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2장을 따라 읽는 영적 가족 이야기

 

 

처음 들었던 그 말

회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배우던 시절, 사람들이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낯설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것을 교회라는 공동체 특유의 예절, 혹은 종교적인 호칭 정도로 여겼다. 회사에 직급 호칭이 있듯이, 교회에는 교회의 언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배움이 쌓이면서 그 말이 조금씩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교회가 그저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며(마16:18),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된 공동체라는 것을 배웠다(엡4:15, 골2:19).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갈4:6, 롬8:15).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안의 그 형제와 그 자매를 위해서도 피 흘리셨다는 사실(고전8:11, 롬14:15)을 깨달았을 때, "형제자매"라는 말은 더 이상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이 만들어 낸 실제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은혜로 받은 자녀의 신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2장 "양자됨"은 짧지만 놀라운 고백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신 모든 사람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양자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신다. 여기서 "양자됨"이란 본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죄인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족으로, 자녀로 받아 주시는 은혜를 말한다.

 

이 교리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자녀 됨이 우리가 타고난 권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 본래 하나님의 자녀였다가 잠시 그 사실을 잊어버린 존재가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한다(엡2:3).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과 믿음으로 연합될 때에만 자녀의 신분을 받는다. 에베소서 1장 5절은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고 말한다. 자녀 됨은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값없이 수여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구별이 있다. 양자됨은 칭의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칭의가 재판정의 언어라면, 양자됨은 가정의 언어다. 칭의는 죄인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법정적으로, 곧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은혜다. 양자됨은 그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으로, 가족으로 받아 주시는 은혜다. 무죄 선고를 받은 피고인이 그 자리에서 재판장의 아들이 되는 법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복음은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거는 우리의 사랑이나 순종, 공동체 생활의 성실함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와 십자가의 공로다. 형제자매를 사랑해야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녀로 받아들여진 사람에게서 형제자매 사랑이 열매로 자라난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복음이 무너진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과 "아바 아버지"

양자됨은 막연한 종교적 위로나 감동적인 가족 비유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다. 갈라디아서 4:4–7은 그 구조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때가 차매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성부께서 받아 주시고, 성자께서 자신의 피로 사시며 자신의 아들 됨 안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그 신분을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현실로 만드신다.

 

로마서 8:14–17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받은 것은 다시 무서워하게 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이며, 그 영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며,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이 아버지 되심은, 모든 사람이 창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하게 누리는 보편적 부성이 아니다.*1 물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에 존엄하며, 그 창조의 진리는 결코 부정될 수 없다. 그러나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자녀의 특권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언약적이고 구원론적인 은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2장은 그 은혜의 내용을 풍성하게 풀어낸다. 양자된 신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받고, 양자의 영을 받으며,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보호하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 아버지로서 사랑으로 징계하시지만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신자들은 약속들을 상속받아 영원한 구원의 상속자가 된다. 징계마저 버림의 표가 아니라 아버지 되심의 표라는 것, 여기에 이 교리의 깊은 위로가 있다.

 

 

같은 아버지를 모신 사람들

그런데 양자됨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개인적인 신분 변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입양은 언제나 한 가족 안으로의 입양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로 받으셨다면, 나는 동시에 다른 자녀들 곁에 놓인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9절의 표현대로, 우리는 외인도 나그네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 곧 하나님의 집안 사람들이다.

 

그래서 교회는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종교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고, 한 성령으로 거듭나며, 한 아버지께 입양된 사람들의 공동체다.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호칭에는 이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우리는 같은 아버지를 모신 자녀들이고, 같은 맏아들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 로마서 8장 29절는 그리스도께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다고 말한다 — 같은 성령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다. 히브리서 2장 11–12절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났으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내가 어떤 신자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할 수 있을까.

 

이 관계는 취향이나 친밀감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나와 성격이 맞지 않는 신자, 나를 불편하게 하는 신자도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형제요 자매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

이 사실이 가장 아프게, 그리고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본문이 있다. 고린도전서 8장 11절과 로마서 14장 15절이다. 두 본문의 직접적인 문맥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과 음식의 문제다. 지식과 자유가 있다고 자부하던 신자들에게 바울은, 그 자유가 믿음이 약한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고 그를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고 경고한다.

 

이 표현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추어 섰다. 바울은 약한 형제를 배려해야 할 근거로 인간적인 도리나 공동체의 평화를 들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를 들었다. 내가 쉽게 판단하고, 무시하고, 상처 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교회 안의 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단지 무례한 일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될 수 있다. 형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어서 형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사람이어서 형제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드러내신 가족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5)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육신의 가족을 무가치하게 여기시거나 부모 공경의 계명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없으며, 자신과의 관계, 곧 하나님의 뜻에 대한 믿음의 순종이 더 근본적인 가족을 이룬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복음은 자연적 가족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혈연의 한계를 넘어서는 더 깊고 영원한 언약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영적 가족은 혈연 가족과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다.

 

마태복음 19:29에서 예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받으리라고 약속하신다. 이는 현세에서 물질과 인맥으로 보상받는다는 번영의 약속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다 잃어버린 자가 교회라는 새로운 가족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와 자매를 얻고 장차 영생을 상속받는다는 제자도의 약속이다. 실제로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서로에게 맡기셨다(요19:25–27). 이 한 장면으로 양자 교리 전체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십자가 아래에서 새로운 돌봄의 관계가 맺어지는 모습은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이 걸어간 길이다. 요한복음 7장 3–5절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라고 말하지만, 본문은 그들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밝힌다. 그들은 예수님의 길을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라 세상적 명성과 공개적 성공의 방식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마가복음 3장 21절의 친족들 역시 예수님을 붙들러 나설 만큼 그분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 친족들과 3장 31절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곧바로 완전히 동일시하여, 마리아가 직접 예수님을 미쳤다고 판단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혈연조차 공생애 동안 그분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혈연만으로는 참된 제자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14절에 이르면 조용하고도 놀라운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형제들이 제자들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고 있다. 부활은 오해하던 가족을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이끌었다. 육신의 가족이 버림받고 영적 가족으로 교체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도 결국 은혜로 믿음 안에 들어와, 다른 모든 신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곧 믿음으로 참된 영적 가족이 된 것이다.

 

 

존중과 정결의 가족 윤리

교회를 가족이라 부르는 것은 막연한 친밀감의 언어가 아니다.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교회 구성원들을 대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가족의 언어를 사용했다(딤전5:1–2). 늙은 남자를 아버지에게 하듯 권하고, 젊은 남자를 형제에게 하듯 대하며, 늙은 여자를 어머니에게 하듯, 젊은 여자를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대하라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말 안에 존중과 책임, 절제와 정결이 함께 들어 있다. 영적 가족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편한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존중하고 지켜야 하는 거룩한 관계다.

 

그리고 이 가족 사랑은 제자됨의 표지가 된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고(요13:34–35), 요한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요일4:20–21). 갈라디아서 6장 10절은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권하고, 베드로전서 2장 17절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명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사랑은 구원이나 양자 신분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녀 안에서 성령께서 맺으시는 필연적이고 감사한 열매다.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뿌리를 살펴야 하지만, 열매가 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2

 

 

다시, 그 호칭 앞에서

이제 나는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말을 예전처럼 가볍게 부르지 못한다. 누군가를 형제나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언제나 내 마음에 들거나, 나와 잘 맞거나, 잘못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자신의 자녀로 불러 주셨으며,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도 피 흘리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고백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 받은 양자의 은혜는 결국 우리를 서로에게로 보낸다. 우리는 완벽해서 가족이 된 것이 아니라 은혜로 한 가족이 되었고, 사랑해서 가족이 된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기에 이제 사랑하도록 부름받았다. 다음 주일, 예배당 문 앞에서 마주치는 그 얼굴들을 향해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를 때, 그 짧은 호칭 안에 삼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가 통째로 담겨 있음을 기억하고 싶다.

 

 

 

 

각주

 

*1,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만으로 동일하게 누리는 이른바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universal fatherhood of God)을 뜻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섭리와 일반적인 선하심 아래 살아간다는 점에서 존엄한 피조물이지만, 성경이 구원론적으로 말하는 자녀의 신분은 본성이나 창조 자체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는 양자의 은혜이다(요1:12–13; 롬8:14–17; 갈4:4–7; 엡1:5).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시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자들에게 특별한 언약적·양자적 의미의 아버지가 되신다.

근대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때때로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과 인간의 보편적 형제애’를 기독교의 중심 명제로 내세웠으며, 이를 모든 사람의 최종 구원으로 확대하는 주장은 보편구원론 또는 만유구원론(universalism)이라 불린다. 모든 피조물이 종말에 본래의 상태로 회복된다고 보는 견해는 만유회복론(apokatastasis) 또는 보편적 화해론(universal reconciliation)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우주에 미치고 창조 세계가 새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회개와 믿음 및 최후 심판을 부정하면서 모든 개인이 결국 구원된다고 주장하는 보편구원론은 구별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2장은 양자됨을 모든 인간의 자연적 소유로 말하지 않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은혜로 고백한다.

 

*2. 여기서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받은 구원, 곧 칭의·양자됨·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키고, 열매는 그 은혜를 받은 신자에게 나타나는 형제자매 사랑과 순종을 가리킨다. 즉, 형제 사랑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가 참으로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내가 형제를 사랑한 공로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 열매는 뿌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증거일 수 있지만,
  • 열매가 뿌리를 생기게 하는 원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언어로 말하면, 선행과 사랑은 구원의 근거(ground)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이며 증거(fruit and evidence)이다. 우리는 사랑해서 양자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은혜로 양자 되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사랑은 구원이나 양자 신분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녀 안에서 성령께서 맺으시는 필연적이고도 감사한 열매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의 열매가 오래도록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자신의 믿음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돌아봄은 사랑을 억지로 쥐어짜라는 요구가 아니라, 다시 뿌리로 곧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로 돌아가라는 부름이다. 우리는 사랑했기 때문에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먼저 은혜로 자녀가 되었기에 사랑하도록 부름받았다.

 

 

 

덧붙여,..

상처가 있는 현실의 교회에서

여기까지는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는 종종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몇 가지를 정직하게 말해 두어야 한다.

 

영적 가족이라는 말은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목회자와 지도자는 양 무리를 섬기도록 부름받은 종이지, 하나님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가족이니 참으라"는 말로 학대나 성폭력, 재정 비리, 권력 남용을 덮는 것은 가족 사랑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름의 배신이다. 성경적 형제 사랑은 죄를 묵인하는 감상적 친밀감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서로를 보호하고 권면하며 필요할 때 정당한 절차를 따르는 사랑이다. 참된 가족 사랑일수록 약한 자를 보호하고 죄를 진실하게 다룬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기에 징계하시듯, 사랑하는 공동체는 죄 앞에서 눈감지 않는다.

 

또한 교회의 하나됨은 획일성이 아니다.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성격과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위선자가 섞여 있을 수 있기에, 교회 명부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구원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신자의 마음과 구원의 상태를 심판하는 재판관이 되어서도 안 된다.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며, 마음을 아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영적 가족은 결혼과 부모 자녀 관계, 친족에 대한 성경적 책임을 폐기하지 않는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하며, 그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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