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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삽의 고백 — 시편 73편
아삽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살려고 했다. 그런데 삶은 그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히려 깨끗하게 살려 할수록 어려움이 따라왔고, 손을 씻고 마음을 지키려 했더니 날마다 징벌을 받는 것 같았다(13-14절). 그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반면 그가 눈을 들어 주변을 보면, 하나님을 입에 올리지도 않는 사람들이 건강하고 부유하고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간다. 고통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오히려 점점 더 잘 된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삽의 발은 미끄러질 뻔했다(2절). 눈에 보이는 현실이 마음을 기울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환점이 찾아온다. 아삽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다(17절). 그곳에서 그는 비로소 시야가 달라졌다. 악인의 형통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미끄러운 곳인지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편의 끝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절). 이것이 이 시편 전체의 결론이다.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다. 현실이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복이 무엇인지를 다시 알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지금 당장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마지막에 공의가 실현될 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의 불균형에 흔들리지 않는다. 또한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사람 — 자신이 나그네임을 아는 사람 — 은 여기서 모든 것을 손에 쥐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자기 자신을 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무엇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결핍감에서 자유롭다.
덧붙이자면, 아삽이 겪은 것은 환경의 문제이기 이전에 마음의 문제였다. 비교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먼저 기울어졌고, 그 기울어진 마음이 모든 것을 비뚤게 보이게 만들었다. 믿음이란 그 마음을 다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그분 앞에 계속 서 있는 것, 거기서 떠나지 않는 것.
2. 같은 질문을 던진 사람들
이 질문은 아삽만 한 것이 아니다. 성경 안에서 이 질문은 반복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것이 불신앙의 질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하박국은 선지자였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물었다. "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즉각적인 심판의 선언이 아니었다. 대신 이런 말씀이 돌아왔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해가 아니라 기다림이었다. 설명이 아니라 신뢰였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그분의 방식은 우리의 방식과 다르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을 오래 들여다본 끝에 이렇게 말했다. 의인에게 악인의 일이 생기고, 악인에게 의인의 일이 생기는 것 같다고.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허무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더 깊이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권면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이해가 닿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주어진 일상을 기쁘게 사는 것.
예레미야도 같은 질문을 했다.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악인의 길이 형통하나이까?" 이 질문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앞에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라는 고백이 먼저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붙들면서 묻고 있다.
욥기는 이 질문에 대해 가장 긴 대답을 한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혹독한 고난을 당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를 몰랐다. 욥의 친구들은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공식을 깨셨다.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이 아니다. 고난이 곧 죄의 결과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대신 자기 자신을 보여 주셨다. 욥이 얻은 것은 논리적 해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훨씬 더 깊은 앎이었다.
신약에서도 이 흐름은 이어진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고, 지금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으며, 지금 잠깐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하게 된 것은 믿음의 순수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순교한 영혼들의 질문 — "어느 때까지입니까" — 은 지금도 하늘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 질문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완전한 대답은 마지막 날에 온다.
3. 중심 잡는 법
성경이 말하는 방식은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지금이 아니라 끝을 본다. 아삽이 성소에 들어가 악인의 마지막을 보았을 때 시야가 바뀌었다. 현재의 그림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은 지금의 불균형에 흔들리지 않는다.
둘째, 형통의 기준 자체를 다시 세운다. 건강, 돈, 평안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이 복이다. 이 기준이 바뀌면 비교할 대상 자체가 사라진다.
셋째, 고난을 죄의 결과로 해석하지 않는다. 내가 고난받는다고 해서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다. 욥이 그것을 보여 주었고, 요한복음 9장의 맹인이 그것을 보여 주었다.
넷째, 기다림 자체를 믿음으로 이해한다. 지금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아도 된다. 설명을 받아야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 곧 믿음이다.
다섯째, 하나님 자신이 가장 좋은 것임을 붙든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날, 우리가 받는 것은 어떤 보상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의 완전한 동행이다. 그것이 처음부터 약속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흔들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비교하는 눈인가, 아니면 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인가. 설명을 기다리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인가.
요약보기
악인의 형통과 고난 받는 의인의 중심에 대해서
1. 시편 73편, 아삽의 시
-의인의 경건한 삶 가운데서 "재난과 징벌을 당하는" 불만과 실족감을 경험함(2, 13-14절)
하지만, 악인의 형통(건강, 부유, 안전, 교만함 등)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이 생김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과 의인과 동행하심을 깨달음(전환점, 성소에 들어감, 17절 이하)
→시편 1편의 "의인의 복과 악인의 멸망"이라는 대원칙을, 현실적 고난과 회의의 틀 안에서 다시 상기시키는 신앙 회복의 시(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28절)
;하나님의 임재가 궁극적 복임.
① 하나님에 대한 신뢰 (최종적인 공의의 실현, 마13)
② 이 땅에선 나그네, 본향을 소망함 (요일2:16, 히11:13-16)
③ 하나님 자신(res)을 주심 (창15:1)
덧붙임; 비교(질투)의식(시73:2, 환경이 아닌, 마음의 기울어짐), 믿음과 하나님 앞(Coram Deo)에서 떠나지 아니함(히11:6, 시73:17, 창17:1)
2. 반드시 함께 봐야 할 본문들
-선지자 하박국의 질문; “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하게 하십니까?”(합1) → 하나님의 답은 즉각적 심판이 아니며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이해가 아니라 기다림, 설명이 아니라 신뢰, 사55:9, 시34:10)
-솔로몬 왕의 깨달음; 의인에게 악인의 일이 있고 악인에게 의인의 일이 있다(전8:14) → 하나님을 경외하라 (허무주의가 아닌, 일상의 기쁨과 감사의 권면,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
-선지자 예레미야의 질문;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어찌하여 악인의 길이 형통하나이까?”(렘12)
(성경 안에서 이 질문은 불신앙의 질문이 아니며 오히려 믿는 자만 할 수 있는 질문임, 시34:8)
-욥기의 메시지; 욥은 의인(욥1:1)이지만 시험 받음. 그러나 욥은 이를 알지 못함. 즉 "고난이 곧 죄의 직접 보응(인과응보)"이라는 공식은 깨짐. → 하나님은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시고 대신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다(욥38-41, 42:5) (논리 정리보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깊이)
(의인이 고난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신 것이 아니다.)
-신약의 관점; 팔복 중 의를 위하여..(마5), 현재의 고난은...(롬8),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벧전1),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계6)
3. 성경에서만정리하는 “중심 잡는 법" (곧 마음, 삼상16:7)
① 비교 대신 종말을 본다(시73:17, 롬8:18)
② 형통의 기준을 재정의한다(시73:28)
③ 고난을 징벌 공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욥기, 요9)
④ 기다림을 믿음으로 본다(합2:4)
⑤ 하나님 자신이 복임을 붙든다(계21)
당신이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학술적 고찰
악인의 형통과 고난받는 의인
— 개혁주의 교리신학적 고찰 —
I. 문제 제기: 섭리와 신정론의 긴장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이라는 현상은 단순한 정서적 불만이나 신앙적 미성숙의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Providentia Dei), 공의(Iustitia Dei), 종말론적 반전(Eschatological Reversal), 그리고 성도의 인내(Perseverantia Sanctorum)와 같은 핵심 교리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신학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다. 성경 안에서 이 질문은 불신앙의 산물로 취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전제하는 자만이 이 질문을 진지하게 제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신앙 안에서 발생하는 질문이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라는 인과론적 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공의를 어떤 신학적 구조 안에서 이해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교리적 질문이다.
II. 성경신학적 구조
1. 지혜문학의 긴장 구조
구약의 지혜문학은 기본적으로 보응 원리(Retribution Principle)를 전제한다.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형벌을 받는다는 이 원리는 신명기적 역사관의 기저를 이루며, 시편 1편이 그 규범적 표현을 제공한다. 그러나 지혜문학은 동시에 이 원리가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직면한다.
시편 73편에서 아삽은 경건한 삶 가운데 재난과 징벌을 경험하면서도(13–14절), 악인의 건강과 부유함과 교만함을 목도한다. 그의 발이 미끄러질 뻔했다는 고백(2절)은 이것이 단순한 지적 의심이 아니라 실존적 위기였음을 드러낸다. 전환은 성소에 들어가는 행위(17절)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종말론적 시야를 회복하는 것으로서, 시편의 결론적 고백—"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절)—은 복의 기준 자체가 재정의됨을 의미한다.
욥기는 보응 원리의 등식—고난은 곧 죄의 직접적 결과라는 공식—을 정면으로 해체한다. 욥의 고난은 그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욥 1:1). 그러나 욥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시는 대신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욥 38–41). 욥이 최종적으로 얻는 것은 논리적 해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인식이다(42:5). 이것은 신정론의 문제가 논증적 해결보다 인격적 계시를 통해 다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전도서는 현실 관찰의 언어로 같은 긴장을 표현한다. "의인에게 악인의 일이 있고 악인에게 의인의 일이 있다"(전 8:14)는 진술은 허무주의적 결론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경외를 촉구하는 서론이다. 이 긴장 구조 전체는 신학적으로 "이미-아직(already-not yet)"의 종말론적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2. 예언서의 종말론적 전환
하박국은 신정론의 질문을 선지자적 고발의 형식으로 제기한다. "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하게 하십니까?"(합 1:3) 하나님의 응답은 즉각적 심판의 선언이 아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는 선언은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언약적 신뢰(covenantal trust)의 구조 안에서 발화된 것이다. 이해가 선행하는 신뢰가 아니라, 이해 없이도 지속되는 신뢰가 믿음의 본질임을 이 본문은 말한다.
예레미야의 질문(렘 12:1) 역시 같은 구조를 취한다.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라는 고백이 선행한 뒤에 질문이 제기된다는 점은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이 질문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을 붙들면서 현실의 불일치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행위다. 성경은 이러한 질문을 신앙의 결핍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으로 제시한다.
3. 신약의 십자가적 재해석
신약은 고난의 의미를 십자가 구조(Theologia Crucis) 안에서 재해석한다.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며, 이는 고난이 하나님의 저주의 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지임을 말한다. 로마서 8장은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천명하고, 베드로전서 1장은 시험을 통한 믿음의 순수함을 강조한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순교한 영혼들의 질문—"어느 때까지입니까"—은 신정론의 질문이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음을, 완전한 대답이 마지막 날에 비로소 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III. 교리적 정식화
1. 하나님의 섭리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 아래 발생한다. 개혁신학은 섭리를 보존(Conservatio), 협력(Concursus), 통치(Gubernatio)의 세 범주로 분석한다. 이 틀 안에서 볼 때, 악인의 형통은 하나님의 통치 밖의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도덕적 승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사용하여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되, 악의 책임은 행위자에게 귀속됨을 강조한다.
2. 일반은총
악인의 외적 형통은 일반은총(Common Grace)의 범주 안에서 이해된다. 해와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내리신다는 예수의 말씀(마 5:45)은 이 사실의 신약적 표현이다. 일반은총은 구원적 은혜(Saving Grace)와 구별되며, 하나님의 보편적 자비의 표현이지 구원의 담보가 아니다.
3. 종말론적 공의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공의를 현세적 완결이 아니라 종말론적 완결로 이해한다. 이것이 시편 73편의 신학적 전환의 내용이다. 악인의 형통이 최종 상태가 아니며, 의인의 고난이 최후의 선고가 아니다. 공의의 실현은 지연될 수 있으나 취소되지 않는다. 이 종말론적 지평을 상실할 때 신앙은 현세적 보응 원리에 종속되고, 그 원리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흔들린다.
4. 성도의 인내
고난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은 의지적 결단의 산물이 아니다. 개혁신학에서 성도의 인내(Perseverantia Sanctorum)는 은혜에 의해 보존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믿음은 단순한 심리 상태가 아니라 언약의 신실하심에 대한 참여다. 따라서 중심을 잡는 것은 인간 편의 심리적 강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언약적 신뢰의 행위다.
IV. 신학적 통합
이 문제는 세 개의 축을 따라 정리된다. 존재론적 축에서,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다는 전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역사적 축에서, 역사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으며 우리는 중간 지점에 서 있다. 종말론적 축에서, 공의는 반드시 최종적으로 실현된다. 이 세 축이 통합될 때, 현재의 불균형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아직 완결되지 않은 역사의 국면으로 이해된다.
V. 중심을 잡는 신학적 원리
다섯 가지 원리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Coram Deo—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해석한다. 현실을 환경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읽는 것이 출발점이다. 둘째, 종말론적 지향(Eschatological Orientation)—현재가 아니라 최후를 기준으로 본다. 셋째,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고난을 저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구조 안에서 이해한다. 넷째, 하나님의 섭리 신뢰(Providentia Dei)—설명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신뢰한다. 다섯째, 최고선(Summum Bonum)—하나님 자신이 최고선이라는 것을 붙든다. 복의 기준이 여기서 재정의된다.
VI. 결론
악인의 형통은 하나님의 통치의 실패가 아니라 공의의 지연이며, 의인의 고난은 하나님의 유기의 표지가 아니라 영광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중심은 환경의 안정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과 언약적 약속에 대한 신뢰에 있다. 그 신뢰는 설명의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의 인격적 만남—욥의 언어로 말하자면, "내가 주를 눈으로 보았다"(욥 42:5)—에 기초한다.
더 깊이 연구을 위한 참고문헌 추천
고전 및 중세
Augustine. The City of God. Translated by Henry Bettenson. London: Penguin Books, 1972. →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멸망이라는 역사적 충격 앞에서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 도성"의 두 질서를 대비시킨다. 악인이 이 땅에서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받는 현실은, 아직 두 도성이 혼재하는 역사의 중간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는 현세적 공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되, 최후 심판에서의 완전한 공의 실현을 확언한다. 종말론적 지평 없이는 현재의 불균형을 해석할 수 없다는 이 논지는 시편 73편의 구조와 직접 맞닿는다.
Aquinas, Thomas. Summa Theologiae. Vol. 5, God's Will and Providence (Ia. 19–26). Translated by Thomas Gilby. Cambridge: Blackfriars, 1967. → 해당 권은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를 다룬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섭리가 악을 허용하되 그것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논증을 전개한다. 악인의 형통이 하나님의 도덕적 승인이 아니라 섭리의 허용(permissive will) 안에 있다는 구분은 이 주제를 교리적으로 정밀하게 다루는 데 필요한 틀을 제공한다.
Calvin, Joh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ited by John T. McNeill.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2 vol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 칼빈이 섭리론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부분이다. 그는 섭리를 단순한 일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통치로 이해한다. 특히 고난과 역경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오히려 성도에게 위로의 근거가 됨을 논증한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 모두 섭리의 통치 아래 있다는 교리적 확신의 토대가 여기에 있다.
개혁주의 조직신학
Bavinck, Herman. Reformed Dogmatics. Vol. 2, God and Creation. Edited by John Bolt. Translated by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4. → 바빙크는 섭리를 보존·협력·통치의 세 범주로 분석하면서, 악의 존재와 하나님의 선하심 사이의 긴장을 교리적으로 정면에서 다룬다. 그는 악인의 형통을 일반은총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종말론적 완결의 관점에서 제시한다. 이 주제에 관한 개혁신학의 가장 체계적인 교리적 서술을 제공한다.
Berkhof, Louis.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38. → 개혁주의 교리신학의 표준 교재로서, 섭리·일반은총·종말론의 각 항목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정리한다. 이 주제를 교리적으로 위치시키는 데 기본 참조틀로 기능한다.
Horton, Michael. The Christian Faith: A Systematic Theology for Pilgrims on the Way. Grand Rapids: Zondervan, 2011. → 현대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섭리와 고난의 문제를 "순례자의 길"이라는 틀로 재해석한다. 이 땅에서의 나그네 됨과 본향에 대한 소망을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루며, 히브리서 11장의 신앙 구조와 연결된다. 현재의 불균형을 종말론적 긴장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실존 문제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실천적 연관성이 높다.
Vos, Geerhardu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Grand Rapids: Eerdmans, 1948. →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계시의 전개 구조를 추적한다. 지혜문학의 보응 원리가 어떻게 예언서의 종말론으로 전환되고, 다시 신약의 십자가 신학으로 완성되는지를 성경 전체의 흐름 안에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틀을 제공한다. 이 주제를 단편적 본문이 아니라 계시 역사 전체의 맥락에서 읽게 해준다.
고난 신학 및 신정론
Carson, D. A. How Long, O Lord? Reflections on Suffering and Evil. 2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6. → 이 주제를 위한 가장 직접적인 참고문헌이다. 카슨은 욥기·시편·하박국·요한계시록 등 이 주제와 연관된 본문들을 직접 주석하면서, 고난과 악의 문제를 성경신학적·교리적으로 통합하여 다룬다. 고난이 징벌 공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 기다림이 믿음의 본질적 구조라는 것,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긴장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균형 있게 논증한다. 학술적 엄밀성과 목회적 실천성을 함께 갖춘 저작이다.
Moltmann, Jürgen. The Crucified God: The Cross of Christ as the Foundation and Criticism of Christian Theology. Translated by R. A. Wilson and John Bowden. New York: Harper & Row, 1974. → 몰트만은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극단 앞에서 고난받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전개한다. 하나님이 고난 밖에서 공의를 실현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고난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논지는 의인의 고난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해하는 신약의 관점과 공명한다. 다만 그의 신론이 개혁주의 정통 신론과 긴장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참조해야 한다.
Plantinga, Cornelius, Jr. Not the Way It's Supposed to Be: A Breviary of Sin. Grand Rapids: Eerdmans, 1995. → 플란팅가는 이 저작에서 죄와 악의 문제를 "샬롬의 파괴"라는 개념으로 분석한다. 세상이 원래 있어야 할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진단은,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이라는 현실이 왜 "정상"이 아닌지를 설명하는 신학적 배경을 제공한다. 동시에 이 파괴가 회복될 것이라는 종말론적 소망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불균형을 단순한 현실 수용이 아니라 회복을 향한 긴장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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