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기존에 작성했던 글들을 참고하여 정리한 글입니다.

tedwiki 티스토리- 성경 연대(주요사건)-저작시기 비교 표 [중간사-신약편]

 

— 한 복음, 여러 사도, 하나의 교회

바울서신을 다 읽고 나면 많은 성도들이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신약은 거의 바울이 다 쓴 것 같네?" 실제로 신약 27권 중 13권이 바울의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 그런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분량으로 보나 신학적 무게로 보나 바울의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 자칫 신약 전체가 바울의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신약을 조금 더 읽어 나가면 다른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예수의 형제였던 야고보, 수제자 베드로, 사랑의 사도라 불린 요한, 그리고 유다. 이들도 같은 복음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상황 속에서 증언했다. 이 편지들을 묶어 '공동서신'이라고 부른다. 공동서신은 단순히 "바울이 아닌 사도들의 편지 모음"이 아니다. 교회가 바울 한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복음이 여러 증인의 목소리를 통해 더욱 풍성하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책들이다.


왜 '공동서신' 혹은 '일반서신'이라 부를까

이름의 유래는 의외로 단순하다. 수신자가 누구인가의 차이다. 바울은 대체로 특정 교회나 특정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고린도 교회에게, 갈라디아 교회에게, 빌립보 교회에게, 혹은 디모데나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주소지가 분명한 편지들이었다. 반면 공동서신은 더 넓은 대상을 향한다. 베드로전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다.(벧전1:1) 여러 지역에 흩어진 성도들 전체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도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보낸다고 했다.(약1:1) 이렇게 특정 교회가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교회, 흩어진 성도들, 모든 신자를 향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공동서신' 또는 '일반서신'이라 부른다. 물론 예외도 있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는 특정 개인이나 공동체를 향한 짧은 편지다. 그러나 전체적인 성격으로 묶어 그렇게 분류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각 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공동서신에 속한 책들은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다. 각 권의 핵심만 아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더 나은 대제사장이시며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선언한다. 구약의 제사제도와 율법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지를 가장 깊이 보여 주는 책이다.

  • 히8: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라."

야고보서는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그 유명한 구절이 여기서 나온다.

  •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약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베드로전후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를 위로한다. 핍박 속에서도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라고 격려한다.

  • 벧전1:6-7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요한서신(요한일·이·삼서)은 진리 안에서 사랑하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선언이 이 편지의 심장이다.

  •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요일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유다서는 교회에 스며든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고, 한 번 주어진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외친다.

  • 유 1: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강조점은 이렇게 제각각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들이 가리키는 그리스도는 한 분이고,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다.


공동서신은 사도행전의 계속이다

이 에세이 시리즈를 따라온 분이라면 자연스럽게 연결이 보일 것이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세워지는 이야기였다. 성령이 임하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끝으로 퍼져 나가고, 곳곳에 교회가 생겨나는 역동적인 역사. 그렇게 세워진 교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박해가 닥치고, 거짓 교사가 들어오고, 믿음이 식어 가고, 성도들이 지쳐 간다. 공동서신은 바로 그 지점에서 등장한다. 세워진 교회가 이제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행전이 교회의 탄생기라면, 공동서신은 그 교회가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성장해 가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라고 할 수 있다. 둘은 끊김 없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히브리서는 누가 썼을까 *1

공동서신을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품게 되는 궁금증이 있다. 히브리서는 도대체 누가 쓴 것일까. 흥미롭게도 히브리서는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여러 추측이 있었다. 바울이 썼다는 견해, 바나바가 썼다는 견해, 아볼로가 썼다는 견해, 누가가 썼다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바울 저작설이 우세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저자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교회는 저자를 모른다는 이유로 이 책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책이 증언하는 복음이 사도적 신앙과 일치하고, 교회가 오랜 세월 이 책을 통해 은혜를 받아 왔기에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성경을 대하는 중요한 태도를 알려 준다. 핵심은 저자의 유명세가 아니라 그 책이 증언하는 복음이라는 것. 히브리서가 누구의 펜에서 나왔든,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변함없이 참되다.


유다서는 왜 '에녹서'를 인용할까 *2

공동서신을 자세히 읽다 보면 깜짝 놀라는 대목을 만난다. 유다서가 '에녹서'라는 책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에녹서는 우리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책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에녹서도 성경으로 봐야 하는 걸까.  답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해하면 오히려 성경을 보는 눈이 깊어진다.

성경의 저자가 어떤 자료를 인용했다고 해서, 그 자료 전체가 영감받은 성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용과 정경 인정은 전혀 다른 문제다. 좋은 비교가 있다. 바울도 자신의 글에서 헬라의 시인들을 인용한 적이 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설교하면서 그들의 시인의 말을 가져다 썼고, 디도서 1장에서도 그레데의 한 선지자의 말을 인용했다.*3 그렇다고 해서 그 헬라 시인들의 작품이 성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다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표현을 끌어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해서, 그 출처가 성경의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 기자는 자신의 시대에 통용되던 언어와 이야기를 활용할 수 있고, 그것은 영감의 작용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정경이 되었을까 *4

유다서와 에녹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더 큰 질문으로 이어진다. 도대체 어떤 책이 성경이고 어떤 책이 성경이 아닌지는 누가, 어떻게 정한 것일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을 먼저 짚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성경을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분별하고 인정'했을 뿐이다. 영어로는 이 차이를 'recognize(알아보다, 인정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교회가 권위를 부여해서 어떤 책이 성경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지닌 책을 교회가 알아보고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분별했을까. 대표적으로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사도성이다. 사도들로부터 비롯되었거나 사도적 권위와 연결되는가.

둘째는 정통성이다. 그 가르침이 이미 받은 신앙의 진리와 일치하는가.

셋째는 교회의 보편적 수용이다. 특정 지역이나 분파가 아니라 여러 시대와 지역의 교회가 두루 받아들였는가.

넷째는 성령의 증언이다. 성령께서 교회의 마음에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해 주시는가. 이는 새로운 계시를 더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도록 인도하셨다는 의미이다.

이 기준들을 통해 교회는 오랜 시간에 걸쳐 어떤 책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해 나갔다. 이 정경 형성의 과정은 그 자체로 큰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짚고 넘어간다.


공동서신은 구약을 어떻게 읽는가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이며 그 모든 흐름이 그리스도를 향한다는 것이다. 공동서신도 끊임없이 구약을 읽어 내는데, 그 방식이 사도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히브리서는 레위기와 제사제도를 깊이 읽는다. 옛 언약의 제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으로 완성되는지를 보여 준다.

야고보서는 잠언과 지혜문학의 결을 닮았다. 일상의 삶 속에서 지혜롭게 믿음을 살아 내는 길을 가르친다.

베드로전서는 출애굽과 언약 백성의 이미지를 가져온다. 성도들을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부르며 옛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표현을 교회에 적용한다.

요한서신은 창세기의 생명과 빛이라는 주제를 이어받는다.

유다서는 구약의 사건들과 유대 전승을 폭넓게 사용한다.

같은 구약을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읽어 낼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보면 성경이 얼마나 풍성한 책인지, 그리고 그 모든 읽기가 어떻게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공동서신(Catholic Epistles)은 왜 필요한가 *5

이제 가장 중요한 결론에 이르렀다. 바울서신만 읽으면 기독교가 자칫 바울의 신학처럼 보일 수 있다. 한 사람의 천재적인 신학자가 만들어 낸 사상 체계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서신을 함께 읽으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인다. 야고보도, 베드로도, 요한도, 유다도,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히브리서의 저자도, 모두 같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서로 다른 강조점으로, 서로 다른 교회를 향해 썼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분은 한 분이다. 복음은 하나지만, 그 복음을 증언하는 목소리는 풍성하다. 마치 한 사람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이 모여 그 사람의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 주듯, 여러 사도의 증언이 모여 그리스도의 충만한 모습을 드러낸다. 공동서신은 복음이 결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함께 받은 것임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이 책들을 읽을 때 한 가지만 기억한다면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사도행전은 그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역사를 기록한다. 바울서신은 그 복음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적용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공동서신은 여러 사도들의 목소리를 통해 같은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증언한다. 서로 다른 저자, 서로 다른 상황, 서로 다른 강조점이 있지만, 그들이 전하는 그리스도는 한 분이며 교회가 붙드는 믿음도 하나다. 이제 신약에는 마지막 한 권이 남는다. 여러 사도들의 증언이 모두 끝난 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를 어떻게 완성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책. 요한계시록이다. 공동서신이 "지금 이 교회가 어떻게 믿음을 지킬 것인가"를 말한다면, 요한계시록은 "이 모든 이야기가 마침내 어디로 향하는가"를 보여 준다. 그 마지막 장면을 향해, 우리의 읽기는 이제 한 걸음을 더 내딛는다.

 

 

 

 

각주

 

*1. 히브리서는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초대교회에서는 바울, 바나바, 아볼로, 누가 등이 저자로 제안되었다. 3세기 교부 오리겐(Origen)은 "이 서신을 실제로 누가 기록했는지는 하나님만 아신다(God only knows who wrote the Epistle)."라고 말하며 저자 문제를 유보하였다. 오늘날에도 저자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교회는 이 책이 사도적 복음과 일치하고 오랫동안 예배 가운데 읽혀 왔다는 이유로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2. 유다서 14-15절은 일반적으로 『에녹 1서』 1:9와 매우 유사한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유다서 9절의 모세의 시신을 둘러싼 미가엘과 마귀의 논쟁은 『모세의 승천(Assumption/Testament of Moses)』과 관련된 유대 전승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성경 저자가 어떤 자료를 인용했다고 해서 그 책 전체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헬라 시인들의 글을 인용한 것(행17:28, 딛1:12)과 같은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원문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유다서 14–15 에녹1서 1:9
"보라, 주께서 그의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사..." "Behold! He comes with ten thousands of His holy ones, to execute judgment upon all..."

핵심 대응은 거의 일치한다.

  • 보라(ἰδού / Behold)
  • 주께서 오신다(comes)
  •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with ten thousands of his holy ones)
  • 모든 사람을 심판한다(execute judgment upon all)
  •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경건하지 않은 행위를 심판한다

유다서는 여기에 자신의 문맥에 맞게 마지막 부분을 조금 확장하여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거친 말을 인하여"

라는 표현을 덧붙인다.

 

두 본문은 "보라, 주께서 그의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신다"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핵심 표현을 거의 동일하게 공유한다. 때문에 거의 모든 주석서가 관련성을 인정하나 "직접 인용(quotation)"인지 "전승을 통한 인용(allusion)"인지는 학자마다 표현이 조금 다를 뿐이다. 유다는 에녹서에 보존되어 있는 당시의 유대 전승을 자신의 논증을 위해 사용하였다. 즉,;

  • 에녹이라는 인물이 실제 예언을 했고,
  • 그 내용이 에녹서라는 문헌에 보존되었을 수도 있으며,
  • 또는 유다가 당시 널리 알려진 전승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함께 열어 둔다.

*3. 바울은 아테네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라고 하며 크레타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와 시인 아라투스(Aratus)의 표현을 인용하였다. 또한 디도서 1:12에서는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라는 에피메니데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 그러나 이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인용일 뿐, 그 작품 자체에 성경적 권위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4. 정경 형성; 신약 정경은 어느 한 번의 회의에서 갑자기 결정된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사도적 기원, 정통한 신앙과의 일치, 교회의 보편적 사용 등을 기준으로 책들을 분별하였다. 367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제39번째 축일 서신(Festal Letter)은 오늘날의 신약 27권을 처음으로 모두 열거한 문헌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393년 히포 공의회와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도 같은 목록이 확인되었다. 이는 새로운 성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 안에서 사용되던 책들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덧붙여, 구약 정경은 제2성전기 말 이미 대부분 사용되고 있었으며, AD 90년경 얌니아(Jamnia, 야브네)에서의 유대교 논의는 이를 새롭게 제정했다기보다 당시 사용되던 전통을 확인하고 논의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많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미 교회가 받아들여 온 66권을 신앙고백 속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1647년)

 

*5. '공동서신(Catholic Epistles)'의 명칭; 여기서 '가톨릭(catholic)'은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universal)'이라는 원래의 뜻을 가진다. 즉 특정 교회보다 여러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을 널리 대상으로 한 편지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다만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처럼 특정 수신자를 가진 예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공동서신' 또는 '일반서신(General Epistles)'이라는 표현도 함께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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