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기존에 작성했던 글들을 참고하여 정리한 글입니다.

tedwiki 티스토리- 성경 연대(주요사건)-저작시기 비교 표 [중간사-신약편]

 

— 복음이 편지가 되어 교회에 전해지다

신약을 읽다 보면 많은 성도들이 비슷한 지점에서 멈칫한다. 복음서까지는 이야기라 따라갈 만하고, 사도행전도 사건의 연속이라 흐름이 보인다. 그런데 로마서를 펼치는 순간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갑자기 논증이 쏟아지고, 율법과 은혜, 칭의와 성화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고, 문장은 길고 빽빽해진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많은 성도들이 복음서보다 바울서신을 더 어려워한다. 하지만 한 가지만 짚어 두면 바울서신은 의외로 친근해진다. 바울서신은 신학 교과서가 아니라 편지다. 살아 있는 교회를 향해, 실제 문제를 안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쓰인 편지다. 이 사실 하나만 마음에 두고 읽기 시작해도 바울서신의 문턱은 한참 낮아진다.


편지가 먼저였을까, 교회가 먼저였을까

많은 사람이 로마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를 마치 신학책처럼 읽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된 교리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순서는 정반대였다. 먼저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바울이 편지를 보냈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바울은 책상에 앉아 "이제 기독교 교리를 정리해 보자"는 마음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갈라디아 교회가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 구체적인 상황에 답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러니까 바울서신은 살아 있는 교회와 나눈 실제 대화다. 이 점을 알면 읽는 자세가 달라진다. 우리는 지금 누군가의 편지를 어깨너머로 읽고 있는 것이다. 그 편지가 왜 쓰였는지, 받는 교회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함께 떠올리면, 딱딱하게만 보이던 문장들이 살아 있는 목소리로 바뀌기 시작한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바울서신이 살아난다

앞서 사도행전을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역사"라고 했다. 바울서신은 바로 그렇게 세워진 교회들에게 보내진 편지다. 둘은 따로 떨어진 책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다. 바울이 어느 선교 여행에서 어느 교회를 세웠는지를 알면, 그 교회에 보낸 편지가 전혀 다르게 읽힌다. 대략적인 흐름을 정리하면 이렇다.;

1차 선교 여행 이후에 → 갈라디아서

2차 선교 여행 무렵에 →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3차 선교 여행 동안에 →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로마 투옥 시기에 (옥중서신) →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말년에 (목회서신) →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이 표를 외울 필요는 없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각 편지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상황에서 쓰였다는 것. 예를 들어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편지인데, 그 안에 "항상 기뻐하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온다. 감옥에서 기쁨을 노래한 편지.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던 그 장면을 떠올리면, 이 기쁨이 어디서 왔는지가 보인다.


바울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서신을 읽다 보면 각 편지가 다루는 주제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모든 다양함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같은 것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서신마다의 강조점을 아주 간단히만 정리하면 이렇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로마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진리를 가장 깊이 펼쳐 낸다.

  • 롬1:16-17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린도전후서는 십자가와 교회의 문제를 다룬다.

  • 고전2:2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에베소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선언한다.

  • 엡1:22-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을 노래한다.

  • 빌3:8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드러낸다.

  • 골 2:9-10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리고 목회서신은 건강한 교회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가르친다.

  • 딤전 3:15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여기서 각 권을 자세히 요약하려 들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바울은 상황마다 다른 편지를 썼지만, 결국 같은 복음을 서로 다른 자리에 적용하고 있었다. 하나의 복음이 여러 교회의 여러 문제 속으로 들어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빛난 것이다.


왜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을까

바울서신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복음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 바울은 원래 철저한 유대인이었다. 당대 최고의 율법 교사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고, 바리새인이었으며, 율법에 대한 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행22장). 그 열심이 어찌나 강했던지,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일에 앞장섰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이 바로 사울 즉, 바울이었다.*1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 그 사건 이후 모든 것이 뒤집혔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바울은 유대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로 갈아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평생 붙들어 온 구약의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다윗에게 주신 언약, 선지자들이 외쳤던 메시아 — 그 모든 것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바울에게 이것은 배교가 아니라 완성이었다. 이 점을 이해하면 바울서신 전체가 다르게 보인다. 바울은 구약을 버린 사람이 아니라, 구약을 끝까지 읽어 낸 사람이다.


그리스도교는 바울이 만든 것일까

요즘 인터넷이나 영상에서 자주 접하는 주장이 있다. "예수는 그저 한 명의 유대인 선생이었고, 오늘날의 기독교는 사실 바울이 만든 것이다."*2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라 마음이 흔들리는 성도들도 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성경 안에 분명하게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요약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 한 마디가 모든 것을 정리해 준다. 바울은 복음을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받아서 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복음은 바울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그가 물려받은 것이다.*3 복음의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다. 예수께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고, 교회가 세워졌고, 그 다음에 바울이 부름받았다. 바울은 이 이야기의 창시자가 아니라, 가장 나중에 합류한 증인이자 해설자다. 그러니 바울은 새 종교의 설립자가 아니다. 이미 주어진 복음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가장 멀리까지 전한 사도다.


바울 신학의 중심을 한눈에

바울서신을 읽다 보면 다루는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길을 잃기 쉽다. 그럴 때 붙들 수 있는 단순한 축이 있다. 십자가, 부활, 그리고 새 창조. 혹은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 복음, 그리고 교회. 바울이 아무리 복잡한 논증을 펼쳐도, 결국 그가 가리키는 곳은 이 세 지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고, 그 복음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 어떤 편지를 읽든 이 중심축을 기억하면 길을 잃지 않는다. 바울은 정교한 교리 체계를 짓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여야 하는지를 보여 주려 했다.


바울은 구약을 어떻게 읽었는가

이 에세이들이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바울서신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구약을 단편적인 옛 기록으로 보지 않았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출애굽의 구원, 시내산의 율법, 다윗에게 주신 왕조의 언약, 선지자들이 바라본 회복 —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바울서신을 읽다 보면 끊임없이 구약이 인용된다.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갈라디아서에서 다시 아브라함의 약속이 다뤄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서신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다리이기도 하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지를 해설하는 책인 것이다.


그 편지는 오늘 우리에게도 쓰였다

바울의 편지들은 분명 특정한 교회, 특정한 사람, 특정한 문제를 향해 쓰였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 갈라디아 교회의 혼란, 빌레몬이라는 한 사람의 결단. 2천 년 전 지중해 연안의 구체적인 상황들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편지들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을 건다. 왜냐하면 우리도 같은 복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직면하는 본질적인 문제들 — 신자들의 분열, 시험, 낙심, 첫 사랑의 식어짐, 진리를 향한 흔들림 — 은 시대가 바뀌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가 오늘 우리 교회의 거울이 되고, 빌립보 교회에 보낸 기쁨의 편지가 오늘 지친 성도의 위로가 된다.


이 책을 읽을 때 한 가지만 기억한다면,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증언한다. 사도행전은 그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역사를 기록한다. 그리고 바울서신은 그 복음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또 살아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바울서신은 새로운 복음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이미 전해진 복음을 교회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한 사도의 편지다.

바울서신을 어렵게 느껴 멀리해 왔다면, 이번에는 편지를 받아 든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 보시길 권한다. 그 편지의 수신자 자리에 우리 자신을 놓고 읽을 때, 바울이 그토록 전하고 싶어 했던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 있는 음성으로 들려올 것이다.

 

 

 

각주

 

*1.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울과 바울, 각각 유대식, 헬라식 이름으로 보는 것이 정통이다; 즉,

  • 사울(Σαῦλος, Saulos) → 히브리식(또는 유대식) 이름
  • 바울(Παῦλος, Paulos) → 로마식(라틴식) 이름

처음부터 함께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도행전 13장 9절이 핵심이다.

"사울이라 하는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행 13:9)


여기서 누가는 "사울이 이름을 바꾸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울이라 하는 바울"(Σαῦλος ὁ καὶ Παῦλος)이라고 쓴다. 헬라어의 ὁ καὶ(호 카이)는 "곧", "또한 ~라고도 불리는"이라는 뜻이다. 즉, 이미 두 이름을 가지고 있었음을 자연스럽게 전제한다. 당시에는 두 이름을 가지는 것은 매우 흔했다.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유대 공동체에서는 히브리 이름을 사용하고, 헬라·로마 사회에서는 헬라어나 라틴 이름을 함께 사용했다. 예를 들어

  • 요셉 → 바나바
  • 도르가 → 다비다
  • 실라 → 실바누스

처럼 두 이름을 사용하는 사례가 신약에도 있다.

 

보통 많은 설교에서 "회심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행전 13장부터 이방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누가는 독자들에게 익숙한 Paulos를 계속 사용한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방 선교의 무대가 중심이 되면서 누가가 로마식 이름을 계속 사용하기 시작한 것

으로 이해한다.

 

다만 성경에는 이름을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신 경우가 있다.

  • 아브람 → 아브라함
  • 사래 → 사라
  • 야곱 → 이스라엘
  • 시몬 → 베드로

이 경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바꾸시는 사건이다. 그러나 사울 → 바울은 그런 기록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울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셨다."는 것은 성경의 진술이 아니라 후대에 널리 퍼진 설명이다.

 

사울과 바울은 서로 다른 시기에 사용한 이름이 아니라, 바울이 처음부터 함께 가지고 있던 유대식 이름과 로마식 이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도행전 13장 9절에서 누가는 "사울이라 하는 바울"이라고 기록하며, 이후 이방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로마식 이름인 '바울'을 계속 사용한다. 따라서 이는 회심 후 이름이 바뀐 사건이라기보다, 선교의 무대와 독자층에 따라 익숙한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주석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2. 이른바, 현대의 "Paul invented Christianity" 논쟁을 말한다.

 

*3. 종교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도 기독교를 '새로운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의 백성에게 주신 옛 신앙(Old Faith)의 계승으로 이해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복음은 바울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시고 사도들에게 맡기신 동일한 구원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불링거의 논지를 요약하면,

"사도들은 새로운 교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구약 언약을 복음으로 해설한 자들이다."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 성도는 하나의 믿음, 하나의 길, 하나의 종교를 공유한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창시자가 아니라, 영원한 언약의 성취자이다."

"아브라함 언약은 모세 율법이나 복음과 단절되지 않는다."

바울은 복음을 발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다"(고전 15:3)고 고백한다. 불링거 역시 『오직 하나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간략한 해설 De testamento 1534』에서 사도들은 "새로운 교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구약 언약을 복음으로 해설한 자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종교를 시작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영원한 언약을 성취하신 메시아이시며, 바울은 바로 그 복음을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증언한 사도였다.

 

* 불링거의 언약신학에 관심 있는 독자는 번역자의 한국어 번역본(Open Access)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