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모세오경,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다」의 핵심 내용을 성경읽기 모임에 맞게 압축한 안내 자료입니다. 모세오경(토라)에 대해서, 각 권을 교회는 어떻게 읽어 왔는지, 구약의 성도는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등에 대한 자세한 논의 및 참고문헌은 원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프롤로그

요한계시록을 덮고 다시 창세기를 펼친다. 방금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 다시 열린 생명나무, 그리고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계21:3)라는 성경의 마지막 약속을 읽었다. 이제 첫 장을 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라는 말씀이 기다린다. 끝을 알고 처음으로 돌아온 셈이다.

 

이 자리는 특별하다. 처음 창세기를 읽을 때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지금은 안다. 에덴에서 시작된 하나님과 사람의 동행이 깨어지고, 그 임재를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긴 걸음이 성막과 성전을 지나 그리스도에게 이르고, 마침내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러니 이번 모세오경 읽기는 단순한 복습이 아니다. 끝을 알고 처음을 다시 읽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에게 모세오경은 '율법책'이라는 이름 때문에 무겁게 느껴진다. 레위기의 제사 규정, 민수기의 인구조사, 신명기의 긴 법 조항 앞에서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읽기자료는 그 책들을 법전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읽어 보자고 권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타락한 인간에게 약속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이야기다. 아래의 압축본은 열아홉 개의 절로 된 본문을 다섯 갈래로 묶어 그 큰 흐름만 따라간다. 자세한 설명과 근거는 본문에서 천천히 만나면 된다.

 

 

1. 율법책이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

히브리어 토라는 우리말로 흔히 '율법'이라 옮기지만, 본래 뜻은 법 조항보다 훨씬 넓은 가르침, 교훈, 지시에 가깝다. 그래서 토라는 법전으로 시작하지 않고 창조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사람이 무엇인지, 왜 세상이 지금처럼 망가졌는지를 먼저 들려준 뒤에야 계명을 준다.

 

순서가 중요하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신다. 십계명의 첫마디도 명령이 아니라 선언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 이스라엘은 십계명을 지켜서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구원하셨고, 그 뒤에 율법을 주셨다. 물론 모세 언약 안에서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축복과 저주는 실제적이었고, 약속의 땅에서의 삶은 언약적 순종과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별도의 구원 방식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섯 권은 그래서 한 줄로 이어진다. 창조 → 약속 → 구원 → 언약 → 율법 → 임재. 창세기가 창조와 약속을, 출애굽기가 구원과 언약과 성막을, 레위기가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사는 법을, 민수기가 광야의 시험을, 신명기가 약속의 땅 앞에서 다시 듣는 말씀을 맡는다. 그리고 이 다섯 권을 관통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가. 에덴에서 시작된 그 질문은 광야 한가운데 세워진 성막에서 첫 번째 대답을 얻는다.

 

 

2. 다섯 권을 따라 걷기

창세기는 하나님이 지으신 "좋은" 세계가 죄로 무너지는 데서 출발해, 그 회복의 실마리를 점점 좁혀 간다. 아담에서 노아로, 바벨에서 아브라함으로, 그리고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가족으로. 약속은 늘 위태로워 보인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라, 형을 속이는 야곱, 노예로 팔려 간 요셉.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약속을 놓지 않으신다. 창세기는 "이것이 ○○의 내력이니라"라는 표제를 열 번 남짓 되풀이하며,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이 약속의 실을 따라가게 한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3)는 신약의 말은 바로 이 장면을 가리킨다.

 

출애굽기는 노예의 신음에서 시작해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우는 장면으로 끝난다. 열 가지 재앙과 유월절과 홍해는 구원의 이야기이고, 시내산은 그 구원받은 백성과 맺는 언약의 자리다. 그런데 책의 후반부가 성막 설계도에 그토록 많은 지면을 쓰는 이유가 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25:8). 출애굽의 목적지는 가나안 이전에 하나님의 임재였다. 출애굽의 최종 목적은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유다.

 

레위기는 거기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붙든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 번제·소제·화목제·속죄제(정결제)·속건제(배상제)의 다섯 제사는 저마다 역할이 다르다. 모든 제사가 피 흘리는 동물제사였던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은 곡물로 속죄제물을 드릴 수도 있었다. 정결 규례와 대속죄일, 그리고 이웃 사랑과 희년의 법까지, 레위기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과 그 앞에서 거룩하게 사는 길을 함께 가르친다. 특히 레16장의 대속죄일은 제사장과 백성과 성소 전체를 정결하게 하는 날로, 레위기의 모든 길이 이곳으로 모인다. 히브리서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할 때 가장 오래 머무는 본문도 바로 이 대속죄일이다.

 

민수기는 구원받았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백성의 이야기다. 진영 한가운데 성막이 있는데도 백성은 원망하고, 열두 정탐꾼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믿음을 잃는다. 첫 세대는 광야에서 쓰러지고, 모세조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였던 뱀을 구원의 표지로 바꾸시고, 이방 예언자 발람의 입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신다. 신약은 이 광야 세대를 교회에 주는 경고로 다시 읽는다.

 

신명기는 요단강 동편, 약속의 땅 앞에서 모세가 새 세대에게 토라를 다시 들려주는 설교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신명기는 기억하라, 가르치라, 생명을 택하라고 거듭 말하면서도, 결국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신30:6) 사랑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으로 나아간다. 이 약속은 훗날 예레미야의 새 언약과 신약의 성령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토라는 모세의 죽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끝난다.

 

 

3. 토라는 어떻게 읽히고 전해져 왔는가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도 토라를 서로 다르게 읽었다. 성전과 제사장 귀족층에 가까웠던 사두개인은 모세의 율법을 특별히 강조하고 바리새인의 구전 전승을 거부했다. 다만 그들이 선지서와 성문서를 전혀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바리새인은 토라를 일상의 삶 전체로 확장하려 했고, 성전이 무너진 뒤 형성된 랍비 유대교는 그 유산을 중요하게 이어받았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를 바리새파가 그대로 살아남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AD70 이후의 긴 재편을 거친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 흐름에서 미슈나와 탈무드, 그리고 성경을 깊이 파고드는 해석인 미드라시가 나왔다. 유대교는 이를 '구전 토라'라 부르며 성문 토라와 함께 읽는다. 오늘날 회당은 토라를 54개의 주간 단락(파라샤)으로 나누어 한 해에 한 번 통독하고, 예언서 본문(하프타라)을 곁들여 읽는다. 마지막 신명기를 읽고 곧바로 다시 창세기를 시작하는 심핫 토라 절기는,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우리 읽기와도 닮았다.

 

토라가 우리 손에 오기까지의 길도 길었다. 오늘날 히브리어 구약의 기본인 마소라 본문, 사마리아 공동체가 보존한 사마리아 오경, 헬라어로 옮겨진 칠십인역, 그리고 20세기에 발견된 사해문서와 아람어 번역인 탈굼이 서로 비교된다. 사해문서는 고대 본문에 일정한 다양성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성경 본문이 놀라울 만큼 안정적으로 전해졌다는 사실도 보여 준다. 사마리아 오경을 후대의 가짜로 보거나, 칠십인역을 72명이 한꺼번에 번역했다는 전승을 그대로 역사로 받아들이는 일은 모두 조심해야 한다.

 

토라가 왜 여호수아서가 아니라 신명기에서 끝나는지도 생각해 볼 만하다. 어떤 학자들은 이야기의 연속성을 보아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서까지를 '육경'이라 부르지만, 전통적으로 토라는 다섯 권이다. 토라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서 멈춘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다. 약속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백성은 이미 받은 말씀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호수아서의 첫 명령도 새 법전이 아니라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수1:8)였다. 신명기는 마지막에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신34:10)라고 적는다. 토라의 끝에는 이렇게 기다림이 남는다. 참된 모세 같은 선지자는 언제 오는가.

 

그렇다면 모세오경은 누가 썼는가. 성경은 여러 곳에서 모세가 기록했다고 말하고, 예수께서도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5:46)고 하셨다. 동시에 모세의 죽음을 기록한 신34장 같은 본문은 오래전부터 후대의 기록이나 최종 정리 가능성을 질문하게 했다. 근대에는 JEDP로 알려진 문서가설이 등장했고, 오늘날 학계는 여러 모델이 경쟁하는 상태다. 이 자료는 두 극단을 모두 피한다. 모든 글자를 모세가 혼자 썼다는 주장만이 신앙적인 것도 아니고, 모세가 후대의 허구라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세는 오경의 실질적·언약적 저자이자 중심적 중보자이며, 최종 문헌 형태가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는 그와 구별되는 문헌사의 질문이다.

 

 

4.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읽는 토라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모세는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구약에는 행위로 구원받는 길이 있고 신약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길은 둘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이 약속보다 사백삼십 년 뒤에 왔으며 먼저 세운 약속을 폐하지 못한다고 말한다(갈3:17). 율법은 약속을 대신하러 온 것이 아니라, 약속 아래 사는 백성에게 주어졌다. 물론 아브라함이 예수의 이름이나 골고다를 우리처럼 알았다고 과장할 수는 없다. 구약 성도들은 자기 시대에 주어진 약속을 믿었고, 그 약속의 궁극적 내용과 성취가 그리스도였다. 히브리서는 그들이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히11:13) 살았다고 말한다. 약속이 다른 것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비추는 빛이 점점 밝아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지금도 동물제사를 드리거나 음식 규례를 지키지는 않는다. 개혁주의 전통은 이것을 도덕법·의식법·시민법의 구분으로 설명해 왔는데, 이는 오경 본문 자체가 붙여 둔 이름표가 아니라 후대 신학의 유용한 분류다. 제사와 정결 규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끝났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된 제도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폐지되었다는 것은 잘못되어 버려졌다는 뜻이 아니다. 목적을 이루어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안식일처럼 개혁주의 안에서 따로 깊이 논의되는 주제가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둘 만하다.

 

레위기의 제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모세 언약 안에서 실제적인 정결과 용서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4)는 말씀처럼, 동물의 피 자체가 죄를 궁극적으로 없애지는 못했고, 그래서 해마다 반복되어야 했다. 그 제도는 자기 자신을 단번에 드리신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기다렸다. 속죄를 이루는 제사는 끝났지만, 감사와 찬양과 헌신의 제사적 삶은 교회 안에서 계속된다.

 

이 모든 흐름은 결국 하나님의 임재로 모인다. 에덴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던 자리였고, 많은 성경신학자들은 성막과의 평행 때문에 에덴을 원형적 성소처럼 읽는다. 죄로 그 자리를 잃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광야의 성막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오셨다. 그리고 마침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여기서 '거하시매'는 '장막을 치시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 되셨고, 그분 안에서 교회와 신자가 성령의 전이 되며,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성전이 되신다. 하나님은 처음 지으신 세계를 버리지 않으신다. 구속을 통해 그 창조를 새롭게 하신다.

 

모세오경에서 그리스도를 읽는다는 것은 본문 뒤에 숨은 암호를 찾는 일이 아니다. 가장 안전한 길은 신약이 직접 연결한 것부터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5: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만나와 생명의 떡, 반석과 그리스도, 모세 같은 선지자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읽는 것과 자의적인 알레고리를 만드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5. 맺으며 — 다시 창세기로

토라를 읽고 나서 복음서를 펼치면 신약의 말들이 새롭게 들린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시험받으신 예수께서 신명기로 대답하신 장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성전을 헐라 하시며 자기 몸을 가리키신 말씀, 생명의 떡, 들리신 인자, 유월절 식탁에서 세우신 새 언약. 이 말들은 모두 모세오경이라는 첫 문법을 알 때 비로소 제 무게로 들린다.

 

그러니 모세오경은 율법 조항의 모음집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타락한 인간에게 약속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언약을 맺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이야기다. 그리고 신약은 그 이야기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 준다. 모세오경은 그리스도 때문에 버리는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읽게 되는 책이다.

 

이제 첫 장을 다시 펼 차례다.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 에덴의 동산, 그리고 그 동산에서 사람을 찾으시던 하나님의 음성. 끝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 처음을 다시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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