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이어지는 복음의 여정
사도행전을 처음 펼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각이 있다. 뭔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낯선 것 같기도 한 그 느낌. 앞에서 복음서를 읽어 왔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고, 베드로가 설교하고, 사람들이 쓰러지고, 바울이 등장하고, 배가 난파되고, 감옥 문이 열리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과연 이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책은 사실 2권짜리 작품의 두 번째 권이다
많은 사람이 신약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그 다음에 사도행전 순으로 읽는다. 자연스럽게 네 복음서를 다 읽고 나서 사도행전으로 넘어오는 흐름이다. 그런데 사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한 세트로 묶인 책이다. 저자가 같고, 수신자가 같고, 이야기가 이어진다.
누가복음 1장 1절과 사도행전 1장 1절을 나란히 놓고 읽어보면 바로 보인다. 둘 다 "데오빌로"*1라는 같은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이고, 사도행전은 "내가 먼저 쓴 글"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즉, 누가복음이 1권이고 사도행전이 2권이다.*2 그렇다면 두 책의 관계는 무엇일까.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을 기록한다. 사도행전은 승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 계속 행하시는 일을 기록한다. 다시 말해,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이야기가 다른 방식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확장하시는 역사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도행전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계속 일하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3
주인공은 사도들이 아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두 사람에게 시선이 쏠린다. 전반부의 베드로와 후반부의 바울. 베드로의 설교, 바울의 선교 여행, 바울의 재판, 바울의 로마 여정. 어느새 이 책은 "베드로와 바울의 활약기"처럼 읽히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조금 다른 눈으로 다시 읽어보면 다른 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성령께서 보내신다. 성령께서 막으신다. 성령께서 택하신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신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시고(행2장),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명하셨으며(행13:2-4), 바울이 아시아로 가려 할 때는 길을 막으시고(행16:6-7), 마게도냐 환상을 통해 새로운 선교의 길로 인도하셨다(행16:9-10). 사도들은 분명히 신실하게 섬겼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공이 아니라 도구였다. 사도행전은 인간의 성공기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다. 이 렌즈를 하나 끼고 읽는 것만으로도 사도행전 전체가 다르게 보인다.
이 책에는 목차가 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짧지만 책 전체의 지도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 이 네 지명이 사도행전 전체의 목차다. 실제로 책의 흐름이 정확히 이 순서를 따라간다.*4
1장부터 7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의 이야기다. 오순절 성령 강림, 초대교회의 탄생, 스데반의 순교. 8장부터 12장은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복음을 들고 나가는 이야기다. 에디오피아 내시의 세례,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이 전해지는 장면이 여기 있다. 13장부터 28장은 바울의 선교 여정과 함께 복음이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그리고 마침내 로마에 이르는 이야기다(땅끝). 이 구조를 알고 읽으면 길을 잃지 않는다. 지금 내가 어느 지점을 읽고 있는지, 복음이 어디까지 나아갔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증인의 책
사도행전에서 반복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증인'이다.*5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증인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들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수많은 설교가 등장한다. 베드로의 설교, 스데반의 설교, 바울의 설교. 기적보다도 말씀의 증언이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확장 이전에 복음의 증언이 확장되는 책이다.
복음은 경계를 넘어가는 이야기다
사도행전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계속해서 경계를 허물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1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 그 자리에는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있었다(행2:5). 그들의 귀에 각자의 언어로 복음이 들렸다.*6 이 장면부터 이미 예루살렘의 경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후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진다.*7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오랜 감정을 생각하면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2 에디오피아 내시가 세례를 받는다(행8장). 이방인으로 당시 성전 공동체의 중심에서 멀리 있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다.*8
3 고넬료 사건에서는 베드로 자신도 처음에는 주저했다(행10장). 율법적으로 부정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셨다.
4 바울 선교 여정에서 복음은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아테네. 마침내 로마.
복음이 나아갈 때마다 누군가는 환영했고, 누군가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복음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말해, 사도행전은 복음이 민족과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초대교회는 무엇으로 살았는가
사도행전 2장 42절은 초대교회의 일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말씀, 교제, 성찬, 기도. 여기에 선교와 섬김이 더해지면 초대교회의 생활 방식이 완성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고 기록한다. 이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초대교회가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조직 체계 덕분에 성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냥 함께 모였고, 말씀을 들었고, 먹었고, 기도했다. 그 단순함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셨다. 오늘날 교회를 생각할 때 사도행전 2장은 자꾸 돌아오게 되는 거울 같은 본문이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바울 서신이 보인다
많은 사람이 사도행전을 다 읽고 나서 로마서를 펼친다. 그런데 그 사이에 뭔가 연결이 끊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갑자기 신학적인 논증이 쏟아지고, 이방인 문제가 나오고, 은혜와 율법의 관계가 논의된다. 어디서 이 이야기가 나온 건지 배경이 잡히지 않는다. 사실 바울 서신은 사도행전을 배경으로 읽어야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바울이 빌립보를 처음 방문한 이야기가 사도행전 16장에 있다. 감옥에서 찬양하다 문이 열리고, 간수의 가정이 세례를 받는 그 장면. 그 교회가 빌립보 교회다. 나중에 바울이 감옥에서 쓴 "기뻐하라, 또 기뻐하라"는 편지가 빌립보서다. 그 감옥과 그 기쁨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사도행전을 먼저 읽은 사람은 빌립보서를 읽을 때 전혀 다른 무게로 받아들이게 된다. 고린도 교회가 왜 그렇게 분쟁이 많았는지, 에베소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갈라디아 지역에서 바울이 왜 그토록 격하게 편지를 써야 했는지 — 이 모든 것이 사도행전의 선교 여행 이야기 안에 담겨 있다. 사도행전은 바울 서신을 읽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배경 설명서다.
| 시기 | 추정 연도 | 사도행전 | 기록된 서신 |
| 회심 | AD 33~35 | 행 9 | - |
| 1차 선교여행 | 46~48 | 행 13~14 | 갈라디아서 (48~49년) |
| 예루살렘 공의회 | 49 | 행 15 | - |
| 2차 선교여행 | 49~52 | 행 15:36~18:22 | 데살로니가전서(50~51) → 데살로니가후서(51~52) |
| 3차 선교여행 | 53~57 | 행 18:23~21:17 | 고린도전서(54~55) → 고린도후서(55~56) → 로마서(56~57) |
| 로마 압송 | 57~60 | 행 21~28 | - |
| 로마 가택연금 | 60~62 | 행 28 |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옥중서신) |
| 이후 말년 | 63~67 |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 (목회서신) |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은 놀랍도록 열려 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다. 복음이 마침내 당시 세계의 중심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바울은 셋집에 머물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책은 그렇게, 결말 없이 끝난다. 왜 이렇게 끝났을까. 이것은 미완성이 아니다. 의도적인 열린 결말이다.*9 복음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것이 끝이 아니라, 로마에서 또 다른 시작이 일어났다. 그 이야기가 오늘까지 이어져 왔고,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 이야기 안에 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페이지는 우리를 향해 열려 있다.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자리가, 복음이 나아가고 있는 그 다음 장(章)이다.
이 책을 읽을 때 한 가지만 기억한다면
복음서는 "예수께서 오셨다"를 증언한다. 사도행전은 "오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지금도 계속 일하신다"를 증언한다. 이 두 문장이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으로,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서신서로 넘어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다리가 된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땅끝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기록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서신서는 그렇게 세워진 교회들을 향한 사도들의 편지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복음서의 끝이 아니라 교회의 시작이며, 서신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다리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은 로마에 이르렀고, 그 복음은 세대를 지나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우리는 지금도 동일한 복음을 맡은 교회로서, 하나님께서 이어 가시는 그 역사 안에 살아가고 있다.
각주
*1. 데오빌로: 헬라어 θεόφιλος, 테오필로스는 헬라어로 '하나님의 친구' 또는 '(사랑받는)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데오필로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더 없고, 그의 정체에 대한 여러 추측과 전승이 있을 뿐이다. (여러 의견에 대해서는 영문 위키피디아 링크를 참고할 것; Theophilus)
*2. 존 로스(John Ross, 중국 이름: 나요한(羅約翰), 1842~1915)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로서 중국에서 선교활동 중에 최초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이자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으로 알려져있다(위키피디아 발췌). 그는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조선 민중(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누가복음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1882년 한글 최초의 성경으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를 가장 먼저 인쇄·출판하게 된다(이는 영국 성서공회와 주고받은 서신,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보고서 등을 통해 확인된다). 덧붙여, 존 로스의 사도행전은 데자행젹으로 번역하였다(1883년). ㅡ 대한성서공회의 한글성경 번역사 페이지에서 두 성경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3. 사도행전은;
- 성령
- 그리스도
- 교회
모두를 함께 증언하는 책이다.
-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사역을 매우 강조했고,
- F. F. 브루스는 성령의 인도와 교회의 확장을 함께 본다.
- 에드먼드 클라우니 계열에서는 교회의 탄생과 구속사적 전개를 중요하게 본다.
개혁주의 주석들은 강조점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을 확장하시는 역사로 이해한다. 즉 개혁주의 주석들을 종합하면, 다음 이해가 가장 균형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는 역사ㅡ
그래서 결국ㅡ
사도행전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을 세상 끝까지 확장하시는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4. 이 문장은 특정 한 사람의 표현이라기보다, 현대 사도행전 연구에서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관점이다.
- F. F. 브루스(F. F. Bruce, The Book of the Acts)
- 행 1:8을 사도행전 전체의 프로그램(programmatic verse)으로 본다.
- 예루살렘 → 유대·사마리아 → 이방 세계라는 전개를 강조한다.
- 존 스토트(John Stott, The Message of Acts)
- 행 1:8을 사도행전의 '목차' 또는 '개요' 역할을 하는 말씀으로 설명한다.
- 그의 사도행전 주석에서는 이 구조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 대럴 복(Darrell L. Bock, Acts)
- 누가가 의도적으로 행 1:8을 책 전체의 구조를 제시하는 프로그램 선언(programmatic statement)으로 배치했다고 설명한다.
- 크레이그 키너(Craig S. Keener)
- 지리적 확장뿐 아니라 복음의 선교적 확장을 보여주는 핵심 구절로 본다.
많은 사도행전 연구자들은 사도행전 1장 8절을 책 전체의 구조를 보여 주는 핵심 구절로 이해한다. 실제로 사도행전의 전개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마침내 땅끝을 향해 나아가는 흐름을 따른다.
*5.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왜 '사소해 보이는 이름들'을 기록했는가? ㅡ 사도행전 12장의 로데라는 여자아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중 한 명의 이름 글로바, 마태복음 27장의 구레네 사람이자 로마서 16장 루포의 아버지 시몬. 이렇게 사소한 이름까지 성경에 기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A) 고대 역사 기록 방식: ‘증인 열거 방식(eyewitness citation)’
성경 기자들이 이름을 기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건의 실제 증인이 누구였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역사문헌을 기록할 때 흔히 사용된 방식이다.
- 누가(눅·행): “처음부터 목격자”(눅1:2)를 근거로 한 역사서 작성
- 바울의 이름 열거(롬16장): 당시 교회에 “실존 인물”을 통해 진술의 신뢰성 확보
- 마가복음: 패턴적으로 사건의 증인 이름을 의도적으로 넣음(예: 바디매오, 시몬 베다니 나병환자의 집 등). 전통적으로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였기에, 베드로가 증언한 인물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즉, 이름을 넣은 이유는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증인 정보였기 때문이다.
(B) 전승적 의미가 있음; 로데(행 12장) ㅡ 하나님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존재”를 통해 베드로의 석방 사실을 먼저 증언하게 하심. 그러나 그녀의 이후 생애를 추적한 비성경적 전승은 채택하지 않는다. 엠마오 두 제자—글로바; 요 19:25의 클로파(Κλωπᾶ)와 동일인인지 여부는 논쟁적임. 클로파는 요셉(예수의 양부)의 형제, 즉 예수의 ‘삼촌 격’. 그의 아들 시몬(Simeon)이 예루살렘 교회의 두 번째 감독. 일부 전승은 엠마오 제자 한 사람을 이 ‘클로파’로 동일시함. 구레네 사람 시몬(막 15:21); 루포(롬 16:13)는 로마교회의 핵심 인물이며 교부 전승에 따르면 알렉산더·루포 형제는 로마 선교의 핵심 증인으로 활동함. 마가복음의 수신자가 로마교회였기 때문에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아는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라는 식의 언급함.
*6. 일부 개혁주의·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오순절 사건을 창세기 11장의 바벨 사건과 구속사적으로 연결하여 이해한다. 바벨에서는 죄로 인해 언어가 혼잡해지고 민족이 흩어졌지만, 오순절에서는 각 민족이 자기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는다. 언어가 하나로 통일된 것은 아니지만,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열렸다는 점에서 오순절은 바벨 이후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해된다.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 주석에서 오순절은;
바벨에서 흩어진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되는 사건
으로 이해한다. 다만 언어 자체가 하나가 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7. 사마리아를 이해하려면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였다(왕하17장). 앗수르는 피정복민을 여러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 다른 민족들을 사마리아에 이주시켜 서로 섞여 살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 혈통과 이방 민족이 혼합된 집단으로 인식되었고, 유대인들과 오랜 갈등을 겪게 되었다. 포로 귀환 이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참여하려 했으나 거절당했고(스4장), 이후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우게 된다. 이때부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종교적·민족적 대립은 더욱 깊어졌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의 교제를 꺼렸지만, 예수께서는 이러한 장벽을 의도적으로 허무셨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셨고, 누가복음 10장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참된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치셨다. 또한 누가복음 17장에서는 열 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감사하러 돌아온 사람이 사마리아인이었음을 기록한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해졌다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다. 오랫동안 적대하던 민족 사이의 장벽을 복음이 허물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구속사적 전환점이다. 일부 개혁주의·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사마리아 선교를 오순절 이후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역사적 원수에게까지 확장되는 첫 단계로 이해한다.
사마리아 선교의 시작
① 스데반의 순교 → 박해 → 흩어짐 (행8:1-4)
스데반이 순교한 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성도들이 흩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8:4) 박해가 오히려 선교의 계기가 된다.
②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감 (행8:5-13)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행8:5) 여기가 사마리아 선교의 시작이다. 그리고 귀신이 떠나고 병자가 고침 받고 큰 기쁨이 생긴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8:8)
③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 인정(행8:14-25)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다. 사마리아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역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두 사도가 안수하자 성령께서 임하신다. 이 사건은 유대인 교회와 사마리아 교회가 하나의 교회임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④ 그 다음이 에디오피아 내시(행8:26-40)
흥미롭게도 사마리아 선교 직후 바로 에디오피아 내시가 나온다. 즉, 예루살렘 → 사마리아 → 에디오피아로, 복음의 경계가 계속 넓어진다.
잠깐. 사도행전 8장에서 베드로와 함께 사마리아에 내려온 사람이 요한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이 요한은 예전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자
"불을 내려 멸할까요?"(눅9:54)
라고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께 꾸중을 들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서는 바로 그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 안수하며 기도한다. 이건 엄청난 변화다. 예수의 복음이 사도들의 마음부터 바꾸었다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마리아 선교는 8장의 중심 주제이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흩어진 성도들 가운데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그리스도를 전했고(행8:5),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 이를 확인하고 함께 기도함으로써(행8:14-17), 사마리아 교회가 동일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임이 드러났다. 특히 요한은 과거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달라고 했던 제자(눅9:54)였지만, 이제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허무셨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장벽이 사도행전에서 실제로 무너지는 중요한 구속사적 장면이다.
*8. 에디오피아 내시는 성경 본문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것으로만 기록된다.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오래된 교회 전통으로 전해지지만, 이를 입증하는 초기 역사 자료는 없다(역사적으로 가장 확실한 것은 4세기. 프루멘티우스와 그의 형제 에데시우스가 악숨 왕국에 들어간 이후 아타나시우스가 프루멘티우스를 에티오피아 최초의 감독으로 임명하는 사건이 에티오피아 교회의 출발이다). 다만 그의 회심은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먼 이방 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장면으로 이해된다.
*9. 바울의 스페인 선교(혹은 제4차 선교여행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신약 성경은 기록하지 않고, 역사적 전승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존재한다." (롬15:23-24, 28, 일부 학자들은 구약의 다시스(Tarshish)를 이베리아 반도와 연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는 그 이후를 기록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바울 개인의 생애를 끝맺는 데 있지 않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제국의 중심 로마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 AD 95년경 클레멘스(로마의 클레멘스)는 클레멘스전서 5장에서 바울이 "서쪽의 끝(the limits of the west)"까지 갔다고 기록한다. 당시 "서쪽의 끝"은 많은 학자들이 스페인으로 이해한다. 확실한 증거는 아니지만 굉장히 이른 증언이다.
- 2세기 후반 무라토리 정경 목록(Muratorian Fragment)에서도 "누가가 바울의 스페인 여행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언급이 있다. 즉 2세기 교회는 이미 "바울은 스페인에 갔다."고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하 원문발췌; “Lucas optimo Theophilo comprehendit, quae sub praesentia eius singula gerebantur, sicut et remote passionem Petri evidenter declarat, sed et profectione Pauli ab urbe ad Spaniam proficiscentis” 직역하면, “누가는 ‘훌륭하신 디오빌로’에게 그가 직접 본 일들을 요약했는데, 이는 베드로의 수난을 생략한 점으로도 분명히 드러나고, 또한 바울이 로마에서 스페인으로 떠난 일도 생략한 점으로도 드러난다”.
- 4세기,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서는 바울이 로마에서 석방된 후 다시 선교하고 나중에 다시 체포되어 순교했다고 기록한다. 다만 스페인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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