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6-7을 묵상하며
한나가 이 노래를 부를 때, 그녀는 오랫동안 자녀를 갖지 못했고 드디어 아들을 품에 안고 성전에 올라와 드리는 고백이었다. 그러므로 이 찬양의 언어는 신앙으로 살아 낸 삶에서 나온 목소리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 짧은 문장 안에는 한나의 긴 세월이 담겨 있다. 그녀는 낮아짐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그리고 그 낮아짐이 끝이 아니었음을, 이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본문을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치는 본문으로 읽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이 실제 삶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 곧 섭리를 찬양하는 본문이다. 주권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왕 되심이라면, 섭리는 그 통치가 나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문제다. 한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런 책임도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제3장과 5장)는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가 "제이원인들(Second Causes)" 곧 인간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1 하나님은 우리를 꼭두각시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 대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결단과 순종을 실제로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 하시니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기에 나는 더욱 책임 있게 살아야 한다"가 된다.(빌2:12-13, 행27:31)
그렇다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인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딸이 아버지에게 물었다."아빠, 무슨 선물 받고 싶어요?" 아버지의 대답은 이랬다.
"네가 하루만이라도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좋겠다. 그게 아빠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야."
좋은 부모가 자녀에게 원하는 것은 값비싼 선물이 아니다. 자녀가 부모를 신뢰하고, 그 신뢰 위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분은 우리에게 미래를 모두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모든 고난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하지 않으신다. 다만 "나를 믿고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순종은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방향이다.(잠3:5-6, 욥38:4)
물론 이 신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고난이 닥칠 때,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의 뜻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섭리는 말로는 아름답지만 믿기가 너무 어렵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뒤를 돌아보면, 우리는 종종 이렇게 발견하게 된다. "그때는 몰랐는데,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었구나. 나를 빚고 계셨구나." 사도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은 고난이 없다는 약속이 아니다. 고난조차도 아버지의 손 안에 있다는 약속이다. 한나의 찬양은 바로 그 경험 이후에 나온 노래다.
신앙은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걸어가는 것이다.(시119:105) 그리고 우리가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이다.(빌1:6, 요10:28~29, 롬8:38~39, 사41:10) 한나의 노래는 승리의 노래이기 이전에, 오랜 눈물 속에서 배운 신뢰의 고백이었다. 그 고백이 지금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상기 이미지는 chatGPT를 사용하여 생성되었습니다.
각주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다룬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무엇을 하실지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5장은 그 작정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섭리이다. 즉, 작정은 하나님의 계획, 섭리는 그 계획의 집행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 그 제1원인은 하나님의 작정(Decree)이다. (창50:20, 행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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