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나님은 우리를 시간 속에서 자라게 하시는가"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단번에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말하듯,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미 모든 일을 작정하셨다.*1 역사는 우연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창조도, 타락도, 구속도, 그리스도의 오심도 모두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 있었다. 그분께는 처음과 나중이 따로 없다. 시간을 만드신 분이 시간 밖에 계신다는 뜻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하나님은 왜 그 완전한 계획을 처음부터 다 보여주지 않으셨을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내용을 한꺼번에 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메시아에 대한 모든 내용을 아담에게 미리 알려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약의 복음을 아브라함에게 완전한 형태로 설명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잠깐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들은 그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그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을까. 완전한 죽음이란 무엇인지, 그들은 알았을까. 아직 아무것도 죽지 않은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죄가 무엇인지, 타락이 무엇인지, 하나님과의 단절이 어떤 것인지 — 그 비참함을 그들이 앞서 알고 있었을 리 없다. 수천 년 후에 한 남자가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할 책임이 있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완전한 이해를 순종의 전제조건으로 삼지 않으셨다. 아브라함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2.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행군할 때 전체 여정을 미리 받아 보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지내면서도 십자가의 의미를 그분이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3 그리고 우리도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섭리 전부를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해한 후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방식을 택하셨을까. 여기서 한 가지 장면을 생각해 본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성인 남자의 모습으로 내려오지 않으셨다. 우리처럼 작고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셨다. 어머니의 품에 안기셨고, 사람들 가운데서 자라셨다. 배우셨고, 순종하셨고, 친구를 사귀셨고, 함께 먹고 마셨고, 울고 기뻐하셨다. 30년의 삶을 사신 뒤에야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마침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은 구원의 완성도 '시간 안에서' 이루셨다. 단번에 내려오지 않으셨다. 과정을 통해 오셨다. 자라는 것을 거치셨다. 성경은 심지어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성자 하나님이 자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배우셨다. 이 문장을 처음 읽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이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방식의 깊은 반영이다.*4


계시도 그렇게 주어졌다. 약속이 먼저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창3장)"는 첫 번째 약속이 씨앗처럼 심어졌다. 아직 거의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은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 씨앗은 죽지 않았다.*5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과 복이 약속되었고(창15장), 그 약속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장)"는 말씀이 흘러나왔다. 다윗에게는 왕조와 왕권에 대한 언약이 주어졌다. 선지자들은 그 언약을 붙들고, 각자의 시대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외쳤다.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그렸고(사53장), 미가는 베들레헴을 지목했고(미5:2), 스가랴는 나귀 탄 왕을 보았고(슥9:9), 말라기는 "엘리야가 오기 전에"(말4:5-6)라는 말로 구약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400년의 침묵이 흘렀다.
 
하나님은 침묵하셨다.*6 적어도 인간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을 것이다. 이 긴 침묵이 신앙의 시험이었다. 아무런 예언도 없고, 아무런 기적도 들리지 않는 세월. 그럼에도 말라기를 읽고 자랐을 사람들, 성전에서 기도하며 기다렸을 사람들이 있었다. 시므온이 그랬고, 안나가 그랬다. 그들은 오실 분을 기다렸고, 그분이 오셨을 때 알아보았다. 기다리는 법을 배웠기에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단번에 성숙해지지 않는다. 단번에 모든 것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배우고, 잊어버리고, 다시 배우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머물고, 떠나고, 만나고, 헤어지고, 기다리고, 견디며 살아간다. 성경도 그렇게 주어졌다. 이스라엘도 그렇게 성장했다. 제자들도 그렇게 배웠다. 교회도 그렇게 세워졌다. 성경은 완성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과 함께 자라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셨다. 아브라함의 기다림을 기록하고, 야곱의 씨름을 기록하고, 다윗의 실패를 기록하고, 예레미야의 눈물을 기록하고, 제자들의 오해를 기록한다. 그 모든 기록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당신도 지금 이 과정 안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과정을 버리지 않으신다."
 
성장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관계는 단번에 완성될 필요가 없다. 이해는 한순간에 도착할 필요가 없다. 오래 남는 것들은 대개 함께 머무름과, 다시 돌아옴과, 기다림과, 소속됨과, 돌봄을 통해 조금씩 펼쳐진다. 하나님은 단지 목적지만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그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도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결과만 기록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삶도 결과만으로 판단될 수 없다. 지금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어도 괜찮다. 지금 왜인지 모르겠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어도 괜찮다. 하나님은 완전한 이해를 갖춘 사람에게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갈 바를 모르면서도 떠난 아브라함과 함께 걸으셨고, 무서워서 도망쳤던 요나를 다시 부르셨고,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으로 다시 세우셨다.
그분이 그 사람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 돌아섬이었고, 믿음이었고, 다시 걸음을 내딛는 것이었다. 신앙이란 어쩌면 단번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성경도 한 번에 주지 않으셨고, 그리스도도 성인으로 보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자라고, 배우고, 머물고, 함께하고, 떠나고, 겪고, 버티고, 그리고 다시 이어가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빚어 가시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방식 자체가 은혜다.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완전히 이해한 후에 믿겠다'는 태도로 버티고 있는 것은 없는가."
 
"하나님께서 이미 충분히 말씀하셨음에도, 나는 여전히 모든 설명을 요구하며 순종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각주

 
*1. 엡1:4~5, 11, 딤후1:9, 벧전1:20, 계13:8
 
*2. 성경 전체가 사실 이 주제를 반복한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선지자들, 사도들. 모두 전체 그림을 몰랐다. 히브리서 11장도 결국 믿음은 이해의 완성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3. 수제자였던 베드로조차도(눅24:12) 그랬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는(아마 그들은 실망에 가득차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나타나셔서 가슴 뜨겁게 구약을 풀어주셨다.(눅24:13-32)
 
*4. 눅2:40~52. 아주 엄밀하게는 [성자 하나님이 신성 안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셨다]는 뜻은 아니다. 개혁주의 정통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성장하셨다.]고 말한다. 조금 더 정교하게는, 참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본성 안에서 자라셨고 배우셨다.
 
*5. 원시복음(Proto-Evangelium)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시기 전에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창세기 3:21이 직접 엡4:24를 의미한다"라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지만, 창3:21 → 사61:10 → 갈3:27 → 엡4:24 → 계19장으로 연결할 수 있다. 즉 인간이 만든 무화과 잎 vs 하나님이 주신 옷이라는 대조이다. 칼빈도 지나친 알레고리적 해석은 경계했지만, 하나님이 죄인을 수치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은혜로 덮으셨다는 의미는 인정한다.( "새 옷의 예표")
 
또한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짓기 위한 살생을, 많은 개혁주의 설교자들(매튜 헨리, 스펄전, 보수적 개혁파 설교 전통)은 [가죽옷을 위해 동물의 죽음이 필요했다. → 죄를 덮기 위한 피흘림 → 제사의 그림자]라고 보았다. 다만 칼빈은 의외로 조심스럽다. 그는 칼빈은 [본문이 명시적으로 제사를 말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입히신 사건(창 3:21)을 죄인의 수치를 덮으시는 은혜의 표지로 이해해 왔다. 일부 해석자들은 동물의 죽음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이후 희생제사와 그리스도의 대속을 예표하는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본문 자체는 이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아담은 복음 전체를 몰랐지만, 복음의 씨앗은 받았다.
아브라함은 십자가를 몰랐지만, 약속을 받았다.
다윗은 교회를 몰랐지만,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씨앗이 그리스도 안에서 꽃을 피웠다.

 
(이는 게르하르두스 보스의 점진적 계시 사상과 헤르만 바빙크의 유기적 계시 개념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요약임)
 
*6. 하지만 개혁주의적으로는 [계시의 침묵]이다. 섭리까지 침묵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