 중 하나에 머무는가, 아니면 언약(covenant)뿐 아니라 선택(election), 인간의 응답(human response), 은혜의 효력(divine efficacy)까지를 생성하고 연결하는 더 근원적인 신학적 축인가?
이 질문을 논문 수준의 가설로 만들려면 반드시 해 두어야 할 구별이 하나 있다. "불링거가 bonitas Dei를 자기 신학의 공식적 중심 교리로 선언했다"는 주장과, "불링거의 여러 교리를 추적해 보면 bonitas Dei가 그것들을 생성하고 연결하는 심층 논리로 반복해서 작동한다"는 주장은 다른 주장이다. 전자를 지지할 증거는 내가 아는 한 없다. 내가 검증하려는 것은 후자다.
현재까지의 근거 상태를 영역별로 정직하게 적어 둔다. 언약에서는 상당히 확실하다. 《De testamento》 자체가 선하심 → 자비 → 자기 낮추심 → 언약 → 약속 → 믿음과 순종이라는 방향을 보여 주고, 최근 연구는 1534년 이후 불링거가 언약을 단순한 법적 계약(pactum)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과 사귐(societas, coniunctio)이라는 유기적 언어로 발전시켰음을 지적한다. 선택에서도 선하심의 언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방금 본 Decades와 제2스위스 신앙고백이 그 증거다. 인간의 응답에서는 신중해야 한다. 과거 베이커(J. Wayne Baker, 1980)의 연구는 불링거의 언약을 쌍무적·조건적으로 읽고, 그를 칼빈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개혁 전통'의 원조로 세웠다. *b 그러나 이 해석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베네마(Venema, 2002)는 불링거의 예정론과 언약론을 칼빈 및 후대 개혁파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개혁 전통'으로 읽는 베이커의 구도를 재검토했고, 오피츠(Opitz, 2004)는 이 연구를 비평적으로 검토했다.[^86] 힐데브란트(Hildebrand)의 최근 연구(2024)는 미출간 창세기 설교들을 근거로 언약과 선택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다시 복원하면서, 동시에 1534년 이후 불링거 신학에서 언약이 폭넓은 중심성(centrality of covenant)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c 그러므로 내가 물어야 할 것은 "불링거는 칼빈보다 인간의 자유를 높게 평가했는가" 같은 단순 비교가 아니라, 선행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가 인간의 믿음·사랑·순종이라는 실제 언약적 응답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가이다 — 우리가 성경 본문에서 발견한 바로 그 구조다. *d 은혜의 효력에서는 가장 신중해야 한다. 불링거가 은혜를 효력 없는 단순 제안으로 이해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는 타락한 인간에게 믿음과 사랑의 원천이 인간 자신일 수 없음을 명시했고,[^87] 제2스위스 신앙고백의 배열도 타락과 자유의지(8–9장), 예정과 그리스도(10–11장), 복음과 회개·회심(13–14장)을 차례로 다루어, 인간의 무능과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 믿음과 회심의 논의로 연결한다. 그러나 이것을 웨스트민스터의 '유효한 부르심'과 정확히 동일한 기제로 단정하면 불링거를 웨스트민스터화하는 시대착오가 된다. 여기는 원문 검증이 더 필요한 영역이다.
독립적 방증도 하나 있다. 불링거의 신론을 분석한 한 연구(2014)는 그의 창조론·섭리론·예정론 전체의 밑바닥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강조가 놓여 있다고 결론지었다.[^88] 언약 연구와 신론 연구가 서로 다른 길로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면, 두 흐름을 bonitas Dei라는 질문으로 교차시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연구 설계가 된다.
그렇다면 가설의 모양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처음에 나는 "선하심 → 언약 → 선택 → 은혜 → 응답"이라는 일직선 파이프라인을 생각했다. 그러나 불링거의 실제 본문들은 그보다 방사형 구조에 가까워 보인다. 하나의 중심에서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구조다.
BONITAS DEI — 하나님의 선하심 →
misericordia / gratia — 자비와 은혜
→ accommodatio — 인간에게 자신을 낮추어 알리심
→ foedus / testamentum — 언약
→ electio in Christo —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 promissio / evangelium — 약속과 복음
→ Spiritus / renovatio — 성령의 갱신
→ fides / amor / obedientia — 인간의 실제 응답인 믿음, 사랑, 순종
→ societas / coniunctio cum Deo — 하나님과의 사귐과 연합
이 도식의 개별 연결선은 앞으로 1차문헌으로 검증해야 할 연구항목이며, 현재는 작업모형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 가설의 가장 흥미로운 함의가 나온다. 힐데브란트가 논증하듯 불링거 신학을 조직하는 중심 개념이 언약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중심 개념'(central organizing concept)과 '궁극적 근거'(ultimate theological ground)는 같은 말이 아니다. 왜 언약인가 — 하나님께서 선하시므로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 주시기 때문이다. 왜 선택인가 —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인가 — 하나님의 은혜가 추상적인 비밀 의지가 아니라 구원자 안에서 계시되기 때문이다. 왜 인간의 응답이 진지하게 요구되는가 — 언약의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의 실제 사귐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들이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면, 다음의 명제를 작업가설로 세울 수 있다.
"언약은 불링거 신학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취하는 관계적 형식이다." (Covenant is the relational form of the divine goodness in Bullinger's theology.) 【C. 연구가설】
즉 언약이 중심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언약 그 자체도 더 깊은 곳 —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 주시는 그 선하심 — 에서 흘러나온다는 말이다.
과학적 가설이 그렇듯, 이 가설에도 반증 조건을 함께 세워 두어야 한다. 불링거의 저작 전체를 조사했을 때 다음 중 하나라도 확인되면 이 가설은 약해져야 한다. 첫째, bonitas가 언약론에서는 중요하지만 선택론과 섭리론에서는 주변적인 경우. 둘째, 선택의 궁극적 근거를 선하심과 무관한 절대 의지(voluntas absoluta)에 두는 본문이 발견되는 경우. 셋째, 인간의 믿음과 순종이 하나님의 선하심 및 은혜와 별개의 독립 원리로 작동하는 경우. 넷째, 후기 불링거에서 이 구조가 사라지는 경우. 반대로 1534년의 《De testamento》에서 1549–51년의 《Decades》, 1566년의 《제2스위스 신앙고백》, 그리고 후기 주석들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구조가 반복해서 확인된다면, 그때는 "불링거는 언약신학자였다"보다 한 층 더 깊은 명제를 제안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 나는 이 문장을 결론이 아니라, 검증할 가치가 매우 높은 작업가설(working thesis)로 잡는다. 그 이상을 주장하는 것은 이 글이 처음부터 경계해 온 바로 그 잘못 — 체계를 본문 위에 올려놓는 잘못 — 을 불링거 연구에서 반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가설이 우리의 두 수업 질문에 무엇을 주는지도 정확히 말해 두자. 이 가설이 성립한다면, 15장에서 성경 본문으로 그렸던 그림에 역사적 깊이가 더해진다. 그때 선택은 이렇게 서술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이며, 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하나님과의 언약적 사귐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은혜의 효력은 인간의 인격과 의지를 파괴하는 강제가 아니라, 죄에 매인 의지를 갱신하여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는 선한 회복이다.
'예정된 자들'이라는 말이 차갑게 들렸던 이유의 일부는, 예정이 마치 성품 없는 절대 권력의 명단 작성처럼 상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상상 속의 하나님과, 온종일 손을 벌리시고(롬 10:21), 돌 같은 마음 대신 살 같은 마음을 주시며(겔 36:26), 사랑하게 하시려고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는(신 30:6) 성경의 하나님은 같은 분이 아니다. 그러나 — 그리고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 장 전체가 부정직해진다 — 이 가설은 가장 어려운 질문을 풀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날카롭게 만든다.
17. 가장 어려운 반론 — 그 은혜가 왜 모두에게는 아닌가
이제 이 글이 끝까지 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질문 앞에 선다.
효력적 은혜가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의 표현이라면, 왜 하나님은 그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베풀지 않으시는가?
정직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뜻"을 앞세우는 대답은 이 질문 앞에서 비교적 이른 지점에 멈춤선을 그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대답이 게으르다는 뜻은 아니다 — 롬 9:20 자체가 그 멈춤선의 성경적 근거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15장과 16장에서 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앞세우면, 질문은 오히려 더 날카로워진다. 선하심은 본성상 어떻게 특정한 선택(particular election)과 관계하는가. 선하신 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왜 모두에게 하지 않으시는가. 이 무게를 회피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층위를 나누자.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이 명시적으로 답하는 것과, 개혁파 조직신학이 추론하는 것과, 신비로 남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첫째, 성경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들【A. 본문】. 성경은 하나님이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명시한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겔33:1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2:4)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동시에 성경은 멸망하는 자의 멸망을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랑의 방향에 돌린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9)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판단이 의로울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 아브라함의 기도가 그 확신 위에 서 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18:25)
또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은혜의 불균등한 분배에 항의하는 자에게 주어진 대답은 하나님의 선하심 그 자체였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20:15)
주목하라. 이 비유에서 주인의 자유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는 자유, 약속한 것보다 덜 주지 않으면서 어떤 이에게는 더 주는 자유다. 성경이 그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는 언제나 그런 종류의 자유다 — 누구에게도 불의하지 않으면서, 어떤 이에게 갚을 수 없는 선을 베푸는 자유.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11:35).
둘째, 개혁파 조직신학이 여기서 추론하는 것들【B/C】. 개혁신학은 이 본문들을 종합하여 대략 이렇게 정리해 왔다. 멸망하는 자는 자기 죄와 불신앙 때문에, 곧 공의에 따라 멸망한다 — 아무도 받아 마땅한 것보다 나쁜 것을 받지 않는다. 구원받는 자는 순전한 은혜로 구원받는다 — 아무도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은혜는 갚아야 할 빚이 아니며, 빚이 아닌 것을 모두에게 주지 않으신다고 해서 불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딤전 2:4 같은 본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모든 사람을 향한 진실한 복음의 초청과 기뻐하심)과 '작정하신 뜻'(실제로 이루기로 정하신 것)을 구별하는 설명이 제시되어 왔다. 이 구별은 성경의 두 계열 본문을 모두 보존하려는 진지한 시도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이것은 본문이 직접 주는 설명이라기보다 본문들을 함께 설명하기 위한 조직신학적 구성이며【C. 구성】,[^89] "왜 A에게는 주시고 B에게는 주지 않으시는가"라는 개별적 '왜'에는 여전히 답하지 않는다.
셋째, 신비로 남는 것. 바로 그 개별적 '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성경의 명시적 진술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개별적인 '왜'에 대해서는 이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WCF 3.7은 긍휼을 베풀기도 거두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뜻을 말할 뿐 개별적 이유를 제공하지 않고, 3.8은 이 교리를 특별한 신중함으로 다루라고 명한다.[^90] 바울은 어떤가. 로마서 9–11장의 그 긴 논증 끝에서 바울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메커니즘의 공개가 아니라 송영이었다. 그리고 모세는 이미 오래 전에 그 경계선을 그어 두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29:29)
감추어진 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했다. 그러나 이 구절의 강조점은 앞부분이 아니라 뒷부분이다 —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했고, 그것은 행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비는 우리를 사변의 미로가 아니라 순종의 길로 돌려보낸다.
다만 '신비'라는 말이 오용되지 않도록 두 가지를 분명히 하자. 첫째, 신비는 질문을 금지하는 딱지가 아니다. "신비니까 그만 물으라"는 말로 이 장의 질문들을 봉쇄한다면, 그것은 롬9:14과 9:19에서 반문을 스스로 기록하고 세 장에 걸쳐 대답한 바울보다, 그리고 자유의지에 한 장을 통째로 바친 웨스트민스터 총회보다 게으른 태도다. 신비의 자리는 논증의 앞이 아니라 끝이다 — 물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묻고,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안 다음에야 도달하는 자리. 둘째, 그러나 그 끝은 실제로 존재한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야말로 가장 비성경적인 기대다. 바울이 "깊도다"라고 외친 것은 논증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논증이 다다른 곳에서 본 것이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링거의 가설에 대해서도 같은 정직함을 유지하자. 16장의 가설은 이 신비를 해소하지 못한다. 그것이 하는 일은 다른 것이다. 그 가설은 신비의 성격을 바꾼다. "왜 모두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성품을 알 수 없는 절대 권력의 자의성 앞에서 묻는 것과, 온종일 손을 벌리시고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아들을 내어 주기까지 하신 분의 선하심 앞에서 묻는 것은 — 질문의 문장은 같아도 — 전혀 다른 경험이다. 전자의 신비는 공포이고, 후자의 신비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깊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서야 할 곳은 그 깊이 앞이다.
18. 깊도다 — 결론
긴 길을 걸었다. 이제 처음의 두 질문 앞으로 돌아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답으로 내어놓자.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가지를 함께 말한다. 하나님이 행하신다 — 택하시고, 이끄시고, 마음을 여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그리고 사람이 실제로 행한다 — 원하고, 믿고, 오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또한 믿지 않고, 거스르고,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그 모든 것에 실제로 책임을 진다. 토라는 이 둘을 바로의 이야기 속에 설명 없이 병치했고, 바울의 로마서 9–11장 논증은 토라에서 이미 보았던 이중 행위자 구조와 깊은 연속성을 보이며,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9:18)과 이스라엘의 불순종(10:21)과 불신앙으로 인한 꺾임(11:20)과 회복의 가능성(11:23)과 모두를 향한 긍휼(11:32)을 한 논증 안에 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자들은 그 두 언어 사이의 관계를 물었고, 웨스트민스터는 그 대답을 작정과 자유의지와 유효한 부르심이라는 범주로 체계화했다. 그 체계는 성경에 깊이 뿌리내린 훌륭한 체계다. 그러나 어떤 체계도 — 웨스트민스터의 체계조차 — 성경 본문 그 자체를 대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오직 성경'은 '성경 전체'를 요구한다. 9:18과 함께 10:21을, 9:22와 함께 11:23을, 선택의 본문과 함께 초청의 본문을 읽는 것 — 그것은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라고 한 WCF 1.9의 원리를 이 문제에 적용하는 한 방식이다.[^91]
이제 두 질문에 차례로 답하자.
"예정된 자들이라고 하면 배타적으로 느껴진다." 그 느낌은 오해가 아니다. 성경과 고백서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하고, 실제로 선택의 특수성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 특수성은 성품 없는 권력의 명단 작성이 아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선택은 선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하시고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같은 성경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선포하시고, 순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온종일 손을 벌리시며,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도 유기된 자로 단정할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 예정 교리가 어떤 사람을 향해 "당신은 아마 아닐 것"이라고 속삭이는 데 쓰인다면 그것은 이 교리의 오용이다. 이 교리의 성경적 용도는 정반대다 — 믿는 자에게는 "네 구원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하나님의 선물이니 아무것도 너를 그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위로가 되고, 아직 믿지 않는 자를 향해서는 "하나님께는 그를 접붙이실 능력이 있다"는 소망으로 기도하고 전도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이 뭐가 있는가." 정확히 답하면 이렇다. 구원의 근거로 말하면 — 없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다. 내 구원이 내 의지의 성능에 근거했다면 나는 단 하루도 확신 속에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삶으로 말하면 — 전부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나를 아바타처럼 조종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내 대신 믿어 주시지 않는다. 내가 믿고, 내가 회개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순종한다. 다만 내가 그렇게 기꺼이 원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 의지를 새롭게 하셨다. "그들은 지극히 자유롭게 나아오니,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WCF 10.1). [^92]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개인적인 질문 — "내가 믿은 것인가, 하나님이 믿게 하신 것인가?" — 에 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원인과 응답을 구별해서 말하면 둘 다다. 그리고 그 순서가 복음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먼저 내 마음과 의지를 새롭게 하셔서 믿게 하셨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내가 믿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심 → 의지가 새로워짐 → 내가 기꺼이 믿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1:29)
엡 2:8은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구원 전체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하고, 빌1:29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은혜로 주어졌다고 더욱 직접적으로 말한다.[^93] 믿음은 나의 행위이면서 하나님의 선물이다. 루디아가 정말로 들었고 정말로 따랐지만, 그 마음을 여신 분은 주님이셨다(행16:14).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 — 믿었다(행13:48).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관하여, 나는 이 글의 끝에서 하나의 가설을 열린 채로 남긴다. 인간의 의지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그 의지를 되살리고 새롭게 하여 기꺼이 당신께로 나아오게 하시는 이 주권적이고 효력 있는 은혜의 궁극적 근거는, 벌거벗은 절대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bonitas Dei)이 아닐까. 그리고 언약이란, 불링거의 여러 본문을 따라 제안해 보자면, 그 선하심이 역사 속에서 취하는 관계적 형식이 아닐까. 이것은 아직 검증 중인 작업가설이며, 《De testamento》와 《Decades》와 《제2스위스 신앙고백》을 관통하는 원문 연구로 확인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가설이 설령 확증되더라도, "왜 그 선하신 은혜가 모두에게는 아닌가"라는 가장 어려운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나는 그 질문을 봉합하지 않은 채로 이 글을 닫는다. 다만 그 질문을 들고 서 있는 자리가 달라졌기를 바란다 — 성품을 알 수 없는 권력 앞이 아니라, 온종일 손을 벌리시는 선하신 하나님 앞에.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이제 예정론의 모든 문제가 풀렸다"고 느끼신다면, 그것은 내가 글을 잘못 쓴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실제 응답을 얼마나 풍성하게, 얼마나 두려움 없이 함께 말하고 있는지를 — 조금 더 보게 되셨기를. 그리고 그 풍성함 앞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이라는 가장 아픈 질문을 세 장에 걸쳐 정면으로 다룬 바울이 마지막에 도달했던 그 자리에, 우리도 함께 도달하기를. 그 자리는 대답의 포기가 아니다. 물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물은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경배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11:33–36)
각주
[^1]: Westminster Assembly,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10.1, hosted by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Confession of Faith," https://opc.org/wcf.html.고백서는 유효한 부르심에서 하나님이 피택자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renewing their wills) 그리스도께 효력 있게 이끄시되, 그들이 "지극히 자유롭게 나아오며,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원하게 된다"(they come most freely, being made willing by his grace)고 진술한다.
[^2]: Athanasius of Alexandria, "Thirty-Ninth Festal Letter" (367), secs. 4–7, especially sec. 5, trans. Archibald Robertson,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2nd ser., vol. 4, ed.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92), https://www.newadvent.org/fathers/2806039.htm.이 서신 5절은 사복음서, 사도행전, 일곱 공동서신, 바울서신 14권, 요한계시록을 열거하고, 6절은 이 책들만을 구원의 샘으로 부르며, 7절은 정경 밖이지만 교훈을 위해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별도로 구분한다. 다만 이것이 367년에 모든 지역 교회의 신약 정경 논쟁이 종료되었다는 뜻은 아니며, 오늘날 연구는 이 서신을 정경 형성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중요한 이정표로 본다.
[^3]: Eusebius of Caesarea, *Ecclesiastical History* 3.25, trans. Arthur Cushman McGiffert,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2nd ser., vol. 1, ed.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90), https://www.newadvent.org/fathers/250103.htm.유세비우스는 아타나시우스보다 앞서 "인정된 책"(homologoumena)과 "논쟁되는 책"(antilegomena)을 구별하면서 야고보서·유다서·베드로후서·요한이서·삼서 등을 후자에 넣었고,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고 적었다.
[^4]: Bruce M. Metzger, "Patristic Evidence and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New Testament Studies* 18, no. 4 (1972): 379–400, especially 379. 메츠거는 신약 본문비평의 증거를 그리스어 사본, 고대 역본, 교부 인용으로 나눈 뒤, 그 가운데 교부 인용이 가장 큰 어려움과 문제를 수반한다고 지적한다.
[^5]: 제2성전기에는 성경의 권위가 강화되는 동시에 그 권위 있는 전승을 해석하고 다시 쓰고 적용하는 서기관 문화가 매우 활발했으며, 쿰란 문헌은 동일한 성경 전승이 문자적·해석적·종파적으로 다양하게 적용된 사례를 잘 보여 준다. Molly M. Zahn, *Genres of Rewriting in Second Temple Judaism: Scribal Composition and Transmiss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especially 196–226; Jonathan G. Campbell, "Scriptural Interpretation at Qumran," in *The New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vol. 1, *From the Beginnings to 600*, ed. James Carleton Paget and Joachim Schap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242–266.
[^6]: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반에는 아우구스티누스, 키프리아누스, 크리소스토무스, 베르나르 등 고대·중세 저자들이 빈번하게 인용된다. 예컨대 교회론을 다루는 4권 1장에서도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직접 원용한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1, trans. Henry Beveridge (1845),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institutes.
[^7]: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ed. Michael W. Holmes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Logos Bible Software, 2010), John 6:37, 44–45. 37절의 ἥξει는 미래 능동 직설법 3인칭 단수이며, 44–45절은 οὐδεὶς δύναται ἐλθεῖν("아무도 올 수 없다")과 πᾶς … ἔρχεται("…하는 사람마다 온다")를 나란히 놓는다.
[^8]: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Phil. 2:12–13. κατεργάζεσθε는 현재형 2인칭 복수 명령이며, 13절의 γάρ가 그 명령에 근거를 잇는다. ὁ ἐνεργῶν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역사 범위는 τὸ θέλειν과 τὸ ἐνεργεῖν, 곧 "원함"과 "행함" 모두에 미친다.
[^9]: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d. Karl Elliger and Wilhelm Rudolph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97), Deut. 10:16; 30:6, 19. 신 30:6의 וּמָל יְהוָה אֱלֹהֶיךָ אֶת־לְבָבְךָ에서는 YHWH가 마음의 할례를 행하시는 명시적 주어이고 이어지는 לְאַהֲבָה가 "사랑하도록"이라는 목적·결과 방향을 나타내는 반면, 신 10:16에서는 이스라엘 자신에게 마음의 할례가 명령되고, 신 30:19에서는 다시 "생명을 택하라"는 명령이 이어진다.
[^10]: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Matt. 11:25–28. 헬라어 본문에서도 ἔκρυψας/ἀπεκάλυψας("감추셨다/나타내셨다")와 아버지의 εὐδοκία가 먼저 진술되고 두 절 뒤에 Δεῦτε πρός με πάντες("다 내게로 오라")가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두 교리를 철학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태가 두 언어를 동일한 단락 안에 실제로 병치한다는 사실이다.
[^1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7 and accompanying proof texts. 3.7의 증거본문 배열은 하나님의 "지나치심"(passing by)과 긍휼을 베풀거나 거두시는 자유를 뒷받침하는 본문군에 마 11:25–26을 포함한다.
[^12]: Irenaeus of Lyons, *Against Heresies* 1.6.1–2, trans.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in *Ante-Nicene Fathers*, vol. 1, ed.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5), https://ccel.org/ccel/irenaeus/against_heresies_i/anf01.ix.ii.vii.html. 이레나이우스는 발렌티누스파가 물질적(hylic)·혼적(psychic)·영적(pneumatic) 인간을 구별하고 영적 부류가 행위가 아니라 본성 때문에 구원된다고 가르친다고 비판적으로 보고한다.
[^13]: Irenaeus, *Against Heresies*, 4.37.1, 4–5,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437.htm. 이레나이우스는 인간이 처음부터 자유로운 행위자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종하도록 지음받았으며, 믿음과 불신앙에도 인간의 실제 의지가 관련된다고 논한다.
[^14]: John Chrysostom, *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 46, on John 6:44–45, trans. Philip Schaff,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14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46.htm.크리소스토무스는 마니교도들이 이 구절을 들어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고 직접 소개한 뒤, 이 말씀은 자유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큰 도움을 필요로 함을 보여 준다고 답한다. 그는 이끄심이 원하지 않는 자를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45절의 "다"를 기꺼이 배우려는 자들로 읽는다.
[^15]: John Chrysostom, *Homilies on Romans* 16, on Rom. 9:14–24, trans. J. B. Morris, W. H. Simcox, and George B. Stevens,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11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9), https://www.newadvent.org/fathers/210216.htm.크리소스토무스는 토기장이 비유가 자유의지를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명시하며, 바로의 경우를 그 자신의 완고함과 연결하는 동시에 위로부터 오는 은혜의 필요를 함께 말한다.
[^16]: Augustine, *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1.3, recalling his earlier treatment in *To Simplicianus* and his later *Retractations*, trans. Peter Holmes and Robert Ernest Wallis,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5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7), https://www.newadvent.org/fathers/15121.htm.아우구스티누스는 심플리키아누스에게 보낸 글에서 이 문제와 씨름하던 시기를 돌아보며 자유로운 선택을 위해 애썼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이겼다고 회고하고, 고전 4:7을 자신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결정적 증언으로 든다.
[^17]: Augustin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1.3. 후기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의 증가만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정면으로 논증한다.
[^18]: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26.4–5, on John 6:44–45, trans. John Gibb and James Innes,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st ser., vol. 7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1888), 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26.htm.아우구스티누스는 이끌림이 의지에 반하여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사람이 사랑과 즐거움에 이끌린다고 설명한다.
[^19]: Augustin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1.35–36, https://www.ccel.org/ccel/schaff/npnf105.xxi.ii.xxxvii.html. 그는 엡 1:4를 주해하며 우리가 장차 거룩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도록 택하셨다고 직접 논증한다.
[^20]: Desiderius Erasmus, *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latio* (Basel, 1524) [판본 확인 필요]; Martin Luther, *De servo arbitrio* (Wittenberg, 1525). 영역본은 Martin Luther, *The Bondage of the Will*, trans. Henry Cole (T. Bensley, 1823), https://ccel.org/ccel/luther/bondage/bondage.html.
[^21]: Martin Luther, *The Bondage of the Will*, secs. LVII, LXV, trans. Henry Cole (T. Bensley, 1823), https://ccel.org/ccel/luther/bondage.xi.xvii.html. 루터는 신 30장의 "택하라," "돌이키라," "지키라" 등의 명령형에서 인간의 영적 능력을 추론하는 에라스무스의 논리를 거부한다. 모세는 명령할 뿐 "너에게 선택할 능력과 힘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성경의 명령·권고·책망이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이지 은혜 없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2]: Luther, *Bondage of the Will*, sec. [locator 확인 필요]. 루터의 "아래의 것들 / 위의 것들" 구별에서 인간은 창조세계의 하위 사물과 시민적 행위에 대해서는 제한된 자유를 행사하지만,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영적 선에서는 스스로를 하나님께 돌이킬 능력을 갖지 못한다.
[^23]: Calvin, *Institutes*, 2.3.5,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iv.iv.html. 칼빈은 타락으로 인간이 의지 자체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의지의 건전함"(soundness of will)을 상실했다고 설명하고, 죄를 짓는 필연성(necessity)을 외부의 강압적 강제(compulsion)와 구별한다. 그는 바로 이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의 필연적 속박 논의를 언급하고, 이어 베르나르의 "자발적 필연성"(voluntary necessity) 논의를 길게 인용한다.
[^24]: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on John 6:44–45, trans. William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https://ccel.org/ccel/calvin/calcom34/calcom34.xii.vii.html.칼빈은 44절의 "이끄심"을 외적 강제가 아니라 성령께서 지성을 밝히고 마음을 순종으로 빚으시는 강력한 역사로 이해하며, 이 역사가 이전에 원하지 않고 주저하던 자를 기꺼이 원하는 자로 만든다고 설명한다. 45절의 하나님의 가르침 역시 외적 음성만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역사와 마음의 내적 조명을 포함한다고 해석한다.
[^25]: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on Matt. 23:37, trans. William Pringle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3.all.html.칼빈은 예루살렘의 거부를 실제적이고 유죄한 거부로 해석하면서도, 이 역사적·외적 부르심의 거부를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목적의 실패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26]: Synod of Dort, *The Canons of Dort* (1619), introduction and Heads I–V, https://www.ccel.org/creeds/canons-of-dort.html.1610년 항론파의 다섯 조항에 대한 개혁교회의 공식적 대응이 도르트 총회의 신조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보다 약 30년 뒤에 작성되었다. 도르트의 조항 배열 자체가 항론파의 논점을 순서대로 반박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27]: The Remonstrants, "The 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1610), art. 3, https://evangelicalarminians.org/the-five-articles-of-remonstrance/.제3조는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게서 또는 자유의지의 힘에서 나오는 구원하는 은혜가 있음을 부정하며,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참된 선을 생각하거나 원하거나 행할 수 없고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 이해·성향·의지와 모든 능력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명시한다.
[^28]: Jacobus Arminius, "Grace and Free Will," in *The Works of James Arminius*, trans. James Nichols and William Nichols, vol. 2 (Longman, Hurst, Rees, Orme, Brown, and Green, 1828) [판본 통일 필요], https://www.ccel.org/ccel/arminius/works2.html. 아르미니우스는 자유의지가 은혜 없이는 어떠한 참되고 영적인 선도 시작하거나 완성할 수 없다고 하고, 자신이 말하는 은혜가 단순한 자연적 도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중생에 속한 은혜로서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움직인다고 명시한다.
[^29]: Remonstrants, "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art. 4. 제4조는 선행하는(prevenient), 돕는, 깨우는, 뒤따르는, 협력하는 은혜를 명시하며 모든 선한 움직임을 하나님의 은혜에 귀속시킨다.
[^30]: Remonstrants, "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art. 4. 제4조는 은혜의 작용 방식이 불가항력적이지 않다고 명시하며, 사람이 성령을 거스를 수 있다는 사도행전 7장의 언어를 근거로 든다.
[^31]: Synod of Dort, *Canons of Dort*, Third and Fourth Heads of Doctrine, arts. 11–12, 16. 11조는 성령께서 닫힌 마음을 열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의지에 새로운 성질을 부어 죽은 의지를 살리시고 악하고 반역적인 의지를 선하고 순종적인 것으로 만드신다고 진술한다. 12조는 이 중생이 단순한 외적 설교나 도덕적 설득이 아니며 하나님이 자기 몫을 한 뒤 최종 결정을 사람에게 남기는 방식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것이 확실하고 무오하며 효력 있게(certainly, infallibly, and effectually) 이루어져 그들이 실제로 믿게 된다고 말한다. 동시에 16조는 이 은혜가 사람을 나무토막이나 돌덩이처럼 다루거나 의지를 없애거나 의지에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32]: Arminius, *Works of James Arminius*, vol. 1, response to Article XXVII, https://ccel.org/ccel/arminius/works1/works1.iv.xxiv.html.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이 믿음을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부분적으로 자유의지"에 의존시키는 것으로 묘사된 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33]: Remonstrants, "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art. 1; Synod of Dort, *Canons of Dort*, First Head of Doctrine, arts. 7, 9. 항론파 제1조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과 순종 안에 끝까지 머무는 자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고 진술한다.
[^34]: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1. 원문은 "nor is violence offered to the will of the creatures; nor is the liberty or contingency of second causes taken away, but rather established"이다.
[^35]: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5, 3.7. 3.5는 선택이 오직 값없는 은혜와 사랑("free grace and love alone")에 근거하며 믿음이나 선행을 미리 보셨기 때문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반면, 3.7은 지나치심(passing by)과 정죄를 말하면서 "for their sin"을 명시한다.
[^36]: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8.
[^37]: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9.1. 원문은 의지가 "neither forced, nor, by any absolute necessity of nature determined, to good or evil"이라고 진술한다.
[^38]: 개혁파의 자유 이해를 현대 철학 용어로 양립론이라 분류하는 논의,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전통을 현대의 특정 자유 이론과 그대로 동일시하는 데 대한 경고로는 Oliver D. Crisp, "Libertarian Calvinism," in *Free Will and Classical Theism: The Significance of Freedom in Perfect Being Theology*, ed. Hugh J. McCann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112–130을 보라. 크리스프는 WCF와 양립 가능한 "자유지상주의적 칼빈주의"의 가능성까지 검토한다.
[^39]: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9.3 and Scripture proofs. 증거본문 배열은 9.3에 요 6:44, 65 등을 연결한다. 다만 증거본문은 고백서 본문 자체와 동일한 지위를 갖지 않으며 판본별 차이가 있다.
[^40]: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9.4 and Scripture proofs.
[^4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0.1. 고백서는 유효한 부르심을 "renewing their wills," "determining them to that which is good," "effectually drawing them to Jesus Christ"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most freely" 나아온다고 명시한다.
[^42]: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0.1, Scripture proofs, https://opc.org/confessions.html.
[^43]: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0.2.
[^44]: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chap. 3, Scripture proofs. 이 글의 증거본문 분석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제출한 배열을 기준으로 한다(각주 52 참조).
[^45]: Pablo T. Gadenz, *Called from the Jews and from the Gentiles: Pauline Ecclesiology in Romans 9–11* (Mohr Siebeck, 2009). 현대 연구는 흔히 9:1–5를 서론, 11:33–36을 송영으로 하여 9:6–29; 9:30–10:21; 11:1–32의 세 단락으로 구획한다.
[^46]: Gadenz, *Called from the Jews and from the Gentiles*, 9–11장 개관. 여러 현대 주석이 9:6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를 9–11장 전체의 문제제기로 읽고 9:6–11:32를 그 답변으로 정리한다.
[^47]: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Jer. 18:1–10, especially vv. 4, 7–10.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망가지자 다른 그릇으로 다시 만들어지고(18:4), 뽑고 파괴하겠다고 선언된 나라라도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이 돌이켜지며(18:7–8), 반대로 복이 선언된 나라가 악을 행하면 복이 돌이켜진다(18:9–10).
[^48]: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9:22–23. 22절의 κατηρτισμένα는 명시적 행위자가 표현되지 않은 완료 수동 분사이고, 23절의 προητοίμασεν은 하나님을 문맥상의 주어로 하는 부정과거 능동 직설법이다. κατηρτισμένα의 태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는 Daniel B. Wallace, *Greek Grammar Beyond the Basics: An Exegetical Syntax of the New Testament* (Zondervan, 1996), 417–18을 보라.
[^49]: Gadenz, *Called from the Jews and from the Gentiles*, Rom. 9:30–10:21 논의. 현대 연구의 공통 구획도 이 단락을 별도 단위로 잡으며, 이 부분의 요지를 이스라엘이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다는 것으로 요약한다.
[^50]: Cf. Deut. 29:4 and Isa. 29:10 in Rom. 11:8.
[^51]: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11:25. ἀπὸ μέρους는 완악함이 "부분적으로" 일어났음을, ἄχρι οὗ는 그것을 "~하기까지"라는 시간 구조 안에 놓음을 나타낸다. 다만 이스라엘의 이후 구원에 대한 정확한 함의는 주해상 논쟁이 계속된다.
[^52]: Westminster Assembly, *Confession of Faith*, chap. 3, Scripture proofs. 3.1과 3.8은 롬 11:33을, 3.8은 또한 롬 11:5–6과 11:20을 사용한다. 로마서 9장은 3.1·3.2·3.3·3.5·3.7·3.8에 걸쳐 광범위하게 쓰이는 반면, 로마서 11장의 사용은 이 세 곳에 집중된다.
[^53]: Westminster Assembly, *The Confession of Faith of the 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chap. 3, with the Assembly's Scripture proofs, in S. W. Carruthers, ed.,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Being an Account of the Preparation and Printing of Its Seven Leading Editions, to Which Is Appended a Critical Text of the Confession with Notes Thereon* (R. Aikman & Son, 1937), https://www.westminsterconfession.org/resources/confessional-standards/the-confession-of-faith-of-the-westminster-assembly-of-divines/. 총회는 1646년 완성판에는 증거본문을 붙이지 않았고, 의회의 요구에 따라 1647년 1월부터 이를 심의하여 4월 29일 증거본문이 포함된 고백서를 제출했다. 증거본문은 고백서 본문과 동일한 문학적·교리적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며, 각 조항을 어떤 성경 본문으로 뒷받침했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적 자료다.
[^54]: Westminster Assembly, *Confession of Faith*, chap. 3, Scripture proofs. 롬 9:30–10:21은 총회가 제3장에 부착한 증거본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55]: Westminster Assembly, *Confession of Faith*, 3.8, Scripture proofs: Rom. 11:5–6, 20; 2 Pet. 1:10; Rom. 8:33; Luke 10:20.
[^56]: Westminster Assembly, *Confession of Faith*, chap. 3, Scripture proofs. 롬 11:20은 3.8에 인용되지만, 롬 11:23은 제3장 어디에도 인용되지 않는다.
[^57]: Westminster Assembly, *Confession of Faith*, 1.9. 원문은 "The infallible rule of interpretation of Scripture is the Scripture itself"로 시작한다.
[^58]: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9:18. θέλει, ἐλεεῖ, σκληρύνει는 모두 현재 능동 직설법 3인칭 단수이며, 생략된 주어는 앞 문맥의 하나님이다.
[^59]: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10:21. ἐξεπέτασα는 부정과거 능동 직설법 1인칭 단수이고, ἀπειθοῦντα와 ἀντιλέγοντα는 λαόν을 수식하는 현재 능동 분사다.
[^60]: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11:20. ἐξεκλάσθησαν은 부정과거 수동 직설법 3인칭 복수이고 ἕστηκας는 완료 능동 직설법 2인칭 단수이며, τῇ ἀπιστίᾳ와 τῇ πίστει는 각각 꺾임과 서 있음에 대한 여격이다.
[^61]: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11:23. ἐπιμένωσι는 현재 능동 접속법 3인칭 복수, ἐγκεντρισθήσονται는 미래 수동 직설법 3인칭 복수이며, 이어지는 절은 하나님을 πάλιν ἐγκεντρίσαι αὐτούς("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는 분으로 명시한다.
[^62]: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Rom. 11:32. συνέκλεισεν은 ὁ θεός를 명시적 주어로 하는 부정과거 능동 직설법 3인칭 단수이고, 이어지는 ἵνα절의 ἐλεήσῃ는 같은 주어를 갖는 부정과거 능동 접속법 3인칭 단수다.
[^63]: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4:21; 7:3; 8:15; 10:1. 완악함 서사는 חזק, כבד, קשה 세 어근의 형태들을 사용한다. 출 4:21의 אֲחַזֵּק은 Piel 미완료 1인칭 단수, 출 7:3의 אַקְשֶׁה는 Hiphil 미완료 1인칭 단수다.
[^64]: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4:21; 7:3. 두 본문 모두에서 하나님은 예고된 완악하게 하심의 명시적 1인칭 주어다.
[^65]: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7:13–14, 22; 8:19. "마음이 굳어졌다"는 상태 서술은 "바로가 스스로 굳혔다"는 능동 행위와 구별된다.
[^66]: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8:15, 32. 8:15의 וְהַכְבֵּד은 כבד의 Hiphil 부정사 절대형으로, 앞의 וַיַּרְא("바로가 보았다")의 주어를 이어받아 그가 자기 마음을 무겁게 했음을 서술한다. 8:32에서는 바로가 명시적 주어다.
[^67]: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9:12. 재앙 사건의 진행을 서술하는 내러티브 안에서 YHWH가 완악하게 하는 동사의 명시적 문법 주어로 등장하는 첫 사례다(וַיְחַזֵּק יְהוָה אֶת־לֵב פַּרְעֹה).
[^68]: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9:34–35.
[^69]: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10:1–2. הִכְבַּדְתִּי는 Hiphil 완료 1인칭 단수이며, 이어지는 לְמַעַן 절들이 완악하게 하심을 YHWH의 표징을 보이는 일 및 그것을 후대에 전하는 일과 연결한다.
[^70]: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Exod. 10:1; 14:4. 10:1의 완악하게 하는 동사 הִכְבַּדְתִּי와 14:4의 영광을 얻으시는 동사 וְאִכָּבְדָה는 같은 어근 כבד에서 나온다.
[^7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1.
[^72]: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 q. 23, a. 5, "Whether the Foreknowledge of Merits Is the Cause of Predestination?" https://www.newadvent.org/summa/1023.htm.아퀴나스의 답은 명백히 부정이다. 그는 예정의 효과 전체가 우리에게서 나오는 어떤 원인에 의존할 수 없다고 설명하며, 은혜를 위한 준비(preparation for grace) 자체도 하나님의 도움 아래 있다고 본다. 나아가 그는 예정의 효과 전체의 이유를 하나님의 선하심(the goodness of God)에 둔다.
[^73]: *via moderna*의 배경과 루터에게서 가브리엘 비엘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Volker Leppin, "Nominalism and the Via Moderna in Luther's Theological Work," in *Oxford Research Encyclopedia of Relig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7)을 보라. 루터는 에르푸르트에서 이 전통 아래 교육받았고 이후 비엘의 은혜론을 주요 비판 대상으로 삼았다. 다만 *facere quod in se est*를 후기 중세 전체의 단일 공식으로 평면화해서는 안 되며, 아퀴나스·비엘·루터가 이 표현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는 연구도 있다.
[^74]: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6–1.10; Calvin, *Institutes*, 4.1. "Solo Scriptura"는 종교개혁 당시의 공식 표어가 아니라, 오늘날 개인주의적 성경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분석적 표현에 가깝다.
[^75]: Cyprian of Carthage, *On the Unity of the Church* 6, in *Ante-Nicene Fathers*, vol. 5, https://biblehub.com/library/cyprian/the_treatises_of_cyprian/treatise_i_on_the_unity.htm; Calvin, *Institutes*, 4.1.4–5, https://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vi.ii.html. 교회를 어머니로 갖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는 격언의 고전적 출처는 키프리아누스이며, 칼빈은 4권 1장에서 이 모성 이미지를 계승한다.
[^76]: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9; 31.3.
[^77]: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1.2–3. 31.2는 총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할 경우(consonant to the Word of God) 경외와 복종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하면서, 그 회의체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라는 데서 오는 사역적 권위도 함께 말한다. 후대 장로교 전통 역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secondary standards"로, 성경을 유일한 오류 없는 신앙과 실천의 규칙으로 규정해 왔다.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Confession and Catechisms," https://opc.org/confessions.html.
[^78]: Calvin, *Institutes*, 3.23.2, https://ccel.org/ccel/calvin/institutes/institutes.v.xxiv.html.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의의 최고 규칙(supreme rule of righteousness)이라 하면서도, 이로써 법 없이 무엇이든 하는 "절대 권력"이라는 허구를 승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못박는다. 하나님은 법 없는 분(exlex)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법이시며, 그의 뜻은 모든 악에서 자유로운 "모든 법의 법"이다.
[^79]: Augustine, *Tractates on John*, 26.4, https://www.ccel.org/ccel/schaff/npnf107.iii.xxvii.html. 아우구스티누스는 요 6:44에 대해 "네가 네 뜻에 반하여 이끌린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며, 사람이 의지뿐 아니라 사랑과 기쁨(delight)에 의해서도 이끌린다고 설명한다. 그는 베르길리우스 *Eclogue* 2.65의 *trahit sua quemque voluptas*를 인용한 뒤, 이 이끌림이 필연이 아니라 기쁨이며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이라고 풀이하고, "사랑하는 자를 내게 데려오라, 그러면 그가 내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80]: Augustin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1.35–36.
[^81]: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11–202, esp. chs. 3–4. 힐데브란트는 1534년의 《De testamento》를 언약에 전적으로 바쳐진 저술로 확인하고 취리히 언약신학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본다.
[^82]: Bullinger, *De testamento*, fols. [확인 필요]. 불링거는 하나님이 인간의 언약 관습에 따라 행하셨다고 말한다. 다만 그가 이 문맥에서 명사 *accommodatio*를 기술용어로 사용했는지와, 후대 신학이 이를 신적 적응으로 명명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83]: Heinrich Bullinger,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et aeterno* (Zurich: Christoph Froschauer, 1534), fol. [folio 확인 필요 — 소장 라틴 원문 기준으로 고정할 것]. 불링거는 인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인 순전한 선하심 때문에 하나님이 언약을 제시하신다고 말하며, 같은 문맥에서 우리 종교의 기원이자 첫째 요점은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과 자비(misericordia)에서 나온다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영역 대조는 Charles S. McCoy and J. Wayne Baker, *Fountainhead of Federalism: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al Tradition*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1), 103–4 참조.
[^84]: Heinrich Bullinger, *The Decades*, sermon on God's providence and predestination, trans. H. I., ed. Thomas Hard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for the Parker Society, 1849–52) [decade·sermon·page 확인 필요]. 불링거는 단순한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구원을 시기하시거나 자신을 멸망하도록 정하셨다고 생각하게 되는 유혹을 경고하고, 예정이 인간의 가치나 무가치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와 자비에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본다고 답한다.
[^85]: Heinrich Bullinger, *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chap. 10, "Of the Predestination of God and the Election of the Saints," https://www.ccel.org/creeds/helvetic.htm.10장은 하나님이 값없이, 순전한 은혜로, 사람에 대한 어떤 고려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택하셨다고 진술하며, 같은 장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한 소망을 가질 것과 아무도 경솔히 유기된 자로 판정하지 말 것을 명시한다.
[^86]: Cornelis P. Venema, *Heinrich Bullinger and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Author of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Baker Academic, 2002); Peter Opitz, review of *Heinrich Bullinger and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by Cornelis P. Venema, *Journal of Ecclesiastical History* 55, no. 3 (2004): 592–93.
[^87]: Bullinger, *Second Helvetic Confession*, chap. 16; Bullinger, *Decades*, IV, 복음과 은혜에 관한 설교. SHC 16장은 믿음을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순전한 선물로 규정하고 성령을 통한 복음 설교로 주어진다고 말한다.
[^88]: W. Peter Stephens, "The Place and Understanding of the Doctrine of God in Heinrich Bullinger's Theology," *Reformation & Renaissance Review* 16, no. 2 (2014): 163–180. 스티븐스는 창조주·섭리·예정 등 주요 요소들 밑에 놓인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강조라고 결론짓는다.
[^89]: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trans. George Musgrave Giger, ed. James T. Dennison Jr., 3 vols. (P&R Publishing, 1992–97), Topic 3, Q. 15–16. 개혁파 정통주의는 이 구별을 voluntas decreti(작정의 뜻)와 voluntas praecepti(계명·계시의 뜻)라는 용어로 정식화했으며, 이것이 하나님 안의 두 의지가 아니라 한 뜻을 우리와의 관계에서 두 측면으로 구별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90]: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3.7–8.
[^9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9.
[^92]: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Confession*, 10.1.
[^93]: Eph. 2:8; Phil. 1:29. 엡 2:8의 중성 지시대명사 τοῦτο는 여성명사 πίστις만을 좁게 가리킨다기보다 앞의 "은혜로 믿음을 통한 구원"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믿는 것 자체가 은혜로 주어진다는 진술은 빌 1:29에서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며(ὑμῖν ἐχαρίσθη … τὸ εἰς αὐτὸν πιστεύειν), 행 16:14와도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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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각주
각주 일러두기. 이 문서는 본문 18개 장이 완성된 이후 추가로 진행된 연구사 논의(J. Wayne Baker와 Pierrick Hildebrand의 불링거 언약 연구)를 정리한 보완 자료다.
*a. 보편적 복음 제시와 자유로운 거부 (Baker의 해석). Baker는 자신의 불링거 해석을 회고하며 요약하는 자리에서, 불링거에게 복음과 그리스도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제시되며,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자유롭게 거부한다"(Those who reject it do so freely)라고 설명한다. 유의할 점: 이 문장은 불링거 자신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Baker가 불링거를 해석하여 요약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불링거가 이렇게 말했다"가 아니라 "Baker의 해석에 따르면 불링거에게…"로 읽어야 한다. 이 보편적 복음 제시 논의의 배경으로는 Baker(1980)의 중기 예정론 서술도 참고하라.
Baker, "Bullinger, the Covenant,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Retrospect," 371; 참고로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31, 34.
*b. Baker의 쌍무적·조건적 언약 테제. Baker의 고전적 연구는 불링거의 언약을 쌍무적(bilateral)이면서 조건적(conditional)인 구조로 읽는다. 여기서 '쌍무적'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대등한 계약 당사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와 약속에서 시작된 언약 안에서 인간의 믿음·순종·신실함이 언약 관계의 실질적 구성 요소, 곧 실제 언약적 응답으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Baker는 이 구조를 선택 중심적이고 상대적으로 일방적(unilateral)·무조건적인 칼빈의 경향과 대조하여, 취리히의 불링거에게서 제네바와 구별되는 독자적 개혁파 궤적 — 그의 표현으로 "또 하나의 개혁 전통"(the other Reformed tradition) — 을 읽어냈다. 두 궤적을 구성하는 논의는 특히 Baker(1980), 193–198을 보라. 약 이십 년 뒤의 회고 논문에서도 그는 "불링거는 조건적이고 쌍무적인 언약을 가르쳤다"(Bullinger taught a conditional, bilateral covenant)라고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한다.
J. Wayne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Athens, OH: Ohio University Press, 1980), 193–198;
J. Wayne Baker, "Heinrich Bullinger, the Covenant,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Retrospect,"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29, no. 2 (Summer 1998): 359–376, cited 370.
*c. Hildebrand의 Baker 테제 재검토. Hildebrand의 공헌 하나는 기존 연구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않았던 불링거의 미출간 창세기 설교 노트를 검토한 것이다. 그는 두 물음 — 불링거에게 타락 이전 언약(prelapsarian covenant)의 요소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불링거가 창세기 17장 해석에서 언약과 선택을 실제로 연결하는가 — 을 던지고 둘 모두에 긍정적으로 답한다. 이어 "Covenant and Election" 절에서 그는 Baker의 구도 — 불링거의 쌍무적·조건적 언약 대(對) 선택에 근거한 칼빈의 일방적·무조건적 유언 — 를 정리한 뒤, 불링거의 언약신학 자체 안에 "선택에 뿌리내린 진정한 일방적 측면"(a genuine unilateral aspect grounded in election)이 존재함을 논증한다. 즉 쌍무적 언약과 일방적 선택은 불링거 안에서 서로 배타적인 두 원리로 분리되지 않는다. 언약의 중심성 논의 전체는 같은 책 4장 "The Centrality of the Covenant, 1534–1551"을 보라.
Pierrick Hildebrand, The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24), 175(미출간 창세기 설교 자료), 183–187("Covenant and Election"), 직접 인용은 184; 4장 전체는 "The Centrality of the Covenant, 1534–1551," 165–202.
*d. "Fundamentum foederis est gratuita receptio". 이 질문의 무게를 보여 주는 자료가 있다. Hildebrand가 창세기 17장 관련 미출간 자료에서 인용하는 불링거의 라틴어 문장이다. "Fundamentum foederis est gratuita receptio." 신중하게 옮기면 "언약의 기초는 값없이 받아주심이다" 정도가 되며, 문맥에 따라 "언약의 토대는 하나님의 무상(無償)한 수납이다"로도 새길 수 있다. 다만 gratuita receptio를 후대의 교리 용어인 '무조건적 선택'으로 곧장 번역하는 것은 과도하다. 이 문장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다 — 불링거의 언약이 조건적·쌍무적 차원을 지닌다 하더라도, 그 토대(fundamentum)는 인간의 선행하는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받아주심이라고 불링거 자신의 언어로 서술된다. 그러므로 조건성은 언약에, 선택은 별도의 일방적 원리에 배속하는 식의 경직된 이분법은 자료 차원에서 복잡해진다. Hildebrand는 불링거가 언약 안에서 믿음을 요구하면서도 그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그리스도의 의, 갱신과 함께 연결한다는 점도 지적한다.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85.
부록 — Baker Thesis 이후의 Bullinger 언약 연구: Covenant, Election, 그리고 새로운 질문
이 부록은 본문 18개 장이 완성된 뒤 추가로 진행된 연구사 검토를 별도로 정리한 것이다. 본문의 논증을 소급하여 수정하지 않으며, 본문과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다.
본문 16장에서 나는 하인리히 불링거 연구사를 한 문단으로 압축해 지나갔다. 베이커가 불링거의 언약을 쌍무적·조건적으로 읽고 그를 '또 하나의 개혁 전통'의 원조로 세웠으며, 후속 연구가 그 해석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한 문단 뒤에는 사십여 년에 걸친 연구사의 드라마가 있고, 그 드라마의 최근 국면은 본문의 연구가설에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다. 여기서 그 흐름을 조금 더 정직하게 펼쳐 둔다.
Baker가 왜 중요했는가. 1980년 이전의 표준적인 서사에서 불링거는 대체로 츠빙글리의 온건한 계승자, 그리고 칼빈이라는 거인의 그림자 속 인물로 취급되었다. J. Wayne Baker의 단행본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The Other Reformed Tradition》(1980)은 이 구도를 흔들었다.1 Baker는 불링거에게서 언약(foedus, testamentum)이 단지 여러 주제 중 하나가 아니라 그의 신학과 윤리, 나아가 취리히의 교회·사회 이해 전반을 관통하는 축임을 보였고, 무엇보다 취리히 종교개혁을 제네바의 부록이 아닌 독자적 연구 대상으로 세웠다.
쌍무적·조건적 언약이란 무엇인가. Baker의 핵심 주장은 불링거의 언약이 쌍무적(bilateral)이면서 조건적(conditional)이라는 것이다. 용어를 정확히 하자. '쌍무적'이란 양 당사자가 실제 관계적 의무와 응답을 지는 구조를 말하며, 하나님과 인간이 대등한 계약 당사자라는 뜻이 아니다. '조건적'이란 언약 안에서 믿음과 순종 같은 인간의 응답이 실제 조건의 언어로 표현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을 곧바로 펠라기우스주의나 신인협력적 구원론, 공로적 기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Baker 자신도 언약이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와 약속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강조한 것은, 그 은혜로 시작된 언약 안에서 인간의 믿음·순종·신실함이 장식이 아니라 언약 관계의 실질적 구성 요소로 기능한다는 점이었다.
'또 하나의 개혁 전통' 테제. Baker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이 구조를 칼빈과 대조하여 두 개의 서로 구별되는 개혁파 궤적을 구성했다.2 취리히의 불링거 — 언약 중심, 쌍무적·조건적, 인간의 실제 언약적 응답 강조, 언약과 선택 사이의 상대적 구별. 제네바의 칼빈 — 선택 중심, 보다 일방적·무조건적 경향, 언약이 선택에 더 강하게 종속. 요컨대 칼빈 중심으로 개혁파 전통 전체를 설명해서는 안 되며, 불링거에게서 독자적인 개혁파 궤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십 년 가까이 지난 회고 논문에서도 "불링거는 조건적이고 쌍무적인 언약을 가르쳤다"(Bullinger taught a conditional, bilateral covenant)라고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했고,3 자신의 불링거 해석을 요약하면서 복음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며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자유롭게 거부한다"(Those who reject it do so freely)라고 설명했다.4 이 마지막 문장은 불링거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Baker의 해석적 요약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자.
이 해석의 강점. Baker 테제의 공헌은 지금도 유효하다. 불링거의 언약이 인간의 응답을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 쌍무적·조건적 언어가 실제 자료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불링거를 칼빈의 각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 — 이 세 가지를 연구사에 각인시킨 것은 Baker다. 본문 16장이 '인간의 응답' 영역을 진지한 검증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부분적으로는 그의 유산이다.
후속 연구에서 드러난 한계.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이 대조가 지나치게 선명하게 그어졌을 가능성이 지적되었다. 칼빈에게도 언약의 상호성(mutuality)과 조건적 언어가 실재하고, 불링거에게도 하나님의 선택과 일방적 은혜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불링거 대 칼빈'을 서로 대립하는 두 신학 체계처럼 세우는 것은 양극화일 수 있다. 문제는 어느 교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같은 교리들이 어떻게 배열되고 강조되느냐일지 모른다.
Hildebrand의 2024년 연구. 이 재검토를 자료 차원에서 밀고 나간 것이 Pierrick Hildebrand의 《The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Oxford, 2024), 특히 4장 "The Centrality of the Covenant, 1534–1551"이다.5 Hildebrand는 한편으로 Baker의 큰 직관 — 언약이 불링거 신학의 중심 조직 개념이라는 것 — 을 강화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Baker 테제의 핵심 이분법을 직접 재검토한다.
미출간 창세기 설교 노트의 의미. Hildebrand의 중요한 공헌 하나는 기존 연구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않았던 불링거의 미출간 창세기 설교 자료를 사용한 것이다. 그는 이 자료를 통해 두 가지를 묻는다. 불링거에게 타락 이전 언약의 요소가 존재하는가. 불링거는 창세기 17장 해석에서 언약과 선택을 실제로 연결하는가. 그의 답은 둘 다 긍정이다.6 곧 언약과 선택의 밀접한 관계는 후대 해석자의 조화 시도가 아니라 불링거 자신의 주석 작업 안에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언약과 선택의 연결. "Covenant and Election" 절에서 Hildebrand는 먼저 Baker의 구도 — 불링거의 쌍무적·조건적 언약 대 칼빈의 선택에 근거한 일방적·무조건적 유언, 그리고 거기서 갈라지는 두 개의 개혁파 궤적 — 를 정리한 뒤,7 결정적인 수정을 가한다. 불링거의 언약신학 자체 안에 **"선택에 뿌리내린 진정한 일방적 측면"(a genuine unilateral aspect grounded in election)**이 존재한다는 것이다.8 이 수정의 요점은 "불링거도 예정론을 믿었다"는 밋밋한 확인이 아니다. 요점은 구조적이다. 쌍무적 언약과 일방적 선택이 불링거 안에서 서로 배타적인 두 원리로 분리되지 않는다면, 조건성은 언약의 몫으로, 선택은 별도의 일방적 원리의 몫으로 나누어 두 전통의 표지로 삼는 방식 자체가 흔들린다.
"Fundamentum foederis est gratuita receptio." 이 지점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Hildebrand가 창세기 17장 관련 미출간 자료에서 인용하는 불링거의 라틴어 한 문장이다. Fundamentum foederis est gratuita receptio — 신중하게 옮기면 "언약의 기초는 값없이 받아주심이다."9 번역에 주의가 필요하다. gratuita receptio를 후대 교리 용어인 '무조건적 선택'으로 곧장 옮기는 것은 과도한 번역이다. 그러나 절제해서 읽어도 이 문장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불링거의 언약이 조건적·쌍무적 차원을 지닌다 해도, 그 토대는 인간의 선행하는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상한 받아주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조건적'이라는 말을, 구원의 성취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조건 충족 여부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언약이 요구하는 믿음과 순종은 그 값없는 토대 위에서, 그 토대로부터 가능해지는 응답이지, 토대를 대신하거나 토대에 앞서는 자격 요건이 아니다. 그리고 Hildebrand의 분석에 따르면 불링거는 언약 안에서 믿음을 요구하면서도, 그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그리스도의 의, 갱신과 함께 엮는다. 조건적 응답의 언어와 값없는 토대의 언어가 한 신학자 안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칼빈과의 더 큰 연속성. Hildebrand는 같은 절에서 칼빈의 창세기 17장 해석도 나란히 검토한다. 칼빈에게도 언약의 양면성, 값없는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인간의 순종이 함께 존재한다. 그렇다면 "칼빈은 순수하게 일방적, 불링거는 쌍무적"이라는 도식 역시 유지되기 어렵다. Hildebrand는 언약의 상호성과 조건성이라는 면에서 두 사람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으며, Baker 테제가 허용한 것보다 더 큰 연속성(greater continuity)을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10 그리고 책의 후반부 칼빈 장에서 그는 '두 개의 개혁 전통' 문제 자체를 재검토하는데, 그 방향은 칼빈을 취리히 언약신학과 경쟁하는 별개 전통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츠빙글리와 불링거의 언약적 통찰을 칼빈 역시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하나의 더 넓은 개혁 전통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쪽이다.11
Baker 테제를 폐기가 아니라 수정으로. 그렇다면 Baker는 '틀린 옛 연구자'인가. 그렇게 처리하는 것은 부당하다. 불링거의 독자적 중요성을 칼빈의 그림자에서 끌어낸 것, 언약의 쌍무적·조건적 차원을 부각한 것, 인간의 실제 언약적 응답을 신학적 의제로 만든 것, 취리히 종교개혁을 독자적 연구 영역으로 세운 것 — 이 공헌들은 그대로 남는다. 수정되어야 할 것은 그 공헌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진 경직된 대립 구도다. 최근 연구가 그리는 그림은 이렇다. 불링거 안에서도 언약과 선택이 맞물려 있고, 칼빈 안에서도 선택과 언약이 맞물려 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어느 교리의 유무나 '일방 대 쌍무'의 단순 대립이라기보다, 강조점과 배열, 성경 해석의 방식, 수사적·목회적 사용의 차이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요컨대 Baker 테제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수정되고 재구성되고 있는 연구사적 논제다.
이것이 bonitas Dei 가설에 새롭게 묻게 하는 것. 마지막으로, 이 연구사가 본문 16장의 작업가설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정확한 크기로 말해 두자. Baker의 모델에서는 언약·조건성·인간의 응답이라는 계열과 선택·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계열이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보일 수 있었다. 그런데 Hildebrand의 자료에서는 불링거 자신 안에서 그 두 계열 — 언약과 선택 — 이 훨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불링거에게 언약과 선택을 함께 묶어 주는 더 깊은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이 질문의 자리에서 본문 16장은 bonitas Dei — 하나님의 선하심 — 를 하나의 후보로 제안했다. 그러나 분명히 하자. Hildebrand가 불링거의 중심이 bonitas Dei라고 입증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정확한 관계는 이것이다. Hildebrand가 언약과 선택 사이의 긴밀한 연결을 복원함으로써, 그 둘의 더 깊은 공통 신학적 근거를 묻는 새로운 연구 질문이 가능해졌다.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답변 후보를 본문의 작업가설이 제안하고 있을 뿐이며, 그 가설의 운명은 본문 16장에 세워 둔 반증 조건과 원문 검증에 달려 있다.
편집자 주. 이 부록의 연구사적 보완은 본문 16장에서 제안된 bonitas Dei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Baker 이후의 불링거 연구에서 언약과 선택의 관계가 새롭게 평가되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그 둘을 더 깊은 층위에서 연결하는 신학적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추가 연구 질문의 역사신학적 배경을 제공한다.
참고문헌 추가 항목
Baker, J. Wayne.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Athens, OH: Ohio University Press, 1980.
———. "Heinrich Bullinger, the Covenant,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Retrospect."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29, no. 2 (Summer 1998): 359–376.
Hildebrand, Pierrick. The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24.
- J. Wayne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Athens, OH: Ohio University Press, 1980).
-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193–198.
- J. Wayne Baker, "Heinrich Bullinger, the Covenant,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Retrospect,"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29, no. 2 (Summer 1998): 359–376, cited 370.
- Baker, "Bullinger, the Covenant,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Retrospect," 371. 이 논의의 배경으로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31, 34 참조.
- Pierrick Hildebrand, The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24), 4장 "The Centrality of the Covenant, 1534–1551," 165–202.
-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75.
-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83–184.
-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84.
-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85.
-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186–187, 결론은 특히 187.
- Hildebrand, Zurich Origins of Reformed Covenant Theology, 6장 중 특히 241–243 (장 전체는 241–275).
이 글은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함께 공부하던 중에 나온 두 질문에서 시작하여, 성경 본문(개역개정)과 교부·종교개혁 문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증거본문 배열, 그리고 필자의 하인리히 불링거 《De testamento》(1534)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16장의 bonitas Dei 명제는 확립된 학설이 아니라 필자가 검증 중인 연구가설임을 다시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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