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콤의 성도와 비텐베르크의 수도사와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잇는 것은 무엇인가. 시대와 언어는 달라도 교회를 교회이게 한 복음의 중심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살핀다. ㅡ 초대교회, 종교개혁, 오늘의 복음주의는 서로 다른 세 종교 세계가 아니라, 삼위일체·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십자가와 부활·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같은 복음의 중심을 각 시대의 언어로 고백해 온 하나의 신앙적 연속체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질문은 남아 있다
카타콤에 모여 숨죽여 찬송하던 로마의 그리스도인과, 비텐베르크 성당 문 앞에 선 수도사와, 오늘 주일 아침 스마트폰으로 설교를 듣는 우리 사이에는 얼핏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언어가 다르고, 예배당의 모양이 다르고, 싸워야 했던 상대가 다르다. 그러나 세 시대의 교회는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인간은 어디에서 구원을 얻는가.
앞선 글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에서 정통 기독교 교파들이 공유하는 신앙의 핵심을 정리한 바 있다. 이번 글은 그 공통분모를 조금 더 좁고 깊게 들여다보려 한다. 초대교회와 종교개혁과 오늘의 복음주의가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십자가와 부활,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중심 진리에서 어떻게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 왔는가 하는 것이다. 미리 말해 두자면, 이것은 "모든 시대가 똑같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가 달라도 교회를 교회이게 한 중심은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초대교회가 지키려 했던 것
초대교회는 복음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사도들에게서 전해 받은 신앙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신앙은 곧 도전을 받았다. 예수는 신처럼 보였을 뿐 피조물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반대로 그분의 몸은 겉모습일 뿐이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교회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애매하게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더 분명한 언어로 고백할 것인가.
니케아 신경과 칼케돈 신조는 그 대답이었다. 이 신조들은 철학적 호기심의 산물이 아니다. 교회가 이미 예배하고 있고, 이미 구원을 의탁하고 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이신지를 지키려는 고백이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세 위격은 혼동되지 않으면서 동일한 본질을 지니신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시다. 어렵게 들리지만, 이것은 강단 위의 수학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누가 우리를 구원하는지, 누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지를 말하려면 이 고백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논리도 여기에 걸려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다.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참 인간이 아니시라면 우리를 대신하실 수 없다. 우리 자리에 서실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목숨을 걸고 지킨 것은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구원 그 자체였다.
물론 초대교회 전체가 처음부터 모든 교리를 완성된 문장으로 말했던 것은 아니다. 고백의 언어는 논쟁 속에서 다듬어졌다. 그러나 언어가 나중에 정교해졌다고 해서 진리가 뒤늦게 발명된 것은 아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를 주로 예배했고, 신조는 그 예배의 내용을 지키는 울타리였다.
종교개혁은 발명이 아니라 재발견이었다
천 년이 흐른 뒤, 종교개혁자들이 마주한 문제는 달랐다. 이번에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인간에게 어떻게 오는가가 흐려져 있었다. 축적된 제도와 관행 속에서, 은혜는 인간의 공로와 뒤섞였고 복음은 무거운 짐이 되어 있었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기독교를 창시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니케아의 삼위일체와 칼케돈의 기독론을 그대로 계승했고, 성경에 충실한 교부들의 증언을 적극적으로 인용했다. 그들이 한 일은 성경과 초대교회의 공교회적 신앙에 비추어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을 초대교회의 단순한 복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대의 질문이 달랐고 강조점이 달랐다. 그러나 그 뿌리는 같았다.
특히 개혁자들이 다시 선명하게 밝힌 것은 은혜였다. 인간은 스스로를 개선해서 하나님께 올라가는 존재가 아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내려오셔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역에 근거하며, 오직 은혜로 주어지고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여기서 믿음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은 인간이 구원값으로 제출하는 또 하나의 공로가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드는 빈손이다. 그리고 선한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생명에서 자라나는 열매다.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가는 감동적인 희생의 상징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죄와 심판이 있고, 대속이 있고, 하나님과의 화해가 있고, 어둠의 권세에 대한 승리가 있다. 부활은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예수의 정신이 되살아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음을 실제로 이기신 구원의 사건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듯,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헛것이 된다. 초대교회가 이것을 고백했고, 종교개혁이 이것을 다시 붙들었다.
오늘의 복음주의가 잊지 말아야 할 중심
그렇다면 오늘의 복음주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복음주의라는 이름이 정통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같은 신학적 건강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 복음주의가 특정한 음악 형식이나 집회 문화, 정치적 성향이나 뜨거운 감정과 동일시될 때, 그것은 자기 중심을 잃는다.
그러나 복음주의가 가장 건강한 모습일 때, 그것은 분명 이 유산 위에 서 있다. 성경이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육체적 부활, 회개와 믿음,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 이것은 복음주의가 새로 고안한 목록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피 흘려 지키고 종교개혁이 다시 밝혀낸 바로 그 중심이다. 오늘 우리가 이 진리들을 다시 말해야 하는 이유는 옛 문장을 박물관에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예배하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다.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니라 같은 복음의 고백
이 연속성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두 가지를 함께 붙들어야 한다. 하나는, 역사적 연속성이 모든 시대 교회의 완전한 순수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도 분쟁이 있었고, 종교개혁 시대에도 그늘이 있었으며, 오늘의 교회에도 부끄러움이 있다. 교회가 오래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새롭고 실용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바른 것도 아니다. 모든 시대의 교회와 신학은 성경의 증언 아래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신조가 성경을 대신하는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조는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여 공적으로 고백한 증언이다. 그래서 세 시대를 잇는 것은 조직의 계보나 제도의 상속이 아니다. 시대마다 언어와 논쟁의 주제는 달랐지만, 교회가 붙들어 온 복음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묻고 대답해 온 신앙의 연속성이다. 니케아의 교부들과 제네바의 개혁자들과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같은 문장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같은 복음을 각자의 시대에 고백했다.
복음에 의해 살아나는 공동체
교회가 시대마다 사용하는 언어와 형식은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로 남기 위해 돌아가야 할 자리는 분명하다. 교회 스스로 만들어 낸 메시지가 아니라, 사도들로부터 전해지고 초대교회가 고백했으며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밝혀 낸 그 복음이다. 교회는 복음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복음에 의해 거듭 살아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복음의 중심은 언제나 같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올라간 이야기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에게 내려오신 은혜의 이야기다(롬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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