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기존에 작성했던 글을 참고하여 정리한 글입니다.

tedwiki - 메시아

 

 

— 점점 더 선명해지는 하나님의 약속

미가서를 펼치면 한가운데서 놀라운 한 구절을 만난다. 장차 오실 통치자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이다. 신약을 아는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탄생을 떠올린다. 그런데 잠깐 멈추어 생각해 보면 궁금증이 생긴다. 미가는 어떻게 메시아가 태어날 동네까지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메시아를 기다리기 시작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성경 전체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흐름을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이해하고 나면, 미가서의 그 구절이 왜 그렇게 특별한지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메시아라는 말의 뜻

먼저 단어부터 짚고 가자. '메시아'는 히브리어 '마쉬아흐(mashiach)'에서 온 말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왕이나 제사장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특별한 사명으로 구별하셨다는 표시였다. 이 히브리어 '마쉬아흐'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 '크리스토스(Christos)'이고, 그것을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다. 다시 말해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같은 뜻의 다른 언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곧 "기름 부음 받은 구원자, 예수"라는 고백인 셈이다.


약속은 처음엔 희미했다

성경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 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메시아에 대한 그림이 처음부터 또렷하게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처음 그 약속의 씨앗이 심어진 곳은 창세기 3장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직후, 하나님은 뱀을 향해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개혁신학에서는 이 구절을 모든 구원 약속의 첫 씨앗, 곧 '원복음'이라고 부른다. 훗날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언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물어보자. 아담과 하와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수천 년 뒤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한 아기를 떠올렸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약속은 "언젠가 하나님이 이 비참함을 끝내실 구원자를 보내신다" 정도의 희미한 빛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로 가면 약속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하나님은 그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시며, 그의 '씨', 곧 후손을 통해 온 세상이 복을 받으리라 약속하신다. 신약에서 바울은 이 '씨'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브라함 당시에 이 약속은 주로 후손과 민족에 대한 약속으로 다가왔다. 메시아라는 한 인물이 또렷하게 그려졌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언약에 대한 신앙이 중심이었다.


다윗에게서 약속이 또렷해지다

희미하던 그림이 결정적으로 또렷해지는 순간이 온다. 바로 다윗 언약이다.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신다. 그의 왕조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영원한 왕이 나올 것이며, 그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이었다. 이 순간부터 메시아는 막연한 미래의 구원자가 아니라 "장차 올 다윗 계열의 왕"이라는 분명한 인격적 이미지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후 다윗의 시편들은 이 기대를 더욱 풍성하게 노래한다.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의로운 왕이 평화와 정의로 통치하며, 그 왕이 단순한 인간을 넘어선 신적 위엄을 지닌 분이라는 그림이 시편 곳곳에 펼쳐진다. 메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기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점이 바로 이 다윗 시대라는 데에는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신학자들뿐 아니라 유대교 학자들까지도 대체로 의견을 같이한다.


이사야가 더한 깊이

다윗을 지나 이사야에 이르면 메시아 신학은 한층 깊어진다. 이사야는 두 가지 이미지를 통해 메시아를 그려 낸다. 하나는 왕의 이미지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셨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 왕이 어떤 분인지를 이사야는 더없이 영광스럽게 노래한다.

 

그런데 이사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혀 다른 이미지를 하나 더 그린다. 바로 '고난받는 종'이다. 이사야 53장은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당하는 한 인물을 그린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영광의 왕이 동시에 고난받는 종이라는 이 놀라운 결합은, 훗날 십자가에서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구약은 왕으로 오실 메시아와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함께 증언한다. 신약은 이 두 그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난다고 증언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더 간절해지다

다윗 왕조가 바벨론에 의해 무너지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던 시기, 메시아를 향한 기대는 오히려 폭발적으로 커진다.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약속된 왕조가 무너졌으니 사람들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영원한 왕은 어디에 있는가." 절망이 깊어질수록 회복을 가져올 메시아에 대한 갈망도 깊어졌다. 이 시기의 선지자들은 그 갈망에 응답하듯 메시아의 모습을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 낸다. 다니엘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 같은 이'를 본다. 에스겔은 다윗과 같은 목자가 흩어진 양 떼를 다시 모으는 환상을 전한다. 스가랴는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는 왕을 그린다. 말라기는 여호와의 날 이전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으로 구약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다. 이렇게 포로기를 지나면서 메시아는 왕이자 제사장이며, 구원자이자 심판자인 복합적인 인물로 기대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모든 기대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성취된다.


딸기주스의 약속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메시아 약속은 처음에는 흐릿하다가 나중에야 분명해진 건가? 하나님의 약속 자체가 점점 또렷해진 걸까?" 이 지점에서 개혁교회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통찰이 있다. 작은 이야기 하나로 풀어 보자.

 

한 아이가 헤드셋을 끼고 신나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온이야, 집에 가면 딸기주스 줄게." 그런데 아이는 음악 소리에 묻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응? 아빠! 뭐라고용? 잘 안들려, 뭘 준다고요?"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집에 가면 딸기주스 준다." 아이는 이번에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네? (못알아들음) 암튼 집에서 봐요" 그렇게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약속했던 딸기주스를 아이에게 내밀었다. 그제야 아이는 눈이 번쩍 뜨여 말한다. "아, 아빠가 말씀하신 게 딸기주스였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 보자. 아버지의 약속은 처음부터 분명했는가, 아니면 나중에야 분명해졌는가. 아버지의 약속은 처음부터 똑똑히 분명했다. 달라진 것은 아버지의 약속이 아니라 아이의 이해였다. 메시아 약속도 이와 같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에서 이미 구속자를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처음부터 분명하고 확고했다. 다만 그것을 받는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조금씩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메시아 신학을 단순히 "사람들이 언제 메시아를 알게 되었는가"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그보다 더 무게를 두는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개혁신학이 말하는 '점진적 계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동일한 구원의 계획을 품고 계셨지만, 그 계획을 역사 속에서 조금씩 더 선명하게 드러내셨다. 약속이 자라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비추는 빛이 점점 밝아진 것이다.


그래서 미가서가 특별하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미가는 어떻게 메시아가 태어날 마을까지 알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따라온 흐름 안에 답이 있다.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씨앗으로 시작된 약속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지나 다윗의 왕권으로 이어지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점점 더 선명해졌다. 다윗 언약 이후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인 왕"으로 분명해졌고, 이사야는 그 왕이 고난받는 종이심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미가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왕이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지까지 말한 것이다. 다윗이 태어난 고향, 그 작고 보잘것없는 베들레헴 에브라다. 이제 메시아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점점 더 구체적인 약속이 되어 간다. 미가서의 그 구절은 바로 이 긴 흐름의 한 정점에 놓여 있다.


미가서를 읽기 전에 기억할 한 가지

창세기에서 씨앗으로 시작된 약속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지나 다윗의 왕권으로 이어지고,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서 점점 더 선명해진다. 미가서는 그 약속이 마침내 베들레헴이라는 한 작은 마을을 가리키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약속을 바꾸신 적이 없으셨다. 다만 그의 백성이 그 약속을 조금씩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미가서를 펼칠 때, 단지 옛 예언 하나를 읽는다고 여기지 말자. 우리는 지금 수천 년에 걸쳐 점점 또렷해져 온 한 약속이 마침내 한 마을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딸기주스를 손에 쥔 아이처럼, 신약에 이르러 우리 눈앞에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덧붙여, [왜 이사야 53장을 읽고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긴다. 이사야가 이렇게 고난받는 종을 말했는데, 왜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지 못했을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기독교는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메시아 예언으로 읽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랍비 유대교(정통 유대교)는 대체로 이 본문을 한 개인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고난을 겪었고,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감당해 왔다는 식으로 읽는 것이다. 또한 유대교가 기대한 메시아는 대체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원수들을 심판하며, 평화와 의의 나라를 세우는 왕적 메시아의 모습이 강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를 무너뜨리지 않으셨고, 예루살렘에 정치적 왕국을 세우지도 않으셨으며, 오히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많은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메시아의 승리라기보다 실패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은 바로 그 지점에서 전혀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먼저 고난받는 종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참된 왕이심을 드러내셨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메시아의 영광과 고난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 왕이신 메시아가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고, 십자가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고 고백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사야 53장을 메시아적으로 읽는 전통이 유대교 안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대와 중세 유대교 자료들 가운데는 이 본문을 메시아와 연결해 읽은 그렇게 이해한 자료들도 남아 있다. 다만 예수를 그 메시아로 인정하느냐의 문제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은 단순히 “유대인은 왜 몰랐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을 통해 승리하시는 메시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사야가 말한 고난받는 종과 다윗의 왕적 메시아가 한 분 안에서 만난다고 증언한다.

 

(*자세한 내용은 상기 위키문서의 각주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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