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아니하냐?" — 성경은 왜 자꾸 반문(反問)하고 단번에 결론을 내릴까

 

들어가며: 성경을 읽다 마주치는 그 말투,  "왜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가?"

 

성경을 조금만 진지하게 읽어 본 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멈칫하는 대목이 있다. 하나님도, 선지자도, 사도들도 하나같이 비슷한 말투를 쓰곤 한다는 점이다.

"일꾼이 삯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냐?"
"이 일을 행할 권한이 없느냐?"
"너희가 이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가 감히 하나님께 따지겠느냐?"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누가 너를 변론하겠느냐?"

 

분명히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정작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가 않다. 묻자마자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고, 마치 "이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단번에 매듭지어 버린다. 그런데 본문 앞뒤를 곰곰이 살펴보면, 솔직히 다른 해석의 여지도 충분히 있어 보인다. 그래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종종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게 된다.

"잠깐만요. 다른 해석도 가능한 것 같은데요?" "논증이 아직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벌써 결론부터 내리시죠?"

 

이 느낌은 결코 불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문을 꼼꼼히 읽는 사람일수록 더 자주 부딪히는 정직한 반응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 초대교회와 개혁교회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리고 혹시 이것이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번역상의 문제는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 말투는 번역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원문 그 자체의 특징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고대의 언어적 습관, 그 시대 사람들이 공유하던 사고방식, 그리고 성경 특유의 신학이 함께 겹쳐 있다. 


1부. 왜 이렇게 빨리 결론을 내릴까 — 네 가지 이유

① 성경은 현대 논문이 아니라 고대 수사학의 산물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은, 성경이 현대의 학술 논문처럼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장 → 근거 → 반론 검토 → 결론"이라는 분석적 글쓰기에 익숙하다. 그러나 고대 유대교와 헬라-로마 세계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그 세계에서 "반문(反問, rhetorical question)"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대단히 강력한 논증 방식이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자기의 사도적 권리를 변호하는 대목을 보면 이 기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연달아 묻는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 고린도전서 9:7 (개역한글)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사 노릇을 하겠느냐? 누가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아니하겠느냐?

 

또 이렇게도 묻는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 고린도전서 9:4 (개역한글)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 고린도전서 9:5  (개역한글)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는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겉으로는 질문이지만, 이것들은 사실, 질문이 아니다. "당연히 그렇다!"를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흐름의 끝에서 못을 박듯 결론을 내린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 고린도전서 9:14 (개역한글)

 

오늘날로 치면, 법정에서 변호사가 배심원을 향해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말은 의견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이미 자명한 결론으로 청중을 끌고 가는 설득의 기술이다. 고대인에게 반문은 바로 그런 무기였다.

② 저자는 독자와 이미 공유된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현대 독자가 가장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우리는 무심코 성경 저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의 사람"을 처음부터 설득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바울이나 선지자들이 상대한 사람들은 대개 이미 구약을 알고, 회당의 전통에 익숙하며,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 공동체였다. 다시 말해, 저자와 독자 사이에는 이미 두텁게 공유된 전제가 깔려 있었다.

로마서 6장의 그 유명한 구절을 보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로마서 6:1-2  (개역한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말은 그 자체로 논리적 증명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이미 죄에 대해 죽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전제(로마서 5장 후반부와 6장 초반부)를 독자와 공유하고 있기에 비로소 성립한다. 만약 그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왜 반드시 그래야 하지?"라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전제를 이미 확정된 사실로 깔아 둔 채 논증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즐겨 쓰는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이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 로마서 7:1 (개역한글)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 고린도전서 6:9상 (개역한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고린도전서 6:19상 (개역한글) 

 

"알지 못하느냐?"는 진짜로 모르는지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이건 너희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환기에 가깝다. 공유된 진리를 다시 일깨우는 말투인 셈이다.

③ 선지자들은 '논쟁'이 아니라 '선포'의 자리에 서 있다

특히 구약의 선지자들은 현대 철학자처럼 토론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거의 언제나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 이사야 1:2, 예레미야 2:2, 에스겔 2:4 등 수백 회

 

이 표현은 선지서 전체에 걸쳐 끝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이 선지자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그는 자기 의견을 펼치는 토론자가 아니라, 보내신 분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자(使者)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동의를 기다려 권위를 얻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입에서는 이런 식의 반문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토기장이가 진흙에게 설명해야 하느냐?"

 

이 말은 "내가 논리적으로 너를 이겨서 설득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그대로 전달하겠다"에 훨씬 가깝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토론 문화에 익숙한 눈으로 보면 다소 독단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선지자는 본래부터 자기 생각을 변론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④ 성경은 모든 가능한 반론을 다루려는 책이 아니다

현대인은 어떤 주장을 들으면 거의 본능적으로 묻는다. "그 반론은요?", "예외는요?", "다른 해석은요?" 우리는 모든 경우의 수가 다 다뤄지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성경 저자들은 가능한 모든 경우를 일일이 다루지 않는다. 그들은 전하려는 핵심 진리를 분명히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그래서 논증이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울의 서신을 차분히 읽어 보면, 그는 결코 논증을 생략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길고 치밀한 논증을 펼친다. 다만 그 긴 논증의 중간중간, 혹은 그 끝에 이런 강한 반문들이 박혀 있을 뿐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롬3:4, 31, 6:2, 15, 7:7, 13, 9:14 11:1, 11, 갈2:17, 3:21, 고전6:15)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롬9:20)

이 표현들은 "논증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이미 충분히 논증을 마친 뒤에 찍는 결론부의 마침표이다. 우리가 그 문장 하나만 떼어 놓고 보기 때문에 "왜 갑자기 결론부터?"라고 느끼는 것이지, 앞뒤 문맥을 함께 읽으면 그것은 논증의 도착점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2부. 그렇다면 이것은 번역의 문제일까

여기서 많은 분들이 품는 의심이 있다. "혹시 한글로 옮기다 보니 말투가 좀 거칠어진 건 아닐까? 원문은 더 부드러운데 번역이 단정적으로 만든 건 아닐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것은 번역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니라 원문 자체의 특징이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한글 번역이 원문의 강도를 살짝 완화한 쪽에 가깝다.

헬라어 원문은 한글보다 더 강하다

로마서 6:2의 "그럴 수 없느니라"를 보자. 헬라어 원문은 μὴ γένοιτο(메 게노이토)*1이다. 이걸 직역하면 점잖은 "그럴 수 없느니라"가 아니라,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천만에!", "절대로 아니다!"에 가깝다. 거의 손사래를 치며 내뱉는 강한 부정이다. 한글 성경의 번역은 사실 꽤 정중하게 다듬은 편이다.

 

로마서 9:20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 로마서 9:20상 (개역한글)

 

이 구절의 원문은 Ὦ ἄνθρωπε(오 안트로페),*2 곧 " O man, 오 인간이여!"라는 외침으로 시작한다. 바울은 여기서 매우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정면으로 대조시킨다. 현대식으로 옮기면 "인간인 네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심문하려 드느냐?" 정도의 강렬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

 

그러고는 곧바로 토기장이 비유로 이어진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 로마서 9:20하 (개역한글)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 로마서 9:21 (개역한글)

토기장이 비유는 바울이 즉석에서 만든 게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 두면 좋은 것이 있다. 이 토기장이 비유는 바울이 갑자기 떠올린 새로운 발상이 아니다. 그는 구약 선지자들의 오랜 전통을 그대로 끌어다 쓰고 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다.

질그릇이 토기장이와 다투겠느냐?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 이사야 45:9

 

예레미야도 같은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 예레미야 18:6 (개역한글)

 

즉 바울의 로마서 9장(토기장이와 진흙)은 이사야와 예레미야로 거슬러 올라가는 깊은 뿌리를 가진 표현이다. 이 사실은 그 말투가 일시적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신학적 언어임을 보여준다.

히브리어의 반문법

구약 쪽은 더욱 흥미롭다. 히브리어에는 반문법이 대단히 발달해 있다. "토기장이가 진흙에게 설명해야 하느냐?" 같은 표현은 실제로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부정을 강하게 강조하는 문법적 장치이다. 우리말로 치면 "그게 말이 되냐?"라고 할 때와 비슷하다. 이 말을 들은 상대가 진지하게 "음, 말이 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답하길 기대하지 않는다. 질문 안에 이미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히브리 시문학과 선지서, 그리고 바울 서신에서 이런 반문법이 유난히 자주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세 층위가 겹쳐 있다

정리하면, 이 말투에는 세 가지 층위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첫째, 언어적 특징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반문법을 즐겨 사용했고, 그것은 당시에 매우 강력한 설득 기법이었다. 둘째, 문화적 특징이다. 고대인은 현대인처럼 "모든 전제를 처음부터 하나하나 증명"하는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전통과 성경, 권위와 관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했다. 그래서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는 진짜 질문이 아니라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라는 환기였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신학적 특징이다. 성경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성경은 질문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지만, 창조주를 피조물의 법정에 세우려는 태도만큼은 반복적으로 거부한다.

 

욥기의 마지막 부분이 이 점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욥의 질문 자체를 꾸짖지 않으신다.*3 오히려 욥을 정죄하던 친구들을 책망하신다. 그런데 막상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되물으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 욥기 38:4 (개역한글)

 

이것 역시 반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단순히 "너는 무엇을 아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가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네가 묻고 있는 그 세계, 네가 이해하려 애쓰는 그 질서를 누가 만들었느냐?"를 묻는다. 하나님은 단지 욥의 위치나 그의 무지를 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위치와 세계 자체의 창조주가 자신임을 드러내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너는 피조물이다"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모든 것을 지어낸 창조주, 곧 네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4 


3부. 초대교회는 이것을 어떻게 보았나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이런 반문들을 대체로 "권위 있는 진리의 선포"로 읽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이것을 번역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요한 크리소스톰의 고린도전서 강해 전통에 따르면 바울의 반문들을 설명하면서, 바울이 상대를 억지로 침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정된 진리를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 반문은 입을 틀어막는 위협이 아니라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는 환기였다는 것이다.*5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의 어려운 구절을 읽을 때는 먼저 교회의 신앙규범(regula fidei) 안에서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까다로운 문장 하나만 따로 떼어 내 논쟁거리로 삼지 말고, 계시 전체의 큰 그림 안에서 그 자리를 찾아 읽으라는 것이다.*6

"이 문장 하나만 떼어 놓고 다투지 말고, 전체 계시 안에서 읽어라."

 

이것이 초대교회의 기본 태도였다. 아우구스티누스, 크리소스톰 모두 "바울이 논증을 생략했다"고 읽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이 이미 충분히 논증한 뒤에, 반문을 통해 그 결론을 단단히 확정하고 있다고 읽었다.


4부. 개혁교회는 이것을 어떻게 보았나

개혁주의 전통은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균형을 잡는다. 두 가지를 동시에, 그리고 팽팽하게 붙잡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맹목적 권위주의는 아니다

칼빈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궁극적 권위를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다. 더 이상 위로 거슬러 올라갈 상위의 법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칼빈이 성경 저자들을 "논리 없이 권위만 휘두르는 사람"으로 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바울을 대단히 치밀한 논증가로 읽었다.

 

다시, 로마서 9장의 그 강렬한 구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 로마서 9:20

 

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이렇게 설명한다. "바울은 질문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피조물이 창조주를 재판하려 드는 그 교만한 태도를 꾸짖는 것이다."*7 다시 말해, 질문은 허용되지만 하나님을 인간 법정의 피고석에 세우는 태도는 거부된다는 것이다. 이 구분은 개혁주의 성경 해석의 핵심적인 균형점이다. 권위를 인정하되 그 권위가 결코 비합리적 독단이 아님을 함께 붙잡는 것이다.


5부. 성경에는 두 종류의 질문이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따라오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물으면 안 되는 건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대목이야말로 이 주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균형이다. 성경을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사실 두 종류의 질문이 나란히 존재한다.

① 신앙 안에서의 질문

먼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면서도 그분께 묻고 씨름하는 질문이 있다. 성경은 이런 인물들을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절규를 그대로 기록해 둔다. 욥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과녁으로 삼으셨나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 욥기 7:20 (개역한글)

예레미야는 더욱 대담하게 따져 묻는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 예레미야 12:1상 (개역한글)

하박국은 응답 없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 하박국 1:2 (개역한글)

 

다윗 역시 시편에서 똑같이 호소한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시편 13:1 (개역한글)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묻는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원망하듯 묻는다. 그러나 성경은 이 질문들을 죄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믿음을 버린 질문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을 심판하려는 질문

반면, 또 다른 종류의 질문이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자기 법정에 세우고,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을 심판하려 드는 태도이다. 앞서, 로마서 9:20, 이사야 45:9, 예레미야 18:6에서 하나님이 단호하게 막아서시는 것이 바로 이 두 번째 종류의 질문이다.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초대교회와 개혁교회가 한 목소리로 붙든 구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질문 자체는 금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피조물이 창조주를 법정에 세우는 태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둘의 차이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이다. 욥과 예레미야와 하박국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물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 채 씨름했다. 그러나 로마서 9장이 막아서는 질문은,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내 기준에 맞게 설명하지 못하면 그분이 틀린 것이다"로 넘어가 버린 질문이다. 바로 그 선을 넘는 지점을 성경은 경계한다.


나가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결론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성경의 "당연하지 아니하냐?", "권한이 없느냐?", "알지 못하느냐?", "누가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같은 표현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들은 결코 번역 과정에서 우연히 생겨난 거친 말투가 아니다. 오히려 한글 번역은 그 강도를 다소 누그러뜨린 편이다. 이 표현들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수사학적 반문법, 고대 유대-헬라 세계가 공유하던 전제의 문화,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강조하는 성경 특유의 신학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낸 언어적 특징이다.

 

그러므로 이 반문들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내지르는 단정(斷定) 혹은 단언(斷言) 그리고 궁극적으로 독단(獨斷)이 아니다. 초대교회와 개혁교회의 일관된 읽기를 따르자면, 이 표현들은 적어도 네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첫째, 이미 제시한 긴 논증을 한 문장으로 요약/압축하거나, 둘째, 공동체가 함께 붙들고 있는 신앙의 전제를 다시 일깨우거나, 셋째, 하나님의 권위를 그대로 선포하거나, 넷째, 인간의 이성이 결코 넘볼 수 없는 경계를 분명히 그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현대인으로서 느끼는 "왜 이렇게 빨리 결론을 내리시지?"라는 인상은, 사실 상당 부분 현대의 분석적·학술적 글쓰기 방식과 고대의 선포적·수사학적 글쓰기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성경이 논리를 건너뛴 것이 아니라, 성경이 쓰인 시대의 언어와 사고방식이 우리와 달랐던 것이다.

 

다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꼭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한다. 개혁주의 전통이 그토록 소중히 여긴 균형, 곧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속에는 욥과 예레미야와 하박국과 다윗처럼 하나님께 깊이 묻고 정직하게 씨름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우리의 의심과 절규와 물음은 그 자체로 불신앙이 아니다.

 

문제는 질문이 아니라, 그 질문이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내 기준에 맞게 설명하지 못하면 틀렸다"로 변질되는 바로 그 지점이다. 초대교회와 개혁교회가 한결같이 주목한 것이 바로 이 경계선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껏 물어도 된다. 다만 그 물음이 창조주를 피고석에 앉히는 자리로까지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가 선 자리를 기억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의 반문(反問)은 논리의 결핍이 아니라, 계시의 권위와 공유된 신앙 전제 위에서 작동하는 신학적 수사다.

 

 

 

 

 

각주

 

*1 https://www.die-bibel.de/en/bible/NA28,UBS5,NIV/ROM.6 (독일성서공회)

 

*2 https://www.die-bibel.de/en/bible/NA28,UBS5,NIV/ROM.9 (독일성서공회)

 

*3 욥기 38–42장에서 욥의 말이 교정되는 면도 있다. 

 

*4-1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신다. 대신 자신을 보여 주신다. 그래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5)

 

즉 욥기의 결론은 "아, 이제 원인을 알았다"가 아니라, "아, 이제 그 원인보다 크신 분이 누구신지 알았다"에 가깝다.

 

*4-2 인식론적(epistemological) 차원에서는 다른 층위의 해석도 가능하다. 즉, "너는 지금 어떤 자리에서 말하고 있느냐?"를 드러내는, 욥의 위치를 환기시키는 질문이다. 하나님은 논쟁에서 이기시려는 게 아니라, 피조물이 선 자리를 일깨우고 계신 것이다.

 

*5 요한 크리소스톰, Homilies on First Corinthians, Homily XXI,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2, ed. Philip Schaff (Peabody, MA: Hendrickson, 1994), on 1 Cor. 9.

 

*6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On Christian Doctrine (De Doctrina Christiana), I.36–40, trans. D. W. Robertson Jr. (Indianapolis: Bobbs-Merrill, 1958).

 

*7 존 칼빈, Commentaries o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trans. and ed. John Owen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2003), commentary on Rom. 9:20–21.

 

 

 

 

더 깊이 읽기: 성경의 반문법, 수사학, 그리고 창조주-피조물 구별

아래 문헌들은 본 에세이의 직접적인 출처 목록이라기보다, 성경에 나타나는 반문(反問), 바울의 논증 방식, 성경 수사학, 창조주-피조물 구별, 그리고 교회의 해석 전통을 더 깊이 연구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한 확장 읽기 자료들이다.

Augustine, Aurelius.

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De Doctrina Christiana). Translated by D. W. Robertson Jr. Indianapolis: Bobbs-Merrill, 1958.

성경의 개별 구절을 고립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교회의 신앙규범(regula fidei)과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학을 담고 있다. 본문의 난해한 표현이나 강한 수사적 언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고전이다.

Calvin, John.*

Calvin, John. Commentaries o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Translated and edited by John Owen.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2003.

로마서 전반에 대한 칼빈의 대표적 주석. 특히 로마서 9장에 나타나는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와 토기장이 비유에 대한 해설은,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과 하나님을 심판하려는 태도를 구분하는 개혁주의적 관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그는 반문 자체보다 왜 성경이 때로 설명 없이 결론을 선포하는가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대답은, 전체 계시 안에서 읽으라.*

Chrysostom, John.

Chrysostom, John. Homilies on First Corinthians.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2. Edited by Philip Schaff. Peabody, MA: Hendrickson, 1994.

초대교회 최고의 설교가 가운데 한 사람인 크리소스톰의 고린도전서 강해.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반문법과 설득 방식, 그리고 청중을 향한 수사학적 전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바울의 논증이 단순한 권위주의가 아니라 목회적·설교적 소통이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Dodd, C. H.

Dodd, C. H.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32.

20세기 바울 연구의 고전. 로마서에 나타나는 논쟁적 문체(diatribe)와 가상의 반대자를 상정한 바울의 논증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로마서의 반문들이 어떤 수사학적 환경 속에서 사용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Stowers, Stanley K.*

Stowers, Stanley K. The Diatribe and Paul's Letter to the Romans. Chico, CA: Scholars Press, 1981.

바울의 반문법과 논쟁적 문체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학술서이다. 로마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럴 수 없느니라", "이 사람아", "누가 말하겠느냐"와 같은 표현들이 고대 수사학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Wright, N. T.

Wright, N. 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3.

바울의 논증 구조와 세계관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방대한 연구서. 바울의 반문이 논리를 대신하는 장치가 아니라, 이미 전개된 논증을 압축하고 강화하는 수사적 도구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Van Til, Cornelius.

Van Til, Cornelius. The Defense of the Faith. 4th ed.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8.

반문법 자체를 연구한 책은 아니지만, 성경의 권위와 창조주-피조물 구별(Creator–Creature Distinction)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혁주의 변증학 고전이다. 특히 왜 하나님이 때로 설명 대신 권위를 선언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며*,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과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의 차이를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데 유익하다.


이 문헌들은 각각 초대교회, 종교개혁, 현대 신약학, 개혁주의 변증학의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성경의 수사학과 권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조명한다. 함께 읽으면 성경의 반문법을 단순한 문체적 특징이 아니라, 계시와 신학, 수사학이 만나는 지점으로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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